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음악가/정악의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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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옥[편집]

麗玉 고구려 때 공후의 여류명인. 뱃사공 곽리자고(郭里子高)의 아내. 한 미친 노인이 강물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자 그 노인의 아내가 공후를 뜯으며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부르고 물에 빠져 죽었다. 이것을 본 곽리자고가 여옥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여옥은 공후를 뜯으며 <공후인>을 불러 후세에 이것이 전해졌다 한다.

백결선생[편집]

百結先生

신라 때 가야금의 원형인 '고'의 명인. 자비왕(慈悲王, 459-479) 때,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서 살았다. 음악의 대가였으나, 몹시 가난하여 옷을 백 군데나 기웠다 하여 백결선생이라 불렸다. 섣달 그믐에 다른 집에서는 떡방아 소리가 들리는데 가난한 그는 떡방아를 찧을 수 없었다. 마음의 기쁘고 슬픔을 능히 고로 그려내는 그는 고로써 방아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했는데, 이것이 대악이라 하여 <방아타령>의 시초가 되었다. 백결선생의 '고'는 거문고인지 다른 모양의 '고'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고구려의 거문고가 신라에 전파된 것은 통일신라 이후이므로 자비왕 때의 '고'를 거문고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가실왕[편집]

嘉實王

가야국의 임금. 가보왕(家寶王)이라고도 한다. 우륵에게 명하여, 열두 달의 율려(律呂)를 본떠 열두줄로 된 가야금을 만들게 하고, 그 곡조를 짓게 했다고 기록되었다. 가실왕은 6가야 중 고령가야의 왕으로 추측된다.

우륵[편집]

于勒

대가야국 가실왕-신라 진흥왕 때의 가야금 연주가, 작곡가.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성열현(省熱縣) 사람으로 가실왕의 총애를 받았다.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현금(十二玄琴:伽倻琴)을 만들고, 이 악기로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物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獅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 등 12곡을 지었다.

551년(진흥왕 12년) 제자 이문(泥文)과 함께 신라에 귀화하여 낭성(娘城:淸州)에서 살았다. 진흥왕이 낭성에 오자 우륵은 왕의 부름을 받고 하림(河臨)·눈죽(嫩竹) 2곡을 지어 바쳤다. 왕이 감탄하여 국원(國原:忠州)에 살게 하고, 552년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등 세 사람을 제자로 삼게 하고 계고에게 가야금을, 법지에게 노래를, 만덕에게 춤을 가르쳤다. 그 후 하림조, 눈죽조 2조가 생겨 모두 185곡의 가야금곡을 만들었다. 왕산악, 박연과 함께 3대 악성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것은 창제한 것이 아니고 전부터 있던 것을 개조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충주 대문산(大門山) 기슭의 금휴포(琴休浦)와 그 위의 탄금대(彈琴臺)라는 곳은 옛날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한다.

왕산악[편집]

王山岳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때의 재상, 거문고 연주자. 처음에 진(晋)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내 왔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연주할 줄을 몰라서 나라에서 상을 걸고 연주하는 사람을 구하였더니 제2상(第二相)인 왕산악이 칠현금의 모양을 그대로 두고 제도를 많이 고쳐서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다.

이것으로 100여곡을 지어 타니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었으므로 이 악기를 현학금(玄鶴琴)이라 하고, 뒤에 말을 줄이어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영양왕 이전의 고분벽화에 거문고 원형이 그려져 있으므로 거문고가 왕산악의 창작이라는 것은 의심스럽고, 그는 예로부터 있던 거문고 원형을 개조하고 위대한 연구가·작곡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륵 및 박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히고 있다.

미마지[편집]

味摩之

백제 무용 때의 무용가. 오(吳)나라에서 기악무(伎樂舞)를 배우고 612년(무왕 13년)에 일본에 귀화하여 사쿠라이라는 곳에 머무르면서 소년들에게 기무(伎舞)를 가르쳐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옥보고[편집]

玉寶高

신라 때의 거문고의 명인. 경덕왕 때의 사찬 공영(恭永)의 아들.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우고 닦아서 스스로 새로운 가락(新調) 30곡을 지어, 이것을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였다. 금오산(金鰲山)에 있는 금송정(琴松亭)은 옥보고가 놀던 곳이라 한다.

