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유엔과 전후의 세계/독재정권의 전말과 현대 세계의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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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독재정권의 대두와 좌절〔槪說〕[편집]

전통적인 독재체제와는 달리, 현대판 독재체제는 대중(大衆)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따라서 현대 독재체제는 흔히들 대중독재체제(大衆獨裁體制)라고도 일컫는다. 이러한 대중독재체제가 수립되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우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노동자 계층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민주정치 자체의 질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는 데서 찾아진다. 종래 부르주아 계층만이 정치에 참여하고 있던 때와는 달리 노동자 계층도 정치에 참여하게 되자, 이 계층의 대립된 의견들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정부는 여러 가지 대립되는 의견들을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대다수 국민들의 복지(福祉)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의 권력을 증대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종래 야경국가체제(夜警國家體制)와는 구별되는 현대 복지국가체제의 특성이다. 19세기 후반을 거쳐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권력이 증대되는 추세를 나타내었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뿌리가 깊고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확고히 다져진 곳에서는 결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허물어뜨림이 없이 정부의 권력을 적절히 증대시키는 선에서 매듭지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박지 못하고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허약한 곳에서는 정부의 권력을 무한정 증대시키는 결과를 빚어냈고,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말았다. 이것이 이른바 1920년대를 전후해서 두 갈래로 출현한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나타난 통칭 파시즘 체제였고, 다른 하나는 소련을 중심으로 해서 등장한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였다. 이러한 독재체제들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대중의 정치참여를 기반으로 하였고, 또 겉치레일망정 선거를 치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독재체제와는 구분된다고 하겠다. 실상 이러한 신판 독재체제는 올바른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념을 추구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데 하나의 특색이 있다.

이러한 신판 독재체제를 민주주의의 사생아(私生兒)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민주주의의 허울을 뒤집어쓴 가짜 민주주의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진짜 민주주의와의 구분이 애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재체제마저도 민주주의란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음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판단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파시즘체제들은 그들의 호전적(好戰的)인 성격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유발하기에 이르렀고, 역사의 심판을 통하여 패망함으로써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독재체제도 오랫동안 눈여겨봄으로써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님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또 한가지 심각한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등장한 신생제국의 정치체제가 변질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신생제국의 일부 정치체제는 지난날의 파시즘 체제를 보다 교묘히 변질시키고 있거나 아니면 실질적으로 군정체제를 연장하고 있으면서도 말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든가, 심지어 그들 스스로를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라고 우기고 있다. 여기서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판단은 다시 한번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행스러운 일은 이러한 사이비민주주의(似而非民主主義)는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붕괴됨으로써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가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사이비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되는 데 반해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원리를 준수하는 정치체제는 절대로 붕괴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끈질긴 힘이 있고, 독재체제와 겨루어 패배해본 적이 없는 화려한 공적이 있다. 올바른 민주주의는 목표로만 제시되는 장식품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목표로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을 더 중요시한다는 데 큰 뜻이 있다. 말하자면 올바른 민주주의란 목표도 민주주의여야 하지만 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도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비민주주의는 목표로만 제시되고 그것으로 향하는 과정은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쉽사리 좌절되지만, 올바른 민주주의는 그 목표도 민주주의이고 그 과정도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자기 치유의 능력을 갖고 끈질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제국[편집]

-諸國

신생 아프리카 제국(諸國)은 대개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각국의 정치·문화를 비롯한 사회적 하부구조는 이같은 의회정치의 운영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복수정당제가 아닌 1당독재 및 1인독재정치가 실시되고 있다. 여기서 장기독재와 쿠데타 및 군사독재가 악순환을 이루는 것이 보편적 양상이 된다. 게다가 아프리카 각국의 군대는 식민군대의 후신들로서 상호 동일성을 갖고 있어 아프리카 각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아프리카 제국의 독립이 활발했던 1960년대 이후 쿠데타가 없었던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와 같은 현상은 초기 독립의 지도자들의 성분이 소수 엘리트였다는 점, 구식민지배층의 잔재청산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정정불안(政情不安)의 계속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인도 대륙[편집]

