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음악사/조선 전기의 음악
조선 전기의 음악
[편집]朝鮮前期-音樂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운 뒤 억불양유(抑佛揚儒) 정책에 따라 예악(禮樂)을 국시(國是)로 삼았다. 정도전(鄭道傳) 등은 건국과 더불어 많은 조선의 창업송가(創業頌歌)를 지었으나, 악곡은 고려조의 음악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차츰 제도가 정비되고 유교가 대흥한 세종 때에 이르러 전조(前朝)의 음악을 많이 개산(改刪)하였다. 세종은 박연을 시켜 아악을 정비하고 율관과 악기를 제작하였고, 향악과 고취악(鼓吹樂)에 기하여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을 만들고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 등을 제정하였으며, 유량악보(有量樂譜)인 정간보를 만들어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실었다. 세조는 부왕(父王)의 음악사업을 이어받아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악에 쓰게 하여 오늘날까지 전하게 하였으며, 정간보를 개량하였고, 오음약보(五音略譜)를 내어 <세조실록> 악보에 실었다. 조선 전기의 음악정비 제작사업은 성종 때까지 계속되었고, 특히 성현(成俔)이 찬술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이 출간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독립한 종합 악서(樂書)가 나왔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과 임진란(壬辰亂)·병자란(丙子亂)을 거치는 동안에 조선 초기까지 전하던 삼국시대 및 고려음악은 소멸되고 당악은 쇠퇴하여 향악화되었으며 새로운 향악곡이 생겨 조선 후기 음악으로 바뀌어지게 된다.
조선의 창업송가
[편집]朝鮮-創業頌歌
태조 2년에 정도전이 <납씨가(納氏歌)>, <궁수분곡(窮獸奔曲)>, <정동방곡(靖東方曲)>을 지어 올렸고,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수보록> 등 신악을 선찬하고 4년에는 하윤(河崙)이 <근천정(覲天庭)>, <수명명(受明命)> 등 악장을 지어 올렸다. <납씨가>는 고려의 <청산별곡>을, <정동방곡>은 <서경별곡>의 곡에 가사만 새로 얹은 것이다. 이와 같은 근세조선 창업송가의 제작은 세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도 고려 때의 음악을 많이 인용하였지만 유교가 대흥한 세종 때에 이르러서 전조의 음악을 많이 개산하였다. 박연·맹사성(孟思誠) 등 음악이론가들을 동원하여 아악을 정비하고 향악을 창작하고 악기를 제작하며 악보를 창안 편찬하는 등 근세조선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조선 전기의 아악
[편집]朝鮮前期-雅樂
고려 때부터 쓰여온 아악은 악기·제도·악률 등에서 여러 가지 불비한 점이 있었으므로 박연 등이 <주례(周禮)>, <석전악보(釋奠樂譜)> 등 중국 고대 악서(樂書)를 참고하여 아악을 엄격하게 바로 잡았다. 첫째는 고려 때 제례악에 아악만을 쓰지 않고 아헌(亞獻)·종헌(終獻)과 송신(送神)에 향악을 섞어 쓰던 것을 세종 10년부터 그 향악을 없애고 순전히 아악만을 썼다.
둘째, 전에는 등가(登歌)와 헌가(軒架)의 음악이 모두 양률(陽律)의 궁(宮, 중심음)만을 썼었는데, 세종 12년경에 <주례>에 따라 등가에는 음려(陰呂)의 궁, 헌가에는 양률의 궁을 써서, 음양지합(陰陽之合) 또는 합성(合聲)의 격에 맞게 고쳤다.
셋째, 세종 9년에 박연이 처음으로 율관과 편경을 국내에서 제작하였다.
넷째, 제례에 사용되었던 아악곡, 즉 봉상시(奉常寺)에 전래된 <조선국악장(朝鮮國樂章)>은 그 출처가 미심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하여, 세종 12년에 그것을 버리고, 임우(林宇)의 <대성아악보(大成雅樂譜)>를 바탕으로 새로 아악보를 제정하고 그것을 제례악으로 사용하였다. 이 혁신된 아악곡이 오늘날까지 연주되고 있다.
다섯째, 그전에는 조하(朝賀)와 회례(會禮)에 당악과 향악이 사용되었는데, 세종 12년에는 <의례시악경전통해(儀禮詩樂經傳通解)>의 소아편(小雅篇)의 악보에 기하여 조하에 쓸 아악보(雅樂譜)를 제정하고, 세종 13년 정월에 처음으로 조하에서 당악 대신에 아악 <융안지악(隆安之樂)>, <서안지악(舒安之樂)>이 연주되었고, 세종 15년 정월에 회례에서 당악과 향악에 아악 <문명지곡(文明之曲)>, <무열지곡(武烈之曲)>이 추가 연주되었다. 이같이 세종 때에는 아악이 제례에서 조하, 회례에까지 확장되었지만 세종 이후 다시 중국제도의 제례에만 국한되었고, 조회와 회례에서는 다시 후퇴하였다.
