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프랑크 왕국과 사라센 제국/안사의 난과 양세법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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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과 양세법의 성립〔槪說〕[편집]

주변 제민족에 대한 당(唐) 문화의 파급에 따라서, 여러 민족은 차츰 내부에서 계급 분화를 일으켜 왕권(王權)이 생겼고, 당의 조종을 받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히 당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이 때문에 기미정책은 파탄되어, 대군을 변경에 상주시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모병제가 발전하고 절도사(節度使)가 배치되었는데 본래는 변경 방비를 강화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할 목적으로 배치한 절도사들이 군벌화(軍閥化)하였다.한편 증대하는 군비(軍費)를 지탱하는 농민층은 장원(莊園)의 발달, 균전제(均田制)의 유명무실화에 의해서 분해의 도를 빨리하였다. 괄호(括戶→租庸調) 정책의 강행에 의해서 호적상의 호구 수는 급증했으나, 징세 강화와 상업 발전에 따른 토지 매매도 격화되어, 토지를 버리고 부랑화(浮浪化)하는 농민(客戶)도 많아 그것을 수용하는 모병군대가 더욱 팽창된다. 그 모순을 기화로 권력 탈취를 기도한 안사(安史)의 난(亂)이 발발하였고, 그 전후(戰後)의 혼란을 처리하여 재정을 바로세우고 절도사를 견제하며 당조(唐朝)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양세법(兩稅法)이 창시되었다.

양귀비[편집]

楊貴妃 (719

756)

당나라 현종의 비(妃)이다. 처음 황자(皇子)의 비였으나, 아버지 현종의 눈에 들어 이혼당하여 귀비(貴妃:女官의 계급)로서 후궁(後宮)으로 들어간다. 현종은 그를 몹시 사랑하여 일족이 대부분 고관에 올랐고 또한 사촌인 양국충(楊國忠)은 재상(宰相)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귀비를 둘러싼 궁정 귀족의 생활은 사치를 극하였고, 양국충의 전권(專權)은 이와 대립하는 안녹산(安祿山→안사의 난)의 반란을 초래하여, 귀비는 황제와 함께 촉(蜀:四川省)에 피신했으나, 도중에 근위병(近衛兵)들에게 죽었다.

양국충[편집]

楊國忠 (?∼756)

중국 당(唐)대의 재상. 양귀비의 종형(從兄). 현종으로부터 국충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752년 어사(御史)에서 재상(宰上)에 올랐으나 술과 노름을 좋아해 음종불법(淫縱不法)으로 지냈다. 안녹산과 사이가 나빠 녹산의 반란을 미리 현종에게 알렸으나 현종은 이를 믿지 않아 천보(天寶) 14년(755년) 마침내 안녹산의 반란으로 황제는 촉(蜀)으로 도망가고 국충은 마외산(馬嵬山)에서 병졸에게 살해당했다.

안사의 난[편집]

安史-亂 (755

763)

당조(唐朝)의 전후기를 구분하는 대반란(大反亂)이다. 개원(開元) 연호가 29년으로 종말을 고하고 다음 해 742년에 천보(天寶)로 바뀐 때, 현종은 이미 재위 30년에 나이도 60에 가까웠다. 그는 어느새 무사안일에 흐르고 사치를 즐기는 평범한 군주로 변모되어 있었다. 이때 중앙정계를 주름잡고 있던 사람이 이임보(李林甫)였다. 그는 734년에 재상이 된 이후 752년에 병사하기까지 19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이 이임보의 권세에 아부하는 형태로 두 세력이 대두해 현종의 치세를 그르치게 했는데, 그 하나는 장안의 궁정에 스며든 양귀비(楊貴妃)와 그 일족이고, 또 하나는 북변의 무장 안녹산(安祿山)이었다. 이임보가 죽기 직전부터 양귀비의 사촌오빠이며, 장안을 주름잡던 양국충(楊國忠) 일파와 최강의 절도사였던 안녹산 일파 사이에 반목이 생겼다. 녹산은 현종과 양귀비에게 접근하여 평로(平盧:熱河의 朝陽)·범양(范陽:北京)·하동(河東:山西의 太原)의 세 절도사를 겸임하여, 천보(天寶) 14년(755) 11월 양국충 일파를 제거한다는 핑계로 범양(范陽)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며, 12월에는 동도(東都) 뤄양을 함락시켜서 대연군(大燕國) 황제라 칭하고, 다음해 6월 수도 장안(長安)을 함락시켰다. 현종(玄宗)은 사천(四川)으로 피하고, 황태자는 북방으로 피하여 즉위해서 숙종(肅宗)이 된다. 허베이(河北)의 안진경(顔眞卿)이나 허난(河南)의 장순(張巡)·허원(許遠) 등 근황군(勤皇軍)의 분전으로 재원(財源)지대인 화이난(淮南)을 점령하지 못한 안군(安軍)은 내분을 일으켜서, 녹산은 아들 경서(慶緖)에게 살해되고(757), 다시 사사명(史思明)은 그를 죽여서 수령이 되었다(759). 당은 위구르족의 원병을 얻어 두 도읍을 탈환하였고 드디어 사사명도 자식인 조의(朝義)에게 살해되고, 그도 부하 손에 죽음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절도사(번진)[편집]

節度使(蕃鎭)