印度大陸

1977년 인도 간디 수상 정권의 몰락은 서방측에서 ‘제2의 인도 독립’으로 부를 만큼 매우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971년 이래 국내에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야당과 언론을 탄압해온 간디의 독재정치는 국민의 반감을 샀다. 그래서 1977년 총선에서 대패배를 하여 민주정치에의 복귀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그 영향을 받아서 스리랑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인도대륙 제국에도 자유화 바람이 일게 되었다. 그 결과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의 8년 독재통치가 종식되었으며 파키스탄의 부토, 방글라데시의 라만 정권도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었다.

80년대에 들어서서도 빈번한 쿠데타와 독재정치로 정세가 불안한 중에도 인종간의 분쟁·경제발전의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남아 제국[편집]

東南亞諸國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8개국 중 비교적 민주정치에 입각한 의회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말레이시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1당·1인독재체제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변화가 일고 있다. 미얀마의 네윈은 1962년 이래 계속 집권해오다가 반정부시위로 1988년 물러나고 다당제(多黨制)선거를 약속했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가 1968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장기집권하다가 물러나고 하비비가 새 대통령이 되었으며 비동맹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베트남·캄보디아는 1975년 이후로, 베트남은 오랜 전쟁이 종식되고 남·북이 통일되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캄보디아는 캄보디아 인민공화국과 민주 캄보디아 연정의 대립으로 내전상태에 돌입하였으나 1993년 총선거를 실시하고 새 정부가 출범했다.

집권 이래 친미노선을 탈피하고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펴왔던 마르코스는 1971년의 비상사태선언 이후 독재체제를 구축하다가 1986년 부정선거로 망명하였다.

쿠르드족[편집]

Kurd族

터키 남동부 빈곤지역에 살고 있는 2천2백만여 명을 포함하여 시리아, 이란, 이라크 등지에 뿔뿔히 흩어져 살고 있는 약 2천만 명의 회교도 유목민족.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서유럽에도 50만 여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으며, 대부분 60년대부터 터키와 이라크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탈출한 난민 출신들이다. 터키내 쿠르드족들은 소수민족으로 정식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민족의 고유언어(이란의 파르시고어계)조차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쿠르드족들의 최대 염원은 단일민족국가 건설. 이를 향한 독립투쟁은 오스만터키 제국 붕괴 이후 터키 영토를 분할, 독립국가를 약속한 1920년의 세브르조약이 터키 공화국을 세운 케말 파샤의 저항으로 무효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쿠르드족의 독립투쟁은 쿠르드노동자당(PKK)이 결성되면서 무장투쟁화했다. 쿠르드 반란군 지도자 오잘란은 1978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초로 PKK를 결성, 1984년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 인근 국가에 퍼져 있는 쿠르드족을 통합하는 ‘범쿠르드국가’를 목표로 무장투쟁 노선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처음 목표와는 달리 현재 PKK는 자치국가, 또는 터키와의 연방 구성을 내세우고 있다.

에스파냐[편집]

Espana

스페인이라고도 한다. 1936년 내란을 거쳐 1939년 집권한 이후 36년간 에스파냐를 철권통치해온 프랑코 총통이 1975년에 사망하자 탄압·전제·공포가 횡행하였던 에스파냐는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입헌군주국으로 복귀하고 내각책임제가 채택되었으며, 국왕에 즉위한 카를로스는 사회·정치 자유화를 선언하고 두 차례에 걸쳐 정치범을 석방했다. 1977년 처음 실시된 총선에서 수아레스 총리가 이끄는 민주중도연합이 승리한 후, 경제난국 타개에 우선적인 시책을 펴나가는 한편 의회에서 신헌법 기초작업을 활발히 해 1978년 국민투표에서 신헌법이 통과됐다. 그러나 1981년 정국불안, 경제침체 등을 책임지고 사임했으며, 소테로가 총리로 취임하였다. 정권을 잡고 있던 민주중도연합이 약화되자 조기총선을 실시하여 노동자사회당이 압승, 곤잘레스 총리를 중심으로 온건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빈곤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하였으며, 1985년 나토에 가입했고, 1996년 3월 총선에서 국민당의 승리로, 13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1986년 EC에도 가입했다.

