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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의 발전[편집]

化學-發展

라부아지에의 원소관(元素觀)과 돌턴의 화학적 원자관은 근대 화학으로의 출발점이 되었다. 19세기의 화학의 연구는 단순히 물건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만들어 낸다는 직업적인 것에서, 화합물이 어떤 원소로 이루어졌는가, 분자 속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추구하는 이론적인 것으로 되어 간다. 특히 그러한 것들이 독일의 리비히와 벨러, 그리고 그 제자인 호프만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보다 뒤늦게 산업 혁명으로 들어갔다는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화합물의 원소 분석은 거꾸로 원소에 의하여 천연물을 합성할 수가 있다는 가능성을, 특히 뒤늦게 발달한 독일 제국(帝國)에게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이룩되어 그 원동력이었던 석탄에서 콜타르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르의 화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기 화학의 진보는 독일의 리비히 문하(門下)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유기물의 원소 분석의 최초의 성과였던 아닐린 염료(染料)의 합성은 영국인 퍼킨에 의해서 우연히 행해졌으나 그의 스승은 독일인인 호프만이며, 이윽고 그는 영국에서는 합성 염료의 연구가 장려되지 않고 있음을 한탄하고 귀국했던 것이다.

분자의 구조를 탐구하는 무기인 '원자가(原子價)'의 이론도 영국인 윌리엄슨(1824-1904), 프랭클런드(1825-1899)로 돌아갔지만, 그것은 독일의 케쿨레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케쿨레의 유명한 벤젠의 분자 구조의 발견은 유기화학의 체계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케쿨레의 의식(意識)여부에 관계 없이, 그의 이론은 합성염료 공업에 응용되어 갔다. 우선 3년 후에는 꼭두서니의 합성에 쓰여 갔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아닐린 염료의 합성이 우연적이었음에 대하여, 케쿨레의 이론을 계획적으로 이용해서 성공한 최초의 예이었다. 쪽(藍)의 합성도 독일의 카이저(황제)에게는 대망의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독일에는 천연 쪽을 재배할 만한 식민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케쿨레의 제자인 바이어는 일생을 연구에 바친 순수한 학자였으나, 그가 한 일은 결국 카이저나 BASF와 같은 대화학공업회사의 눈에 띄게 되었다.

유기 화학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 19세기 후반에, 나중에 현대 화학의 주류가 되는 물리화학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것은 주로 화학 변화의 과정을 문제로 삼았다. 그것은 원료에서 무엇이나 만들면 된다는 화학 변화의 결과는 아니고, 얼마나 빨리, 얼마만큼 많은 제품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화학 변화의 조작(壓力·溫度·濃度)을 공업이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산(酸)·알칼리 공업의 권위인 게오르크 룽게(1839-1923)가 원료(황 같은 것들)에서 제품(황산)이 되기까지의 시간 경과를 문제로 삼은 것은 1879년이 된 후의 일이며, 그 이전의 황산 제조에서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공장 설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세기 중엽 이후에 화학공업도 크게 변해갔다. 산·알칼리 공업 중에서, 예컨대 소다 공업도 변했다. 산업혁명시대에 영국에서 발전한 르블랑법(法) 소다에서는, 식염과 황산을 섞어 황산소다를 만들고 황산소다와 코크스와 석회석을 솥에 넣어서 검은 재를 만들고 그것을 물에 녹여서 탄산소다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거기에는 막대한 연료와 노력이 필요했다. 1861년 벨기에의 솔베이는 이것을 식염수와 암모니아와 탄산가스를 자동적으로 섞는 솔베이탑(塔)을 만듦으로써 공장 전체를 장치와 파이프로 잇는 일련의 연속 기계 장치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암모니아 식염수는 위로부터, 탄산가스는 밑에서부터 불어 올리는 솔베이탑의 건설은 압력·농도·온도와 화학반응과의, 실로 물리화학적 과제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솔베이의 경험과 기술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연속 기계 장치에 비한다면, 합성염료 공장은 오히려 실험실을 확대한 정도의 것이었다. 연속 기계 장치는 현대화학 공업의 기술적 기초인 것이다.

현대 화학 공업의 또 한 가지 기술적 기초라고 할 만한 것은고온·고압 기술이다. 고압 기술은 19세기 말에 액체 공기의 제조 공장이 만들어지는 가운데에서 축적되었던 것이지만, 물리 화학의 진보와 호응하여 고온·고압 기술을 확립시킨 것은 하버와 보슈의 암모니아 합성 기술이었다. 공중의 질소가스와 수소가스를 화합시키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원료의 겨우 0.02%도 안 되는 것이다.

그 유명한 리비히까지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1859). 독일의 칼스루에 공업대학의 하버와, 베를린대학의 네른스트(W. Nernst, 1864-1941)는 1903년에서부터 1908년에 걸쳐 될 수 있는 대로 수량(收量)이 많은 암모니아를 얻는 연구를 계속했다. 그 때에 밑거름이 된 것은 19세기 80년대에 확립된 화학 평형의 이론이었다.

그에 의하면, 압력은 될 수 있는 대로 높게, 온도는 될 수 있는 대로 낮게, 그러나 낮게 하면 반응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므로 촉매를 쓰는 방법이 시사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하버는 100-200 기압, 500℃, 오스뮴 촉매로써 암모니아를 10.4-17.6%를 얻는 데 성공했다. 굴드베리(1836-1902), 워게(1833-1900)나 반트호프 또는 오스트발트 등이 쌓아 올려 왔던 물리화학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BASF의 기사(技師)인 보슈가 하는 일은 이와 같은 고온·고압에 견뎌 내는 노(爐)를 만드는 것이었고, 동료인 미타슈(1869-1953)가 하는 일은 값비싼 오스뮴을 대신할 값싼 촉매를 찾아 내는 일이었다. 아닐린 염료나 인디고 합성으로 크게 벌이를 한 BASF로 해서 비로소 이 연구에 1백만 마르크를 투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912년, 오파우에 건설된 합성 암모니아 공장은, 물리 화학의 진보의 결정(結晶)이며, 독점자본주의의 기술적 산물이었다는 의미에서 현대 화학 공업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는 사이에 화학은 보다 전문화되고 보다 이론적이 되었으나, 그렇게 됨으로써 더욱 더 화학 기술과의 결합을 깊게 한다고 하는 현대적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하버[편집]

Fritz Haber(1868-1934)

독일의 화학자. 공중질소 고정법을 발견. 브로츨라프 출생. 베를린, 취리히 등의 대학에서 수학하고, 칼스루에공업대학의 물리화학·전기화학 교수가 되었다. 여기서 공중질소 고정법을 발견했다. 1911년 베를린대학 교수가 됨과 동시에 갓 창립한 카이저빌헬름연구소의 물리학 및 전기화학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기체 반응의 열역학, 전기화학에 관한 많은 연구 외에 불꽃 속의 화학평형(平衡), 니트로벤젠의 전해산화 등 많은 실험을 했다. 1918년 공중 질소 고정법에 의하여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33년, 나치스 독재체제로 들어가자, 유태인인 하버는 박해를 받았으며 케임브리지대학에 초청되었으나 영국으로부터 이탈리아로 피한여행(避寒旅行)을 하는 동안에 병사(病死)했다. 문하에는 뛰어난 학자가 많다.

보슈[편집]

Karl Bosch(1874-1940)

독일의 공업 화학자. 하버의 공중질소 고정법을 공업화했다. 쾰른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대학의 오스트발트 밑에서 기계공학과 유기화학을 배우고 학위를 얻었다.

1899년 25세로 BASF에 기사로서 입사했다. 하버의 암모니아 합성법을 공업화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는 경험에 의존하는 종래의 방법을 버리고 계통적으로 이 문제를 검토하여 4년간에 성공했다. 31년에 이 업적에 의해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뒤에, 대화학공업 콘체른이었던 팔벤의 사장이 되었다(1935). 수성(水成)가스와 수증기로부터 수소를 만드는 보슈법의 고안 등 고압화학공업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37년 플랑크의 뒤를 이어 카이저 빌헬름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하버와는 의형제 간이다.

유기 화학의 시초[편집]

有機化學-始初

1780년, 프랑스의 베리만(1735-84)은 자연계의 물질을 처음으로 무기물과 유기물로 구별했다. 유기물이란 동식물·생물에 관계되는 물질, 무기물이란 무생물에 관련되는 물질이란 뜻이다.

