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청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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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성립〔槪說〕[편집]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분할의 위기를 자각한 지배계급 내부의 개명인사의 개혁운동(戊戌의 變法)이 실패하고, 광범한 민중을 조직한 의화단의 격렬했던 반제투쟁(反帝鬪爭)이 열강의 무력에 의하여 진압된 데서부터 중국의 20세기는 시작된다. 이후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철저하게 되고 청조(淸朝)의 제국주의에의 의존성(買辦性)은 한층 노골화되어 갔다. 세력 범위를 정하고 조차지(租借地)까지도 획득하고 있던 열강은 팽대한 의화단 사건 배상금의 담보로서, 관세·염세(鹽稅) 그 위에 내국관세 관리권(內國關稅管理權)까지 장악하고, 청조의 명맥을 완전히 지배했다. 최대의 탄갱(炭坑) 카이핑(開平)을 영국에게 빼앗기고, 한치평(漢治萍)의 철·석탄은 차관(借款)으로 일본에게 지배되었으며, 동북의 보고(寶庫) 만주는 러시아에게 점령되어,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외인 기업은 중국 민족산업을 압도했다.

청조는 시기가 늦었으나 1900년 이래 실업장려·과거폐지·입헌제 준비 등 일련의 소위 신정(新政)을 실시하여 부르주아지 상층을 회유하려 했다. 자의국(諮議局:省議會의 예비기관) 등의 설치로 변혁을 요구하는 세력을 분열시키고 한편으로는 신식군대(신군)를 편성함으로써 고조되는 혁명 운동에 대처하려 한 것이다. 이상의 여러 가지 ‘신정(新政)’ 경비는 거액의 배상금과 함께 농민 등 근로 대중으로부터 신세(新稅)·부가세 증세(增稅) 등으로 충당되었다. 각지의 민중은 쌀 소동이나 반세소동(反稅騷動)으로 일어나고, 지식인들도 입헌운동과 더불어 이권회수 운동(광산·철도 등의 경영권·부설권의 탈취)이나 외국 상품 배척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1905년에는 쑨원(孫文)의 지도하에 혁명 세력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중국혁명동맹회는 개량파(改良派)와 이론 투쟁을 하면서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결행한다. 청조는 외국 차관으로 자기의 권력 유지를 기도하고, 1911년에는 담보로 하기 위한 간선철도 국유령(幹線鐵道國有令)을 발포하여 그 매판성을 폭로함으로써 신해혁명을 유발했다. 회유되고 있던 부르주아지에게도 호응을 받지 못하여 1912년에 청조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발족한다.

쑨원[편집]

孫文 (1866

1925)

중국의 민족주의적 민주주의 혁명의 지도자. 중화민국 건설자. 자는 일선(逸仙), 중산(中山)이란 호를 썼다. 광둥성(廣東省) 샹산현(香山縣:현재 중산의 농가) 출신. 하와이, 홍콩에서 학문을 닦고 의사 개업. 어릴 때부터 태평천국의 지도자인 홍수전(洪秀全)을 숭배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청·일전쟁 후 청조 타도를 목표로 하는 혁명 단체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했다. 무장 봉기에 실패한 후에는 유럽·미국·일본에 망명, 그 사이에 혁명 이론인 삼민주의(三民主義)를 형성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 총리가 됐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귀국한 다음해에 임시 총통이 됐으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양위한다. 그 후에도 북방의 군벌 정권에 반대, 혁명운동을 계속하여 1919년에 중국국민당을 조직하고, 1924년에는 국공합작과 농민·노동자들의 결합을 강화했다. 1925년, 회담 때문에 가 있던 베이징에서 “혁명은 아직까지 성공하지 않았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했다.

삼민주의[편집]

三民主義

쑨원이 제창한 중국 혁명의 이론으로 국민당의 강령. 민족·민권·민생주의로 되어 있다. 당초의 민족주의는 청조 타도, 민권주의는 민주공화제, 민생주의는 지권평균(地權平均:地價 상승 부분을 국가에서 흡수)을 내용으로 하는데 구삼민주의(舊三民主義)라 불린다. 국공합작 때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민생주의는 ‘밭갈이 하는 자에게 밭을’이라는 토지개혁의 의의를 갖는 것으로 발전하여 신삼민주의라고 불리듯 쑨원의 사상적 성장을 보여준다.

랴오중카이[편집]

廖仲愷 (1877∼1925)

중국의 혁명가이자 국민당 원로, 랴오청즈(廖承志)의 아버지. 쑨원(孫文)의 정치공작에 참가하였으며,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했다. 신해혁명 후 광둥도독부(廣東都督府)의 총참의(總參議)가 되었다. 쑨원의 광둥군정부에 참가하여 재정부차장,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광둥대원수부 비서장, 당공인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국민당 좌파의 대표적 중심인물로 1925년 8월 20일 광저우에서 우파에게 암살당했다.

