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프랑크 왕국과 사라센 제국/바르다나 왕조와 인도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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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나 왕조와 인도의 분열〔槪說〕[편집]

굽타 왕조의 붕괴 후 북인도에는 잠시 분열시대가 계속되는데 7세기 초에 하르샤 바르다나왕이 나와서 북인도를 다시 통일했다. 도읍을 카나우지(카냐그부쟈, 曲女城)에 둔 하르샤 왕국의 번영에 관해서는 당시 인도에 체재했던 현장(玄?)이 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하르샤왕은 또한 당나라 조정에서 사절을 파견하였고, 그 답례로서 당조(唐朝)에서 왕현책(王玄策)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하르샤의 사후 왕실이 문란해져서 북인도의 통일은 급속하게 무너졌다.하르샤 왕국이 망한 다음부터 이슬람교도에 의해서 북인도가 통일되기까지의 약 5세기 반 동안, 인도에는 소왕국 난립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북인도 각지에는 라지푸트족의 소왕국이 흥망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라지푸트 시대라고 일컬을 때도 있다. 이들 소왕국은 이웃 나라와의 싸움을 반복하고 10세기 말부터 시작된 이슬람교도의 침입에 대해서도 단결하여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남인도에서는 드라비다계의 여러 왕국이 분립하고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남단의 타밀 지방에 흥성했던 촐라 왕조가 특히 부강을 자랑했다. 이 왕조의 원정군은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쟈야에까지 달했다고 한다.사상면에서는 불교의 쇠퇴가 특히 주목된다. 인도 민중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던 불교는 일시 벵골의 팔라 왕조에 보호되어 번성했었는데, 12세기 말경에는 거의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르샤 바르다나(계일왕)[편집]

-(戒日王) Harsa-vardhana (재위 606

647)

고대 인도의 국왕이며 문인(文人). 타네사르 왕가에 태어나서 17세에 즉위한 후부터 사방의 정복을 단행하여 북인도의 재통일을 성취시켜 인도 통일 바르다나 왕조를 수립하였다. 왕은 또한 문인으로서도 알려져 그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훌륭한 희곡(戱曲)이 현존하고 있다. 왕의 보호하에 학문·예술은 훌륭하였고, 수도 카냐크부쟈의 궁정에는 서사시 『하루샤챠리타』의 작가 바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학자·예술가가 출입했다. 당나라의 중 현장도 왕의 초청을 받아 후한 대접을 받았다. 왕의 종교정책은 관용을 베풀어 불교·힌두교에 깊은 이해를 보였고, 또한 물질적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국내는 평화롭고 번영했으나, 왕의 사후 급속히 붕괴했다.

라지푸트 시대[편집]

-時代

7세기 중엽부터 12세기에 이르는 북인도의 분열 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에 북인도에는 라지푸트족(Rajput)이 세운 중소 왕국이 분립하여 싸움을 반복하고 있었다. 라지푸트는 ‘왕자’란 뜻으로서 5세기경 서부 인도에 이주한 중앙아시아계의 제민족이나, 토착의 유력 종족이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을 자랑하기 위해서 스스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라지푸트 여러 왕국 가운데에는 카나우지에 근거한 프라티하라 왕조가 유명하다. 또한 이 시대에 벵골에서 일어나 갠지스강 중류 일대를 지배했던 팔라 왕조 아래서 밀교적(密敎的)인 불교문화가 번영하여 독특한 팔라 미술작품을 남겼다.

남인도의 여러 왕국[편집]

南印度-王國

북인도가 군웅할거(群雄割據) 상태에 놓여 있던 수세기 동안 남인도에 있어서도 드라비다계 민족이 세운 여러 왕국의 흥망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여러 왕국 가운데 타밀 지방에 9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번영한 촐라 왕조가 중요하다. 이 왕조는 한때 실론을 정복했고 갠지스강 유역과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 밖의 유력한 왕조로는 팔라바 왕조(3

9세기), 찰루키아계 여러 왕조(6

12세기), 라슈트라쿠타 왕조(8

10세기) 등이 있다. 이러한 여러 왕조의 보호하에 문화는 남인도 독자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남인도식의 힌두사원 건축이나 촐라 왕조 치하의 타미르 문학 발달 등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남인도의 경제와 문화[편집]

