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음악가/민속악의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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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판석[편집]

朴判錫

근세조선(철종-고종)의 명고수. 전남 나주(羅州) 출생. 판소리 8명창 다음에 이른바 후8명창이라 하여 박만순(朴萬順)·이날치(李捺致)·김세종(金世宗)·정창업(鄭昌業) 등이 철종·고종 때 활약했다. 이 무렵 이날치·정창업 등 후8명창의 북을 도맡아 친 사람이 박판석이다. 명고수 한성준이 일상 말하기를 "북을 치려면 박판석 씨같이 쳐야 한다"고 찬탄하였다. 그의 판소리 정통 고법(鼓法)은 명창이며 명고수인 장판개(張判介)에게 전해졌고 명고수 김명환(金命煥)도 어려서 박판석에게 사사했다.

김창조[편집]

金昌祖(1865-1929)

근세조선(고종 때)의 가야금 산조 명인. 전남 영광(靈光) 출생. 시나위·봉장취 등 예로부터 내려오는 기악곡을 토대로 판소리의 여러 장단조를 엮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산조를 체계화했다고 전한다. 해금을 비롯하여 여러 악기에 능하였고 가야금 병창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손녀 김죽파 역시 가야금 산조의 명인이다.

한숙구[편집]

근세조선(철종-고종)의 가야금 명인. 일명 한선달. 한수동의 아버지. 어려서부터 여러 악기를 공부하여 각 악기에 능하였고 풍류에도 일가를 이루었고 가야금 산조를 체계화시킨 김창조와 비슷한 연배로 가야금 산조에도 뛰어났다. 그의 문하에서는 한수동· 한성기(韓成基)·안기옥(安基玉) 등 많은 산조명인이 났다.

백낙준[편집]

白樂俊(1884-1934)

근세조선(고종 때)의 거문고 산조 명인. 충청남도 논산(論山) 출생. 당시에 전해오던 가야금 산조 양식을 본따서 거문고 산조를 작곡하여 연주하였다고 전한다. 초창기만 해도 한편에서는 백악지장(百樂之丈)인 거문고로 민속음악을 연주한다 하여 비난도 있었고 한편에서는 새로운 양식에 뛰어난 연주를 한다 하여 갈채도 많이 받았다. 그의 산조음악은 제자 신쾌동(申快童)에 의하여 전해졌다. 일제 때 취입한 거문고 산조음반 3장이 남아 있다.

한성준[편집]

韓成俊(1875-1941)

조선(고종-일제)의 명고수·무용가.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생. 박순조(朴順祚)에게 사사하였다. 김창환(金昌煥)·박기홍(朴基洪)·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정정렬(丁貞烈) 등 명창들의 북을 도맡아 쳤다. 한편 민속무용의 대가로, 그동안에 흩어져 있는 무용의 체계를 세워 승무(僧舞)·학무(鶴舞)·태평무(太平舞) 등 여러 무용을 무대화시켰다.

한수동[편집]

일제 때의 가야금 산조 명인. 가야금의 대가 한숙구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에게 가야금을 배워서 대가가 되었는데 한숙구 문하생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한다.

한성기[편집]

韓成基

일제 때의 가야금 산조 명인. 한숙구와 김창조에게 가야금을 사사했다. 가야금 산조에 뛰어났고 병창도 잘하였다. 그의 제자로 김죽파가 있다. 왜정 때 취입한 산조 음반이 있고 병창이 많이 남아 있다.

박종기[편집]

朴鍾基

고종-일제 때의 대금산조 명인. 전남 진도(珍島) 출생. 대금 하면 정악(正樂)에 김계선(金桂善), 민속악(民俗樂)에 박종기로 쌍벽을 이루었다. 일제 때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는 '박젓대' 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이름을 날렸다. 어려서부터 젓대의 학습에 열심이었고 뛰어난 재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재래의 심방곡(心房曲)·봉장취 같은 곡에도 능하였을 뿐 아니라 판소리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산조에 판소리 기법을 많이 활용하여 대금산조의 체계를 세운 공이 크다. 부모의 중병에 살을 도려 약에 쓴 효행이며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긴 기인(奇人)이었다.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기악부문의 연주와 교육에 활약하였다. 그의 제자로 한주환(韓周煥)이 있다. 왜정 때 취입한 산조 음반과 많은 기악반주 음반이 남아 있다.

