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민족의 독립운동/신문화운동과 3·1운동/민족운동의 새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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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의 새 양상〔槪說〕[편집]

3·1운동은 한국민족의 내재적 생명이 세계적 문화에 접촉되어 폭발된 일대 각성이었다. 그러므로 3·1운동은 민족운동의 새 기폭점(起爆點)이었고 그 이후의 민족독립운동은 한민족의 전통적 주체와 외래사조가 조우(遭遇)하는 가운데 발전하였다. 조선 총독의 식민정책은 소위 문화정치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 본질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고답적 무단정치로서 단지 3·1운동과 같은 민족운동이 폭발하지 않게끔 숨구멍을 터놓은 데 불과한 것이다. 사회운동, 언론·교육운동 등은 어느 정도 자유가 용인되었다 하나 제한된 자유요, 철저한 감시와 탄압 속의 자유였으며,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였던 것이다.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해외에 있어서의 민족운동이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었고, 국내에 있어서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민족적 자각과 식민지 교육이 교차되는 속에서 근대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게 될 민족자본가·지식인·학생·노동자 등 새로운 세력이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그 결과 한국의 민족운동도 여성 및 학생운동, 계급해방의 사회·인권운동, 산업개발과 자립경제운동, 급격한 독립운동에서 점진적인 문화운동 등으로 그 징표를 바꾸어갔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독립문제보다도 사회혁명에 치중하는 사회운동과 문화적 방법에 의한 민족운동이 이 시기의 2대 경향이었다. 그것이 곧 사회주의의 대두와 문화운동에의 전환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임시정부의 활동[편집]

臨時政府-活動

3·1운동을 전후하여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임시 형태로서 근대적인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독립 후의 국가를 미리 준비하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조직, 실시하기 위함이었다. 1919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국내·국외에서는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하는 5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2. 25), 서울에는 역시 손병희를 정도령(鄭道令)으로 하고 이승만(李承晩)을 부도령으로 하는 조선민국 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 4.9), 상하이에는 이동녕을 의정원 의장으로 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4.10), 철산·의주지역에서는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하고, 이승만을 국방총리로 하는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 4.17), 그리고 서울에서는 이승만을 집정 총재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재로 하는 한성정부(漢城政府, 4.23)가 13도 대표의 국민대회 명의로 세워졌다.다섯 개 정부 중에서 13도 대표의 명의로 된 서울의 한성정부가 법통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하이의 임시정부가 어느 정도 정부다운 실체를 지니고 있었다.그리하여 상하이정부가 중심이 되어 단일정부수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블라디보스토크 정부를 흡수하여 입법기관을 형성하고, 한성정부의 법통과 인맥을 계승하여 행정부를 조직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헌법을 만들고(9. 11), 내각과 의정원을 구성하여 형성된 단일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 11. 9)이다.임시정부는 3권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으로서,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하였다. 내각은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선임되었는데, 이는 한성정부안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활동의 중점을 민족운동의 통할과 대외적 외교에 두었다. 본국과의 연락을 위해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고 교통국을 설치하였으며, 『독립신문』을 기관지로 발행하고, 워싱턴·파리·북경 등 주요 강대국의 수도에 외교관을 파견하였다. 또한 1919년 5월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등을 대표로 보내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당장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지만,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정부가 있음을 알리고, 국내적으로는 암흑기의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그러나 임시정부의 대통령인 이승만이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등 외교활동에만 주력하는 데 불만을 품은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은 한층 적극적인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하면서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상하이에 와서 6개월(1920

1921) 동안 체류하면서 국무총리인 이동휘를 해임시키고 이동녕과 신규식을 번갈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하였다.임시정부내에 노선갈등이 일어나자 이를 여론에 의해 조정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1923. 1

1923. 5)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도 임시정부의 조직만 개조하자는 개조파(改造派)와 완전 해체한 후 새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創造派), 그리고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현상유지파(이동녕·김구 등)가 엇갈려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그 후 개조파와 창조파는 상하이를 떠나버림으로써 임시정부의 권위가 크게 떨어졌는데, 현상유지파는 1925년 이승만을 해임시킨 다음 박은식(朴殷植)을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곧 이어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령(國務領)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였으나, 1927년에는 주석(主席)이 국무위원의 합의에 의해 정부를 운영하는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었다가 1940년부터는 주석중심제로 개편하였다. 그 사이 이상룡(李相龍)·홍진(洪震)·김구(金九) 등이 국무령에 취임하고, 이동녕이 주석에 선출되었다.임시정부의 헌법이 이와 같이 여러 차례 바뀐 것은 정부내의 지도급 인사들 사이에 여전히 노선갈등이 일어나 많은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떠나버린 것과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인적 구성과 활동은 상당 기간 침체에 빠졌지만,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조소앙(趙素昻)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수용하여 좌우노선을 절충하는 새로운 건국방략을 마련하고, 광복 후 건국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사회주의의 대두[편집]

社會主義-擡頭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모였던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립하여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이 무렵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1925년에 이르러서는 이윽고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그러한 속에서도 내부적인 대립과 파쟁은 끊이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 1925년부터 국내에 노동쟁의와 소작쟁의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그것이 사회운동이었던 것은 물론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한편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니 이 운동은 절대적인 자유를 내세워 일체의 권력을 부인하고, 암살·파괴 등의 과격한 방법을 취하였다.1923년 박열의 일황(日皇) 암살계획은 그 중 하나였다. 1926년 4월 조선 왕조 최후의 왕인 순종이 서거하자 이를 이용하여 사회주의 운동자들을 중심으로 6월 10일에 시위운동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6·10 만세운동이었다.

