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유엔과 전후의 세계/이집트와 서아시아 여러 나라의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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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와 서아시아 여러 나라의 독립〔槪說〕[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까지 이 지역은 20개 이상의 식민지로 분할되어 유럽 열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지역의 풍부한 석유자원과 전략적 위치의 중요성, 낡은 식민주의의 잔재로 인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은 계속 주둔군을 철수하지 않았다. 수에즈 운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관리하에 있었고 유전(油田)은 유럽 열강의 자본에 독점되어 있었다. 유전 사용료는 대부분 왕족과 그 권속들의 사치생활로 소비되어 독립국가로서의 발전은 암담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지식인, 청년장교 등이 중심이 되어 민족 해방운동을 강렬하게 전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정치적 독립뿐만 아니라 경제적·군사적 독립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 1952년의 이집트 혁명, 1956년의 수에즈 전쟁, 1958년 이라크 혁명 등은 이러한 일련의 노력이었다. 아랍민족주의의 개화와 함께 중동에는 자원민족주의도 눈이 뜨여 제4차 중동전을 계기로 아랍산유국들은 대서방 석유금수와 석유가격 대폭인상 등 석유 무기화 정책을 취하여 이른바 세계 에너지 위기를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이같은 석유무기화 정책으로 막대한 석유수입을 올린 중동 산유국들은 세계의 부(富)의 판도를 바꿔놓았으며,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발언권도 크게 신장되었다. 아랍 제국들과 이스라엘간의 숙명적인 분쟁은 1978년 사다트·베긴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평화적 해결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아랍 강경세력들의 거부와 가자 지역의 이해관계 등으로 사실상 혼미를 거듭하였다.

아랍 연맹[편집]

-聯盟

1945년 3월 카이로에서 유럽 세력의 배제와 아랍 여러 나라의 주권옹호를 목적으로 결성한 정치·군사·경제기구. 원가맹국은 이집트·시리아·레바논·이라크·요르단·사우디아라비아·예멘의 7개국. 그 후에 리비아·수단·튀니지·모로코·쿠웨이트·알제리·남예멘·바레인·카타르·오만·통일아랍공화국토후연방·모리타니·소말리아·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가담하여 현재 21개국이며, 1976년 레바논 내전의 종식을 모색하기 위하여 아랍평화군을 창설하였다.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간의 평화조약이 조인되자 연맹은 일시적으로 이집트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켰으나 1989년 비공식으로 다시 회원국이 되었다.

이집트아랍 공화국[편집]

-共和國

Egypt Arab Republic

형식적으로 독립국 왕제(王制)였던 이집트는 전후(戰後) 영국에 대하여 조약개정(條約改定)을 요구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1952년 1월 카이로에서 군중의 일대 반영(反英) 폭동이 일어나 영국인의 건물·주택을 습격하였다. 폭동은 진압되었으나 조국을 부패로부터 건져내고 영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젊은 장교들이 ‘자유장교단(自由將校團)’을 조직, 1952년 7월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았다. 이 혁명의 중심 인물인 나세르는 1953년 왕제(王制)를 폐지하고 공화정(共和政)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집트가 당면한 거의 절망적인 현실을 기적적으로 해결해 나갔으며, 이 혁명은 아래로부터의 민중혁명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일부 육군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이루어졌다. 혁명정부는 우선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농업생산의 증가를 목표로 관개시설 확장계획을 수립하였다. 또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다목적 댐인 아스완 하이댐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 하이댐 건설에는 미·소 양진영의 미묘한 외교전(外交戰)이 뒤따랐다. 미국과 영국은 당초 이 건설에 원조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이집트의 적극적 중립정책 때문에 돌연 철회하였다. 소련은 이 틈을 타서 조건 없는 원조를 제의하였다.

나세르는 이와 같은 야심적인 경제계획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하여 확고한 독재정권을 수립하였다. 1956년 7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1958년 2월에는 시리아와 합병을 이룩하였다.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에 입각한 중립정책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1967년 중동전쟁에서의 패전 후 인책사임을 발표했으나 전국민의 반대로 이를 철회, 중동문제의 해결에 부심하던 중 1970년 9월 나세르가 사망하였다. 후임에 사다트가 나와서 대체로 나세르의 적극 중립정책을 계승하였다. 사다트는 제4차 중동전을 통하여 이스라엘 상승(常勝)의 신화를 깨뜨리는 한편, 석유무기를 발동시켜 아랍권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막대한 국방비 부담은 이집트로 하여금 만성적인 경제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사다트 대통령은 1978년 이스라엘 베긴 수상과 중동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경제재건과 중동평화를 기도하였으나 아랍제국의 반발에 부딪혔으며, 그 역시 강경군부 세력에게 암살당하였다. 현 대통령은 무바라크(Mubarak)이다.