유기물의 연구는 우선 라부아지에에 의한 유기물의 원소 분석법의 고안에 의해서 시작되었다(1784년의 알코올 분석 등). 이 방법은 그 후 게이 뤼삭이나 테나르(1777-1857)에 의해서 개량되었다. 그러나 유기물의 분석은 수고와 숙련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유기물을 연소시킬 때 발생하는 탄산가스나 수증기의 용적을 재어 무게로 환산해야만 했다. 베르셀리우스는 1815년 그것을 직접 무게로 달 수 있게 하는 등의 개량을 했으나, 그래도 베르셀리우스는 7종류의 유기물을 분석하는 데에 18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유기물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연속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든 것은 독일의 리비히였다(1831). 게다가 리비히는 많은 학생을 온 세계에서 모아 각각 분담하여 유기 분석을 하게 하는 등 근대적인 실험실을 기센에 만들었다. 이런 리비히의 유기분석 장치와 1833년 프랑스의 뒤마(1800-1884)가 고안한 유기물 중의 질소를 측정하는 기구에 의하여 유기 분석의 기본이 이룩되었다.

리비히[편집]

Justus Freiherr von Liebig(1803-1873)

독일의 화학자.

근대 유기화학의 건설자. 부친은 의약·염료 등 화학 약품을 만드는 소상인(小商人)이었다. 10형제의 둘째로서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났다. 집일을 돕고, 약방의 점원 노릇을 하는 동안에 화학자가 될 결심을 굳혔다.

17세 때, 독일의 대학에 입학했으나 사변적(思辨的)인 과학 학습법에 실망한 그는 당시 유럽의 화학의 중심이었던 파리 대학으로 옮겨 다행히도 게이 뤼삭의 연구실에 들어 갈 수 있게 되었고, 거기서 뇌산은(雷酸銀)의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스웨덴의 베르셀리우스 밑에 있던 뵐러는 시안산은(酸銀)의 연구를 하고 있었으나, 뇌산은과 시안산은의 원소 조성이 같은 것을 알고 리비히와 함께 연구를 한 결과, 같은 원소 조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원자의 배치가 다르면 성질이 다른 물질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1826). 이러한 현상은 베르셀리우스에 의하여 이성체(異性體)라고 이름지어졌으며, 이 일이 있은 후 유기 화합물의 구조문제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

리비히와 뵐러는 이 때부터 리비히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두터운 우정으로 맺어졌으며, 유기화학의 중요한 문제를 공동으로 몇 가지나 해결하였다. 또 그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왕복한 서간은 감동적인 것이었다.

리비히 이전에는 유기 화합물의 조성을 분석하는 기술은 확립되지 못했었다. 그는 칼리구(球)나 콘덴서 같은 장치를 고안하여 원소 분석의 기초적 기술을 완성하였다(1831). 이와 같은 기초 위에 선 그와 뵐러는 화학 변화 때에 한덩어리로서 이동하는 원자단(벤조일기)을 발견했다(1832). 이것은 기(基)의 최초의 실례가 되었으며, 탄소 화합물의 화학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또 리비히의 업적은 농업 방면에도 미쳐서 유기물이 직접 양분으로서 흡수된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무기화학 비료를 시비(施肥)할 것을 주장했다.

그 이전의 화학 교육은 도제(徒弟) 제도의 연장이었으나 리비히는 기센대학에 실험을 주로 한 세계 최초의 근대화학 교실을 만들었다. 19세기의 뛰어난 화학자는 거의 이 교실에서 배출되고 있다. 1825년부터 27년까지 기센대학 교수로 있었으나 1852년에 뮌헨대학으로 옮겨갔다.

뵐러[편집]

Friedrich W

hler(1800-1882)

독일의 화학자. 유기물의 생체외 합성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암 마인 근교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의사가 되기를 지망했으나, 스승의 권고로 베르셀리우스 밑에서 화학을 배우고 독일로 돌아왔다. 1835년부터 죽을 때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다. 1828년 시안산암모늄의 이성체로서 요소를 무기적으로 합성, 생체만이 유기물을 만들어 낸다는 생각을 부정했다. 뒤에 무기화학·공업화학으로 걸음을 옮겨 처음으로 알루미늄을 단리(單離)시켰으며 티탄과 규소에 대하여 연구를 깊이 해 나갔다.

성격은 온화하여, 리비히의 격한 성격과는 대조적이었다.

분자 구조의 탐구[편집]

分子構造-探究

유기물의 원소 분석의 이론과 장치가 이루어짐으로써 갖가지 유기물이 어떤 원소로 몇 %씩의 중량비로 이루어졌는가가 분명해져 갔다. 동시에 거기서 유기물의 분자식이 정해져 갔다.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한 화학자들이 착수한 문제는 분자식을 바탕으로 하여 분자 속의 각 원자가 어떤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분자의 내부 구조 탐구에 대한 문제였다.

이성체의 발견[편집]

異性體-發見

리비히는 뇌산은(雷酸銀)을 원소 분석하여 분자식을 AgCNO로 했다(1824년). 따라서 뇌산의 분자식은 HCNO가 된다. 그런데 같은 해 뵐러는 시안가스를 가성칼리액에 통해서 얻은 산을 원소 분석한 결과, 분자식으로 말한다면 HCNO가 된다는 것을 알아 내고 '시안산(酸)'이라 명명했다. 그래서 전혀 성질이 다른 2가지 물질의 분자식이 똑같을 리가 없다고 하며 양자간에 논쟁이 일어났다.

한편, 리비히의 스승 게이 뤼삭은 "같은 조성의 산이 몹시 다르다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소간에 다른 결합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여 이성체, 즉 똑같은 원소 분석치(分析値), 분자식으로 다른 성질의 물질의 존재를 예견한 발언을 했다.

그 뒤 리비히와 뵐러는 자기네 주장의 어느 쪽이 옳은가를 공동으로 실험해 본 결과, 어느 쪽에도 분석 착오는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게이 뤼삭이 말하듯이 이성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단순히 원소 분석에 의한 분자식뿐이 아니라, 분자 속의 원자의 결합양식, 즉 분자구조를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두 사람 사이에는 과학사상 드물게 보는 우정이 싹트게 되었다(오늘날에는 뇌산은 HONC, 시안산은 HNCO로 표시된다).

이성체의 발견은 뵐러의 다음 차례의 연구, 즉 요소의 합성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시안산에 암모니아수를 화합시켜 시안산암모늄의 이성체로서의 요소의 결정을 구명한 것이었다. 단지 4페이지에 미달하는 그의 논문 '요소의 인공적 합성'은 유기물의 인공적인 합성을 개척하는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당시 유기물은 생명체에 의해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생명력론(生命力論)'을 타파하는 시초가 되었다.

기와 분자 구조[편집]

基-分子構造

뵐러의 요소 연구에 영향을 받은 리비히는 1829년 마뇨산(馬尿山)을 발견했다. 한편 뵐러는 안식향산(安息香酸)을 개에게 먹여 오줌을 살펴보고, 거기서 마뇨산을 발견했다. 이러한 일로 리비히와 뵐러 두 사람은 공동 실험을 추진하여 마침내 공동 논문 「안식향산의 뿌리에 관하여」(1832)가 나오게 되었다.

고편도유(苦扁桃油=C7H6O)는 염소가스(Cl2)의 작용으로 염화벤조일(C7H5OCl)이 되며 산소가스(O2)의 작용으로는 안식향산(C7H6O2)이 되나, 어느 화합물에나 C7H5O라는 원자의 집단이 흡사 하나의 원소인 양 보존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벤조일 근(根 또는 基)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근(또는 基)의 발견은 분자 구조의 연구에 한걸음의 진전을 가져다 주었다.

이어서 리비히는 1834년에는 에틸기(基=C2H5-)를 발견하고 동년 프랑스의 뒤마 등이 메틸기(基CH3-)를 발견, 이후 갖가지 기가 발견되어 그 때까지 흐트러져 있던 유기 화합물들의 계통이 세워지고, 반응의 예측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리하여 1837년에 뒤마와 리비히는 기(基)를 유기화학에서의 원소라고까지 선언했다.

일원론적 분자관[편집]

一元論的分子觀

유기 분자는 기(基)에 의하여 2분되어 있다고 하는 생각에 대해서 분자의 실제의 조직은 하나이며 구별 따위는 없다고 하는 생각이 생겨났다. 그 생각이 다름 아닌 뒤마의 실험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뒤마는 여러 가지 유기물에 염소가스를 작용시켜 유기물 중의 수소가 염소로 치환되고 치환된 수소는 염화수소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置換法則). 그의 제자 롤랑(1807-1853)은 염소로 치환되기 전의 유기물과 다음 유기물의 성질이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내어, 염소는 수소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대사건이었다. 첫째로 수소는 플러스 전하(電荷), 염소는 마이너스 전하를 지니고, 그 성질은 정반대로 되어 있었다는 것, 둘째로 염소는 수소와 치환하게 되면, 염소는 불변의 원자 집단이라고 불리던 그 '기(基)'를 파괴하고 들어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자를 이와 같이 일원적으로 보는 것이 옳으냐 이원적으로 보는 것이 옳으냐로 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윽고 거기서 다른 견해가 나왔다. 원자가론(原子價論)이 그것이다. 이것은 분자는 어쨌든 원자로 되어 있는 것이므로 또한번 분자 내의 원자 하나하나의 개성을 살펴 나가자는 생각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원자가의 생각은 뒤에 케쿨레에 의해서 완성된다.

