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유엔과 전후의 세계/평화에의 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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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의 길을 찾아서〔槪說〕[편집]

1953년 1월에 취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민주당 정권이 취해온 ‘소련봉쇄정책’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방법이라고 비판하며 ‘힘의 신봉자’인 덜레스를 국무장관으로 기용하여 적극적인 ‘롤 백 정책’을 추진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에 대하여 스탈린이 죽은 소련에서는 평화공세를 강화하여 비교적 유화적인 외교정책을 전개하였다.

1953년 7월, 2년 동안 난항을 거듭하던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이 타결되고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인도차이나에서는 ‘승리 없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중공은 호치민의 북베트남을 원조하고 프랑스는 바오 다이(Bao Dai)의 남베트남과 함께 북베트남을 상대로 싸워 분쟁은 완전히 국제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리하여 한국과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든(R. A. Eden)의 노력으로 1954년 4월 제네바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국과 중국·북베트남·북한 등 19개국이 참석하였으나 한국 문제는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했고, 인도차이나는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리하여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로는 처음으로 지상에서 전투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1955년 4월 아시아·아프리카 29개국 대표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회의를 열었으니 수카르노의 개회연설대로 이 회의는 ‘인류사상 최초로 양대륙에 걸친 유색인종의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동남아시아 조약기구의 참가국인 타이·필리핀 등도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평화 10원칙’ 발표되어 이제까지 노예적 지위에 있던 약소국들이 평화를 요구하고 전쟁의 원인이 되는 식민지주의에 반대를 하게 됨으로써 그 의의는 중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국제정세가 평화적 방향으로 기울어져가는 가운데 1955년 7월 제네바에서 일주일 동안 전세계가 기대하던 4거두회담(四巨頭會談)이 열리게 되었다. 미·소·영·불의 4국 수뇌들은 비록 심각하게 대립하였지만 선의(善意)와 성의를 가지고 토의를 계속, 모든 난문제의 해결을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협상이라는 수단으로 해결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 협상을 통한 해결의 정신이 ‘주네브 정신’으로 불리는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1956년 10월 프랑스·영국·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이집트를 침공한 수에즈 전쟁이 일어났고, 소련은 헝가리 의거를 군사력으로 무참히 짓밟아 평화를 찾는 세계의 여론을 외면하였다.

1957년 가을에 개발된 대륙간 탄도탄(ICBM)은 핵무기의 발전과 함께 군사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정치 면에서도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 것으로, 상대국들 사이에 자국의 일방적인 승리란 불가능하다는 정세판단을 갖게 만들어 동서간 타협의 기운을 마련해 주었다. 1960년대 이후 아시아·아프리카 등지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분쟁의 해결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많은 평화적 해결기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쿠바 위기 때의 미·소 협력, 닉슨의 중공 방문, 브란트의 동방정책, 헬싱키 선언, SALT회담 등을 통하여 동·서간에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노력은 진지해져가고 있다. 1977년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은 수십 년을 끌어왔던 중동전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쾌거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덜레스 외교[편집]

-外交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Dulles, 1888

1959)는 1950년 애치슨(Acheson) 국무장관의 특별고문으로 있었고, 이듬해 대통령 특사로 대일강화(對日講和), 미국과 필리핀의 안전보장조약, 안저스(ANZUS) 조약 등의 체결에 노력하였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요청으로 국무장관이 되어 ‘롤 백 정책’ ‘뉴 루크(New Look) 정책’을 채택하고, 냉전(冷戰)의 장기화에 대비하기 위하여 경제와 국방의 균형, 기본전략으로서 공군력과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즉각적인 대량 보복정책’을 세웠다. 또한 동남아시아 집단방위조약기구(SEATO), 중동방위조약기구(METO) 등을 성립시켜 집단안전보장에 주력하였다.

롤 백 정책[편집]

Roll back 政策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의 외교정책. 민주당 행정부의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수동적 패배주의라 규정하고 보다 적극적인 정책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 위성국의 여러 민족에 공작을 하여 예속민족을 해방시키려 하였다. 이 정책은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취임연설에서 미국 정책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제네바 회의[편집]

-會議

1954년 4월에서 7월까지 한국과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스위스의 제네바(Geneva)에서 열린 국제회의. 한국전쟁 참전국 및 소련·중국·북한·인도차이나 3국 등 19개국이 참가하였다.

