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시사/정치와 생활/근대정치의 전개/근대정치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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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정치의 전개[편집]

近代政治-展開 문예부흥(Renaissance)과 종교개혁(Reformation)에 의해 동트기 시작한 근세의 여명(黎明)은 프랑스 대혁명에 이르러 백일(白日)이 되었으나, 시민사회가 완전히 형성되고 안정된 정치가 구축되는 데는 나폴레옹의 격랑(激浪)과 왕정복고(王政復古)의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몽사상과 혁명의 전개에 따라 구현되는 듯이 보이던 자유와 권리는 공포정치의 수단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는 오히려 인간의 경원(敬遠)하는 바가 되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이외의 나라에서는 더욱더 보수 반동정치로 치닫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와 같은 역사의 시행착오적(試行錯誤的)·변증법적(辨證法的) 발전을 거쳐 근대의 정치가 귀착한 것이 의회제도(議會制度)였다. 의회는 원래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과 자산계급(資産階級)의 장치로서 존재하였던 것이 19세기가 경과함에 따라 산업부르주아지의 강력한 정치적 기구로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왕의 권좌(權座)를 의회로 옮겨 의회가 남·녀의 성을 바꾸는 것 이외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을 정도의 권력을 향유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의회주권론(議會主權論)이 대두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국민의 다변적(多變的) 기질이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그대로 의회정치에 투영되어 다당정치(多黨政治)의 표본을 남겼으며, 독일에서는 의회정치에 대한 경험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연방의회의 구성을 통한 통일에의 의지를 불사르면서도 결국 강력한 왕권의 시녀에 불과한 제국의회(帝國議會)로 낙착했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19세기의 근대정치도 대립과 갈등에서 발전하여 나간다. 특히 이 시대는 정치적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이념적 차원과 실제의 정치면에서도 뚜렷하여 의회와 정당이 병행하여 발전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빈 체제와 자유주의 운동[편집]

Wien 體制-自由主義運動프랑스의 유럽 지배는 각국의 민족주의적 항쟁에 의하여 극복되었으나, 그 사이에 뿌려진 자유의 씨는 각지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전후(戰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빈에 모인 각국의 지배자들은 영토의 재분배는 술책과 타협으로서 결정볼 수 있었지만, 각국이 내포하고 있는 체제의 안정문제는 그러한 외형적인 국경문제보다 훨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의 군대가 주둔하여 있고 그 군대와 싸웠을 때에는 각국 국민들도 조국과 민족의 보위를 위하여 군주들에게 복종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군이 격퇴된 뒤에도 군주들은 보수·반동정책만을 취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나아가서는 신(神)의 이름을 빌려 군주의 영광을 더하게 할 뿐 아니라(이른바 신성동맹의 조약문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국민들에 대해서는 가부장으로 군림하려고 하였다. 영국은 이러한 신성동맹의 선언이 도덕적이어서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1815년 11월에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와 함께 나폴레옹과 같은 위험요소가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국제적으로 협력할 것을 쌍무(雙務)의 협정으로 못박았다. 각국은 국경의 확정을 위한 빈 회의로부터 시작하여 신성동맹을 거쳐 4국동맹(四國同盟)에 이르러선 완전한 보수주의적 체제를 갖추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각지에서 자유주의자들이 분연히 일어서 그들의 지배자가 안정을 명분삼아 자유를 탄압하는 데 대하여 저항하였다. 독일에서는 1815년 바로 그해부터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정치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이른바 브루센샤프트(Bruschenschaft)라는 것으로, 민족의 통일과 정치적 자유를 그들의 이념적 깃발로 삼았다. 1817년 10월 독일의 대학생들은 저항운동의 상징인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바르트부르크에서 성대한 축제를 열고 자유의 횃불을 밝혔다. 그리고 그 횃불로 탄압의 상징인 가발과 곤봉 및 반동적인 서적을 불태우고, 독일민족은 마땅히 한국가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독일의 학생운동을 지켜보던 각국 정부는 1819년 9월 카를스바트(카를로비 바리)에서 회의를 열고 탄압책을 강구한 끝에, 대학과 언론을 규제하고 혁명적 활동을 조사할 중앙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합의하고서 그 취지를 선언하였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에 저항하던 시기에 조직된 탄소당(炭燒黨:Carbonari)이 있어 빈 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구성원은 대체로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하여 진보적인 귀족과 지식인들이 한데 합쳐 있었으며, 활동범위는 이탈리아의 여러 곳은 물론 프랑스에까지 넓게 퍼져 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자유가 외세의 축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한 저항의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마치니는 그들의 운동이 민중과 유리되어 있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청년이탈리아 당을 발족시키지만, 이탈리아의 통일은 그로부터 몇십 년 뒤의 일이 된다. 러시아에서는 해방전쟁에 참가하였다가 귀국한 청년 장교들이 조국의 낙후한 실정에 눈을 떠 전제정치를 지양하고 입헌정치를 시행할 것과 사회적 불평등의 표본인 농노제(農奴制)를 철폐할 것 등을 내세우고 구제동맹(救濟同盟)을 결성하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중의 과격파 비밀결사인 데카브리스트(Dekabrist:12월 당원)들은 조직을 확대하여,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을 틈타 무장봉기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러시아에서는 서구화의 주장과 슬라브 주의가 대립되었는데 이 논쟁은 러시아의 쇠망을 구제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7월혁명과 2월혁명[편집]