염료 합성의 시초[편집]

染料合成-始初

석탄을 건류하여 코크스를 만들면 석탄가스가 나온다. 그리고 석탄가스가 생길 때에는 반드시 콜타르가 남는다. 석탄가스 제조 공장은 이 검고 찐득찐득한 타르의 처치에 고민, 화학자들에게 부탁을 했다. 화학자는 타르를 증류(蒸溜)하여 온도에 따라 중유(中油)·중유(重油)·안트라센유(油)·피치로 나누었다. 그리고 경유로 고무를 녹여서 방수포를 만들거나, 중유(重油)를 목재에 삼투시켜서 방부용으로 하거나 했다.

리비히의 제자인 호프만은 그 경유를 분석하여 아닐린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아닐린에서 염료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편 리비히의 제자로 러시아의 지닌(1812-1880)은 1842년에 니트로벤젠을 환원하여 아닐린을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니트로벤젠은 벤젠으로 만든다. 벤젠은 그 무렵 안식향이라는 향료로 만들고 있었으나, 그 후 호프만은 벤젠을 경유에서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타르 → 경유 → 벤젠 → 니트로벤젠 → 아닐린이란 순서가 생기고, 아닐린은 무진장으로 있던 타르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공업적 전망이 섰다.

호프만의 조수 퍼킨은, 우연한 동기로 처음으로 아닐린 염료 합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아닐린 염료를 모브라 이름짓고 1857년에 합성공장을 런던 근교에 세웠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도 아닐린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약품을 섞어서 갖가지 색의 염료가 합성되게 되었다. 호프만도 호프만 바이올렛이라 하는 아닐린 염료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경험적·우연적인 합성이었다. 계획적인 염료의 합성은 분자 내의 원자의 결합 양식이 결정된 뒤의 일이다.

호프만[편집]

August Wilhelm von Hofmann(1818-1892)

독일의 화학자. 기센에서 태어남. 기센대학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했으나, 리비히의 영향을 받아 화학으로 전향했다. 리비히의 조수로 있으면서 아닐린 연구를 시작했다.

1845년 영국으로 초청되어 재영 중에 타르 속에서 벤젠을 추출, 값싼 벤젠을 얻게 되었다. 다음에는 벤젠으로부터 아닐린을 합성하고, 1865년에 귀국했다. 그 뒤 독일에서는 그의 업적을 바탕으로 콜타르 염료 공업이 발전했다. 독일 화학회 초대 회장. 또 화학자들의 훌륭한 전기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퍼킨[편집]

William Henry Perkin(1838-1907)

영국의 유기 화학자.

합성 염료 제조에 성공했다. 런던에서 태어남. 부친은 건축업자. 15세에 왕립대학에 들어갔고 이어서 호프만의 조수로 뽑혔다. 아닐린으로 키니네를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는 동안에 염료 합성에 이용할 것을 생각해 내고(1856), 부친 그리고 형과 함께 공동으로 합성염료 제조에 나섰다. 뒤에 쿠마린(coumarin) 합성에 성공하여 세계에서 처음으로 천연 향료의 합성을 행했다.

1869년 알리자린의 공업적 합성에도 성공. 만년에 나이트의 작위(爵位)를 받았다.

원자가의 생각[편집]

꼭두서니의 합성[편집]

-合成

벤젠 핵(核)의 구조가 밝혀지고 나서 3년 후(1868), 베를린의 그레베(1841-1927)와 리베르만(1842-1914)은 꼭두서니의 주성분인 알리자린을 합성했다. 그 합성법은 우선 알리자린의 분자 구조를 결정하고 그 구조의 모체가 되는 것이 안트라센이라는 것을 알아낸 다음 거기서 계획적으로 유도한 것이다.

쪽의 합성[편집]

藍-合成

케쿨레의 제자인 베이어는 1865년, 쪽의 주성분인 인디고 C16H10O2N2의 합성을 해보려고, 벤젠 핵의 분자 구조를 따라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80년 마침내 이에 성공했다. 인디고의 분자 구조를 밝힌 것은 3년 후인 1883년의 일이다.

케쿨레[편집]

Friedrich August Kekule(1829-1896)

독일의 유기 화학자.

원자가론(原子價論)을 만들어 유기화합물, 특히 벤젠의 구조를 밝혀냈다.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군사참의관(參議官)을 지냈다. 건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기센대학에 입학했으나 리비히의 강의를 듣고 화학으로 전향했다. 대학 수료 후 파리, 런던에서 제1선의 화학자의 이론을 배우고, 귀국하여 하이델베르크에서 강사직에 취임했다. 1857년 탄소가 4가이고, 또 길다란 사슬을 만든다는 것, 이 사슬에 갖가지 원자가 붙어서 다양한 화합물을 형성한다는 것을 발표했다. 다음해에 벨기에로 부임한 그는 방향족 탄화수소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여 벤젠의 구조식을 밝혔다. 이에 따라서 방향족의 이성체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게 되어, 케쿨레가 예상한 화합물은 차례차례로 발견되었다. 또 케쿨레의 이론을 바탕으로, 독일의 합성화학공업은 훌륭한 발전을 보였다. 1867년 모국으로 돌아온 케쿨레는 본대학의 화학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여기에 머무르면서 베이어, 반트 호프와 같은 학생을 길러냈으며, 훌륭한 유기화학 교과서를 남겼다.

베이어[편집]

Johann Friedrich Wihelm Adolf Baeyer(1835-1917)독일의 유기화학자.

인디고의 합성에 성공했다.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유명한 측지학자. 어릴 때부터 화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21세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분센(R. W. Bunsen, 독일의 화학자, 1811-1899)의 문하생이 되어 처음부터 진보된 유기화학 연구를 시작했다. 이 때 특별한 지도강사였던 케쿨레를 따라 벨기에로 건너갔다. 1860년 귀국하여 실과학교의 교사로서 12년간을 보냈으며, 이 동안에 인디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뒤에 스트라스부르대학의 교수가 되어, 거기서 색소 연구(色素硏究)에 전념했다. 또 그의 제자인 리베르만과 그레베는 천연 염료(天然染料)인 알리자린을 처음으로 합성했다.

1875년 리비히의 사망 후 뮌헨대학의 화학 교실을 인수하여 이 곳을 대규모로 개조해서 후세까지 모범이 되었던 실험실을 만들었다. 이곳으로 온 지 3년, 인디고를 연구하기 시작하고 나서 10년째에 겨우 실험실에서 인디고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82세의 고령으로 죽을 때까지 40년간을 뮌헨에서 지냈다. 그는 유능한 화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는 한편, 화학공업상의 문제에도 힘을 쏟아 유기화학자를 많이 양성했다. 1909년, 인디고의 합성을 비롯한 유기화학상의 공적에 따라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입체 화학의 시초[편집]

立體化學-始初

분자의 조직을 나타내는 식, 즉 구조식은 케쿨레 등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케쿨레는 예를 들면 메탄 CH4를 다음 그림과 같이 나타내었다. 그런데 실제의 조직은 탄소 원자는 정사면체의 중심에 위치하며, 4개의 수소원자는 그네구석에 고정되어 있다. 즉 분자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처음으로 공포한 사람이 네덜란드의 반트 호프였다. 반트 호프는 위슬리체누스(1835 1902)의 논문에서 커다란 힌트를 얻었다. 젖산(乳酸)에는 두 가지가 있으며, 분자의 구조식은 하나일지라도 성질이 다른 젖산-발효젖산과 육젖산(肉乳酸)이 있다. 발효젖산을 물에 녹여서 선광계(旋光計)에 넣으면 아무런 변화도 없으나, 육젖산에 넣으면 광원의 빛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가리기 위해서는 검광자를 오른쪽으로 몇 번 돌려야만 한다. 발효젖산에는 선광성이 없으나 육젖산은 우선성(右旋性)이다. 2종류의 젖산에 대하여 하나의 젖산분자의 구조식밖에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반트 호프는 특유의 공상력을 작용시켜서 먼저 탄소원자 C에 세가지 기(基)가 결합한 3종류의 구조식을 생각하고(그림(1)(2)(3)), 이어서 그 평면 구조식을 탄소원자가 사면체의 중심이 되게 구조를 입체로 바꿈으로써(그림 ① ② ③) 2종류의 젖산에 대하여 2종의 구조식으로 나타내도록 하였다(그림에서 ②와 ③은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는 파스퇴르의 주석산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①을 우선성인 육젖산으로 하고, ②를 미발견의 좌선성 젖산으로, 선광성이 없는 발효젖산은 좌우 같은 분량이 포함된 것으로 생각했다. 젖산의 구조가 입체적이라면 본디 모양인 메탄도 입체적일 것이다. 이리하여 1874년 반트 호프는 불과 11페이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획기적인 논문도 처음에는 공상적이라고 빈축을 받는 형편이었다. 위슬리체누스만은 높이 평가하여, 뒷날 이 '공간의 화학' ― 입체 화학의 옳음을 증명하고, 다시 에밀 피셔(1852 1919)에 의해서 당류·단백질의 구조 구명과 합성을 위한 유력한 길잡이가 되었다.

