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종교의 새 기운/농민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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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반란〔槪說〕[편집]

농업·상업·수공업 등 각 방면에 걸친 경제적 성장은 조선 양반사회의 신분체제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양인이나 중인 출신의 부농(富農)이나 거상(巨商)들은 관직을 매수하는 등 양반 행세를 하였다. 그런가 하면 양반들 중에서 소작농으로 몰락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한편 양인인 농민들 중에서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이들 중에서는 농촌을 벗어나 유망(流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노비는 점점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었다. 노비안(奴婢案)에 기재된 공노비(公奴婢)의 수는 상당했으나, 그들은 사실상 양인이나 다름없었다. 순조 1년(1801)에 이르러서는 노비안조차 국가에서 불살라버려 공노비들은 천인 신분을 벗어나서 양인으로 되었다. 비록 사노비(私奴婢)는 아직 남아 있었으나, 이것도 점차 소멸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분체제의 동요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즈음 연달아 일어나는 민란은 그 결과였던 것이다.19세기에 들어와 외척의 세도정치가 행해지면서 기강이 더욱 문란해지는 데 따라 민심은 조정으로부터 이반되어 갔다. 농민들의 불만과 불평은 압제가 막심한 사회에서는 우선 음성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각지에서 괘서·방서(榜書) 등의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민심을 어지럽게 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불안은 정감록과 같은 비기(秘記)나 참설(讖設)이 유포되는 온상이었다.그러나 농민들의 불만은 이러한 음성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우선 화적(火賊)이니 수적(水賊)이니 하는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란이 또 빈발하였다. 그 주체는 물론 농민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몰락한 불평양반들에 의하여 지도되어 대규모 반란으로 확대되는 경우도 있었다. 순조 11년(1811)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이외에도 소규모 민란은 거의 쉴새없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철종 13년(1862)의 진주민란은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러한 민란들은 대개 악질 관리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양반사회 자체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였던 것이다.한편 농민들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자기들의 경제적인 곤란을 타개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노력을 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계와 구황식물의 발달이라는 현상을 낳았다. 구황식물로서는 감자와 고구마의 재배가 성했으며, 여기에는 조엄·이광려(李匡呂)·강필리(姜必履) 등의 노력이 컸다.

평안도 및 삼남지방의 농민봉기[편집]

平安道-三南地方-農民蜂起

산발적으로 분출되던 민중의 불만은 1810년대 이후로 대규모 반란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반란의 횃불을 먼저 들고 나선 것은 평안도지방이었다. 이곳은 광산이 많고 의주상인·평양상인 등이 대외무역을 통하여 대상인(大商人)으로 성장한 이가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재력을 바탕으로 향임층으로 올라간 이도 적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본다면 다른 지방에 비해 앞서가는 곳이었고, 양반세력도 미약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적 선진성이 오히려 중앙정부의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평양감사는 돈벌이가 잘 되는 가장 부러운 벼슬자리로 여겨져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서북인들의 더 큰 불만은 과거에 합격해도 요직을 주지 않는 지방차별이었다. 이는 왜란 이후로 오랫동안 누적된 불만이었다. 단군·기자조선의 문화전통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서북인들에게 정신적 상처를 준 것이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우군칙(禹君則)·김사용·이희저·김창시 등이 주동이 된 이른바 ‘홍경래 난’은 서북지방의 대상인·향임층·무사·유랑농민 등 각계층이 연합하여 지방차별 타파를 구호로 내걸고 일어난 것이었다. 10년 간의 오랜 준비 끝에 일어난만큼 그 위세도 대단하였다. 처음 가산군 다복동(多福洞)에서 1,000여 명의 병력으로 군사를 일으킨 홍경래 세력은 평안도민의 폭넓은 호응을 얻어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의 9읍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박천의 송림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고, 정주성에 들어가 대항하다가 군사를 일으킨 지 4개월 만에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평안도 민중봉기가 실패한 원인은 지방차별 타파라는 명분이 전국적인 호소력을 갖지 못한 데에 있었다. 그러나 서북지방에서 성장한 경제적 역량과 주민들의 각성은 뒷날 한말의 구국계몽운동에 다시 발휘되어 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평안도민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부세제도의 모순은 시정되지 않았다. 19세기 중엽의 철종대에 이르러 부세제도의 모순에 불만을 품은 민중의 항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중에서도 충청·전라·경상의 이른바 삼남지방이 가장 치열하였다.1862년(철종 13년) 2월 경상도 단성(丹城)에서 시작된 민중봉기는 이웃 진주(晉州)로 이어지고 경상도 20개 군현, 전라도 37개 군현, 충청도 12개 군현, 그리고 부분적으로 경기도·함경도·황해도 등지에서도 일어났다.이 중에서도 1862년 진주에서 일어난 항거가 가장 거세었다. 병사(兵使) 백낙신(白樂莘)의 가렴주구에 못이긴 진주민중은 향임 유계춘(柳繼春)의 지도 아래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스스로 초군(나무꾼)이라 부르면서 죽창과 곤봉을 들고 일어나 관아를 부수고 농촌의 부민들을 습격한 다음에 스스로 해산하였다.이 시기의 민중운동은 주로 부세수탈에 불만을 품은 가난한 농민과 요호(饒戶)·부민(富民), 그리고 지방 토호들까지 가세하여 자치적 회의기구인 향회(鄕會)를 조직하고 처음에는 합법적인 소청운동을 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죽창 등의 무기를 들고 일어나 수령이나 이서배, 그리고 지주·고리대금업자 등을 공격하였다. 정부는 이에 무력(武力)으로 진압하기보다는 선무사·안핵사·암행어사 등을 파견하여 지방의 실정을 조사하고, 원한의 대상이 되는 수령을 처벌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을 설치하여 농민부담을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 결과 민중봉기는 다소 진정되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대원군 집권기에도 광양 난(1869년), 이필제(李弼濟)의 난(1871년), 명화적의 활동이 그대로 지속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1894년의 갑오 동학혁명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홍경래의 난[편집]

