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선 사 시 대/구석기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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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문화〔槪說〕[편집]

한국의 구석기 문화는 지금까지의 발굴에서 적어도 3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석기 문화의 유적지 발굴은 함경북도 웅기군(雄基郡) 굴포리(屈浦里)와 충청남도 공주군 석장리(石壯里)에서만 이루어졌으나, 그 밖에 구석기 유물이 나오는 곳은 금강 유역, 남·북한강 유역, 태화강 유역 등이며, 화성·수원·안성·경주·순천·울주·웅기군 부포리 등에서도 발견되어, 한국의 여러 곳에서 구석기 유물이 나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한국이 빙하(氷河)로 덮인 흔적은 없으나 빙하의 인접 지역으로서 빙하기나 간빙기(間氷期)의 영향을 받은 것은 지층의 구성으로 판명되고, 여러 지질층 사이에 문화층이 끼어 있는 공주 석장리에서는 전기 구석기로부터 후기 구석기까지의 문화가 있었다.적어도 30만 년 전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되는 석장리의 가장 오랜 문화층은 지표 아래 11m에 있는 층으로, 아주 거친 잔손질을 한 외날찍개와 긁개의 문화층이다. 몸돌을 중심으로 하는 석기가 주가 되고 사냥이나 부엌용 석기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이 지구가 석장리에 거주한 전기 구석기인의 주된 생활 근거지로 보여진다. 평균 기온은 현재보다 9℃ 정도 더 낮았던 것으로 나타난다.그 바로 위의 지층에서는 한 개의 석기가 나왔을 뿐으로 뚜렷한 성격을 밝힐 수 없으나 그 위의 문화층은 긁개가 풍부한 문화층이다. 그 긁개에서 날을 분석해 보면, 볼록날:직선날:오목날이 19:7:1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동물을 잡아 가죽을벗기는 등의 활동을 주로 하여 음식을 마련하였다는 것이 나타나고, 나무나 뼈를 깎는 등의 활동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그 위의 문화층에서는 역시 긁개가 많으나 깎개의 수가 늘어나고 외날 전통은 계속되면서 원초(原初)형 주먹도끼가 나왔고, 또 찌르개로는 창끝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찌르개가 나온 것으로, 이는 저우커우뎬(周口店) 13지점의 창끝 모양 석기나 클랙턴(Clactonian)의 나무로 깎은 창과 아슐(Acheulean)의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창끝 등의 단계로 보여지므로 이 문화층이 전기 구석기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기 구석기인들의 활동에서 달라진 것은 예리한 날의 깎개가 늘고 홈날 칼과 톱니날 칼을 만들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이는 중기 구석기인이 나무나 풀줄기를 자르고 깎았던 것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기둥이나 작대기 등을 세우고 나무를 엮어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노천이 아닌 움막을 지어서 그때그때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문화층보다 약 1m 이상 높은 지표 아래 5·6m의 지층에서는 쌍날의 주먹도끼·주먹대패·밀개 등이 나타나며, 깎개·찌르개의 수가 늘어나고 모룻돌떼기·부딪쳐떼기 등의 수법도 보인다. 또 경도를 달리하는 세 가지 암질(岩質)의 모룻돌이 짝을 지어 출토되고 부스러기나 격지도 자못 많아져서 석기 제작에 오랜 시일이 걸린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돌마치나 돌망치가 모룻돌과는 좀 떨어진 곳에 나란히 줄지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모룻돌에 부딪쳐떼기를 한 다음 망치로 잔손질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이 층 위에서도 격지 석기는 적은 편이나 차츰 늘어난다는 것은 석영(石英)이나 편마암(片麻岩)을 가지고는 격지 석기가 어렵고 또 수법상으로도 중기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이 문화층의 특징은 석기를 만들어 쓴 근거지로서 석기 제작장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바로 밑에 얇은 염토층이 있는데 그 곳에서 출토한 규질판암의 석기는 중국 북쪽 수동구(水洞溝)에서 나온 석기와 흡사하다. 이 위 문화층으로 굳은 염토층에서 출토된 문화층이 자갈돌 찍개 문화층이다. 이 문화층에서는 석기의 재료가 반암(斑岩) 자갈돌로서, 찍개가 쌍날로 되고 격지가 커지며, 큰 격지로 만든 긁개가 있고, 수법은 클랙턴(Clacton)의 전통이 짙은 가운데 르발루아(Levallois)의 전통이 엿보이는 문화층이다. 찍개나 주먹도끼는 원초형에 가깝지만 아슐(Acheulean)식도 한 점이 나왔었다. 긁개에서는 라끼나형의 것과 흡사한 것이 있고, 밀개에 있어서도 콧날 등 밀개의 원초형도 보인다. 클랙턴 전통을 강하게 가지는 석기의 제작 수법으로 자갈돌의 원통망치를 가지고 먼저떼기를 베푼 다음에 작은 돌마치로 잔손질을 한 클랙턴 수법이 주가 되고 르발루아 수법도 알았던 무스테리앙식(式) 문화로 추정할 수 있다.석기의 구성이나 특징으로 보아서 이 층에서는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살았고, 가족의 수도 발굴 면적에 한해서 볼 때 10명 정도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문화층은 중기 구석기시대의 문화로 추정된다. 이 위로 석영의 모난 돌들로 석기를 만들어 쓴 층위가 있는데, 이 위층까지 후기 구석기 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방사선 탄소 측정법(C14)에 의하여 3만 년부터 2만 년 전으로 밝혀진 층들이다. 맨 위층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와 같이 밀개·찌르개·새기개 등이 많은 층이고, 예술활동도 자못 활발한 시기이다. 석장리의 후기 구석기 집자리에서는 기둥구멍이 있고 높이 약 50㎝ 정도의 돌들로 담같이 에워 쌓은 곳에 문돌이 150㎝ 사이를 두고 놓였으며, 문돌을 들어서면 불을 피워 요리했을 노지(불땐 자리)가 있고 조각해 세워졌던 개모습의 흉상, 땅바닥에 판 고래 등이 들어 있는 집자리가 나타났다(여기에서 사람과 동물의 털들이 나타나고, 화분을 검사한 결과 목련과 수련이 그 시기에 자랐음이 밝혀졌다).이 주거지에는 동물의 발자국도 나타났다. 그 조각에는 당시 사람들의 예술·종교 의욕이 충분히 발휘되어 있다. 또한 당시에는 돌날떼기를 터득하고 아름다운 석기도 만들고 있다. 이 후기 구석기 집자리의 문화는 동북 아시아, 중국 등의 후기 구석기 문화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굴포리의 문화는 전기와 후기 구석기의 두 문화층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