안장[편집]

安長

신라 때의 거문고의 명인. 이찬 윤흥(尹興)에게 발탁되어 청장(淸長)과 함께 지리산에 묻혀 사는 귀금(貴金)으로부터 희귀한 거문고의 음악을 전수받고 아들 극상(克相)·극종(克宗)에게 계승시켰다.

극종[편집]

克宗

신라 때의 거문고의 명인. 귀금(貴金)으로부터 희귀한 거문고음악을 전수받은 안장(安長)의 아들로, 형 극상(克相)과 아버지의 거문고음악을 계승하였으며 새로이 7곡을 작곡하였다. 극종 이후에는 거문고 음악이 신라에 널리 퍼지고 평조(平調)와 우조(羽調)로 나누어져 발전하였다.

김창하[편집]

金昌河

근세조선(순조-헌종)의 국악사. 가야금, 정재춤의 명인. 자는 의선(義善), 본관은 경주. 서울 출신이다. 조선 말기, 유명한 국악가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정조 때의 국악사 김대건(金大建)이 아버지이고, 철종-고종 때의 가야금 명인 김종남(金宗南)이 아들이며, 고종-왜정 때의 이론가이자 제4대국악사장인 김영제가 종증손자이다. 1827년에 전악에 올랐다. 전악과 악사로 있으면서 가야금도 잘 탔지만, 특히 익종(翼)을 도와서 구후관이라는 악단을 조직하고 구후관감의 칭호를 받았으며,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보상무(寶相舞)·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춘앵전 등을 제작 안무했다.

함제홍[편집]

咸濟弘

근세조선(헌종-철종)의 국악사. 단소의 명인. 자는 경현(景賢), 본관은 양근(楊根:楊平). 아버지 함윤옥(咸潤玉)이 순조 때 강원도 간성(杆城)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장악원 악사가 되자 그의 집안에서는 많은 국악의 명인이 나왔다. 함제홍은 단소와 젓대로, 아들 함재운(咸在韻)은 거문고로, 아들 함재영은 젓대로, 손자 함화진(咸和鎭)은 거문고 및 이론 행정가로 이름을 날렸다. 함제홍은 1846년에 가전악이 되고, 1852년에 전악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장악원 악사로 있으면서 단소와 젓대를 잘 불었고, 단소에 있어서는 신기(神技)에 들어가서 세상에 못내는 소리가 없었다. 별명이 함소(咸簫)라 하여 후대에까지 이름이 전한다.

이인식[편집]

李寅植

근세조선(헌종-고종)의 피리의 명인. 본관은 경주, 자는 성효(聖孝). 거문고의 대가 이수경(李壽卿)의 할아버지로, 국악의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후손들 중에 훌륭한 국악인이 많이 나왔다. 1847년(고종 13년)에 가전악(假典樂), 1876년(고종 13년)에 전악을 거쳐 악사가 되었다. 피리에 뛰어났다.

김종남[편집]

金宗南

근세조선(철종-고종)의 국악사, 가야금의 명인. 호는 해은(海隱), 본관은 경주. 조선 말기, 국악의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순조 때의 정재춤의 명인인 김창하(金昌河)가 큰아버지이고, 고종 때의 이론가이며 제4대 국악사장인 김영제가 양(養)손자이다. 1859년에 전악이 된 기록이 남아 있다. 가야금의 대가였고, 초대 국악사장을 지냈다.

김종한[편집]

金宗漢(1843-1937)

근세조선(철종-고종)의 국악사, 가야금의 명인. 개명은 종표(宗杓), 자는 영조(永祖), 본관은 경주. 근세조선(철종-고종)의 가야금 명인 김종남(金宗南)의 아우. 1866년 전악에 오른 기록이 있다.

