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나치스 정권과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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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 정권과 파시즘〔槪說〕[편집]

세계공황은 안정된 듯이 보이던 독일 경제를 뿌리째 파괴하였다. 실업자는 500만 명을 넘었고 심각한 사회불안이 독일을 덮어 민중은 바이마르 공화제에 대하여 절망하였다. 이러한 정세에서 대중은 개혁을 갈망하게 되고 공산당 세력이 증대되는 한편 히틀러가 영도하는 나치스가 대두했다. 나치스는 베르사유 조약의 반대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적 선전으로 모든 계층의 편을 드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뮌헨 쿠데타의 패배로부터 재흥하였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생기는 정책의 모순을 볼셰비즘과 유대인 탓으로 돌리고 동요하는 민중, 특히 대자본가나 공산주의에 다 같이 반감을 가진 중산계급의 불만에 편승하여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1928년 12석에 불과했던 의회의 의석이 1932년에는 230석을 얻어 제1당으로 비약하였다. 그러나 동년 11월의 선거에서 의석이 줄고 그에 비례하여 공산당 세력은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혁명을 두려워하는 자본가와 군부는 나치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드디어 히틀러 내각을 성립시켰다(1933). 더욱이 계속 잔존하는 반대 세력을 근절하기 위하여 1933년 총선거를 앞두고 국회방화사건(國會防火事件)을 일으키고 이것을 공산당의 탄압에 이용하여 결국 자유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을 해산하였다. 그렇게 하여 1934년 히틀러는 총통(總統)이라 칭하고 나치스의 독재를 확립하였다. 정권을 잡은 나치스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反)하여 재군비(再軍備)를 추진하였으며 1933년 국제연맹 탈퇴, 1935년 징병제 부활, 1936년 로카르노 조약 폐기,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에의 진주(進駐) 등을 밀고 나감으로써 여기에서 베르사유 체제가 붕괴되었다.

한편, 이탈리아는 대전 후의 동요 중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이미 1922년 이래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 지배의 확립을 위하여 선거법 개정, 노동조합과 다른 정당의 해산이 강행되었다. 반(反)파시스트측도 마테오티와 같은 용감한 행동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반파시스트 운동은 그들 내부의 분열과 대립 때문에 효과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1927년에 파시스트 지배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공황은 이탈리아를 곤경으로 몰아넣어서 파시스트 정권은 그 활로를 군비확장과 침략에서 구하기 위해 1935년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였다. 독일·이탈리아 양 파시즘 국가는 그 후 급속히 접근하여 1936년 ‘베를린·로마 추축(樞軸)’을 형성하게 되었다.

나치스[편집]

Nazis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國家社會主義獨逸勞動者黨)의 통칭이다. 전신은 미력한 ‘독일 노동자당’으로 1919년 육군에서 히틀러가 파견되어 입당, 1920년 당명을 개칭하여 ‘나치스’로 발전하였다. 같은 해 25개조 강령(綱領)이 발표되어 후에까지 불변의 강령이 되었다. 내용은 ‘대독일’의 수립, 베르사유 조약의 반대, 노동 없이 얻는 소득의 폐지, 트러스트의 국유화, 전리(戰利) 이득의 몰수 등이나 그 가운데 그들이 내세운 사회주의적 요구는 스스로 포기하였다. 당수인 히틀러의 탁월한 웅변이나 위력과 인기와 동시에 돌격대(S·A), 나치스 학생동맹·청소년단체인 히틀러 유갠트 등 조직의 교묘한 활동으로 당세(黨勢)는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한편 반대 세력은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의 공동 투쟁을 거부함으로써 나치스 반대를 위한 통일된 조직을 가질 수가 없어 결국 파시즘의 지배를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히틀러[편집]

Adolf Hitler (1889

1945)

오스트리아의 브르노에서 세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가를 지망하여 빈에 나왔으나 입시에 낙방하여 화공(畵工) 또는 부랑자로 지냈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육군 하사로 참전하여 부상으로 입원중에 독일혁명을 겪었다. 1919년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하여 이를 나치스당으로 발전시켜 당수(黨首)가 된다. 1923년 뮌헨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투옥, 거기서 『나의 투쟁』을 썼다. 천재적인 웅변과 지도력으로 당세를 확장하여 1933년 수상, 다음해엔 힌덴부르크의 뒤를 이어 총통(總統)이 되고, 독재권을 확립하였다. 베르사유 체제를 타파하고서 독일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끌어 연합군에 패배한 뒤 1945년 베를린에서 자살하였다.

