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프랑크 왕국과 사라센 제국/7 ~ 8세기의 동남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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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8세기의 동남아시아〔槪說〕[편집]

6세기 중엽 메콩강 중류

지역에 일어난 크메르(캄보디아)인의 나라 진랍(眞臘)은 7세기에 들어서자 부남(扶南)을 멸망시켰으나, 이 왕가에는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계승권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 마침내 두 개의 진랍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당서(唐書)』 「남만전(南蠻傳)」에는 이들 두 나라가 북쪽의 ‘육진랍(陸眞臘),’ 남쪽의 ‘수진랍(水眞臘)’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쪽의 진랍은 문화적으로 이란 계통이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조직이 완비되었고, 행정도 중앙 집권화되어 있어서 국력이 충실했다. 한편 남쪽의 진랍은 약체를 면치 못해 오래지 않아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800년경에는 젊고 천재적인 군주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남부의 통일운동이 일어나, 결국 앙코르의 크메르 제국이 건설되었다. 미얀마에서는 이라와디강 하류 델타에 몬(Mon)인, 상류와 중류 지대에 퓨(Pyu)인이 살고 있었고 7세기에는 퓨인의 국가가 번영했다. 한편 도서 지방에서는 수마트라에 스리비자야 왕국이 일어나 해상무역에 의해서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스리비자야 왕국[편집]

-王國

rivijaya

인도네시아에도 일찍부터 인도의 힌두교가 침투하여 그 영향을 받은 몇 개의 작은 나라가 2세기경부터 점점 성장해갔다. 7세기가 끝난 무렵에는 그들이 연합하여 스리비자야라는 커다란 국가로 통일되어 수마트라 섬의 현재의 팔렘방을 수도로 했다. 이곳의 비문이나 중국인 의정(義淨)의 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典)』으로도 이 나라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국, 그리고 인도와 활발한 교역활동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간에 위치하여, 말래카 해협과 선다 해협의 중앙에 위치하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8세기에 들어서자 해상무역 국가로 급속히 발전했다. 때마침 서방의 사라센 제국으로부터 상선(商船)이 자주 동쪽으로 나온 시기이며, 당대(唐代)의 중국은 풍부한 시장임과 동시에 중국인도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스리비자야는 중계무역지 역할을 하였다. 7세기 후반 인도에 유학했던 당나라 중 의정(義淨)이 도중에 스리비자야에 들러서 산스크리트어 연구와 불전의 번역 등에 종사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나라 불교의 번영을 알 수 있다. 8세기 중엽에는 말레이 반도의 일부도 지배했던 것 같고 영토도 확대되어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대국이 되었다. 10세기를 최성기로 하여 14세기에 몰락했다.

사일렌드라 왕조[편집]

-王朝 Sailendra

8세기 중엽 중부 자바에서 일어난 왕조로 베트남의 참파와 캄보디아를 공격할 만큼 군사적으로 강했던 듯하나 그 정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귀의자였던 이 왕가의 사람들은 불교를 소중히 보호하여 장대한 불교 건조물 보로부두르, 챤디 멘두트 등 훌륭한 불교 건축을 남겼다. 그런데 9세기 중엽 자바의 이 왕가는 강력한 해군력을 이용하여 베트남 북부와 캄보디아에 원정을 하고 나아가서는 말레이 반도까지 권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도 빼앗고 말았다. 결국 스리비자야 왕국은 사일렌드라 왕조의 지배 밑에서 재흥(再興)해 가게 되는 것이다.한편, 자바의 동부에는 불교계 사일렌드라 왕조에 대항하여 힌두교를 신봉하는 마타람 왕국이 대두하였다. 서로 이웃한 두 나라의 적대 관계는 결국 마타람 왕국의 승리로 끝난다. 그 결과 자바에서 축출된 사일렌드라 왕가는 완전히 수마트라 섬의 재생(再生) 스리비자야 왕조로 합체했다.

보로부두르[편집]

Borobudur

자바섬의 중부에 있는 인도네시아 최대의 불교 건조물. 사일렌드라 왕조 치하인 8세기에서 9세기 전반에 걸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조영자(造營者)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던 것을 1814년 영국인이 발굴하여 재건(再建)했다. 석조건축(石造建築)으로서 기단(基壇)은 거의 정방형인데 1변의 길이는 111.5m이다. 그 위에 5층을 쌓아올렸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며, 각층(各層)에는 회랑(廻廊)이 있다. 또 그 위에 3층의 원단을 쌓아올리고 꼭대기의 중앙에는 종(鍾)모양의 대탑(大塔)을 세웠다. 전체로는 9층이며 그 높이는 31.5m에 달한다. 그 내부를 보면 상부원단(上部圓壇)내에는 72체(體)의 불상(佛像)이 안치되어 있고, 또 하부 5층에는 2,000 가량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참파[편집]

Champa

중국에서는 임읍(林邑)·환왕(環王)·점성(占城:9세기 중엽 이후의 호칭) 등으로 불리는데, 참파의 이름은 인도식 왕의 이름과 함께 이 나라가 일관해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참파 왕국은 인도문화의 가장 동쪽 전초지였다. 그들은 자주 프놈과 동맹을 맺기도 하면서, 중국과 끊임없이 싸움을 벌였다. 4세기 반경에 참파는 중국의 한 군(郡)인 일남(日南)을 합병하기도 했으나 이 승리는 순식간에 뒤바뀌고 말았다. 5세기에 중국이란 대국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참파는 독립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부바르만왕은 공식적으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이리하여 비교적 평화스런 시대가 시작됨으로써, 경제적 활동이나 문화적·종교적 사업을 촉진시킬 여유를 갖게 되었다. 7세기경까지는 유력한 국가로서 중국령인 동경(東京) 지방에도 압력을 가했었으나 8세기경부터는 베트남과 당나라의 압박을 받았고, 거기에도 해상왕국 스리비자야의 대두로 해상 활동이 억제되어 중개무역도 쇠퇴했다. 13세기에 원(元)나라 원정군을 격퇴시켰으나 15세기에 계속해서 베트남의 공격을 받아 17세기에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