무정부주의운동[편집]

無政府主義運動

한국 무정부주의운동의 근원은 1922년 박열 등이 조직한 ‘흑우회(黑友會)’였다. 흑우회는 1923년 9월 동경 지진 직후 박열의 일황 암살계획 사건으로 그 일파의 비밀결사인 불령사(不逞社)가 검거되자 다소 침체한 가운데 운동은 계속되었다. 이 운동이 국내에서 표면에 나타난 것은 불령사 사건에 연좌된 서동성이 대구에 돌아와 조직한 진우연맹(眞友聯盟)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의 무정부주의자들은 강권주의의 치하에 있어서 자유의 옹호와 촉진을 위해서는 급격한 폭력주의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노동자·농민운동[편집]

勞動者·農民運動

한편, 1920년대에는 일제의 가혹한 착취에 반대하여 노동자·농민의 단체들이 조직되고 이들의 지도 아래 노동자·농민들의 집단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먼저, 노동운동단체로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1920), 조선노동연맹회(1922), 조선노동총동맹(1924), 노동총동맹(1927) 등으로 이어진 전국적 조직이 있었으며, 노동단체의 결성과 궤를 같이하여 1920년대에 총 891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하였다.그 원인은 주로 일본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 인상요구와 8시간 노동제 요구가 중심이었다. 한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3천여 명이 참가한 원산노동자 총파업(1928

1929)은 규모가 가장 큰 것이었다.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노동운동이 항일적 성격을 띤 좋은 본보기였다.농민운동은 주로 소작인조합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는데, 소작료(4할) 인하와 소작권 이동 반대가 주목적이었다. 소작쟁의는 시대가 지날수록 격화되어 1922년에 24건(2,500여 명 참가)이던 것이 1930년에는 726건(1만 3천여 명 참가)으로 대폭 늘어났다. 소작쟁의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전남 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1923

1924)와, 황해도 재령군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 소작쟁의(1924), 그리고 평안도 용천의 불이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 소속 서선농장(西鮮農莊) 소작쟁의(1923

1931)가 유명하다.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의 소작쟁의는 항일의 성격을 띤 것으로서 이곳 출신 나석주(羅錫柱) 의사가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었다.반일적 성격을 띤 농민운동은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이 결성되면서 더욱 가열되었다. 이 조직에는 소작인뿐 아니라 자작농들도 함께 참여하여 일제의 가혹한 수탈정책에 정면으로 항거하였다.

박열[편집]

朴烈 (1895

? )

독립운동가·무정부주의자. 처음 이름은 준식(準植), 경북 출신. 경성 제2고보에 재학중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했다. 이어 일본에 건너가 무정부주의운동에 가담,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다. 1923년 일황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석방되어 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재일거류민단 단장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 귀국했다가 납북되었다.

6·10 만세운동[편집]

六·十萬歲運動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일어난 만세 시위 사건. 1926년 4월에 조선 왕조 최후의 황제인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별세에 대한 국민의 애통은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에의 증오감을 촉발시켰다. 그의 장례는 6월 10일로 정해져서, 전국 각지로부터 국민들이 서울로 모여들게 마련이었다.서울의 각급 학생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대 항일시위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공산주의자 수십 명이 검거되었으나 그들과 연결되어 있던 좌익 학생이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으나 수많은 시민과 학생에 의해 시내 각처에 삐라가 산포되고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신간회[편집]

新幹會

1927년 1월에 조직된 좌우합작 단체. 1922년 이후 국내에도 사회주의 사상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서울청년회·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조선청년총동맹·조선공산당 등이 조직되었다. 이리하여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다같이 통일적 민족운동 단체의 조직을 요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간회는 일제 총독부의 허가 아래 결성되었으나, 이는 일제가 민족운동을 표면화시켜 단일적인 억압체제를 갖추려는 데 그 계략이 있었던 것이다.이상재를 회장으로 한 신간회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나마 민족주의를 표방하여 한국민의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며 기회주의를 일체 배격한다는 등 세 가지 강령을 내세웠다.이 조직은 그 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가다가 광주학생운동의 발발로 기세가 꺾이고 말았으며 1931년 5월에 해체되었다. 당시의 간부로는 조병옥(趙炳玉)·안재홍·홍명희(洪命熹)·허헌(許憲) 등이 있었다.

