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음악사/조선 후기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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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음악[편집]

朝鮮後期-音樂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한국의 문화는 큰 시련을 당하여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의 음악도 이 때를 계기로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전기에 힘써 갖추어 놓았던 아악은 난리통에 흩어졌다. 후에 문물이 바로잡히자 아악을 재건하였으나, 규모는 훨씬 줄어들고 말았다. 조선 전기 음악에 많이 전하던 고려조의 향악과 송의 사악은 대부분 상실되었거나 변질되었다. 당악은 향악화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명맥을 유지한 <영산회상>, <보허자> 가곡(<만대엽>) 같은 악곡은 많은 변주곡을 낳아서 조선 후기의 향악곡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영산회상>은 방대한 기악 모음곡으로 되었고, 가곡·가사·시조는 많은 종류가 생겼다. 한편 영조 이후에는 서민문화의 대두에 따라 판소리·산조·잡가와 같은 민속음악이 생겨 민간에 유포되었다.

조선 후기의 아악[편집]

朝鮮後期-雅樂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두 차례의 외침을 받고 수도를 비웠던 까닭에 궁중음악은 조선 전기의 그것과 많이 달라졌다. 병자호란 후 국력이 피폐하여 전후 10년간을 종묘제향을 비롯한 모든 제향과 조정 의식에 음악이 빠졌다가, 겨우 인조 25년(1647) 정월의 종묘제향에 그전과 같이 음악이 사용되었을 정도였다.

인조 때의 제례 아악의 규모는 겨우 헌가(軒架) 22인, 등가(登歌) 20인으로, 성종 때의 헌가 124인 등가 64인에 비하면 극히 작고, 그 이후에도 그 이상 더 커지지 못하였다.

당악과 향악의 상호변화[편집]

唐樂-鄕樂-相互變化

당악도 세종 때의 <대악전보(大樂前譜)>에는 14곡이 기보되었지만, 조선 후기의 <속악원보(俗樂源譜)>에는 겨우 <보허자>와 <낙양춘> 2곡밖에 없고, 그 두 곡만이 당악으로 지금도 연주되고 있다. 그

<보허자>도 <대악후보>에는 1행 16정간으로 기보되었는데, <속악원보>에 이르러서는 1행 20정간으로 기보되어서, 리듬에서 변화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특히 <보허자>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원음(元音) 사이에 간음(間音)이 점점 들어가서, 당악인지 향악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지경으로 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 때만 하더라도 당악기는 서쪽에, 향악기는 동쪽에 따로 분리되어서 당악과 향악이 교대로 연주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당악기와 향악기의 합주로 되어 버려, 당악과 향악을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또 한편 향악도 <대악전보(大樂前譜)>에 실린 세종 때 된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봉황음(鳳凰吟)>, <만전춘(滿殿春)>은 물론 <대악후보>에 실린 <진작(眞勺)>, <이상곡(履想曲)>, <납씨가(納氏歌)>, <횡살문(橫殺門)>, <서경별곡>, <한림별곡(翰林別曲)>, <쌍화점(雙花店)>, <자하동(紫霞洞)> 등 많은 곡이 조선 후기에는 없어지고, 그 중에서 겨우 <감군은(感君恩)>, <만대엽(慢大葉)>, <북전>, <동동(動動)>, <정읍(井邑)>, <영산회상>이 남았다가, <감군은>, <만대엽>, <북전>은 조선 후기 늦게 없어져서 지금에 전하지 않고, <동동>, <정읍>, <영산회상> 등만 지금도 연주되는데, 그것도 <대악후보>의 곡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도록 변해 버렸다.

<보허자> 같은 당악이 원음에 간음을 추가하여 향악화한 것과 같이, 또 향악도 당악의 스타일로 접근하였다. 즉 <정대업(定大業)>의 혁정(赫整)은 원래 향악이어서, <대악후보>에서는 1정간(井間), 2정간, 3정간, 5정간같이 불규칙한 시가(時價)의 음으로 되었는데, <속악원보>에 이르러서는 균일하게 1정간의 음으로 되어, 그 음악은 중국 음악의 스타일에 가까워졌다. 또 <정읍>, 일명 <수제천(壽齊天)>도 당악의 <낙양춘>만큼이나 한음 한음을 느릿느릿한 템포로 연주하면서 향악에 독특한 꾸밈음(裝飾音)과 연음(連音)을 지녀서, 그전의 악보에서는 볼 수 없는 위엄을 새로 갖게 되었다.

