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유엔과 전후의 세계/전후 중국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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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중국〔槪說〕[편집]

1945년 8월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對日)전쟁의 승리를 맞이하게 된 국민당 정부는 다른 전승국(戰勝國)과는 전혀 다른 조건하에서 전후의 첫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안되었다. 1937년의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중심으로 한 항일민족 통일전선(抗日民族統一戰線)은 사실상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의 8년 동안 부분적 충돌이 일기는 하였으나 그런대로 유지되어 왔으며, 전쟁 후에도 전면적 충돌은 서로 피하였으니 그것은 중국 민중들이 그와 같은 사태를 절대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항전승리(抗戰勝利)의 날이 오자 온 중국은 기쁨의 환호성으로 들끓었으며, 장제스(蔣介石)는 구국(救國)의 투사, 민족의 영웅으로 숭배되었다. 그러나 전후구상(戰後構想)을 놓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1945년 8월말부터 장제스와 마오쩌둥(毛澤東) 수뇌회담이 충칭(重慶)에서 이루어졌다. 이 회담에서는 내전(內戰)의 회피, 정치의 민주화를 위한 정치협상회의 개최, 각 정당의 합법적 지위 승인 등에 관해 원칙상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이 쌍십절(雙十節) 협정의 원칙에 입각한 정치협상회의가 다음해 정월에 열렸으니 이를 중개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특사 마셜 원수(Marshall 元帥)였다. 이 회의의 대표 구성을 보면 장제스를 의장으로 하여 국민당 8, 공산당 7, 민주동맹 9, 중국청년당 6, 무소속 9의 비율로 되어 있다. 이 회의는 1월 10일에서 31일까지 난항(難航)을 거듭하기는 하였으나 화평건국강령(和平建國綱領)의 성안으로 평화적 재건에의 구체안이 결정되었다. 국·공(國·共) 정전협정, 정치협상회의에 뒤이은 정군(整軍)협정도 2월말에 조인되었다. 정치회의의 성공은 중국 민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946년 3월에 열린 국민당의 정치 기관은 정치협상회의의 모든 결정사항을 전복시키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이는 중공 점령 지구에 있어서 급속도로 신장하는 공산당 세력에 대한 공포심, 국민당기구의 복잡성, 지도자의 무능과 부패 등에 기인한 처사였다. 이리하여 동·북 각지를 위시하여 국민당과 공산당 양군(兩軍)의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1947년 2월 말 국민당 정부는 난징(南京)·상하이(上海)·충칭(重慶)에 있는 공산당 대표부에 퇴거 명령을 내리고 공산당을 반란 단체로 본다는 그들의 결정을 통고하였다. 중국공산당 대표단은 그 해 3월 난징을 떠남으로써 1년 이상 끌어온 국·공 평화교섭이 종지부를 찍게 된 한편 공산당의 근거지 옌안(延安)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가하여졌다. 1947년 3월 옌안을 점령한 국민당의 군대는 예상외로 적은 저항을 받으면서 화북·동북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함으로써 국부측의 승리가 압도적인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원조도 급속도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리하여 이루어진 각지의 주요 도시 점령은 점(點)과 선(線)만을 확보한 일본군처럼 농촌지역을 완전 장악한 공산당에 의해 포위되는 상태였다. 1947년 9월 중국 공산당이 국부군에 대한 반격을 선언하였을 때 전선(戰線)에서는 국민당군의 지휘관들이 무기와 탄약을 가진 채 공산군측으로 이탈하는 현상이 잦았으며, 국민당 조직 자체도 중추부만을 남기고 전부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1949년 1월 장제스 총통은 휴전을 받아들인다는 뜻의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天安門) 광장에서는 건국식전(建國式典)이 베풀어지고 중국(中國)의 성립이 선포되었으며,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옮기게 되었다. 1954년 제1회 전국인민대표회의를 개최, 헌법을 채택하고 마오쩌둥을 초대 국가주석으로 선출하였다. 1959년 제2기 전인대에서 류사오치(劉少奇) 당부주석을 국가주석으로 선출. 1961

1963년 연속된 흉작과 소련과의 관계악화로 류사오치는 덩샤오핑(鄧小平) 총서기와 손잡고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경제조정책을 실시했다. 마오쩌둥이 류와 덩 등의 노선을 수정주의라고 규정한 것을 계기로 1966년에 문화대혁명 기운이 태동했다. 마오는 린뱌오(林彪) 등 군의 지지를 배경으로 홍위병을 동원해 당조직이나 각계의 지도층을 숙청했다.

