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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센 제국의 발전〔槪說〕[편집]

7세기 초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알라의 새로운 신앙을 설교하여 박해를 받은 마호메트는, 622년 메디나로 옮겼다. 이 사건은 헤지라(聖遷)라고 불리는데, 낡은 부족 조직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와 새로운 종교적 공동체의 성립을 의미하며, 이슬람교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마호메트는 630년에 메카를 회복하고, 2년 후 그가 죽을 무렵에는 아라비아의 거의 전토를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마호메트의 사후, 장로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후계자)로 선발되었다. 이후 제4대 알리에 이르기까지를 정통 칼리프 시대(632

661)라고 한다. 이 시대에 아라비아인의 대정복이 개시되었다. 특히 제2대 칼리프인 우마르는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를 병합하였고, 642년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타도하여 사라센 제국의 기초를 구축했다. 정복 사업은 그 후에도 계속 추진되었으나, 제3대 우스만 시대부터 교단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그것은 마호메트 일족과 메카의 상업 귀족을 대표하는 우마이야가(家)와의 대립이다. 마호메트의 종제(從弟)인 알리가 제4대 칼리프에 취임하자, 시리아 총독이었던 우마이야가(家)의 무아위야는 유력한 반대 세력이 되어 알리의 암살 후, 다마스쿠스에 도읍을 두고 옴미아드 왕조를 세웠다.옴미아드 왕조는 칼리프의 세습제(世襲制)를 취하고, 그 지위는 차츰 전제군주화되었다. 이 시대에 정복은 더욱 확대되어서 서로는 에스파냐, 동으로는 중앙아시아·북부 인도까지 사라센 제국의 최대 영토를 형성했다.이와 같은 찬란한 대외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알리 일당의 시아파(派)가 옴미아드 왕조의 아랍 지상주의에 불만을 가진 이란계 이슬람교도의 지지를 받아 칼리프에 대항하여 제국 분열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편집]

-以前-

7세기에 이슬람교가 일어나서, 세계 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아라비아 반도도, 마호메트 이전의 역사에 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로마인은 이 지방을 북쪽에서부터 ‘돌의 아라비아’ ‘사막의 아라비아’ ‘행복한 아라비아’의 셋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돌의 아라비아’는 시리아 사막에 접속되고, 로마 시대에 나바테아 왕국의 중심으로서 번영했던 페트라 등의 대상(隊商) 도시가 존재했다. 또한 현재의 예멘 지방에 해당하는 남쪽의 ‘행복한 아라비아’는 관개(灌漑) 농업과 향료 무역에 의해서, 기원전부터 미나와시바의 여왕으로 유명한 사바 왕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일부 지대를 제외하고,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막의 아라비아’는 날쌔고 사나운 유목민 베도윈의 세계이며, 그들은 부족간의 대립 항쟁으로 오랜 ‘무명시대(無名時代)’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사막의 아라비아’에도 홍해(紅海)의 해안에 거의 평행하게 남북을 연결하는 내륙의 대상로(隊商路)가 있어 이 길은 5,6세기경부터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베도윈 가운데는 무역에 종사하며 도시에 안주하는 자도 나타났다. 이러한 도시 중에서도 가장 유력했던 곳이 메카이다. 메카는 카바 신전의 성지로서도 마호메트 이전부터 중요한 곳이었다.

마호메트[편집]

Mahomet (570?

632)

이슬람교의 개조(開祖)이다. 아라비아명으로 무하마드라고 한다. 메카에 세력이 있었던 쿠라이시족의 하심 집안에 태어나서 일찍 양친을 잃고, 백부인 아부 타리브에게 양육되었다. 25세 때, 15세 연상인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때때로 종교적 명상에 잠기게 되었다. 40세경 메카 교외의 히라산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알라의 천계(天啓)를 받아, 드디어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포교는 사람들의 조소와 적의(敵意)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의 최초의 귀의자(歸依者)는 아내인 하디자였고, 또한 소수이기는 했으나 일가문의 유력자도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카바 신전의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알라 앞에서의 평등을 주장하는 그의 가르침이 차차 하층민 사이에 전파됨에 따라 메카의 지배계급은 그에 대한 박해를 강화했다. 이 고난의 시기에 그의 훌륭한 이해자였던 아내와 보호자인 백부를 잃고, 622년 9월 마호메트는 메디나 시민의 초청을 수락,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겼다. 메디나에서 그는 종교적 지도자로서뿐만 아니라 입법자(立法者)로서, 또한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서 신망을 얻었다. 630년에는 메카를 정복하고, 카바신전의 우상을 파괴하여, 이 곳을 이슬람교 제1의 성지로 정했다. 632년 6월 8일, 메디나에서 병사했다.

