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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 서양음악사/양악의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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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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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洋音樂-

신문화교육을 실시한 미국 선 교사들이 성서와 영어로 된 찬송가를 들고 신학문과 의료사업을 통하여 기독교 정신을 선교하기 시작했다.

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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唱歌

1886년 설립한 지 일년이 못된 배재학당의 학과과정표에는 '창가'라는 색다른 과목이 있었다(培材史, 1955, p. 60). 그 기록에 보면 "서소문(西小門)에서 1886년 8월 3일에 간이한 교육을 시작했을 때에는 15개월 동안 영어와 세계 역사의 두 과목이었지만 1886년 11월 1일에 서양식 벽돌집 큰 교사를 짓고… 교실이 많이 마련된 후에는 학과목도 대폭 확장했다. 성경·영어독본·한문·영어문법·수학·지지(地誌)·만국역사·기하·화학·사민필지(士民必知)·물리·창가·도화·체조·위생·생리 등의 학과목을 교수하였고…"로 되어 있다. 또 1890년에 내한한 존스(G. H. Jones) 부인이 설립한 인천 영화(永化) 여학교에서도 '창가'과목이 있었음이 기록을 통해 밝혀졌다. 즉 "그때 음악을 창가라고 했었는데 주로 '찬미가'를 번역하여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송 수잔나, 한 데이세 두 교사들이 풍금을 치면서 가르쳤다…"(永化 70年史; 1963, p. 60).

위의 두 예로 미루어 보건대 기독교 계통의 신교육기관에서는 음악교육을 다같이 실행했음이 추측되지만 그 '창가'라는 것이 주로 찬미가였는데 '창가'라는 어휘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아래 사실에 비추어 알 수 있다. 즉 일본에서 신교육령이 발포(發布)되던 1879년에 음악취조소(音樂取調所)가 설치되고, 1881년 문부성(文部省)에서 <소학창가집(小學唱歌集)>을 내놓은 때부터 창가라는 말이 쓰여지게 된 것이, 우리나라에서도 창가라고 불린 것 같다. 그 후 찬송가도 함께 묶여 창가라고 불리다가 1905년 경부(京釜)철도가 개통된 후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최남선(崔南善)이 일본에서 이미 유명했던 <일본철도가>를 본따 30절이나 되는 작사로 부르게 되었던 일에 비추어 찬송가 외의 일반 노래가 창가로 불리게 된 예가 되는 것이다.

여기 흥미있는 당시의 <철도가> (경부텰도노래, 京釜鐵道歌, 1908) 가사가 어떠한 식으로 되었던가를 보아둘 필요에서 두 절만 실어본다.

철도가

(1908년 작사)1. 우렁차게 토하난 기젹소래에

남대문을 등디고 떠나 나가서

빨리부난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2. 늙으니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 친소 다같이 익히 디내니

됴고마한 딴세상 뎔로 일웠네

(이하 생략)

창가의 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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唱歌-範疇

신문학 운동과 함께 서울과 지방에 교회 계통 학교가 세워지고 점차 학교는 늘었다. 평양에 숭실대학·숭실중학·정의·숭의학교 등 기타 지방에 교육기관과 의료기관도 속속 설립되었다. 신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여러 과목 중 찬송가와 미국민요, 기타 일반노래를 다 창가라는 범주 속에 넣어 가르쳤다. 그러므로 '찬송가'는 '창가'라는 것을 낳은 모체지만 '창가'야말로 한국에서 서양음악의 시발이었음에 이의는 없을 것이다.

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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讚頌歌

우리나라에서 처음 불린 찬송은 백관성(白灌聖)의 "만주로부터 돌아온 아버지는 매일 새벽에 기도를 하시고 나지막한 소리로 주예수아이워(主耶蘇愛我)를 부르셨다"에 의하여 위의 노래였음을 알게 된다. 그 후 이화 100년사에 보면 초기 공부과목 중에 주기도문과 '예수 사랑하심'을 영어로 배우며 공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찬송가>는 1893년에 언더우드 박사에 의해 번역출판된 <찬양가>로서 4성악보(四聲樂譜)로 되어 있는 본격적인 찬송가지만 그 전해인 1892년에 존스와 로스와일러(Rothweiler) 목사의 공편(共編)으로 된 찬송가가 있었다. 그 후 1895년에는 감리교파에서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30곡으로 된 <찬미가>가 출판되었고, 1897년에는 북장로파에서 <찬송시>라는 이름으로 117곡으로 된 찬송가를 발행했다. 이것이 한국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친 찬송가다. 그 바로 전에 리이(G. Lee)와 기포드(Gifford) 부인 공편으로 나온 1895년 출간 <찬송시>가 있는데 54곡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찬송가가 1908년 장로·감리 양교파 찬송가위원회의 <찬송가>가 나오기까지 점차로 곡수를 증가시켜갔다. 1908년에 나온 새 <찬송가>는 262곡으로 되어 있었다.