나세르[편집]

Gamal Abdel Nasser (1918

1970)

이집트아랍 공화국 대통령. 카이로 사관학교·육군대학 졸업.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에 종군하여 부상했다. 1952년 나기브 장군과 함께 군부(軍部) 쿠데타를 지도, 영국과 그 괴뢰정부의 파루크왕을 추방하고 공화제를 실현했다. 1954년에 수상, 56년에 대통령, 같은 해 7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침략을 받았으나 중립외교 정책을 구사하여 침략군을 철수시켰다. 1958년 시리아와 합병하였으나 1961년 시리아는 분리되어 나갔다. 1967년 중동전쟁에서 참패하여 인책사임을 발표하였으나 전국민의 반대로 철회하고 대세의 만회에 부심중 격무로 사망했다. 저서에 『혁명의 철학』이 있다.

사다트[편집]

Anwer Sadat (1918

1981)

이집트 대통령. 군사 병원 사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아바시아 육군사관학교 입학, 후에 나세르와 만나 자유장교단의 중심 멤버가 되었다. 1969년에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970년 10월 나세르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3년 10월 아랍제국단결을 성립시키고 제4차 중동전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하여 ‘이스라엘 불패’ 신화를 깨뜨리고 이집트의 위신을 높였다. 1977년에는 네 번이나 싸운 구적(舊敵) 이스라엘을 극적으로 방문, 중동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다른 아랍제국의 반발을 샀고, 강경군부세력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수에즈 전쟁[편집]

-戰爭

1956년 10월 영국과 프랑스·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침입한 전쟁. 나세르에 의한 이집트 혁명 후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계획을 위하여 건설자금이 필요하게 되었다. 1955년 12월에 미국과 영국은 이집트에 아스완 댐 원조를 약속한 바 있으나 이집트가 공산권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므로 이에 대한 응수조치로 약속한 원조를 철회하였다. 그러자 1956년 7월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 회사의 국유화를 선언하였다. 이는 곧 연간 약 1억 달러의 운항통행료와 그 밖의 수익을 이집트가 차지함으로써 자력(自力)으로 댐 건설계획을 실현시키려고 취한 조처였다. 국유화조치는 아랍 제국의 지지를 얻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석유이권과 대외적인 위신의 유지를 대의명분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침입하였다. 그러나 유엔은 긴급 총회를 열고 즉시 철병을 결의하였고, 미국은 전화(戰火)가 확대되지 않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소련은 침략군에 대하여 로켓 사용의 경고(警告)로 독특한 역할을 하였다. 결국 12월 영국과 프랑스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라크[편집]

Republic of Iraq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가 1930년 입헌군주국으로 독립, 1958년 7월 군부 쿠데타로 왕제(王制)가 무너지고 카셈 중장을 수상으로 하는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1963년 2월 아레프 대령 등 바트당(黨)을 주체로 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카셈은 총살되고 아레프가 대통령에 취임. 1966년 아레프의 사망으로 친형인 라만 아페프가 승계했으나 1968년 바트당 온건파의 쿠데타로 바크르 장군이 취임했다가 1979년 7월에 사임하고 부통령이던 후세인이 새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라크는 1975년 화해한 이란을 1980년 침공하여 1988년에 휴전하였고, 1990년에는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하였다가 이듬해 UN의 지원을 받은 반이라크 연합군에게 패하였다. 1995년 7월 이란과 관계정상화에 합의하고, UN의 경제제재로 악화된 국내사정을 타개하려고 대서방 화해책을 내세웠다.2003년 3월 미국의 공격을 받아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고, 이라크과도통치위원회가 출범했다.