조선 전기의 당악
[편집]朝鮮前期-唐樂
유교 특히 중국의 예악사상(禮樂思想)이 아악의 완성을 촉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악을 재검토시켰다. 즉 송의 사(詞)의 대부분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해서 비판되었고 예외로 <수룡음(水龍吟)>, <하운봉(夏雲峰)>, <억취소(憶吹簫)>의 가사만이 초정(稍正)하다 해서 그 곡은 그대로 쓰고 원가사(元歌詞)를 버리고 <시경(詩經)>의 가사를 차용하였다. 이런 가사의 개변은 태종·세종·중종 때에 자주 발견된다. 예를 들면 중강조(中腔調)에다 <시경>의 녹명(鹿鳴)의 가사를 붙이는 따위이다.
조선 전기의 향악
[편집]朝鮮前期-鄕樂
조선 전기는 고려조의 음악을 습용(襲用)하였거나, 예를 들면 <대악후보(大樂後譜)>의
<한림별곡(翰林別曲)>, <쌍화점(雙花店)>, <진작(眞勺)>과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의 <풍입송(風入松)>, <야심사(夜深詞)> 또는 고려조의 음악에다가 신제가사(新製歌詞)를 붙이고 곡명을 바꾸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납씨가(納氏歌)>의 원곡은 <청산별곡>, <정동방곡>의 원곡은 <서경별곡>,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종 때에 <보태평>, <정대업>, <발상(發祥)>, <봉래의(鳳來儀- 前引子, 與民樂, 致和平, 醉豊享, 後引子의 모음곡)>, <봉황음(鳳凰吟)>, <만전춘(滿殿春)의 신악(新樂)>이 제정되고 <세종실록>에까지 그 악보가 기록된 사실이다.
보태평과 정대업
[편집]保太平-定大業
<보태평>은 선왕의 문덕(文德)을, <정대업>은 그 무공을 각각 한문으로 칭송한 것이고 음악은 고취악에 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정대업> 중의 화태(和泰)와 순응(順應)의 음악은 각각 고려 때의 <서경별곡>과 <만전춘>의 곡에서 차용된 것이다. <보태평> 11곡은 모두 임종궁(林鍾宮)의 평조(平調)이고, <정대업> 15곡은 모두 남려궁(南呂宮)의 계면조(界面調)이다.
원래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 때 연례(宴禮)에 연주되었는데, 세조 9년(1464)에 이르러 향악이 아악 대신에 종묘제향악으로 채용되었다. 이에 따라서 짧은 제향(祭享) 절차에 맞게 <정대업> 15곡이 <보태평>과 균일하게 11곡으로 감소되었고, 또 각 곡의 가사와 음악도 단축되었다. 그리고 <보태평>의 임종궁 평조와 <정대업>의 남려궁 계면조가 각각 황종궁(黃鍾宮)의 평조와 황종궁 계면조로 고쳐졌다.
이같이 개혁된 <보태평>과 <정대업>의 악보는 <세조실록>에 게재되었다. 이 개혁된 종묘악이 비록 후세에 그 리듬은 변개되었지만 조선 말까지 약 500년간 계속되었다.
발상
[편집]發祥
<발상> 11곡은 가사가 한문으로 되었고 그 음악도 당악같이 6음계로 되었는데, 이 고취곡(鼓吹曲)은 세조 때 폐용되었는지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민락
[편집]與民樂 한글이 1443년에 창제되었고, 1445년에는 조종(祖宗)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을 가영(歌詠)하고 후손에게 경천근민(敬天勤民)을 명심케 하는 <용비어천가> 125장을 한글로 지었고, <치화평(致和平)>과 <취풍형(醉豊享)>이라고 칭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치화평>과 <취풍형>이 각각 125장의 악보를 모두 기재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중에서 <치화평> 3기(三機)의 첫 16장과 졸장(卒章)만 연주하고, <취풍형>의 첫 8장과 졸장만 연주하였다. <대악후보>의 <치화평> 1·2기(機)의 경우에는 첫 3장만, 3기의 경우에는 첫 16장만 기보(記譜)되었고, <취풍형>의 경우도 첫 8장만 기보되었다. 이 <용비어천가>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125장 중에서 첫 4장과 종장만을 떼어서 가사를 중국계의 고취곡에 붙여서, 그것을 <여민락>이라고 칭하였다. <치화평>과 <취풍형>은 오늘날 연주되지 않고, <여민락>만은 비록 그 가사를 부르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관현합주로 연주된다. <봉황음(鳳凰吟)>(林鍾宮 平調)과 <만전춘(滿殿春)>(林鍾宮 界面調)은 <처용가(處容歌)>의 속된 가사를 묘정정악(廟廷正樂)의 것으로 개찬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악보
[편집]世宗實錄-樂譜
<보대평>, <정대업>, <발상>,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봉황음>, <만전춘> 등 세종 때 음악이 <세종실록> 제 136권-제147권에 악보를 남기고 있는데, 그 악보는 1행 32정간(井間)으로 되었고, 그 정간은 시간 단위를 표시하여, 그것이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최고(最古)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이고, 서양의 그것보다 약 2백년 늦다. 그 1행 32정간이 세조에 의하여 1행 16정간 2행으로 개서(改書)되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16정간이 대부분 20정간으로 변하여진 채로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 세종의 정간보는 기보법 사상 획기적인 것이다.
