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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
[편집]科學革命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 일어난 16, 17세기는 서양과학사상 특별한 시기를 획한다. 이 기간 중 기존 체제 안에서의 점진적인 발전은 찾아볼 수 없다. 낡은 과학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구조의 과학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혁명이란 말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뜻에서 과학혁명의 경우는 정당화된다고 하겠다.
고대와 중세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의 범위 안에서 발전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는 논리적 정연성(整然性)을 특색으로 한다. 그것은 잡다한 것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을 이루고 있다. 이런 체계는 동시에 강점과 약점을 지닌다. 즉 전체로서의 정연성 때문에 세부적인 것에 의문을 품기가 어렵다. 어느 한 부분을 문제삼으면 전체가 딸려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곧 약점이 되기도 한다. 한 요소가 틀린 것이 판명되면 전체계가 무너진다. 전체적 맥락(脈絡)에서 개별적 의미를 분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파탄
[편집]Aristoteles-破綻
과학혁명은 천문학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 1473-1543)의 『천구(天球)의 회전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한 요소를 의심한 데 불과하다. 다른 것은 다 그대로 두고 그 부분만 분리해서 공격하려 했으므로 수월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이 공격이 요행 성공하자,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의 전체 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준 충격은 마치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돌의 파문이 전 수면에 번져가듯 역학·광학·생리학 등 각 부문에 걷잡을 수 없이 파급되었다. 이리하여 만신창이(滿身瘡痢)가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체계는 전혀 새로운 체계로 대치되어 19세기까지 과학의 틀을 이룬다.
근대 유럽문명은 8, 9세기의 격심한 혼돈을 겪은 뒤 10세기에 출현한다. 끊임없는 만족(蠻族)의 침입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에 살아남은 유일한 것은 기독교 교회였다. 이 때부터 유럽문명은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교회는 국가·경제를 포함한 생활의 모든 측면을 그 통제 아래 두었다. 16세기에 이 문명의 성공은 그 근원에 대한 도전으로 바뀌고 그 결과 유럽문명은 세속화(世俗化)의 길을 걷는다.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속화를 촉진시켰다. 또한 이 때는 거대한 경제적 팽창이 진행되며 근대 자본주의가 대두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신흥 부르주아는 장원(莊園)에 토대를 둔 봉건경제체제를 무너뜨리고, 국왕들은 교황으로부터 정치 권력을 빼앗았다. 이런 움직임과 병행해서 일어난 근대과학은 세속화의 지적(知的) 측면이며 17세기 말까지는 유럽문명의 구심점(求心点)으로서 기독교교회를 대치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성서의 몇 구절이 인용돼서 간단히 반박될 만큼 과학은 처량한 신세였는데 뉴턴에 이르러서는 성서가 과학에 의해 정당화될 정도로 과학과 기독교의 역할은 완전히 전도(顚倒)된다. 이것이 불과 1세기 반 동안에 일어난 변화임을 볼 때 과학혁명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새로운 지식관
[편집]-知識觀
중세에 있어 지식의 목표는 영원한 진리를 명상하는 것이었다. 지식은 신에 의해 계시(啓示)되는 것으로서 인간은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지식은 고정된 것이며 확장의 개념은 없었다. 그러나 프랜시스 베이컨(F.Bacon, 1811-1859)에서 우리는 지식 개념의 뚜렷한 변화를 본다. 그는 지식의 목표는 명상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함으로써 과학의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다. 즉, 지식은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전취(戰取)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가 강조한 '힘으로서의 지식'은 물질적 편익(便益)과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구경꾼으로부터 자연의 주인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같은 지식관·자연관의 변화는 과학혁명의 주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과학혁명의 기간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과학사가들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된 것은 아니지만 대개 16, 17세기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이 기간 중에도 과학혁명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두 해를 부각시키는 것이 좋겠다. 1543년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와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가 발간된 해이다. 이 두 책은 그 자체로는 별로 혁명적인 내용을 담지 못했으나 각각 물리과학과 생물과학에서 뒤따른 혁명의 불씨가 된 책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1687년은
'프린키피아(Principia)'로 통칭되는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나온 해이다. 이 책에서 뉴턴은 갈릴레이, 데카르트, 케플러 등의 산발적인 업적을 종합하여 과학혁명을 일단 완결하는 것이다. 이 144년 동안에 과학은 근본적인 변혁을 치렀으며 주요한 진전은 17세기 중엽에 이루어졌다.
르네상스의 반동성
[편집]Renaissance-反動性
과학혁명을 그에 앞선 르네상스, 종교개혁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한 16세기 초, 유럽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잃어버린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으므로 근대보다는 낡은 세계, 즉 중세에 속한다고 보아야겠다. 더욱이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를 제외하고는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비슷하게 종교개혁도 종교계의 큰 변화임에 틀림없으나 새로운 종교의 탄생은 아니며 잊혀졌던 원시(原始)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의 주역 루터와 캘빈은 똑같이 코페르니쿠스에 반대했으며 과학에 대한 이해는 카톨릭보다 더 박약했다.
따라서 버터필드의 말처럼 과학혁명은 기독교가 일어난 이래 모든 것의 빛을 잃게 했으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중세 기독교 체제 안에서의 한 에피소드, 내적변위(內的變位)에 불과한 지위로 떨어뜨렸다고 하겠다. 이렇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과거지향적인 데 비해서 과학혁명은 과감히 전통과 결별하고 전진적인 자세를 취했으므로 근대는 과학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기계적 자연개념의 확립
[편집]機械的自然槪念-確立
과학혁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1) 감관경험에 의한 상식을 거부하고 추상적인 이성을 채택했다. 이것은 상식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 이성적인 플라톤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었음을 뜻한다.
(2)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대치했다. 다시 말하면 과학이 수학화됐다는 것인데 역시 질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 양적인 플라톤 과학에 눌렸다는 얘기다.
(3) 기계로서의 자연개념이 발전되었다. 즉 목적론적·유기체적 사고가 물러가고 기계적·인과론적 사고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망각되었던 그리스의 원자론이 부활한 것이며 모든 현상을 물질과 그 운동에 의해 설명하려는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의 결과로 나타났고 뉴턴에서 그 절정을 볼 수 있다.