전악과 악사로 활약하였고, 가야금을 잘 탔다. 특히 덕행을 겸비하고 지조가 굳어서 국악인들의 사표(師表)로서 존경을 받았다. 제자들이 그를 추모하여 그의 초상을 박연의 신실(神室)에 봉안하고 크게 제사를 지냈다 한다.

함재운[편집]

咸在韻(1854-1916)

근세조선(고종-일정)의 국악사, 거문고 명인. 자는 치관(致寬), 호는 겸와(謙窩). 본관은 양근(楊根:楊平). 문헌에는 재소(在韶)로도 나온다. 서울 출신. 헌종 때의 뛰어난 단소의 명인인 함제홍(咸濟弘)이 아버지이고, 국악의 이론가인 함화진(咸和鎭)이 아들이다. 어려서 강인식(姜寅植)에게 거문고를 사사하여 일가를 이루고, 김경남(金景南)·이병문(李炳文)과 함께 한말 거문고 삼절(三絶)의 칭호를 얻었다. 특히 여민락(與民樂)에 뛰어났다.

1906년 서경 풍경궁 참서관에 임명되고, 1907년 전악에 임명된 후 1908년에는 장례원(掌禮院) 국악사장에 임명되었다. 연주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음악이론가·행정가로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김경남[편집]

金景南

근세조선(고종-왜정)의 거문고 명인. 이병문(李炳文), 함재운(咸在韻)과 함께 거문고의 3절(三絶)로 꼽힌다. 1908년(융희 2년) 하규일(河圭一), 하순일(河順一), 명완벽(明完璧) 등과 함께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의 전신(前身)인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를 조직하여 연주와 후진 양성에 공헌하였다. 그 후 고악정리장(古樂整理長)으로 있으면서 악보 편찬 사업을 주관했다.

명완벽[편집]

明完璧(1842-1929)

조선(철종-왜정)의 국악사. 가야금 명인. 호는 진당(眞堂), 본관은 서촉(西蜀). 서울 출생. 1861년 장악원 전악으로 임명되고, 1893년에는 악사에 올랐고, 1907년에는 장례원 국악사에 임명되었다. 1911년 이왕직 아악사에 임명되고, 제2대 아악사장이 되었다. 가야금의 명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가곡 여창과 기타 다른 악기에도 능하였다. 1921년 서울 공회당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정약대[편집]

鄭若大

조선(고종)의 젓대의 명인. 함제홍, 함재운, 최학봉과 더불어 조선 말기 젓대의 손꼽히는 거장이다. 정약대는 매일 인왕산에 올라가 젓대 불기를 10년간이나 하루같이 했다 한다. 7-8분이 걸리는 '도드리' 한 곡조가 끝나면 나막신에다 모래 한 알씩을 넣되, 이렇게 하루 종일 계속해서 나막신에 모래가 가득차야만 집으로 내려왔다.

강재흥[편집]

姜載興(1852- ? )

조선(고종)의 해금의 명인. 구명(舊名)은 삼석(三石), 본관은 진주. 서울 출생. 1867년 장악원(掌樂院) 악공으로 임명되고, 1913년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아악수에 임명되었다. 1895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 다녀왔다. 해금과 아쟁을 하였고, 해금은 매우 잘했는데, 특히 여민락에 뛰어났다.

최학봉[편집]

崔鶴鳳(1856- ? )

조선(고종)의 젓대의 명인. 일명 성호(聖浩). 본관은 경주. 서울 출생. 1871년 장악원 악공에 임명되고, 1913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에 임명되었다. 함제홍, 정약대, 함재영과 더불어 조선 말기의 손꼽히는 젓대의 명인이고, 특히 근래의 젓대의 거장인 김계선(金桂善)을 길러낸 스승이다.

