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음악사/현대 한국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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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음악[편집]

現代韓國音樂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물밀 듯이 밀려온 서구문화로 한국문화의 변화는 물론 한국인의 음악활동도 많이 변했다.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조선 왕조가 무너지니 왕실의 의식이 없어짐과 때를 같이하여 여기에 쓰이던 수천년 전통 음악이 설 자리를 잃었다. 왕의 거동이나 군대 행진에 쓰이던 취타(吹打)는 양음악 밴드(Band)의 행진곡으로 대치되었다. 사랑(舍廊)마다 울려나오던 풍류소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심신을 닦는 도로서 음악을 연주하던 풍류인들이 베토벤이나 브람스에 열중하게 되었다. 광장에서 판소리와 잡희(雜戱)를 즐기던 대중들은 유행가와 신파극(新派劇)에 귀를 기울였다. 게다가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정책으로 한국음악은 더욱 위축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한국 전통음악은 이왕직(李王職) 아악부(雅樂部)·원각사(圓覺社)와 협률사(協律社)에 이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에 이은 조선정악원(朝鮮正樂院)·기타 사설전수소(私設傳授所)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나갔다. 8·15광복과 함께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과 기타 여러 창극단체(唱劇團體) 등을 통하여 한국음악 재건운동이 일어났으나, 나라가 어수선하고 6·25가 겹친 데다가 일반국민의 이해부족으로 옛날의 성세(盛勢)로 돌이킬 수는 없었다. 휴전 이후, 일부 국민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차차 높아지고 정부의 지원이 있게 되면서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국악사양성소(國樂師養成所)·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국악예술학교·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등 정규 국악교육기관이 차례로 생겨서 신인들을 배출하고 있다. 새로운 학문을 닦은 신인들이 연주·창작·연구·교육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음악은 어느 면에서는 밝은 전망이 보인다. 그러나 한편 판소리·십이가사·십이잡가 같은 특수분야는 신인들의 진출이 많지 않아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요구되고 있다. 한국음악을 연구하는 학술단체로 한국국악학회(韓國國樂學會)가 활약해 왔다.

<成 慶 麟>

이왕직 아악부[편집]

李王職雅樂部

광무 원년(光武 元年, 1897)에 종래의 장악원(掌樂院)을 교방사(敎坊司)로 개칭하고 제조(提調) 이하 772인의 인원을 두었으며, 융희 원년(隆熙元年, 1907)에는 교방사를 장악과(掌樂課)로 고쳐서 궁내부(宮內部) 예식과(禮式課)에 부속시키고, 국악사장(國樂師長) 이하 305인의 인원을 두고, 김종남(金宗南)이 초대 국악사장이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장악과는 아악대(雅樂隊)로 바뀌고 아악사장 이하 189인의 인원으로 줄었다. 이 중에는 양악군악대에 밀려서 시종원(侍從院) 부속 구 군악수(軍樂手)인 취고수(吹鼓手)들이 일부 편입되어 있었다. 그 뒤 인원을 84명으로 줄이고, 다시 57명으로 줄였다. 1917년에는 아악생 양성소를 두어 제1기생 9명(뒤에 18명)을 모집하여 수업연한을 3년(뒤에 5년)으로 하고 음악실기·음악이론·일반학과를 수업하였다. 1920년 일본 음악학자 다나베(田邊尙雄)의 건의로 1922년에는 당국의 보다 나은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25년에는 아악대에서 아악부(雅樂部)로 명칭을 고치고 당주동(唐珠洞) 청사에서 운니동(雲泥洞)으로 옮겼으며, 광복 직전까지 종묘·문묘 제향에 제례악을 연주하고, 아악생 양성·아악 방송·악서 및 악보 편찬·악기 제작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제1대 국악사장에 김종남, 제2대 국악사장 이남희(李南熙), 제3대 아악사장 함재운(咸在韻), 제4대 국악사장 명완벽(明完璧), 제5대 아악사장 김영제, 제6대 아악사장 함화진(咸和鎭)이 역임하였다. 이왕직 아악부의 전통은 현 국립국악원이 이어받고 있다.

