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 서양음악가/대중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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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편집]

손목인[편집]

孫牧人( ? -1998)

일제시대부터 활동하던 작곡가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켰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고복수의 <타향살이>를 비롯하여 김정구의 <바다의 교향시>, 김백희의 <아내의 노래>, 박단마의 <슈사인 보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히트곡을 만들었다.

반야월[편집]

가수 겸 작곡가이다. 가수로서의 진남 외에 반야월,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 금동선, 허구, 고향초, 옥단춘, 백구몽이라는 작가 예명을 갖고 있으나 본명은 박창오이다.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마상일기> 등을 노래해 히트시켰으며,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 고개>, <무너진 사랑탑> 등 5,000여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박시춘[편집]

국내 작곡가 중 가장 많은 전통가요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가요인으로서 김정구에 이어 두 번째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가거라 삼팔선>, <고향초>, <돌지 않는 풍차>, <물새 우는 강언덕>,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많은 히트곡이 있다.

이봉조[편집]

( ? -1987)

연주가 겸 작곡가. 색소폰 연주자로서 이름이 높다. <맨발의 청춘>, <안개>, <떠날 때는 말없이>, <팔도강산>, <보고 싶은 얼굴>, <좋아서 만났지요> 등의 많은 히트곡을 내었고 가수 정훈희와 함께 활동해 더욱 유명해졌다. 국내외 가요계 입상 경력이 많다.

김영광[편집]

나훈아가 부른 <사랑은 눈물의 씨앗>, 남진의 <울려고 내가 왔나>, 이수미의 <내 곁에 있어주>, 최진희의 <카페에서> 등 다수의 히트곡을 냈다.

길옥윤[편집]

吉屋潤(1927-1995)

평북 영변 출생. 본명은 최치정이다. 경성치과전문대(현 서울대 치대) 졸업 후 1950년 일본으로 건너가 전속밴드 '크루캐츠'를 조직해 일본 방송인 TBC, NHK 등에 출연하였다.

1966년 귀국하여 패티김이 부른 <4월이 가면>을 시작으로 수많은 곡을 히트시켰는데, 특히 패티김과 혜은이의 노래를 많이 히트시켰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재즈의 한국정착사>를 강연하였으며, 서울예대 교수, 한국음반 저작권 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건호[편집]

강원도 원주 출생. 70, 80년대 대표적 작곡가로 수많은 노래를 만들었으며, 시집도 다수 출간하였다. 대표곡으로

<당신도 울고 있네요>(김종찬), <빙글빙글>(나미), <그대 모습은 장미>(민해경), <그녀에게 전해주오>(소방차) 등이 있다.

가수[편집]

이난영[편집]

李蘭影 방송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일제시대에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가극단을 따라다니다 레코드사 사장의 눈에 띄거나 가요 콩쿠르에 입상하는 길밖에 없었다. 삼천리가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OK레코드사에 발탁된 이난영은 전자의 대표적 경우에 해당한다. 주요 곡으로 <목포의 눈물>, <해조곡> 등이 있다.

고복수[편집]

高福壽

이난영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으로 1933년 동아일보 후원으로 컬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 신인가수선발대회에서 입상한 후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손목인 작곡의 <타향살이>를 비롯하여 <풍년가>, <짝사랑> 등의 노래를 불렀다.

김정구[편집]

金貞九(1916-1998)

함경남도 원산 출생. 60여년 간 서민의 심금을 울려온 우리 가요계의 큰별이다. 17세 때 친형 김용환(金龍煥)이 작곡한 <어머니의 품으로>로 데뷔한 후

<인생의 봄>, <항구의 선술집>, <바다의 교향시>, <수박타령>,

<왕서방 연서>, <총각진정서>, <유쾌한 봄 편지> 등 7백여곡을 불러 1980년 가수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특히 일제시대인 1938년 망국의 한을 우리 민족 특유의 애조에 실어 발표한 <눈물젖은 두만강>은 전 국민이 사랑하는 노래로서 일제와 분단의 고통 속에서, 특히 실향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이 소줏잔을 기울이며 이 노래를 불렀고, 1985년 남북예술단 평양공연에서 이 노래를 불렀을 때는 북의 객석도 눈물바다가 됐다.

