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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 서양음악사/예술음악의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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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 연주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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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韓演奏家-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외국연주가로서는 우선 일본 소프라노 야나기(柳兼子)가 1920년 5월 4일 YMCA 강당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다음 내한 순으로 연주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프로그램은 생략하며 이하는 1945년 광복 전의 외래 연주를 열거하는 것임)

크라이슬러(Kreisler, 1923년 5/23 바이올리니스트) · 하이페츠(Heifetz, 1923년 11/5, 바이올리니스트) · 짐발리스트(Zimbalist, 1923년 11/25, 바이올리니스트) · 프레미슬라우(Premislau, 1925년 2/14, 첼리스트)·존스(Johnes, 1925년 2/11, 테너-메트로폴리탄 오페라)·스튜핀(Stupin, 1926년 4/9, 첼리스트)·팔로 여사(Mrs. Palow, 1927년 2/12, 바이올리니스트)·루이지애나 트리오(Louisiana Trio, 1927년 3/20, 3중창단)·세키야도시코(關屋敏子, 1927년 5/29, 소프라노)·슬라반스키야 합창단(1927년 9/23, 러시아 합창단)·엔리코(M. Enrico, 1927년 11/16, 바이올리니스트)·뢰베(L

we, 1930년 4/12, 소프라노)·티보(Thiboud, 1933년 6/29, 바이올리니스트)·크로이처(Kreutzer, 1934년 2/5, 피아니스트)·짐발리스트(1935년 재차 내연)·엘만(Elnab 1937년 4/25, 바이올리니스트)·레오 시로타(Leo Sirota, 1939년 3/22, 피아니스트). 이 외에도 러시아와 구미의 연주가 10여명의 내한도 있었다.

첫 심포니와 국내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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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ony-國內-orch-estra

이 땅에서 처음으로 듣게 된 본격적인 '심포니·오케스트라'로서는 이른바 일만방공친선예술사절(日滿防共親善藝術使節)이라는 이름으로 내연한 세르게이 슈바이코프스키(Sergei Schweikovsky) 지휘의 '하얼빈 교향악단'의 내연이었다. 국내에는 작은 규모의 관현악단이 1920년 11월에 조직되었는데 그것이 이른바 경성악우회(京城樂友會)로서 대부분이 일본인들로 구성 운영되었고 그 중에는 장덕창(張德昌, 광복 후 공군참모장 역임자), 유순희(柳淳熙), 최호영(崔虎永) 등이 있을 뿐이었고 연주활동도 활발하지 못했다.

그 외 1926년에 박경호(朴慶浩), 붓스(Boots) 여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가 창설되고 YMCA 무대 위에서 어지간히 활발하게 오케스트라(소규모) 연주회를 전개했다. 1928년에는 '경성제국대학 관현악단'이 조직되었으나(이 단체도 대부분이 일본학생이었음) 대곡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그 후 1930년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의 전신)에 관현악단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현제명(玄濟明) 지도하에 조직되어 이후 1940년까지 매년 춘추로 서울 공연을 위시하여 지방순연 등 학생단체로서 활발한 연주를 계속했으며, 음악을 보급하는 데 큰 공을 남겼다. 평양에는 숭실전문학교(숭실대학교의 전신)에 밴드와 합창단이 미국인(피아니스트) 말스베리(Malsbery)에 의하여 조직되었고 지방순연을 거듭하여 음악보급운동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실내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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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內樂運動

1920년대의 연주활동은 대개 산발적으로 혼합음악회로 이루어졌던 것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독창, 독주 등의 본격적인 연주로 변형해 가기 시작했고, 특히 기악에서 실내악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실내악 단체로 처음 조직된 이영세(李永世)·홍성유(洪盛裕)·김원복(金元福) 등의 조직체가 1933년에 생기고, 곧 홍난파와 결합되어 당분간 활발하게 연구활동했다.