1973년 8월 공산당 10차 대회에서 소위 4인방인 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장칭(江靑)·야오원위안(姚文元)이 권력을 장악, 실각한 덩샤오핑 외 다수가 복권됐다. 그 후 4인방은 저우언라이(周恩來) 타도를 주창했다.

1975년 1월 제4기 전인대에서 저우언라이가 ‘4개의 근대화’를 제창한 후 76년 1월 서거하자 4인방은 덩의 실각을 목표로 주자파 비판운동에 불을 당겼다.

1976년 9월 마오쩌둥 사망 후 잠시 화궈펑(華國鋒) 체제를 거쳐 1978년 3월 제5기 전인대 후 덩샤오핑이 복권했다. 1989년 5월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으며 그 후 악화되었던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해 90년 들어 계엄령을 해제했다. 천안문 사태 여파로 보수파가 세력을 잡는 듯했으나 1991

1993년에 밀려든 개혁·개방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2003년 3월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후진타오 국가주석, 원자바오 총리 체제가 출범했다.

한편 대만으로 옮겨간 국민당 정부도 국제사회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 안정기에 들어섰으며, 장제스가 1975년에 사망한 후 부총통 옌자진이 계승, 신임총통에 취임하였으나 1978년 3월 장제스의 아들 장징꿔로 이양되었다. 19 88년 1월 장총통이 사망하자 리덩후이(李登輝) 부총통이 승계하였다.

대만(타이완)[편집]

(臺灣) Taiwan

본토수복(本土收復)을 최고 국책(國策)으로 삼고 있으나 1954년 12월 체결된 미국·중국 공동방위조약에 의하여 무력행사에는 미국의 동의를 얻도록 되어 있으며, 1958년 가을 중국군의 진먼섬(金門島) 포격으로 대만 해협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덜레스 미국무장관의 압력으로 무력 침공은 사실상 단념하게 되었다. 중화민국은 1949년 이래 실시된 계엄령으로 국민의 자유가 제약을 받고 있다가 1987년 해제되었다. 반공·친미정책이 외교정책의 기조였으나 현재 미국과의 단교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1981년 이후 중국으로부터 평화공세와 통일제의를 받았으나 계속 일축하다가 1987년 본토의 친족방문을 허용하는 등 교류를 시도하고 있으며, 1988년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정치의 민주화를 천명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리덩후이는 1996년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로 재선되었다. 대만은 1971년 유엔 탈퇴, 영토 귀속문제 등으로 많은 수교국들과 단절하여 현재 정식수교국은 31개국뿐이지만, 실제로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국가와 경제·문화 교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0년 3월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천수이볜(陳水扁)과 뤼슈롄(呂秀蓮)이 각각 총통과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천수이볜[편집]

陳水扁 (1950

)

대만 남부 타이난현(臺南縣)의 콴톈향(官田鄕)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빈궁함 속에서도 항상 1등으로 졸업했다. 1969년 국립대만대학교 상경대 공상(工商)관리학과에 합격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법률학과로 전공을 바꿔, 재학 중 법률고시에 응시, 최연소 변호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 가오슝(高雄)사건으로 다수의 민주운동가들이 시위주도 혐의로 체포되자, 민주운동가들을 변호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자유와 인권, 대만 국민들을 위한 민주주의 회복운동에 힘쓴 그는 1981년 제4기 타이베이 시의원에 당선되고, 1989년 입법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뒤 민진당의 원내 제1간사장이 되었다. 1994년 민진당의 타이베이 시장후보로 직접선거에 의해 시장직에 당선되었고, 그가 재직하는 동안 타이베이는 행정절차의 개선 및 도시개발이 현저히 이루어져 아시아 5대 도시로 선정되었다. 2000년 3월 18일 민진당의 총통 후보직으로 출마하여 뤼슈롄(呂秀蓮)과 제10대 총통과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중국[편집]

