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러시아 혁명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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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의 배경〔槪說〕[편집]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1890년대에 이르러 급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차리즘은 제국 전체의 균형적인 발달을 고려하지 않고 왕실의 이익을 중심으로, 특히 프랑스 등 외국 자본의 도입을 도모함으로써, 공업화로 인하여 아무런 법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은 채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한 임금노동자 계급(賃金勞動者階級, 프롤레타리아트)과 구체제(舊體制)의 미르(농촌공동체)에 방치된 영세 농민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운동도 격화하고,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혁명의 길을 주창하는 플레하노프, 레닌 등에 의하여 1898년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이 결성되어, 소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전위(前衛)가 되었다. 1903년 이 당은 분열되어 프티부르주아적 개량주의를 주장하는 멘셰비키는 배제되고 볼셰비키가 주류(主流)가 되어 혁명운동이 진행되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로 시작하는 제1혁명에서, 10월 선언(宣言)으로 의회(議會)의 개설이 약속되어, 다음해에 부르주아 의회인 두마가 성립되었으나 역시 무력하여 차리즘, 특히 스톨리핀의 보수 정치에 탄압되었다. 이에 대해 1905년 각지에 소비에트를 설립한 사회민주노동당은 조직화된 세력으로 반체제 운동을 착실히 계속하여 혁명을 준비했다.

피의 일요일[편집]

血-日曜日

1905년 1월 23일(舊曆 1월 9일)의 일요일, 러·일전쟁(露日戰爭)에의 전비(戰費) 조달 등으로 궁핍했던 14만 명의 노동자는 신부(神父) 거폰(실은 황제의 어용 운동가이다)에게 인솔되어, 식량의 보증 등 민중의 절박한 요구를 황제에게 청원하기 위하여 조용한 데모를 전개했다. 데모 대열이 페테르부르크의 동궁광장(冬宮廣場)에 당도했을 때, 군대의 발포를 받아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때문에 노동자 사이에 아직 강하게 남아 있던 황제에 대한 신뢰감이 급속도로 냉각되고, 대신 심각한 증오와 분노가 일어나서 노동자에게는 저항의식이 높아지고 그날 중으로 재빨리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 제1차 혁명이 시작되었다.

전함 포툠킨의 반란[편집]

戰艦-反亂 1905년 6월 14일 러시아 황제의 흑해 함대(黑海艦隊) 소속 전함 ‘포툠킨’ 호가 노동자 파업에 호응하여 오데사에서 반란을 일으켜, 11일간 함(艦) 위에서 저항한 끝에 실패한 사건. 이 반란은 초지일관(初志一貫) 리더십의 결여로 인해 해상에서 연료·식량이 떨어져 황제측에 투항함으로써 짧은 기일로 끝났으나, 황제의 군사적 지주이며 국가의 치안을 지켜야 할 군대가 국민측에 가담한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10월선언[편집]

十月宣言

1905년 10월, 제1혁명이 전국적으로 고조됨을 수습하기 위하여 니콜라이 2세가 발포한 칙령(勅令)이다. 입헌군주정(入憲君主政)을 약속한 것으로, 내용으로는 사상·집회·결사의 자유, 입법권을 가진 의회의 개설, 투표권의 확장 등을 포함하고 있다.

니콜라이 2세[편집]

Nikolai Ⅱ, Aleksandrovich Romanov (1868

1918, 재위 1894

1917)

러시아 최후의 황제. 1894년 부(父) 알렉산드르 3세의 뒤를 이었는데, 정치적 능력은 부족했다. 혁명 운동의 탄압에 힘쓰고 스톨리핀의 보수 정책으로 제정(帝政)은 일시 연기되었다. 그러나 1917년의 혁명으로 퇴위(退位), 다음해에 총살되었다.