하지만 이러한 단체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여러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다. 실내악운동에 참가했던 음악가들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홍난파·이영세·홍성유·김원복·고봉경(高鳳京)·최호영(崔虎永)·안병소(安炳昭)·나운영(羅運榮)·윤낙순(尹樂淳)·이인수(李仁秀)·계정식(桂貞植)·최성진(崔星鎭)·이흥렬(李興烈)·김인수(金仁洙)·Brice·일본인 수명, 문학준(文學準)·김생려(金生麗)·김흥교(金興敎)·안성교(安聖敎)·김태연(金泰淵)·박태철(朴泰哲)·정희석(鄭熙錫)·조옥윤(趙玉潤)·최규영·윤기선 (尹琦善)·채동선(蔡東鮮)·이강렬(李康烈)·박민종(朴敏鍾) 등.

이상의 음악가들은 실내악운동에도 참여했지만 일반 연주활동도 자주 가졌음을 기술해 둔다(이상은 광복 전까지임을 밝힌다). 광복 후에 새로 나온 실내악인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안용구(安容九)·최영우·김준덕(金俊德)·전봉초(全鳳楚)·이계성(李桂成)·김희조(金熙祚)·전희봉(全熙奉)·정봉렬(鄭奉烈)·이동훈(李東勳)·양해엽(梁海曄)·김창환(金昌煥)·정진우(鄭鎭宇)·구연소(具然昭)·김재홍(金在洪)·김종명(金鍾明)·김동성(金東晟) 등. 한편 6·25전쟁 중에는 실험악회(實驗樂會)라는 의욕적인 조직체를 구성하였는데 고전으로부터 현대곡에 이르기까지 연구 연주하며 특히 국내 작곡자들 중에 김성태(金聖泰)·이상근(李相根)·윤이상(尹伊桑) 등은 실내악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 구성 멤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윤이상·신재덕(申載德)·임원식·원경수(元京洙)·안용구·노광욱(盧光郁)·전봉초·이재헌(李在憲)·안용기(安龍基)·최영우·김용삼(金容三)·양재표(梁在豹)·이남수(李南洙)·고순자(高順子)·정진우·정순빈(鄭筍彬) 등. 환도(還都) 후에 활동하기 시작한 음악인을 첨가한다면, 박달환(朴達煥)·정회갑(鄭回甲)·손용찬(孫鎔讚)·박정윤(朴正潤)·임만규(林万圭)·원용성(元容星)·김용윤(金容潤)·조연자(趙年子)·김몽필(金夢弼)·홍연택(洪燕澤)·임춘원(林春源)·김선주(金善胄)·김종순(金宗純)·조정현(曺廷鉉)·임정숙(林禎淑)·권영순(權寧純)·이규형(李圭瀅)·이여배(李餘培)·이한성(李漢成)·윤용석(尹用錫)·봉주완(奉柱完)·성정희(成貞姬)·박봉희(朴奉姬)·이명학(李明學)·이봉수(李鳳秀)·정홍자(鄭弘子)·이성균(李成均)·정윤민(鄭允敏) 등의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소속한 단체명을 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 3중주단, 음악가의 집, 서울 4중주단, 문학준 4중주단, 박민종 4중주단, 연악회(硏樂會), 아카데미 3중주단, 실험악회, 한국현악 4중주단, 노이마 3중주단, 안용구 3중주단, 오로스 목관 5중주단, 코리아 목관 5중주단, 안용구 합주단(샤피로 지휘), 이화여대 현악합주단, 바로크 합주단 등이다.

외국실내악 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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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國室內樂來演

광복 이전에 실내악 내연이 거의 없었던 일은 국내의 실내악이 과히 발전·향상되지 못했던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외래 실내악단을 아래와 같이 열거해 본다.