France-七月革命-二月革命 1824년에 루이 18세가 죽고 그 동생인 샤를 10세가 즉위하였는데, 이 왕은 절대주의적 정치를 강화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즉 구귀족을 우대하여 거액의 보조금을 지출하고, 가톨릭을 옹호하며, 언론을 규제하여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는가 하면, 반대의 소리를 하면 의회를 해산시켜 버리고 말았다. 1830년에 이르러서는 해외원정을 통하여 왕권을 과시하면서 안으로는 선거에 대한 노골적인 압력을 가하였다. 그는 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의회가 반대파들로 가득 찬 것을 보자, 의회를 소집도하기 전에 해산해 버리고 자기의 뜻에 맞추어 엄격한 제한선거(制限選擧)를 하려고 하였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7월 하순에 라파테트를 지도자로 하는 공화파의 영도 아래 바리케이드를 쌓고 왕의 군대와 격돌하였다. 그런데 왕의 군대는 봉기한 시민을 진압하기보다 오히려 혁명진영에 가담하는 병사가 늘어나는 형편이었으며, 이것을 알아차린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혁명이 과격하게 진행되면 곤란하다는 사실을 체험했던 부르주아지들은 왕족이면서 혁명가인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옹립하고 국민의 동의를 얻었다. 이로써 왕정복고 이후의 극단적 반동정책은 극복되었으나, 새정부의 무사안일주의 정책은 국민의 어느 계층에게도 호감을 사지 못하였으며, 1846년에는 농업공황이 닥친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드디어 1848년 2월에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의 봉기에 왕위를 쫓겨나고 말았다. 혁명을 유도하였던 각 파들은 군주의 지배시대가 지난 것을 알아차리고 공화국을 수립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른바 제2공화국은 남자들만의 보통선거를 통하여 구성된 의회를 정치적 주축으로 삼고, 루이 블랑과 같은 사회주의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국영기업을 세움으로써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이 협조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더욱 공격적으로 나와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의 철폐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양자간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아무런 경제정책적인 배려 없이 시작하였던 국영기업이 폐쇄되기에 이르자,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지의 배신이라고 공격하면서 다시금 파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6월 하순 사흘에 걸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노동자의 폭동은 진압되었으며, 이에 제2공화국은 완전히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들었고 의회중심정치가 되었다.

영국에서의 정치적 갈등[편집]