中國 People’s Republic of China

중국은 건국과 동시에 중국의 봉건적 토지 소유 관계를 일소하고 지주계급(地主階級)과 소작관계(小作關係)를 말소하기 위한 사회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건국 이듬해인 1951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항미원조(抗美援助)의 구호를 외치더니 약 75만의 군대를 한국전선에 투입하였다. 전통있는 중국사회의 갑작스러운 공산주의 혁명으로 혼란했던 민심을 전쟁 분위기와 긴장을 이용해 수습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구실로 증산절약운동(增産節約運動)과 위생운동을 전개하고 이어 3반5반운동(三反五反運動)을 전개하였다. 1953년에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세우고 320억 원(元)을 투입했는데 이 중에는 소련의 20억 달러 원조가 포함되어 있다. 1958년에는 제2차 5개년 계획에 접어들었으나 1959년부터 3년간 계속된 한해(旱害)에다 성급한 인민공사화(人民公社化) 실패가 겹쳐 중·소 논쟁의 격화로 말미암은 소련 기술자의 철수로 전면 실패를 자인, 부득이 1965년까지 경제조정기간을 거친 끝에 1966년부터 제3차 계획에 착수했다. 1966년 이후 문화혁명에 의한 정권투쟁(政權鬪爭)은 1968년 10월 중앙위원회 확대 총회에서 류사오치(劉少奇)를 ‘영원히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의하여 일단락지었다. 이에 힘입어 마오(毛) 일파는 1969년 당(黨) 제9회 전국대표대회에서 류사오치 등 실권파(實權派)를 정식으로 당에서 추방하는 한편 린뱌오(林彪) 부주석을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린뱌오 또한 1971년 9월 쿠데타 미수 끝에 제거되었다. 1973년 8월 제10회 전국인민대표회의 이후 저우언라이 수상을 중심으로 온건 세력이 집권하고 있다가 1976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혁명 제2세대에 속하는 화궈펑을 수상 겸 당주석으로 임명함으로써 혁명 제1세대부터 권력의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룩하였다.

건국 20여 년이 되는 동안 문화대혁명, 4인방(四人幇)의 제거 등 숱한 내부 혼란을 겪으면서도 중국은 ‘빈곤의 나라’라는 과거의 이미지를 개선시킨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 근거로는 ① 12억 인구의 의식주 해결, ② 21차에 걸친 핵실험, ③ 7개의 인공위성 발사, ④ 제트기·전차·잠수함·미사일의 생산, ⑤ 석유의 자급자족, ⑥ 거대한 공업시설, ⑦ 수개의 양쯔강 횡단 교량 건설, ⑧ 세계에서 가장 힘든 몇 개 지역의 철도망 건설, ⑨ 광범위한 분야의 과학적 조사 연구 실시 등과 같은 사실들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은 1971년 국제연합에서 중국대표권 승인에서 승리함으로써 정권의 정통성을 대외적으로 보장받았으며, 그 후 대미·대소관계에 있어 교류를 재개하는 한편 국내적으로도 부분적인 경제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1980년 덩샤오핑이 화궈펑과 5년 간의 권력투쟁 끝에 중국 최고 지위자로 부상했고, 1988년 리펑이 총리가 되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장쩌민 상하이시(市) 당서기가 총서기로 선출되어 1990년부터 주석직을 승계받아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998년에는 리펑 총리에 이어 주룽지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2003년에는 원자바오 총리가 취임했다.

3반5반운동[편집]

三反五反運動

중국의 내정(內政) 개혁 운동의 하나. 중공 정권의 초기 공산주의 혁명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전개된 운동으로 공산당 정부 공작원의 부정(不正)·낭비(浪費)·관료주의(官僚主義)의 3해(三害)를 없애고, 이러한 3해와 결탁한 자본가·상인·지주를 제거하려는 것이 3반(三反)이다.