유의석[편집]

劉儀錫(1858-1932)

고종 때 궁정악사를 지낸 대금의 명인. 기악합주에서 연음 형식(다른 악기의 연주를 이어받아 연주하는 형식)으로 연주할 때의 기량이 특히 뛰어났다. 유의석의 자는 경재(慶哉)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문헌에 따르면 1867년에 장악원의 악공이 되었으며, 1877년에 열린 궁중의 큰 잔치 때 대금을 연주했다. 1908년에 장악원의 가전악이 되어 대금 수석 연주자로 활약했고, 1913년에 장악원이 아악대로 개편되면서 아악수장직을 맡아 아악생 교육과 후배 양성에 힘썼다.

함재영[편집]

조선(철종-고종)의 젓대 및 단소의 명인. 자는 치서(致瑞), 본관은 양근(楊根:楊平). 헌종-철종 때의 젓대와 단소의 뛰어난 명인 함제홍(咸濟弘)의 아들. 고종-대한민국 때의 음악이론가요 행정가인 함화진(咸和鎭)의 큰아버지이다. 아버지 함제홍의 젓대와 단소 기예를 계승받아 명인이 되었다. 1897년 전악이 되었고, 뒤에 악사가 되었다.

최순영[편집]

崔淳永

조선 말(고종-왜정)의 피리의 명인. 자는 경화(景和), 본명은 순룡(淳龍). 본관은 전주. 서울 출생. 1875년(고종 12년) 장악원 악공이 되어 피리를 전공하고, 1903년(광무 7년) 전악에 임명되었고, 1913년엔 아악수장(雅樂手長), 1932년엔 아악사(雅樂師)를 역임했다. 피리에 뛰어났고, 아악부원 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 주임교수로 있었다.

이수경[편집]

李壽卿(1882-1955)

조선 말(고종-대한민국)의 대금의 명인. 본관은 경주. 호는 송사(松史). 아악의 명인이 많이 난 집안에서 태어났다. 철종 때의 악사(樂師)로 피리의 명인인 이인식(李寅植)이 할아버지요, 고종 때의 악사 이원근(李源根)이 아버지요, 가곡의 명창인 이병성(李炳星)이 그의 아들이다. 1892년 장악원 악공으로 입사하여 거문고와 정재춤을 배웠고, 1902년 전악에 오르고 1911년에 장악(掌樂)에 임명되었다. 1913년 이왕직 아악수장(雅樂手長)에 임명되었고, 1933년에는 아악사를 역임, 1940년에 퇴임하였다. 한말 거문고의 삼절(三絶)의 한 분인 이병문(李炳文)의 뒤를 이어받아, 그의 거문고 탄법(彈法)은 정통 수법으로 알려졌으며, 또한 절묘한 연주를 하였다. 특히 영산회상에 뛰어났다. 정재춤에도 능하였고, 거문고 단소 같은 악기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가 있었다. 일정 때 음반에 합주곡 음반이 남아 있다.

전용선[편집]

全用先(1887-1967)

단소의 명인. 아호는 추산(秋山)이며,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전용선은 처음에 거문고와 가야금을 배워 풍류(관악합주 또는 현악기가 중심인 관현합주)를 통달했고, 이후 단소의 청량한 소리에 매혹되어 단소 공부에 전념했다. 또한 정악뿐만 아니라 속요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시나위 가락을 연구한 결과 단소산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전용선류 단소산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계선[편집]

金桂善(1891-1943)

조선(고종-왜정)의 대금의 명인. 서울 출생. 본관은 경주. 본명은 기선(基善). 당적, 단소, 생황도 일가를 이루었다. 대금은 고종 때의 명인인 최학봉(崔鶴鳳)에게 사사하였다. 1906년 주전원(主殿院) 내취(內吹)에 임명되었고, 1908년에는 장악원(掌樂院) 내취에 옮겼다. 1911년에 이왕직 세악(細樂) 내취에 임명되었고, 1913년 이왕직 아악수(雅樂手)로 승진되었다.