시리아[편집]

Syrian Arab Republic

터키의 지배를 벗어나 1920년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1941년 9월 연합군 사령관이 시리아의 독립을 선언했고, 1944년 1월 프랑스로부터 통치권을 인수하고 1946년 4월에는 프랑스군이 모두 철수했다. 1958년 2월 이집트와 합병, 통일아랍공화국의 성립을 보았으나 1961년 9월 보수세력에 의하여 분리하여 재독립했다. 1970년 아사드 국방장관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1991년 대통령에 4선됐다. 시리아는 아랍 세력의 대이스라엘 최고 강경파 중 하나였으나 방패막이였던 소련의 붕괴, 걸프전, 라빈 이스라엘 신정권의 탄생을 거치며 점차 서방과의 실리외교도 추구하고 있다.

2000년 6월 아사드 대통령 사망후 그의 둘째 아들 바샤르 아사드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아사드[편집]

Hafez Assad (1928∼2000)

시리아 정치인. 아랍어로 ‘사자’란 뜻의 아사드 가문 출신. 1930년 북부 해안도시 케르다하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바트당에 가입, 바트당이 집권한 1963년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 국방장관에 임명, 1970년 무혈쿠데타로 집권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걸고 수십년간 이스라엘-아랍간의 적대 구도를 이끌어온 중심인물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등의 배후에서도 항상 아랍의 단결을 외치며 이스라엘에 강경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러한 이유로 아랍권의 대부로 존경을 받아왔다. 또한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책략으로 ‘아랍의 비스마르크’라 불렸다. 국제관계에서는 옛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원조를 얻고 걸프전 때는 연합군의 편을 드는 등 철저한 실리파였다.

레바논[편집]

Republic of Lebanon

1920년 터키의 지배를 벗어나 1923년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가 1942년에 독립했다. 1944년 1월 자치권을 획득하고 1946년 12월 외국 군대가 완전 철수했다. 지리적·문화적으로 유럽과 중근동(中近東)의 경계에 위치하여 기독교와 회교의 세력이 백중세를 이루고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다. 이러한 종교적 색채는 정치에도 반영되어 대통령은 기독교, 수상은 회교도 중에서 선출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1975년 회교도와 기독교간에 내란이 전개되었는데, 1976년 시리아군을 주축으로 한 아랍 평화유지군이 파견돼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분쟁은 계속되었다. 1978년 레바논에 본부가 있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테러 공격에 보복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이 레바논을 침공하였으며, 1982년 PLO는 레바논에서 철수했다. 1984년 이후 레바논에서 종파(宗派)간 시가전이 벌어져 각 종파 지도자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됐으나 기독교 보수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가 1991년 내전종식에 합의했다.

사우디아라비아[편집]

Saudi Arabia

터키의 지배를 받아왔으나 1924년 왕국으로 독립했다. 석유자원이 쿠웨이트 다음으로 세계 제2위이다. 석유채굴권은 미국계의 아라비안 아메리칸 회사가 1939

1999년까지 독점하고 있으며 이익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석유회사가 반분(半分)한다. 아랍 보수세력의 중심적 존재로서 공산주의는 회교교의에 위반된다고 하여 공산국가와는 국교가 없으며 친(親)서방 노선을 따르고 있다.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에 반대, 이집트와 단교했다가 1987년 11월에 열린 이슬람 정상회담 이후 이집트와 관계를 개선했다.

이란[편집]

Iran

입헌군주제로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중립을 선언했으나 영국·소련의 연합군이 진주하여 칸팔레비왕이 퇴위하고 그의 아들인 팔레비왕이 뒤를 이었다. 1951년 민족주의자 모사데그 수상의 석유 국유화로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 1952년 2월 단교하기에 이르렀으나 1953년 군부 쿠데타로 모사데그 수상은 실각했으며, 1954년 8월 국제석유재단과의 협정이 성립되어 석유분쟁은 수습되었다. 1955년 센토에 가입, 1959년 3월 미국과 군사경제협력협정을 체결했고, 1968년부터 팔레비왕은 토지개혁, 여성참정권 부여, 산림녹화, 노동분배율의 향상을 중심으로 백색(白色)혁명을 추진했으나 1970년 이후에 가중한 국방비 부담과 정치탄압, 보수파인 시아파의 반발로 반팔레비투쟁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1979년 미국이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여 팔레비는 해외로 망명했다.

그 후 1979년 시아파 회교지도자이던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하여 국민투표에 의해 공화제로 바뀌고 회교공화제 수립을 선언했다. 1980년 이라크와 8년간의 전쟁을 치렀으며, 1989년 이슬람교 혁명 이후 계속되어온 경직된 통치구조에서 벗어나 1997년 하타미가 개혁을 예고하며 당선되었다.