조선 정악원[편집]

朝鮮正樂院

음률을 즐기는 대갓집 사랑에는 율방(律房) 또는 풍류방(風流房)이라 하여 영산회상·가곡 등 정악 계통 음악을 연주 및 전수하는 사설 음악실이 있었다. 이러한 율방의 제도를 확대하여 1905년 9월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가 조직되었다. 정악의 연주도 하였지만 주로 정악의 전수에 주력하였다. 당시 교사진용은 가곡에 하규일(河圭一), 하순일(河順一), 거문고에 김경남(金景南), 가야금에 명완벽(明完璧), 함화진(咸和鎭), 양금에 김상순(金相淳), 생황에 한진구(韓鎭九), 단소에 조동석(趙東錫) 등이 이름난 대가들이었고, 서양음악에는 김인식(金仁湜)이었다. 1911년 조양구락부는 정악원(正樂院)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체하여 조선정악원 혹은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라 부르게 되었다.

창극[편집]

唱劇

여러 가객들이 무대에서 연기를 하며 판소리조로 연행하는 극의 한 분야. 조선 말기에 원각사(圓覺社)라는 국립극장이 생겨 판소리 가객들이 배역을 분담하여 판소리를 공연했던 데서부터 창극이란 용어가 비롯되며 그 후 각본도 새로 쓰고 곡조도 새로 붙인 창작 창극이 나왔다. 원각사 때에는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 등 수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춘향가>·<심청가>·<최병도타령> 등 여러 창극을 공연하였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1907년 경에는 김창환이 협률사(協律社)를 조직하였으며, 송만갑 또한 서울에서 협률사를 조직하였다. 이 두 협률사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고, 1910년대 중반에서 단성사·장안사·연흥사와 같은 극장이 생겨 송만갑·이동백·김창룡(金昌龍) 등이 장안사와 연흥사에서 창극을 공연하였고, 광주에서도 협률사가 조직되었다. 1920년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여러 창극단이 명멸하다가 1933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가 발족되어 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丁貞烈)·한성준(韓成俊)·오태석(吳太石)·김연수(金演洙)·박녹주(朴錄珠)·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 등 수많은 명창이 활동하였는데, 1935년에 동양극장에서 '춘향전'을 공연하여 크게 성공한 이래 <심청전>·<흥보전> 등 많은 창극을 공연하여 창극의 극성기를 이루었으나 1937년에 해산되었다. 1930년대 말에는 화랑극단·동일창극단이 있었고, 1940년 중반에는 쇠퇴하였다가 1945년에 서울에서 대한국악원이 조직되었고, 1946년에 대한국악원 창극부에서 대춘향전을 공연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1947년에는 김연수창극단·임방울(林芳蔚) 일행국극사(國劇社)·국극협회(國劇協會) 등이 있었으며, 김연수창극단에서 <장화홍련전>· <선화공주> 등을, 국극사에서는 <서동요>를, 국극협회에서는

<만리장성>, 조선창극단에서는 <호동왕자>, 김연수창극단에서

<사육신>을 공연하였고, 1948년에는 여류명창들로 구성된 여성 국악동우회가 <옥중화와 해님달님>을 공연하여 인기를 끌자 기성 창극단들은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6·25 당시 여성 국극단이 난립하자 1950년 중반에는 창극이 쇠퇴하고 말았다. 1961년 국립극장이 생기고 창극 대춘향전이 공연되어 성공하였고 이어서 국립극장 창극단이 창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극은 판소리 선율로 짜여지며 흔히 국악관현악 반주가 딸린다.

원각사[편집]

圓覺社

1907년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국립극장으로, 창극(唱劇)이 주가 되고 잡가(雜歌)와 잡희(雜戱)도 공연한 상설극장이다. 판소리는 원래 고수의 북장단에 소리하던 독창이었으나, 원각사 시절에 약간의 무대장치로 배역마다 여러 인물이 출연하여 연기하며 분창(分唱)하는 창극이 처음 시작된 것이다. <춘향가>·<심청가> 등이 창극화되고, <귀의 성(鬼-聲)>· <치악산(雉岳山)> 등 신소설(新小說)이 극화되어 상연되었다.

창극에는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이화중선(李花中仙) 등 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출연하였고, 경서도창(京西道唱)과 재담에는 박춘재(朴春載)·문영수(文泳洙) 등이 출연하였다. 원각사는 3년이 못되어 해산되고, 협률사(協律社)·장안사(長安社)·연흥사(延興社)·광월단(光月團) 등이 조직되어 광무대(光武臺)를 중심으로 지방공연에 주력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편집]

朝鮮聲樂硏究會

원각사가 해산된 뒤에 여러 창극단체들이 명멸하였으나, 일제의 탄압 아래 활동이 저조하여 새로이 통합하여 재기의 길을 모색하였으니, 이것이 1933년에 조직된 조선성악연구회이다.