심상건[편집]

沈相健(1889-1965)

일제 때의 가야금 산조 명인. 충남 서산(瑞山) 출생. 본관은 청송(靑松). 부친에게 가야금을 배워 충청도제 가야금 성음을 터득한 뒤 독특한 자기만의 경지를 개척하여 가야금 산조에서 이색적인 유(流)를 만들었다. 다른 산조와 청을 달리하고 정악적인 성음이 깃들여 있다. 일제 때 가야금 산조와 병창으로 많은 연주와 음반 취입을 하였다. 1948년 조택원 무용단과 미국에 가서 공연했다. 1962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상(文化褒賞)을 받았다. 일제 때 음반으로 산조와 병창이 많이 남았는데 단가, 장부한(丈夫恨)이 걸작이다. 그의 가야금 병창은 충청도의 전통적인 고제로 알려졌다.

강태홍[편집]

姜太弘(1892-1968)

일제 때의 가야금 산조 명인. 전라남도 무안 출생. 선배들의 가야금 산조를 토대로 재치 있고 구성진 자기 류(流)의 산조를 작곡했다. 가야금 병창에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고 신작(新作)에도 능하였다. 가야금 산조의 제자로 원옥화가 있고, 병창의 제자로 박귀희가 있다.

오태석[편집]

吳太石

일제 때 가야금 병창 명인. 전남 보성군 벌교(筏橋) 출생. 가야금 병창은 본래 가야금 산조 명인이 여기(餘技)로 하는 것이었고 병창의 성음은 '석화제'라는 병창 특유의 제로 부르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그는 가야금 산조의 명인이 아니면서도 타고난 성량으로 판소리 성음을 가야금 병창에 얹은 개혁자였다. 크고 고운 목과 맛있는 목구성과 재치있는 너름새로 청중의 심금을 울리었다. 조선성악연구회와 기타 많은 창극 단체에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일제 때 취입된 많은 음반이 남아 있는데 <흥보가> 중에서 박타령과 <심청가> 중에서 심청모 출상하는 대목이 걸작이다.

박석기[편집]

朴錫基(1899-1952)

거문고 산조의 대가. 전남 담양 출생. 거문고 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백낙준(白樂俊)과 김종기(金宗基)에 이어 신쾌동(申快童)과 함께 산조를 전수받아 백낙준류 거문고산조를 그의 제자인 한갑득(韓甲得, 전무형문화재 제16호 기능보유자)에게 전수시켰다. 갑부의 아들로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수재이며 국제 올림픽에 야구선수로도 참가한 유능한 운동선수이기도 하다. 일제하에서 재능을 발휘하지 않은 채 풍류로 소일하다가 백낙준을 고향으로 초빙하여 극진히 후대하며 산조를 사사하였다. 연주활동은 하지 않고 제자에게 전수만 시켰다. 1939년 조상선(趙相鮮)·한주환(韓周煥)·김여란(金如蘭)·김소희(金素姬)·임소향(林素香) 등과 함께 화랑창극단(花郞唱劇團)을 조직하여 광주와 서울에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의 음악은 한갑득류 거문고 산조로 전승되었다.

신쾌동[편집]

申快童(1910-1977)

거문고의 명인, 전북 익산(益山) 출생, 호는 금헌(琴軒). 어려서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정일동(鄭一東)에게서 거문고 정악(正樂), 백낙준(白樂俊)에게서 거문고 산조를 익혀 백낙준의 고제(高弟)가 되고 그가 죽은 후 스승의 의발을 이어 거문고 산조의 제1인자가 되었다. 1938년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명창 송만갑·정정렬에게 창악을 배워 거문고와의 병창을 개발하니 거문고 병창은 그가 효시가 되었다.

그리고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는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밖에는 없던 것을 여기 엇모리와 휘모리를 더해서 거문고 산조의 틀을 완성시켰다. 국악예술학교 교사, 국립국악원·서라벌예술대학 등 강사를 역임하고 1967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산조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저서에 <현금곡전집(玄琴曲全集)>이 있다.

한주환[편집]

韓周煥(1904-1963) 대금 산조의 명인. 전남 화순 출생. 박종기의 대금 산조 가락에 자신의 개성이 담긴 새롭고 독특한 가락을 얹어 한주환류 대금 산조를 만들었다.