주기율의 발견[편집]

周期律-發見

19세기에서의 유기화학의 발전 중에서 소수의 화학자는 여전히 무기화학을 추구하고 있었다. 특히 전기분해법(데이비, 베르셀리우스), 분광 분석법(분센 1811-1899, 키르히호프 1834-1887) 등에 의해 새 원소가 차례로 발견되었다. 1870년까지 원소수는 63개가 되고, 그 중 19세기 중에 발견된 수는 약 반수인 30개에 이르고 있다.

원자량·분자량의 통일[편집]

原子量·分子量-統一

발견된 모든 원소는 차례차례 그 원자량·당량(當量)이 측정되었으나, 화학자에 따라서는 산소의 원자량을 8로 하는 이와 16으로 하는 이가 있었다. 따라서 물의 분자식도 학자에 따라서는 H2O이기도 하고 HO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케쿨레는 만국 화학자회의를 열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따라 1860년, 칼스루에서 첫번째 회의가 열렸다. 이 제1회 회의에서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으나 그 영향은 컸다. 가장 큰 성과는 하나는 주기율이 확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주기율의 확립[편집]

週期律-確立

186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교수가 된 멘델레예프는 63개의 원소를 어떤 순서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느냐를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원소 분류의 확실한 원리로서 원자량을 선택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원자량의 차이가 원소의 성질의 차이나 유사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수소에서 염소까지의 15장의 카드를 원자량 순으로 늘어놓았다(그림Ⅰ). 그러자 2장째인 리튬은 9장째인 나트륨과는 알칼리 금속으로서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세로로 늘어놓고 보면 다른 원소―예를 들면 불소와 염소에 대해서도 유사한 것이 세로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6장째인 베릴륨이 10번째인 마그네슘과 유사하다는 데서, 그것을 원자 리튬과 붕소의 사이에 넣고, 원자량 14를 9로 바꾸어 써 보았다. 그는 실험도 않고 원자량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자 다른 원소 모두가 세로로 유사(類似)한 것이 되어 바꾸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그림Ⅱ).

여기에는 이미 원소를 원자량순으로 늘어놓으면 일정한 주기로 성질이 비슷한 원소가 온다는 법칙, 즉 주기율(週期律)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베릴륨의 원자량이 14가 아니라 9라는 것은 15년 후인 1884년 스웨덴의 닐슨(1840-99)과 페터슨에 의하여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이리하여 멘델레예프는 63개의 원소 전부를 주기율에 의하여 분류하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먼저 비슷한 원소를 세로로 맞추고, 가로로는 원자량순으로 늘어놓았다. 성질이나 원자량이 모두 확실했던 것은 아니며, 고생은 계속되었다. 표에는 아무래도 빈 칸이 생기게 되지만, 이것은 장차 발견될 원소라고 단정했다. 미지 원소에 대한 예언, 이것도 주기율의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1869년, 최초의 주기율표가 학회에 발표되었다(이것은 현재의 주기율과는 달리 가로·세로가 반대로 되어 있었다).

1871년에는 다시 현재의 것에 가까운 주기율표가 발표되었다. 주기율표는 다른 과학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멘델레예프가 거기서 미지의 원소인 에카규소(게르마늄)·에카붕소(스칸듐)·에카알루미(칼륨)의 원자량·성질·비중 등을 예언한 일이 얼마 안 가서 거의 그대로 실증되고, 주기율은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자연 법칙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멘델레예프 이전에 되베라이너(1780-1849)의 3조원소(三組元素), 드 셍크루터(1819-1886)의 땅의 나선(螺旋), 뉼랜즈(1837-1898)의 옥타브의 법칙 등 원자량 순으로 원소를 늘어놓는 시도가 여러 가지로 행해지고 있었으나, 그 어느 것도 미지 원소의 예언이라는 대담성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멘델레예프[편집]

Dmitrii Ivanovich Mendeleev(1834-1907)러시아의 화학자. 주기율을 발견했다. 부친은 고등학교 교장. 14명의 형제 중 막내로서 시베리아의 토볼스크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실명하고 병으로 사망한 뒤에, 모친이 유리공장을 경영하여 대가족을 부양해 갔다. 자형의 지도로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16세 때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앙 교육전문학교의 이과(理科)에 입학했다. 얼마 안 가서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되었으나, 병과 싸우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이론화학과 유기화학의 강사가 되자, 선발되어 파리로, 이어서 독일로 유학했다. 분센(R .W. Bunsen, 독일의 물리학자, 1811-99)이나 키르히호프(G. R. Kirchhoff, 독일의 물리학자, 1824-87) 밑에서 액체의 열팽창에 대한 연구를 하고, 귀국한 뒤에 곧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다(1865). 대학에서는 공업화학·무기화학에 대한 강의를 했다.

후세의 무기화학자들에게 보고(寶庫)라 불리었던 교과서 『화학의 기초』를 출판했으나, 이 때 원소의 배열방법으로서 원자량의 크기의 차례에 따를 것을 생각하고, 주기율에 대한 사상의 실마리를 잡았다. 1869년 주기율을 발표, 1871년 이 원리에 입각하여 미지 원소의 존재와 성질을 예언했다. 56세 때 정치상의 문제로 대학을 사퇴했다. 주기율 이외의 그의 연구에는 용액의 비중, 액체·기체의 열팽창, 유기화학에 관한 것 등이 있으며, 화학공업에서도 카프카즈의 석유공업에 공헌했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 얼마 안 가서 생애를 마쳤다.

노벨[편집]

Alfred Bernhard Nobel(1833-1896)

스웨덴의 발명가·화학 공업가·노벨상의 설정자. 스톡홀름에서 출생하여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국에 유학하여 기계공학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연구하고, 이를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발명, 1867년에 특허를 얻었다. 1869년부터 파리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념하여, 1875년 무산 화약 발리스타이트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발명 및 특허에 의해 그의 가문은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세계의 평화와 과학의 발달을 염원해 오던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은 스웨덴과학아카데미에 기부되었고 그 기부금으로 노벨상 제도가 설정되었다. 이 상은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경제학·평화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국적 및 성별에 관계없이 그 부문에서 뚜렷한 공로자에게 매년 수여되고 있다.

프랭크랜드[편집]

Sir Edward Frankland(1825-1899)

영국의 유기화학자. 1863년 런던 왕립원 교수가 되었다. 로커와 함께 원자가 이론(1852-1860)을 내놓았으며, 1868년에는 태양 대기중에 헬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또한 공중위생 전문가이기도 하였다.

분센[편집]

Robert Wilhelm Bunsen(1811-1899)

독일의 화학자. 괴팅겐에서 출생하여 괴팅겐대학을 졸업한 후, 화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연구는 화학의 각 분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분센 버너를 비롯한 전지·광도계 등 많은 기구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859년 키르히호프와 함께 '스펙트럼 분석법'이라는 원소를 조사하는 법을 발견해 낸 것이다. 물질에서 나오는 빛을 프리즘으로 분석하면, 그것이 어떤 원소인가를 알 수 있어, 작은 물질을 찾아내는 데 편리하므로 천문학이나 물리학을 진보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퍼킨[편집]

Sir William Henry Perkin(1838-1907)

영국의 유기화학자.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집에다 실험실을 만들어 연구를 하고 호프만의 제자가 되었다. 1856년 화학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보라의 색소를 발견했는데, 이 색소가 사람의 손으로 합성해서 만든 아닐린 염료이다. 그 후에 그는 런던 교외에 공장을 세우고 인조 염료 공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계속 연구를 하여 몇 개의 합성 염료를 더 만들어 내었으며, 공장에서 은퇴해서도 화학 연구를 계속하여 향료도 만들었다.

[편집]

Charles Martin Hall(1863-1914)

미국의 화학자. 전기 분해 원리를 이용하여 보크사이트로부터 알루미늄을 제련해내는 경제적인 방법을 창안하였다.