英國-政治的葛藤 19세기 초까지의 영국의회는 거의 지주계급의 독점무대였고, 따라서 18세기의 산업혁명(産業革命) 이래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산업자본가계급은 그들의 의사를 의회에 반영시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불합리성을 시정하기 위한 의회개혁운동이 18세기 말부터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에 놀란 귀족계급의 위축과 반동적 자세로 말미암아 정체된 상태에 귀족계급의 위축과 반동적 자세로 말미암아 정체된 상태에 있었다. 1830년에 대륙에서 일차적으로 빈 체제가 무너지자 영국에서도 개혁운동이 발달하였는데, 이때 기성정치세력이던 휘그 당이 토리 당에 대항하여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해 줌으로써 그것은 현실화되었다. 1830년 11월에 그레이내각이 성립되자 곧 선거법개정안(選擧法改正案)이 제출되었는데, 이것이 대폭 수정되자 그레이는 의회를 새로 선거하여 지지세력을 다시 확보하였다. 그러나 보수세력의 아성(牙城)인 상원을 통과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개혁의 실현이 난관에 봉착하자 민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하고 폭동으로 변할 위험성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태의 추이에 대하여 웰링턴을 지도자로 한 보수세력은 귀족들을 설득하여 양보토록 하였다. 드디어 1832년 6월 타협과 양보에 의해 선거법개정안(Reform Bill)이 성립하였고, 이에 따라 선거구는 인구분포에 의거 재조정되고 유권자의 수는 약 3배로 증가하였다. 선거법개정에 성공한 자유쥬의자들은 이에 만족치 않고 곡물법(穀物法)의 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곡가를 낮추어야만 노동자의 임금을 저수준(低水準)에 묶어 둘 수 있기 때문에 수입을 개방하여야 하고, 한편 대륙의 농업국도 영국으로 곡물을 수출하여야만 그 돈으로 공산품(工産品)을 사 갈 것이기 때문에, 곡물법은 영국의 산업자본가들에게 있어 이중의 장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산업자본가들은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곡가의 하락(下落)을 성취해야만 하였다. 1839년에 코브던과 브라이트 등은 곡물법반대연맹을 조직해 정치운동으로 확대하면서 의회에 직접 대표를 보내기 위하여 선거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토지귀족과 대지주·농민, 그리고 교회가 일치하여 반대하고, 한편 선거법개정운동에 참여했다가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한 노동계급이 협조하지 않기 때문에 그 세력이 크게 늘어나지 못하더니, 1845년의 흉작으로 곡물법의 철폐가 불가피하게 되자, 이듬해에 필의 보수당내각은 폐지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이로써 산업자본가들은 완전히 득세하게 되었고, 영국의 정책은 안으로는 자유주의 밖으로는 팽창정책으로 나아다. 이와 같이 부르주아지는 19세기 전반을 통하여 정치권력의 형성과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프롤레타리아는 여전히 소외되었다. 일찍이 1830년대 초에 영국에서 장전운동(章典運動:chartist movement)이 있었으나 당국의 탄압에 의하여 한번 좌절되었고, 이 영향으로 말미암아 30년대 말의 청원운동(請願運動:the national petition movement)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결점을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2년에는 제2차 청원운동이 전개되어 300만 명의 서명을 얻었는데도 의회는 이것을 외면하고 말았으며, 1848년에는 대륙의 혁명적 기세에 힘입어 대중봉기의 사태에까지 이르렀지만, 웰링턴이 진압에 나서자 이 운동은 흩어지고 말았다. 이에 노동운동은 온건한 사회주의진영과 과격한 공산주의 세력으로 나누어졌으며, 영국에서는 노동조합의 결성과 그의 타협적 노력에 의하여 드디어 19세기 말에는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하며, 1900년에는 노동당이 결성되고 급격한 성장을 보여 다수의 의원을 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곧 정권의 일익(一翼)을 담당하기에 이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이 1848년에 「공산당선언(共産黨宣言)」을 발표하면서 계급투쟁을 포고하고, 자본론(資本論)·잉여가치설(剩餘價値說) 등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이론을 전개하였으나 각국의 사정에 따라 그 세력의 신장은 부진하였다.

통일을 지향한 독일의 정치[편집]