이 연구회는 후진양성과 창극운동에 주력하였는데, 당시의 진용은 판소리에 송만갑·김창룡·이동백·정정열·임방울(林芳蔚)·김연수(金演洙)·강장원(姜章沅)·김초향(金楚香)·박녹주(朴綠株)·김소희(金素姬) 등이었고, 기악에 강태홍(姜太弘)·박종기(朴鍾基)·신쾌동(申快童) 등이었다. 이 당시 상연된 창극은 <춘향가>·<심청가>·<수궁가>·<홍보가> 등 판소리를 창극화한 것, <배비장가>·<장화홍련전>·<숙영낭자> 등 고본(古本)을 창극화한 것이었다.

조선악부[편집]

朝鮮樂部

1940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관장 아래 조선악부가 설립되었다. 부장이사에 함화진, 상무이사에 박헌봉(朴憲鳳)이 역임하여 주로 창극과 가무로 지방공연을 하였으나 관헌의 간섭이 심하여 애로가 많았다.

대한국악원[편집]

大韓國樂院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에 국악인의 연합으로 민간단체인 국악원(國樂院)을 조직하였다. 원장에 함화진, 부원장에 박헌봉이 취임하고, 총무국·사무국·문화국 등 여러 부서를 두었다. 문화국에는 아악부·정악부·창악부·무용부 등 여러 부서를 두었다. 1946년에는 <대춘향전>·농악경연대회, 1947년에는 <대심청전>을 공연하였다. 1947년에는 원장에 박헌봉이 취임하고 부서도 바뀌었으며, 주로 창극운동에 주력했다. 1953년에는 대한국악원으로 개칭했다.

국립국악원[편집]

國立國樂院

1951년에 문교부 관할로 설립되었다. 국립국악원은 구왕궁 아악부(舊王宮雅樂部)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구왕궁 아악부는 근세조선 장악원(掌樂院)의 후신인 일제 때의 이왕직 아악부가 8·15광복 후에 개칭된 이름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때의 음성서(音聲署), 고려 때의 대악서(大樂署)에 연원을 두고 있다. 초대 원장에는 이주환(李株煥), 악사장(樂士長)에 성경린이었다. 현재 국립국악원에는 국악감상을 위한 연주실과 악기 진열실이 설치되어 있다. 연주는 정기 또는 수시로 연주되고 있으며 해외공연을 통해 우리의 전통음악과 무용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다. 국내 유일의 국악 전용 극장인 예악당(대극장)과 우면당(소극장), 음악사에서 가치가 있는 국악 관련 자료를 수집해 전시해 놓은 국악박물관 따위를 갖추고 있다.

국악고등학교[편집]

國樂高等學校

1955년 4월 1일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라는 이름으로 발족하였는데, 1972년 9월에는 대통령령 제6792호에 의해 국악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초대 교장에는 성경린, 매학년 1학급이던 것이 1974년 11월 23일자로 매학년 2학급 120명에 총학생수가 360명으로 증원되었다. 이들은 일반학 과목을 70%, 전공분야의 교과목인 악과를 30%의 비율로 이수하고 있다. 전공분야의 교과목으로는 '피리', '대금', '해금', '거문고', '가야금', '무용' 등 여섯 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하게 되며, 그 밖에 여러 가지 성악부문과 국악의 기초이론과 서양음악 기초이론, 실기 등을 익히고 있다. 그동안 많은 국악인을 배출하여 민족음악 정립에 헌신하고 있다.

국악의 대학교육[편집]

國樂-大學敎育

한국 최초의 대학정규 국악과가 1954년 덕성여자대학에 창설되었다. 주임교수에 장사훈(張師勛)이 취임했으며, 한국 최초로 제1회 전국남녀 중·고등·대학 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국악 보급에 공이 컸으나 2년 만에 폐과되었다.