한국의 통일문제는 이 회의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고, 인도차이나 문제에 있어서는 휴전협정이 성립하였다. 그 내용은 인도차이나 3국의 독립과 2년 후에 베트남 통일선거를 실시한다는 등 10개 항목이었다.

파리 협정[편집]

-協定

1954년 9월

10월에 처음에는 런던, 다음은 파리에서 서유럽 9개국 외상들이 모여 성립시킨 협정. 참가국은 미국·영국·캐나다·프랑스·서독·이탈리아·베네룩스 3국 등. 이 협정에는 서독의 주권을 회복시키고 서독을 서유럽 연합과 북대서양조약에 가입케 하여 재군비를 인정하는 것과 자르(Saar)의 귀속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반둥회의)[편집]

-會議(-會議)

195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A. A.(Asia-Africa) 제국(諸國) 29개국의 대표자가 모인 회의. 공동선언에 표시된 평화 10원칙은 “관용을 실행하여 선량한 이웃으로서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며” “모든 국민은 유엔 헌장의 목적과 원칙에 따라 자기 자신의 정치·경제제도·생활양식을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고 하였다. 전쟁의 원인이 되는 식민주의에 반대를 하게 된 것은 큰 의의를 갖는다.

4거두회담[편집]

四巨頭會談

1955년 7월 제네바에서 열린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수뇌회담(首腦會談). 아이젠하워·이든·포르·불가닌 등의 4수뇌는 이 회담에서 유럽의 안전보장문제(安全保障問題)·군축문제(軍縮問題)·동서교류(東西交流)의 촉진 등을 토의하였다. 구체적인 성과는 얻지 못하였지만 회의는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열려 ‘주네브 정신’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

아이젠하워 독트린[편집]

Eisenhower Doctrine

1957년 1월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의회에 보낸 ‘중동특별교서(中東特別敎書)’.

1956년의 수에즈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물러난 다음, 공산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중동지역에 미군(美軍)의 주둔 권한을 대통령에게 줄 것, 중동지역에 대한 경제원조로서 이후 2년 사이에 4억 달러를 지출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이 중동지역을 중시하는 정책이다.

유럽경제공동체[편집]

-經濟共同體 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의 약칭. 유럽공동시장(European Common Market)이라고도 한다. 1957년 3월 아데나워 서독 수상, 프랑스의 장모네 등 유럽통합론자들의 제창으로 로마에서 EEC 설립에 관한 조약을 조인하고, 1959년 1월에 정식으로 발족했다. 가맹국은 서독·프랑스·이탈리아·베네룩스 3국 등 6개국이다.

전후(戰後)의 서유럽 여러 나라는 미국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국제정치상 지도성을 잃었으며, 식민지 상실에서 오는 경제적 타격이 컸다. 그리하여 유럽경제의 번영과 정치적 발언의 강화를 목표로 이 공동체는 미·소 2대 블럭과 맞먹는 광역경제권(廣域經濟權)을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위해 ① 관세동맹의 결성에 의한 역내관세(域內關稅) 무제한 철폐, ② 역내의 노동력·자본의 자유이동, ③ 농업수송에 관한 공동정책의 결정, ④ 경제정책의 조정, ⑤ 유럽 및 해외속령(海外屬領)의 자원 공동개발 등을 수행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취한 후 가맹국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6개국의 공업생산지수는 1958년 100으로 할 때 1963년 초에는 142로 상승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공동체에서 제외된 유럽 각국에 커다란 충격을 주어 1961년에는 영국이 가입 신청을 하였다. 이 문제는 그 후 오랫동안의 논란 끝에 1971년 6월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영·불 회담(英佛會談)에서 최종적인 합의를 봄으로써 회원국은 영국을 비롯하여 에이레·덴마크·노르웨이 등 4개국이 늘어난 10개국이 되었다. 그 결과 유럽경제공동체는 5강시대(五强時代)의 명실상부한 유럽 통합체를 발족하게 된 것이다.

