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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5·4운동과 국민당의 통일〔槪說〕[편집]

제1차 세계대전중에 구미(歐美) 열강(列强)의 중국 침략이 후퇴하자 중국에서는 민족자본이 발전하여 자본가와 노동자가 성장하였다. 그러한 정세에 있어서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 리다자오(李大釗), 루쉰(魯迅) 등이 대표하는 신문화운동이 태동하였다. 그들은 잡지 『신청년(新靑年)』으로 봉건사상을 배척하여 민주와 과학을 표방하고 낡은 문체를 비판하여 구어(口語)에 의한 표현을 주장하였다. 1915년 일본은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내어 중국에 있어서 이권을 강제로 승인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을 처리하는 파리강화회의에서도 일본의 이 요구는 일부가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민족의 위기에 눈뜨고 있었던 중국의 지식인을 비롯한 전국민이 강력한 반일운동(反日運動)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5·4 운동인 것이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중국의 혁명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되어 1921년에는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었다. 한편 북쪽의 군벌정부(軍閥政府)에 대립하여 광둥(廣東)에 국민당 정권을 조직하고 있던 쑨원(孫文)은 1924년 ‘연소(聯蘇)·용공(容共) 노동원조(勞動援助)’ 정책을 내걸고 중국공산당과 제휴하였다. 1925년에는 5·30사건이나 홍콩(香港)·광저우(廣州) 파업으로 대표되는 반제투쟁(反帝鬪爭)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의 배경에서 국공제휴(國共提携)를 기반으로 하여 국민혁명(北伐)이 행하여져 전국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상하이(上海)에서는 장제스(蔣介石)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서 난징(南京)에 국민정부가 세워졌다. 여기에서 국공(國共)을 분리하여 뒤에 공산당은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을 중심으로 그들 나름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천두슈[편집]

陳獨秀 (1880

1942)

잡지 『신청년(新靑年)』을 창간하여 신문화운동을 창도하였다. 러시아 혁명 후 급속하게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 중국공산당을 창당하여 총서기(總書記)가 되었다. 국공합작(國共合作)으로 국민혁명을 추진하였으나 장제스(蔣介石)의 쿠데타 때 우익(右翼) 기회주의자라 하여 총서기 직책에서 해임당하고 또다시 분파활동을 구실로 공산당에서 축출되었다.

후스[편집]

胡適 (1891

1962)

잡지 『신청년』에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를 발표하고 구어(口語)의 사용을 제창하여 문학혁신의 문을 열었다. 프래그머티즘을 방법으로 하고 은사인 듀이를 중국에 초청하여 ‘실험주의’를 선전하였다. 정치적으로는 개량주의자(改良主義者)로서 공산주의를 비판하였고 장제스의 정책을 지지하였다.

루쉰[편집]

魯迅 (1881

1936)

본명은 저우슈런(周樹人). 문화혁신, 특히 신문학운동의 지도적 인물이며 일본에 유학, 귀국하여 교육에 종사했다.

작가로서는 『광인일기(狂人日記)』로 봉건사상을 비판하였고 『아Q정전(阿-正傳)』을 써서 해방이 되지 않은 민중의 곤경을 호소하였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국민당 정부의 부패 등 시국 비판을 글로 표현하였고, 또 판화운동(版畵運動)의 추진자이기도 하다.

『신청년』[편집]

新靑年

1915년 상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에 의하여 창간되어 신문화운동과 현대사상의 계몽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잡지이다. 특히 ‘민주와 과학’을 표방하여 봉건사상에서 해방, 구어문(口語文)의 사용, 사실주의(寫實主義)에 의한 신문학의 건설을 제창하였다. 천두슈, 후스, 리다자오, 루쉰이 대표적 집필자였다.

대화 21개조[편집]

對華-個條

1915년에 일본 제국주의의 욕망을 드러낸 요구로 강렬한 배일운동(排日運動)을 불러일으켰다. (1) 산둥성(山東省)의 구(舊)독일 권익(權益)을 일본이 계승한다. (2) 뤼순(旅順)·다롄(大連)의 조차 기한(租借期限)을 다시 99년 연장하고,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서 일본인에게 토지조차권 및 영업권을 준다. (3)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를 일화(日華)가 합판(合辦)한다. (4) 중국 연안의 항만과 섬을 타국에 양도·대여하지 못한다. (5) 중앙정부의 정치·재정·군사 고문에는 일본인을 고용한다 등등이 그 주요한 골자이다.