신간회운동[편집]

新幹會運動

3·1운동 후 일본의 유화적인 민족분열정책으로 좌우의 민족운동은 모두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파 민족주의 인사들의 실력양성운동은 타협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공산주의자들은 1926년의 6·10 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조직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타협주의를 거부하던 민족주의 인사들은 온건한 좌파와 연합하여 이념적으로 중도적인 중앙당(中央黨) 혹은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을 건설하여 분열된 민족운동을 결집하려 하였으며, 좌파에서도 양심적인 우파와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궤멸되었던 조직을 합법적으로 재건하려고 하였다.좌우협력운동은 1925년에 결성된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와 1926년에 조직된 정우회(正友會)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 운동이 더욱 확대되어 1927년 2월에 드디어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신석우(申錫雨)·안재홍(安在鴻)·홍명희(洪命憙)·문일평(文一平) 등 『조선일보』 계열의 민족주의자와 이갑성(李甲成)·이승훈(李昇薰) 등 기독교계, 권동진(權東鎭) 등 천도교 구파, 한용운 등 불교인, 그리고 공산당 대표 한위건(韓偉健) 등 28명의 발기에 의해 이상재(李商在)를 회장으로, 홍명희를 부회장으로 하여 결성된 신간회는 전국에 약 140여 개소의 지회를 두고 약 4만명의 회원을 확보할 만큼 큰 단체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유영준(劉英俊)·김활란(金活蘭) 등 여성들이 조직한 근우회(槿友會)가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활동하였다.신간회는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어 ① 조선인에 대한 착취기관 철폐 ② 일본인의 조선이민 반대 ③ 타협적 정치운동 배격(기회주의 배격) ④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실시 ⑤ 사상연구의 자유 등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동맹휴학 등을 지도하였다. 원산노동자의 총파업과 단천의 농민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의거(光州學生義擧, 1929. 10.3)를 지원한 것은 대표적인 활동이었다.사회주의자와 대중운동 단체의 참여가 커지면서 신간회는 1929년 6월 좌익의 허헌(許憲)을 집행위원장으로 하여 운동방법도 대규모 민중대회로 바꾸어갔다. 처음에 신간회를 관망하고 있던 일제는 신간회가 특히 광주학생의거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열기로 하자, 핵심간부를 대거 체포하는 등 탄압을 가하였다. 신간회도 1930년 이후에는 다시 온건 합법노선으로 선회하였다.그러나 김병로(金炳魯)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간부진들이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천도교 신파(최린 등)와 관련을 맺자 지방지회의 사회주의자 세력은 온건노선을 반대하여 신간회의 해소를 주장하고 나섰다. 때마침 코민테른에서도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장악과 민족주의자와의 분리투쟁을 종용하는 지도노선의 변화가 생겨(1930. 9) 마침내 민족주의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31년 5월 해산하고 말았다.신간회운동은 비록 4년여 만에 중단되고 말았지만,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간의 민족협동 전선운동의 첫 시발로서는 의의가 크다. 특히 이 운동에 참여했던 우파 민족주의 인사들이 친일적인 극우와 극좌 공산주의를 다같이 배격하면서 좌우의 중간 노선을 창출하려고 노력한 것은 새로운 시도로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좌우대립을 지양하려는 중앙당건설운동과 좌우의 일시적 협동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그러한 추세는 1930년대에 들어가 한층 가속화되면서 8·15광복 후 중도정당과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광주학생운동[편집]

光州學生運動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나 전국 학생들이 궐기한 항일투쟁. 민족차별교육에서 발달하여 민족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배경[편집]

한국이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잃고 10년이 지난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를 외치며 민족자결(民族自決)을 부르짖자, 일제는 그때까지의 무단정책(武斷政策)을 버리고 문화정책(文化政策)을 내세워 회유(懷柔)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러나 문화정치는 경제적 착취를 비롯한 정신적·문화적 수탈(收奪)을 더 강화하여 그들의 식민지 통치정책을 교묘하게 수행하였다.1929년 당시 쌀은 총수확량의 1/3인 1500여 만석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경작지는 반이 일본인의 소유가 되었다.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농민이 수십만에 달하였으며 200여 만명이 화전민(火田民)이 되었다. 또한 공업원료의 대부분은 일본에 헐값으로 이출(移出)되고, 일제상품이 시장에 범람하여 상공업 자본은 그들에게 독점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하에서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은 3·1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조직화되어 갔다.전라도 지방에서는 1928년 4월 16일에 광주·송정리 항일격문사건(抗日檄文事件)이 일어났고, 28일에는 전북 기자대회사건(記者大晦事件)이 발생했으며 6월 2일에는 이리(裡里)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습격 계획이 있었고, 8월 5일에는 전라남도 소년연맹 결성운동이 일어났다. 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어 계급투쟁을 지향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의 일제타도와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 학생들은 1926년의 조직적인 항일투쟁인 6·10만세운동을 지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사회과학 등을 연구하면서 계속적인 동맹휴학을 감행하고 끊임없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철폐를 요구했다. 독립운동 기운이 고조됨에 따라 일제는 1927년 고등경찰제도를 실시하여 치안체제를 강화하여 사상범의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했으나 각종 사회단체의 활동은 끈기있게 계속되었다. 그 중에도 1927년에 조직된 신간회(新幹會)는 모든 애국단체를 한데 묶어 민족투쟁을 단일화하고 광주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게 된 대표적인 단체이다.광주학생운동을 지도적으로 추진한 것은 광주 학생들의 비밀결사인 성진회(醒進會:1926년 11월 조직. 광주보고 중심의 사회과학연구회)와 독서회(讀書會:성진회 해산 후인 1928년 11월 조직. 광주보고·광주농고·광주여보고 등의 통합조직)로 신간회가 결성되기 전후에 조직되었다. 광주학생들의 활발한 움직임은 해마다 대규모의 동맹 휴학을 단행했고 특히 1928년 6월부터 10월까지의 5개월 간에 걸친 광주보고 2·3·4·5학년생의 동맹휴학은 그 규모가 엄청난 것이었다.이들은 학교당국에 ‘한국인 교사를 많이 채용하고, 한국역사를 가르치며 한국어 시간을 증설하고, 도서실에 한국 서적과 한국 신문을 비치하라’고 주장하고 매우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태세를 갖추었으며, 동맹휴교 정신도 명백하여 식민지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요구하였다. 5개월에 걸쳐 학생·학부모·졸업생이 합세하여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여 학생계의 의식적인 항일성을 명백하게 부각시켰으나 일제 당국의 폭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와 그 차별적인 교육체제를 부정하는 항일학생의 의사는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발단과 전개[편집]