이같이 조선 후기의 궁중에서는 향악도 중국 고전악같이 완서하고 위엄있게 연주하도록 정부가 신칙(申飭)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음악이 점점 빨라지는 데다가 가사도 해학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영산회상의 발달[편집]

靈山會相-發達

<영산회상>은 <대악후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의 노래로 무도에 쓰였다가 후에 <유예지(遊藝志)>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영산(中靈山), 잔령산, 가락더리 같은 본(本) 영산의 빠른 변주곡과 <영산회상>의 음악과 관계없는 삼현도드리, 하현(下弦), 염불, 타령, 군악(軍樂)이 추가되었고, 나중에는 더 빠른 가벼운 곡으로 계면(界面) 가락도드리, 양청(兩淸), 우조(羽調) 가락도드리가 끝에 달렸다. 이같이 선비들이 즐기는 <영산회상> 같은 실내악이 위엄으로 시작하였다가 정악(正樂)을 벗어나서 가벼운 농조(弄調)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곡의 발달[편집]

歌曲-發達

조선 전기의 <대악후보>와 안상의 <금합자보(琴合字譜)>에는 <만대엽(慢大葉)>만 보이지만, 임진란 후의 <양금신보(梁琴新譜)>에는 <만대엽> 외에 그보다 빠른 <중대엽>이 보다 많이 나오고,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의하면, 18세기 당시에 벌써 제일 느린 <만대엽>은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여 없어진 지 오래이고, 그보다 좀 빠른 <중한잎(中大葉)>도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당시에 통용된 것은 빠른 잦은한닢(삭대엽)뿐이었다. <유예지>에는 그 잦은한잎보다 더 빠르고, 가사가 해학적인 농(弄), 낙(樂), 편(編)이 끝에 달린다.

가사의 성쇠[편집]

歌詞-盛衰

가사로 말하면 1728년에 간행된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상사곡(相思曲, 相思別曲)>, <춘면곡(春眠曲)>, <권주가(勸酒歌)>, <백구사(白鷗詞)>, <길군악(軍樂)>,

<양양가(襄陽歌)>, <어부사>, <처사가>, <황계가(黃鷄歌)>, <매화가>, <관등가(觀燈歌)>, <귀거래(歸去來)>, <환산별곡(還山別曲)>, <낙빈가(樂貧歌)>, <강촌별곡(江村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의 16곡이 보이고 그 중에서 뒤에 있는 6곡을 잃고, 대신 <죽지사(竹枝詞)>와 <수양산가(首陽山歌)> 2곡을 얻어 모두 12곡이 전창(傳唱)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청구영언>에 벌써 잡가인 <백구사>와 <매화가>가 가사에 섞인 점이다.

시조의 발달[편집]

時調-發達

시조는 가곡인 삭대엽(數大葉)의 가사를 차용하나, 한수를 5장 대신 3장으로 나눈다. 시조의 악보는 서명응(徐命膺)의 <유예지(遊藝志)>와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보(歐邏鐵絲琴譜)>에 보여서, 시조는 영조조(英祖朝)의 이세춘(李世春)에서 나왔다는 말을 수긍케 한다. 후에 시조도 평시조(平時調) 외에 지름시조와 사설시조(辭說時調)를 파생한 것도 잦은한닢의 경우와 비슷하다.

판소리의 대두[편집]

-擡頭

이상은 상류층에서 애호된 음악들이고, 서민층에서는 판소리와 산조 같은 전혀 새로운 음악이 생겼다. 판소리는 광대가 부채를 들고 서서 그와 마주 않은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서 <춘향가> 같은 긴 이야기를 소리·아니리(白)·발림(科)으로 서술하여 관중을 울리고 웃기는 일종의 극음악(劇音樂)이다.

이 판소리는 <만화집(晩華集)>(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가사 <춘향가> 200구에 의하여, 늦어도 영조조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18세기의 판소리에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타령>,

<화용도(華容道)> 이외에 <배비장가)>, <옹고집>,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강릉매화가>, <무숙(武叔)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12가지가 있었다. 그 중 지금은 먼저 다섯가지만 전해진다(<오가전집>에서처럼). 이 판소리에 관한 중요한 문헌은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廣大歌)>이다.

가야금 산조의 성행[편집]

伽倻琴散調-盛行

가야금 산조는 가야금 독주곡으로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순서로 연주되고, 진양조는 우조(羽調)로 시작되어 계면조로 그친다. 이 가야금 산조는 광주(光州)의 아전인 김창조(金昌祖 또는 昌祚, 약 1865-1929)가 만들어냈다고 하며, 그 후 그의 제자 안기옥(安基玉), 한성기(韓成基)에 의하여 보급되었다. 이 기악 독주곡은 마치 판소리같이 감정을 충분히 표출하여 일반에 실감을 주어 애호되었다.