이미자[편집]

李美子(1941- )

'트롯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미자는 초등학교 시절 6·25전쟁이 터지자 예산에서 수용소생활을 했다. 미8군 쇼단에서 노래를 시작했고, 쇼단이 해체된 후 서울로 상경, HLKZ텔레비전 '예능 로터리'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1등을 수상하게 됐다. 그 뒤 작곡가 김성근에게 발탁되어, 1958년 <행여나 오시려나>, <미련에 우는 여인> 등을 발표했다.

이후 작곡가 나화랑에 의해 <열아홉 순정>, <집시의 여정>,

<워싱턴 블루스> 등을 출반했다. 1964년에는 <동백아가씨>를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시켰으나 당시 5·16 당국자들에 의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왜색가요'로 분리되어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그 뒤에 발표한 <섬마을 선생>도 왜색가요 처분을 받았다.

1969년에는 <기러기 아빠>를 기점으로 1천곡 취입돌파를 했으며 해외공연도 자주 했다. 1970년에는 드라마 주제가 <아씨>로 인기정상을 차지했고 그 뒤 계속적인 음반활동을 펼쳐 나갔다.

남인수[편집]

소야곡의 1인자, 한국최고의 서정가수로 한세대를 풍미했다. 대표곡으로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무너진 사랑탑> 등이 있다.

한명숙[편집]

1961년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란샤쓰 사나이>를 불러 대히트시켰다. <노란샤쓰 사나이>는 동남아에도 진출하여, 외국에서 히트한 최초의 가요이다.

배호[편집]

'매혹의 저음가수'로 1971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 울어>, <안개낀 장충단 공원> 등이 히트하였다.

최희준[편집]

'찐빵', '학사가수'로 불린 서울법대 출신 가수이다. 1960년대 <하숙생>,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맨발의 청춘> 등의 히트곡이 있다.

패티김[편집]

1966년에 데뷔했다. <4월이 가면>, <초우>, <빛과 그림자>, <사랑이란 두 글자>, <서울의 찬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등 많은 곡을 히트시켰다.

특히 남편이었던 길옥윤의 노래를 많이 불렀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며, 국내 무대에도 자주 서고 있다.

남진[편집]

전남 목포 출생. 1966년 <울려고 내가 왔나>로 데뷔하여

<가슴 아프게>, <님과 함께>, <어머님>, <미워도 다시 한 번>, <우수>, <젊은 초원> 등 많은 곡을 히트시켰다. 미남가수로 젊은 여성팬들을 열광시켰으며, 나훈아와의 라이벌 대결은 장안의 화제였다.

나훈아[편집]

19세 때인 1966년 <사랑은 눈물의 씨앗>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1991년까지 1,620곡을 발표한 정상의 가수이다.

<님 그리워>, <너와 나의 고향>, <바보 같은 사나이> <무시로>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히트곡이 있다.

정훈희[편집]

1967년 데뷔하여 <강 건너 등불>, <풀꽃반지>, <무인도>, <안개>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작곡가 이봉조와 콤비로 가요계에서 크게 활약했다. 17세 소녀였던 1967년에 매력적인 목소리로 부른 <안개>는 전국적인 애창곡이 되었다.

문주란[편집]

1960년 어린나이로 데뷔하여 <동숙의 노래>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등 매혹의 저음가수로 인기를 끌었다. 히트곡으로 <공항대합실>, <공항의 이별> 등이 있다.

윤복희[편집]

폭발적인 가창력과 무대매너로 많은 인기를 얻었던 대형가수로 <여러분>이 대표곡이다.

김상희[편집]

1966년 <처음 데이트>로 데뷔한 이래 <대머리 총

각>, <울산 큰애기>, <단벌신사> 등의 히트곡을 냈다.

김추자[편집]

볼륨있는 창법과 화려한 율동으로 1969년 데뷔하여 많은 인기를 누렸다. 대표곡으로 <님은 먼 곳에>가 있다.

