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음악가/정악의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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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지[편집]

法知

신라 때의 성악가. 주지(注知)로 기록되기도 한다. 대내마(大奈麻)로 있다가 552년(진흥왕 13년)에 왕명으로 계고(階古), 만덕(萬德)과 함께 가야(伽倻)에서 귀화한 우륵(于勒)에게 노래를 사사하였다. 역시 우륵에게 가야금을 배운 계고와 춤을 배운 만덕과 어전에서 연주회를 갖고 찬사를 받았다. 당시 12곡을 줄여 아정한 5곡으로 고쳤다 한다.

계고[편집]

階古

신라 때의 가야금의 명인. 대내마(大奈麻)를 지내다가 552년(진흥왕 13년)에 왕명으로 법지, 만덕과 우륵에게 사사하였는데, 그는 가야금을 배웠다. 뒤에 법지, 만덕과 함께 어전에서 연주함으로써 칭찬을 받았다.

만덕[편집]

萬德

신라 때의 무용가. 대사(大舍)의 벼슬로 있다가 552년(진흥왕 13년)에 계고, 법지와 함께 우륵에게 사사했는데, 만덕은 춤을 배워 계고, 법지와 함께 어전에서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다.

김수장[편집]

金壽長(1682- ? )

근세조선(숙종-영조)의 가곡 명창. 자는 자평(子平), 호는 노가재(老歌齋). 숙종 때 병조에서 서리를 지냈다. 가곡창(歌曲唱)에 능하여 김천택(金天澤)과 교유가 깊었다. 1746년, 1755년, 1763년 3차에 걸쳐 편찬, 개수하여 <해동가요(海東歌謠)>라는 가곡·가사의 사설집을 내었다. 만년에 서울 화개동에 '노가재'라는 띠집을 짓고, 여러 제자들에게 가창을 지도했다. <해동가요>에 그의 시조시(時調詩) 117수가 실렸다.

김천택[편집]

金天澤

근세조선(숙종-영조)의 가곡 명창. 자는 백함(伯涵), 이숙(履淑), 호는 남파(南波).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에서 김수장(金壽長)을 비롯한 평민 출신 가객(歌客)들과 가곡을 중심한 음악활동에 공헌했다.

특히 1728년(영조 4년)에 가곡 및 가사의 사설과 음악이론을 집성·정리한 <청구영언>을 엮어냈다. 이 책은 뒤에 음악 및 문학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해동가요(海東歌謠)>, <가곡원류(歌曲源流)> 등 실제로 불렸던 가곡·가사의 사설집의 시초로 중요시된다. <청구영언>에 그가 지은 시조시 57편이 전한다.

이세춘[편집]

李世春

근세조선(숙종-영조)의 가객(歌客). 일명 응태(應泰). 가곡창(歌曲唱)에 능하였고, 시조장단을 짜서 시조를 내놓은 것으로 신광수(申光洙)의 <관서악부(關西樂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전한다.

박효관[편집]

朴孝寬

근세조선(고종)의 가곡 명창. 자는 경화(景華), 호는 운애(雲崖). 가곡창으로 대원군의 총애를 받고, 운애라는 칭호를 받았다. 수백년 전통을 갖는 가곡을 이어받아 후세에 전한 공이 크며, 특히 1876년(고종 13년) 제자 안민영(安玟英)과 그 때까지 전하는 많은 가곡의 사설과 이론을 정리 집성한 가곡원류의 편찬은 음악과 문학에의 공헌이 크다. 가객(歌客)들과 승평계(昇平契)를 만들었다. 유작으로 시조 13수가 전한다. 그의 가곡창은 하준권(河俊權), 하규일(河圭一)을 거쳐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안민영[편집]

安玟英(1816- ? )

근세조선(고종)의 가곡 명창. 자는 성무(聖武), 호는 주옹(周翁), 구포동인(口圃東人). 고종 때의 가곡 명창인 박효관(朴孝寬)의 제자로, 스승과 더불어 가곡(歌曲)·가사(歌詞)의 사설을 모은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 간행하였다. 박효관과 더불어 대원군의 아낌을 받았는데, 구포동인은 대원군이 준 호라 한다. 성격이 고결하고 운치가 있어 평생 산수와 더불어 노래를 짓고 즐겨 부르며 음률로 보냈다. 저서로 <금옥총서(金玉叢書)>·<주옹만필(周翁漫筆)>·<가곡원류> 등이 있고, 그가 지은 시조시 185수가 전한다.