이스라엘[편집]

State of Israel

옛 이름은 팔레스티나. 1517년 터키령(領)이 되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기원 70년 로마제국에 정복당하여 이곳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에서의 독립을 숙원(宿願)으로 삼았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와이즈만 박사의 지도하에 유대인의 팔레스티나 복귀운동인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1917년 영국은 유대인이 팔레스티나에서 조국을 건설하는 것을 승인했으나 동지(同地)의 주권을 둘러싼 유대인과 아랍 민족간의 분쟁이 격화, 전후 1947년 11월 유엔은 팔레스티나를 유대·아랍 2국가에 분할하는 안(案)을 가결했다. 1948년 5월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자 이스라엘 공화국은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직후 아랍측의 침공으로 시작된 1차 중동전에서 승리해 1949년 아랍 각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같은 해 5월 유엔에 가입했다. 1차 중동전 이래 1956년 시나이 반도 침공으로 제2차 중동전, 1967년 제3차 중동전(6일전쟁), 1973년 제4차 중동전을 치르면서 아랍국들과의 대립이 계속됐다. 1979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점령했던 이집트령 시나이 반도를 반환했다. 1982년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분쇄할 목적으로 레바논을 침공해 1985년 6월까지 국경지역에 안전지대를 설치하고 철수했다(제5차 중동전). 그 후 1994년 7월 백악관에서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46년 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95년 라빈 총리가 피살되고, 1996년 5월 리쿠르당의 네타냐후가 총리로 취임한 이후, 양측간의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다. 1998년 5월 네타냐후 총리와 아라파트 수반은 1차 협상을 가졌으나 양측의 강경입장 고수로 실패, 10월에 다시 협상을 하여 영토-평화 교환협정에 조인했다. 이 평화협상안은 이스라엘이 3단계 중 1단계만 이행, 중단하고 팔레스타인도 독자적인 독립국 선포 강행을 추진하여 다시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1999년 5월 총선에서 에후드 바라크 총리가 당선되었으며, 이어 2001년에는 샤론 총리가 취임했다.

다얀[편집]

Moshe Dayan (1915∼1981)

이스라엘의 군인·정치가. 팔레스티나의 데가니아에서 출생. 1937년 대(對)아랍 게릴라 조직에 참가하여 자위군을 조직하였으나, 1939년에 조직이 비합적이라는 이유로 영국 당국에 체포되어 2년간 복역했다. 1941년에 석방된 후 프랑스의 비시정권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레바논에서 전투중 한 눈을 잃었는데 이후에 한 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로 유명해졌다. 팔레스티나 전쟁 때는 전선사령관으로 활약하였고, 1953∼1958년 이스라엘군 참모장을 지냈고,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때는 시나이 반도 전선사령관으로 아랍 연합군에 대승했다. 이후 군에서 퇴역한 뒤 정계에 진출하여 농업장관·국방장관 등을 역임했다. 1978년 이스라엘의 베긴 내각의 외무장관을 지내면서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성사시키는 데 공헌했으나, 화평교섭을 둘러싸고 베긴 수상과 대립하여 1979년 10월 사임했다.

라빈[편집]

Yitzhak Rabin (1922∼1995)

이스라엘 군인·정치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지하전투조직인 팔마치의 전투부 부사령관이 되었다. 게릴라 부대 부사령관으로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때는 예루살렘 전선을 지휘하였다. 1953년 영국 육군대학을 졸업, 참모차장을 거쳐 1964년 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국방장관 M. 다얀과 함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휘하였다. 1968년에 퇴역하여 1973년까지 미국주재대사로 근무하였다. 1973년 12월 총선거에서 노동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노동장관에 취임후, 1974년 6월 유대인으로는 최초로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다. 1977년 부인의 해외예금 스캔들로 물러났다가 1984년 국방장관으로 복귀했다. 1992년 총리가 된 후 주변 아랍국들과 평화협상에 애쓰며, 팔레스타인 자치원칙에 합의하고, 요르단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등의 공로를 쌓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내의 강경파들에게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1995년 유대인 극단주의자의 총격을 받아 암살당했다.

