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 서양음악가/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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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돌[편집]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인 1881년에 일본에 유학한 최초의 양악 전공자이다. 귀국 후 양악식 악대(밴드) 지도자로서 군악대 설립을 도모하여 한반도 악대문화를 자주적으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며,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과 함게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당 핵심인물 중 한 사람으로 그 일로 삶을 마감하였다.

에케르트[편집]

Franz Eckert(1852-1916)

작곡가 겸 지휘자. 1852년 4월 5일 독일 슐레지엔주(州)의 재판관의 아들로 태어나 브로츨라프 드레스덴음악학교를 졸업, 육군 군악대에 들어가 병역의무를 마치자 곧 해군 군악대 대장으로 근무하였다. 이 때 주일 독일 공사 베버의 알선으로, 독일 해군성의 허가를 얻어 1879년 3월 일본에 초빙되오, 일본 해군 군악대의 교사로 취임했다.

그 후 3년간 음악취조소(音樂取調所)의 음악교사를 겸임하였고, 궁내성 아악과 전임교사가 되기도 했다. 22년 만에 귀국한 에케르트는 독일 황제로부터 프로이센 왕실 악장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1896년 민영환(閔泳煥)이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군악대의 창설을 상주(上奏)하자 에케르트를 초빙하기로 결정, 1901년 2월 27일 그의 도착과 함께 한국 최초의 대취주악단을 창설했다. 그는 우리 전통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가사나 민요를 연구, 그 테마에 의해 작곡한 작품도 많았다. 그는 또 백우용(白禹鏞)을 위시한 음악의 선구자들을 길러냈다. 1916년 8월 6일 65세를 일기로, 위암으로 회현동 객사에서 별세. 작품으로는 <태호선(太湖船)>, <중국 행진곡>, <일본 국가>, <구대한제국 애국가> 가 있고, 이 밖에 피아노곡, 실내악곡, 관악독주곡 등이 있다.

이상준[편집]

李尙俊(1884-1948)

황해도 재령(載寧) 출생. 김인식과 함께 양악 발전에 진력한 한국 최초의 작곡가.

12세에 피어슨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선교사로부터 오르간을 배웠다. 15세에 평양 대성학교에서 음악을 지도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으며, 1909년 24세의 나이로 조양구락부 조선악과에 들어가 국악을 전공하는 한편 김인식에게 서양음악을 배워 한국의 전래음악을 5선보에 채보하기도 했다.

1929년 <놀령, 방아타령> 외 16곡을 수록한 <조선속곡집(朝鮮俗曲集)>을 발행하고 이어 <신선속곡집(新選俗曲集)>을 출간하였다. 이는 한국 음악사상 최초의 채보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채보활동 외에 저술활동과 휘문·보성·진명·숙명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정악전습소를 창설하여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저서로 음악교재의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 <중등창가집>, <풍금독습>, <중등음악>, <최신창가집> 등을 냈고, 음악인을 위한 <보통 악전대요>를 출간했다. 그 외에 <조선나팔곡집>, <조선속곡집>, <신유행가곡집 1·2권>, <조선신구잡가> 등이 있다. 성악가 이해남(李海南)의 엄친이기도 한 그는 김인식·김형준과 함께 양악 수입기에서의 3대 공로자의 한 사람이다.

안확[편집]

安廓(1884-1946)

우리나라 근대음악사 기간(1860-1945년) 동안 음악정치사를 주도한 지배층의 아악계에 반대하여 일반 민중들이 좋아하는 민악을 새로운 민족음악으로 해석하여 부흥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30년 <조선>이라는 잡지에 <조선음악의 연구>라는 글을 실어, 도덕적이고 형식적인 궁정음악을 배격하고 민중음악을 취하여 조선음악의 진상을 볼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안확은 민악을 새롭게 부각시켜 민족음악의 지평을 확대한 근대음악 이론가이자 민족문화 비평가라 할 수 있다.