(4) 새로운 과학적 방법이 발달했다. 베이컨은 사실 수집에서 시작해서 일반화에 도달하는 귀납적 방법(歸納的方法)을 내놓았고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는 명석하고도 판명(判明)한 진리로부터 수학적 연역(演繹)에 의해 결론을 얻으려 했다. 한편 갈릴레이는 수학과 실험을 교묘하게 결합시킨 근대적인 과학적 방법을 인출해서 자연 연구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했다.
(5) 궁극적 설명을 버리고 즉각적 기술(記術)을 택했다. 즉 왜(why)가 어떻게(how)로 바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돌이 땅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그 속에 있는 형상(形相)이 고향인 땅으로 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무거운 물체가 왜 떨어지는지는 모르며 알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낙체가 떨어지되 어떻게 떨어지는가를 알아보는, 즉 가속도 측정에 있었다.
실제로 과학혁명의 기수(旗手)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데카르트, 뉴턴 등은 예외 없이 플라톤주의자들이었으며 갈릴레이, 데카르트, 뉴턴은 모두 기계적 철학의 철저한 신봉자였던 것이다. 결국 과학혁명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플라톤과 원자론자들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혁명이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었던가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제이다. 과학혁명에 관한 해석은 외적 및 내적 접근으로 나누어진다. 외적 접근은 미국의 사회학자 머튼(R. K .Merton)이 『17세기 영국의 과학, 기술, 사회』(1938)에서 17세기 영국에서의 과학 발전은 퓨리터니즘의 기치관과 기술, 항해, 전쟁 등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제기되었다. 이에 앞서 일본의 오쿠라 긴노스케(小倉金之助)는 수학의 발전과 계급 투쟁을 연결시켰으며(1929), 구소련의 헤센(Hessen)은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당시의 항해술이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씌어졌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 바 있다(1931). 갈릴레이가 대포의 탄도(彈道)문제를 해결하려고 투사체(投射體) 운동을 연구했다든지 토리첼리(E. Torricelli, 1608-1647)가 산간의 물의 흐름을 조정하기 위해 수력학(水力學)에 손댔다는 것도 비슷한 주장이다. 이 접근은 극단적 결정론의 입장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필연적 인과관계 수립은 주저하는 온건론자들 사이에 견해차이가 있으나 1930년대의 학계를 휩쓸었던 것이다.
한편, 내적접근은 소르본의 철학교수 콰레(A. Koyr
)에 의해 시작되는 바, 그는 획기적인 저서 『갈릴레이 연구』(1939)에서 과학혁명은 외적인 조건과는 무관하게 근대과학자들의 지적(知的) 태도의 변화의 결과 일어난 것이라고 단정했다. 달라진 것은 첫째 공간의 기하학화(geometrisation del'espace)와 둘째 우주의 해체(dissolution du cosmos)이다. 우주가 기하학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중세적인 유한한 계층적(階層的) 우주가 무한한 우주로 바뀐 결과 과학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외적접근에 기울었던 학계의 대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40-50년대는 내적접근이 외적접근을 완전히 압도하게 된다.
천재냐, 대중이냐
[편집]天才-大衆-
외적접근에 의하면 과학혁명은 종교개혁과 자본주의의 부산물로서 과학사가의 역할은 사소한 지엽적 문제의 해결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내적접근에서는 과학혁명은 근세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보므로 과학사의 비중은 매우 크게 되는 것이다. 과학사가들이 외적접근에 흥미를 잃게 된 것은 그것이 과학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사의 학문으로서의 독자성이 위협받는 점도 간과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와 사회적 관심이 높은 젊은 과학사가들에 의해서 외적접근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역사학계에서는 해묵은 '머튼 명제(Merton 命題)'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내적접근은 과학혁명에 있어 소수의 천재들의 역할에 대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즉 사회로부터 독립된 과학의 자율성(自律性)이 강조된다. 반면 외적 접근에서는 자본주의가 일어나면서 형성된 부르주아가 주동적인 역할을 해서 과학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몇몇 개인이 담당한 몫은 전체적으로 볼 때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과학사학계가 이룩한 찬란한 성취는 내적접근이 기본적으로 타당함을 증명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최근 부쩍 활발해진 기술사(技術史)와 과학혁명의 사회적 측면의 연구는 내적접근이 불충분함을 드러내 주고 있다. 결국 어느 한 접근을 극단으로 밀고 갈 때 불가피하게 독단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과학혁명은 천재들의 출현과 어느 정도의 사회경제적인 힘에 의해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혁명의 새 해석
[편집]科學革命-解釋
이렇게 본다면 과학혁명은 학자와 장인(匠人)이 힘을 합해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 이래 완전히 분리되어 별개로 발전해 온 과학과 기술의 악수로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베이컨이 응용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는 것은 이미 말했거니와 그는 건전한 지식에 참으로 공헌한 것은 철학자가 아닌 장인들의 업적이라고 하면서 과학자들에게 장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라고 권했다. 보일(R. Boyle, 1627-1691)은 지각없는 자연학도만이 장인에게서 배우는 것을 비웃는다고 말했다. 그는 신사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통념을 깨뜨리고 용감하게 실험실로 뛰어들었다. 갈릴레이는 중요한 개념적 업적을 이룩했지만, 동시에 그 시대의 기술적 업적을 찬양하고 새 기술에 의해 관찰, 실험의 범위를 넓히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과학혁명에서의 학자와 장인의 역할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학자들은 과학을 변혁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장인들은 변혁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따라서 과학혁명은 주로 이론과 설명의 혁명이지만 장인들이 이를 위한 기초를 만드는 데 상당한 공헌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본격적인 협조 내지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에는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宋 相 庸>
천문학의 혁신
[편집]天文學-革新
중세의 서유럽에서 인정된 우주 체계는 지구 중심설이었다. 그것의 주요 내용은 지구가 세계의 중심에서 정지(靜止)하여 있고, 여러 천체가 이것들을 태우고 있는 여러 천구(天球)의 운동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체계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설(說)에 근거하는 우주체계로서, 인간의 직접경험의 사실과 합치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서유럽인이 신봉하는 크리스트교의 인간관이나 세계관과도 일체화(一體化)된 것이었다.