요르단[편집]

Jordan

요르단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국의 위임통치령에 편입, 1923년 요르단 왕국이 성립되었다. 194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1949년 현재의 국호로 변경하였다. 1951년 초대 압둘라 국왕의 피살 이후 1953년 후세인 국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후세인 국왕은 제3차 중동전 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요르단을 무장투쟁의 발진기지로 삼자 1970년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개시하였다. 국왕은 1989년 22년 만에 첫 하원선거를 실시하였고, 1991년 장기간의 계엄령을 철폐하고 1992년에는 정당활동도 합법화하였다.

또한 1994년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위싱턴에서 전쟁상태 종식에 합의하였다. 주요 중동분쟁시마다 중재를 자처한 후세인 국왕이 1999년 2월 7일 사망함으로써 요르단의 역내 위상과 완충국가의 기능이 퇴조할 것이 우려되었으나, 장남인 압둘라가 왕위를 계승하고 개각과 군인사 단행을 통한 친정체제를 구축하여 활발한 민정시찰과 해외순방외교를 펼치고 있다.

중동전쟁[편집]

中東戰爭

1967년 6월 이스라엘과 아랍 여러 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6일간의 전쟁. 1963년 벤구리온 수상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에슈콜 수상은 거국내각(擧國內閣)을 구성, 다얀 장군을 국방상으로 임명하고 건국 이래 끊임없이 압력을 주고 있는 아랍 여러 나라, 특히 이집트·시리아에 대하여 저공비행에 의한 기습작전을 벌여 성공, 시나이 반도를 지나 수에즈 운하의 동안(東岸)까지 점령하였으며, 이 밖에도 많은 영토를 점령하였다. 1948년의 제1차 중동전, 1956년의 수에즈 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중동전에 이어 제3차 중동전으로 일컬어지는 1967년의 ‘6일전쟁’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화평 노력과 1970년 미국 로저스 국무장관의 정전안이 받아들여져 일단 휴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6일전쟁에서 참패를 당한 이집트는 와신상담으로 전쟁준비를 착실히 하여 1973년 10월에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에 부교를 놓고 시나이 반도에 일제히 쳐들어갔으며, 시리아는 골란 공원에서 이스라엘에 포문을 열었다. 6일전쟁과 달리 아랍측이 약간 우세한 가운데 진행된 4차 중동전은 유엔의 중재에 의해 16일 만인 10월 22일에 일단 휴전에 들어갔다. 키신저·닉슨의 중동 왕복방문외교로 아랍측과 이스라엘은 시나이 협정을 맺는 등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으나 양측의 뿌리깊은 대립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측의 강경입장으로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1977년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1979년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편집]

-解放機構 PLO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묵인하에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시작되고,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하자 기존의 거주자인 팔레스타인인(人)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게릴라전을 통하여 대이스라엘 투쟁을 계속해온 이들은 1·2차 중동전을 겪게 되었고, 1964년 아랍정상회담의 결의에 따라 반이스라엘 해방기구의 통일전선으로 PLO를 결성하게 되었다. 입법기관으로 국민의회, 군사기관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군(PLO)을 가진 PLO는 야세르 아라파트의 지도하에 군사·정치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4년에는 아랍정상회담에서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받았으며, 아라파트가 유엔에 등장, 사상 처음으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80년 오스트리아가 처음으로 PLO에게 외교특권을 부여했으며, 프랑스와 서독이 팔레스타인 자결권을 인정했다. 1988년 알제리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민족협의회(PNC)에서 팔레스타인을 독립국가로 선포, 아라파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아랍 석유수출국기구[편집]

-石油輸出國機構 OAPEC

Orga- nnization of the Arab Petroleum Exporting Coutries의 약칭. 1967년 제3차 중동전에서 미국·영국·서독 등에 대하여 실시한 석유금수가 효과를 보지 못하자 1968년 1월 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리비아가 설립한 아랍산유국의 연대기구이다. 1973년 10월 중동전을 계기로 석유를 무기로 이용,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들에게 석유공급 중단 및 제한과 감산조치의 압력을 가하여 미국의 중동평화노력을 강화시키고 아랍에 대한 지지국들을 늘렸다. 회원국 중에 이집트는 대(對)이스라엘 평화조약 체결로 1979년 자격정지를 당했다. 10개 회원국 대부분이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가입했고, 전세계 석유매장량의 47%, 생산량의 25%를 점유하고 있으며, 나라마다 국영회사와 판매계약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