펄 시스터즈[편집]

배인순, 배인숙의 두 자매로 구성된 듀엣으로

신중현 곡 <비>, <첫사랑>, <커피 한잔> 등이 빅히트했다.

하춘화[편집]

1970년대 초 <잘했군 잘했어>로 스타덤에 오른 이래 <강원도아리랑>, <영암아리랑> 등 우리 가락을 살린 노래를 주로 불렀다.

조영남[편집]

서울대 성악과 재학시절 번안곡 <딜라일라>로 데뷔, <내고향 충청도>, <화개장터> 등의 히트곡을 냈다.

신중현[편집]

申重鉉(1943- )

서울 출생. 한국정서에 걸맞는록을 성립시킨 국내 대중음악계의 거목.

국내 대중음악계에 로큰롤이라는 새로운 음악사조를 정착시킨 그는 로커로서 스타 메이커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1963년 <빗속의 여인>, <내 속을 태우는구려>를 발표하면서 그룹 '에드 4' 활동을 펴 나갔다. 그 후 <미인>, <님은 먼 곳에>, <안개 속의 여인>, <석양> 등을 발표했다. 그룹 '애드 4' 이후 '덩키스', '골든 그레입스' 등의 그룹을 두루 거치면서 1974년에는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하여 보다 실험적인 록 활동을 해나갔다. 신중현은 또한 60년대 후반부터 김추자, 바니걸스, 펄 시스터즈, 장현, 박인수, 김정미, 임아영, 이정화, 인순이 등 굵직한 스타들을 키워냈다. 그러나 1975년 불어닥친 '대마초 사건'은 그의 음악활동에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왔다. 이후 신중현은 다시 '신중현과 뮤직파워'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1985년 <아름다운 강산>으로 재기에 성공했고 <비가 내리면>, <즐거워> 등의 곡을 발표했다. 또한 88년에는

<그 동안>, <겨울공원>을 발표했다.

박인희[편집]

1970년대 대표적 통기타 가수 중 하나로 방송인으로 재능을 떨쳤다. 대표곡으로 <목마와 숙녀>, <모닥불> 등이 있다.

이장희[편집]

1970년대 초 인기를 모았던 포크 1세대 스타로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 애와 나랑은> 등의 히트 곡을 냈다.

이은하[편집]

다이내믹한 보컬과 무대 매너로 1970년대 말 <밤 차>, <아리송해>,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 등을 히트시켰다.

조동진[편집]

(1947- )

포크1세대 싱어송라이터. 1972년 <작은 배>로 데뷔하여 <겨울비>, <나뭇잎 사이로>, <제비꽃>, <행복한 사람> 등의 노래를 불렀다. 맑고 잔잔한 노래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다.

송창식[편집]

(1948- )

1968년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으로 데뷔하였다. 윤형주와 함께 '트윈폴리오' 활동을 하면서 많은 곡을 히트시켜 한국의 '사이몬과 가펑클'로 불렸다.

그 후 솔로로 독립하여 의욕적인 활동을 펼쳐 한국적 정서를 살린 음악과 개성있는 가창력으로 인기를 모았다. 주요 곡으로

<고래사냥>, <그대 있음에>, <날이 갈수록>, <사랑이야>, <상아의 노래>, <슬픈 얼굴 짖지 말아요>, <피리부는 사나이>, <우리는>, <푸르른 날>, <하얀 손수건>, <가나다라> 등이 있다.

현철[편집]

(1948- )

1969년 <무정한 그대>로 데뷔하여 활동하다가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다 1984년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으로 재기하여 현재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 주요 노래로

<내마음 별과 같이>, <못난 내 청춘>, <봉선화 연정>, <사랑은 나비인가 봐>,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싫다 싫어> 등이 있다.

김정호[편집]

애조 띤 음색에 우수 어린 노래로 1970년대 중반 정상의 인기를 누렸으나, 폐병으로 요절했다. <하얀나비>, <꽃잎>,

<이름모를 소녀> 등이 히트했다.