덕성여대에 이어 1959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가 신설되어 50명의 신입생을 모집했다. 초대 국악과장에는 이혜구(李惠求)가 취임했다. 거문고·가야금·대금 등의 기악전공과 음악이론·작곡 등의 전공으로 분류되었다. 1963년에는 대학원에 국악과가 신설되어 대학원생 2명을 모집했다. 그 밖에 국악과가 있는 대학으로는 한양대 음악대학, 이화여대 음악대학, 4년제 대학과정의 추계예술학교 등이 있다.

국악예술학교[편집]

國樂藝術學校

민속음악이 중심이 되어 1960년 사립학원으로 한국국악예술학교가 설립되었다. 초대 교장에 박헌봉(朴憲鳳)이 취임했다. 중등부 3년, 고등부 3년으로 민속음악과 정악을 주로 전수하고 있었는데 현재 중등부는 폐지되고 고등부만 남아 있다. 교사는 석관동에 자리잡았다.

문묘제례악의 현황[편집]

文廟祭禮樂-現況

한일합방 후에 문묘제향은 엄수되었고 광복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원래 문묘제례악은 장악원(掌樂院) 좌방(左坊)의 전담으로 이른바 악생(樂生)들이 연주하였다.

한일합방 후에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아악수가 파송되어 연주하였으며, 광복 후 현재까지는 국립국악원 악사들이 1년에 두 차례 봄가을 석전일(釋尊日)에 파송되어 제례악과 일무(佾舞)를 아뢰어 왔다. 중국 상고시대 음악에 기원을 두는 것으로 고려 예종 때 들어와서 조선 세종 때 정비된 수천 년의 역사를 갖는 문묘제례악은 동양에서 가장 오랜 음률이다. 집사악사(執事樂士) 1인, 등가(登歌), 헌가(軒架) 집박(執拍) 2인, 차비악수(差備樂手)로 등가 헌가에 각 18인 외에 일무로 8일무, 64인의 무원이 동원된다.

종묘제례악의 현황[편집]

宗廟祭禮樂-現況

종묘제향은 연5향(年五享)이었다가 한일합방 후 1911년에는 1월, 4월, 7월, 10월의 연4향으로 줄었으나 광복 직전까지 엄수되었다. 음악과 일무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전담하였다. 구성인원은 집사아악사(執事雅樂師) 1인, 집박아악수장(執拍雅樂手長) 2인, 가(歌)아악수장 4인, 차비아악수(差備雅樂手) 2인, 일무아악수(佾舞雅樂手) 36인이었다.

광복 후에 종묘제향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에서 주관하여 연2향으로 계속되었으나 제례악은 쓰지 못하고 있다가 1970년부터 국립국악원 국악사들이 파송되어 종묘제향을 아뢰었다. 일무는 8일무를 추고 있다. 근세조선 세종 때 고취악과 향악을 토대로 제작된 종묘제례악은 세조 때 쓰기 시작하여 5백년 역사를 가지고 장악원·이왕직 아악부·국립국악원을 통하여 전해졌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1964년 12월에 지정되었다. 현재 종묘제향은 5월 첫 일요일에 연 1회 봉행하고 있다.

연례악의 현황[편집]

宴禮樂-現況

한일합방으로 근세조선 왕조가 무너짐과 동시에 왕실의 제반 연례의식에 쓰이던 음악은 폐용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왕직 아악부에서 연주행동과 아악생 양성을 통하여 광복되기까지 전해 왔고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전해 와서 순음악으로 보존되고 있고 음악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국악고등학교·서울대학교 국악과·이화여대 국악과·한양대학교 국악과와 서울시립 국악 관현악단에서도 순음악으로 연주하고 있다.

정악의 현황[편집]

正樂-現況

예전에 대갓집 사랑에서 성행하던 이른바 율방(律房)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와 이왕직 아악부에서 명맥을 이어왔다.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서울대학교 국악과 등 각급 학교 및 사설학원에서 전해지고 있다. 영산회상에 뛰어났던 명금(名琴) 이병문(李柄文)의 거문고 수법은 이수경(李壽卿)을 거쳐 장사훈(張師勛)으로 전해져 왔고 여민락의 선금(善琴)이었던 함재운(咸在韻)의 거문고 수법은 함화진(咸和鎭), 장인식(張寅湜), 성경린(成慶麟)으로 전해져 왔고, 가곡 반주에 뛰어났던 김경남(金景南)의 거문고 전통은 임석윤이 이어받았으나 그의 사망으로 단절되었다.

