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유엔과 전후의 세계/국제긴장의 격화와 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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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긴장의 격화〔槪說〕[편집]

미국과 소련의 팽창주의는 대전중에는 반(反)파시즘에 입각하여 일치하고 있었으나 전후의 처리를 놓고는 서로 대립하여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소련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계속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며 동유럽 여러 나라들을 자기의 위성국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1946년 3월 미국을 방문중이던 처칠은 ‘철의 장막’이라는 연설을 하고, 미국·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협력체제를 만들 것을 호소하였다.

1947년 3월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 독일의 강화문제를 놓고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명확해졌으며, 그리스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세력과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민주정부 사이에 치열한 내전(內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1947년 3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에서 만일 이 중대한 시기에 그리스와 터키를 원조하지 않는다면 동유럽은 물론 서유럽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고 하여 두 나라에 대한 4억달러의 원조를 요청하고 소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배경이 된 것은 당시 국무성 정책기획국장으로 일하고 있던 조지 케넌(G. F. Kennan)의 ‘봉쇄정책’이었다. 그는 미국의 권위있는 외교전문 계간지인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소련의 행동 원천(源泉)」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소련의 정치행동 목적은 무슨 틈바구니든지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침투해가는 데 있으므로 미국의 대소(對蘇)정책은 그와 같은 소련의 팽창 경향에 대해 장기적이고도 끈기있는, 그리고 확고하고도 주의깊은 ‘봉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 케넌의 사고방식은 결국 전후 미국의 세계정책상 기조(基調)를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본정책의 구체화는 조직적으로 국내적·국제적인 반공정책으로 나타났다. 마셜 계획의 수원체제(受援體制)를 갖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반소(反蘇)·반공열(反共熱)을 불러일으켜 각료 중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을 추방하였다. 유럽의 반공조직이 강화되자 소련은 1947년 7월 ‘몰로토프 계획’이라고 하는 소련 중심의 동유럽 경제부흥계획을 시작하고, 9월에는 동유럽 여러 나라와 프랑스, 이탈리아를 포함한 9개국 공산당 대표들이 모여 ‘코민포름’을 결성하였다.

1948년 4월의 ‘베를린 봉쇄’는 미소간의 냉전을 극단화시켰으며, 1949년 4월 유럽에 대(大)반공진영을 결성하기 위해서 북대서양조약기구가 구성되었다. 소련은 나토에 대항하기 위하여 동유럽 여러 나라 사이에 6개의 2국간 우호상호원조조약(友好相互援助條約)을 체결하고, 이 소련의 세력권은 1955년에 바르샤바 조약기구로 발전하였다.

1949년 9월 소련의 원자폭탄 보유가 발표되고 10월에는 중공(中共) 정권이 나타나 1950년 2월 중·소 우호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아시아에도 동서긴장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동서간의 냉전은 1950년 6월의 한국전쟁으로 열전화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한국 민족에게 안겨주었다. 이러한 동·서 진영간의 냉전은 1961년 쿠바위기를 고비로 서서히 해빙되어 미국은 소련 및 중공, 동구권에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서독 또한 동독 및 동구권과 접근하여 냉전체제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수에즈 전쟁, 키프로스 사태, 베트남 전쟁, 중동전쟁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구식민종주국에 대한 민족해방 투쟁 등의 분규는 지구상에서 그칠 날이 없다.

철의 장막[편집]

鐵-帳幕

제2차 대전이 끝난 다음해인 1946년 3월 5일 미국을 방문중이던 처칠이 풀턴(Pulton)시에 있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er) 대학에서 연설할 때, 소련의 외교정책이 비밀주의(秘密主義)란 것을 풍자한 말이다. 이 연설에서 처칠은 “이제 발틱해(海)의 슈테틴(Stettin)으로부터 아드리아해(Adria 海)의 트리에스테(Trieste)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철(鐵)의 커튼이 유럽 대륙을 횡단하여 내려지고 있다”라고 말한 이래 이 말은 유행어가 되었다. 이 연설은 이어서 “이 철의 커튼을 넘어서 유럽에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한 각지의 공산당 제5열의 행동은 문명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기 때문에 민주 제국(諸國), 특히 앵글로색슨인들은 굳은 단결을 필요로 한다”고 경고하였다. 소련은 이에 대하여 맹렬한 반발을 보였으며, 전쟁 후 1년도 채 못되어 영국·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분명히 표면화되었다.