그러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윽고 이 지구중심설이 비판되고, 마침내는 지동설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이 16-17세기에서의 천문학의 혁신이다. 이 혁신은 또한 단순한 천문학사상(史上)의 사건만이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지적 발달사상(知的發達史上)의 대사건으로서, 이것이 그 후의 사상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천문학의 혁신을 시작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인데, 그 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다한 사람들이 있었던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지구중심설을 비판한 니콜 오렘(1323-82), 지구의 자전을 시사한 N. 쿠사누스(1401-1464),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 의해 『행성신이론(行星新理論)』을 저술하였고, 또 『알폰소표』의 개정에 협력하여 천문학 부흥의 기운을 만든 게오르크 풀바흐(1423-1461), 그의 일을 이어받아서 규칙적인 천문 관측을 개시한 요하네스 뮐러(1436-1476) 등이다.
이 혁신은 다시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에 의한 천문학상의 새 사실의 발견과 케플러에 의한 행성의 운동법칙의 발견 등으로 추진되고, 뉴턴에 의한 현대 동력학의 형성을 기다려 완결되었다.
코페르니쿠스
[편집]Nicolaus Copernicus(1473-1543)
폴란드의 성직자·천문학자. 토룬에서 태어나, 크라쿠프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볼로냐, 로마, 파도바 및 페라라에서 신학과 천문학과 법률을 배웠다. 이후 프라웬부르크의 가톨릭교회 평의원으로서, 또한 관구장으로서 활동하는 한편 천문학의 연구를 추진하였다.
크라쿠프대학 시대의 코페르니쿠스는 풀바흐의 『행성 신이론』에 대한 주석을 출판한 블루제프스키에게 사사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 정통할 기회를 얻었다. 볼로냐대학에서는 노바라에게 천문학을 배우고, 또한 그의 천문관측에 협력하였다. 이 노바라는 신플라톤주의의 입장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비판하였는데, 코페르니쿠스는 적지않게 그 영향을 받았다.
종래의 천문 체계는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이론과 관측치(値)와의 충분한 일치를 얻지 못했다. 이 때문에 코페르니쿠스는 고대의 철학자들의 우주론을 조사 연구한 끝에 지구의 운동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의 지동설은 우선 『개요(槪要)』로서 발표되었고, 사본의 형태로 학자간에 유포하였다.
더욱더 자세한 저서의 발표를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주저하고 있었으나, 그의 밑에 그의 천문 이론을 배우기 위하여 찾아온 비텐베르크의 루터파의 수학 교수 레티크스(게오르크 요아힘, 1514-1576)의 권유로 코페르니쿠스의 주저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1543)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543) 天球-回轉-關-
뉘른베르크에서 출판된 이 코페르니쿠스의 주저는 6권으로 되어 있다. 그 골자는 전체의 서론을 이루는 제1권을 보면 명백하다. 거기에는 우주도 지구도 구형이라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천체가 원운동을 하듯이 지구도 또한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고, 이에 따라 행성의 겉보기운동의 불규칙성이 간단하게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 지구의 크기에 비하여 하늘은 광대하다는 것, 고대인이 지구는 부동(不動)이며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 이유와 이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반론(反論) 등이 서술되어 있다. 단, 출판을 위임맡은 앙드레아스 오지안더(1498-1552)가 서명없이 덧붙인 서문 '이 저술의 가설(假說)에 대하여 독자에게'에 기술되어 있는, 본서의 의론(議論)은 가설이라고 하는 양해를 구한 서문은, 지구의 회전을 물리적 사실(物理的事實)이라고 생각한 코페르니쿠스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브라헤
[편집]Tycho Brahe(1546-1601)
덴마크의 천문학자. 덴마크왕 프레더릭 2세의 후원으로 후베인 섬에 대규모적인 천문대를 설립했고, 고정도(高精度)의 기계(器械)를 써서 20년간에 걸쳐 천체의 위치 관측을 하였고, 망원경 발명 이전의 관측자로서는 최고 수준의 것을 얻었다. 그것이 훗날에 그의 문하에 온 케플러에게 씌어져서 행성 운동의 3법칙의 발견을 가져오게 되었다.
관측과 계산에 의하여 혜성이 달보다도 멀리에 있는 천체임을 증명한 사실, 또 종래 생각되고 있었던 천구의 존재를 부정한 사실도 천문학사상(史上)에서의 브라헤의 큰 공적이다.
케플러
[편집]Johannes Kepler(1571-1630)
독일의 천문학자. 튀빙겐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던 중, 교수인 메스틀린(1550-1630)에게서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배우고, 이후 평생 이 입장에서 천문학의 연구를 하였다. 세계가 수학적 질서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는 피타고라스적 신플라톤주의와 결부된 종교적 확신에 이끌리어 행성의 운동과 배열을 연구하고, 티코 브라헤의 풍부하고 면밀한 관측을 이어 받아 계산을 시도한 결과, 1609년에는 행성운동의 제1·제2법칙을, 1619년에는 제3법칙을 발견하였다.
저서에는 『우주의 신비』(1596), 『신천문학(新天文學)』(1609), 『세계의 조화(調和)』(1619), 『루돌프표』(1627) 등의 천문학상의 것이 있는 외에, 광학 연구의 성과인 『비테로에의 추가(追加)』(1604)와 『굴절광학』(1611)이 있고, 또 달여행 이야기를 포함하는 자서전적 공상과학소설이라고도 할 『꿈』(1634)도 있다.