크룩스[편집]

Sir Willam Crookes(1832-1919)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 1861년 탈륨을 발견하고, 그 원자량을 정했다. 또한 복사에너지의 크기를 측정하는 장치인 복사계를 발명했다. 1870년대 음극선의 움직임을 연구하려고 진공관을 만들었는데, 이 장치를 크룩스관이라 한다. 크룩스관은 오늘날 전자장치에 쓰이는 음극선관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스완[편집]

Sir Joseph Willson Swan(1828-1914)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 1864년에 사진 인화에서 탄소처리법으로 특허를 받았으며, 건판 방식(1871)과 브롬 종이(1879)를 만들었다. 또한 에디슨보다 20년 앞선 1860년에 전등을 발명하였으며, 처음으로 실용성있는 인견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램지[편집]

Sir William Ramsay(1852-1916)

영국의 화학자. 글래스고에서 태어나, 글래스고와 독일의 튀빙겐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74년 글래스고대학 강사 시절에 유기화학과 물리화학을 연구하였다. 1887년 런던대학의 화학 교수가 되어 레일리와 함께 아르곤과 네온·크립톤 등의 원소를 발견하였다. 1904년 이 업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으며, 방사능을 연구하여 방사성 원소의 붕괴설을 증명하였다.

드와[편집]

Sir James Dewar(1842-1923)

스코틀랜드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 병을 열에 대한 부도체로 감싸는 방식과 함께 병 내부를 이중으로 만들어 사이의 공간은 진공으로 하고 병 안쪽에 은도금을 하여 대류와 복사에 의한 열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인 보온병을 발명하였다.

르 샤틀리에[편집]

Henry Louis Le Chatelier(1850-1936)프랑스의 화학자. 1884년 화학반응이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어느 방향으로 일어날지 미리 예측하는 '르 샤틀리에의 원리'를 발표했다. 이 원리로 화학공업을 합리화하여, 낭비없이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원리는 독일의 화학자인 하버가 공기중의 질소에서 암모니아를 만드는 방법을 발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밖에도 르 샤틀리에는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을 밀접하게 연결하여 금속학·광물학·고온측정법·도자기·시멘트 등을 연구했다. 그 결과 높은 온도에서 측정할 수 있는 백금-로듐 열전기쌍과 금속을 용접할 때 쓰는 산소아세틸렌 용접기를 개발했다.

물리화학의 시초[편집]

物理化學-始初

물리화학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8세기 중엽의 독일의 과학자였다. 그러나 19세기의 화학의 주류는 유기화학이었다. 분자의 조직을 마치 콩의 가공(加工)과 같이 생각하고, 그 콩(原子)을 바꾸면 다른 분자가 된다는 합성 화학 연구(合成化學硏究)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화학 변화의 원료와 제품이 관심사였으며, 화학변화의 과정이 주위의 물리적인 여러 조건에 의해 어떻게 되는가 하는 화학 친화력의 문제는 단순히 화학자의 경험에 일임되고 있었다. 이 경험에 과학의 빛을 주었을 때, 이른바 물리화학의 시초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물리학 그 자체의 발달도 필요하였다. 처음에는 조그만 흐름으로 시작되었던 물리화학이 드디어 1870년대 이후 대하(大河)가 되어 화학의 주류를 형성함에 있어서는 기체분자 운동론·열역학·전기학 등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운동·열·전기와 같은 에너지가 화학에너지로 변환하는 에너지변환(變換)의 법칙의 확립이 그 전제(前提)였던 것이다.

물리화학의 근원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이다. 리비히의 친구인 코프(1817-1892)는 화합물의 화학적·조성이 그의 물리적 성질(비열·비등점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계통적으로 조사해 내어서(1840-1858) 물리화학을 출발시켰다.

그러나 그 후 물리화학의 중심이 된 것은 화학 친화력의 탐구였다. 분센과 로스코(1833-1915)는 염소와 수소가 빛의 작용 아래에서 염산이 되는 반응 과정을 조사했다. 한편 빌헬르미(1812-1864)는 화학 친화력을 수학적으로 나타내어 원료 물질의 농도와 반응 속도와의 관계를 분명히 했다.

1861년에 시작되는 연구에서 프랑스의 베르틀로와 제자인 페앙 드상지르는 초산과 알코올에서 초산 에스테르(醋酸ester)와 물이 생기는 반응으로 얼마만한 농도의 원료가 몇 % 제품이 되어 평형점에 달하는가를 실험했다.

그 결과 원료의 약 70%밖에 제품이 되지 않고 화학 평형이 되는 반응도 원료의 농도를 늘리면 그 80-100%가 제품이 된다는 것이 표시되었다.

그러나 원료의 농도 증가와 제품 증수(增收)를 일일이 실험치 않고 알아맞히는 법칙 ― 질량작용의 법칙을 찾아낸 것은 노르웨이 화학자 보게(P. Waage, 1833-1900)와 수학자 굴베르크(1836-1902)였다(1844). 두 사람은 화학평형을, 정반응의 반응속도(화학력이라고 처음 이름했다)와 역반응의 속도가 같아지는 점을 생각하여 쌍방의 반응속도 정수(定數)의 비를 화학 평형정수 K로 했다. K는 일정 조건에서의 그 화학반응에는 고유의 것이므로 반응물질의 농도를 실측하여 K를 정해두면, 원료의 농도를 어떻게 바꾸면 제품의 농도가 어떻게 되는가를 산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날에 입체화학으로 명성을 떨친 반트 호프도, 독립적으로 질량작용의 법칙을 발견했다(1877).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발견한 질량작용(質量作用)의 법칙은 분자 운동론(分子運動論)이나 원자의 실재(實在)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화학 변화의 진행은 열의 발생이나 흡수와 깊은 관계가 있다. 물리학자는 1860년까지에는 열에 대한 두 가지 법칙, 제1법칙과 제2법칙을 이미 얻어내고 있었다.

1840년, 독일의 헤스(1802-1855)는 다수의 화학반응 때에 출입하는 열량을 재어, 일정한 화학반응으로 출입하는 열량은 별도의 길을 지나서 같은 최종 생성물에 달하기까지의 열량의 총화에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이 열총량 불변의 법칙은 2년 후에 로버트 마이어가 말한 바와 같이 열역학 제1법칙의 특수한 경우였다.

베르틀로와 톰슨(1826-1909)은 갖가지 반응열을 측정하여, 반응열이 화학 친화력의 대소를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고 생각했다. 즉 화학 변화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가는 보다 더 열을 발생시키는 방향으로 결정된다고 했다(최대일의 원리).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경우를 제하고는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본디 열역학 제1법칙은 화학반응의 결과에만 적용되는 법칙이었기 때문이다.

화학 반응의 과정을 연구하는 데는 가역반응과 화학평형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 조건에 따라서는 원료는 모두가 제품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반응의 과정에 가장 적절한 것은 열역학 제2법칙이다. 1869년, 독일의 홀스트만(1842-1929)은 염화암모늄의 분해반응에 처음으로 열역학 제2법칙을 적용시켰다. 그리고 이 시도를 1884년 반트 호프가 완성시켰다. 또 이전에 발견했던 질량작용의 법칙을 제2법칙을 이용해 유도해냈다. 또한 그는 용액간의 정역(正逆)반응에도 적용시켜, 기체에서 성립되는 보일-샤를의 법칙이 농도 희박한 용액에도 성립된다는 것을 추측해냈다(1886).

1887년 아레니우스는 반트 호프가 특히 의문시했던 점에 주목했다. 즉 희박한 용액 중에서도 정확하게 보일-샤를의 법칙이 성립되는 것은, 사탕·포도당 같은 2-3개의 유기화합물뿐이고 산·염기(鹽基)·염 등의 수용액에서는 조금 어긋남이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어긋남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자기의 이온설(說)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1883년 아레니우스는 전해질(電解質) 수용액에서는 용질은 단순히 분자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세밀하게 전기를 유도할 수 있는 소부분(小部分), 즉 이온으로 나눠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반트 호프의 결과는 아레니우스의 이노설의 증명이 된 것이다.

식염수 속에서는 나트륨 이온과 염소이온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는 착상은 당시의 화학자에게는 꿈과 같은 얘기였으나, 이윽고 이것이 전기 화학, 즉 전지나 전기분해의 진보에서 불가결한 것이 된다.

오스트발트도 일찍부터 이온의 존재를 믿었던 소수 화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반트 호프의 1884년의 논문의 영향을 받아 물리화학을 에너지라는 생각에 의해 통일 조직하려고 생각하고, 그것은 원자·분자·이온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그 뒤 톰슨(J. J.)이 기체 이온의 실재를, 페랑이 브라운 운동에서 분자의 실재를 증명하고 나서, 그는 그 실재(實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발트의 에너지론은 그 때까지의 기계적·역학적 원자관을 수정하게 하고, 당시 분산되어 있던 물리화학의 연구업적을 그것으로 조직화하였으며, 19세기 화학의 주류였던 유기화학을 현대화학의 주류인 물리화학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반트 호프[편집]

Jacobus Hendricus Van't Hoff(1852-1911)네덜란드의 물리학자.