統一-指向-獨逸-政治 나폴레옹의 몰락 후 안정된 질서를 구축한 것처럼 보이던 메테르니히의 보수체제도 1848년에 이르러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때는 이미 전신(電信)과 기차가 있어 파리의 2월혁명의 소식이 급속히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의 곳곳에서 불안상태가 나타나더니 3월 중순에는 빈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경찰과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더하여 군중들이 궁성 주변에 모여 메테르니히의 퇴진(退陣)을 요구하게 되었다. 군대가 출동하였지만 이들은 데모하는 군중을 방관할 따름이었다. 메테르니히는 그의 마지막날이 온 것을 깨닫고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자유주의자를 수상으로 등용하여 언론의 규제를 완화하고 헌법제정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조가 후퇴함에 따라 헝가리·북부 이탈리아 등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 오스트리아의 국세는 점차 기울어진다. 1848년은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독일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새로운 전기(轉機)가 되었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자유와 통일에의 열망이 하루아침에 터져나오는 듯했다. 각지의 대표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전독회의(全獨會議)를 열었다. 의화를 운용하는 경험이 부족하고 각지의 이해관계가 서로 어긋나는 난관이 있었으나 이것을 극복하고 12월에는 '독일민족의 기본법'을 제정하여 앞으로 미국식의 연방정부를 형성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곧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주도권 쟁탈을 둘러싼 대립과 반동세력의 재기에 의하여 결실을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의 상황을 파악하고 프로이센으로 돌아간 비스마르크는 정치의 수단으로서 설득과 타협을 주로 하는 의회를 포기하고 '철(鐵)과 혈(血)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는 군비를 늘리는 한편 국내의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억눌러 강력한 국내의 단합을 바탕으로 하고, 밖으로는 예정된 전쟁을 수행하여 통일을 지향했다. 그리하여 덴마크를 격파하여 분쟁지역을 독일에 편입시킴으로써 국민의 지지와 자신을 얻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이김으로써 독일연방에 대한 지도권을 확보하고,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쳐서 이겼다. 프로이센은 파리에 독일의 제후들을 소집하여 국왕을 황제 빌헬름 1세로 추대하고 독일제국(帝國)의 발족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수백 년 이래 독일민족의 숙원이던 통일국가가 이루어졌고, 통일국가의 형성에 의하여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온전히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조차 우선 통일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은 정치적 후진국이 되었고, 1920년대에 가서야 국민에 의한 정부를 갖게 되지만 그 시련은 더욱 심하게 된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성립[편집]

France 第三共和國-成立1848년 이래의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이 되었던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1세의 영화를 꿈꾸어 국민을 기만해 황제의 자리에 나아갔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국내에서도 허장성세(虛張聲勢)하던 루이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의 공격을 받고 여지없이 무너지자 국민들은 그를 축출하여 공화정부를 세웠다. 1876년의 새헌법으로 출발한 제3공화국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의 정치형태를 채택하였다. 몇 차례에 걸친 권위주의적 정치가의 출현에 환멸을 느낀 프랑스 국민들은 논쟁과 시비의 반복을 일삼아, 70년이 채 못 되는 제3공화국 기간 중에 백번 이상 내각을 새로 구성하였으니 한 정권의 수명은 평균 일년에 훨씬 미달하였다. 또한 정당의 분화가 심하여 하나의 다수당이 나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권은 연립에 의하여 서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일관되게 어떤 정책을 밀고 나갈 수는 없었다. 한때 불랑제 같은 장군이 우익세력(右翼勢力)을 규합하여 공화제를 위협하는 듯했으나(1886-1889년) 성공하지 못했으며, 한편 사회주의운동이 노동조합의 합법화에 따라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분열적 정치풍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부 과격한 반(反)의회주의자들이 있었으나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근대정치의 완성[편집]

近代政治-完成 1815년으로부터 100년간 유럽은 전면전쟁을 면하게 되어 이른바 '유럽의 조화(the concert of Europe)'는 훌륭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이 각국은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고 청산하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기 말에 이르면 세계적 대국으로서의 영국과 통일에 의하여 강대국으로 등장한 독일, 그리고 역시 비상한 수단에 의하여 통일을 이룬 이탈리아, 이에 더하여 유럽 국가로 등장한 러시아, 비록 국력을 크게 떨치지는 못했으나, 만만치 않은 프랑스 등이 각각 새로운 힘의 발산과 균형을 모색하는 가운데 각축(角逐)을 벌이게 되며, 각국의 내부에서는 의회정치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기대했던 성과보다는 허식적 장치(裝置)에 불과한 것이 탄로가 나서 의회정치를 불신하는 사상이 싹트기도 한다. 의회정치에서 불가결한 요소로 등장한 정당들은 상호간의 경쟁을 통하여 일정한 정치적 윤리와 규율을 만들어 정치사회를 공고히 하였으며, 또한 국민을 계몽하고 국민에게 호소하여 '정치의 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를 촉진하였다. 무산노동계급(無産勞動階級)의 생활이 개선되고 정치적 활동이 가능해진 데는 그들 자신의 좌절을 모르는 노력에 힘입은 바 크지만 부르주아지간에 생긴 경쟁의 결과이기도 하며, 한편 사회과학의 발전에 따라 인간에 대한 존경심이 점차로 생기게 된 것도 지나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완성이 없듯이 정치과정도 변천하며 발전하는 것이다. <裵 成 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