중국의 마사총 부부의 바이올린·피아노 2중주, 미국 줄리어드 4중주단, 빌투오지 디 로마실내악단, 미국의 스트로즈 4중주단, 그리고 1971년 10월 독일에서 내연하여 2000년간의 유럽 음악을 발췌하여 고대 악기와 현대악기 등으로 연주하였던 희귀한 'Capella Monacenisis' 합주단 등이 있다.

초기 한국의 음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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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期韓國-音樂敎育

서양 음악이 우리나라 학교 과목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04년경인데 그 당시의 음악을 창가라고 했다는 것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다. 1910년에 이르러 보통교육 창가집인 구한국학부(舊韓國學部-현재 교육부에 해당)가 편집발행한 <학부 창가집>이 한국정부 인쇄국의 인쇄로 나오고, 1913년에는 이상준(李尙俊)이 지은 놀량 외 16곡이 든 <조선속곡집(朝鮮俗曲集)>과 <신유행창가>, <조선신구잡곡>, <보통악전대요(樂典大要)>(행진곡이 끼여 있음)가 발간되었으며, 1918년에 다시 <창가집>을 출판했다. 이 창가집은 주로 이상준 자신의 작사 작곡으로 된 곡이 많고 야구가(野球歌)·효순(孝順) 등 36곡으로 되어 있다. 여기 <야구가>의 재미있는 가사를 소개한다(미국인 헨리 C. 워크(Work) 작곡의 'Marching Through Georgia'에 붙인 것).1. 장엄하고 활발스런 야구수들아

공부할 때 공부하야 지식 넓히고

운동할 때 운동하야 체육 힘써서

심신을 건강케 하세후렴:야구수들아 야구수들아

모든 기운을 다 모아서

철퇴같이 튼튼한 배트로 치는 뽈

오버디 쎈터로 홈인2. 장하도다 우리학도 오늘날이어

천기는 청량하고 일광좋은데

배트를 둘러메고 들에 나가니

흉금이 상쾌로다(철자는 옛 스타일에 의했음)

창가 시간은 제정되었지만 음악교사 부족으로 당분간은 과목만으로 그저 넘기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필요성에 의한 음악학교로 보이는 조선정악전습소가 1913년에 설립되고, 1915년에는 조양구락부가 설립되었는데 조양구락부에는 조선악과와 양악과를 두었고, 양악과에는 성악과 바이올린(4현금) 및 풍금을 가르쳤다(정악전습소난에 기술했음).

이 전습소와 조양구락부에는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면서(음악도 선교사에게 배우고) 졸업한 김인식(金仁湜)이 바이올린을 가르쳤다(후일에 안 일이지만 그 당시 김인식은 바이올린 줄의 조율을 옳게 하지 않았고 자작식의 조율을 해서 자신이 잘 연주했으며 그 식으로 가르쳤다고 하는 초기 바이올린 교육의 재미있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당시 학생인 홍난파, 이상준이 다 김인식에게 배웠던 것이다.

이보다 조금 앞선 1910년에는 이화전문학교에 비공식 음악과를 두어 본격적인 음악교육에 힘썼는데 1914년에는 3명의 졸업생이 나왔고, 교사로는 미국 선교사 미스영과 임배세(林培世), 김형준(金亨俊) 및 정사인(군악대 출신) 등이었다. 이화음악과는 1925년에 총독부의 정식인가를 받아 오늘날까지 여성음악교육기관으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바 되었다. 1945년까지 음악전문학교로서는 독일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귀국한 김재훈(金載勳)이 1938년에 경성음악전문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음악인을 육영하다가 광복 전 1943년에 폐교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음악학교는 아니지만 음악교육을 중점으로 함으로써 학생들의 음악활동이 1920년 말기로부터 광복 전까지 활발했던 두 학교가 있었으니, 오랜 역사를 가진 중앙교육학교가 그 하나이고, 그 다음이 경성보육학교이다. 특히 중앙교육학교에는 쟁쟁한 음악교사들이 있었던 관계로 실력이 좋아 전국을 순회하면서까지 하는 음악활동, 특히 동요 합창이 높이 평가받았다.