신문화 운동의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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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文化運動-要素

선교사가 내한한 지 2년이 지난 1887년에는 서울 정동감리교회와 새문안장로교회를 위시하여 각 지방 교회에서 신교(信敎)의 자유와 함께 피어오르는 개신교의 찬송 소리는 종소리와 함께 널리 울려퍼지기 시작하여 1903년에는 원산(元山), 그리고 1906년에는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전도대를 거리로 뛰어나가게 하여 북을 치며 찬송을 높이 불러 어린이와 어른들에게 감흥깊게 전달되어 새로운 개화(開化)의 풍조로 삽시간에 퍼졌다.

더욱이 부흥회와 사경회(査經會)에서 부르는 열광적인 찬송은 을사조약의 망국적(亡國的) 설움과 울분의 폭발이었으며, 분노와 애통의 부르짖음이 되었으니 한국의 찬송가와 부흥회 운동은 단순한 종교적인 교회만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개화기 한국의 신문화 운동의 큰 요소였다. 심지어 산간벽지에까지 찬송가의 울림소리와 신교육의 필요성을 외치는 고함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쓰개치마를 쓰지 않고는 길에 못나오던 정숙한 부녀자들까지도 신교육을 받아야겠다는 불 같은 욕망이 타오르게 되어 산과 물을 건너면서 서울로 향하여 신학문을 배우려고 올라온 처녀들이 많았으니, 오늘날 여성계 지도자들 중 많은 수가 그 초기 신교육의 영향력을 받았던 것이다.

찬송가는 한국 내의 서양음악 발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일본의 창가와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으니 우리의 것은 구한말의 비통한 운명 속에서 싹튼 종교적 부르짖음과 민족주의의 표현이었고 한민족 개화역사의 불가분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찬송가와 창가는 단지 부르는 노래라는 영역을 벗어나 개화기의 벅찬 민족의 고동이었는가 하면 망국에 처한 겨레의 통곡이었으며 자주독립을 갈망하는 함성이었다.

창가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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唱歌-變遷

19세기 말에서 1910년에 이르는 우리 민족의 역사는 한국적인 특수한 사회현상과 국제관계의 한계상황 속에서 몸부림을 칠 대로 쳐보았지만 끝내 헤어나지 못하고 드디어 호시탐탐 기회만 보고 있던 일본에게 사로잡히고야 말았으니 이에 대한 민족의 분노, 무지에 대한 각성, 민족주의와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움직임이 종교적인 성향으로 나타났고 노래로 표현한 것이 바로 창가였다. 창가는 재래의 전통적인 시가(詩歌)나 가사·잡가 또는 향가 따위의 가락이 아니라 새로운 풍조, 즉 개신교의 창가를 이용해 부른 것인데, 세속적인 생활내용마저 도입시켜 창가로서 발전시켜 일종의 사회참여로 나타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1896년 음력 7월 25일(양력으로 9월 9일)인 고종황제 탄신일을 맞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축하 예배를 보는 가운데 탄신 축가가 불렸던 것을 위시하여 같은 해 4월 7일 한글로만 인쇄된 한국 최초의 <독립신문>이 발간되면서부터 수많은 창가의 가사들이 실려 일반이 널리 부르게 되었던 것으로서 이것이 사회참여의 시작이 되었다.

가사의 내용을 보면 그 당시 신교육을 통한 국가건설, 민족·국가 관념의 선양, 독립, 대동단결, 여성지위 향상, 사·농·공·상의 계급타파, 산업건설 등 근대사조의 총망라라 볼 수 있는 가사로 되었으므로 비록 <독립신문>에 실린 초기 가사가 재래 민요조인 4·4조의 형식으로 되었다 하더라도 잡가 따위 곡에 붙이기 위한 가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무렵에 조직된 독립협회·만민공동회 등이 일어나 독립정신을 계몽고취하고 독립신문의 발간과 독립문 건립 등으로 뜻있는 선각자들은 앞을 다투어 독립가, 애국가류의 창가 가사를 지어냈다. 그 예를 하나 들면 다음과 같다.