2000년 3월 실시된 총선에서 아스나르 총리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였다.

포르투갈[편집]

Republic of Portugal

1932년 취임한 살라자르 수상은 36년간 비밀경찰을 활용, 반대 세력을 진압하고 철저한 독재를 해오다가 1968년 병으로 퇴진하였다. 그 뒤 카에타노 정권이 들어서 다시 독재체제를 강화했으나 1974년 쿠데타가 일어나 42년간에 걸친 독재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포르투갈은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허용하였으며, 포르투갈의 식민지 청산·독재의 탈피는 에스파냐의 민주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80년 소아레스 전(前)총리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이 되었다. 1987년·1991년 총선에서 온건좌파 사회민주당이 승리했으나 1995년 10월 총선에서 중도좌파 야당인 사회당이 압승하였다. 1996년 1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조르제 삼파이오 사회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리스[편집]

Republic of Hellas

그리스는 1967년 파파도풀로스 대령 주도의 군부 쿠데타 이래 군사독재체제를 수립, 국민의 기본권 제한, 언론자유 박탈, 반정부인물의 계속적인 검거 등 정권유지에 필요한 모든 강압적 수단을 행사해왔다. 파파도풀로스는 1973년 국민투표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새로운 쿠데타로 군사정권은 무너지고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1981년 총선에서 전그리스 사회주의운동(PASOK)의 승리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1983년 7월부터 17개월간 미군기지 폐쇄를 결정했다. 1985년 총선에서 PASOK가 재집권했으며, 1985년 이후 경제성장의 악화로 친서방관계 개선에 힘쓰고 있다. 1989년 6월 총선에서 PASOK 참패, 7월 민주주주의당(ND)과 좌익진보연합이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10월 공산­보수 연립내각 총사퇴로 11월 크세노폰 졸로타스 내각이 출범하였으며, 1990년 4월 총선서 신민주주의당 승리, 미쇼타키스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탄생하였다. 1993년 10월 총선 실시, 사회당 압승, 파판드레우 총리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1996년 1월 집권 사회당내의 개혁파인 코스타스 시미티스를 총리로 선출하였으며, 9월 22일 총선에서 시미티스 총리는 집권 PASOK를 승리로 이끌었다.

홍콩반환[편집]

香港返還 Hongkong

1842년 영국과 중국의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배,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홍콩섬이 영국에 할양, 제2차 아편전쟁으로 1860년 북경조약을 체결하면서 구룡반도도 할양되었다. 영국은 1898년 제2차 북경조약을 체결, 지금의 신계지역인 구룡반도 북부와 주변 235개의 섬을 조차하기로 하고 총독을 통해 외교권을 행사했다.

영국의 점령 직후부터 1862년에 걸쳐서 도시건설이 진척되어 아편전쟁 이후의 아편무역과 미국·오스트레일리아와의 무역으로 막대한 재화(財貨)가 축적되어, 유명한 여러 재벌들을 출현시켰다. 1865년에는 해운·조선업(造船業)의 투자가 시작되고, 1866년에는 재벌의 출자로 홍콩상하이(香港上海) 은행이 창립되고, 화상(華商) 사이에는 매판자본이 성장했다. 1911년 신해혁명과 일본의 중국침공 등 정치적 격변으로 대륙의 인구가 홍콩으로 몰려왔으며 대륙 공산화 이후에는 자본가와 전문인력 75만여명이 건너와 홍콩번영의 주역이 되었다.

중국은 1982년 신헌법을 통해 조차만료기간인 1997년 홍콩주권의 회복을 선언하였으며, 1982년 9월부터 영국과 중국 사이에 홍콩주권반환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1984년 12월 19일 중국을 방문한 대처 영국 총리와 자오쯔양 중국 총리는 주권반환에 관한 공동선언에 조인, 1985년 5월에 베이징에서 비준서를 교환하였다. 주권반환 이전의 홍콩은 영국의 크리스 파튼(Chris Pa- tten) 총독과 14명의 행정위원회(내각)가 행정을 담당했다.