당(唐)나라 제5대 예종(8세기 초) 때부터 설치된 지방군 사령관이다. 현종은 친정(親政)을 시작하게 되자 위람승을 도태시키고 원외관, 시관(試官) 등 불필요한 관리를 파면시켜 기강을 바로잡아 나갔다. 당(唐) 초기에 균전제(均田制)가 현실적으로 실시된 것은 화북(華北)의 일부지방에 지나지 않았고, 율령제의 전제가 된 것은 수전(授田)에 따른 조용조와 잡요 등의 공과(公課)였으나, 당 초기의 일반 농민은 일괄적으로 공과를 납부할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다.더구나 부병제(府兵制)에 있어서 절충부(折衝府:軍府)의 극단적인 편중에 따른 병역 의무의 편재라는, 비정상적인 징병의무가 부과되었기 때문에, 군부가 설치된 주에서 설치되지 않은 주로 도망하는 사람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이에 병농(兵農) 일치의 원칙에 따른 부병제가 붕괴되고, 그대신 용병(傭兵)에 의한 모병제(募兵制)가 새로 채택되었으며, 이들 군단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막대한 병력을 거느리는 절도사(節度使)가 생기게 되었다. 변경에 상주하는 대군을 거느린 절도사의 출현은 당의 중앙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병·민·재(財) 3권을 장악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이 평로(平盧) 절도사가 된 것이 742년, 평로·범양(范陽)·하동(河東)의 3절도사를 겸임한 것이 751년, 반란을 일으킨 것이 755년 11월이었다. 이 난을 계기로 절도사는 내지에 열치(列置)되어 몇 주(州)를 통괄하는 도(道)의 장관이 되었다. 아군(牙軍)이라고 불리는 친위군을 중핵으로 막부(幕府)를 두고, 심복의 군장(軍將)에게 민정·재정을 맡기고 진장(鎭將)이 인솔하는 외진군(外鎭軍)을 요소에 두어 영내를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강대한 것은 세습 군벌로 화해서 중앙에 반항했다. 당조(唐朝)에서는 이의 통제에 고심하였으나 드디어 제국은 분열되고 5대 10국(五代十國)이 되었다. 5대 사이에 절도사는 세분화되어 권력이 약해지고 송(宋)에서는 그 권한 기구를 해체 흡수하여 단순한 명예 칭호로 화했다.

양세법[편집]

兩稅法

당(唐)나라 제9대 덕종(德宗)의 건중 원년(建中元年, 780). 재상 양염(楊炎)에 의해 실시된 세법으로서 여름·가을 양기에 납입한다. 당나라 초기 이래의 조용조제는 고정균액(固定均額)의 세제로서 과세 단위인 정남(丁男)의 수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수입이 결정되고 지출은 거기에 맞추는 양입제출(量入提出)의 현물 재정이었다. 이것은 급격한 재정 팽창을 충당하지 못하여 개원 천보시대(天寶時代)에 궁지에 몰렸다. 당조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 전비(戰費) 조달을 위하여 임시 비상 징수를 실시했고, 거기에다가 이 난을 계기로 하여 내지(內地)에까지 배치된 절도사의 징세도 겹쳐서 난후(亂後)의 세제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양세법은 이것을 모두 정리하여 하나로 통합하고 그 밖의 징세는 엄금하여 이것을 중앙비와 지방 도주현비(道州縣費)로 분할하는 것으로서 세제 간소화, 중앙의 수입 확보, 절도사의 징세 제한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780년에 창시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체(實體)는 이미 이전 지방 말단의 징세 현장에서 자연발생하고 있었다. 중앙으로부터의 징세령서(徵稅令書)가 연간 2백 통에 달하고 그때마다 징수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여름·가을의 수확기에 일괄 징수해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양세가 유일한 정세(正稅)로 되면 필요 경비는 모두 여기에서 지출된다. 그래서 1년의 예산을 세워 그것을 각도·각주·각현·각호의 담세 능력에 따라서 할당하고, 지출에 맞추어 징수 할당의 예산을 결정하는 양출제입(量出制入) 원칙의 재정으로 변하였다. 조용조(租庸調)는 토착호(土着戶)인 토호(土戶)에만 세금을 부과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객호(客戶)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본적지로 송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토지와 인구의 이동이 격화되고 객호가 기우지(寄寓地)에서 토지 소유주가 된다든지 부호(富戶)가 몰래 다른 현에 재산을 도피시키는 등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 때부터 대책이 문제가 되어 현종(玄宗) 시대에는 우문융(宇文融)이 호구색역사(戶口色役使)가 되어 객호를 호적에 기록하고자 노력했다.안사의 난 후에 토지와 인구의 이동이 더욱 격화하였고, 드디어 양세법에 이르러서는 토객(土客)의 구별 없이 현주지에서 약간의 토지를 가졌어도 주호(主戶), 즉 담세호(擔稅戶)로 했다. 이후 객호란 무산무세(無産無稅) 내지 한 사람 몫의 담세 능력이 없는 자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호산(戶産)을 가지면 수년의 유예기간 후 주호에 편입된다. 호의 재산은 향촌에서는 오로지 토지, 도시 상인에게는 동산도 포함했으나 동산은 파악이 어려워 5대를 경과하여 송(宋)에 이르는 동안은 별도의 기준을 마련하여 옥세(屋稅)·지세(地稅)·상세(商稅) 등 도시민이나 상인의 세를 별도로 취급하게 된다.양세법은 자산에 대응한 전액(錢額) 일원화의 세이며 연 2회 징수면에서도 중국 세제사상 획기적인 것으로 후세에까지 이 선을 따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