5반은 증수회(贈收賄), 탈세(脫稅), 국가 자재의 횡령(橫領), 원료와 급료의 사기·착복(着服) 및 국가 경제정보의 누설 등 5해(五害)를 없애자는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이 운동 기간인 1950년에서 1954년 사이에 83만 명의 ‘인민의 적’이 제거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인민공사[편집]

人民公社

중국(中國)이 1958년에 추진한 공산주의적인 대규모 집단농장. 농업협동화가 소규모의 공동노동체제였기 때문에 대규모 수리공사(水利工事) 같은 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규모의 공동노동조직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인민공사는 1만 명으로부터 4만 명을 포용하는 규모이며 10개 정도의 집단농장 결합으로 조직된다. 이 인민공사는 전통적인 토지와 도구의 소유권 개념을 지양시키고 집단소유제와 전인민소유제를 채택하였으나 현재는 생산대(生産隊)의 소유제를 추가한 3급소유제(三級所有制)를 시행하고 있다. 인민공사는 공업·농업·상업·교육·군사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농업도 광범위하게 농업·임업·목축업·부업(副業)·어업을 영위한다. 공사에는 공동식당·유치원·양로원·병원 등 복지시설을 설치하고, 분배제도로서는 무상급여제와 임금제를 병행하여 실시하고 있다.

중·소 논쟁[편집]

中·蘇論爭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 이후 소련 공산당과 중국의 공산당 사이에 공산주의 이념(理念)의 원칙적인 여러 문제에 관해 벌인 논쟁. 이 논쟁의 발단은 1958년부터 시작되는 중국의 제2차 5개년 계획에 적극 후원하겠다던 소련이 실행을 하지 않았다는 점, 중국이 대만해협의 위기를 조성했을 때 소련은 겉으로 중국측을 옹호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 중국과 인도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소련이 중립적 입장을 취한 점 등에 대해 중국이 오랫동안 축적된 불만을 표면화함으로써 생겼다. 196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의에서는 1956년에 채택된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을 재확인하는 공동선언서를 채택하였다. 이 회의에 배석원 자격으로 참석한 중공 대표 캉성(康生)은 이때까지 쌓였던 소련에 대한 불만을 소련의 평화공존론을 공격함으로써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캉성은 ‘미국이 여전히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대만 해방이 미국의 방해공작으로 완수되지 않았다는 점과 흐루시초프의 낙관적인 평화공존론으로 대미유화정책이 대두되고 있는 점’을 비판하였다. 중공은 또 수정주의에 대해 비난을 가하였고, 레닌주의의 정당성을 신봉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소련의 쿠시넨(Kwusinen)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은 한낱 낡은 교조(敎條)로 화석화(化石化)할 것이 아니라 항상 변천하는 새로운 역사 상황에 보조를 맞추어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며, 흐루시초프야말로 현역사상황에 가장 알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공로자이며 그의 평화공존론은 현국제정세에 가장 합당하도록 레닌주의 외교정책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신노선이라고 중공에 대해 반박하였다. 이렇게 평화공존론에서 시작된 논쟁은 1인숭배사상 배격론, 알바니아 문제, 유고슬라비아 문제, 소련 공산당의 신강령, 후진국 민족해방운동 성격 규정, 핵무기 문제 등을 둘러싼 전면적 논전으로 번져갔다. 결국 이 이념분쟁의 배후 요인은 소련 공산당이 현대수정주의자·기회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중국이 교조주의자·모험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는 양국의 사회적 현실, 사회주의 발전 단계의 차이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공산주의 진영 내부의 선진과 후진, 부유와 빈곤, 현상유지와 현상타파, 보수와 혁신의 대립, 한걸음 나아가서는 서방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소련 공산당과 동방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중국 사이의 대립이 곧 중·소 이념 분쟁의 기본 성격이라 하겠다.

저우언라이[편집]

周恩來 (1896

1976)

중국의 정치가.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1919년 5·4운동 이래 중국 공산당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20년 파리 유학, 1927년 남창(南昌) 폭동에 참가하였고, 1928년에는 소련에 갔다. 1930년 중국 중앙정치국 주석이 되었으며, 1936년 국·공 합작을 이룩하였다. 중·일 전쟁(中·日戰爭) 중에는 국민당 정부의 정치위 부위원장, 1949년 중국 외상, 1954년 중국 수상(首相)으로서 제네바 회의에 참석했다. 1955년 반둥회의 중국 수석대표가 되었고, 1972년·1974년에는 미국 대통령 닉슨과 포드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미·중국 접근외교를 펴는 등 탁월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항상 제2인자이기에 만족하는 그의 원만한 성격은 1976년 암으로 사망하기에 이르기까지 당내외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평화 5원칙[편집]