모스크바 외상회의[편집]

-外相會議

1947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 외상회의. 이 회의에서는 독일·오스트리아의 배상문제와 강화조약에 관해서 토의되었지만 아무런 합의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미·소의 의견대립이 극단화되었다. 따라서 독일의 분단을 준비하는 결과가 되었다.

트루먼 독트린[편집]

Truman Doctrine

1947년 3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발표한 외교정책의 원칙. 이는 공산주의의 확대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유주의적 정치제도를 유지하려는 나라에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주려는 것이다. 먼저 영국이 지원해주던 그리스와 터키에 영국을 대신하여 원조를 주었다. 이 원칙은 반공정책과 대(對)소련 봉쇄정책으로 전개되었다.

마셜 계획[편집]

Marshall Plan

1947년 6월 미국 국무장관 마셜이 제창한 유럽 경제부흥 계획의 속칭. 전쟁으로 황폐한 서유럽 제국의 경제부흥을 돕기 위하여 미국측에서 경제협력국(經濟協力局), 서유럽측의 프랑스·영국·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노르웨이 등 16개국이 참가하여 유럽 경제협력기구가 조직되었다. 1948년 4월에서 1952년 1월 사이에 미국은 122억 달러를 원조하였다. 이 계획에는 트루먼 독트린에 근거를 둔 서유럽의 경제적 안정을 통한 대소방벽화(對蘇防壁化) 의도와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미국자본의 시장요구라는 일면도 있다.

코민포름[편집]

Cominform

Communist Information Bureau의 약칭. 1947년 9월 바르샤바에서 소련 공산당 주창 아래 유럽에 있는 9개국 공산당이 참가하여 창설한 공산주의 국가의 정보국. 참가국은 소련을 중심으로 체코·불가리아·루마니아·헝가리·폴란드·유고·프랑스·이탈리아의 9개국으로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의 반공체제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행동의 통일, 경험·정보 교환, 활동의 조정을 위하여 코민포름을 설치할 것을 정하였다. 이들은 마셜 계획을 미국의 확장정책의 일부라 비난하고, 1948년 6월에는 유고 공산당을 제명하여 반소적(反蘇的)이고 민족주의적이라고 비난하였다. 1956년 4월에 해산될 때까지 세계 각국의 공산당에 대해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냉전(冷戰) 초기 단계에서 갖는 의의가 컸다.

베를린 봉쇄[편집]

-封鎖

1947년 12월 런던의 4개국 외상회의의 결렬로 독일의 통일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미·영·불 3개국은 그들의 점령지구에 독자적인 독일 정부를 수립하여 서유럽에 가담시킴으로써 소련에 대항하는 서방측의 군사력과 공업력을 강화시키려는 기본방침을 세워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소련은 이것을 4개국 협정위반이라고 비난하면서 1948년 3월 독일 관리이사회에서 퇴장하고 4월 1일부터 서부 베를린을 출입하는 철도·도로의 교통을 제한하게 되었다. 베를린 봉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통화개혁이었다. 이 문제는 이사회에서도 오랫동안 난항을 거듭하였으나 서방측은 6월 18일에 화페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즉시 소련측은 구(舊)화폐의 유입을 저지하기 위해 동서 독일의 교통을 차단하여 잠정적 개혁조치의 실시로 이에 대항하였다. 봉쇄를 당하여 아사(餓死) 상태에 빠진 베를린을 구출하기 위해 서방측은 곧 식량·석탄 등의 대규모 공수(空輸)를 개시하게 되었다. 11개월 동안 총계 277,728회의 공수가 이루어졌고, 물자 공급량은 2,343,300톤에 달했다. 1949년 봄이 되자 서방측의 강경한 태도와 공수의 성공으로 베를린과 서방측의 유대를 끊어버리려던 당초의 소련의 의도는 완전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5월 12일 미·소 양국의 회담 결과 소련은 봉쇄를 해제하였다. 베를린 봉쇄는 해제되었으나 9월 서방측에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성립하고 10월 소련측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됨으로써 독일의 분할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편집]