물리화학의 기초를 이룩했다. 로테르담 태생. 부친은 지방의 개업의. 처음 기사가 될 생각으로 고등공업학교에 들어갔으나, 공업 면에 흥미가 적어져서 라이덴대학에 입학, 화학의 준비로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20세 때 독일의 본대학에 들어가 케쿨레에 사사(師事), 당시의 유기화학의 첨단을 걷는 구조론을 배웠다. 케쿨레의 권유로 파리에 유학한 후 네덜란드로 돌아와서 학위를 땄다.

1874년, 탄소화합물의 사면체 구조를 제창하고, 입체 화학의 실마리를 여는 논문을 발표했으나 이 논문은 무시당하고, 학위는 있어도 직장을 얻을 수가 없었다. 신문에 개인교수 광고를 내고 있는 동안에 겨우 수의(獸醫)학교의 조수 자리를 찾아내었다. 1876년, 그의 논문이 비슬리체누스(J. Wislicenus, 독일의 화학자, 1835-1902)에게 소개되자, 별안간 명성을 떨쳐 2년 후 암스테르담대학에서 정교수로 맞아들이고, 이후 18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1884년, 반응속도와 평형에 관한 이론을 발표, 2년 후에 용액론(溶液論)이 나왔다. 1887년에 오스트발트와 함께 창간한 유명한 『물리화학 잡지』의 제1호에는 아레니우스의 전리설과 그의 용액론이 함께 실려 있다. 1896년에, 여러 차례에 걸친 요청 끝에 베를린대학의 명예 교수가 되어, 세계적으로 중요한 자원이었던 슈타스푸르트의 암염층의 성인(成因)을 연구했다. 1901년 제1회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아레니우스[편집]

Svante August Arrhenius(1859-1927)

스웨덴의 물리학자.

이온설의 제창자. 업살라의 근교에서 출생. 부친은 기사. 업살라 대학에서 화학·수학·물리학을 공부하고, 24세 때 박사 학위 논문으로서 이온설을 발표했으나 일반으로부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오스트발트는 곧바로 이온설을 인정했다. 모국에서 불우하였던 아레니우스는 이후 5년간에 이르는 유럽 편력여행을 떠나 오스트발트, 콜라우시(F. W. G. Kohlrausch, 독일 실험 물리학자, 1840-1910), 볼츠만(오스트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1844-1906), 반트 호프의 연구실을 차례로 찾아 연구를 추진했다. 이 동안에 이온설은 반트 호프의 용액론에 의해서 확고히 뒷받침되어 일반으로 퍼져 갔다.

1891년, 기센대학의 초빙을 거절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아레니우스는 스톡홀름공과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905년에는 그를 위해서 신설한 노벨연구소의 물리화학 부주임이 되었다. 그의 업적에는 용액의 점성(粘性), 또는 반응속도의 연구가 있으나, 후년에는 우주 구조론이나 기상전기·면역(免疫)화학 등 넓은 범위에 걸쳐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오스트발트[편집]

Friedrich Wilhelm Ostwald(1853-1932)

독일의 화학자.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태어남. 부친은 통제조업. 지방의 실과학교에 입학했으나, 곤충채집으로부터 음악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에나 열중했으므로 5년의 과정을 7년 걸려서 졸업했다. 19세 때 도르파트대학에 입학, 유기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 산·염기의 화학친화력을 연구함으로써 학위를 얻고 리가로 돌아와 공과대학 교수가 되었다(1877). 아레니우스의 이온설을 알게 되자, 반트 호프를 합한 세 사람이 손을 잡고 이온설을 주장하며 싸웠다. 그 자신도 희석률(稀釋率)을 유도하여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887년, 정치적 분규가 있었던 리가를 떠나 독일의 라이프치히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 때 조수로는 네른스트(1864-1941)와 베크만(1853-1923)이 뽑혔다. 그의 연구실에는 유능한 학생들이 모이게 되고 물리화학의 메카라 불리었다. 오스트발트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쳤으며, 물리화학의 기초 실험법의 확립, 반응속도·촉매·질산 제조와 같은 연구가 있다. 이와 같은 업적에 대하여 1909년 노벨화학상이 주어졌다. 또 그는 교육자로서 매우 유능하여 훌륭한 교과서를 많이 써 내었다. 계몽에도 힘을 써서 과학사(科學史)·인물전을 저술했고, 특히 과학의 고전적 논문을 수집한 『오스트발트 프라시카』의 편찬은 유명하다.

후년에 그는 원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에너지론자가 되었으나, 실험적으로 원자·분자가 증명되자 그것을 인정했다. 1905년에는 대학을 그만두고 색채론을 연구했고, 철학적 사색에 잠기면서 국제어(國際語)를 만들었다.

현대화학으로의 길[편집]

現代化學-

20세기 화학의 여명은 우선 원자·분자의 실재 증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돌턴이 근대적 원자론을 제출한 이래, 원자·분자의 존재는 자연과학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으로서 일반에게 받아들여져 왔으나, 존재가 실증되기까지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설(假說)로서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서 열역학이 발달하여 현상을 에너지 면에서 포착할 수가 있게 되자 원자·분자의 존재를 의심하는 소리가 일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곧 물리학자의 손으로 원자·분자의 존재는 실증되었고, 그 이후 원자의 구조를 추구하는 물리학의 눈부신 진보가 이룩되어 이 물결을 타게 된 화학에서도 화합물의 결합 실체나 반응 기구를 원자보다 한층 더 작은 전자, 또는 원자핵의 차원에서 추적할 수가 있게 되었다.

1900년대 초 아인슈타인, 스몰루코프스키(M. von Smoluchovskii, 1872-1917) 등은 액체 속에 떠돌아다니는 미립자의 브라운 운동의 원인이 액체 분자의 충돌이라는 것을 계산해냈다. 이어서 1909년 페랭은, 액체 속에 떠도는 미립자의 수는 액체 하부에서 상부를 향해 줄어가지만, 이 감소 상태는 지구 주위의 대기의 밀도가 상공으로 올라감에 따라서 감소하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 현상(沈降平衡)의 측정에서 아보가드로수(數)를 구했다. 3년 후, 그는 아인슈타인 등의 추론(推論)에 실험적 증명을 주고, 같은해 스웨덴의 스베드 배리(1884-1971)의 확산의 실험도 있어서 분자의 실재(實在)는 확실히 증명되었다.

X선 해석학의 탄생[편집]

X線解析學-誕生

1912년 독일에서는 물리학자 라우에(M. von Laue, 1879-1960)가 결정(結晶)에 X선을 쬐는 실험을 시작했다. 수년 후 그는 그 때까지 반사나 회절(回折)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던 X선이 회절 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을 발견했으나, 이 현상은 브래그 부자의 손으로 곧 다루어져, X선 해석학(解析學)이 탄생했다.

그들은 단결정(單結晶)의 표면에서 X선을 반사사키고, 이 결과를 해석하여 결정구조(結晶構造)를 이루는 물질 내부의 원자 배열상태를 알아내었다. 그 결과 식염과 같이 수중에서 이온이 되는 물질은 고체 중에서 이온의 형태로 결정을 이루고 있으며, 분자가 수중에 용해된 다음 이온으로 해리(解離)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판단임이 밝혀졌다. 또 다이아몬드의 결정 내에서는 탄소가 사면체의 배치(配置)를 취하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리하여 분자를 이루고 있는 원자의 모양이 실제로 확인되고, 19세기의 입체화학에서 얻어진 성과가 그릇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X선을 이용하는 실험 방법은 이후 X선 결정학, X선 분광학 등으로서 화학실험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화학적 결합론의 발전[편집]

化學的結合論-發展

화합물 구조에 대하여 이와 같은 연구가 추진되는 한편, 고전적 화학의 원자가(原子價)가 실제로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가? 화학 결합의 본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연구도 물리학의 도움을 빌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화합물을 형성하는 힘을 전기적인 것으로 보는 생각은 이미 19세기 초에 볼타 전지(電池)의 탄생 당시의 전해 실험에서부터 베르셀리우스의 전기 화학적 2원론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 후 주로 유기 화합물을 대상으로 한 분자의 구조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결합력의 원인에 대한 고찰은 한동안 중단되어 있었다. 이것은 결합력을 살펴보는 실험적 방법이 아직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합력을 전자의 작용으로서 처음 착안한 것은 영국의 물리학자 톰슨(J.J)이다. 그는 1897년, 진공 방전의 실험에서 전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이어서 양구모형(陽球模型)이라 불리는 원자 모형을 생각해 내었다(1904). 이 모형에서는 양구 내부에 전자가 동심적으로 배치되고 이것의 각환 고리에는 전기 역학적으로 안정된 수의 전자가 들어 있다.