유럽연합[편집]

-聯合

EU

European Union의 약칭. 유럽경제공동체(EEC),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의 3기관을 통합한 것으로, 1965년 단일이사회와 단일위원회 설립에 관한 통합조약을 채택하고 1967년 7월에 공식 발족하였다. 본부는 브뤼셀에 있으며, 가맹국은 1995년 현재 프랑스,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 그리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핀란드, 스웨덴, 오스트리아 등 15개국이다. 1993년 1월부터 명칭을 기존의 유럽공동체(EC)에서 유럽연합(EU)으로 개편하였다.

EU는 회원국간에 국경 없는 지역 창설, 경제·사회적 결속 강화, 경제통화 동맹 및 단일통화 수립을 통한 경제·사회 발전을 촉진하고 공동방위 정책을 포함하는 공동외교 안보협력을 통해 국제무대에서의 유럽 일체성 옹호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유럽 시민권제도 도입을 통해 회원국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고 내무·사법 분야의 발전을 추구하기도 한다.

세계반공연맹[편집]

世界反共聯盟 WACL

World Anti Com­munist League의 약칭.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제창으로 진해에서 중국·필리핀 등 8개국이 모여 설립한 ‘아시아반공연맹(APACL)’은 1966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12차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1967년 4월 1일 ‘세계반공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 기구의 목적은 공산주의를 일소(一掃)하고, 정의·자유·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세계자유민의 단결을 도모하며, 반공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가맹회원국은 모두 60개국이며, 48개국의 정회원과 12개국의 준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1971년 7월 마닐라에서 제5차 총회를 열고, 42개국의 200여 대표가 참석, 북한의 게릴라전법을 규탄하였고, 닉슨의 중국 방문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성명하였다. 1987년 130개 국가와 국제기구 대표 475명이 참석하여 ‘자유를 통한 공동안보’를 주제로 제30차 총회를 개최했다.

브란트의 동방접근 정책[편집]

-東方接近政策

1966년 6월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연립내각인 키징거 정권이 수립된 후 빌리 브란트(Willi Brandt)는 외상(外相)으로 입각하여 대(對)동구접근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967년 1월 루마니아와 국교를 수립하더니 68년 1월에는 유고슬라비아와도 국교를 수립하였다. 1969년 10월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의 연립내각에 의한 브란트 정권이 수립된 후 브란트 수상(首相)은 시정연설에서 ‘계속과 쇄신’ 방침을 비치고 특히 동독과 동유럽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접근할 자세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처음으로 동독을 ‘국가로서의 존재’로 인정하고 2일 후에는 할슈타인 원칙의 포기를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11월 28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에 조인, 유럽의 전후현상(戰後現狀)을 인정하고 평화질서 속에서 독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노력한다는 외교의 기본원칙을 명백히 하였다. 1970년 3월에는 동독의 에르푸르트에서 전후 4반세기 만에 역사적인 양독(兩獨) 수상회담을 열었으며, 제2회는 서독의 카셀에서 브란트 수상과 동독의 슈토프 수상이 다시 모여 양독의 유엔 가입을 동시에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1969년 12월부터 소련과 상호무력불행사를 비롯하여 국교정상화를 위한 협상개최에 합의를 보고, 여러 차례의 회담 끝에 1970년 8월 12일 브란트 수상 자신이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 코시긴 수상과 함께 ‘서독·소련 조약’에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유럽의 현상 인정과 동서간의 긴장완화 및 상호협조를 다짐함으로써 냉전질서의 마무리를 위한 첫 조치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12월 7일에는 브란트가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방문, 고물카와 함께 국교정상화를 위한 조약에 정식으로 조인하였다. 이러한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거둔 가장 큰 수확은 1971년 9월 3일,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대국 사이에 조인된 베를린 협정이었다.

제2차 대전이 끝난 지 26년, 동·서독이 분단된 지 22년, 그리고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세워진 지 10년 동안 베를린 문제는 동·서 냉전의 초점이었다. 이 문제의 원만한 타결을 위해 협력과 화해를 바탕으로 한 협상외교를 벌인 것은 전후 최대의 성과였다. 9월 17일에는 소련의 크리미아에서 브란트·브레주네프 회담을 열고 동·서독의 유엔 동시가입을 위한 상호협조, 유럽안보회의 개최, 동·서 상호간의 균형있는 감군협상을 촉진한다는 등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브란트의 외교활동은 서독이 이제까지 서방 3국의 그늘 아래서 근신하던 자세를 탈피하고 동·서 외교의 한복판에 우뚝 선 ‘정치적 거인’으로서 독자적인 적극외교를 펴고 있다는 사실을 내외에 과시했다. 브란트의 업적은 1971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세계평화에의 기여란 측면에서 일단 권위있는 객관적 평가를 받고 있다.