(이하생략)

(위의 합가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받아 같이 부르는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강강수월래>나 기타 여러 잡가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어서 그 당시 창가라는 테두리에서 불렀다고 볼 수도 없고 창가의 초기이니만큼 재래식의 잡가·시가·가사양식의 연장으로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개화기에 나타난 창가는 곡과 분절(分節) 및 가락(音律)의 형식은 찬송가를 모방하여 정비했다고는 하지만 재래식에서 떠나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반면 7월 7일자 발표 <독립문가>와 <경무학도의 노래>, 7월 26일자 발표된 <대죠선 달성회장 예수교인들의 애국가> 같은 것은 대개 기독교 정신을 고취한 사람들의 가사였던 만큼 곡도 찬송가식의 곡을 사용했음직하다.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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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國歌

어쨌든 창가가 사회참여의 기세를 높인 것만은 사실이고 애국가의 속출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개정되며 선포된 독립은 사실상 일본이 청국(淸國)과 러시아 등 외국으로부터의 한국에 대한 간섭을 단념케 하여 놓고 일본이 한국을 독점하려는 간계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며,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 때로부터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야욕이 발동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집회와 <독립신문>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연회를 열며 창가를 불렀고, <독립신문>은 논설을 통하여 국민정신을 일깨워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이 당시 애국가를 부르는 기운이 성하여 애국가의 숱한 가사가 신문에 끊임없이 게재되었다. 독립문 건립 정초식에(1896년 11월 21일) 배재학당 학생들이 음악 순서를 도맡았는데 그 때 부른 애국가는 윤치호가 급하게 작사했고 선교사이면서 음악교사였던 벙커 목사가 영국 민요 을 가르쳐 우리 가사에 맞추었다. 그러나 신문에는 그 곡명을 독일민요인

<로렐라이> 곡에 붙였더라고 보도했던 희화적인 삽화도 있다. 그 애국가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개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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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唱運動

독립사상이 움트던 그 당시의 애국가 운동은 국민 개창운동으로 변모하는 한편 신교육 교과과정으로, 또는 개화사조를 노래하는 새 단계로 옮겨져 갔다. 그러므로 찬송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시기를 제1기로 하고, 그 후 연대적으로 일어난 애국가 운동기를 제2기라고 본다면 그 다음인 세속적인 개화상을 노래한 단계를 제3기라고 나눌 수 있는데, 1908년경 최남선의 <철도가>가 지어져 나오던 무렵이 바로 제3기의 입문이라고 보아진다. 이 단계에 들어서서는 형식뿐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애국·독립이라는 전국민의 공동관심사로부터 의식적인 문학 행위까지로 변천해 갔으며 개인의 감정을 노래할 줄 아는 정서면의 발전으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창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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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初-唱歌集

우리나라 초기 선교계통 학교에 창가 시간이 있었고, 그 외 학교에도 정식과목으로 채택되면서 1910년에는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최초의 창가집, 즉 학부 발행의 <보통교육 창가집>이 나오고, 합방 직후에는 일본 총독부에서 그 교과서의 교정판을 내놓았다. 외관상으로는 창가가 독립적인 특수영역을 형성한 것같이 보였는지 모르나, 한국인 스스로가 즐겨 발현할 노래에서 동떨어진 일본 노래를 불러야 했던 비운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일본 본토에서 직수입해 온 노래책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무렵 음악이론의 기초를 닦은 우리네 손으로 간단한 작곡이 시작되었으니 최남선의 작사와 김인식(金仁湜)·이상준(李尙俊) 양씨의 멜로디는 문학과 음악의 분화(分化)를 뚜렷이 하게 한 첫단계로서 이것을 제4단계로 잡아도 좋겠다.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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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作

작곡이 시작은 되었다 해도 찬송가와 같이 4성부인 화성을 붙인 것이 아닌 단선율(單旋律)이었음을 밝혀 둔다.

초기 작곡인 김인식의 <학도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재미있는 현상이 있으니 G장조에서 이루어진 곡의 마지막음이 도라는 음으로 끝나지 않고 레로 끝을 맺었다는 점은 현대음악의 제시인 양 특이한 것이다.(이 시절의 가사 내용은 애국심에서 우러나오는 계몽·권학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같은 작곡가의 멜로디나 가사의 경향이 정서적으로 변해가며 노래의 향취가 짙어 갔으니 <표모가(漂母歌)>와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산곡간에 흐르난 맑은 물가에 뎌기 안즌 뎌 표모 방망이 들고 이옷 뎌옷 빨적에 하도 바뿌다

해난 어이 짤바서 서산을 넘네

위 가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남선 이후 개인의 감정과 정서의 표현이라는 의식적인 문학행위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보며 예술 가곡의 발아(發芽)라고 보아 마땅할 것 같다.