함제홍(咸濟弘)·최학봉(崔鶴鳳)·정약대(鄭若大)·함재영 등 대금 명인의 전통은 근세 젓대의 명인 김계선(金桂善)을 거쳐 김성진(金星振)이 이어받았다. 김수장(金壽長)·김천택·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등의 가곡 전통은 하준권(河俊權)·하순일(河順一)·하규일(河圭一)·이병성(李炳星)·이주환(李株煥)을 거쳐 전효준(田孝準)·홍원기(洪元基)·김월하(金月荷)에게, 하규일·임기준(林基俊) 등의 가사 전통은 이병성·이주환을 거쳐 이양교(李良敎)·정경태(鄭坰兌)가 이어받았다.

판소리의 현황[편집]

-現況

송흥록(宋興綠)에서 비롯된 동편제(東便制) 소리는 박만순(朴萬順)·송우룡(宋雨龍)·김세종(金世宗)·정춘풍(鄭春風)·김찬업(金贊業)을 거쳐 박기홍(朴基洪)·전도성(全道成)·이선유(李善有)·유성준(劉成俊)에 이르렀으나 오늘날 순수한 동편제 소리는 끊어졌다. 송흥록의 종손 송만갑(宋萬甲)은 동편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편제 정창업(丁昌業)의 소리제를 도입하고 자기 창제(唱制)를 개발하여 별입하였다. 송만갑의 제자로는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김정문(金正文)·박봉래(朴鳳來)가 있었으나 모두 송만갑 생전에 타계하였고 박녹주(朴綠株)가 김정문의 소리를, 박봉술이 박봉래의 소리를 이어받고 있다.

박유전(朴裕全)에서 비롯된 서편제(西便制) 소리는 이날치(李捺致)·정창업을 거쳐 김채만(金采萬)·김창환(金昌煥)에게 전해졌으나 순수한 서편제 소리는 듣기 어렵다. 김채만의 제자 공창식(孔昌植)의 전통을 임방울(林芳蔚)이 이어받았으나 제자없이 타계했고 한승호(韓承鎬)가 김채만의 소리를 약간 보유하고 있다. 정정렬(丁貞烈)은 정창업의 제자로 서편제 소리를 이어받았으나 전도성·박기홍의 영향으로 동편제 소리를 받아 자기류(自己流)로 별립했다.

정정렬의 소리는 김여란(金如蘭)·김연수(金演洙)·김소희(金素姬)가 전하였다. 박유전의 심청가는 정재근(鄭在根)·정응민(鄭應珉)을 거쳐 정권진(鄭權鎭)이 이어받았다. 염계달(廉季達)·고소관(高素寬)·김성옥(金成玉)에게서 비롯된 중고제 소리는 김정근(金正根)·김석창(金碩昌)을 거쳐 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으로 내려와 강장원(姜章沅)에게 이르렀으나 중고제 소리는 끊어져 버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판소리의 곡목별 예능보유자는 다음과 같다.

춘향가에 김여란(金如蘭)·김소희, 심청가에 정권진(鄭權鎭), 흥보가에 박녹주(朴綠株), 수궁가(守宮歌)에 정광수(丁光秀)·박초월(朴初月), 적벽가(赤壁歌)에 박봉술(朴奉述)·박동진(朴東鎭)·한승호(韓承鎬), 그리고 판소리의 고수로 김명환(金命煥)이 지정되어 있다.

산조의 현황[편집]

散調-現況

김창조(金昌祖)·한숙구에서 비롯됐다는 가야금 산조는 여러 유파로 갈라졌다. 한성기(韓成基)류는 김죽파(金竹坡)가, 최망둥류는 함동정월(咸洞庭月)이, 안기옥류는 정남희를 거쳐 김윤덕(金允德)이 계승하였다. 강태홍(姜太弘)류는 원옥화(元玉花)가, 박상근류는 성금연(成錦鳶)이 이어받고, 심상건(沈相健)류는 끊어졌다.

백낙준(白樂俊)에게서 비롯된 거문고 산조는 신쾌동(申快童)과 박석기(朴錫基)에게 전수됐는데 박석기는 제자 한갑득(韓甲得)에게 전하고 한갑득은 다시 김윤덕에게 전하였다. 신쾌동류는 많은 제자를 길러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1977년 타계하였다. 거문고 산조의 기능보유자로는 한갑득이 지정되고 있다. 피리 산조는 이충선(李忠善), 대금 산조에는 박종기(朴宗基)를 이어받은 한주환(韓周煥)을 거쳐 강백천(姜白川)·편재준·김만식·한범수(韓範洙) 등이 있다.