洪景來-亂 1811년(순조 11) 12월에 홍경래가 평안도 일대에서 일으킨 민란(民亂). 홍경래(1780

1812)는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多美面)에서 출생하였다. 고려시대의 이름난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후예. 19세에 사마시(司馬試:生員進士)에 실패하고 집을 나가 방랑하면서 거사를 꿈꾸었다.

원인[편집]

표면적인 이유로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서북인(西北人)을 일반적으로 문무 고관에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격문(檄文)에서 홍경래는 '임진왜란 때 재조(再造)의 공이 있었고, 종묘의 변에는 양무공(襄武公:鄭鳳壽)과 같은 충신이 있었다. 둔암(遯庵:鮮于?)·월포(月浦:洪儆禹)와 같은 재사가 나도 조정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 서북인을 평한(平漢)이라고 멸시하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완급(緩急)의 경우에는 서북인의 힘을 빌리면서도 4백년 동안 조정에서 입은 것이 무엇이냐’고 하였다. 조선에 있어서 사실상 서북인을 중요한 자리에 임용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정책적인 것은 아닌 듯 하다. 선조 때 이이(李珥)가 서북인의 수재(守宰:地方官)가 되는 자가 적으므로 지방 인재의 등용을 상책(上策)한 것은 이를 증명한다. 다만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서북인의 불평 불만을 이용하여 거사의 첫 조건으로 내세워 민심을 수득(收得)하기로 꾀하였던 것이라고 하겠다. 딴 기록에 보면 사마시(司馬試)에 실패한 뒤 그 급제한 자를 보니 모두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당시 과거제도도 크게 부패하여 권문세가의 자제는 무학둔재(無學鈍才)라도 급제의 영예를 차지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쉽게 성공할 수 없으며, 특히 평안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있으니, 이것이 홍경래로 하여금 개조범상(改造犯上)의 뜻을 굳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남양 홍씨가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 위정자에 대한 불평, 즉 권력적 감정이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분노를 품은 홍경래는 일찍이 집을 떠나 각지로 방랑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던 것이다.

계획[편집]

홍경래가 뜻을 결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국정에 비위가 거슬린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각지의 부호·명사들을 농락하면서 기회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가산(嘉山)에 있는 재략이 풍부하고 풍수복좌(風水卜?)를 업으로 하는 우군칙(禹君則), 가신의 역속(驛屬)이며 졸지의 부호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李禧著), 무재(文才)가 뛰어난 곽산(郭山)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등을 심복으로 하여 거사에 참여시켰으며, 태천(泰川)의 김사용(金士用), 곽산의 홍총각(洪總角), 개천(价川)의 이제초(李濟初) 등 용력 있는 자를 모두 선봉장으로 하였다. 그리고 가산의 다복동(多福洞)을 근거로 하고, 거사하기 전부터 이곳에 옮겨와 금광 채굴을 구실로 유민(流民)을 꾀어 장정 일꾼을 모아들였다. 이리하여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1811년(순조 11)에 종래에 없었던 큰 흉년이 들게 되어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궁민(窮民)을 끌어들여 스스로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칭하고, 우군칙을 참모로 한 본대(本隊)는 가산·박천을 함락시킨 후 서울로 남진케 하고, 1대는 김사용을 부원수, 김창시를 참모, 박성간(朴聖幹)을 병참장(兵站長)으로 하여 곽산·정주를 점령하고, 선천(宣川) 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안주(安州)를 공략할 방책으로 거병하였다.