게슈타포[편집]

Gestapo

독일 나치스 정권하의 비밀국가경찰. 독재체제의 강화를 위한 국가권력기구로 나치즘 테러 지배의 중핵조직(中核組織)이었다. 1933년 4월 프로이센의 내무장관으로 취임한 괴링이 창설했으며, 국회방화사건 등의 음모와 요인체포를 위해 비밀리에 활동했다. 1934년 이후, SS(나치친위대) 대장 히믈러의 지휘하에 조직을 확대했다. 게슈타포의 임무는 모든 법적 규제를 초월하여 국가에 대하여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의 수사와 단속을 하는 데 있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사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탄압, 자유주의자와 교회의 감시, 유대인의 추방과 학살 등의 테러행위, 잔학한 고문과 강제 수용 등 나치스 체제의 확립을 위해 활약하였다. 이러한 게슈타포의 테러 지배로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전유럽이 독일군 점령지로 확산되었다.

국회방화사건[편집]

國會放火事件

선거를 3월에 맞는 1933년 2월 27일에 일어난 국회화재사건을 말한다. 임박한 총선거에서 반대 세력의 진출을 두려워한 나치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과 기타 정당을 탄압하는 데에 이용하였으나 그 진상은 나치스가 계획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파시스트당[편집]

-黨

무솔리니를 지도자로 하여 1919년 극단적인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와 침략주의자가 조직한 ‘이탈리아 전투자단(戰鬪者團)’이 파시스트(Fascista)당의 모태(母胎)이다. 그들은 18세 이상의 보통선거권 소유, 8시간 노동, 최저임금제, 노동자의 경영참여 등 급진적인 강령을 내세워 동요하는 중소시민, 특히 귀환병사(歸還兵士)·교원 등의 대자본가·노동자에 대한 반발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또 당시의 혁명적인 기운을 두려워하는 자본가와 지주 및 군부의 지원을 받아 1920년 이후 급속하게 성장해 갔다. 1920년 9월 노동자의 공장 점령에서 보는 바와 같은 급진적 운동에 대하여 파시스트는 폭력적 수단으로 진압하였다. 당원도 늘어나 1921년 11월 ‘국민 파시스트당’으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강령도 개정하여 사회주의 반대, 자유경제 지지를 명백히 하고, 로마로 무장 진군하여(1922) 그 해에 정권을 잡게 되었다. 특히 파시즘의 어원은 이 당에서 유래한다.

무솔리니[편집]

Benito Mussolini (1883

1945)

포를리주(州)의 프레답피오에서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났다.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원을 지내다가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전을 주장하여 사회당에서 제명을 당하고 1919년 파시스트당의 모체(母體)인 ‘이탈리아 전투자단’을 결성한다. 쿠데타에 의하여 정권을 획득(1922)하고 독재정치를 행하여 독일과 함께 침략전쟁으로 나아간다. 빨치산에게 체포되어 코모 호반(湖畔)의 동고에서 총살되었다(1945).

에티오피아 침략[편집]

-侵略

공황(恐慌)으로 인한 세계적 혼란과 나치스의 대두 등으로 국제 긴장이 격화되는 기회를 틈타서 일어났던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입 사건(1935). 에티오피아가 즉시 국제연맹에 제소하여 국제연맹은 대이(對伊) 경제 봉쇄를 실시하였으나 석유를 금수(禁輸)에서 해제한다는 등 약한 것으로서, 결국 이탈리아의 행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1936년 5월 에티오피아를 합병하게 되지만, 에티오피아의 게릴라전으로 시달림을 받는다.

베를린·로마 추축[편집]

-樞軸

1936년 파시즘 국가인 나치스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 맺어진 우호제휴관계(友好提携關係)이다. 양국은 오스트리아와 발칸에의 진출을 두고 대립하였으나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침략에 의하여 영국·프랑스·소련과 대립했기 때문에 독일에의 접근을 기도하였고, 또 독일도 영국과 프랑스·소련의 포위망 형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에스파냐 전쟁을 계기로 양국은 제휴를 깊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