흥중회·광복회·화흥 회[편집]

興中會·光復會·華興會 청조타도를 목적으로 한 각지의 혁명 단체.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에 결집한 흥중회는 쑨원이 1895년에 조직하고 광둥을 중심으로 활동, 재삼 무장 봉기를 되풀이했으나 실패했다. 광복회는 채원배(蔡元培)·장빙린(章炳麟)이 조직하고 저장(浙江) 지구가 중심이었다. 전신인 애국학사(愛國學社)는 『소보(蘇報)』를 발행하여 청조를 공격, 추용(鄒容)의 혁명군을 소개하고 탄압받았다. 화흥회는 황싱(黃興)·쑹자오런(宋敎人) 등 후난(湖南) 출신자가 조직했다. 1906년 노동자를 결집하여 대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중국혁명동맹회[편집]

中國革命同盟會

청조 타도를 목적으로 한 혁명 세력의 통일 조직. 1905년 도쿄에서 흥중회·광복회·화흥회가 단결하여 발족했다. 총리는 쑨원, 부총리는 황싱, 간사는 쑹자오런(宋敎人).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하고, 기관지 『민보(民報)』로 혁명 사상을 고취, 무장 봉기를 조직하여 신해혁명을 가져왔다. 청조 타도의 당면 목표 달성 후 국민당이 결성되었으나, 혁명의 성과를 군벌에게 빼앗기게 됐고, 그 후 1919년 중국국민당이 된다.

러·일 협약[편집]

露日協約 (1909

1917)

러·일전쟁 후에 러시아·일본이 상호 이익 보호를 위하여 맺은 협약. 중국에서의 러시아·일본 양국의 권익 존중과 기회 균등, 세력 범위 확정과 불가침, 중국의 영토 보전을 약속한 것. 이에 의하여 러시아의 발칸·외몽골 진출, 일본의 동아시아, 특히 한국에의 진출이 상호 보증되어, 20세기 초두에는 영·일동맹(英日同盟)과 함께 일본 외교의 주축이 된다. 1910, 1912, 1916년에 개정, 강화되었으나 러시아 혁명으로 파기되었다.

선통제[편집]

宣統帝 (1906

1967, 재위 1908

1912)

청조 최후의 황제, 만주국의 강덕제(康德帝, 재위 1934

1945). 이름은 푸이(溥儀), 선통은 연호. 3세로 숙부 광서제(光緖帝)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신해혁명으로 퇴위, 1917년에 복위(復位)하려다 실패했으며, 1932년 일본군에게 옹립(擁立)되어 만주국을 집정, 이어 황제가 되었다. 1945년 일본 패전과 더불어 전범(戰犯)으로서 소련에 억류, 도쿄 재판 증인으로 출정하기도 했다. 후에 중공군에게 인도되었다가 1959년에 석방되고, 1964년에는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이 되었다. 만년에는 식물원 근무, 사료 편찬 등에 종사했다.

위안스카이[편집]

袁世凱 (1859

1916)

청말·민국 초기의 군벌 거두(巨頭).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 허난성 향신(鄕紳)의 아들. 이홍장(李鴻章)에게 중용되어, 청조 대표로서 조선의 내치(內治) 외교를 지배했으며, 청·일전쟁 후에는 양식 군대(洋式軍隊:新軍)의 훈련을 담당했다. 무술변법을 배반하여 서태후의 신임을 얻고, 의화단 진압과 외인 보호에 노력하는 등 청조와 열강을 위하여 견마지로(犬馬之勞)했다. 이홍장이 죽은 후, 직예총독(直隸總督)이 되어 마음내키는 대로 위세를 떨쳤으나 후에 물러났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수상으로서 출마, 자기가 배양한 무력을 배경으로 혁명파와 흥정하고 청조를 위협(威脅), 선통제의 퇴위와 함께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고, 신해혁명의 성과를 가로챘다. 다시 쑹자오런을 암살하여 제2혁명을 유발했다. 1913년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 1915년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듬해에 병사했다. 그의 후계자는 북양군벌(北洋軍閥)로서 제국주의에 종속돼 있으면서도 정권쟁탈을 일삼았다.

북양신군[편집]

北洋新軍

청조 말기에 창설된 신식 군대로서 북양군벌의 기반. 청일전쟁 후 이홍장의 명령으로 '신건육군(新建陸軍)'이 설치되어 위안스카이가 훈련을 담당하였고, 1906년에는 6진(鎭:사단)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위안스카이의 사병적(私兵的) 존재로서 그는 이것을 정치 자본(政治資本)으로 삼아 민국의 초대 대총통이 되었다. 위안스카이 이후 부하인 돤치루이(段棋瑞)·펑궈장(馮國璋)·우페이푸(吳佩孚)·차오쿤(曹?) 등은 베이징이나 지방에 할거하여 ‘중화민국’ 정권을 독점하고, 영·일 제국주의(英日帝國主義)에 종속, 남방의 혁명파와 대립했다.