망원경과 갈릴레이의 천문학
[편집]望遠鏡-Galilei-天文學
갈릴레이 자신이 제작한 망원경을 써서 천체를 관찰하였을 때, 많은 놀랄 만한 천문학상의 새 사실이 발견되었다. 즉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항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뿐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상정(想定)하였듯이, 항성은 어느 것이나 모두 극히 먼 곳에 있기 때문에 망원경으로 보아도 점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행성에 대하여서도 크기를 알 수 있고 또한 행성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있다는 것, 달에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산과 골짜기가 있다는 것, 태양에는 흑점이 있는데 그것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 및 그 움직임으로부터 태양이 자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목성에 위성이 있다는 것, 금성의 크기의 변화와 그에 따르는 만(滿)과 결을 보이는 것 등이다. 이 같은 것들은 어느 것이나 전통적인 지구중심설과는 모순되고 있고, 지동설에 있어서는 뒷받침이 되는 사실이었다. 갈릴레이는 곧 『성계(星界)의 보고』(1610)를 서술함으로써 이 같은 새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가 그 후에 저술한 『천문대화(天文對話)』(1632)는 이상과 같은 점을 더욱 상세하게 논한 것이다. 이 저작은 4일간에 걸친 대화의 형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천문학 혁신의 본질을 아는 데에도, 또 중세 및 근대의 양(兩) 과학의 특질을 명백히 하는 데에도 매우 뜻깊은 과학상의 고전이다.
갈릴레이
[편집]Galileo Galilei(1546-1642)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근대 자연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오늘날에는 보통 이름인 갈릴레오로 불린다).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나, 18세 때 피사대학에 입학, 25세 때(1589) 피사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피사시대의 갈릴레오는 다분히 스콜라적이었었는데, 저 유명한 '차의 법칙'과 '구동력 역학'에 근거를 구함으로써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태도를 표명하였다. 정류체(精流體)에서의 부력(浮力)에 관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운동적인 경우로 확장하여 매질 내 운동의 소론에 '차의 법칙'을 적용하였다. 연직상승운동(鉛直上昇運動)에 관하여 구동력의 자기소멸성을 증명하고, 또한 차의 법칙과 구동력을 병용하여 낙하의 가속성의 설명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 있어서 그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갈릴레오가 전통에서부터 탈피하여 독자적인 동력학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파도바대학으로 전임(轉任)한 다음부터였다. 이미 피사시대에 사면(斜面)에 관한 고찰로부터 수평면운동(水平面運動), 세계의 중심 둘레의 원운동(圓運動)을 검토하고, 이들 운동은 저항을 받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정지(靜止)에의 경향을 가지는 일 없이 영속한다고 하고, 구동력에 대한 연관(聯關)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인과적 고찰을 일단 물리치고, 자연낙하운동에 대해서 사면(斜面)을 사용한 실험을 행한 것은 파도바로 옮긴 연후였다(1592년 파도바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 실험을 여러 번 반복한 결과, 낙하 거리가 낙하시간의 제곱(自乘)에 비례함을 알았다. 운동과 시간과의 근친성(近親性)에 상도(想到)하여, 낙하 속도는 낙하 시간에 비례한다는 상정(想定)하에 이 실험 결과를 증명했으며, 자연 낙하의 등가속도성을 결론지었다. 더욱이 각종 실험을 바탕으로 낙하 가속도가 진공 내에서 물체의 비중에 무관계하다고 하는 결과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가, 그를 구동력의 역학으로부터 이탈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신과학 대화』
『新科學對話』 (1639)
갈릴레이의 만년의 노작(勞作).
갈릴레이는 이 책 속에서 감속이나 가속과는 달리 등속도운동은 그것 자신이 스스로 속도를 유지하고, 또 그 지속(持續)에는 아무런 발동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관성법칙)는 것을 표명하여 구동력론과 결별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배제하였다. 이 법칙과 운동의 상호 독립성에 근거하는 사면상운동(斜面上運動)의 해명이라든가, 포물선 탄도의 증명이라든가, 이 저작의 전체 구석구석에서 보게 되는 아르키메데스적 수학적 방법은 물리학의 수리적(數理的)성격에 관한 표본(標本)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도 좋다. 단 관성은 갈릴레이에 있어서도 법칙형식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고 직선운동의 관성(慣性)이란 한정(限定)에서 명확함이 없으며, 그 해결을 뒤에 남겼다.
새로운 철학
[편집]-哲學
동역학의 체계화(體系化)로의 발전 및 다른 물리현상에 관한 물리학의 형성에로 설명 영역의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갈릴레이적 방법의 기저(基底)에 있는 것을 의식적(意識的)으로 포착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학 그 자체를 넘어서 더욱더 앞선 통찰이 요청된다. 새로운 철학은 이 요청에 부응(副應)하는 것이었다.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
[편집]Bacon-『Novum Organum』프랜시스 베이컨(영국의 철학자. 정치가, 1561-1626)은 저작 『대변혁』을 계획, 그 2부만이 완성 공간(公刊)되었는데(1620), 이것이 『신(新)오르가논』이었다. 여기에서 자연의 해명에 관한 지침(指針)이 제시되었다. 그의 신(新) 철학의 안목(眼目)은 서적에서부터가 아니라 자연과의 직접적인 교섭에 의해서 지식의 체계적 형성을 도모한다는 주장에 있었다.
그런데 자연과의 교섭은 실험에 지나지 않는다. 단 그가 말하는 바의 실험은 자연에 대해서 행하여지는 모든 합목적적인 간섭, 즉 산업의 모든 과정, 농업이나 제조업에 결부된 일체의 기술을 포함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한다면, '과실(果實)을 낳는 실험', '빛을 가져다주는 실험'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이나 개물(個物)로부터 단순히 별견(瞥見)한 것만으로 사변(思辨)에 의하여 대뜸 일반자(一般者)를 다룬(자연의 예단(豫斷)) 것이 아니고, 또 그것들을 단순히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고 질서정연한 조직적 방법을 통하여 일반자에 달하는(자연의 해명(解明))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신(新)오르가논'으로서의 귀납법의 혁신이 엿보인다.
더욱이 실용상의 여러 결과가 인간 복지(福祉)의 개선을 위한 수단임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에 진리의 보증이기도 하다. 즉 과학적 진리와 실천적 유용성(有用性)과의 동일성이 눈에 뜨인다. 나침반·인쇄·화약의 3대발명의 베이컨에 있어서의 의의(意義)는 여기에 있었다.
한편, 베이컨의 저서 『뉴 어틀랜티스』(1627 출판)에 묘사된
'솔로몬관(館)'은 과학 연구의 협력 조직을 위한 이상상(理想像)이었는데, 그의 사후 런던에 창설된 왕립학회(1662)는 이의 구체화를 위한 기념비로 되었다.