1929년 10월 30일, 광주 여자 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朴己玉) 등이 기차로 나주역에 도착하여 역을 나오려 할 때, 나주에서 통학하는 일본인 광주중학교 학생 후쿠다 슈조(福田修三) 등이 댕기를 잡아당기는 등 희롱하자 여학생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보(光州高普) 2학년 박준채(朴準埰)가 후쿠다를 후려치면서 시비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현장에 있던 일본인 경관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편을 들었고 일본 신문인 광주일보는 다음날 편파적인 기사를 실어 학생들의 분노에 부채질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인 학생과 일본 중학생 사이에는 충돌이 계속되었고 광주 역전에서는 쌍방간에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학교와 학교, 한인과 일인 간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면서 11월 3일 일본 국경일의 하나인 메이지절(明治節)을 맞이하였다.반일감정이 복받쳐 있던 광주보고생들은 신사(紳士)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일인 광주중학교 학생과 싸움을 벌이고 광주일보사를 포위,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 왜곡보도에 항의했다.이 싸움은 곧 광주 역전으로 파급되어 그 곳에 모여 있던 한·일 학생 간의 대충돌을 야기하였다. 학생 간의 충돌은 교사들 간에도 파급되었고 남녀학생 모두가 쌍방으로 갈리어 한인(韓人) 대 일인(日人)의 조직적인 투쟁으로 확대되었다.일제당국은 임시 휴교조치를 내리고 주동자 체포에 착수하여 수십 명을 검거했다. 이러한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에도 학생들은 11월 12일을 기해 다시 궐기하여, <국금된 학생석방> <식민지 노예교육제도 철폐>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일본제국주의 타도> 등을 부르짖었다. 일제당국은 광주사건의 확대를 막고자 신문보도를 금하고 주동학생의 적발·교통차단·교내검속(校內檢束) 등 갖은 탄압을 감행하였으나 이것은 오히려 한국학생들의 항일의식을 더욱 강하게 하여 나주·목포·서울로 비화(飛火)되고, 마침내 전국 학도의 총궐기가 일어나게 하였다.11월 12일의 제2차 가두시위 이후, 서울의 공·사립학교와 시내 요소에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시민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살포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경성보고·배제고보·휘문고보·청년학관·경신학교·보성고보·이화여고·동덕여고 등에서 가두시위와 동맹휴학이 일어났고, 개성·부산·청주·평양·함흥·춘천 등 각지로 번져 3·1운동 이후 가장 거센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였다.이 운동에 참가한 학생수는 5만 400여 명, 학교수는 194개교였으며 그 중 퇴학처분자가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구속자가 1,642명이었다. 또 학생운동을 지원한 신간회는 학생운동을 계기로 민중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정수태(丁洙泰)·권동진(權東鎭)·홍명희(洪命熹) 등의 간부들이 검거되었다. 이 밖에도 근우회(槿友會)·청총(靑總)·노총(勞總) 등 항일단체의 관련자 91명이 체포되었다.

의의[편집]

1928년 6월부터 동맹휴교 형태로 시작된 광주학생의 대일항쟁은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으로 연결되어 30년대 민족독립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광주학생들은 민족독립운동에 대하여 민감한 수용력을 보여 민족독립을 위한 역사적 과제를 모색하는 생동력 있는 지성을 추구하였으며, 성진회를 중심으로 민족독립정신의 고취와 대일 항쟁요원을 조직·육성하고, 일제의 강력한 식민화정책에 항거하여 조직성과 집단성이 강한 학생층으로서 민족차별과 식민지교육체제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분석·비판하여 민족독립의 필요성을 부각하였다.이와 같이 광주학생의 항쟁은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를 통한 민족의 독립과, 독립을 위하여 식민지 교육체제를 반대하고 민족교육을 주창하여 궐기한 한국학생으로서의 민족독립항쟁이다. 광주학생운동이 있은 지 20여 년이 지난 1953년 10월 20일에 국회는 만장일치로 매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했다. 1954년 6월 10일에는 전국 학도들이 정성을 모아 발원지 광주 서중학교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을, 전남 여자중학교에 자연석 기념비를 건립했다. 학생의 날은 1973년 유신정치로 폐지되었으나 11년 만인 1984년에 부활되었다.

