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프랑크 왕국과 사라센 제국/프랑크 왕국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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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의 발전〔槪說〕[편집]

프랑크 왕국에서는 메로빙거 왕조의 분국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 지위가 차츰 높아져서 왕국 전체의 궁재 지위를 겸하도록 되었다. 피핀, 카를 마르텔(찰스 마르텔), 소(小)피핀 등은 각각 궁재로서 활약했다.7세기 초에 탄생한 사라센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 세력은 아프리카를 거쳐서, 8세기에는 서(西)고트족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프랑크 왕국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카를 마르텔의 군대는 이슬람 교도를 투르·푸아티에 싸움에서 격퇴하고, 서유럽을 이슬람 교도의 침략에서 지켰다. 이어서 카를 마르텔의 아들 소(小)피핀은 교황의 승인 아래 왕위를 빼앗아 카롤링거 왕조를 창시하였고, 다시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족을 멸망시켜 교황에게 광대한 땅을 기부하였다. 이렇게 카롤링거 왕조가 교황과 손을 잡음으로써 서로마 제국의 재흥자(再興者)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얻음과 동시에, 로마 교회 또한 동방교회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여, 서방 정신계(界)의 독립을 꾀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중세 유럽의 교황권과 군주권의 밀접한 관계가 창출(創出)된 것이다. 또한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대토지 소유의 발전은 분국의 혼란을 초래했으나, 궁재 시대부터 이 봉건체제를 재편성하면서 집권화에의 권력적·제도적인 노력이 계속되고, 드디어 카를 대제(大帝)에 의한 왕국의 확립과 번영의 시대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궁재[편집]

宮宰 Majordomus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에서 비롯한 최고의 궁정직(宮廷職)이었다. 국왕에 준하는 권력을 가졌고, 국왕 측근의 종사(從士)들의 장이기도 했다. 궁재는 세 분국(三分國)에도 두었고, 그 중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의 힘이 강력해서, 드디어 프랑크 왕국의 궁재 지위도 겸하게 되었다. 궁재로서는 피핀, 카를 마르텔, 소(小)피핀 등이 유명하다.

투르·푸아티에 간의 싸움[편집]

-間-

732년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이 이슬람 교도의 군대를 격퇴한 싸움.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루아르강 유역에 진출한 압둘 라흐만이 지휘하는 회교도의 대군은, 투르(Tours)와 푸아티에(Poitiers) 사이에서 카를 마르텔이 지휘하는 게르만 여러 부족의 군에 패하여 압둘 라흐만은 전사하였다.이리하여 이슬람교도의 유럽 중추부 침입은 저지되었다. 이 전투는 이슬람교도의 침략으로부터 서유럽의 크리스트교를 수호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카를 마르텔(찰스 마르텔)[편집]

Karl Martell (689

741, 재위 714

741)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이다. 그는 투르·푸아티에 간의 싸움에서 이슬람교도를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접한 여러 민족을 제압하고, 또한 부르군트, 프로방스 등을 정복하여 카롤링거가(家)의 지위를 크게 높였다. 그는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에 대비하여 기사를 양성하였는데, 이것이 봉건제도의 하나의 기원을 이루었다는 설도 있었으나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카롤링거 왕조[편집]

-王朝 Karolingian (751

987)

메로빙거 왕조 내란기에 대두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아, 7세기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서 궁재직(宮宰職)을 발판으로 왕국의 실권을 장악한 이후, 그 자손은 계속하여 궁재가 되고, 그의 증손(曾孫) 카를 마르텔은 이슬람교도의 침략을 격퇴하여 더욱 강성해졌다.그의 아들 소(小)피핀은 751년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창건하였다. 그후 서(西)프랑크 루이 5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카롤링거 왕조가 계속되었다. 카를 대제의 시대가 최성기이며, 그 후 재차 분열을 겪었다. 카를 대제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제국의 제관(帝冠)을 받아 반(半)고대적인 집권적 관료국가로서 번영하였는데, 초기에 있어서는 고대적인 상업에 기생(寄生)하고 있던 메로빙거 왕조와는 달리 토지 경제 내지는 농업분야에 권력기반을 두고 있었다. 대제의 사후, 봉건적 분권주의가 진전됨에 따라 제국은 점차 약체화하였다.베르됭, 메르센 두 조약으로 왕가가 분열된 후 이탈리아계는 875년, 동프랑크계는 987년, 서프랑크계는 987년에 각각 단절되었다. 이 왕조는 봉건제에 의거하면서 통일체로서의 프랑크 왕국의 집권하에 성공하였고, 그 붕괴의 과정에서 훗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같은 국민적 전통을 가진 봉건제가 탄생되어 갔다.

소피핀[편집]

小- Pepin the Younger (714?

768)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를 창시한 국왕이며, 카를 마르텔의 아들이다. 747년에 전(全)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어, 로마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전왕(前王) 힐드리히 3세(메로빙거 왕조)의 폐위를 인정시켜서 왕위에 올랐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군을 격파하여 라벤나의 땅을 교황에게 기부했다. 이 밖에 바바리아를 정벌하고 나르본, 아키텐을 합병하는 등 왕국의 확대에 힘썼다.

아바르인의 침공[편집]

-人-侵攻

아바르인은 중앙아시아의 몽골계 유목민족. 5세기에 유럽에 들어와, 6세기에 다뉴브강 유역을 중심으로 아틸라 제국 이래의 대제국을 이룩했다. 6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동로마제국이나 프랑크 왕국을 괴롭혔는데, 8세기 말 프랑크의 카를 대제와 그 아들 피핀에 패배하고는 아바르인은 쇠퇴하여 마자르인에 동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