1985년 중국과 영국이 체결한 공동선언에 따라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구로서 외교와 국방 이외의 분야에서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언론과 출판, 집회 등 모든 권리를 보장받고 자유항과 금융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유지, 1997년 7월 1일 주권반환 이후 50년간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적용받기로 합의했다. 홍콩 특별행정구는 형식적으로 홍콩주민이 뽑은 행정장관이 관리하지만 외교와 국방은 중국이 담당하게 되었다.

마카오 반환[편집]

-返還 Macao

마카오는 1557년 포르투갈인이 해적을 평정한 공으로 이 곳에 거주권을 얻은 이후, 중국 및 일본에 대한 무역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727년과 1753년에 포르투갈인은 마카오의 할양을 청조(淸朝)에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오히려 지조(地租) 납부의 의무를 재확인받았다. 그 후 마카오는 본국의 국제적 지위 하락에 따라 청조에 의지하여 영국, 프랑스의 압박을 모면하려 했다. 아편전쟁(阿片戰爭) 이후는 완전 영토화를 꾀하여 1887년 청나라와의 우호통상조약(리스본의정서)에 따라 포르투갈에 영구할양됐으며 일제에 잠시 강점되기도 했다. 1945년 일제패망에 따라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환원, 1949년 중국의 공산정권 수립후 중국측은 마카오 할양을 규정한 리스본의정서가 불평등조약이라며 반환을 요구, 포르투갈도 포기의사를 밝혀 1987년 양국이 주권이양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996년 10월 양국은 마카오 반환협상을 개시하였다. 1997년 2월 25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베이징을 방문한 조르제 삼파이오 포르투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반환 후 마카오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보장을 약속하였고, 1997년 6월 20일 양국은 '마카오-중국간 항공운항' 문제 등의 반환조건에 합의하여 1999년 12월 20일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었다.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마카오 주권회복은 중국 인민의 쾌거이자 통일을 향한 중대한 진전'이라고 평가한 뒤 홍콩과 마카오에서의 성공적인 1국2체제 실현이야말로 대만과의 통일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치하했다. 마카오의 주권반환은 서구의 아시아 식민통치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는 동시에 21세기 초강대국을 꿈꾸는 중국이 주요 국가목표 중 하나로 설정한 통일조국에 한발 더 나아가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테레사[편집]

Mother Teresa (1910∼1997)

마케도니아 스코페 출생. ‘사랑의 선교회’ 창시자. 본명은 아그네스 곤자 보야주.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어머니와 함께 가톨릭에 몰입, 로레토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테레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캘커타의 성 마리아 여고교사와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과 함께 사랑의 선교회를 만들어 버려진 어린이, 굶어 죽어가는 사람, 장애인들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테레사 수녀는 1997년 9월 5일 주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까지 무한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달라이라마 14세[편집]

達賴喇麻-世 Dalai Lama (1935∼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로 5세 때 티베트 불교 교주인 제14대 달라이라마에 즉위하였다. 10년 후 정치와 종무의 최고권위자로서 1959년의 티베트 동란 때 인도로 망명하여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는 인도 북서부의 다람살라에서 티베트인 10만 명과 망명정부를 세우고 1963년 새 헌법을 공포하여 티베트인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데 노력하였다. 30년간 망명생활을 하며 비폭력과 평화적 방법에 의해 티베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노력한 공로가 인정되어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피노체트[편집]

Augusto Pinochet (1915∼

)