데카르트의 자연관
[편집]Descartes-自然觀
데카르트(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 1597-1650)도 베이컨처럼 사변철학이 산업상의 생산에 들어맞는 딴 종류의 철학에 의해서 대치될 필요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청년 데카르트는 확실한 지식에의 동경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른바 방법적 회의(方法的懷疑)라는 독자적인 사고로 나아갔다. 그는 생각을 함에 즈음해서 4개의 규칙, 즉 명증(明證)·분할·연역(演繹)·매거(枚擧)가 되는 여러 규칙을 두었다. 이 여러 규칙에 함축(陷蓄)되는 바의 것이야말로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핵심을 이룬다. 간단히 말하면, 권위라든가 감각이라든가 하는 불확실한 것을 떠나 그저 전적으로 이성에 좇아(명증규칙(明證規則)에 의거해서) 명석판명(明晳判明)한 것을 탐구하고, 엄밀한 연역적 논증(일반적인 것에서부터 특수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사고방식. 3단논법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합리주의는 자연을 어떻게 포착했을까. 말할 나위도 없이 자연은 감각적 인식을 넘어서 이성에 의하여서 포착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데카르트는 정신을 물질에서부터 독립시킴으로서 물체적 세계(物體的世界)의 자율성·객관성을 확립하고, 그럼으로써 감각의 입장을 초월한다. 이와 같이 하여 색·맛·냄새와 같은 이른바 제2차적 성질은 그것 자체로서 객관적인 물체의 참된 모습은 아니고, 명석 판명적으로는 물체는 연장(延長)이라고 일컬어진다. 연장으로서의 물체와 그 운동이 객관적 자연의 진상이었다(이리하여 데카르트 자연학은 세계 기하학으로서 수학적 방법을 일반화한 보편수학으로 된다). 그뿐 아니라 운동은 연장으로서의 물체처럼 장소의 변화로서 포착되며, 운동에 관한 힘이 들어갈 여지를 남기지 않기 때문에, 데카르트적 자연은 기계적으로 된다. 제1원인으로서의 신이 물체에 일정량의 운동을 주고, 자연적 세계는 주어진 운동의 양을 영원히 간직한다. 이와 같은 자연관의 기계적 성격은 자연물(自然物)과 인공물과의 준별(峻別)을 부정하는(시계가 그 바늘로 시간을 표시하는 것은, 한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과 동일한 자연의 일인 것이다)데 이르러서 더욱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리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진로(進路)가 철두철미한 선명성(鮮明性)을 갖고 전개됨과 동시에, 이 기계적·수학적·자연관이야말로 근대 정신의 형성에 중대한 한 요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학회의 성립
[편집]學會-成立
16세기 후반으로부터 17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에는 세계 최초로 근대적 학회가 생겨났다. 그것은 존 밥티스트 포르타(1535-1615)에 의하여 설립된 나폴리의 아카데미아 세클레토룸 나투나(1560년대)와 그 후신인 로마의 아카데미아 디린체이(1601-1630) 및 나폴리의 아카데미아 델치멘토(1657-1667)이다. 이들 학회는 모두 다 신학적·스콜라적인 시대의 흐름에 반항하여, 르네상스 특유의 관찰과 실험정신을 기치(旗幟)로 하여 낡은 학문·사상의 무지(無知)와 싸우고, 교의(敎義)에 사로잡히지 않고 널리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학회는 그 표방하고 있는 목표에 있어서는 낡은 것과의 싸움을 목표삼고 있었으나, 조직체로서는 궁정 내의 살롱과 같은 것이었다. 각종 계층의 회원을 포용하는 근대적 조직체로서의 학회는 1660년대의 영국의 왕립학회(로열소사이어티, 1662년 창립), 프랑스의 파리 과학아카데미(1666년 창립)에서 비롯된다. 양 학회는 당시의 유럽 각 대학에서 볼 수 있었던 지적 퇴폐(知的頹廢), 즉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라는 목적을 떠나서 논쟁으로써만 밤과 낮을 보내던 스콜라학적 태도를 비판하여, 산업기술(産業技術)에 쓸모있는 학문, 또 거꾸로 기술에서부터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정신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정신은 이미 베이컨의 유토피아 이야기 『뉴 어틀랜티스』(1624년 집필)에 표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베이컨은 그 가운데서, 인류의 복지 증진을 위한 자연 연구의 연구소로서 자료를 수집하는 그룹, 실험을 하는 그룹, 법칙을 찾아내는 그룹, 그 법칙을 다시금 새로운 실험·응용으로 시험하는 그룹 등으로 나눈 회원 조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 왕립학회의 조직은 근대적인 위원회·총회 방식이 채택되고, 회원에는 귀족·의사·신부(神父)·상인과 그 둘레에는 직인(職人)·농민 등이 널리 모여 있었다. 연구를 위한 특별위원회(기계학위원회·통신위원회 등)가 설치되고, 전체로서 베이컨의 정신과 회원 조직이 채용되어 있었다.
파리 과학아카데미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중심인물 호이겐스의 노력으로 동일한 베이컨적 정신이 도입되고, 자연과 기술의 수집, 인체 해부, 자유낙하(自由落下), 기압의 실험 등 외에 지도의 작성, 망원경의 개량 등 기술적 진보를 노리는 연구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683년 콜베르의 사망 이후는 회원의 신분 차별이 혹심한 학회로 되었고, 그의 평등은 프랑스 혁명에 의하여 바로잡혀졌다(1795).