미·소 전략무기 제한협정[편집]

美·蘇戰略武器制限協定SALT. 1969년 헬싱키에서 막을 올린 미·소 전략무기회담은 1972년 5월 ABM제한조약 및 공격용무기제한 잠정협정을 내용으로 하는 제1차 SALT협정을 타결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백파이어 폭격기와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에 대한 전력무기 취급 여부에 대한 논란과 미사일의 크기에 대한 문제의 시비로 제2차 SALT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미·소는 1976년 11월, 1972년·1974년에 체결된 핵군축조약에 적용될 2개 의정서에 조인을 했으며, 1977년 5월부터 다시 회담으로 들어갔다. 현재의 경우 양국의 경제사정으로 보아 군비경쟁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의 길이 모색될 것으로 보인다.

헬싱키 선언[편집]

-宣言

1975년 8월 1일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열린 전유럽 안보협력회의 최종단계의 수뇌 회담은 미·캐나다를 합하여 모두 35개국 수뇌가 역사적인 ‘헬싱키 선언’에 서명, 제2차 세계대전 후 30년에 걸친 긴장의 완화와 평화공존체제의 커다란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회의에서 조인된 문서는 주권의 존중, 무력불행사, 국경불가침 등 10개 원칙을 중심으로 하는 구주안전보장문제와 경제·과학·환경 분야의 협력, 사람과 정보의 교류, 회의 결과의 검정조처 등이 핵심으로 되어 있다. 중립제국들은 이 회의를 동서간 긴장완화의 진전이라고 환영하였으나 서독은 동·서독의 분할과 동구에 대한 소련의 지배권이 승인되었다는 이유에서 불만을 나타냈다. 이 회의와 병행해서 1973년 빈에서 진행된 중(中)유럽 상호 병력감축협상(MRFA)은 보유병력의 상한(上限), 공군병력 유럽 주둔 미군의 전술핵무기 문제 등의 갈등으로 별 진전이 없었다.

비동맹회의[편집]

非同盟會議

전후 식민주의의 고삐에서 풀려난 29개 신생독립국 외상들은 195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모임을 갖고 국제정치에서 독자적 영역 확보를 주목적으로 하는 제3세력권을 형성하였다. 반둥회의는 네루, 저우언라이 등의 참석하에 영토권 존중, 내정불간섭, 평화적 공존 등 신생독립국이 지향해야 할 ‘평화 5원칙’의 좌표를 설정하였으나 미·소의 견제작용으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1960년대의 해빙무드를 계기로 비동맹이라는 형식으로 재출범하였다. 유고의 티토,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을 산파역으로 해서 1961년 9월 베오그라드에서 회동한 29개 비동맹국 대표들은 중립·반식민·반제국주의·평화공존 등을 기본정신으로 하는 27개항의 ‘베오그라드 선언’을 채택했다. 70년대 민족주의·반식민주의·반강대국의 입장이 크게 부각되어 개발도상국의 권익을 추구하는 압력단체가 됐다. 1988년 외무장관회의에서 핵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 국제공동체의 최우선 과제라는데 합의를 보았고, 유엔의 모든 토의에서 강력한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 비동맹세력은 미국에 대한 불신에서 반미·좌경의 색채를 띠고 있다.

서방선진 7개국 정상회의[편집]

G7(Group of Seven) Summit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이 1975년 7월에 제창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동년 파리 교외에서 제1차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동안 7개국과 1기구(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EC)가 참가해왔으나 97년 6월 20일 미국 덴버에서 개최된 제23차 회의는 러시아의 참여로 8개국 정상회의로 개최되었다. 석유위기와 인플레 극복, 국제무역상의 마찰 회피, 에너지대책 등 자본주의 제국간의 정치·경제적 조정을 꾀하고 서방측 선진국의 상호협력 도모를 목적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