김민기[편집]

金敏基(1951- )

전북 이리 출생. 서울대 미학과에 재학 중 '도비두'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노래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재동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을 만나게 되면서 <아침이슬> 주게 됐고 1970년에 발표됐다. 1972년에는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 등을 부르다 경찰서에 연행됐으며, 그의 앨범 및 노래는 모두 방송금지 조치됐다. 이후 김민기는 시인 김지하와 조우하게 됐고 야학활동을 벌여나가기도 했다.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노동자들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던 그는 국악인들과 교유하여 다음해 <아구>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1977년 군 제대 이후 양희은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을 발표했고, 동일방직 노조문제를 다룬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발표했으나 이 노래 역시 비운을 겪었다. 1980년에는 문화체육관에서 7년의 긴 공백을 깨고 공연을 펼쳤고 1983년에는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가졌다. 1987년에는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고, 1990년대에 들어와 학전 소극장을 개관한 그는 1993년 22년 만에 독집앨범을 발표했고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의 곡 <아침이슬>은 1970년대의 저항가요였지만

90년대까지 오면서 20여년 동안 그 민주정신을 이어갔다.

조용필[편집]

趙容弼(1950- )

경기도 화성 출생. 조용필은 한국 대중음악계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노래로써 국위선양을 한 대형가수이다. 1969년 록밴드 '에트킨즈'를 결성하여, 미군부대를 위문하며 많은 활동을 했다. 1971년 3인조 그룹 '김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한 뒤 당시 가요제인 선데이컵 팝그룹 경연대회에서 을 불러 최우수 가수왕상을 수상했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대히트시키며 명실상부한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그 해 대마초 사건으로 힘든 고비를 맞이했다.

1980년 <창밖의 여자>가 히트되면서 재기에 성공했고 이후

<한오백년>, <촛불>, <미워 미워 미워>, <고추잠자리>, <단발머리> 등 주옥 같은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1981년에는 국내 최초로 카네기홀에서 초청공연을 가졌으며, 1982년에는 일본문화방송 30주년 기념공연을 가졌다. NHK 리사이틀홀에서의 단독 출연과 6월 미국 11개 도시를 순회공연하는 등 의욕적인 해외공연 활동을 펼쳤다. 1980년부터 1994년까지 발표한 앨범 15장은 우리나라 현대 대중음악의 발자취를 보여준다. 조용필의 이러한 방대한 음악적 업적은 대중음악계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양희은[편집]

(1952- )

1971년 김민기의 곡 <아침이슬>로 데뷔하여 유명해졌다. 이후 맑고 고운 목소리로 70년대의 연인이라고 불리는 포크음악 시대의 대표적 여성스타로서 활동하였다. 의식과 깨달음을 전하는 노래를 많이 불러 대학가에서 사랑을 받았으며, 주요 곡으로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 <세노야>,

<아름다운 것들>, <아침이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작은 연못>, <하얀 목련>, <한계령> 등이 있다.

윤수일[편집]

1978년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스타가 된 뒤 1980년대 중반까지 <황홀한 고백>, <아파트> 등의 히트곡을 냈다.

정태춘[편집]

鄭泰春(1954- )

경기도 평택 출생. 정태춘은 중·고등학교 시절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음악적인 감각을 익혔다. 1978년 자작곡 <시인의 마을>, <촛불> 등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하였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하였으며, <촛불>로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을 수상하였다. 잔잔하면서도 철학이 담긴 시적인 노래를 부르던 정태춘은 1988년 이후 의식있는 노래를 부르며 대중집회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주요 곡으로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시인의 마을>, <애고 도솔천아>, <탁발승의 새벽노래>, <촛불> 등이 있다.

전영록[편집]

(1955- )

1974년 <애심>으로 데뷔하였다. 발라드한 노래로 젊은층, 특히 10대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주요 곡으로 <그대 우나봐>, <내 사랑 울보>,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애심>, <저녁놀>, <종이학> 등이 있다

심수봉[편집]

1977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그때 그 사람>으로 입상하여 데뷔하였다. 독특한 목소리와 창법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으며, 주요 곡으로 <그때 그 사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무궁화>, <미워요>, <사랑밖엔 난 몰라>, <여자이니까>,

<젊은 태양> 등이 있다.