平和五原則

원래는 1954년 4월 인도와 중국 사이에 체결된 ‘티베트·인도 사이의 통상 및 교통에 관한 협정’의 전문(前文)에서 표방된 것이었으나 6월 저우언라이·네루의 공동 성명에서 ① 영토와 주권의 상호존중, ② 상호불가침, ③ 내정불간섭, ④ 평등호혜(平等互惠), ⑤ 평화적 공존 등의 5원칙을 재확인했다. 이 평화 5원칙은 1955년의 반둥회의 결의사항의 골자로 되었으며, 중국은 자기들 외교정책의 기본방침으로 선전하고 있다.

대약진[편집]

大躍進

중국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건설운동으로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에 입각하여 추진한 경제의 고도성장정책이다. 1958년 후반에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즉 총노선·대약진·인민공사라는 3대 목표로 전국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도시·공업·사회제도·당의 노선 등에 영향을 끼쳐 공업과 농업, 대도시와 중소도시, 대공장과 중소공장, 선진기술과 재래기술 등을 발전시키는 방침이 채택되어 사회제도에 있어서의 현저한 변화를 이루었다.

이전의 소련 사회주의의 여러 정책이 중공업우선정책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집단에 의한 사회건설 방식이었지만, 대약진정책은 대중노선을 채택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비약적인 성장이 농업 생산력의 객관적인 한계를 무시한 정책과 현실을 무시한 중공업우선정책, 3년간의 자연재해와 중·소 관계의 악화 등으로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대약진 정책의 실패는 마오쩌둥 비판을 초래하여 마오쩌둥은 일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이후 문화대혁명에 의한 마오쩌둥의 권력탈환에 영향을 미쳤다.

랴오청즈[편집]

廖承志 (1908∼1983)

중국의 정치가. 국민당 원로 랴오중카이(廖仲愷)의 아들로 일본에서 출생했다.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 링난(嶺南) 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 대학 중퇴, 유럽으로 가서 공산당 활동을 하였다. 1932년 귀국, 활동도중 체포되었다. 어머니의 탄원으로 석방된 후 1934년 대장정에 참가하였다. 당중앙출판국장과 중국 공산당 7기 후보중앙위원 등을 역임하고 1947년 광둥으로 가서 남방당부를 주재했다. 중·일전쟁 때 홍콩에서 활동하던 중 국민당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공산당 간부가 되어 화교문제와 통일전선활동 등을 지도했다. 중일우호협회회장이 되었을 때는 일본과의 각서무역을 주재하는 등의 주로 대외적 통일전선 업무를 맡아보았다.

문화대혁명[편집]

文化大革命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약칭. 1965년 가을부터 중국에서 일어난 정치·사상·문화 투쟁. 1966년 봄부터 중국은 모사상(毛思想)에 의한 국론통일에 힘쓰면서 홍위병조반단(紅衛兵造反團)이 인민해방군의 지원하에 부르주아 실권파 및 ‘현대수정주의 분자’들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문혁(文革)은 자본주의적 역사와 조건 속에서 형성된 인간을 개조하여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을 만들고 계급분화와 특권 이익집단화의 제반 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평등한 인간생활을 보장, 발전시키는 사회를 창조한다는 목적에서 전개되었다. 문혁(文革)은 1967년 들어서 ‘전(專)’ 즉 현대적 기술정보와 과학적 방법론의 도입으로 생산성 향상과 능률 제고를 바라는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을 중심으로 한 실권파와 ‘홍(紅)’ 즉 이념을 바탕으로 한 인간 내지 정신혁명 우선을 주장하는 마오쩌둥 당주석파간의 권력투쟁적 양상으로 확대되었으나, 1968년 10월 류사오치가 실각, 마오쩌둥 당주석파의 승리로 일단락지어졌다.