홍난파[편집]

洪蘭坡(1897-1941)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경기도 수원 출생. 본명은 영후(永厚). 14세에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15세 때 <샴페인 원무곡>을 연주하여 첫무대를 밟았다. 1912년 YWCA 중학부 졸업. 이어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를 나온 후 동전습소 교사로 있다가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업하고 도쿄고등음악학원을 졸업, 도쿄교향악단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약하다가 귀국, 독주회를 갖는 한편 <봉선화>를 작곡했다.

1922년 연악회를 창설하고 한국 최초의 음악지 <음악계>를 창간, 악단 발전에 힘썼으며, 1920년에는 단편집 <처녀혼>을, 1923년에는 장편소설 <폭풍이 지난 뒤>를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도 발휘했다. 중앙보육학교 교수와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하고, 1931년 도미, 셰로우드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이화여전과 경성보육학교에서 음악을 교수하는 한편 홍성유(洪盛裕)·이영세(李永世)와 '난파트리오(蘭坡 Trio)'를 조직하였다. 빅터레코드사 음악고문, 경성중앙방송국 양악 책임자로 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는 한편 1940년 동악단의 제1회 연주, 모차르트의 <주피터> 교향악 연주로 그 분야에 효시를 이루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민족의 노래가 된 <봉선화>를 위시하여 <조선동요 100곡집>, <조선가요 작곡집>, 바이올린곡으로 <여름밤의 별들>, <로맨스>, <애수의 조선>이 있고 관현악 모음곡과 독창 모음곡 <나그네의 마음>이 있다.

박태준[편집]

朴泰俊(1900-1986)

작곡가이자 합창지휘자. 대구 출생. 미국 웨스트민스터합창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1952년 우스터대학에서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음. 연세대 종교음악과를 창설하고 동 음악과 과장 및 음대 학장을 지냄. 1957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1960년엔 예술원 음악공로상을, 1962년엔 문화훈장을 받았고,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오빠 생각>, <동무 생각>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종교음악과 합창음악의 개척자.

채동선[편집]

蔡東鮮(1901-1953)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한 후, 베를린 슈테른센 콘세르바토리움에서 리하르트 하르처에게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테에게서 작곡을 배우고 1929년 귀국, 4회의 독주를 가졌다.

순수한 가곡 작곡에 전력하였으나 민족음악 문화 수립의 기저로서, 민요 채보와 국악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37년엔 작곡집을 발표하였고, 광복 후에는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고 고려작곡가협회 회장, 대한음악가협회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정부수립 1주년 기념 예술제 때엔 자신이 작사·작곡한 교향곡 <조국>을 스스로 지휘 발표했다. 부산피난 중 53세로 별세할 때까지 잠시 교단에 선 일도 있으며, 대표작으로 가곡 <고향> 외에 <향수>, <모란이 피기까지>, <바다> 등이 있고, 합창곡

<또 다른 하늘>, 교향곡 <조국>, <한강>, <현악 4중주곡 제1번>, <현악 4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모음곡> 등이 있다.

윤극영[편집]

尹克榮(1903-1988)

서울 출생. 1922년 도쿄에서 '색동회'를 조직하고 다음해에 <반달> <고드름> <설날>을 비롯하여 30여편의 동요를 작곡했다. 1926년엔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작곡집 <반달>을 출판하기도 했다. 8·15광복 후 월남하여 '노래동무회'를 조직했으며, 동요 100여곡도 작곡했다. 홍난파·박태준과 함께 동요 작곡계의 개척자이다.

김세형[편집]

金世炯(1906- ? )

평안남도 평양 출생. 미국 챕먼대학 음악부를 거쳐 웨스트대학원 수료. 1938년에 도쿄에서 제1회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1962년에는 제7회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 교향시곡 <오셀로>, 작곡집 <먼길> 외 가곡이 있다. 이화여전·서울대 음대를 거쳐 숙명여대 음대 학장, 경희대 음대 학장을 역임.