김수희[편집]

(1953- )

1978년 <너무합니다>로 데뷔한 이후 많은 곡을 히트시키며 꾸준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주요 곡으로

<너무합니다>, <당신은 누구세요>, <멍에>, <못잊겠어요>, <지금은 가지 마세요>, <남행열차>, <애모> 등이 있다.

최성수[편집]

(1960- )

1986년 <남남>으로 데뷔하였다. 주요 곡으로 <동행>, <기쁜 우리 사랑은>, <남남>, <잊지 말아요>,

<풀잎 사랑>, <해후> 등이 있다.

이광조[편집]

(1952- )

1977년 <사랑의 바람>으로 데뷔하였다. 독특한 창법으로 사랑받은 이광조의 주요 곡으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세월 가면>, <연인이여>, <즐거운 인 생>, <오늘 같은 밤> 등이 있다.

구창모[편집]

(1954- )

1978년 TBC 해변가요제에서 <구름과

나>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룹 송골매의 싱어로서 활동하다가 솔로로 독립하였다. 주요 곡으로 <구름과 나>, <방황>, <슬픈 멜로디는 나를 울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외로워 외로워>, <희나리> 등이 있다.

혜은이[편집]

(1955- )

1976년 <당신은 모르실 거야>로 데뷔한 이후 길옥윤의 곡을 많이 부르며 사랑을 받았다. 귀여운 외모와 맑은 목소리가 특색이다. 주요 곡으로 <감수광>, <당신만을 사랑해>, <당신은 모르실거야>, <독백>, <파란나라>, <진짜 진짜 좋아해> 등이 있다.

김현식[편집]

(1956-1991)

1980년 그룹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봄여름가을겨울>로 데뷔한 이후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로서 활동했다. 야생마처럼 거친 목소리로 젊은층에게 큰 인기를 모았던 80년대 대표적 록 가수이다. 주요 곡으로 <골목길>, <비처럼 음악처럼>, <사랑했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내사랑 내 곁에> 등이 있다.

김수철[편집]

(1957- )

1978년 TBC 대학가요경연대회에서

<일곱색깔 무지개>로 데뷔하여 그룹 '작은거인'에서 기타와 보컬을 담당하였다. 가창력과 음악성이 뛰어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판소리를 비롯한 국악에도 관심을 가져 국악과 양악을 접맥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영화 <서편제>, <불림소리> 등으로 음악성을 더욱 인정받았다. 주요 곡으로 <내일>, <못다핀 꽃 한송이>, <변심>, <왜 모르시나>, <일곱색깔 무지개>, <젊은 그대> 등이 있다.

나미[편집]

(1957- )

1979년 <미운 정 고운 정>으로 데뷔한 이후 1980년대 초반 댄스뮤직 붐을 주도하였다. 주요 곡으로 <미운 정 고운 정>, <미움인지 그리움인지>, <슬픈 인연>, <빙글빙글>, <보이네> 등이 있다.

조덕배[편집]

(1958- )

1985년 <나의 옛날 이야기>로 데뷔하여 잔잔하고 애상적인 노래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주요 곡으로

<꿈에>,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 <나의 옛날 이야기>,

<너풀거리듯>,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 거야> 등이 있다.

노사연[편집]

1970년대 말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여성 스타로서 히트곡으로 <만남>, <돌고 돌아가는 길> 등이 있다.

신형원[편집]

(1958- )

1984년 <불씨>로 데뷔한 이후 맑은 목소리로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주제로 철학이 있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주요 곡으로 <개똥벌레>, <개밥의 도토리>, <불씨>,

<사람들>, <유리벽>, <터> 등이 있다.