천안문 사건[편집]

天安門事件

① 중국 마오쩌둥(毛澤東) 체제 말기인 1976년 4월에 있었던 대중반란. 중국 문화대혁명 이래의 마오쩌둥 사상 절대화 풍조와 마오쩌둥 가부장 체제에 대한 중국 민중의 저항을 나타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에서는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간 實權派)’ 비판 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따라서 오랜기간 중국의 혁명과 건설 및 국제 무대에서의 중국의 위신 증대에 기여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도하려던 중국 민중의 의지는 꺾이고, 다시 극좌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1976년 4월 4일 청명절(淸明節)에, 베이징(北京)의 민중은 손에 손에 화환과 플래카드를 들고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 영웅기념비를 향해 시위행진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자필 비문이 새겨져 있는 기념비는 민중의 화환에 의해 제단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시 당국과 관헌은 이 기념비에 바친 화환을 모두 철거하였고, 다음날인 5일 격노한 대중은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자동차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야기되었다. 플래카드에는 후에 ‘4인방’이라 하여 체포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과 측근인 야오원위안(姚文元) 등을 비판하는 시가 많이 게재되어 마오쩌둥 체제에 대한 반역 의사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압되었으며, 덩샤오핑(鄧小平:당시 중국공산당 부주석·부총리)에게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실각시켰다. 반면 이 사건으로 해서 화궈펑(華國鋒)은 정식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은 그 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0월에는 ‘베이징 정변’으로 4인방이 체포되는 등 격동의 시기를 체험하였으나, 1978년 11월에는 천안문 사건이 혁명적 행동이었다는 대역전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이 사건은 1919년의 역사적인 5·4운동을 본떠서 ‘4·5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② 1989년 6월 4일 미명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노동자·시민들을 계엄군을 동원하여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당시 베이징에서는 그 해 4월 15일 후야오방(胡輝邦)이 사망한 후, 팡리즈(方勵之)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 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당국은 학생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 베이징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한편 학생들의 요구에 유연한 대응을 보이던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그의 해임설이 떠도는 가운데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알려진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국무원 부총리 등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6월 3일 밤 인민해방군 27군을 동원, 무차별 발포로 천안문 광장의 시위군중을 살상 끝에 해산시켰으며, 시내 곳곳에서도 수천 명의 시민·학생·군인들이 시위 진압과정에서 죽거나 부상했다. 이 사건은 당시 중·소 수뇌회담 취재차 입국했던 외국 기자들에 의해 즉각 전세계로 보도되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는 이와 같은 비인도적 처사에 항의, 강력한 비난성명을 냈다. 이 사건 이후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는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중국 지도부는 반혁명분자에 대한 숙청, 개인숭배 조장, 인민들에 대한 각종 학습 등 체제굳히기와 함께 개방정책 고수를 천명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확립을 내세우는 등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여왔다.

화궈펑[편집]

華國鋒 (1921 ) 중국의 정치가. 산시성(山西省) 자오청(交城) 출생. 1959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발탁되어 후난성 위원회 서기로 승진, 1964

1966년 후난에 240㎞에 달하는 대규모 수리관개용 수로공사를 지휘, 완공시켜 농업 분야에서 능력을 과시하였다. 1968년 후난성 혁명위원회 부주임, 1969년 당 제9기 중앙위원, 후난성 당위 제1서기 겸 후난성 군구(軍區) 제1정치위원으로 후난성 당·정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71년 ‘린뱌오(林彪)사건’으로 중앙에 진출, 국무원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도하에 린뱌오 사건을 조사하고, 1973년 당 제10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위원, 1975년 국무원 부총리 겸 공안부장, 1976년 2월 저우언라이 사망 후 국무원 총리직 대행, 4월 당중앙위 제1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가 되었다. 10월 장칭(江靑) 등 4인방(四人幇) 체포에 협조하고, 당 중앙위 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국무원 총리 겸임), 1977년 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주석, 군사위원회 주석, 당중앙당학교 교감 겸임 등으로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았고 문화대혁명을 지지하여 급속히 승진하였다. 마오쩌둥이 죽은 후 군부 실력파와 협조하여 문화혁명파의 주도자인 4인방을 제거하였지만 그 역시 실용주의 정책을 견지하는 덩샤오핑(鄧小平) 일파에 의해 실권을 빼앗기고 당과 정부 최고위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992년 당 제14기 전국대표대회 대표선거에서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덩샤오핑[편집]