임동혁[편집]

任東爀(1907- ? )

서울 출생. 1927년 일본 도요(東洋)음악학교 졸업. 후카이(深井史郞)에게 사사한 그는 1929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사 주최, 전 일본 음악콩쿠르에서 제3위에 입상했다. <3도시의 인상>이란 작품 외에 저서로 <음악과 문화>가 있다. JODK 양악 책임자, JODK 관현악단 지휘자, 이화여대 음대 교수 역임. 일본 도쿄성악전문학교 강사 역임.

이흥렬[편집]

李興烈(1909-1980)

함남 원산 출생. 동요를 작곡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썼으며, 음악 교육에 이바지했다.

이흥렬은 일본 도쿄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귀국 후 1933년경 경성보육학교에서 홍난파와 함께 음악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1934년에는 <이흥렬 작곡집>을, 1937년에는 동요집 <꽃동산>을 발표했다. 서라벌예술대 교수와 숙명여대 교수를 지내며 후세 교육에 힘썼다. 예술원 회원, 한국작곡가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문화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훈장, 대통령상, 예술원상을 받았다.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봄이 오면>, <바위고개>, <자장가> 등의 가곡 50여 곡과 <꾀꼬리의 노래>,

<소나무 노래> 등의 동요 65곡이 있으며, 합창곡으로 <배 위에서>, <백로곡>, <닐리리야>와 피아노 3중주곡 <5월의 노래>, 교향시 <동과 서> 등이 있다. 저서로는 <음악의 종합 연구>, <새로운 음악통론> 등이 있다.

조두남[편집]

趙斗南(1912-1984)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 평양 출생. 미국인 신부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다. 11세 때 가곡 <옛 이야기>로 데뷔했고, 17세 때 첫 가곡집을 발간했으며, 21세 때 가곡 <선구자>를 작곡했다. 광복 이후 서울에서 창작 활동을 하다가 6·25전쟁 이후 마산에 정착해 피아노 교육에 전념했다. <선구자> 외에도 다수의 가곡과 대규모 성악곡인 칸타타 <농촌>, 오페레타 <에밀레종> 등이 있다.

김성태[편집]

金聖泰(1910- ? )

작곡가이자 음악교육가. 서울 출생.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 작곡부 졸업.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음대에서 작곡 이론 연구. 연세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음대 학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한국 음협 고문, 고려 및 서울교향악단 객원지휘자를 역임하였다.

작품으로는 <교향적 기상곡>을 비롯하여 <현악 4중주>, <현악합을 위한 모음곡>,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등이 있으며, 교성곡(交聲曲) <비바람 속에>와 연가곡(連歌曲) <꽃>,

<소월(素月) 가곡집>, <산유화>, <이별의 노래> 외 수십 곡의 가곡 등이 있다. 저서로는 <악전>, <화성법>, <대위법> 등이 있으며 악보 출판으로서는 예술 가곡집인 <교향적 기상곡>,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등이 있다.

김동진[편집]

金東振(1913- ? )

평안남도 안주 출생. 평양숭실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1938년에 일본 고등음악학교를 졸업. 그후 만주 신경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및 작곡을 담당, 평양 국립심포니 창설 기념 지휘를 하기도 했다. 월남 후 해군정훈음악대 창작부장 겸 지휘자로 활약, 초대 예술원회원을 역임했다.

작품으로는 오페라 <심청전>, 교성곡 <조국>, <승리의 길>,

<만가> 등이 있고, 교향모음곡 <제례가(祭禮歌)>, 서곡 <양산가>와 가곡 <가고파>, <내 마음>, <뱃노래>, <수선화> 등이 있으며 그 외에 영화음악에도 손을 뻗쳐 1956년엔 <백치 아다다>를 비롯하여 수많은 영화음악을 남겼다.