해금 산조는 지용구(池龍九)를 거쳐 지영희(池映熙)가 이어받고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까지 되었으나 지영희의 미주 이민으로 해제가 되었다.

잡가의 현황[편집]

雜歌-現況

추교신(秋敎信)·조기준(曺基俊)·박춘경(朴春景)의 경기잡가 소리는 박춘재(朴春載)·임기준(林基俊)을 거쳐 이창배(李昌培)·정득만(鄭得晩)·김순태(金順泰) 등이 이어받고 있다. 여악(女樂)으로는 일찍이 최정식(崔貞植)에게 사사한 안비취(安翡翠), 주수봉(朱壽奉)에게 사사한 묵계월(墨桂月), 그리고 이은주(李銀株) 3인이 1974년 중요무형문화재 경기잡가(민요)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각각 전수 장학생을 지도하였다. 한편 서도잡가 소리는 명창 장학선(張鶴仙)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타계한 뒤 김정연(金正淵)·오복녀(吳福女) 2인이 승계하여 또한 전수 장학생을 가르치었다.

한국국악학회[편집]

韓國國樂學會

한국음악의 음악학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회로서, 1948년 이혜구·성경린·장사훈의 발의(發意)로 한국국악학회 전신인 국악연구회(國樂硏究會)가 발족되었다. 이어서 제1회 정례 발표회를 가졌다.

1964년에 한국국악학회는 사단법인체로 인가 등록되고 회장에 이혜구, 이사에 성경린·김성태·정호근·장사훈(상임), 감사에 이주환·이상만이 피임되었다. 1972년까지 200여회 연구발표회를 가졌고, <한국음악연구>라는 학술지를 2회 발간했다. 또한 100여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10여권의 학술서적 및 악보가 출판되었다.

국립창극단[편집]

國立唱劇團

국립중앙극장에 소속된 창극단, 1961년 정부조직법에 따라 만들어졌다. 1962년 국립극장에서 제1회 창단공연으로 창극 <춘향전>을 공연했으며. 이 때 함께 공연한 한국국악협회 회원들이 그 주체가 되었다. 그 후로 <심청전>, <흥보전>, <배비장전> 따위를 정기 공연하면서 창극을 일반인에게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973년부터는 단원들이 전원 유급제가 되고, 1974년에는 국립극장이 남산에 세워지면서 판소리 보급과 창극 공연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 후로는 <수궁가>, <숙영낭자전>을 비롯해서 앞서 공연한 작품을 반복해서 공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판소리 보급을 위한 강의와 감상회를 열고 있으며, 해외 공연도 시기와 기간을 정해 놓고 꾸준히 하고 있다→국립극장.

한국음악의 연구활동[편집]

韓國音樂-硏究活動

한국국악학회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에 대한 연구활동이 계속되었다. 이혜구(李惠求)는 1940년대 <양금신보의 사조(梁琴新譜 四調)>를 발표한 이래 많은 논문을 내었고 논문집 <한국음악연구>와 <한국음악서설>, <한국음악논총>을 내었다.

장사훈(張師勛)은 <보허자고(步虛子考)>를 비롯하여 많은 논문을 내었고 논문집 <국악논고>·<한국전통음악의 연구>·<한국악기대관>·<국악총론>·<한국음악사>·<전통무용의 연구>를 내었다. 그 밖에도 함화진(咸和鎭)의 <조선음악통론>, 성경린(成慶麟)의 <조선음악독본>·<조선의 아악>·<국악감상>·<한국음악논고>·<한국의 무용>, 김기수(金琪洙)의 <국악입문>, 박헌봉(朴憲鳳)의 <창악대강> 등의 저서가 있다.

한편 국립국악원이 주축이 되어 인출된 것으로 양악 5선보에 옮긴 <한국음악>이 제14집까지 나왔고 재래의 율자보(律字譜)에 의한 <한국음악선집>도 제5집까지 나왔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간행한 영인본(影印本) <속악원보>와 <대악후보>가 있고 양악 5선보에 채보한 이재숙(李在淑)의 <가야금산조>가 있다.