鄧小平 (1904

1997)

중국의 정치가. 쓰촨성(四川省) 출생. 1918년 프랑스로 유학, 1921

19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모스크바의 중산(中山) 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7년 광시(廣西)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 1933년 반주류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고 장정(長征)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창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한편 류사오치(劉少奇)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으로부터 반모주자파(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쩌둥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에 의하여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 해 9월 마오쩌둥이 죽고 화궈펑(華國鋒)이 저우언라이 계열의 노간부인 예젠잉(葉劍英), 특무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복직되었다. 그 후 화궈펑과 5년 간의 권력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의 집권 후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 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1989년 4월 천안문(天安門) 사건으로 그의 정치적 거취가 불안해 보였으나 위기를 수습하고,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후 1997년 병세 악화로 사망하였다.

주자파[편집]

走者派

중국은 1971년 이후 ‘비수정풍(批修正風)’ 운동,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고조, 정신혁명의 심화를 꾀한다. 1974년에는 ‘비림비공’ 운동을 한층 격렬한 민중운동으로 전개하고 1975년에는 ‘수호지비판’을 펴서 수정주의·자본주의·봉건적 투항주의의 잔재를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1976년초 인민일보(人民日報)는 계급투쟁을 강조한 마오쩌둥의 지시를 발표하였으며, 동년 2월에는 당 제1부주석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계급이론 학습’ 대신 ‘안정과 단결’ ‘국민경제의 향상’에 중점을 둔다고 본격적으로 덩샤오핑을 비판하였으며, 그러한 덩샤오핑 일파를 주자파(走者派)라고 칭하였다. 반주자파 운동은 당내 강·온건 양 파의 당권경쟁으로 파급되어 1976년 4월 중앙당 중앙위원회는 마오쩌둥의 직접 개입으로 덩샤오핑의 모든 공직을 박탈키로 하였으며, 화궈펑 수상서리를 정식 수상에 임명하여 화궈펑 과도체제를 탄생시켰다.

4인방[편집]

四人幇

장칭(江靑)·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등 화궈펑에 대항해 장칭을 당주석으로 앉히려는 쿠데타 음모를 주도한 4인을 말한다. 1976년 10월 당주석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화궈펑이 취임한 후 장칭을 중심으로 한 상해 문혁파 4인이 쿠데타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음이 발표되었다. 이들 4명은 모두 문화혁명 후 득세한 소장·과격파들로서 반주자파 운동의 중심세력이기도 하였다. 북경의 대자보(大字報)들은 장칭파가 마오쩌둥의 유서를 위조하여 화궈펑을 제거하고 장칭을 당주석에 앉히려고 음모하였다고 비판하면서 화궈펑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였다. 권력투쟁에서의 강경파 실각은 군부와 인민들 사이에 광범한 지지기반이 없었던 데에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장쩌민[편집]

江澤民 (1926 ) 중국의 정치가.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 출생. 상하이교통(上海交通) 대학 전기학과를 졸업하였다. 재학시절 상하이 학생운동권의 핵심인물로 두각을 나타냈고 1946년 공산당에 입당, 졸업 후에도 지하활동을 계속하였다. 1949년 상하이에 있는 식품공장·비누공장·전기기계공장의 서기·공장장 등을 지냈고, 1955년 모스크바 스탈린 자동차공장에서 1년간 연수하였다. 1956년 귀국 후 1966년까지 창춘(長春)·우한(武漢)·상하이 등지를 옮겨가며 공장관리자 및 공업연구소 책임자로 일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곧 당과 공직에서 추방되어 10년 동안 피신생활을 하다가, 1976년 국무원 제1기계공업부 책임자로 복귀하였다. 1980년 국가 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전국 인민정치 협상회의 위원이 되었다. 1983년 국무원 전자공업부장(장관)에 오르고, 1984년 국무원 전자공업 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5년 상하이시 시장이 되고, 1987년 상하이시 당서기장직도 맡아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국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1989년 6월 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이 천안문(天安門) 광장 시위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실각하자, 같은 달에 개최된 제13기 4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총서기에 선출되었다. 이어 1990년 4월 중국의 최고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