우종갑[편집]

禹鍾甲(1916- ? )

강원도 강릉 출생. 1932년 일본 데이코쿠(帝國)고등음악학교 졸업. 1941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하는 전 일본 음악콩쿠르 관현악 부문 제2위 입상. 1942년 동 콩쿠르 관현악 부문에서 1위로 입상. 모로이(諸井三郞), 이케우치(池內友次郞)에게 사사. 1955년 TBS 작곡상 특상 수상. 작품으로는 <관현악을 위한 2악장>, <교향관현악을 위한 3악장> 등이 있고, 관현악을 위한 음악 <가람(伽藍)>과 관현악을 위한 3장 <창경(昌慶)> 등이 있다. 일본 악계에서 활약한 상복(賞福)을 타고난 교향악 작곡가.

김대현[편집]

金大賢(1917-1985)

함남 흥남 출생. 일본

데이코쿠고등음악학교 졸업. 오오키(大木正夫), 쓰가와(津川主一)에게 사사. 관북(關北)관현악단과 원산실내악단 지휘, 해군정훈음악대 창작부 차장을 역임했다.

작품으로 오페라 <콩쥐 팥쥐>와 경가극(輕歌劇) <사랑의 신곡>과 동요곡으로 <자전거>, <종소리> 등이 있다. 경희대 강사,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장을 역임.

김순남[편집]

金順男(1917-1983)

서울 출생.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음악 작곡가로 알려져 있으나, 월북 작곡가여서 작품 연주가 금지되었다가 1988년에 해금되었다.

김순남은 경성사범학교 음악부 연습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 작곡부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도쿄고등음학교 기악부에서 공부하며 일본현대작곡가연맹이 주최한 음악회에서 피아노 소나타를 발표했다. 1946년 당시 북한의 국가로 쓰였던 <인민항쟁가>를 작곡했고, 1948년 좌익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령이 내려져 월북했다. 평양국립음악학교 작곡학부장, 조선음악동맹 부위원장 등을 지냈고, 모스크바음악원에 유학하기도 했다. 1953년부터 반동 음악가로 지목돼 모든 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4년에 복권되었다.

김순남은 음악에 민족성을 담았고, 사실주의 내용에 맞는 표현 기법을 사용했으며, 전통 장단과 음계를 사용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에 가곡집 <산유화>와 <자장가>가 있으며, 피아노 소나타와 실내악곡이 많다. 그 밖에 관현악곡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 라>, 교향곡 <태양 없는 땅>과 같이 정치색이 짙은 작품도 있다.

윤이상[편집]

尹伊桑(1917-1995)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적 작곡가. 경남 충무 출생.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이 뛰어나 14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며, 193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음악원에 입학해 2년간 작곡과 첼로 등을 배웠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1941년 항일운동에 참여했으며, 1944년에 2개월간 감옥에 수감됐다. 1946년부터 부산과 통영의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1953년부터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면서 실내악, 관현악, 가곡 등을 작곡하는 데 전념했다.

1955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은 이후 1956년에 유럽으로 건너가 1956년부터 1957년까지 파리음악원에서, 1958년부터 1959년까지 베를린음악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1967년에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강제 귀국되어 투옥되었다가 세계 음악계의 항의로 1970년에 풀려나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1970년과 1971년에 하노버음악대학에서, 1970년에는 베를린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1987년에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1992년에는 함부르크아카데미의 플라케티상, 쿠세비츠키음악재단상, 괴테메달 등을 수상했다.

윤이상은 서양 음악의 기법을 이용해 우리나라의 특성이 담긴 음악을 만들었고, 동양의 연주기법을 서양악기에 적용했으며, 서양의 현대음악 어법으로 아시아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음악의 바탕에는 도교사상이 흐르고 있다.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의 작품으로는 가곡집 <달무리>를 비롯하여 피아노 3중주, 현악 4중주, 첼로 소나타가 있으며, 영화음악 <낙동강>, 극음악 <처용의 노래> 외 동요작곡 등이 있다. 파리국립음악원 유학시절인 1959년에 데뷔작인 <7악기를 위한 음악>이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1960년엔 다시 쾰른 음악제에서 현악 4중주곡으로 주목을 끌었다. 이후 10여년 동안 오페라 4개를 비롯하여 30여개의 곡을 써서 지위를 굳혀 왔으며, 옥중에서('동백림 공작단' 사건에 연루) 완성한 오페라 <나비의 꿈>을 독일에서 연주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예술제에서 개막된 오페라 <심청>은 동서양의 음악과 사상을 융합시킨 독특한 음악으로 호평을 받았다.