신의주역 폭파사건[편집]

新義州驛爆破事件

1920년 신의주역 호텔을 폭파시키려던 사건. 정주(定州)의 이진무는 청년단연합회의 사명으로 8월 15일 신의주역 호텔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선천(宣川)에서 친일파를 살해한 후 김석호 등의 학생과 힘을 합쳐 신의주 형무소에 재차 폭탄을 던지려다 실패했다.

독립군의 무장투쟁[편집]

獨立軍-武將鬪爭

상하이임시정부가 평화적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동안, 만주지방에서는 무력으로 일제와 싸우는 독립군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곳에서는 50여 만에 달하는 교민이 무장투쟁을 지원하였고, 이미 일제강점 직후 이곳에 온 망명인사들이 이들과 제휴하여 경제적 기반을 닦고 군대를 양성해 놓아 그야말로 독립전쟁기지가 튼튼하게 꾸려져 있었다.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만주와 연해주지역에는 30여 개의 독립군부대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국수적 종교인 대종교를 신봉하고, 박은식·신채호·김교헌 등이 쓴 국사책을 교재로 하여 정신적으로도 강인하게 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본국의 해방 뿐 아니라 우리의 옛 강토인 만주지방을 수복한다는 웅대한 계획을 품고, 그곳 만주족을 동화시켜 나가기도 하였다.우리 역사의 중심무대를 만주에 두고, 거란족·여진족 등을 배달민족으로 간주하여 우리 역사에 포섭하여 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1920년대에 활동한 독립군부대 중에서 명성이 높은 것은 서간도와 북간도지역의 군정부(軍政府, 뒤에 西路軍政署가 됨)·대한국민회군(大韓國民會軍)·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대한의용군·광복군총영 등이었다.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때로는 국경을 넘어와 국내진공작전을 펴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전과를 올린 것은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 주축이 된 봉오동 전투(1920. 6)와 김좌진(金佐鎭)·이범석의 북로군정서가 중심이 된 청산리 전투(1920. 10)였다. 봉오동 전투에서는 일본군 1개대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으며,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고 2천여 명을 부상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독립군부대와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은 간도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20년 10월 이른바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여 중국인 마적을 시켜 일본영사관을 습격시키고 한국인에게 뒤집어씌워 간도지방의 교포들에 대해 잔학한 학살을 감행하였다. 1920년 일본군은 1만여 명의 동포를 살해하고, 2,500여 채의 민가와 30여 채의 학교를 불태워버렸는데, 이를 ‘경신참변’ 혹은 ‘간도학살사건’이라 부른다. 일본군의 잔학한 만행으로부터 교포사회를 구하고 그들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독립군부대들은 소·만국경지대인 밀산부(密山府)에 모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수십만 동포가 살고 있는 연해주(自由市, 알렉세프스크)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소련내의 적군(소련군)과 백군(러시아군)의 내분에 말려들어 이른바 ‘자유시참변’(1921. 6. 28)을 겪고 적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애로를 극복하면서 독립군부대들은 만주를 중심으로 재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남만주의 집안(옛 고구려 수도)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대안지역에서는 채찬(蔡燦)·김승학(金承學) 등이 중심이 되어 임시정부 직속의 참의부(參議府, 1923)가 결성되고, 길림성과 봉천 일대에는 오동진(吳東振)·지청천(池靑天) 등이 중심이 되어 정의부(正義府, 1925), 그리고 북만주에서는 연해주에서 돌아온 독립군들이 김혁·김좌진을 중심으로 신민부(新民府, 1925)를 각각 조직하였다. 이 세 단체는 입법·행정·사법기관을 갖춘 일종의 자치정부로서 민정과 군정을 겸하면서 그곳 동포들을 관할하였는데, 나중에는 국민부(國民府, 1928)로 통합되었다.

해외의 독립운동[편집]

海外-獨立運動

해외의 독립운동으로서는 우선 만주를 무대로 한 독립군의 활약이 있다. 이들은 혹은 임시정부와 연결하기도 하고 혹은 독자적으로 많은 군사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리하여 독립당군으로 통일된 이들 독립군은 만주에서 혹은 국경을 넘어와서 일본 군대와 경찰을 습격하였다. 이러한 여러 전투 중 1920년 김좌진의 지휘 아래 치러진 청산리 전투는 가장 빛나는 것이었다. 이렇듯 만주 독립군의 활동이 맹렬하자 일본은 만주의 군벌 장작림(張作霖)과 협약을 맺고 독립군을 탄압하였다. 무력항쟁 이외에 김원봉·김구 등은 의열단과 애국단을 만들어 공포 수단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니, 나석주의 동척 폭탄 사건이나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이 그 중 유명하다.