중앙교육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교사의 이름을 더듬어 보면 홍난파, 독고선, 이영세, 나운영, 임영선, 홍성유, 김원복, 이경팔, 최희남 등으로 한국음악계(광복 전) 일선 연주가로 이름있는 음악가였던 것이다. 경성보육학교에도 김성태, 이흥렬 등 저명한 음악가들이 음악교육에 종사했다.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이 음악학교가 거의 없었던 까닭에 이러한 교육기관에서 우선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광복 후 한국에는 많은 음악학교가 설립되어 매년 1천여 명의 졸업생이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제 광복 이후에 설립된(이화를 제외한) 주요 음악대학(음악과)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서울대·숙명여대·연세대·서라벌예대음대(1972년

중앙대와 병합)·경희대·한양대·조선대·수도여자사범대(현재

세종대)·성심여대·효성여대·계명대·영남대·동아대·부산여대·한성여대·성신여자사범대·중앙대·상명여자사범대·청주여대·대전신학대·단국대 등.

국내음악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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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內音樂活動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의 연주 상황을 살펴보면 경성악우회가 창립되고 그 창립연주회를 1월 13일에 YMCA 강당에서 가졌다(광복 전까지 서울의 연주회관은 주로 YMCA 강당, 공회당(현 상공회의소)이었고 때로는 정동 모리스홀이었다. 그 후 1935년에 건립된 부민관(전 국회의사당)이 유일한 음악회관이었다.

음악회에서 연주한 음악가로는 김형준·홍난파·김영환 등이었고, 다음해에도 대개 이 연주가들의 연주로 일관했는데 특기할 것은 1920년에 홍난파의 봉선화(김형준 작사)가 작곡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해 6월에는 해산된 군악대가 경성악대라는 이름으로 제1회로 시민을 위한 납량(納凉) 음악회를 파고다공원에서 열었고, 그후 한동안 계속하여 매주 목요일 오후에 연주했다. 이즈음에는 자선 음악회라는 명칭 아래 음악회가 열렸으니 이화학당 합창단, 연희전문학교 합창단이 출현하는 등 아래와 같은 인사들의 연주가 한창이었다.

김영희(金英熙)·최동준(崔東俊)·김재호(金載鎬)·박태원(朴泰元-朴泰俊의 兄씨)·임배세(林培世) 등이었고, 그후 1923년 이후에는 동경으로부터 음악을 전공하고 온 윤심덕·한기주 두 사람의 연주가 장안의 인기를 모았다. 이 무렵에는 각 여학교에 음악열이 고조되었고 이화를 비롯하여 경성의전, 연희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평양숭실대학,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연주가 눈에 띄었고, 특히 1923년 1월 20일에는 외국학교로서는 처음인 내한 연주회가 있었는데, 와세다(早稻田)대학 학생들의 연주회였다.

1924년 이후 광복되기까지 한국 악단에서 연주활동한 중요한 음악인을 연주 연대순으로(앞서 기술한 음악인 외) 열거하면 김경숙(金敬淑)·이영근(李永根)·김문보(金文輔)·박석기(朴錫基)·최호영(崔虎永)·이정진(李定鎭)·차재일(車載鎰)·김면균(金冕均)·한희숙(韓熙淑)·김활란(金活蘭)·김은실(金恩實)·정애리스·박원정(朴元貞)·최영순(崔永順)·김영의(金永義)·이사라(李思羅)·이준선 (李俊善)·안병소(安炳昭)·권태호(權泰浩)·안기영(安基永)·백우용(白禹鏞)·현제명·정훈모(鄭勳謨)·곽정순(郭正淳)·이인선(李寅善)·이유선(李宥善)·채동선(蔡東鮮)·이애내(李愛內)·채선엽(蔡善葉)·이상춘(李想春)·이관옥(李觀玉)·이승학(李升學)·김천애(金天愛)·김자경(金慈璟)·정영재(鄭榮在)·이용준(李容俊)·이인범(李仁範)·김대근(金大根)·이순희(李順熙)·하대응(河大應)·유경손(柳慶孫)·김학상(金學相)·김영애(金永愛)·한규동(韓圭東)·최봉진(崔奉鎭)·이창식(李昌植)·장보원(張寶媛)·서수준(徐守俊) 등(작곡가나 또는 합창단원 등은 제외되었음).