작품으로는 독주곡 18개, 실내악곡 45개, 실내합주곡 5개, 협주곡 11개, 관현악곡 22개, 합창곡 5개, 오페라 5편 등 150여 곡이 있다.

금수현[편집]

(1919-1992)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가. 부산 출생. 일본 도요(東洋)음악학교 졸업. 나리타(成田)에게 사사. <그네>의 작곡자로 알려졌으며 <월간음악> 발행인, 한국 작곡가협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아들이 현재 활동중인 지휘자 금난새이다

정윤주[편집]

鄭潤柱(1919- ? )

경상남도 출생.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원을 거쳐 영 필하모니에 관계했으며 임동혁(任東爀)에게 사사. 작품으로 관현악무용모음곡 <까치의 죽음>, <사신(死神)의 독백>이 있으며, 교향모음곡으로 <초추(初秋)의 스케치>,

<교향곡 제1번>, <현악 4중주곡 제1번> 등이 있다. 한국작곡가협회장 역임.

이현웅[편집]

李顯雄(1920- )

1931년 도쿄고등음악학교 졸업. 1940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사 주최, 전 일본 음악콩쿠르 실내악 부문에서 1위 수상. 모로이(諸井三郞)에게 사사. 작품으로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소품> 외 다수가 있다. 일본 악계에서 실내악 작곡가로 활약하였다.

윤용하[편집]

尹龍河(1921-1954)

황해도 은율 출생. 신경음악원을 졸업하고 동북고교 등에서 음악 교사로 일했다. 광복 후 박태현, 이흥렬 등과 함께 음악가 협회를 조직해 음악 운동을 전개했고, 국민가요인 <민족의 노래>, <해방절의 노래> 등을 작곡했다. 대표작으로 가곡에 <보리밭>, <도라지꽃> 등이 있으며, 동요로 <나뭇잎배>, 칸타타에 <조국의 영광>과 <개선>이 있다.

나운영[편집]

羅運榮(1922-1994)

서울 출생.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곡 부문에 입상해 작곡가가 되었다.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한 후 1945년부터 중앙여자전문학교(중앙대학교의 전신)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46년에 민족음악연구소를 창립하고 1973년에는 한국 민속음악박물관을 설립했다. 미국 포틀랜드대학에서 명예 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연세대, 목원대 등에서 음악대학 학장을 지냈다. 교향곡 13개, 미사곡 9개,

오페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등 2편, 가곡 <가려나>를 비롯해 16편, 협주곡 6개가 있다.

김진균[편집]

(1925-1986)

대구 출생.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을 접하면서 자란 김진균은 대구사범대학교를 졸업 후 빈대학에서 음악학을 공부하였다. 연세대, 숙명여대·경북대에서 강의를 하였다.

초창기 음악학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던 시기에 김진균은 대구지역에서 이론분야를 개척하였다. 깊은 음악철학적인 내용을 평이한 문체로 표현했던 김진균은 전문 음악인뿐만 아니라 음악애호가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했으며, 한국적인 가곡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적인 시도를 해왔다. 대표 작품으로, <그리움>, <오월이 오면>, <파초>, <푸르른 날> 등이 있다.

장일남[편집]

張一男(1932- )

황해도 해주 출생. 1950년 평양음악학교 졸업 후 수도여사대·한양대 강사를 역임하였다. 61년 오페라 <호동왕자>를

작곡, 국립오페라단 창립기념공연을 하였고, 66년 오페라 <춘향전> 발표, 1971년 <원효대사>를 발표하였다. 1988년 올림픽 기념오페라 <불타는 탑> 을 작곡하였으며, 서울아카데미심포니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작품에 <호동왕자>·<춘향전>·<원효대사>·<불타는 탑> 등이 있으며 교향시에 <한강>·<조국(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