한주환은 한숙구에게 대금 풍류(관악합주 또는 관현합주)와 시나위를 배웠고, 이후 1930년대 후반 광주에서 박종기에세 대금을 배워 크게 성공했다. 고향의 풍류방에서 한수동, 정남옥과 같은 유명한 음악인들과 함께 활동했고, 한때 임춘앵창극단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제자로는 서용석, 이생강이 있다.

박상근[편집]

朴相根(1905-1949)

가야금 산조의 명인. 충남 강경에서 출생. 박상근류 가야금 산조를 만들었는데, 가락이 경쾌하고 연주법이 자유분방한 점이 특징이다.

어려서 박덕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박팔괘에게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웠으며, 이차수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웠다.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 기악부에 들어가 당시 가야금 산조의 명인 강태홍, 김종기, 정남희와 함께 활동했다. 1935년 이후로는 가야금 병창을 그만두고 가야금 산조에만 힘을 기울였다. 1968년 제자 성금연이 중요무형문화재 가야금 산조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박상근의 가야금 산조가 세상에 알려졌는데, 박상근류 가야금 산조는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산조에 속한다.

김병호[편집]

金炳昊(1910-1968)

가야금 산조의 명인. 전남 영암 출생. 김창조의 가락에 새롭고 독특한 엇모리 가락을 넣어서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를 만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김창조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웠으며, 조선창극단과 임방울창극단에서 공연을 했다. 1961년부터 1968년까지 국립국악원 강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크게 힘썼다.

김죽파[편집]

金竹波(1911-1989)

가야금 산조의 명인. 전남 영암 출생. 김창조 가락에 새 가락을 짜넣어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구성했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김창조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11세 때부터 할아버지의 수제자인 한성기에게 가야금 풍류, 산조, 병창을 배웠다. 13세 때부터는 연주 활동을 시작해 전국에서 이름을 떨쳤다. 1926년에 서울로 올라와 연주 활동을 했으며, 산조, 병창, 민요를 녹음하였다. 1979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와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명환[편집]

金命煥(1913-1989)

명고수. 전남 곡성 출생. 20세기 후반에 우리나라에서 판소리의 북장단을 가장 오래 공부한 고수에 속한다. 18세 때 고향에서 명창 장판개에게 판소리와 북을 배웠고, 20세 때부터 박판석, 김정문, 김봉학에게 전문으로 북을 배웠다. 김명환은 고법뿐만 아니라 판소리 이론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는데, 임방울·이동백·송만갑·정응민과 같은 당대 최고의 판소리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197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윤덕[편집]

金允德(1916-1978)

가야금 산조와 거문고 산조의 명인. 전북 정읍 출생.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와 거문고 산조를 만들었다. 1931년 정자선에게 양금을, 1932년 김광석에게 풍류가야금을, 김용근에게 풍류거문고를 배워 지방 풍류를 두루 익혔다. 1947년 정남희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웠고, 1948년 한갑득에게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 또한 대한국악원국극사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야금과 거문고를 가르치기도 했다.

1953년부터는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1960년부터는 서울대학교와 국악예술학교 강사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과 연주 활동에 전념했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와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한영숙[편집]

韓英淑(1920-1990) 고전무용 무용가이자 승무의 대가. 13세 때 할아버지 한성준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해 1937년 서울에서 열린 한성준 무용발표회에서 처음 발표했다. 한영숙은 한성준에게 승무, 학춤, 살풀이 같은 전통 춤을 전수받았으며 광복 후에는 한영숙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국악예술고등학교, 서울예술대학, 서울시립무용단 등에서 후진을 길러냈다.

한영숙의 승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박귀희[편집]

朴貴姬(1921-1993)

가야금 산조와 병창의 명인. 대구 출생. 가야금 병창으로 <죽장망혜>, <녹음방초>, <사랑가>를 즐겨 불렀다. 손재광 문하에서 소리를 전문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화중선, 박지홍, 유성준에게 노래를 배웠으며, 강태홍, 오태석에세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19세 때 음반을 취입했고, 광복 후에는 김소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해 공연 활동을 했다. 1955년 김소희, 박초월, 한영숙과 함께 한국예술학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이 되었으며, 1960년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해 1973년 이사장을 지냈다.