헤지라(성천)[편집]

-(聖遷) Hegira

이슬람교의 교조(敎祖) 마호메트가 메카로부터 메디나로 옮겨간 것(聖遷)을 말한다. 마호메트의 포교활동은 메카의 쿠라이시족(族)의 반감을 사, 심하게 박해를 받았으므로 메카에서 이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상적(商敵) 메카에게 항상 압박받아 622년 7월 16일 야트리브(메디나)로 소수의 신도를 데리고 이주하였다. 이슬람교도는 이를 기원(紀元) 1년으로 삼는다.

메카[편집]

Mecca

이슬람교의 중심적 성지(聖地)이다. 이 땅은 남아라비아와 시리아를 연결하는 대상로(隊商路)에 연한 요지이고, 또한 카바 신전의 존재 때문에 일찍부터 아라비아인의 종교적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5세기 이래, 쿠라이시족이 이 곳을 지배하게 된 때부터 상업적으로 번영했다. 7세기 초 마호메트가 이곳에서 이슬람교를 일으켰고, 일시 메디나로 옮겼으나, 630년 메카를 정복하여 카바를 알라의 신전으로 정한 후부터 메카는 이슬람교 제1의 성지가 되었다. 이슬람교도는 일생에 한 번은 메카의 순례를 염원하며, 특히 대제(大祭)가 실시되는 12월에 메카는 순례자로 붐빈다.

카바[편집]

Ka’ba

메카의 중심에 있는 이슬람교의 가장 중요한 신전이다. 방형(方形)의 건물로서 여기에는 아라비아인에게 예로부터 신앙되었던 검은 성석(聖石)이나 쟘쟘의 성천(聖泉)이 있다. 카바는 이슬람교 이전부터 존재하여, 많은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었으나, 630년 메카에 들어온 마호메트는 우상을 일소하고, 알라의 성소(聖所)로 바꾸었다. 그는 카바를 키브라(예배의 방향)로 정하고,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의 이슬람교도는 매일 이 성소를 향해서 예배하고 있다.

메디나[편집]

Medina

메카 다음가는 이슬람교 제2의 성지. 원명은 야트리브. 622년 마호메트는 메카로부터 이 곳으로 옮겨 이슬람교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후에 ‘예언자의 마을(마디나트 안 나비)’이라 명명되어, 약칭 메디나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호메트부터 정통 칼리프 시대를 통해서, 이 곳이 수도였다. 이 곳에는 예언자 외에 후계자 아부바크르 및 우마르의 묘가 있고, 매년 많은 순례자가 방문한다.

이슬람교[편집]

-敎 Islamism

마호메트(또는 무함마드)(Mohammad)를 개조(開祖)로 하여,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종교이다. 마호메트교 또는 회교(回敎)라고도 한다. 이슬람은 ‘절대귀의(絶對歸依)’라는 뜻이다. 성전(聖典) 코란에 의하면 이슬람 신앙의 근본은 알라(Allah)(알라의 뜻: 유일한 신이라는 뜻)와 신의 사도 마호메트를 믿는 데에 있으며, 이와 함께 코란(Koran) (또는 코란(Quran) 이전의 성전(예컨대 성서 등), 천사, 최후의 심판의 날의 신앙이 중시되었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전지전능·대자대비(大慈大悲)의 신이며, 사도 마호메트는 알라가 인간에게 보낸 예언자들 가운데 최후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태교나 그리스도교는 신의 계시의 일부를 전하는 데 불과하며, 완전한 계시는 마호메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마호메트는 인간이어서 그 신격화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이슬람교의 신자는 모슬렘이라 불리며, 신 앞에서는 신분·계급의 차이, 민족·국경의 구별이 없이 평등하며, 또한 모든 모슬렘은 형제라는 것이 강조되었다. 유일신 알라에의 절대귀의와 평등의 가르침이 이슬람교를 세계 종교로 발전시킨 최대의 이유이며, 현재 모슬렘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세 대륙에 분포하여, 약 3억 6천만에 달한다고 한다.