창가의 제4단계는 또다시 변모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단순한 애국·애족·권학 등의 노래가 아니라 이 나라의 절망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좌절감에 사로잡힌 상한 마음을 위로하며 달래고, 한편으로는 저항하는 음악으로 발전하면서 예술가곡과 대중음악인 유행가로 분화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계 음악의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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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音樂-接觸

세계 음악의 접촉은 외국의 대연주가들(크라이슬러·하이페츠·짐발리스트·엘만·프레미슬라우 등의 바이올리니스트와 그 외 피아니스트·첼리스트·성악가 등)이 속속 내연(來演)하면서 세계음악을 접하게 된 소중한 시기가 되었다. 해가 거듭하면서 청중들의 감상력을 높인 동시에 음악을 공부하겠다는 청년들에게 청운의 꿈을 불러일으켜 가까운 일본으로 유학하는 수가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창작 면에서도 과거의 유치했던 수준을 자연히 넘기 시작하여 초기 창가의 모습이 변모하면서 외국 음악의 본격적 양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동요 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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童謠-

성인을 위한 음악 외에 아동음악이 창작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의 일이다. 오늘날까지도 어른아이 구별할 것 없이 즐겨 부르는 윤극영(尹克榮)의 <반달>이 동요의 첫 창작품으로 되어 있지만 작가의 뜻은 '돗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의 민족적 비운을 그린 것으로 해석되는 동시에 신시(新詩)의 모체가 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유행가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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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行歌-擡頭

민족의 슬픈 감정을 표현한 유행가 <황성 옛터>는 일제에 대항하는 항일 감정의 폭발이라고 여겨져 일제는 이 노래가 나온 지 2년 후에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1928년부터 왕평(王平)·전수린(全壽麟) 등의 유행가 작곡가들의 노래가 속출하여 예술가곡과 유행가의 갈래가 뚜렷하게 되었다.

예술 가곡의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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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歌曲-創作

예술 가곡은 신시의 발전과 더불어 일어났다. 이은상(李殷相) 시에 붙인 가곡이 가장 먼저 작곡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홍난파(洪蘭坡-본명 永厚)는 <성불사의 밤>· <고향>· <옛동산에 올라>·<사공의 노래> 등을 작곡했고, 김형준(金亨俊)의 작사 <봉선화>에 곡을 붙여 일본인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한 바 있는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윤심덕과 한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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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心悳-韓琦柱

창가식 노래 연주가 사라져가고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돌아온 윤심덕·한기주 두 처녀는 서양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 등까지 불러대는 대가의 모습으로 당시 YMCA와 공회당(지금의 서울상공회의소) 스테이지에 나타나 장안의 이목을 끌었으며 인기를 모았다. 그들은 일찍이 창가라는 형태의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로서 그 후 연마한 예술 가곡으로 한국음악계의 연주 수준을 높여 갔다. 1920년 말기로부터 한국인들의 기악과 성악의 영역이 넓어지고 세련된 음악도 수가 증가일로에 이르게 됨에 따라 재래의 창가시대는 거의 사라져가기는 했지만 이것은 누에가 자라 집을 짓고 번데기가 되는 것같이 '창가'야말로 우리나라에서의 서양음악의 기반이었던 동시에 국민계몽·교육·종교·신문학 등의 광범위한 테두리 안에서 크나큰 공을 세웠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초의 양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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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初-洋樂隊

1896년은 신문학운동이나 음악의 사회참여라는 대중화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개화의 물결이 급격하게 집약된 이 해에는 한국 최근세사의 중대한 사건들이 많았다. 즉 독립신문의 창간으로 우매한 민중을 계몽선도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독립가·애국가를 보급했고, 창가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는가 하면 정치·사회적으로 독립협회의 조직, 독립문 건립, 황국협회, 만민공동회, 황제즉위와 대한제국의 국호개칭 등 실로 격동하는 해였음은 주목할 만하다. 또 한편으로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친로내각(親露內閣)의 성립 등으로 일제침략의 계략을 분쇄하려는 온갖 노력과 걷잡을 수 없는 풍운을 겪었던 것이다.