철도 국유문제[편집]

鐵道國有問題

1911년 청조는 재정 개혁·실업 진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간선 철도 국유령을 발포했으나 이것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네 나라의 차관단(借款團)에게 600만 파운드의 차관에 대한 담보로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외인 경영·관영의 것을 고심해서 회수하여 민영화(民營化)했을 뿐인만큼, 이 매국적인 조치는 민족자본가 외에도 광범한 대중의 분격을 불러일으켜서 쓰촨성 등 전국 각지에서 격한 반대 투쟁(保路運動)이 전개되고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우창신군 봉기[편집]

武昌新軍蜂起

1911년 신해혁명의 발단이 된 후베이성(湖北省)의 성도(省都) 우창(武昌, 武漢)에서의 신군의 봉기. 우창의 신군 장교와 병사 중에는 혁명 사상을 품은 자들이 많아 문학사(文學史)·공진회(共進會) 등 비밀 조직을 만들고 있었는데, 신군의 일부가 철도 국유 반대 폭동 진압을 위하여 쓰촨(四川)으로 출동중, 10월 10일(음 8월 19일)에 봉기하고 우한삼진(武漢三鎭)을 장악, 여단장 리위안홍(黎元洪)을 군정부(軍政府) 도독(都督)으로 추대했다. 이 소식이 전국에 퍼지자 각지에서 혁명 세력이 봉기, 청조가 멸망하게 되었다.

신해혁명[편집]

辛亥革命

1911년(辛亥年)에 일어나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시민 민주주의 혁명(1911

12). 1911년 10월 10일에 우창의 신군이 봉기하자 1개월 사이에 남방을 중심으로 하는 16성(省)이 호응하여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1912년 1월 1일 쑨원이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혁명 정부는 힘이 모자라므로 수상 자격으로 청조의 실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와 타협하고 공화제에 찬성, 임시 약법(約法)을 준수한다면 임시 대총통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준다고 해버렸다. 강력한 무력을 가진 위안스카이에게 위협을 받아, 2월 선통제가 퇴위함으로써 청조는 멸망했다. 3월,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다. 혁명파 쑹자오런은 국민당을 결성하고 의회 투쟁으로 위안스카이를 견제하려 했으나 위안스카이에게 암살되고, 위안스카이의 혁명파 배제, 탄압이 격화되는 가운데 제2혁명도 실패로 돌아가 혁명의 과실은 군벌과 관료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이것은 혁명파가 철저한 제국주의 반대·토지개혁의 강령만으로 농민대중을 결집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래의 전제왕조를 타도하고 아시아에 최초로 공화국을 출발시켜 정신상 공전(空前)의 대해방을 안겨준 의의는 크다.

중화민국[편집]

中華民國 (1912 ) 1911년의 신해혁명 후에 성립된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쑨원의 삼민주의에 기초를 두고 건국되어, 1912년 3월에 제정된 임시약법(臨時約法)을 가지고 발족. 곧 청조의 내각 총리대신 위안스카이는 쑨원으로부터 양도받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여 정국을 지배. 이후 그의 후계자인 북양군벌(北洋軍閥)이 베이징에서 정권을 장악했다. 혁명세력은 쑨원을 중심으로 광둥 등지에서 저항했으나, 반제국주의, 반봉건의 강령을 제기하여 국민을 결집시킬 수 없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19년의 5·4 애국운동, 1921년의 중국 공산당 성립 등은 쑨원의 사상을 발전시켜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으로 결실을 맺고, 그가 죽은 후 1928년에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에 의한 전국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7년에 국공합작이 깨지고, 국민당 정권의 매판화(賣辦化)가 진전됐다. 1937년 이후 항일전(抗日戰) 과정에서 재차 국공합작이 성립됐으나 전중국을 공산화하려는 공산당의 저항으로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본토를 버리고 타이완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임시 약법[편집]

臨時約法

중화민국의 일종의 잠정 헌법. 1912년, 혁명파의 임시 참의원에서 제정됐다. 참의원이 대총통의 권한을 체크하는 것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 ‘아시아 최초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헌법’으로서 평가된다. 1914년 위안스카이가 대총통 권한을 강화하는 ‘중화민국 약법(신약법)’을 발포하자 쑨원 등 혁명파는 구약법 회복을 위한 무력 투쟁을 전개, 당면한 목표를 여기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