이동휘[편집]

李東輝 (1873

1928)

독립운동가. 호는 성재(誠齋), 함경도 단천(端川) 출신. 구(舊)한국군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령(參領)을 지냈다. 융희 1년(1907) 군대해산의 기밀을 탐지하고 강화진위대의 연기우(延基羽) 등과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이해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그 후 시베리아에 망명하여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했다. 1919년 상하이임시정부의 군무총장(軍務總長)이 되었다가 이듬해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때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소련에서 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고려공산당 조직기금으로 사용했으며, 후에 시베리아로 가서 병사했다.

신흥무관학교[편집]

新興武官學校

1920년 만주에 세운 독립군 양성 기관. 서로군정서(西露軍政書)에 소속된 신흥무관학교는 일본 육사 출신의 지청천 등을 포섭하여 신흥무관학교라 개칭하고, 적극적인 무력 항일을 목적으로 발족했다. 당시 교장에는 이시영(李始榮), 교성대장(敎成隊長)에는 지청천, 교관에는 이범석(李範奭)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 졸업생은 후에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신규식[편집]

申圭植 (1880

1922)

독립운동가. 자는 공집(公執), 호는 예관(?觀). 청주 출생. 어려서부터 재주와 기개가 뛰어나고 전쟁놀이를 좋아하였다. 외국어 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우고 다시 대한제국군의 육군 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를 졸업, 부위(副尉)가 되었다. 을사 5조약이 체결되자 지방군대를 동원하여 일본군과 싸우려다가 뜻을 못 이루어 음독자살을 기도했는데 가족이 구출해 오른쪽 눈이 상했다. 그 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대한협회(大韓協會) 등 독립단체에 들어 활약하였고, 1909년(융희 3)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했다. 1911년 중국에 건너가 손문(孫文)의 무창의거(武昌義擧)에 가담했다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로 들어가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진영사(陳英士)·여천민(呂天民) 등 중국 국민당 간부들과 사귀어 한중 공동 투쟁의 전도를 닦음으로써 본격적 독립 운동의 터전을 닦았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 해 9월 법무 총장이 되고 다음 해 10월에는 국무 총리 대리 겸 외무 총장의 자격으로 신생 중화 민국 광둥 정부(廣東政府)에 특파, 대사로 가서 손문과 교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받고 가능한 모든 면의 원조를 약속받아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1922년 임시정부 내에 내분이 생기고, 중국 광둥 정부에서도 정변이 생겨 손문이 피신하니 상하이에 돌아와 병석에 눕고 민족의 앞날을 근심한 나머지 25일 간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광복단[편집]

光復團

1913년에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채기중(蔡祺中)·유창순(庾昌淳) 등이 풍기에서 비밀결사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광복운동을 하던 중 대구의 박상진(朴尙鎭) 등과 합류하여 광복회라 개칭, 1916년에 노백린(盧伯麟)·김좌진 등을 가입시켜 광복단이라고 칭하였다.이들은 수백 명의 단원을 포섭하여 단원을 확장하고 선언문을 발표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후에는 김상옥 등 20여 명의 암살단이 국내에 파견되어 총독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안창호[편집]

安昌浩 (1878

1938)

독립운동가. 호는 도산(島山). 평남 강서(江西) 출생. 18세 때 평양에 나가 독립협회 평양 지회 결성식이 열린 쾌재정(快哉亭)에서 첫 연설을 하여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1898년(광무 2)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승만(李承晩) 등과 같이 만민공동회를 개최, 독립협회 운동을 계속했다.1900년 미국에 건너가 신문명을 배우는 한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세워 교포의 생활을 지도, 향상케 하였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의 소식을 듣고, 1906년에 귀국,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실력을 배양함으로써 독립을 찾으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 정주(定州)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웠으며, 서울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기관지로 사용하고,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 평양에는 도자기 회사까지 세워 교육·문화·산업 등 모든 방면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그 뒤 1908년(융희 2)에는 박중화(朴重華)·최남선(崔南善)·김좌진(金佐鎭)·이동녕(李東寧) 등과 청년 학우회를 조직, 실무역행주의(實務力行主義)로 민족 계몽을 적극 추진했다. 1911년 총독 데라우치 암살 음모사건을 뒤집어씌우려 하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191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민족 혁명 수양 단체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난 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 총장 및 노동 총판을 지내는 한편 흥사단 극동 임시 위원부를 조직, 임시정부 육성과 민족 계몽을 통한 독립운동에 계속 헌신했다.1932년 상하이에서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거사가 있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에 송환되고, 대전 감옥에서 3년 간 복역한 후 가출옥하여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산(大寶山)에 들어가 휴양하다가 1937년 6월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이듬해에 병으로로 보석되어 서울 대학병원에서 치료하다가 간경화증(肝硬化症)으로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김시현[편집]

金始顯 (1883

1966년)