자연관의 변환
[편집]自然觀-變換
보일은 연금술을 극복하여 근대화학의 문턱에 섰다. 그것은 그 때까지의 화학실험의 성과 위에 서서, 그것을 전통적인 물질 변환의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실을 본다는 입장을 취한 것(르네상스적 관찰정신)과 그 설명으로서 새로운 원자론(입자론)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류(流)의 4원소설과 특히 파라셀수스류의 3원질설을 비판하여 분해 생성물이 3으로 국한될 수만은 없다는 화학 실험례를 들고, 종래 간과되어 왔던 증기·기체의 존재, 잔재(殘滓)로서 버려져 있었던 물체를 침전물로서 중시한 것이다. 즉 보일의 태도는 화학 반응에 대하여, 종래의 테두리로부터만 보는것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하여 전면적으로 포착하려고 한 것이다. 또 3원질론자가 말하는 황·수은·염(鹽)과 같은 분해 생성물이, 원질 혹은 원소의 이름에 상당하는 '원초적(原初的)·단일적'인 것이 아니고, 같은 염에도 산성의 것도 알칼리성의 것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화학물질을 질의 차이에 따라 구별한 보일은 이 질적(質的) 차이(변화)야 말로 원자론에 의해서 비로소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어 수은이 불에 의해서만 적색으로 변한다든가, 신맛인 질산에 은을 작용시키면 쓴맛의 질산은이 된다든가, 연단(鉛丹)에 부으면 달콤한 질산납(窒酸鉛)이 된다든가 하는 화학 반응의 원인은 3원질론자의 범위에서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질산 입자의 은 입자와의 결합이 연단입자의 결합으로 바뀐다고 하는 입자의 운동과 조직의 차이뿐이다. 즉 그는 화학반응의 가장 중요한 질의 변화를 "물체의 소부분의 운동·형(形)·구조(構造)로부터만 끌어낸다(『회의적 화학자』 1661년 간행)"고 하는 입자론을 채용하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보일은 그 후 『형상(形相)과 질의 기원(起原)』(1666) 속에서 원자론(입자론)에 대하여 (1) 모든 자연 물체에는 공통된 보편물질이 있다. (2) 보편물질은 운동을 부여받으며 자신도 감각하지 못하는 미립자로 나뉜다. (3) 미립자는 크기·형태·운동이라는 3개의 성질을 가진다. (4) 많은 수의 미립자는 조직(형태·순서·위치)되어서 가감적 질(可感的質, 열·색·맛·냄새 등)을 나타낸다고 설파하였다. 그러나 그의 입자론에는 또한 그가 판단한 상대인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류의 보편물질이라는 생각이 있고, 따라서 운동은 신에 의하여서 비로소 주어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한계가 있었다. 또 근대적인 원소라는 생각(라부아지에)도 명확히 파악되어 있지 않았다. 근대화학에의 길은 실험과 경험에 의하여서 알게 되는 화학적 여러 사실을 정리하고, 거기에 걸맞는 입자론을 결부시켰을 때 열렸던 것이다.
보일
[편집]Robert Boyle(1627-1691)
영국의 화학자·물리학자. 코크백작의 제14자로서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이튼학교를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가서 새로운 과학을 섭취하였다. 1646년, 19세 때 런던에서 생긴 새로운 과학자의 그룹 '인비저블 컬리지(보이지 않는 대학)'에 참가, 그 곳의 베이컨 정신을 배우고 자연과학의 유용성에 눈을 떴다. 그리고 의학과 화학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650년에는 최초의 의화학서(醫化學書) 『독약을 의약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대하여』를 저술하였다(이 무렵 영국에는 청교도혁명이 일어나 1649년에 국왕이 처형되었다).
1654년 옥스퍼드로 옮겨, 런던에서 발족한 또 다른 하나의 신(新)과학자 그룹(옥스퍼드 그룹)에 참가하였고, 그의 가장 활동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 1661년 간행된 『서설(序說)』에서 그는 스콜라파 자연철학을 비판하면서, 화학 실험의 유용성에 대해서 그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화학 실험만으로 화학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험·관찰과 결부된 일반적 원리가 필요하였다. 이 화학 실험과 연결되는 이론이야말로 입자론이었는데, 그는 이 생각을 1659년의 『입자철학을 설명하는 데 유용(有用)한 화학 실험례』(1661년 간)에서 비로소 말하였다.
당시 이미 가상디 등의 원자론 외에 데카르트의 원자론이 있었는데, 보일은 쌍방에 논점의 차이는 있으되, 어느 쪽이나 스콜라 이론에 반대하고 있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사물을 입자 혹은 미소물체(微小物體)로 설명하는 점에서도 입자철학이라고 이름붙여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주요저서 『회의적 화학자(懷疑的化學者)』(1961)로 명확히 제시하였다.
그간 보일은 젊은 훅을 조수로 하여 토리첼리의 진공 실험을 하고, 대기의 압력과 그릇 속의 공기의 압력(탄성)과를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후자의 원인을 대기 입자의 존재에 의해서 설명하고, 그 유명한 보일의 법칙을 발표하였다(『공기의 탄력과 무게에 대한 학설의 옹호』, 1662년 간).
그 후 1666년에는 『질과 형상에 대한 기원』을 저술함으로써 입자철학을 전면적으로 전개하였다.
보일은 입자철학을 도입함으로써 화학을 그것 자신만으로도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으로 만들어, 단순히 의학·산업에만 쓸모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하고, 화학에 실험적 방법을 도입하며, 전통적인 원소관(元素觀)에 대항해 싸운 근대화학의 개조(開祖)였다. 1680년에는 런던의 왕립 학회의 회장이 되었고, 64세로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혈액순환의 발견
[편집]血液循環-發見
17세기의 의학은 16세기의 해부학의 융성에 이어 혈액순환설을 중심으로 한 생리학에서 비롯하였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학문의 목적은 자연을 지배하는 데 있다 하여 공리주의를 제창하였다. 이것을 밑받침하기 위해 엄밀한 귀납법이 의학의 연구에도 필수불가결한 방법으로 도입되었다.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인체의 작용을 고체와 액체 운동으로 구분하여 수학과 물리학적 입장에서 해명하는 가능성과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의 절호의 발전 터전을 만든 것이 윌리엄 하비의 혈액순환설이다. 그는 목적을 위한 사상을 물리치고 실험적 연구의 길을 연 제1인자이다. 하비의 일대 발견의 실마리는 파브리치오로부터 정맥판(靜脈瓣)의 존재를 들은 데서 연유하였다.