그는 전기적으로 플러스(+) 원자는 전자를 몇 개쯤 잃고 나서 안정되며 마이너스(-) 원자는 전자를 더 받아들여 가지고 안정된 전자 상태가 된다고 생각했다. 원자가(原子價)의 전자론은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지만, 이러한 생각에서는 식염과 같은 이온 결합은 설명되어도, 수소분자(H2)와 같은 공유 결합에는 전혀 무력한 것이었다.

한편, 원자 구조에 대한 추구는 물리학자의 손으로 계속되었다. 분센, 키르히호프 이래 진행돼 온 분광학의 성과와 플랑크의 양자론(量子論) 등을 바탕으로 삼았다. 보어는 1913년 획기적인 원자 모형을 발표했다.

이 구조에서는, 원자핵의 주위를 전자의 껍데기가 몇 겹으로나 둘러싸고 있어서 가장 안정된 희유(稀有) 가스의 최외각(最外殼) 전자는 8개이다. 같은해, 영국의 모즐리(1887-1915)는 모든 원소의 특성 X선의 파장을 측정하여, 그 변화와 원자자핵의 전하의 크기 사이에 직선적인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리하여 원소의 성질과 전자수, 즉 원자번호와의 밀접한 관계가 밝혀지고, 주기율표는 다시 원자번호 면(面)에서 재검토되게 되었다.

1916년 독일의 코셀(A. Kossel, 1888-1927), 미국의 루이스(G. M., 1875-1946)는 보어의 모형을 바탕으로 하여 원자의 결합력을 설명했다(1916). 이 생각을 계승한 랭뮤어는 1919년에 팔우설(八偶說)을 발표했다.

루이스 랭뮤어의 이론에서는 원자와 원자가 가전자(價電子)를 공유하여 전자의 쌍을 만듦으로써 화학 결합이 이루어지며, 이 결합 양식을 공유결합(共有結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공유전자의 궤도운동은 보어의 원자모형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아, 전자적 원자가론(電子的原子價論)은 여기서 커다란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보어가 생각하는 굳은 작은 입자 모양을 취한 전자가 파동성(波動性)을 가진 전자로 치환되었을 때, 이 벽은 비로소 뚫리게 되었던 것이다.

양자 역학과의 관계[편집]

量子力學-關係

1923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드 브로이는, 물질도 입자(粒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가진다는 물질파의 이론을 제출하여 전자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예견했다. 취리히대학의 슈뢰딩거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1926년 전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유명한 파동 방정식을 유도했다. 같은 취리히대학의 하이틀러(1904-1981)와 런던(1900-1954)은 슈뢰딩거의 지도와 격려를 받으면서 다음해, 수소 원자끼리가 공유결합(共有結合)을 하여 안정된 수소 분자를 만드는 메커니즘을 양자 역학을 이용하여 선명하게 해명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화학결합을 양자역학적으로 해명하는 양자화학이 발전하였다. 하이틀러·런던의 이론에서는 2개의 원자에 속하는 전자가 각각 상대되는 핵과의 사이에서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폴링(L. C. Pauling, 1901-1994)은 이 전자의 교환을 '공명(共鳴)'이라 부르고(1931), 슐레이터(J. C. Slater, 1900- ? ) 등과 함께 원자궤도 함수법을 발전시켰다. 공명이론은 특히 방향족(芳香族)화합물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 유효했다. 한편 분자 스펙트럼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분자 내의 전자 상태가 실험적으로 살려지게 되어, 분자를 다핵(多核)원자로 간주하는 견해가 생겨났다. 그래서 푼트(1896- ? ), 마리켄(1890- ? ) 등은 화학결합의 경우 각 전자는 분자 전체에 퍼지는 궤도를 운동한다고 생각하고, 분자궤도함수를 도입했다(1932).

화학 반응론의 전개[편집]

化學反應論-展開

물리화학의 탄생 이후 화학반응론 또한 20세기로 들어서자 통계역학·양자(量子)역학의 도움에 의하여 반응의 출발점에서부터 종점까지의 전과정(全過程)을 추적할 수 있는 이론으로 성장했다. 아레니우스(1859-1927)가 추상적으로 인도한 활성화(活性化) 에너지와 활성화 물질의 개념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물리화학자는 이론을 전개시키고 있었으나, 이 문제는 화학공업의 발전에서 중요한 촉매와 관계가 깊기 때문에 공업 면에서도 이 이론의 완성에 대한 요청은 컸다.

1918년 미국의 루이스(W. C.)는 기체분자 운동론을 도입하여, 화학 반응을 다수와 분자간의 상호 작용으로 생각하고 '충돌의 이론'을 만들어 반응의 메커니즘(조직) 연구를 조금 전진시켰다. 뒤에 아이링, 폴라니(1891-1976)는 반응 과정의 양자역학적 고찰을 가하여 절대 반응속도론을 제출하고 오늘날의 양자역학적 반응속도론의 토대를 구축했다. 앞으로 반응론은 생체 내의 촉매인 효소작용의 해명 때에도 중요한 구실을 할 것이다.

고분자 화학의 진전[편집]

高分子化學-進展

제2차대전을 경계로 눈부시게 발전한 분야 중의 하나가 고분자화학이다. 고분자물질 중에서 천연 고분자물질·녹말·셀룰로오스·단백질·고무 등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논의되어 왔으며 합성 고분자도 19세기에 이미 셀룰로이드, 베이클라이트 등으로 나타나고 인조고무의 연구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나, 이러한 물질의 구조에 관해서는 충분한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고, 합성에 관해서도 시행 착오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런 물질이 탄소의 길다란 사슬을 가진 분자라는 것을 밝혀내고, 그들에게 고분자란 이름을 붙여 고분자 화학의 체계를 세운 것은 슈타우딩거의 공적이다.

독일에서는 제1차 대전 당시부터 천연자원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무·수지·섬유와 같은 고분자 화합물의 합성에 주력하고 있었으나, 슈타우딩거도 1910년대에는 이 소플렌을 중합(重合)하는 문제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고분자의 연구에 몰두했던 것이다. 고분자는 분자량이 커서 용매(溶媒)에 의한 용해가 곤란하기 때문에 보통의 유기화학적 방법으로는 다룰 수가 없어서 당시의 고분자 화합물은 모두 콜로이드 화학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런 경우, 용매에 콜로이드 상태로 분산하는 고분자의 입자(粒子)에 대해서는 다수의 분자가 약한 분자간력(分子間力)으로 회합(會合)한 덩어리라고 하는 생각이 오스트발트 이후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슈타우딩거는 이 입자는 몇 백이나 되는 기본 분자가 공유결합으로 단단히 결합하여 길다란 사슬을 만드는 하나의 고분자로 되어 있다고 결론짓고, 그 증거로서 고분자 물질의 중합도(重合度)를 바꾸지 않고 유도체로 바꿀 수 있다는 것, 물리적 방법으로 결정된 분자량과 특징적인 말단기(末端基)로부터 계산된 분자량이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가 이 이론을 처음 발표한 1920년에는 이것을 이해하는 학자가 아무도 없어, 이와 같은 생각을 버리도록 그에게 충고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실험적 증거가 늘어남에 따라서 이 이론이 옳다는 것이 차차 인정되어 합성고분자 화합물의 계통적 개발에 응용되기에 이르렀다. 1937년 미국의 뒤퐁사(社)에서 카로더스가 합성한 나일론은 고분자 화학에 바탕을 둔 합성 기술의 최초의 승리였다.

페랭[편집]

Jean Baptiste Perrin(1870-1942)

프랑스의 물리학자.

분자의 실재를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리유에서 출생. 에콜 노르말 출신. 졸업 후에 거기서 조수가 되어 음극선·X선의 연구에 종사하여 학위를 얻었다. 1910년 파리대학의 물리화학 교수가 되자 곧 콜로이드 용액의 연구를 시작하여 아보가드로수(數)를 유도했다. 12년 『원자』라는 유명한 책을 내어 원자·분자의 실재를 해설했다. 26년 그의 침전 평형에 관한 발견에 대해서 노벨물리학상이 주어졌다. 이 밖에 광화학 방면에 많은 업적이 있다.

그는 파리대학 생물물리학 연구소장·국제 물리화학 학회장을 지내고 1934년 랑지뱅(P. Langevin, 프랑스의 이론물리학자, 1872-1946), 졸리오 퀴리(Joliot-Curie, 프랑스 물리학자, 1900-1958), 이레느 퀴리(Irene Curie, 1897-1957) 등과 함께 반파시즘 조직을 만들어, 파시즘에 대한 투쟁을 전개했다. 1936년 프랑스 제1차 인민전선 내각에 영입되어 이레느 퀴리의 뒤를 이어 과학 연구소 장관으로 취임했다.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에서 사망했다.