그 후 아악수장으로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1919년 아악수를 사퇴하였다. 그는 음악적 소양이 뛰어나서 국악기는 물론 서양악기까지 능히 연주하는 기교를 가졌고, 표현력이 뛰어나서 그의 젓대 소리에 심금이 울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왜정 때 취입된 음반으로 평조회상(平調會相)과 청성잦은한잎(淸聲曲)이 남아 있으며, 많은 민요 및 가곡, 반주, 합주곡 등에 그의 대금이 끼여 있다.

김천흥[편집]

金千興(1909- )

해금, 아쟁, 양금 연주자이자 궁중무용의 명인. 서울 출생. 궁중무용을 재현하는 등 전통 춤과 전통 음악을 알리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22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에서 해금을 전공했으며, 아쟁과 양금도 배웠다. 1923년에는 순종황제 탄신 오순경축공연에 무동으로 출연했고, 1926년부터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보, 아악수, 아악수장을 지냈으며,

1951년부터는 국립국악원에서 예술사, 연주원, 자문위원을 거쳐 원로사범을 지냈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제 제1호 종묘제례악과 197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저서에 <한국 무용의 기본 무보> <정악 해금보> <심소 김천흥 무악 70년> 이 있다.

한범수[편집]

韓範洙(1911-1984)

해금, 퉁소, 대금의 명인. 서울 출생.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범수는 대금산조의 창시자 박종기에게 대금을 배웠는데, 박종기의 산조 가락을 다듬어 새로운 한범수류대금산조를 완성했다. 또한 자신의 대금산조 가락을 해금에 맞게 개발해 새로운 해금산조도 만들었다. 오늘날 한범수류 대금산조와 해금산조는 활발히 연구, 전승되고 있다.

김기수[편집]

金琪洙(1917-1986)

대금 연주자이자 신국악 작곡의 선두자. 서울 출생. 독주곡·관현악곡·무용음악·의식음악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많은 전통 음악 악보를 채보했다. 또한 많은 교재와 국악입문서를 발간해 국악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악기를 개량하고 복원하는 등 국악기의 개량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김기수는 이왕직아악부에서 아악수와 아악사를 맡았으며, 1951년부터는 국립국악원에서 국악사, 장악과장, 악사장으로 일했다.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제 제1호 종묘제례악과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준현[편집]

金俊鉉(1918-1961)

일제시대 때의 피리의 명인. 호는 가농. 충청남도 연기(燕岐) 출신. 국악이론가이면서 제4대 아악사장인 김영제의 조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제4기생으로 입소하였다. 최순영(崔淳永)에게서는 피리를, 김계선(金桂善)에게서는 대금을 배웠다. 1936년 아악수가 되고, 광복 후 국립국악원 아악사가 되었다. 목피리를 잘 불어 합주는 물론 피리 독주를 퍼뜨렸다. 1952년 국악진흥회가 제정한 제3회 국악상을 받았다.

정경태[편집]

(1916- ? )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병성 문하에서 가곡과 가사를 배웠다. 무형문화재 가사 기능보유자이다.

홍원기[편집]

(1922- )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왕직아악부 양성소에 입학하여 아악 공부를 하였고, 이병성·이주환 명창에게 성악을 배웠다. 무형문화재 가곡 기능보유자이다.

김성진[편집]

(1916- ? )

서울 종로구 묘동에서 태어났다. 이왕직아악부 양성소에 입학하여 아악을 배웠다. 무형문화재 대금정악 기능보유자이다.

황병기[편집]

黃秉冀(1936- )

가야금 연주자이자 국악 작곡가. 서울 출생. 경기중학 시절부터 김윤덕, 김영윤, 심상건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서울대학교·국립국악원·워싱턴대학교 강사였으며, 1990년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 우리측 대표를 맡기도 했다. 1964년부터 유럽·미국·일본·동남아 각지에서 가야금을 연주해 우리나라 음악을 세계에 알려왔다. 작곡에도 뛰어나며, 주요 작품으로 <숲>, <침향무>, <비단길>, <전설>, <아이보개>, <영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