두마[편집]

Duma

러시아의 의회(議會). 1905년 10월 선언(宣言)에 의해 개설(開設)이 약속되어, 다음 해 4월에 개회(開會)하였다. 1917년 2월 혁명까지 4회 선출되었다. (1) (1906. 4∼1906. 7) 정원 478명 중 입헌민주당(立憲民主黨)이 179명으로 제1당이 되어 제2당의 노동당 94명과 합세하여 반정부적 색채가 짙었고, 또 정부가 금지한 토지문제를 논의하여 강제 해산당했다. (2) (1907. 2∼1907. 6) 노동당 104명, 입헌민주당 98명, 사회민주노동당(社會民主勞動黨) 65명,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 37명이었는데, 의원(議員)의 연령도 젊고, 반정부적이었으므로 스톨리핀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3) (1907. 11∼1912. 9) 새 선거법에 의한 결과, 입헌 민주당이 52명으로 줄고, 좌파(左派)도 합계 31명밖에 안되었으며, 극우당(極右黨)이 171명으로 되었다. 특히 10월 당계(黨系)가 113명으로 되어 어용(御用)국회가 되었는데, 스톨리핀은 이것을 배경으로 농업개혁을 단행하였다. (4) (1912. 11∼1917. 2) 국내의 혁명적 풍조를 반영, 정부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반정부적인 색채가 강화되었다. 2월혁명 때에는 국회내 자유주의 그룹을 중심으로 하여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가 기도되었고, 그후는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지배하였으나, 소비에트 권력의 증대와 함께 소멸하였다.

미르[편집]

Mir

러시아 농촌공동체. 농민 보유지(保有地)는 관습을 좇아 일정 기간씩 재분할하여 경작해 왔으므로, 납세에 대해서 농민은 연대 책임을 졌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農奴) 해방 때 토지 공유(共有)의 새로운 주체로서 미르가 채용되었는데, 동시에 행정의 최말단에 재편되었다. 그러나 그 법제적(法制的) 근거가 1906년 스톨리핀의 농지개혁법으로 상실되어, 토지의 사유제(私有制)가 진전되고, 다른 면에서는 몰락 농민이 된 임금노동자계급(賃金勞動者階級)이 사회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나로드니키는 미르에 의거하여 사회 혁명을 달성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스톨리핀[편집]

Pyotr Arkadievich Stolypin (1862

1911)

러시아의 정치가. 페테르부르크 대학 졸업 후 관계(官界)에 들어가 1906년 제1국회가 해산되던 날 수상이 되어, 이후 사실상 독재자로서 철저한 반동(反動) 스톨리핀 시대를 전개하고, 언론의 억압, 노동운동의 탄압, 군사재판에 의한 사형의 남용 및 극도의 선거간섭을 하였다. 1907년 반정부적이던 제2국회를 해산시키고, 국회의 협찬없이 신선거법을 발포하여 국회를 어용국회로 만들었다. 그동안 그는 1906년에 농업개혁을 실시하고, 자작농을 창설함으로써 이를 혁명의 방파제로 삼으려 하였다. 그 결과 부농(富農)이 증가한 반면 프롤레타리아화한 빈농이 속출하고 새로이 부농과 빈농의 대립이 심해져 혁명 세력을 증대시켰다. 1911년 암살되었다.

라스푸틴[편집]

Grigorii Efimovich Rasputin (1872?∼1916)

제정 러시아 말기의 수도사로서 궁정의 막후인물. 시베리아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청년시절에는 말도둑이었으나 30대에 한 종교분파에 가입해 각지의 수도원과 성지를 편력, 기적을 행하는 예언가로서 신자를 얻었다. 농민들 사이에서 성자(聖者)라는 평판을 얻고, 1905년에 궁중에 들어가 그의 ‘예언’과 ‘기적’으로 세력을 얻었다. 특히 황태자의 난치병을 기도로 치료하여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리아의 신임을 얻어 정치에도 간섭하게 되었다. 그후 그의 생활은 방종으로 흘렀고 정계와 재계의 우익세력은 그를 자신들의 정치목적에 이용했다. 궁정을 둘러싼 이러한 음모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더욱 두드러져 제정의 붕괴를 촉진했다. 그는 점차 종교는 물론 외교와 내치에도 관여하여 몇몇 황족과 귀족들은 그를 암살하려는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제정붕괴를 2개월쯤 남기고 암살하였다. 그는 제정 말기의 궁정정치의 부패와 혼란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