5·4운동[편집]

-運動

1919년에 일어난 민중의 반제운동(反帝運動)이다. 일본이 1915년에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강제적으로 승인케 한 ‘21개조 요구’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당시부터 강한 반일(反日)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처리하는 파리회의에서 중국은 21개 조약의 취소와 독일의 산둥 이권(山東利權) 회수를 요구했으나 열강에 의하여 무시되고 산둥(山東)의 이권은 일본이 계승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베이징(北京)의 학생들이 5월 4일에 베르사유 조약 반대, 21개조의 철폐를 부르짖으며 데모를 하였고, 일부는 친일파 요인의 저택을 습격하였다. 상하이에서는 광범한 노동자와 상공인이 계속 파업을 결행하여 일본 제품을 보이콧하면서 ‘국화애용(國貨愛用)’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산업의 발전을 조장하였다. 이러한 운동의 확대는 체포 학생의 석방, 친일파 요인의 면직, 베르사유 조약의 서명 거부 등으로 낙착을 지어 대중운동이 결실을 맺은 데에 의의가 있다.

국민당[편집]

國民黨

봉건적인 군벌 지배(軍閥支配)에 대항하여 공화제를 확립하고자 한 중화민국 시대의 지도적인 정당으로서 청조(淸朝)를 타도하였다.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는 그 후의 개혁을 ‘의회’에 맡기게 되어 위안스카이가 영도하는 공화당에 대립하는 국민당으로 발족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위안스카이가 탄압하게 되자 쑨원(孫文)은 재차 일본에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반제(反帝)·반봉건(半封建)의 5·4운동으로 혁신의 기운이 높아져서 중화혁명당도 중국국민당으로 바꾸어 공산당과 제휴하여 군벌정권 타도를 목표로 한 북벌(北伐)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 후 장제스(蔣介石)가 상하이에서 반공(反共) 쿠데타를 감행하여 국민당은 그가 영도하는 정당으로 시종일관하게 되었다.

중국공산당[편집]

中國共産黨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초로 하여 결성되었으며 현재 중국의 지도적인 정당이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각지에 공산주의 연구 클럽이 생겨 1921년에는 코민테른의 원조를 얻어 이들 클럽의 대표자가 상하이(上海)에 모여 중국공산당을 창당하였다. 1922년과 1923년 대회에서 ‘당면한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규정에 의하여 ‘국민당과의 제휴’가 결정되어 봉건 군벌을 타도하는 북벌(北伐)이 실시된다. 그 중에도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데타로 국공(國共)은 또다시 분열하였으며, 공산당은 독자적인 군대로 토지개혁을 추진하고 1931년에는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을 중심으로 하여 소위 그들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그 후 국민당 정부의 수차에 걸친 토공작전(討共作戰)에 쫓기어 1934

1935년에는 근거지를 산시성(陜西省)·옌안(延安)으로 옮겼다. 1936년에 시안(西安) 사건을 실마리로 재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형성, 항일민족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종전 후 공산당은 강력해진 공산군을 배경으로 국민당과 대결하여, 이윽고 1949년 10월에 중국 전토를 석권하고 중공정권을 수립하였다.

국공합작[편집]

國共合作 (제1차)

1924년 1월 국민당 제1회 전국대표대회에서 행해졌다. 소련대표 요페가 쑨원(孫文)과 만나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제휴가 필요함을 강조한 데 대하여, 쑨원도 공산당의 국민당 가입을 인정하기로 하고, 1924년 1월 연소(聯蘇)·용공(容共)·부조농공(扶助農工)의 3대정책을 결정하여 공산당원이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당의 지도권 장악이 목적이었던 공산당은 그것이 여의치 않음을 깨닫자, 국민당 좌파(左派)를 꾀어 우한정부(武漢政府)를 세웠고, 이어서 세워진 난징정부(南京政府)와도 대립하였다. 그러나 우한정부도 점점 반공(反共)적으로 기울어져 1927년 7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결별함으로써 제1차 합작은 끝나버렸다.