함동정월[편집]

咸洞庭月(1917-1994)

가야금산조의 명인. 전남 강진 출생. 본명은 금덕(金德). 최옥산(삼)류 가야금 산조의 가락에 자신의 독특한 가락을 얹어 함동정월류 가야금 산조를 만들었다.

11세 때 가야금, 시조, 승무를 배우기 시작했고, 12세 때 가야금의 명인 최옥산(삼)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웠다. 18세 때인 1935년에 일본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 실시한 콩쿠르에서 입상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의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한갑득[편집]

韓甲得(1918-1987)

거문고 산조의 명인. 전남 광주 출생. 자출(왼손으로 줄을 치거나 떨어 음높이를 변화시키는 연주 기법)을 연속으로 2-3회씩 사용해 특이한 음색을 개발했고,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 한갑득류 거문고 산조를 완성했다.

박석기에게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를 전수했다. 1940년 이후에는 조선창극단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69년에 국립국악원 강사로 재직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고 음반을 취입하는 등 거문고 산조의 보급과 발전에 힘썼다. 197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산조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성금연[편집]

成錦鳶(1923-1987)

가야금 산조의 명인. 광주 출생. 안기옥류 가야금 산조와 박상근류 가야금 산조를 경쾌하고 화려하게 재구성해 성금연류 가야금 산조를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최옥산(삼), 안기옥, 박상근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운 후 방송과 공연을 통해 뛰어난 기량이 알려져 명성을 얻었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예능보유자가 되었으나 1974년 시나위 예능보유자였던 남편 지영희와 함께 예능보유자 자격을 반납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가야금 전수에 힘썼다. 성금연은 13현 가야금, 15현 가야금, 철 가야금과 같은 개량 가야금을 만들었고, 가야금 독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박동신[편집]

(1904- ? )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탈춤을 배웠으며, 무형문화재 강령탈춤 기능보유자이다.

장태남[편집]

(1909- ? )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머리를 깎고 승려로 입적하여 범패를 배웠다. 무형문화재 범패 기능보유자로서 강화도 문수사의 주지로 있었다.

박송암[편집]

(1911- ? )

서울 봉원동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입산하여 범패를 배웠다. 무형문화재 범패 기능보유자이다.

김득수[편집]

(1917- ? )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남도민요와 육자배기, 판소리를 배웠다. 한성준·정원섭 등에게 북을 배웠으며, 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기능보유자이다.

김병섭[편집]

(1921- )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김학순에게 설장구를 배웠다. 현재 김병섭 농악연습소를 운영하며,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

김무규[편집]

(1908- ? )

전남 구례군에서 태어났다. 전추산 명인에게 단소를 배웠다. 무형문화재 향제줄풍류 기능보유자이다.

김봉열[편집]

(1913- ? )

전북 진안에서 태어났다. 김인철에게 굿치는 것을 배웠다. 그의 가락은 호남 좌도가락의 맥을 잇고 있다.

김석출[편집]

(1922- )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무업(巫業)을 하는 부모 밑에서 노래와 사설과 악기를 배우며 자랐다. 무형문화재 동해안 별신굿 기능보유자로서

날라리가 특기이다.

이매방[편집]

(1927- )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할아버지 이대조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한 후 박영구에게 본격적으로 배웠다.

김동진[편집]

(1928- )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박동실에게 소리를 배웠다. 40세 되던 무렵 목이 상해 그 때부터 북을 쳤다.

박병천[편집]

(1933- )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대금 명인 박종기의 손자로서 어려서부터 음악을 익혔다. 씻김굿을 최초로 무대에 올렸으며 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 기능보유자이다.

공옥진[편집]

孔玉振(1933- )

1인 창무극(소리·춤·재담을 곁들인 전통 연극)인 병신춤으로 유명한 무용가. 어려서 명창인 아버지 공대일에게 창을 배우기 시작했고, 10세 때 일본에서 최승희에게 춤을 배웠다.

광복 이후부터 1961년까지 조선창극단을 비롯한 많은 국악단체에서 일했고, 1978년부터 독특한 병신춤이 포함된 1인 창무극을 선보였다. 특히 <심청전>,<수궁가>를 공연하면서 판소리판의 인기있는 주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