北大西洋條約機構 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미국은 1948년 반데버그 결의(Vandenberg 決議)로 전통적 고립주의인 먼로주의(Monroe 主義)를 청산하고 미국의 국가적 안정에 영향을 주는 지역을 위해서 상호원조와 집단적 협정에 참가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소련의 거대한 지상 군사력의 위협을 받고 있는 서유럽 제국, 즉 영국·캐나다·프랑스·이탈리아·덴마크·베네룩스 3국 등 12개국을 결속하여 1949년 4월 워싱턴에서 북대서양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기구는

유럽의 대반공집단 안전보장기구(大反共集團安全保障機構)로서 가맹국 중 어느 한 나라에 대한 무력공격은 무조건 전가맹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1952년에 그리스와 터키, 1955년에 서독이 가맹하여 15개국이 되었다. 1966년 3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나토의 개편을 요구하며 나토의 군사기관에서 탈퇴하였으며, 1974년 8월 그리스는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에 항의, 역시 나토의 군사기관에서 탈퇴하였으나 두 나라 모두 정치기구에는 계속 남아 있다. 1977년 런던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서방방위체제 개선과 강화를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도록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1985년 유럽에 배치된 3백개의 핵지뢰철수를 결정했다. 최근에는 동서진영간의 화해에도 중점을 두어 군축뿐만 아니라 평화를 위한 동반자 계획 등의 다양한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1999년 3월 폴란드·체코·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이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바르샤바 조약기구[편집]

-條約機構

1955년 5월 폴란드의 바르샤바(Warszawa)에서 소련과 동유럽 제국 8개국간에 맺은 집단 방위 기구. 1954년 10월 서유럽 여러 나라가 독일의 재군비, 나토 가맹을 포함한 파리 협정을 체결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소련, 기타 공산국가가 대항조치로서 이를 결성하게 되었다. 알바니아는 소련과 의견을 달리하여 1968년 9월에 탈퇴하였고, 통합사령부의 설치와 소련군의 회원국 영토주둔권을 규정하였다. 1980년대말 소련 및 동구권이 해체되면서 1991년 4월 바르샤바 조약기구도 해체되었고, 조약 그 자체도 유명무실해졌다.

중소우호 상호원조조약[편집]

中蘇友好相互援助條約

1949년 10월 1일 중국이 탄생하고 마오쩌둥이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조인한 것. 이 조약은 북대서양조약에 대항하는 공산측의 동맹조약으로 중·소 양국은 일본 및 미국의 장래 침략에 대해서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중소분쟁을 겪는 동안 사문화(死文化)됐다.

동남아시아 조약기구[편집]

東南亞細亞條約機構 SEATO

So- uth East Asia Treaty Organization의 약칭. 1954년 9월 마닐라에서 조인. 미국·영국·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필리핀·타이·파키스탄의 8개국이 참가한 반공 군사동맹(反共軍事同盟). 공산주의의 침투, 파괴 활동으로부터 동맹국들을 보호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시토를 보이콧하고 파키스탄은 1973년 11월에 탈퇴하였다. 1975년 20차 각료이사회는 베트남 전쟁 후의 정세를 고려, 시토를 단계적으로 해체하기로 합의하여 1977년 해체됐으나 조약 자체는 아직 존속하고 있다.

중앙조약기구[편집]

中央條約機構 CENTO

Central Treaty Organization의 약칭. 1955년 2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조인된 이라크·터키간의 방위조약인 바그다드 조약에 영국·파키스탄·이란의 3개국이 가맹하여 중동방위 조약기구를 창설하였다. 이 기구는 나토와 시토 사이에서 주로 소련의 중동진출을 봉쇄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는데, 1958년 7월 조약 중심국인 이라크에 혁명이 발생, 1959년 이라크가 이 기구에서 탈퇴하자 조약의 명칭을 중앙조약기구(CENTO)로 바꾸고 본부도 바그다드에서 터키의 수도 앙카라로 옮겼다. 센토는 최근 반공군사 동맹기구로서의 성격을 차츰 벗어나 조약국간의 개발협력기구로 전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