독립운동가. 자는 구화(九和), 호는 하구(河求)·학우(鶴右). 본관은 안동(安東).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 3·1 운동 후 만주에 가서 항일 무장 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무력 항쟁을 벌였다. 1923년 의열단의 밀령으로 국내에 들어와 경기도 경찰부 경부(警部) 황옥(黃鈺)과 제휴, 전국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고, 요인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체포되었다.191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1929년 석방되어 다시 만주로 망명했다. 길림성(吉林省)에서 독립연맹(獨立聯盟)을 조직, 1931년 베이징(北京)에서 또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岐) 형무소에서 5년 간 복역, 출옥 후 베이징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2년 베이징 일본 영사관에 1년 간 감금되었고 1945년 또다시 일본 헌병대에 잡혀 수감 중 해방으로 석방되었다.귀국 후에 고려 동지회(高麗同志會) 회장·민주 국민당(民主國民黨) 고문 등을 역임하고, 1940년 제2대 국회의원에서 당선되었다. 1952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 복역 중 1960년 4·19혁명으로 석방, 이해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가 이듬해 5·16군사정변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범석[편집]

李範奭 (1900

1972)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철기이며 서울 출생. 1915년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1919년 윈난 육군강무학교 기병과를 나왔다. 이 해 만주 청산리 전투사령관이 되어 이듬해 청산리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1922년

25년에 소련 합동 민족군 연해주 지구 지휘관으로 소련 혁명에 참가하였다. 1941년 지청천과 광복군을 만들어 참모장이 되고, 1945년 광복군 중장이 되었다. 광복을 맞이하여 일본군의 무장 평화 접수차 귀국하였다. 그 후 조선 민족 청년단을 만들었고 초대 국무총리·국방부 장관·중화민국 대사·내무부 장관·참의원 등을 지냈다. 회고록 『우등불』이 있다.

이봉창[편집]

李奉昌 (1900

1932)

독립운동가. 서울 출생. 19세 때 용산역 안에 있는 만철(滿鐵) 견습소에 입소하였으나 1924년 병으로 퇴직하고 이듬해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방랑 생활을 하였다. 1931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김구(金九) 주석(主席)의 지도를 받아 애국단에 가담, 이해 12월 일본 천황을 암살할 것을 선서한 후 수류탄 2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2년 1월 8일 만주국 괴뢰왕 부의(溥儀)와 함께 천황 히로히토(俗仁)가 도쿄시의 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數田門) 앞에서 대기했다가 수류탄을 던졌으나 황기(皇旗)의 기수와 근위병에 부상을 입혔을 뿐 일황을 죽이지는 못하였다.그때 이봉창은 피하지 않고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대한독립 만세”를 세 번 부른 후 태연히 포박을 당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의 총리대신 이하 각원(閣員) 전부와 경시청장(警視廳長)이 추궁당하였으며, 7월 19일 대심원 공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이봉창은 “나는 너희 임금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어늘 어찌 너희들이 감히 내게 무례히 하느냐” 하고 한마디 호령을 했을 뿐 재판을 거부했다. 이에 일본 법원은 방청인도 없이 저희끼리 판결문을 작성, 사형을 선고하고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형을 집행하니 의사 나이 33세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復章)을 받았다.

윤봉길[편집]

尹奉吉 (1908

1932)

항일 의사. 황(璜)의 맏아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출생. 어려서 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한학(漢學)을 배웠다. 1926년 18세 때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모직 공장 직공·세탁소 외교원으로 일하다가 1931년 김구(基九) 선생의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에 들어갔다.그 뒤 직접 왜적에 대항하여 투쟁할 기회를 찾던 중, 1932년 4월 29일 소위 일본의 천장절(天長節)을 기하여 일본이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전승 축하회를 상하이의 흥커부 공원(虹口公園)에서 여는 것을 알았다. 이 날 오전 11시 40분 윤봉길은 폭탄을 몸에 품고 경비가 삼엄한 식장에 뚫고 들어가 식장 정면에 투척, 폭발시켰다.당시 중국에 있던 최고위급 왜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 날 식장에서의 이 거사로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河端)는 폭발 현장에서 즉사,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은 전신에 24개의 파편을 맞고 5월 26일에 죽고,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제9사단장 요시다(吉田謙吉)·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으며, 그 외에도 10여 명의 왜인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윤봉길은 도피할 생각도 않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른 후 체포되어 이 해 5월 29일 일본 오사카(大阪)로 이송되고, 6월 21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즉결되어 12월 19일 오사카 위수형무소(衛戍刑務所)에서 34세를 일기로 일제의 손에 사형당하였다. 유족은 부인 배씨(裵氏)와 두 아들이 있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청산리 전투[편집]

靑山里戰鬪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소속의 독립군이 길림(吉林)의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 1920년 만주 왕청현(旺淸縣)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출병으로 말미암아 태백산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백운평(白雲坪)에 이르러 일본군 1만의 공격을 받게 되었으나, 김좌진·이범석(李範奭)·나중소(羅仲昭) 등의 지휘 아래 일본군 2천2백여 명을 사살했다. 이어 천수평(泉水坪)에서 1개 중대를, 마록구(馬鹿溝)에서 2만여 명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상 3회에 걸친 전투를 청산리 전투라 하며, 이는 2천5백의 독립군이 5만의 일본군과 대적해서 승리한 독립군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린 전투였다.