조선 후기 음악의 특징[편집]

朝鮮後期音樂-特徵

조선 후기 음악은 민간음악의 대두와 해학적인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한시(漢詩)에 대가 되는 우리말의 <청구영언>, <구운몽>에 대가 되는 향토색이 짙은 <춘향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그림에 대가 되는 단원(檀園) 김홍도 및 혜원(惠園) 신윤복의 풍속도의 특징과도 같다.

만대엽[편집]

慢大葉

<안상금보>, <양금신보> 등 조선 전기·중기 악보에 나타나는 옛 성악곡으로 <중대엽>과 더불어 가곡의 원류로 추정되는 악곡이다. 사설은 시조시(時調詩)로 되었고 가곡과 같이 5장으로 구분된다. 조선 초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옛 악보에는 장대엽·늦은한닢·진화엽(晋化葉)으로 보이며 <안상금보>에 처음 보이고 <유예지> 때에는 보이지 않는다.

중대엽[편집]

中大葉

<양금신보>, <유예지> 등 조선 중기 악보에 나타나는 옛 성악곡으로 조선 중기 <만대엽>에서 파생되어

<삭대엽> 즉 현존 가곡의 원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설은 시조시로 되었고, 평조·평조계면조·우조·우조계면조로 4조가 있었고 각 조마다 제1·제2·제3의 파생곡이 있었다. <양금신보>에서 처음 보이고 <서금보(西琴譜)>, <일사금보(一蓑琴譜)>에는 보이지 않는다. 중한닢이라고도 부른다.

북전[편집]

北殿

<안상금보>에서부터 <유예지> 등 조선 전후기 악보에 보이는 옛 성악곡. 고려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불리던 악곡이었으나 조선 말기에 끊어지고 말았다. 사설은 시조시를 얹어부르는 등 가곡과 비슷한 형태의 성악곡으로 가곡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곡이다. 평조·평조계면조·우조 등 여러조가 갖추어지기도 했다. 문헌에는 <후정화(後庭花)>, <후전(後殿)>으로도 보인다. <뒤전> 혹은 <대받침>으로도 부른다.

양금신보[편집]

梁琴新譜

광해군 2년(1610) 양덕수(梁德壽)가 엮은 거문고 판본 악보. 악사 양덕수가 임진란을 피하여 남원에 살았는데 거기서 예로부터 잘 알던 임실 현감 김두남(金斗南)을 만나 그의 권에 의하여 악보를 냈다. 6대강에 오음(五音-宮商角徵羽)·합자보·육보를 같이 적어서 알기 쉽게 엮었다. 내용은

<만대엽>, <북전>, <중대엽>, <감군은> 등 비교적 간략하나 <중대엽>은 4조(四調-平調 羽調 平調界面調 羽調界面調)를 갖춘 점에서 뒤에 없어진 중대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전기 음악과 후기 음악의 경과과정을 보여주는 악보이다. 이겸로(李謙魯) 소장으로, 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본이 나왔다.

현금동문유기[편집]

玄琴東文類記

광해군 12년(1620)에 이득윤(李得胤)이 엮은 거문고 악보. 이득윤이 광해군 때 벼슬을 그만두고 초야에 묻혀 지내며 엮은 것이다. 합자보로 되었고 정간법은 약하였다. 이 악보는 안상·조성(趙晟)·박근(朴謹) 등 여러 사람의 악보를 인용한 점이 특색이다. 이 악보에 실린 악곡은 <만대엽>, <북전>, <중대엽>, <삭대엽>으로 <양금신보>와 비슷하다. 이병기가 발견하여 이득윤 자필고본(自筆稿本)임을 밝혀냈다.

현금신증가령[편집]

玄琴新證假令

숙종 6년(1680) 신성(申晟)이 엮은 거문고 악보. 합자보와 육보를 함께 적었으나 정간법은 약했다. <만대엽>, <중대엽>, <북전>, <삭대엽>, <여민락>, <보허자> 등이 실렸는데, <중대엽>, <삭대엽>은 4조(四調-平調·羽調 平調界面調·羽調界面調)를 갖추었고 각각 제1·2·3곡이 나타나 있어서 <중대엽>과 <삭대엽>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혜구 소장이었으나 원본은 흩어지고 청사 등본이 국립국악원에 전한다.