하규일[편집]

河圭一(1867-1937)

근세조선(고종-왜정)의 가곡

명창. 본관은 진주, 자는 성소(聖韶), 호는 금하(琴下). 서울 출생. 여섯 살 때부터 10여년간 한문을 공부하고, 집안의 영향을 받아 가곡을 공부했다. 숙부 하준권(河俊權), 재종(再從) 하순일(河順一)이 모두 가곡의 대가였다. 1885년에는 하준권의 제자 최수보(崔壽甫)에게 배웠고, 다음에는 가곡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가곡원류의 저자 박효관에게서 가곡을 닦았다. 나쁜 성대를 가졌으나 피나는 노력으로 성대를 바로잡고 근세 가곡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치었다.

한편, 관리로는 1901년 한성소윤(漢城少尹) 겸 한성 재판소 판사로 있었고, 1909년 내장원 문교 정리위원(內藏院文敎整理委員), 전남 독쇄관(督刷官), 1910년 진안군수(鎭安郡守) 등을 역임했다. 한일합방 이후에 관직을 그만두고, 1911년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調陽俱樂部)의 학감으로 취임하여 함재운(咸在韻), 명완벽(明完璧), 김인식(金仁湜) 등과 함께 연주·교육·편찬 등 국악사업에서 활약하였다. 한편 당시 정악의 명인들로 구성된 수요회(水曜會)를 조직하여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고, 1926년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십여년간 가곡 전수에 헌신하였다. 그는 가곡의 명창으로뿐 아니라 오늘날 가곡의 전통이 이어져 오는 데 있어 그의 공은 실로 큰 것이었다. 저서로 <가곡필휴(歌曲必携)>가 있다.

이병성[편집]

李炳星(1909-1960)

왜정 때의 가곡 명창. 호는 두봉(斗峯), 본관은 경주, 서울 출신. 고종 때의 가야금의 대가 이수경(李壽卿)의 아들이다.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제3기생으로 입소하여 피리를 전공하였다. 1926년 졸업한 뒤 아악수장, 아악사를 역임했다. 하규일(河圭一)에게 가곡을 배워, 가곡을 잘 불렀다. 1940년 아악부를 퇴직하고, 1950년 구황실 아악부 촉탁, 195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를 지냈다. 1960년 국악진흥회로부터 국악상을 받았다. 왜정 때 취입한 가곡 음반이 남아 있다.

이주환[편집]

李珠煥(1909-1972)

가곡의 선가(善歌). 서울 출생, 초명은 복길(福吉). 호는 소남(韶南).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 입소하여 피리를 전공하니 스승은 최순영(崔淳永)이다. 동소를 졸업하고 아악수·아악수장·아악사를 역임하고 광복을 맞이했다.

1946년 구왕궁 아악사장(雅樂師長), 1951년 국립국악원 개원에 공이 크고 초대원장에 취임해 국립국악원의 기틀을 세우고, 국악사양성소를 부설하여 국악교육을 실시하고 초대소장을 겸섭했다. 광복 이후 시조창(時調唱) 보급을 위하여 아악부에 월례 시조강습회를 개강하고 그 뒤 이병기(李秉岐)·성경린 등과 시조 연구회를 창설하였다.

1954년 예술원 회원에 당선되고 1962년 국립국악원 고문으로 있었다. 1969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1971년 동 제41호 가사의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어 각각 전수장학생을 교육했다. 가곡은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에게서 배우고 가사의 일부를 임기준(林基俊)으로부터 배웠다. 서울시문화상, 대통령표창, 예술원상 등을 수상하고, 저서에 <고금시조선(古今時調選)>·<가곡보>·<속가곡보>·<가사보>·<시조창 연구> 등이 있다. 유음으로 <소남 가곡선집(韶南歌曲選集)> 3매 1질이 있다.

김월하[편집]

金月荷(1918-1991)

정가의 명인. 경기도 고양 출생. 가곡·가사·시조와 같은 정가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우리나라 정가계의 뛰어난 여류 명창이다. 6·25전쟁 당시 부산 피난시절에 이병성에게 가곡과 시조를 배웠고, 1958년부터 이주환에게 가곡, 가사, 시조를 배웠으며, 임석윤, 이창배, 정운산에게 노래를 배웠다. 1970년에 전국 시우단체 총연합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지냈고, 1973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여창 가곡)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1974년부터 국립국악원 연주원을 비롯해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강사로 일했으며, 1991년에는 재단법인 월하문화재단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많은 국내외 공연과 음반 취입으로 전통 음악의 발전에 이바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