김좌진[편집]

金佐鎭 (1889

1929)

독립운동가·장군. 호는 백야(白冶). 본관은 안동(安東), 형규(衡奎)의 아들. 홍성(洪城) 출생.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여 근대화에 앞장섰으며, 이듬해 호명 학교(湖明學校)를 설립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 기호학회(畿湖學會) 및 청년 학우회(靑年學友會) 등의 간부를 지내고 1913년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 중 1915년 체포되어 3년 간 복역했다. 1917년 만주로 망명, 1919년 서일(徐一) 등과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이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왕청현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였다. 이듬해 북로군성서의 군대를 동원하여 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총지휘, 일본군 제19·21사단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무장 독립 운동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그 후 부대를 이끌고 흑룡강(黑龍江) 부근에 이동,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 부총재로 취임하고 일본군의 보복 작전을 피해 1921년 노령으로 이동했다가 이듬해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들어왔다. 1925년 닝안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 군사 집행 위원장이 되고 이어 성동(城東) 사관 학교를 세워 정예군 육성에 공헌, 그 동안 임시정부로부터 군무 총장(軍務總長)·국무 위원 등에 임명되었으나 오직 독립군 양성에만 전력하였다. 1929년 한중연합회(韓中聯合會)를 결성, 주석이 되어 항일 투쟁과 동포의 단결에 힘쓰다가 이듬해에 과거의 부하였던 고려 공산 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의 김일성(金日星)·박상실(朴相實) 등에게 융안 현 중둥로 산시역(永安縣中東路山市驛) 자택 앞 정미소에서 암살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홍범도[편집]

洪範圖 (1868

1943)

항일 투사. 평북 자성(慈城:一說에는 平壤 陽德) 출생. 소년 시절에 갑산에 이사,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07년(융희 1)에 차도선(車道善)·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 등과 갑산(甲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후치령(厚致嶺)에서 왜장 미야베(宮部)의 중대 병력(中隊兵力)을 섬멸, 황수원(黃水院)·삼수(三水) 등지에 전승하며 투쟁하다가 만주로 망명,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여 간도(間島) 지방에서 활약했다. 3·1운동 때에는 동지를 규합하여 동남만(東南滿)과 노령(露領)을 근거로 기병(起兵), 동 간도 국민회 소속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어 1919년 가을 부하 2백명을 거느리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와 일본 군대를 수차 격파하였다.1920년 6월에는 왜보병(倭步兵) 19사단과 신미(新美二郞)가 지휘하는 남양군 수비대(南陽郡守備隊) 약 1개 연대와 접전하여 간도 봉오동(鳳梧洞)에서 유격전으로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시 일본군의 대부대가 만주 전역에 걸쳐 출동을 개시했으므로 부하 6백여 명을 데리고 북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 부대가 집결해 있는 밀산(密山)으로 이동, 지청천(池靑天) 부대와 여러 단체까지 통합,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부총재에 취임했다. 그 뒤 군단과 더불어 노령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흑하사변(黑河事變)을 당하여 군대를 해산, 만주와 노령 지방을 방랑하다가 시베리아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復章)을 받았다.

의열단[편집]

義烈團 1919년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비밀 항일운동 단체. 이 단체는 일정한 주소를 가지지 않고 비밀을 엄수하며, 폭력을 유일한 수단으로 일본 관리와 관청을 암살·파괴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당시 김원봉(金元鳳)·양건호(梁健浩) 등은 길림에서 동숙하고 있었는데, 각지에 출몰하는 독립단의 활동이 미온적이라는 점에 분개하여 급진적 독립운동을 표방하고 결사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근거를 북경으로 하고 한·중인(韓中人) 70여 명의 결사적 단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부산경찰서 폭탄사건, 총독부 폭격사건, 동척 폭탄사건 등은 모두 이들의 거사였던 것이다.

애국단[편집]

愛國團

상하이에서 조직된 애국운동 단체. 1919년 김구가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있으면서 한·중(韓中) 우의와 일본 수뇌 암살을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이 단체에서 이봉창·윤봉길 등 의사(義士)가 배출되었다.

보안회[편집]

保安會

구한국 말기의 항일 단체. 1904년(고종 41년)에 원세성(元世性)·송수만(宋秀萬) 등이 만들었다. 일본이 우리의 교통·통신 기관을 강제로 차지하고,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기 위해 조직하였다. 이 보안회의 활동으로 황무지 개척안은 취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친일 단체인 송병준(宋秉畯)의 유신회(維新會)의 방해로 없어졌다.

동척 폭탄사건[편집]

東拓爆彈事件

1926년 12월 나석주(羅錫鑄)가 동양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사건. 나석주는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한 무관으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이후 중국인으로 가장하고 톈진에 들어가서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 길로 동양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이었으며, 이 사건에서 그는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편집]

上海虹口公園事件

1932년 윤봉길이 일본군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등을 폭살한 사건. 김구의 영도 아래 있던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은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이용,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이 사건으로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령관 시라카와, 해군중장 노무라 등이 죽거나 다쳤으며, 윤봉길은 체포되어 위수 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