이문세[편집]

(1959- )

1984년 <나는 행복한 사람>으로 데뷔한 이후 80년대 발라드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MC로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만능스타이다. 주요 곡으로 <광화문 연가>, <그녀의 웃음소리뿐>, <그대와 영원히>, <나는 행복한 사람>, <난 아직 모르잖아요>, <사랑이 지나가면>, <조조할인>, <파랑새>, <솔로예찬> 등이 있다.

주현미[편집]

(1961- )

1984년 <쌍쌍파티>로 데뷔한 이후 1985년 <비 내리는 영동교>로 독집앨범을 발표하였다. 특이한 창법으로 트롯계의 여왕으로 떠올랐다. 주요 곡으로 <눈물의 블루스>,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울면서 후회하네>, <짝사랑> 등이 있다.

유재하[편집]

(1962-1988)

1987년 <사랑하기 때문에>로 데뷔한 이후 음악성이 뛰어난 노래를 불렀다. 주요 곡으로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랑>, <지난 날> 등이 있다.

이선희[편집]

(1964- )

1984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혼성듀엣 '사막오장'의 멤버로 출연하여 로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뛰어난 가창력을 바탕으로 많은 곡을 불러 80년대를 풍미하였다. 주요 곡으로

<겨울 애상>, <나의 거리>, <나 항상 그대를>, <사랑이 지는 이 자리>, <아 옛날이여>, <알고 싶어요>, <한바탕 웃음으로>, <갈등> 등이 있다.

변진섭[편집]

(1966- )

1987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우리의 사랑이야기>로 금상을 수상한 이후 발라드한 노래를 꾸준히 발표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주요 곡으로 <너무 늦었잖아요>,

<너에게로 또다시>,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새들처럼>, <홀로 된다는 것>, <희망 사항>, <사랑이 필요한 거죠> 등이 있다.

박남정[편집]

(1966- )

1987년 <아 바람이여>로 데뷔하였다. 1980년대 초반 댄스뮤직의 선구자로서 한국의 마이클 잭슨으로 불렸다. 주요 곡으로 <널 그리며>, <사랑의 불시착>, <아 바람이여>, <안녕 그대여> 등이 있다.

신해철[편집]

그룹 '무한궤도'·'넥스트' 멤버로 활동하다 솔로로 전향했다. 히트곡으로 <재즈카페>, <안녕>, <날아라 병아리> 등이 있다.

김완선[편집]

(1969- )

1986년 <오늘밤>으로 데뷔한 이후 댄스뮤직으로 사랑받았다. 한국 댄스뮤직의 새 장을 연 김완선은 '한국의 마돈나'로 불렸다. 주요 곡으로 <지난 이야기>, <기분 좋은 날>, <나 홀로 뜰 앞에서>, <나 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

<리듬 속에 그 춤을>, <이젠 잊기로 해요>, <탤런트> 등이 있다.

신승훈[편집]

1990년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밀리언 셀러로 만들며 화려하게 데뷔한 발라드 스타이다. <보이지 않는 사랑>,

<널 사랑하니까>, <고개 숙인 너에게> 등 6개 앨범으로 통산 앨범 판매량 1,000만장을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김건모[편집]

1992년 <잠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데뷔하였다. 빼어난 가창력으로 <핑계>, <잘못된 만남>, <스피드> 등을 줄이어 히트시켰다. 3집 <잘못된 만남>은 단일 음반으로는 최다인 2백 80만장 이상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룹[편집]

라나에 로스포[편집]

1971년 <사랑해>로 선풍을 일으킨 혼성 듀엣이다.

산울림[편집]

김창완·김창훈·김창익 형제로 구성되었다. 1977년 <아니 벌써>로 데뷔한 이후 많은 명곡을 발표하였다. 70년대 말 파격적인 사운드와 스타일의 한국적 록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대표곡으로 <개구쟁이>, <산할아버지>, <꼬마야>,

<내게 사랑은 너무 써>, <독백>, <너의 의미>,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등이 있다.