경과[편집]

1811년 12월 18일 삼경에 이희저의 일대가 가산군청을 습격하여 군수 정저(鄭著)와 그의 아버지 노(魯)를 죽이고, 군청을 점령하고 난을 일으켰다. 12월 20일 새벽에 홍경래는 우군칙 등과 더불어 박천읍(博川邑)을 점령하였다. 곽산에서도 호응하여 곽천에서 용천(龍川)에 이르기까지 질풍과 같이 점령하였다. 점령지에는 위쉬(僞?)를 두어 주관케 하고, 곡창을 풀어 궁민에게 나누어 주어 인심수득에 노력하였다. 이렇게 하여 청천강 이북의 8읍(嘉山·博川·郭山·定州·宣川·泰川·鐵山限西林城·龍川)이 5

6일 만에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홍경래군은 남하하는 제1관문인 안주(安州)를 공략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松林里)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이해후(李海愚)와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필사의 각오로 천여 명의 병사를 모아 2대로 나누어 29일에 송림리의 홍경래군을 공격하였으며, 곽산 군수 이영식(李永植)의

원군의 도움으로 홍경래군은 대패하여, 정주성(定州城)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었다. 이 변보가 20일 평양에 전해지자 평안감사 임나수(李晩秀)는 22일 순안(順安)의 병사를 안주로 향하게 하고, 다시 열읍(列邑)의 병사를 계속 동원하게 하고, 도내의 곳곳 요새(要塞)를 굳게 지키게 하며, 만일을 위하여 창의(倡義)의 유생·문사를 모집하여 평양을 방비하게 하고 일부는 출정시켜 안주의 관군에 부속시켰으나 송림리 싸움에서 적을 추격·섬멸치 않았다는 이유로 이만수는 파면되었다. 정부에서는 병조참판 정만석(鄭晩錫)으로 양서위무사 겸 감진사(兩西慰撫使兼監賑史)에 임명하여 반란지를 위무케 하고, 난군에게 귀순을 권고하였다. 24일에는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고, 이요헌(李堯憲)으로 양서순무사에 임명하고, 박기풍(朴基豊)을 중군으로 삼아 서적(西賊) 토벌에 관한 군무를 보게 하고, 27일 선봉대로 서울을 출발하여 이듬해 1월 3일 정주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이는 송림리 싸움 후 5일 만이다. 이와 전후하여 곽산에서도 관군이 이겨 박천·가산을 회복하였으며, 8읍 중 정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하였다. 따라서 정주성은 완전히 고립하게 되었으며, 관군은 사방의 의병과 더불어 전세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홍경래군은 성을 굳게 지키고 여러 번 성 밖으로 돌격하여 나왔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농성을 계속하였다. 이에 정부군은 화약(火藥)으로 성하를 폭발시키고 성내로 돌입, 함락시키니 4월 19일로 농성한 지 100여 일, 거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이때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우군칙·홍총각 등 다수는 포로가 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5월에 참형당하였다.

실패한 이유[편집]

홍경래의 계획이 일부 어그러져 실패를 가져오게 하였다. 박종일(朴鍾一)로 하여금 서울에서 난을 일으켜 중앙의 혼란을 꾀하였으나 주살되고, 창성(昌成)·강계(江界)·초산(楚山)·위원(渭原) 등지의 포수(砲手)들의 내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체포되었으며, 점령한 8읍이 함락되어 정주성이 고립되고, 붙들린 포수들이 정주성 공격을 도왔으며, 호병(胡兵)을 청하려 하였으나 부하의 번의로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영향[편집]

홍경래의 난은 극도로 피폐한 조선 말기의 생활불안과 억울한 감정에서 오는 위정자(爲政者)에 대한 반항이었다. 비록 정부의 힘으로 평정되기는 하였으나, 정치의 폐단이 가시지 않고 1813년(순조 13) 11월에 제주도의 양제해(梁濟海)의 음모사건, 1816년(순조 16) 10월 성천읍(成川邑-平南)의 중 학상(學相)이 홍경래의 여당이라 자칭하며 흉패한 행위를 한 것 등으로 보아 홍경래 난은 일시 돌발적인 군란(軍亂)이나 민란(民亂)에 그치지 않았다. 그 여파가 파급되어 민중의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이 되었으며 철종 때 곳곳에서 민란(民亂)이 계속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괘서사건[편집]