이해 4월에는 민영환(閔泳煥) 전권공사와 윤치호(尹致昊) 3명의 수행원을 러시아 황제대관식에 참석케 하여 10월 20일 인천항에 도착하기까지 세계를 일주하면서 선진국가들의 문물을 시찰, 관광하였다. 특히 민영환은 귀국하자 그 보고서에 육해군을 충실히 정비할 것과 군의 사기앙양을 위해 양식군악대(洋式軍樂隊)를 창설해야 할 것을 상주했다. 다행히 쉽게 승낙되어 독일인 에케르트(Franz Eckert)를 1900년 독일 영사 와이파트의 주선으로 3년 기한으로 300원(元)의 월봉으로 초빙하여 한국 최초의 양악대를 창설케 한 것이다. 군악대가 창설된 초기 수년간은 대원들에게 매일 악리(樂理)와 실기를 지도했으며 국가 행사가 있을 때에 연주할 악곡을 자신이 편곡, 작곡까지 하는 실력가로서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선구자들을 많이 육성해 냈다.

이 양악대에서 실시한 교육은 지금까지 각급 학교에서 해온 찬송가나 창가교육의 구전(口傳)교육을 실기로 옮긴 최초의 본격적인 교육이었다. 왜냐하면 음악의 전문교육기관인 이화전문학교의 음악과나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의 창설은 이로부터 10년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 사용하던 서양악기의 이름은 모두 한문 이름으로 번역 사용했고 악기의 종류는 30종에 달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직이었다. 이 양악대가 연주한 곡들은 각국의 국가·애국가, 각국의 국민가·행진곡·춤곡(舞曲)·가곡 등 상당수의 레퍼토리를 가졌다. 이 악대의 직제(職制)는 아래와 같았다(괄호 안은 직명과 인원수임.)

1등 군악장(正尉 또는 副尉, 隊長 1명), 2등 군악장(正校 상당, 副長 1명), 부참교(副參校, 1등 軍樂手, 3명), 상등병(2등 군악수, 6명), 병졸(악수, 27명), 병졸(樂工, 12명), 참교(參校, 서기 1명), 모두 51명.

1915년에 양악대가 해산될 무렵에 조사된 대원 명단을 보면 아래와 같다.

양악사장(洋樂師長)에 백우용(白禹鏞), 양악사에 김창희(金昌熙)·이춘근(李春根), 양악수장(洋樂手長)에 박중엽(朴仲燁)·이순창(李順昌)·김경준(金敬俊)·엄봉연(嚴奉淵)·김종현(金宗鉉)·문병옥(文秉玉)·서병선(徐丙善)·박흥규(朴興奎), 양악수에는 이용석(李容錫)·이명준(李明俊)·김재호(金載鎬) 외 38명.

양악대가 조직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5년 후인 1905년에 맺어진 을사조약이라는 망국의 비운은 군악대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1907년에 이르러서 침략의 마수는 국가경비를 절약한다는 구실로 이 군악대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군악대에 깊은 관심과 호의를 가지고 있던 왕실의 후원으로 왕실 호위대와 함께 1910년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존속시키다가 호위대는 곧 해산되고 군악대는 이왕직(李王職) 양악대로 개칭되면서 얼마간 존속되었다.

그 후 일인에게서 받는 왕실 예산의 삭감에 따라 수난을 겪기 시작한 군악대는 왕가의 보조비만으로는 유지할 길이 없어 학교운동회나 극장으로 돈벌이를 하다가 1915년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이왕직의 조력으로는 존속시킬 수 없게 되어 유서깊고 험로만을 걸어오던 양악대는 드디어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이를 애석히 여긴 민간유지들의 독지(篤志)로 인하여 '경성악대(京城樂隊)'라는 명칭으로 1930년 초기까지 연명해 오면서 망국의 설움과 절망에 빠진 민중을 위로 고무하기 위해서 매주 목요일마다 '파고다'공원에서 야외 연주로 무료공연을 계속했다. 이 때에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탓으로 애처로이 해산하게 되었으니 그들은 각기 사랑하던 악기를 들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최후가 아니었다. 그들은 학교로 들어가 밴드육성에 힘썼으니 그 중에 휘문중학교에 여러 악기를 기증하기도 하는 등 학교밴드 발전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학교와 군대의 밴드가 향상 발전된 근원을 살피면 초기의 외국인 에케르트와 백우용 외 여러 선배들의 피와 땀의 절정임에 틀림없고 특히 이 땅에 뼈를 묻은 에케르트의 위업임을 인정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의 공적은 한국 최초 양악대의 이름과 함께 이 나라 양악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