백운암금보[편집]

白雲庵琴譜

숙종 무렵에 엮어진 편자 미상의 거문고와 퉁소악보. 육보에 합자보를 곁들였으나 정간법은 약하였다. 내용은 <중대엽>, <북전>, <감군은>, <만대엽> 단가(短歌)·<삭대엽>으로 <중대엽>과 <북전>의 비중을 크게 다루었고 보기 드문 단가 및 퉁소의 평조계면조 악보가 실려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이혜구 소장으로, 이 악보에 실린 단가 사설의 작자 백우암이 악보의 편자로 추정되어 <백운암금보>라 불리고 있다. <양금신보>와 <현금신증가령>과의 사이에 엮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악후보[편집]

大樂後譜

영조 35년(1763) 서명응 등이 왕명을 받고 <대악전보(大樂前譜)>와 <대악후보>로 편찬한 악보. <대악전보>는 세종조 악보를 모아 엮었다 하며 내용은 당악계 음악이 주가 되고, <대악후보>는 세조조 악보를 모아 엮었다 하며 내용은 <세조실록> 악보의 <보태평>, <정대업> 등 제례악보와 그 밖의 많은 <진작>, <만전춘>, <동동>, <정읍> 등 고려가요가 주가 되는 시용(時用)의 향악보이다. 전보는 당악계 음악의 귀중한 자료인데 조선 말기에 아깝게 망실되고 후보는 국립국악원에 전하여 향악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기보법은 <세조실록> 악보와 같이 6대강 정간법에 오음약보로 되었다.

속악원보[편집]

俗樂源譜

영·정조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편자 미상의 관찬 판본 악보. 6대강 정간법에 율자보로 되었다. 내용은 종묘·무안왕묘(武安王廟)·경모궁(景慕宮)의 제례악과

<여민락>, <낙양춘> 그리고 거문고·가야금·비파의 종묘제례악보와 방향보(方響譜)로 엮어졌다. 방향보는 9정간법을 썼다.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전한다.

유예지[편집]

遊藝志

서유구(徐有渠)의

저서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 가운데에 실린 악보. 대개 정조 무렵에 편찬된 것으로 추측된다. 서유구는 <대악전후보>를 엮어 바친 서명응의 손자이다. 거문고 악보는 육보에 합자보를 곁들였고, 양금(洋琴)악보는 율자보(律字譜)로 되었고, 생황(笙簧)악보는 수자보(數字譜)로 적었다. 내용은 <중대엽>, <삭대엽>, <농엽(弄葉)>, <우락(羽樂)>, <계락(界樂)>, <편수대엽(編數大葉)> 등 가곡 악보와 <영산회상>, <영산회상이층제지(靈山會上二層除

指)>, <세영 산>, <삼현회입(三絃回入)>, <염불타령>, <군악유입타령(軍樂流入打鈴)> 등 <영산회상> 악보를 실었고 양금보에 시조악보가 있다. 이 악보는 영조 이전의 음악과 고종 때의 음악을 비교연구하는 데 다리 구실을 하는 귀중한 악보이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었다.

구라철사금보[편집]

歐邏鐵絲琴譜

이규경(李圭景)이 순조 때 엮은 양금 악보. 양금은 조선 중기에 들어온 서양악기로, 이 악기로 된 악보로는 <구라철사금보>와 <유예지>의 양금 악보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양금 각현(各絃)과 거리가 먼 아악식인 12율순에 배율(配律)하여 적었기 때문에 해독이 불가능했던 것을 근년에 장사훈에 의하여 배율을 수정하여 이 악보를 해석했다. 내용은 <영산회상>, <하현환입>, 가곡·시조로 엮어졌다. 이병기 소장으로 되었다.

삼죽금보[편집]

三竹琴譜

고종 때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편자 미상의 악보. 책머리에는 경종 1년에 쓴 이승무(李升懋)서가 얹혀 있으나 악보 내용으로 봐서 고종 때 편찬된 이 악보에 이전부터 전해오는 이승무의 서문을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16정간에 육보로 적혀 있다. <영산회상>, <평조영산회상>, <군중취타>, <노군악(路軍樂)>, <가군악(家軍樂)>, <양청환입(兩淸還入)>, <삭대엽>, <소용>, <우롱>, <중대엽>, <상사별곡>의 무녀시조(巫女時調) 등을 포함하여 <영산회상> 가곡·가사 등 60여 곡이 매우 광범하게 실려 있다. 이 악보는 <유예지>와 현존 국악과 다리 구실을 하는 귀중한 악보이다.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