순환설의 선구를 이룬 사람으로는 에스파냐의 세르베토(M. Serveto, 1511-53)가 있다. 그는 신학자이나 의학도 이수하였다. 1553년에 『크리스트교 부흥론』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이에 폐순환설(肺循環說)을 설파하였다. 이 책은 크리스트교의 개혁을 논한 것으로, 이 혁신적 의견 때문에 반역자로 몰려 저서는 몰수되어 불태워졌고 그 자신도 화형을 당하였다. 그의 폐순환설은 혈액이 우심실(右心室)로 들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고, 혈액은 우심실에서 폐로 가서 여기서 선홍색(鮮紅色)으로 변하여 폐정맥을 통해 좌심실에 이른다고 말하였다.
베살리우스의 제자로 그 후계자였던 콜롬보(M. R. Colom-1559)는 동물의 생체해부 결과 혈액이 폐순환을 하는 것을 말하였다. 세르베토의 사후 6년째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창의의 견해인지 또는 세르베토의 설을 인용한 것인지는 의문시되고 있다.
콜롬보의 문하생인 이탈리아의 체살피노(A. Cesalpino, 1519-1603)는 처음으로 순환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로마교황의 시의였다. 이 사람들이 혈액순환설의 선구를 이루었다.
하비
[편집]William Harvey(1578-1657)
영국의 생리학자, 임상의학가.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후,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파도바대학에 입학 바프리치우스에게 외과와 해부학을 배웠다. 그는 1602년에 조국으로 돌아와 런던에서 개업하였으며, 의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의 주요 저서 『동물의 심장 및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는 1628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되었다. 그 내용의 중요점은, 1회의 박동으로 보내지는 혈액양으로 1시간에 보내지는 혈액양을 계산하여, 그만한 대량의 혈액양을 간장에서 항상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고 하였다. 불과 72페이지의 소책자이지만 이로써 갈레노스 학설을 완전히 뒤집었고 관념적 생리학으로부터 실증적 생리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또 그는 발생학의 연구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1651년에 출판한 『동물발생론』에는 '모든 동물은 알에서'라고 한 유명한 말이 기재되어 있다.
현미경의 등장
[편집]顯微鏡-登場
혈액순환의 발견으로 정밀한 관찰과 명확한 기재, 거기다 새로 계수적 개념이 가해지는 연구 방법이 크게 발흥하였지만, 그 인식은 육안의 범위 내에 머물렀다. 그러던 것이, 현미경의 발명으로 전인미답의 분야가 개척되었다. 복합현미경은 렌즈를 갈고 닦아내는 일을 업으로 하던 네덜란드의 얀센이 1590년경 처음 만들었다고 하며, 곧 이탈리아의 갈릴레이가 개량하였다.
그리하여 17세기의 후반에 이르러 그것을 사용한 연구가 많아졌다. 새로운 현미경이나 망원경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현미경학자는 그 두 나라에서 많이 출현하였다. 그 대표로는 이탈리아의 말피기, 레디, 네덜란드의 레벤후크, 슈밤메르담, 그라프, 영국의 훅 등을 들 수 있다.
레디(F. Redi, 1626-1697)는 동물을 이용하여 하비의 설을 확인함과 동시에 곤충의 발생을 조사하여 생물의 자연발생설에 반격을 가하였다.
그라프(R. de. Graaf, 1641-1673)는 시온호펜의 태생으로, 레벤후크와 친했다. 그는 조숙하여 일찍이 대학생 때에 췌액(膵液)의 연구로 유명하였다. 난포(卵胞)를 발견하였고, 그 논문이 1668년에 발표되었다.
훅(R. Hooke, 1635-1703)은 물리학자이지만 현미경의 개량에 힘썼다. 1665년 출판한 『현미경 도집(圖集)』에는 코르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확인된 소실(小室)을 '세포'라고 기재하였다. 이것이 세포라는 말의 시초이다.
말피기
[편집]Marcello Malpighi(1628-1694)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볼로냐 근방에서 태어났다. 볼로냐대학에서 고학으로 의학을 배웠고 피사·메시나·볼로냐 등의 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현미경에 의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연구를 무익한 것으로 보고 온갖 박해를 가하였다. 생명마저 위협당하였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심한 곤란을 극복하면서 연구하여야만 하였다. 만년에 로마교황의 시의가 되어 겨우 안주하는 처지에 있었고 66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물리의학파의 폴레리와 피사에서 서로 알게 되는 사이가 되어 그 친교는 평생 변치 않았다.
그의 연구 중에서 최대의 업적은 하비의 혈액순환설을 보정한 것이었다. 즉 폐의 미세구조의 연구로 모세관의 말단 연락을 확인하여, 1661년에 간행된 『폐의 해부학적 관찰』이란 표제가 붙은 책에 정밀하게 기재하였다. 그 밖에 넓은 분야에 걸친 그의 업적은 생리학파 해부학의 제휴를 이룬 선구자로서 위대하다.
레벤후크
[편집]Antonivan Leeuwenhoek(1632-1723)
네덜란드의 생물학자. 델프트에서 태어났다. 대학교육을 받지 않고 의복상을 하면서 현미경적 연구에 종사하였다. 소형의 간단한 현미경을 많이 만들어 그것을 사용하여 미세한 관찰을 시도, 소견을 런던 왕립학회에 50년간이나 계속 보고하였다. 주요한 공적은 원생동물 및 세균의 발견과 동맥·정맥의 말단의 직접연락을 명백히 한 혈액의 흐름에 관한 연구이다. 또 처음으로 적혈구를 바르게 관찰하였다.
슈밤메르담
[편집]Jan Swammerdam(1637-1680)
네덜란드의 해부학자. 암스테르담의 유복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이덴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임파관을 발견하였다. 그의 연구는 특히 곤충에 뛰어난 것이 많으며 레벤후크보다 훨씬 뒤졌다. 만년은 몹시 곤궁하여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려 43세로 사망하였다. 그 유고는 1737년에 부르하베가 정리 집성하여 『자연의 성서』라는 제명으로 출판하였다.