피노체트는 1973년 민주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뽑힌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를 미국의 지원하에서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1990년까지 17년 동안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그가 주도한 1973년의 칠레 쿠데타는 금세기 남미사(史)의 가장 잔인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피노체트의 군정(軍政)은 정치구조의 전면개혁을 내세워 곧바로 의회 해산, 헌정 중단, 야당 불법화 등 독재 굳히기에 나섰다. 아옌데식 사회주의는 주적(主敵)으로 몰렸고 근로 생활조건 향상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빈민들까지 좌익으로 내몰아 17년 집권기간중 3천 여명이 사망했고 1천여명이 실종됐다. 1988년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집권 연장 여부를 묻는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고, 불신임을 받은 그는 이듬해 대선에서 야당 후보에게 패했다.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독재로 전 세계 언론의 지탄을 받아온 피노체트는 결국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대통령 자리를 물러났다. 에스파냐(스페인) 사법당국은 피노체트가 칠레에서 집권하던 기간중 에스파냐 시민 80여명을 살해한 사실에 대해 인터폴을 통해 영국에 그의 체포를 공식 요청했으며, 영국은 10월 에스파냐 사법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런던에서 신병치료중이던 피노체트를 전격 체포하였다. 피노체트는 영국에 구금된 채 과연 자신에게 전 국가원수로서의 면책특권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길고 긴 재판을 받아야 했다. 런던 고등법원은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을 인정, 그의 체포가 불법이라고 판결했으나 대법원격인 상원재판부는 그의 면책특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고등법원의 판결을 파기했다.

2000년 2월 15일 영국 고등법원에서는 피노체트 상원의원의 건강상태에 관한 병원진료기록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국제사면위원회(AI)를 비롯한 전세계 6개 인권단체에 대한 공개요구는 거부했다. 이에 잭 스트로 영국 내무장관은 피노체트 의원이 집권기간(1973∼1990) 자행한 각종 인권유린행위에 대한 재판을 준비중인 에스파냐에 그의 신병을 넘겨야 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건강상태 검사를 독립의료기관에 지시했다.피노체트는 2000년 3월 칠레로 귀환했다.

카슈미르 분쟁[편집]

-紛爭 Kashmir

1947년 8월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이래 그 귀속을 둘러싸고 양국 최대의 분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

카슈미르는 인도 서북부에 위치한 면적 약 21만 3천 km2의 지역인데, 번왕(藩王)은 힌두교도이며, 주민의 70% 이상은 이슬람교도로 1947년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시에 양국은 각각 병합을 주장했다. 인도에 귀속을 선언한 번왕에 대하여, 파키스탄 세력이 지원한 자유 카슈미르파(派)가 무력으로 항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양국군의 충돌이 일어났다.

1948년 1월, 인도는 이 문제를 국제연합(國際聯合) 안전보장이사회(安全保障理事會)에 제소(提訴)한 결과 1949년에 한때 휴전이 성립되었으며, 그 후 수차에 걸쳐 국련위원회(國聯委員會)의 조정, 양국 수뇌의 접촉이 행해졌다. 휴전 이래 카슈미르는 사실상 양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어 왔으나, 인도는 1956년 10월의 주(州) 재편성에 따라 카슈미르를 새로운 주로서 확인하고, 이에 따라 1954년 2월에 인도 합병을 결의한 인도측 점령지역의 제헌의회(制憲議會)도 1956년 11월 정식으로 인도 연방 귀속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측은 주민 투표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1965년 양국의 본격적인 전투가 발발, 1966년 유엔의 조정으로 정전협정이 이루어져 두 나라 정상은 군대 철수를 잠정적으로 합의했으나, 카슈미르에서는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이슬람교도들은 인도 통치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였다. 특히 1989년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이슬람교도들의 폭동이 발생하면서 매년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다.

1998년 9월 유엔 총회를 앞두고 양국 정상은 정상회담과 상대국 죄수 교환석방 등의 분쟁해결을 위한 노력을 했지만, 1999년 5월 다시 영토분쟁이 시작되어 8주간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같은 전투로 하루에 수십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부상당하고 있다. 외교전문가들은 핵 보유국인 두 나라가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으로 끝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으나 잠시나마 지속돼온 평화분위기는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동티모르 사태[편집]

-事態

1975년 인도네시아 군대에 점령당하고 그 다음해 인도네시아의 영토로 병합됐던 포르투갈의 전 식민지 동티모르가 1999년 유엔 감시하의 독립 찬반투표를 실시해 압도적인 표차로 독립을 선택했으나 이후 벌어진 친 인도네시아계 민병대들의 유혈난동으로 국제사회가 동티모르에 군대를 파병했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 강제병합된 이후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여왔으며 이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군병력의 탄압을 받아 20여만 명이 군대의 학살과 기아 등으로 숨지는 고초를 겪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아왔다.