송골매[편집]

배철수·구창모·이봉환·김정선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었다. 1979년 기존 '활주로' 멤버와 구창모가 합류하여 앨범 <산꼭대기 올라가>를 발표하면서 유명해졌다. 주요 곡으로

<모두 다 사랑하리>, <빗물>,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처음 본 순간>,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등이 있다.

배따라기[편집]

이혜민·노근식을 멤버로 1981년 연포가요제에서 <첫사랑은 다 그래요>로 입상한 이후 가요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요 곡으로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비오는 날엔>,

<비와 찻잔 사이>, <아빠와 크레파스> 등이 있다.

해바라기[편집]

이주호·유익종을 멤버로 1983년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데뷔하여 꾸준하게 좋은 노래를 발표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주요 곡으로 <갈 수 없는 나라>, <너>, <내 마음의 보석상자>, <모두가 사랑이에요>, <사랑으로>,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사랑의 시>,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등이 있다.

들국화[편집]

전인권·최성원·주찬권·허성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었으며, 1985년 <그것만이 내 세상>을 발표하면서 데뷔하였다. 전인권의 포효하는 목소리로 강렬한 이미지를 심은 80년대 간판 록 밴드이다.

주요 곡으로 <그것만이 내 세상>, <매일 그대와>, <사노라면>, <사랑일 뿐이야>, <행진> 등이 있다.

다섯손가락[편집]

임형순·이두헌·박강영·최태완·이우빈을 멤버로 1985년 <새벽기차>을 발표하면서 데뷔하였다. 주요 곡으로 <새벽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풍선> 등이 있다.

소방차[편집]

김태형·장원관·이상원으로 구성되었으며, 1987년 <그녀에게 전해주오>로 데뷔한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주요곡으로 <그녀에게 전해주오>, <사랑하고 싶어>, <어젯밤 이야 기>, <일급 비밀>, <하얀 바람> 등이 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편집]

진실한 삶의 노래를 만들어 널리 알리려는 노래 모임이다. 1984년 대학에서 노래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참여해 앨범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을 발표했고, 이 앨범 이름이 노래모임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7년 이후 노래를 통해 대중들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건전한 문제의식을 갖게 했으며, 노래집을 출간하거나 수많은 공연을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또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그 날이 오면>, <광야에서> 등을 담은 두 번째 앨범은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모으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동물원[편집]

김광석·유준열·김창기·박기영·최형규·이우성으로 구성되었으며 1988년 <거리에서>를 발표하면서 데뷔하였다. 주요 곡으로 <거리에서>, <변해가네>, <혜화동>,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편집]

1990년대 들어서서 대중음악계는 '서태지 신드롬'을 탄생시켰다. 서태지(1972- ), 이주노(1969- ), 양현석(1970- )으로 구성된 이 그룹은 90년대 청소년층의 음악을 대변하는 강력한 랩 댄스그룹이었다. 미디음악의 생성과 더불어 이들은 대중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그룹으로 급부상했으며,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닌 춤을 비롯해 작곡, 편곡, 연출에 이르는 음악 프로듀서로의 면모까지 보여 주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당시 국내에서는 생소했던 랩, 메탈, 솔 등 매우 독특한 음악을 표출하며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1992년 첫 앨범 <난 알아요>를 발표해 대중음악계의 총아로 대두했다. 이들의 음악장르는 이미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랩, 리믹스, 펑크록 등 유행을 타고 있던 시기였다. 이후 <환상 속의 그대>,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가 발표됐고 2집 <하여가>,

<죽음의 늪>, <수시아>, <너에게>, 3집 <발해를 꿈꾸며>, <교실 이데아>, <널 지우려 해>, <영원>, 4집 <시대유감>, <컴백 홈> 등 청소년층의 사이에서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96년 네 번째 앨범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이자 모든 곡을 만든 서태지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메탈그룹 '시나위' 출신으로, 자신의 음악관을 과감하게 전환해 랩 음악을 우리나라에 맞도록 만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격렬한 록 음악에 모순으로 가득찬 기성 세대와 사회 질서를 꼬집는 내용을 담아 1990년대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나아갈 바를 제시했다. 또한 서태지는 1998년 여름 컴백앨범을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