南印度-經濟-文化

남인도 여러 왕국의 경제 제도의 기본적 단위로서는 촌락(村落)이 있는데, 인구의 대부분은 이 촌락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국가의 최대 수입원(收入源)은 촌락으로부터의 조세수입이었다. 국가는 농촌에서 조세를 거뒤들이기 위해서 4개 단위의 행정구, 즉 촌(村)·군(郡)·현(縣)·주(州)로 구분된 징세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예컨대 촐라 왕조에서는 전국이 6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 행정구는 관리나 군인인 책임자에 맡겨져 각각의 행정구에서의 자치를 상당히 인정하고 있었다.그러나 중앙정부에 의해 임명된 이들 행정 책임자들은 뒤에 가서는 그 권한을 세습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앙정부가 관리를 임명하는 행정제도는 인도에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었으나, 그것이 세습적 요소를 지님에 따라 점차로 분권적(分權的)인 정치조직을 낳게 되어, 관료들은 이 제도를 이용해서 지방적인 소정권(小政權)을 구축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다만 라슈트라쿠타 왕조와 촐라 왕조의 정치체제 가운데에는 특수한 제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지방의 명사(名士)로 구성되는 의회 또는 고문회의(顧問會議)라 할 수 있는 조직이다. 이것은 그 지방의 행정면에서나 공공 사업이나 사원(寺院)의 관리면 혹은 사법면(寺法面)에서도 수장(首長)을 보좌하거나 자치권을 발휘하는 데 커다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종교적인 면에서 보면 남인도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힌두교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 계층은 옛 신분제 이념에 따라서 바르나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바르나제(制)도 이 지방에 있어서는 중앙인도나 북인도와 달라 바라문과 수드라가 주요 계층을 구성하고 있고 그 다음 크샤트리아와 바이샤의 순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주요 바르나 외에 다시 일련의 직인(職人) 계급 카스트와 카스트 외의 다른 여러 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이와 같은 사회적 구성요소는 모권제(母權制)와 같은 각 지방 독자의 옛 사회형태와 얽혀 있어서 특징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지방적 특수성을 다시 부각시킨 것은 이른바 바빌론의 포수(捕囚) 이후 인도에까지 건너온 유대인과 아랍의 대정복(大征服)으로부터 도망쳐 온 페르시아인으로 이뤄진 이민족 집단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종교면에서는 남인도 전지역에 걸쳐서 보급된 것이 흰두교의 비시누신(神)과 시바신에의 신앙이었다. 특히 타밀 지방에는 이들 신을 받든 훌륭한 사원과 예배당 건조물이 많이 남아 있다. 토지나 촌락의 기부(寄附)는 말할 나위도 없고 호화로운 사원이 배치된 하나의 도시 전체가 헌납되는 경우도 있었다.이와 같은 유력한 사원에서는 종교계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두터운 비호까지 받았으며, 따라서 세속계(世俗界)에도 실권을 떨치는 이른바 장원영주적(莊園領主的) 권력을 가진 사람도 등장했다. 기부나 헌상물(獻上物)이 많은 유력한 사원, 또는 사원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힌두교 문화가 번성해서 산스크리트 연구를 위한 학교도 개설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중심지에서는 문법 연구, 천문학, 의학 등의 전문적인 학문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촐라 왕조[편집]

-王朝 Chola

인도반도의 남부지방에서는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크리시나 3세에 의한 승리가 이 지방 여러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처럼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 불과 50년 후에는 탄자부르에 도읍을 정한 촐라 왕국이 라자라자 1세(재위 985∼1016)에 의해 다시 대두되었다.촐라 왕국의 번영을 이룩하여 해상에서의 군사 및 교역면(交易面)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한 것은 라젠드라 1세였다. 이 왕은 인도 동해안에 원정을 가서 그 일대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다시 갠지스 강 하류의 팔라바 왕국에까지 쳐들어가 싸웠다. 또한 그는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섬 북안까지도 함대를 파견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수십 년 간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이어받았으나, 비라라젠드라 왕이 죽은 뒤에는 이 촐라 왕국의 권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먼저 판디아 왕국에서 촐라 왕조의 지상권(至上權)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이어서 실론섬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사태는 급전하여 촐라 왕조를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촐라 왕조는 판디아 왕조의 집요한 공격으로 점차 쇠퇴해 1279년에 멸망하였다.

라슈트라쿠타 왕조[편집]

-王朝 Rstrakta

인도의 데칸고원을 다스린 힌두 왕조(753?∼973). 라슈트라쿠타라는 명칭은 지방장관이란 뜻으로 왕의 선조가 이 명칭을 얻은 데서 유래된다.7세기 전반부터 찰루키아 왕조의 지배하에 세력을 떨쳐 8세기에 신드를 점령하고, 찰루키아 왕조를 멸망시키고 라슈트라쿠타 왕조를 창시하였다. 왕조는 973년까지 14대가 이어졌는데, 소왕국으로 분립된 데칸지방에서는 비교적 장기간 세력을 유지하였다. 당시 갠지스 강 중류 유역의 프라티하라 왕조, 하류유역의 팔라바 왕조 등의 강대한 왕국과 전쟁을 되풀이하였는데, 특히 두르바왕과 고빈다 3세 때에는 북인도에 대원정을 단행하여 광대한 영토를 영위했으나, 973년에 봉신의 지위로 떨어졌던 찰루키아 왕조의 타일라에게 멸망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