5·30운동[편집]

-運動

1925년 5월 30일 상하이(上海)에서 일어났던 반제운동(反帝運動). 5월 14일 상하이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방적공장에서 노동자 스트라이크가 일어났을 때 일본인 경영자가 수십 명의 노동자를 살상하였다. 5월 30일 학생을 중심으로 한 군중이 이에 항의하여 조계(租界)에 밀어닥쳤는데 조계의 경찰이 발포하여 다시금 십수 명의 사상자를 낸 것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일 상하이에는 학생·상인·노동자 총파업이 실시되고 전국 각지에서 지원 파업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6월 7일에는 상하이에서 반제운동을 지도하는 공상학연합회(工商學聯合會)가 조직되어 각계층을 통일하는 반제운동 연합체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북벌[편집]

北伐

신해(辛亥) 혁명 이래 광둥(廣東)에 물러나 혁명정부를 수립한 쑨원(孫文) 등이 북방의 군벌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전쟁(1925

1928)을 말하는데, 특히 쑨원의 사후, 1926∼1928년 장제스(蔣介石)에 의하여 실행된 토벌이 가장 유명하다. 보통 북벌이라 함은 이를 가리킨다. 1925년 7월 국민 혁명군 총사령으로 취임한 장제스는 쑨원의 유지(遺志)를 따라 북벌을 시작했는데(제3회 북벌), 종전의 실패와는 반대로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국민 혁명군의 깃발)가 가는 곳마다 거의 무인지경을 지나듯 삽시간에 후난(湖南)·장시(江西)의 각 도시를 점령하고 양쯔강의 선에 진출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혁명 후의 지도권이 장제스에게 장악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국민당 좌파와 손잡고, 우한(武漢)정부를 세워 장제스의 난징(南京)정부에 대항했다. 또 장제스가 난징을 점령할 때에 난징사건이 일어났는데, 공산당의 책략임을 알게 되어, 일시 북벌을 중지하고 공산당을 탄압했다. 1927년 4월부터 북벌을 계속하다가 일본의 산둥(山東)출병으로 방해를 받았지만, 1928년 3월 다시 북벌을 선언하였다. 일본의 제2차 산둥 출병으로 지난(濟南)사건을 일으켰으나, 그대로 북벌을 계속 당시 북방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쭤린(張作霖)을 쫓아내고 베이징(北京)을 점령, 6월에 쑨원의 묘전에 북벌의 완성을 보고하였다.

난창봉기[편집]

南昌蜂起

1927년 8월 1일 장시성 난창(南昌)에서 일으킨 최초의 무장봉기. 1927년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후 우한정부(武漢政府)에서 이탈한 중국 공산당은 북벌 이후에 주도권 장악이 불명확하자 저우언라이(周恩來)·탄핑산(譚平山)·장궈타오(張國燾)·리리싼(李立山) 등의 지도하에 주더(朱德)·허룽(賀龍)·예팅(葉挺)이 지휘하는 부대 3만여 명을 동원하여 국민당의 반공정책에 대항하는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의 호응없이 일어난 이 봉기는 한때 난창을 제압하여 혁명위원회를 설치했으나, 당시 국민당 부대가 강대하여 4일 만에 난창에서 쫓겨나 광저우(廣州)로 철수하였다. 난창봉기의 실패로 중국 공산당은 큰 타격을 받았지만, 처음으로 공산당군이 성립된 날로, 이후 8월 1일을 건군기념일(建軍記念日)로 정하였다.

장제스[편집]

蔣介石 (1886∼1975)

전 중화민국의 총통. 자는 중정(中正), 저장성(浙江省) 출신. 1907년 일본의 육군 사관학교에 유학하였다.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가입하고 후에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참가하였다. 쑨원에게 발탁되어 광둥(廣東) 국민당 군정부의 참모장이 되고 소련 유학 후에 황푸군관학교(黃捕軍官學校) 교장이 되었다. 국공합작 때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북벌을 하던 도중 상해에서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정부(南京政府)를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 북벌을 감행하였으며, 중국국민당과 중화민국의 강력한 지도자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겪으면서 재차 국공합작을 이루었으나 종전 후 본격적인 내전(內戰)에 패배하여 대만으로 물러나는 몸이 되었다.

국민정부[편집]

國民政府

쑨원이 없는 광둥정부(廣東政府)는 그 조직을 개편하여 국민정부라 하고 공산당과 제휴하여 봉건 군벌을 타도하고자 북벌을 감행하였다. 군사위원회의 수석인 장제스는 좌파(左派)의 대두를 막기 위하여 상하이에서 반공 쿠데타를 일으켰다. 우한(武漢)에 옮겨가 있던 국민정부는 장제스를 제명하였으나 그는 난징(南京)에서 별도의 정부를 수립하여 대항했다. 우한의 국민정부는 정책의 차이로 국공(國共)이 분열하여 당시 국민당원의 대부분은 난징 정부에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