인도네시아는 1999년 9월 동티모르에 내린 비상계엄령을 공식 해제하고 인도네시아군의 동티모르 철수계획을 국제동티모르 파견군의 코스그로브 사령관에게 전달했다. 국민협의회(MPR)가 1999년 10월 19일 동티모르 독립을 공식비준하고, 와히드 대통령이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 주권의 이양에 관한 공한(公翰)을 10월 28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함으로써 동티모르에 대한 24년간의 인도네시아 통치는 공식 종식되었다. 이에 따라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 국민의 상대적 관심은 크게 낮아졌으나, 동티모르 독립에 자극받아 아체, 남부 술라웨시, 이리얀자야, 리아우 등 여타 지역에서의 분리독립요구 움직임은 점차 강해지고 있다.

체첸전쟁[편집]

-戰爭 Chechen

1991년 소련 해체 후 체첸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994년 12월 러시아 옐친 대통령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체첸에 지상군을 투입하여 제1차 체첸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러시아군은 1차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하여 2년 1개월 만에 철수했다.

1996년 러시아와 체첸은 평화협정에 서명한 후 1997년 체첸에서 러시아군은 완전 철수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1999년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들이 체첸 반군이라고 주장하며, 8월에 남부 다게스탄 공화국의 산악지대를 기습 점거한 체첸 반군에 대해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여 10월에 제2차 체첸전쟁이 일어났다. 1999년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의 주도 아래 러시아는 전면전을 감행해 수도 그로즈니를 점령했다. 그후 러시아는 2000년 2월 6일 전쟁종료를 선언했다.

2003년 3월 러시아는 체첸공화국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체첸이 러시아 연방의 일부임을 확인하는 신헌법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체첸 반군은 이에 반발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양안관계[편집]

兩岸關係

양국(중국―타이완)은 국공내전 이후 1997년에 처음으로 중국과 타이완 간 화물선 직항이 이루어졌고, 그후 중국이 6개 해운회사에 타이완과의 직접운항을 허가하였다. 또한 1999년 5월에는 타이완이 중국으로의 여객선 직항을 완화하고 2000년 1월에는 양안간 무역 및 교류촉진방안을 내놓아 양안관계는 호전을 보였다. 그러나 양국이 내세우는 통일정책은 상당한 견해차를 보인다.

장쩌민 총서기는 1995년 1월 신춘 다화회(新春茶話會)를 통해 ‘하나의 중국’ 원칙 등 8개 원칙을 담은 평화통일방안을 제시한 데 이어 2000년 2월 ‘타이완(臺灣)백서’를 발표하였다. 타이완백서는 하나의 중국에 하나의 중앙정부, 타이완의 장래를 결정할 국민투표 반대, 동서독 통일모델 적용 불가, 미국의 타이완 안보강화법1 2반대, 타이완의 국제사회 활동제한 등을 담고 있다.

한편 타이완의 리덩후이 총통은 중국이 타이완 통일의 기본방침으로 제시한 일국양제방안에 대해 실현불가능한 것으로 일축하였고, 특히 리 총통이 1999년 7월 중국과 타이완을 ‘특수한 국가 대 국가’ 관계로 규정하면서 양측은 대만해협에서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양안간 긴장감이 계속되었다. 2000년 3월 중국이 꺼려했던 대만 야당 민진당의 총통후보 천수이볜(陳水扁)이 3월 선거에서 승리한 후 양안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천수이볜은 취임 이후 ‘하나의 중국’원칙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지 않고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공존방안을 모색해왔다. 중국은 이에 대해 ‘하나의 중국’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대화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혀 양측의 대화 분위기 조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민간차원의 교류를 통한 긴장완화방안이 적극적으로 추진될 가능성을 보여 관계개선이 곧 가시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