<세종실록> 악보에는 <회례악>, <제례악>, <보태평>, <정대
업>, <발상>, <봉래의>, <전인자>, <여민락>, <치화평>, <취풍 형>, <후인자>, <봉황음>, <만전춘> 기타 종묘사직 등의 제례악이 실려 있다.
세조실록의 악보
[편집]世祖實錄-樂譜
세조실록 48권-49권에 실린 악보이다. <세종실록> 악보는 1행 32정간이나 <세조실록> 악보는 1행 16정간으로 축소되었고, 3·2·3·3·2·3정간으로 갈라 6대강(六大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16정간 6대강법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세종실록>은 율자보로 되었으나 <세조실록>은 오음약보(五音略譜)로 되었고 당악에서 쓰던 공척보(工尺譜)를 병용하였다. <세조실록> 악보에는 <보태평>, <정대업> 등 종묘제례악과 원구제악이 실려 있다.
악학궤범
[편집]樂學軌範
조선 성종 때(1493) 성현이 주가 되어 찬술한 9권으로 된 종합악서이다. 이 악서는 제1권에 악(樂)의 원리, 제2권에 악기진설도설(樂器陳設圖說), 제3, 4, 5권에 정재도설(呈才圖說), 제6, 7권에 악기도설(樂器圖說), 제8, 9권에 의물(儀物), 관복도설(冠服圖說)을 자세히 기술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독립된 악서(樂書)이다. 물론 그 이전에 박연이 악서 찬집을 제의하였지만 실현치 못한 것 같고, <세종실록> 128권에 악기도설과 악현도가 일부 게재되었으나 <악학궤범>같이 전반적인 것이 못된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악사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악기가 파괴되었어도, 잿더미에서 구출된 <악학궤범>으로 인하여 악기를 제조하고, 음악의 고제(古制)를 복구할 수 있었다. 고악 복구에 불가결한 <악학궤범>은 초간 이후 광해군(光海君)·효종(孝宗)·영조(英祖), 1933년, 1968년 등 여러 번 복각(複刻)되었다.
조선 전기 음악의 특징
[편집]朝鮮前期音樂-特徵
조선 전반기에 세종은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에 자극되어, 악리(樂理)를 연구하였고 박연에게 율관(律管)을 제작시켰고, 유량악보를 발명하였고, 성종 때 성현은 <악학궤범> 같은 독립한 악서를 찬술하여 음악의 학문면에서 큰 발전을 보았다. 또 한편 음악 예술면에서는 유교의 예악(禮樂) 사상의 영향을 받아 아악이 중요시되어 아악서(雅樂署)가 독립하였고 당악과 향악의 남녀상열지사도 개산(改刪)되었고, 그 때 특히 향악은 유식한 한문의 가사를 많이 써서 그런 가사에 붙여진 음악도 점차 당악같이 담담해져 조선 전기의 향악은 조선의 백자에 비할 수 있게 되었다.
안상금보
[편집]선조 5년 안상이 편찬한 악보로 일명 <금합자보(琴合字譜)>라 한다. 편장 안상이 명종 16년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어 악사 홍선종(洪善終)·악공 허억봉(許億鳳)·이무금(李無金)과 함께 이 악보를 편찬하고 선조 5년에 책을 낸 것이다. 거문고의 오음약보·합자보 및 육보(肉譜)와 노래와 사설을 적고 피리의 오음약보 및 육보·장고악보를 곁들여서 총보(總譜)를 만들었다. 이 악보에는 <만대엽(慢大葉)>, <정석가(鄭石歌)>, <북전(北殿)>, <사모곡(思母曲)> 같은 고가요(古歌謠)가 실렸는데, 조선 후기에 크게 성했던 가곡의 실마리가 되는 <만대엽>, <북전>의 최고 악보로서 조선 전기음악과 후기음악을 비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 전형필(全瑩弼) 소장으로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었다.
시용향악보
[편집]時用鄕樂譜
임진란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저자를 알 수 없는 고판본(古版本) 악보. 6·25전쟁 후에 세상에 알려졌다. <세조실록> 악보와 같이 6대강 16정간에 오음약보로 되었다. 4행을 한 묶음으로 하여 제1행은 오음약보, 제2행은 장고의 악보, 제3행은 박(拍)의 악보, 제4행은 악곡의 사설을 적었다. 이 악보에는 <사모곡>, <서경별곡>, <청산별곡>,
<귀호곡(歸乎曲-가시리)> 등 많은 고려가요와 <납씨가> 등 조선 초기의 악가와 <성황반(城隍飯)>, <내당(內堂)>, <삼성대왕(三城大王)>, <대국(大國)> 등 10여곡의 무속가요가 있어서 고려 향악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악보의 발견으로 20여곡의 고가요가 새로 알려진 것이다. 원본은 이겸로(李謙魯)가 소장하고 있고 1954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본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