지금까지 활발한 연구활동을 한 사람으로는 황병기·권오성·한만영·이재숙·김정자·이성천·이병원·송방송·이보형·김길운 등이 있다.

한국음악의 창작[편집]

韓國音樂-創作

한국음악을 근대 관현악으로 처음 작곡한 사람은 김기수(金琪洙)이다. 그는 1942년에 연구작품 <세우영(細雨影)-4중주곡>의 발표를 시작으로 1951년 <고향소(顧鄕韶)>, 다음해에 <정백혼(精白魂)>, <송광복(頌光復)> 등을 작곡하였으며, 그 후 10여년 간 20여곡의 작품을 썼는데, 이 시기가 국악 작곡의 초기라 하겠으며 그의 작풍(作風)은 1960년대 이후 출현한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서 신국악 공모를 시작하면서 많은 젊은 작곡가들이 참여하여 입선작 및 연구발표작을 내놓았는데, 이들의 작품은 대개 전통한국음악에 바탕을 두고 현대적 기법과 연주법을 개발해 가면서 새로운 청중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강덕(李康德)은 합주곡 <새하늘>(1962년 작품)을 발표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그는 전통적인 선율과 장단 위에 새로운 양식을 구축했으며 특히 <가야금 협주곡 3번>은 그의 역작이다. 황병기(黃秉冀)는 1962년 가곡 <국화 옆에서>를 발표한 이래 독주곡과 합창곡을 많이 썼는데, 그의 특징은 가야금 독주곡에 있다.

황병기는 최초로 가야금 독주곡을 작곡했으며, 그의 작품 속에 흐르는 분위기는 전통에 바탕을 두고 현대적 감각을 살린 시적이고 표제적이며 회화적이다. <침향무(沈香舞)>(1974)는 가야금 음악의 세계성을 시도한 작품이고 초기 작품 <숲>(1963)은 빈번히 연주되어 신고전작품처럼 되었다.

이성천(李成天)은 1962년 <청성자진한잎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발표한 이후 가장 폭넓고 활발한 작곡활동을 보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아악의 정신적 깊이를 추구한 작품에서 음악적 기교와 섬세한 음감각은 물론 음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애정을 가지고 다루는 데에 있다.

그의 역작은 가야금 독주곡 <놀이터>(1966)와 <숲속의 이야기>(1967-1974) 두 개의 모음곡들이다. 그는 <놀이터>에서 최초로 가야금의 양손 사용법과 글리산도의 주법을 도입하여 가야금 음악에 색채적 기법을 더하였고, 불규칙한 복합박자를 사용했다. 또 <두음을 위한 5현금>에서 가야금 12현 중 7현을 안쓰고 두음과 5현으로 제한한 그의 태도는 극도로 자기를 구속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예술가적 고행에 들어선 것이다. 김용진(金溶鎭)은 1962년 합주곡 1번을 발표한 후 2번(1966), 4번(1967), 5번(1969) 등과 많은 중주곡, 독주곡을 썼다. 그의 작품은 전통음악의 깊은 음악적 흐름과 양식적 요소들을 찾아 자신의 감각으로 부각시키려는 데 특징이 있다.

그의 대표작은 역시 합주곡들이다. 조재선(趙在善)은 1963년에 합주곡 <합주> 다음에 <젓대를 위한 시나위>와 이어 <가얏고를 위한 시나위>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남도음악을 주제로 형식화시킨 작품이다. 이 음악은 1960년대에 가장 빈번히 연주된 합주곡으로 꼽을 수 있으며 1975년작 <원색(原色)의 율(律)>은 악기편성이나 배치가 동양 철학사상에 근거하고 있으며, 유율(有律)악기가 길게 뻗다가 끝을 밀어올리는 것과 무율(無律)악기의 끊임없는 간타음(間打音) 반복의 단순성에서 우주공간의 무한성을 느끼게 한다.

그 외 이해식(李海植)·이상규(李相奎)·김용만(金容萬)·박일훈(朴一薰) 등 젊은 30대들의 참신한 작품들이 발표되어 한국의 창작음악을 질적·양적으로 풍부하게 하고 있다. 또한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한 중진작가들인 정회갑·김달성·김흥교·이성재·강석희·백병동·박중후·서우석·이건용 등도 좋은 작품을 내놓았다. <成 慶 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