물리의학파와 화학의학파
[편집]物理醫學派-化學醫學派물리학은 16세기-17세기에 걸쳐 크나큰 발견이 계속 있어 이상(異常)한 진보를 했고, 물리학적 연구방법이 자연과학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물리학적 및 수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하비의 혈액순환설에 힘을 얻어 인체의 생리는 물론 병도 물리학으로 설명된다는 기계관적 연구법이 의학에 지나치게 도입되어 새로운 학파가 탄생하였다. 이것을 물리의학파(이아토로피지크)라고 한다. 이 학파의 원조는 이탈리아의 산토리우스이며, 이 학파에 속하여 크게 활약한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보렐리, 발리비, 영국의 글리슨 등이다.
발리비(G. Baglivi, 1668-1707)는 심장은 펌프이고, 힘줄은 지렛대이며 선(腺=샘)은 체로서 질병은 고체의 긴장 정도에 의하여 발생한다고 설명하였다.
글리슨(F. Glisson)은 하비의 문하생으로, 그는 자극에 의한 흥분능력은 감각·욕망·운동의 형태로 반응하고 그 중의 운동의 기능은 섬유(纖維)에 있으나 여기에는 감각능력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물리의학파에 대하여 연금술에서 탈피한 화학은 파라셀수스의 힘으로 의학 분야에 크게 진출하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신체의 구성물질이나 질병의 본체를 화학적으로 해명하려 하는 학파가 나타났다. 이를 화학의학파(이아트로케미)라고 하였으며 벨기에의 반 헬몬트, 네덜란드의 실비우스, 영국의 메이오, 윌리스 등이 저명하다.
헬몬트(J. B. Van Helmont, 1577-1644)는 이 학파의 사상을 체계화하였고, 탄산가스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신비적인 생각도 지니고 있었다.
메이오(J. Mayow, 1640-1679)는 생명에 필요한 공기중의 물질을 불의 공기라고 불러, 폐에서 혈액이 선홍색으로 변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하였다.
윌리스(T. Willis, 1666-1709)는 실비우스의 '발효(醱酵)' (생체 내의 화학적 변화)라는 생각을 한층 넓게 해석하여 체내의 신진대사도 이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산토리오
[편집]Santorio(1561-1636)
이탈리아의 물리적 의학파의 선구자. 파도바대학에서 의학을 배운 후 베네치아에서 진료를 하면서 학문연구를 하였다.
그는 독특한 장치로 30년간이나 자가 실험을 하여 '무의식 호흡'을 발견한 것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주제는 너무도 시세에 앞서 그 실험 방법은 매우 조잡하고 부정확한 측정 방법을 바탕으로 한 데에 큰 잘못이 있었다.
보렐리
[편집]Giovanni A.Borelli(1608-1679)
이탈리아의 물리의학파의 대표자. 나폴리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수학을 배웠고 메시나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뒤에 피사대학으로 옮겼다. 이 곳에서 말피기와 친교를 맺었다. 주요 저서 『동물운동론』은 생물의 모든 현상은 그 고체부(固體部)의 긴장과 액체부의 농담에 관계한다고 하여 뼈와 그 부착근(附着筋)을 지렛대 장치로 간주하고 그 운동은 지렛대의 손잡이(柄), 받침점(支點)의 위치, 힘줄(筋)의 강도(强度) 등에 제약된다고 말하였다.
실비우스
[편집]Franciscus Sylvius(1614-1672)
네덜란드의 화학의학파의 거두. 임상의학자.
그의 설은 식물은 위와 장에서 여러 가지 분비액(타액, 담즙 등)과 혼합되어 '발효(생체의 화학적 변화)'로 유미가 생겨서 이것이 흉관(胸管)을 거쳐 피를 액에 섞어 심장을 통하여 전신에 보내진다. 발효에 의하여 발생한 산성물질과 알칼리 물질이 피 가운데서 적당히 혼합되고 있을 때에는 건강하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병이라고 한다.
임상의학의 혁신
[편집]臨床醫學-革新
17세기에 일어난 물리의학파와 화학의학파는 그 연구방법이나 연구업적을 오늘날에 와서 볼 때 매우 조잡한 것이지만 그와 같은 이론을 토대로 하여 독단적인 학설을 만들어 놓았다. 너무도 기계적·물질적으로 생명현상을 생각한 나머지 불충분한 고찰로 조급히 결론을 지으려고 했기 때문에 마침내 정신현상도 단지 물질의 활동형태로 보아야 한다고 톨런드가 말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이론의 미로 속에 빠진 의학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임상의학을 과학적으로 재출발시키려는 반성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제1인자로 영국의 시드남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물리의학파의 뛰어난 학자는 병리학에서는 그 학설을 꺾지 않지만 임상의학에서는 이것이 그대로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을 명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시드남
[편집]Thomas Sydenham(1624-1689)
영국의 임상의학자. 젊었을 때 크롬웰의 전쟁(청교도 혁명시)에 참가. 의회군(議會軍)의 사관이었다. 후에 대학에 다시 들어가서 의학을 전공하여 학사 학위를 받았는데, 나이 52세였다.
그는 편견없는 객관적 주요 증상의 비판적 고찰 및 증후 기록을 진료 치료의 근본으로 하였다. 시드남은 질병을 3종류의 개념으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체액의 이상으로 인한 것과 생명력의 부조로 인한 것으로 나누는 방식, 둘째는, 급성병과 만성병으로 분류하는 법, 셋째는 산발성과 유행성으로 나누는 방식이다. 특히 유행병의 원인을 눈에 보이지 않는 유해인자(미아스마)로 한 것은 뛰어난 견해이다. 치료 방침은 전적으로 히포크라테스의 취지를 바탕으로 하여 자연의 치유력을 중시하였다.
이와 같이 물리의학파·화학의학파 등의 이론에 치우친 의학을 반성하게 되었고, 임상의학의 존재를 확립시킨 공적으로 '영국의 히포크라테스'로 불린다.
뵈르하페
[편집]Hermann Boerhaave(1668-1738)
네덜란드의 임상의학자. 독일의 슈탈, 호프만과 함께 체계학파의 3대가의 한사람이다. 그는 모든 생활 작용은 신체를 구성하는 액체와 고체의 운동이며, 질병은 주요 성분의 형(形)의 변화와 운동의 이상에 의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관념적인 생각방식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다른 체계 학파와 달리 현명하였다. 그 고결한 인격과 이지(理智)로 절대적인 명성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