코란[편집]

Quran 또는 Koran

코란은 이슬람교도의 종교, 도덕, 사회에 관한 불변의 법전으로 ‘외는(誦) 것’이라는 뜻이다. 알라가 마호메트를 통하여 내려진 천계(天啓)의 서(書)라는 것이다. 전체는 30편 114장으로 나뉘어 있고 운문(韻文)으로 되었으며, 그 구성은 별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알라의 천지 창조, 인간의 탄생,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의 역사·전승(傳承), 종말의 날, 최후의 심판, 모슬렘의 신앙 생활이나 세속 생활의 규율을 포함한다. 마호메트가 죽은 후 편찬 사업이 시작되어, 651년에 제3대 칼리프인 우수만에 의하여 현행 코란이 정해졌다. 코란은 모슬렘의 전생활의 규준일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서는 안된다고 되었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도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신자의 생활을 규제하는 법률적 도덕 규칙면에서는 코란 외에 하디드, 즉 제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마호메트의 말이나 행동에 대한 전승(傳承)이 특히 중요시되었다. 하디드는 순나라 불리는 범례집(範例集) 속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판(版)이 있다. 이 순나와 이슬람 세계의 공통된 법전인 코란은, 비록 불분명한 점이 있기는 하나 마호메트의 전기를 아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무슬림[편집]

Muslim

이슬람교도를 말한다. 무슬림의 의무는 5주(柱)라고 불린다. 그것은 “알라 이외에 신은 없고, 마호메트는 그 사도이다”를 외는 신조 고백(信條告白, 샤하다), 하루에 다섯 번 카바를 향해서 행하는 기도(사라트), 재산의 일부를 신에게 바치는 희사(喜捨, 자카드), 라마단(9月) 동안 행하는 단식(사움), 메카에의 순례(핫지)이다. 이 밖에 ‘알라의 길에 있어서’ 무기를 잡는 성전(聖戰, 지하드)도 중요한 의무로 되어 있다.

성전[편집]

聖戰

이슬람교를 위하여 싸우는 의무를 말한다. 지하드라고 한다. 이슬람교도의 정복은 종래 “오른손에 칼, 왼손에 코란”이라는 말로 대표되어, 그들의 격렬한 종교적 정열과 불신앙자에 대한 엄격한 양자택일의 태도가 특색으로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대교도나 그리스도교도 등은 ‘경전(經典)의 백성’으로서 이슬람교에 개종하지 않아도 인두세(人頭稅, 지즈야) 및 지조(地租, 하라쥬)를 납부하면 종래의 신앙을 인정한다는 형식적인 정책이 취해졌다.

칼리프[편집]

caliph

‘후계자’의 뜻이다. 마호메트의 사후 이슬람교단을 이끈 최고 지도자의 칭호. 정식으로는 ‘칼리파 라술 알라(알라의 사도의 후계자)’라고 한다. 마호메트는 후계자에 대해서 지시를 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교단 내부에 혼란이 생겼으나, 아라비아의 부족제 전통에 따라, 선거에 의해서 아부 바크르를 초대 칼리프로 선출했다. 칼리프의 선거제는 제4대 칼리프로서 끝나고, 옴미아드 왕조부터 세습제로 변하였다. 칼리프는 정교(政敎) 양면으로 최고 권위를 겸비하고 있었으나 아바스 왕조의 후반부터 정치적 권력을 잃고, 종교적 권위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칼리프제는 약 1천3백 년간 계속되어 1922년 오스만 왕조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

아부 바크르[편집]

Ab

Bakr (572?

634, 재위 632

634)초대 칼리프이다. 마호메트의 가르침에 가장 빨리 귀의한 사람의 하나로 교단 내부에서 장로로서 중책을 맡았다. 마호메트의 사후, 교단 분열의 위기를 누르고 최초의 칼리프에 선출되었다. 칼리프 취임 후에 일어난 아라비아 제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반도의 통일을 회복하였으며, 성전을 강조하여 이라크, 시리아 방면에서의 정복을 개시했다.

우마르[편집]

Umar (591?

644, 재위 634

644)

제2대 칼리프로서 대정복을 계속하여 사라센 제국의 기초를 확립했다. 당시 오리엔트의 2대 강국이었던 동로마 및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와 싸워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642년에는 니하반트의 싸움에 의해서 페르시아를 타도하였다. 그는 코란의 편찬 사업에 착수하였으며, 헤지라 기원(紀元)을 정하고, 사라센 제국의 제도를 굳혔다. 644년에 그리스도교도인 페르시아인에게 암살되었다.

우스만[편집]

Uthman (574?

656, 재위 644 656) 쿠라이시족의 우마이야가(家) 출신. 우마르의 사후, 제3대 칼리프에 선출되었다. 그는 코란의 정본(定本)을 만들고, 그 때까지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던 이본(異本)은 모두 불태워버리게 했다. 또한 중앙·지방의 요직을 옴미아드가 일문에서 독점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656년 이집트의 반란군 병사의 습격으로 죽었다.