掛書事件

조선 중기 이후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에 시달린 일반 민중들이 인생의 길·흉·화·복이나 왕조의 운명·성쇠를 예언하는 비기(秘記)·참설(讖設) 등을 믿고 괘서·방서(榜書) 등의 벽보를 이용, 민간에 전파시켜 민심을 현혹한 사건. 순조 4년(1804) 안악인(安岳人)·이달우(李達宇) 등이 괴상한 가사로 조정을 비방한 일이 있고, 같은 해 상민(常民) 재영(載榮)·성서(性西) 등이 관서비기(關西秘記)라는 것을 도성의 4문에 게재한 일이 있었다. 더구나 동왕 9년(1809)부터는 10수년에 걸쳐 흉년과 기근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였다. 동왕 11년(1811) 부교리(富校理) 김계하(金啓河)가 상소문에서 우려하였던 바대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이후에도 민중의 반항과 산적 집단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동왕 17년(1817) 홍경래의 당과 기맥을 통하던 채수영(蔡壽永) 등이 유언비어로 민심을 현혹하다가 처형되었으며, 동왕 19년(1819)에는 남평(南平)의 관노(官奴) 김재점(金在点) 등의 괘서사건, 동왕 26년(1826)에는 김치규(金致奎)·박형서(朴亨瑞) 등의 괘서사건이 잇달이 일어나 조선 왕조의 말기적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주민란[편집]

晋州民亂

철종 13년(1862) 봄 진주에서 일어난 민중의 봉기. 진주민란은 홍경래의 난 이후 거의 쉴새 없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소규모의 민란 중 가장 두드러진 농민봉기의 예이며, 당시 경상도우병사(慶尙道右兵使)로 새로 부임한 백락신(白樂莘)의 극심한 탐학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는 갖은 명목으로 거액의 세전(稅錢)을 강제 징수하여 사욕을 채워서 민읍(民邑)을 소란케 했다. 이에 대해 전직의 불평관리들이 주모가 되어 인근의 여러 읍과 민중을 규합하여 간리(奸吏)를 죽이고 부민(富民)과 향리(鄕里)의 집을 불사르는 변란이 일어났다. 정부는 백락신과 진주목사 채병원(蔡秉元)을 파직하고 민중을 진무케 하였다. 그러나 난의 주모자들은 지방관헌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보복심에 불타는 그 지방의 향리들에 의해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이 진주민란의 영향은 심각하여 이후 삼남 일대엔 민란의 큰 홍수가 잇달아 휩쓸고 지나갔다.

거창민란[편집]

居昌民亂

1862년(철종 13) 5월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의 영향을 받아 경상도 거창현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수령의 횡포와 삼정문란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부사 황종석이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나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난을 일으켰다. 이시규·최남기·이승문 등이 삼정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통문을 올리고 농민들을 모아 관아를 습격하고 관청 서류를 불태웠다. 후에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진주에서 처형되었다.

부안민란[편집]

扶安民亂

1862년(철종 13) 전라도 부안에서 일어난 민란. 철종 때 삼정(三政)문란으로 전라도 각지에서 일어난 난을 무마하기 위해 파견된 호남 선무사(宣撫使) 조구하의 행렬을 부안 농민들이 가로막고 불법 수탈행위의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가 무시되자 관리들을 밟아 죽이고 조구하는 쫓아보냈다. 조정의 명을 받은 전라도 관찰사 정헌교는 김홍상 등을 효수함으로써 난을 진압하고, 조구하는 파직되었다.

계와 구황식물[편집]

契-救荒植物

조선 후기 전국적인 규모의 민란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농민의 부담은 가혹한 것으로서, 이러한 압박하에서 농민들은 계라는 경제적 공동체를 만들어 활로를 개척하려고 하였다. 계는 현실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하여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초기의 친목과 공제를 목적으로 한 종계(宗契)·혼상계(婚賞契)·동계(洞契)에서 차츰 제언계(提堰契)·군포계(軍布契)·농구계(農具契) 등으로 발전하여 갔으며, 이와는 달리 감자와 고구마가 구황식물로서 농민들이 재배하는 바 되었다. 고구마는 영조 때 조엄(趙嚴)이 대마도에서 종자를 얻어와 농민들의 식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감자도 헌종 때에 보급되어 고구마보다도 널리 퍼졌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세 소작농으로 몰락한 농민들의 생활은 곤궁한 것이어서 기아자가 생기고 더러는 유랑의 길에 들어서서 농촌 피폐가 더욱 심화되었다.

조엄[편집]

趙嚴 (1719 1777)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영조 14년(1738)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사서(司書)·동래부사(東萊府使)·경상도 관찰사·대사헌·이조판서·제학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김해의 배소(配所)에서 병사할 때까지 영조를 보좌하여 산업 발전과 국가 재정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왕 36년(1760) 창원·진주·밀양에 3개 조창(漕倉)의 증설을 건의, 이제까지의 세곡수송(稅穀輸送)의 민폐를 덜고 공물 수납의 공정으로 국고를 충실히 했다. 뿐만 아니라 동왕 39년(1763)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제주도에서 재배, 우리나라 최초로 고구마를 재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