랭뮤어[편집]

Irving Langmuir(1881-1957)

미국의 물리학자.계면(界面) 현상의 연구로 유명.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컬럼비아광산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의 괴팅겐대학에서 네른스트(W. Nernst, 독일 물리학자, 1864-1941)의 지도를 받았다. 귀국 후 제너럴일렉트릭의 연구소에 들어갔다. 텅스텐 전구와 진공관의 벽에 필라멘트의 증발기체가 흡착하는 현상을 연구하고,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가스넣은 전구를 발명했다. 그 뒤 그는 흡착문제에 흥미를 가지고, 1916-1918년에 걸쳐서 금속 표면의 기체의 화학 흡착을 연구하여, 이것을 단분자층(單分子層) 흡착이라 정의했다. 이 때 유명한 '랭뮤어의 흡착 등온식'을 유도했다.

또 계면현상과 화학구조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찰을 깊이하여, 1919년에는 '루이스·랭뮤어의 원자가(原子價)이론'을 발표하고, 화학 결합론을 발전시켰다. 그 밖에 응결 펌프·진공계·고압 정류관 등 그의 연구는 널리 기초·응용 면에 걸쳐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1932년에는 계면 화학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50년 제너럴일렉트릭의 부소장에서 은퇴.

브래그 부자[편집]

-父子 William Henry Bragg(1862-1942) William Lawrence Bragg(1890-1971)

영국의 물리학자. X선을 이용하여 결정 구조를 밝혔다. 아버지 헨리는 캄벌랜드 태생.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후 2년간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교수를 지냈다. 1904년, 라듐에서 나오는 선의 비적(飛跡)에 관한 연구로 처음으로 존재를 인정받았다. 귀국하여 리즈대학 교수. α선에서 X선으로 연구를 진척시켜, 아들 로렌스와 함께 'X선 간섭에 관한 브래그의 공식'을 유도하고 X선 분광기를 고안했다. 이 업적에 대하여 1915년 노벨물리학상이 주어졌다. 두 사람의 공저 『X선과 결정 구조』는 아직도 기초적인 명저(名著)로서 읽히고 있다.

그 후, 아버지는 런던 대학·왕립연구소 명예교수, 데이비 패러데이 실험소장을 역임하고, 아들은 맨체스터대학 물리학 교수,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부자 공동으로, 나중에는 아들 혼자서 암염(岩鹽)·다이아몬드의 결정 해석(解析), 고체 내 원자 배열 등을 X선을 이용하여 추구했다.

폴링[편집]

Linus Pauling(1901-1994)

미국의 물리학자.화학 결합을 연구했다. 오리건주 포틀랜드 태생. 오리건,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수학하고 재학시절부터 분자 구조에 흥미를 가졌다.

장학금을 얻어 유럽에 유학. 좀 메르펠트, 보어, 슈뢰딩거 등에 사사(師事)하여 양자역학(量子力學)을 배웠다.

1922년부터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구조화학 연구에 종사하고 1931년 교수, 1937년 화학과 주임이 되었다. X선 회절(回折)·전자선 회절 등도 응용하여, 원자구조 외에 결정구조·기체분자 구조까지 추구하여 양자역학을 화학에 응용하고, 분자에 대한 화학결합의 이론을 제출했다. 특히 벤젠핵의 특수성의 설명으로서 유도된 '공명이론(共鳴理論)'은 유명하다.

제2차대전 때는 각종 위원회에 참가하여 국방에 협력하고, 전후에는 항원(抗原) 항체반응, 효소반응의 기구, 단백질의 구조 등에 폭넓은 연구를 진행시켰다. 1954년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세계 과학자연맹·평화옹호위원회 등에 참가하여 수·원폭 금지, 평화운동을 위하여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1961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하버[편집]

Fritz Haber(1868-1934)

독일의 화학자. 하이델베르크·취리히·예나 등의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1906년 칼스루에 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을 거쳐 베를린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공중 질소 고정법인 '하버법'을 창시하였다. 1918년 암모니아 합성의 공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저서에 『공업 전기 화학의 기초』 『유기 화학의 전기 분해법』 등이 있다.

아이링[편집]

Henry Eyring(1901-1981)

미국의 물리화학자.절대 반응 속도론을 수립. 멕시코에서 출생. 1912년 도미(渡美), 애리조나대학에서 수학하고, 캘리포니아대학을 졸업한 후 베를린에 유학했다. 귀국 후 미국에 귀화(1935). 1938년 프린스턴대학 교수. 1946년 유타대학 교수. 폴라니(M.Polanyi, 헝가리의 물리화학자·사회학자, 1891- ? )와 함께 양자역학적(量子力學的)으로 활성화 에너지를 계산하여 통계학적인 화학반응 속도론을 확립했다(1935).

1941년, 액체의 점도(粘度)에 이것을 적용하여 '아이링의 점도식(粘度式)'을 유도, 고분자 화학에 공헌했다.

캐러더스[편집]

Wallace Hume Carothers(1896-1937)

미국 워싱턴에 있는 뒤퐁사에서 일한 산업체 화학자. 아이오와주의 벌링턴 출생. 최초의 인조섬유 네오프렌을 성공적으로 합성해내고 뒤이어 나일론을 합성하여 상업 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발라흐[편집]

Otto Wallach(1847-1931)

독일의 유기화학자. 베를린·괴팅겐대학에서 공부한 후, 1889년부터 15년 간 괴팅겐대학 교수와 화학협회 지도원을 겸임하였다. 1910년 지환 화합물의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 밖에도 클로로알데히드의 구조 및 합성, 아조 염료와 디아조 화합물, 그리고 정유의 구조와 결정 등을 연구하였다. 저서에 『화학 분석표』 『화학에 있어서의 지도와 연구』 『테르멘과 캄포르』 등이 있다.

하든[편집]

Sir Arthur Harden(1865-1940)

영국의 화학자. 맨체스터에서 출생하였다. 에를랑겐대학에서 피셔와 함께 연구하고, 1888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알코올 발효의 연구, 인산 결합에 의한 당 조성 등을 설명하고, 1929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돌턴 원자설의 기원』 『무기 화학의 진보』 『실험 유기 화학의 기초』 등이 있다.

브뢴스테드[편집]

Johannes Nicolaus Bronsted(1879-1947)덴마크의 화학자. 바르데 출생. 코펜하겐대학 졸업. 1923년 아레니우스의 산·염기 개념을 넓혀 새로운 산·염기의 이론을 발표했다. 브뢴스테드의 산·염기 이론은 영국의 로리가 내놓은 이론과 같았기 때문에, 브뢴스테드-로리의 산·염기라고도 한다.

힌셀우드[편집]

Sir Cyril Norman Hinshelwood(1897-1967)영국의 화학자. 냉전기간 중 세메노프(Semenov)와 비슷한 시기에 화학반응 속도론을 연구하여 1956년에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언어학자이자 고전철학자이며 왕립원과 고전학회의 위원장을 지냈다.

[편집]

Otto Hahn(1879-1968)

독일의 화학자.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하여, 프랑크푸르트·마르부르크·뮌헨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38년 슈트라스만과 함께 우라늄 원자핵의 핵분열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그보다 앞서 1905-1910년에는 방사성 물질인 토륨과 악티늄의 자연 붕괴에 관한 연구를 하여, 후에 여러 가지 방사성 동위원소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마이트너와 함께 방사성 물질인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하였다. 1928년 괴팅겐의 카이저 빌헬름 화학 연구소장이 되었으며, 1944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슈타우딩거[편집]

Hermann Staudinger(1881-1965)

독일의 화학자.

고분자 화학을 탄생시켰다. 헤센에서 출생. 아버지는 철학 교수. 할레, 뮌헨, 다름슈타트에서 수학하고 스트라스부르에서 학위를 받았다. 칼스루에, 취리히대학을 거쳐, 1926년 이후 프라이베르크대학으로 옮겨가서 1956년까지 동 대학의 고분자화학 연구소장으로 지냈다.

칼스루에 시대에 케란의 자동 산화 및 중합(重合)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취리히 시대에는 이소플렌을 중합, 뒤에 스틸렌·이소프틸렌·질산비닐 등의 중합을 연구하여 오늘날의 고분자 화학공업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론적으로도 고분자는 장쇄상(長鎖狀)의 거대 분자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또 고분자 용액의 점도와 분자량과의 관계식을 유도했다. 1953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헤베시[편집]

Georg de Hevesy(1885-1966)

헝가리의 화학자.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하여, 스톡홀름대학 유기화학연구소에서 일하였다. 그는 희토류의 원소를 연구하고, 1923년 코스터와 함께 하프늄을 발견하였다. 그 X선 분석을 화학에 응용하고 동위 원소의 생리학적인 응용을 연구하여, 1943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저서에 『방사능 지시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