알리[편집]

Ali (603

661, 재위 656

661)

제4대 칼리프이다. 아부 타리브의 아들로서 마호메트의 종제(從弟)이자, 딸 파티마의 남편이었다. 가장 빨리 마호메트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예언자의 최대 협력자가 되었다. 제3대 칼리프가 살해되자 칼리프에 선출되었는데, 메카의 유력자나 우마이야가의 무아비야의 반대를 받아 도읍을 메디나에서 쿠파로 옮겼다. 그 후 알리는 제국 통일을 위하여 무아비야와 항쟁과 타협을 했으나, 661년 정정(政情) 불안을 개탄하는 이슬람교도에게 암살을 당하여 쿠파의 회교 사원에서 쓰러졌다. 알리 및 그의 자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시아파라고 하며, 이슬람교의 일대 분파를 형성했다.

수니[편집]

(수나派) Sunni

이슬람교의 정통파이다. 이슬람교의 유력한 분파인 시아파는 마호메트의 사후에도 알리 및 그 자손에 의해서 예언적 활동이 계속된다는 데에 대해서 계시와 종교적 지식의 전부는 단지 ‘코란’과 예언자의 언행(수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견해를 가지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시아파[편집]

-派 Shi’ite

수니(정통파)에 대립하는 이슬람교의 일대 분파로서, 그 이름은 시아트 알리(알리黨)에서 유래한다. 시아파는 알리를 마호메트의 정식 후계자로 하여 다른 칼리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알리 이외에 신은 없고 마호메트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신조에 ‘또한 알리는 신의 벗이다’라는 말을 부가한다. 알리 및 그의 자손은 이맘이라고 불리고, 그 지위는 신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라고 한다. 시아파의 결성으로 이슬람 세계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분열되고, 이 현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시아파에게 있어서는 알리와 그 자손만이 신자 공동체의 정통적인 장(長), 즉 이맘인 것이다. 이맘은 기도를 주재하는 사람이고, 예언자의 말의 참된 의미를 전하는 사람이다.시아파는 이란인 사이에 많이 퍼져서 16세기에는 사파비 왕조의 아바스 1세에 의해 페르시아의 국교로 정해져서 현재에 이른다.

옴미아드 왕조[편집]

-王朝

정통 칼리프 시대에 이어 사라센 제국을 지배한 왕조(661

750)이다. 우마이야가(Umayya) 일문인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재위 661

680)는 정통 칼리프 제4대인 알리의 사후 칼리프가 되어 다마스쿠스에 도읍을 정하고 왕조를 창립했다. 이 왕조는 칼리프 세습제(世襲制)를 취하고 비잔틴의 제도를 도입하여 행정조직을 정비하고, 아라비아어를 공용어로 했다. 제5대 칼리프인 압둘 말리크(재위 685

705) 시대가 최성기였다. 8세기 초 제국의 영역은 중국·인도의 국경에서 대서양 연안까지 확대되었는데, 정복이 한계에 달함과 동시에 국내의 불만도 높아졌다. 옴미아드 왕조의 아랍 지상주의에 반발한 피정복민은 차츰 민족적 자각을 강화하였고, 시아파의 반(反)옴미아드 왕조 운동이나 아라비아 여러 부족간의 반목도 격화되었다. 750년에 이 정세를 이용하여 봉기한 아부 알 아바스에 의해서 14대 89년으로 멸망했다.

무아위야[편집]

Muwiya (?∼680, 재위 661∼680)

우마이야 왕조의 창건자. 630년 마호메트(Mahomet)가 메카성에 들어오자 이슬람교에 개종하였다. 1대 칼리프(caliph)인 아부 바크르(Ab-bakr) 때 시리아 원정에 공로가 있었으며, 후에 다마스쿠스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2대 칼리프가 암살된 후 칼리프가 되어 4대 알리와 대립하여, 661년 알리가 암살되자 예루살렘에서 즉위,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그 후 이라크를 평정하여 이슬람권(圈) 최초의 세습(世襲) 왕조를 세워 국정의 정비와 영토의 확장에 노력하였다.

다마스쿠스[편집]

Damascus

시리아 남부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 구약성서의 다마스코. 아라비어로 Di- mashg 또는 alsham.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로서 기원전 10세기 이후 아랍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732년 아시리아에게 멸망된 이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지배되었으며, 뒤에 동로마 제국에 속했다. 그러나 635년에 이슬람교도에 의해 지배된 이후, 750년까지 칼리프의 소재지가 되었다. 12세기에 십자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1401년에는 티무르에 의해 파괴되고, 30만의 시민이 살해되었다. 1516년 오스만 투르크령(領)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프랑스의 위임통치지(委任統治地)로 되었다가, 1946년 영국, 프랑스 양군이 철수한 후, 시리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