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근대미술/한국 근대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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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의 공예[편집]

暗黑期-工藝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통하여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온 한국의 공예는 조선시대 말기의 유교적(儒敎的)인 폐습으로 지적되는 기술 천시사상, 그리고 일본이 한국을 강탈한 후 일제(日帝)의 문화탄압정책이 몰고온 여파로 일련의 공백기를 맞이하게 된다. 공예품 제작가들은 결국 장인계급(匠人階級)으로 몰락함과 동시에 공예품의 질도 떨어져서 전혀 조형성이 고려되지 않은 천박하고 무취미한 일상용기류가 제작되기 시작한다. 또 한국의 전통적인 공예가 제대로 명맥(命脈)을 잇지 못하는 대신 일제품(日製品)의 일방적인 양산(量産)으로 불균형한 현상이 초래된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 때문에 근대의 한국 공예는 한마디로 암흑시대의 공예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목공예[편집]

木工藝

조선시대 공예의 주류를 형성해 온 목공예는 주로 가구류(家具類)에 많이 반영되어 안방에서 쓰이던 장, 옷걸이, 앞닫이, 문갑, 사방탁자, 밥상, 연상, 책장, 편지꽂이, 경대, 목침, 내사상, 솜장, 버선장, 이불장, 그리고 마루에 놓여지던 쌀뒤주, 팥뒤주, 찬장, 그밖에 망건집, 광관집, 필통, 반짇고리 등 종류도 다양할 뿐 아니라 재료에 있어서도 괴목, 오동나무, 대추나무, 호도나무, 밤나무, 피나무, 소나무, 감나무, 잡목 등 각종 목재를 다각적으로 활용하여 왔다.

이러한 일련의 민예품(民藝品)들은 근대로 접어들어 종류도 대폭적으로 감소되고 공예품 자체에 가해지던 제작자들의 열의도 식어지면서 점차 조잡하고 저속한 제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구사된 투조(透彫)·부조(浮彫)의 세련된 기법이 소멸되고, 고답적인 가구의 다리가 갖는 형태와 그 아름다움도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질이 좋지 못한 나전(螺鈿), 얇게 가공된 기물 등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석공예[편집]

石工藝

현재 중앙청(中央廳) 앞뜰에 놓여진 해태 석상(石像)은 구한말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조라 할 수 있으나 근대를 일괄(一括)한 대부분의 석조는 전국 각지에 산재한 각 능(陵)의 볼품없는 크고 작은 석물(石物)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 정도이며 기법도 저급하고 유형화(類型化)된 것들뿐이다. 여기 사용된 석재는 화강석·오석(烏石)·애석(哀石)·황등동·대리석 등이다.

금속공예[편집]

金屬工藝

근대의 금속공예는 일제(日帝)의 문화탄압 및 전쟁으로 인한 재료의 결핍 등의 원인으로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한 채 8·15해방 후 건국과 더불어 새로운 전개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칠기[편집]

漆器

전통적인 민예품(民藝品) 중에 가장 대표적인 공예로 전해져 내려 온 칠기는 대체로 홍칠(紅漆)이나 흑칠(黑漆) 자개가 많은 수를 차지한다. 무늬는 남화(南畵) 계통의 소재에서 출발하여 화조(花鳥)를 주제로 한 것, 부귀다남(富貴多男), 만수무강(萬壽無疆), 백수백복(百壽百福) 등 문자를 도안화한 추상적이며 상징적인 장식무늬가 태반이었다. 기술적으로 떨어지는 것일수록 나전을 많이 가공 장식하는 경향이 짙어 의식적으로 나전칠기를 고가(高價)화한 것, 귀족적인 것, 완상(玩賞)을 위주로 한 것으로 보고 또 그렇게 보이게 하려는 장인(匠人) 제작자들의 타성이 많이 작용하여 비예술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김진갑[편집]

金鎭甲

공예가. 나전칠기(螺鈿漆器). 1932년-37년 제11·12·13·14·15·16회 선전(鮮展)에 출품, 특선(제14회전) 및 입선을 한 바 있고 해방 후 1946년 조선 나전칠기공예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1953-57년 국전 제2·3·4·5·6회에 심사원을 역임하기도 한 나전칠기의 명인(名人)이다.

김봉룡[편집]

金奉龍 (1903-1994)

공예가. 나전칠기. 16세 때부터 나전칠기를 만들기 시작하여 초기에는 근대초기 나전칠기의 명인으로 알려진 박정수(朴貞洙)에게, 30세 이후에는 칠기의 조형미를 현대적으로 혁신한 김성규(金成圭)에게 사사(師事)했다. 그 사이 서울에 고대미술 나전칠기 공예소를 설립, 20년간 자영(自營)하기도 했다. 1934년-40년 계속하여 선전에 입선, 1943년 및 44년의 선전에는 무감사(無鑑査)로 출품했다.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은상패(銀賞牌)를 수상했다. 1945년 조선미술본부 회원, 1946년 조선공예가협회 회원, 1953년 이후에는 경상남도 공예기술원양성소 강사를 거쳐 동 부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작품 <용봉모양나전화병 (龍鳳模樣螺鈿花甁)> 등이 있다.

음일천[편집]

陰一天 (1903- )

공예가. 화각공(華角工). 서울 출신. 각질장(角質匠)이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중학을 마친 후 화각 각질공예부문에 정진. 40여년간 이의 전승(傳承)에 힘써 왔다.

유근형[편집]

柳根瀅 (1893-??)

도예가. 서울 출신. 18세 때 일본인이 경영하던 한양고려소(漢陽高麗燒)에 입사, 처음으로 상감(象嵌) 기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후 주로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전국 각지의 도자기공장, 즉 진남포(鎭南浦), 회령(會寧), 금교(金郊), 금화(金華), 풍기(豊基) 등지의 기사로 전전하면서 기술을 연마했고 고요지(古窯址)를 찾아 옛 청자(靑磁)의 파편을 발굴, 직접 그 성분을 연구함으로써 고려청자의 비색(秘色)을 비교적 잘 살리는 청자도공(靑磁陶工)으로 알려진다.

이임준[편집]

李任駿 (1906- )

도예가. 조선백자(朝鮮白磁)의 마지막 전승인. 광주분원(廣州分院)의 사기장(砂器匠)을 세습하던 집안에서 태어나 15세 때부터 사기일을 배워 19세 때 선친을 따라 여주(驪州)로 옮겨 제작생활을 했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