특기할 것은 이인범·하대응·최봉진 등은 일본에서 열린 권위있는 성악경연대회에서 보기좋게 입선되어 일본 성악을 압도하였다.

광복 이후 한국의 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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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以後韓國-交響樂團

앞서 소개된 바 있듯이 소규모의 오케스트라단이 있었을 뿐, 그나마도 오래 지속하지 못한 실정에 처했었다. 먼저 광복되던 1945년 10월에 현제명에 의하여 고려교향악단이 조직되고 26회의 연주회(지휘 계정식·김성태·임원식)를 가진 후 불행하게도 해산하게 되었으나 다행히도 1947년에 이르러 단원들과 김생려의 활동으로 '서울필하모니'를 조직하게 되고 당시 정동에 있던 KBS에서 일보던 미국 군인 자코비(Jacobi)의 고문 및 지휘로 연주활동을 계속하다가 6·25전쟁으로 부득이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해군 교향악단이 남한에 흩어진 음악가를 총망라하여 전시(戰時)의 군·관·민을 위로하는 음악활동에 나섰다. 뒤를 이어 안병소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지휘로 연주해 본 육군교향악단은 환도 이후 22회의 연주를 가진 후 얼마 전까지의 'KBS교향악단(지휘 임원식)'으로 개편되어 1971년까지 지속해 오다가 1971년 말에 국립교향악단으로 개편되었다.

개편된 국립교향악단은 1972년에 지휘자 임원식(林元植)이 사임하고 홍연택(洪燕澤)이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한편 정훈음악대(政訓音樂隊)의 후신인 서울시립교향악단도 상임지휘자 김만복(金萬福)이 사임하고 정재동(鄭載東)에게 바통이 넘어갔는데, 이로써 임원식·김만복의 시대는 가고 홍연택·정재동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그러나 지휘자로서의 경험이나 역량으로 볼 때 앞의 사람들을 따를 길 없고 의욕에서만 앞사람을 능가한다고 볼수 있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만 하는 것처럼 서양의 음악인 교향악 연주에서도 유럽의 역량있는 지휘자를 상임으로 초빙해서 교향악단이라는 앙상블로서의 기초적인 표현능력을 다듬고 적응력을 확대시켜 나가야만 앞날의 비약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 1972년 12월 2일 시민회관의 소실로 시립교향악단은 정기공연장을 잃게 된 반면에 지금까지 홈그라운드가 없었던 국립교향악단은 1973년 10월 국립극장(國立劇場)이 개관됨으로써 오랜 침체를 벗어나 활동에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그의 하나로 특기할 만한 것이 1974년 3월을 제1회로 해마다 열리고 있는 '한국작곡가의 밤'인데, 제1회에 이교숙·이영자·이상근·김용진·백병동·이수철, 제2회에 최병철·공석준·이영자·박재열·정윤주, 제3회에 유신·나인용·백병동·김성태·이연국·한성석, 제4회에 조복열·이상근·정윤주·박중후·오숙자·강석희 등의 관현악 작품이 연주되었다. 그리고 이 명단은 그대로 1970년대에 활약한 우리나라 관현악곡 작곡가의 리스트가 되기도 했다.

한편 1974년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지방의 교향악운동은 1976년에 대구시립교향악단과 부산시립교향악단이 서울 공연을 가짐으로써 건재를 과시했다. 한국에 내연한 외국 교향악단으로는 죠지 셀 지휘의 '클리블랜드 심포니', 케르테슈 및 프레빈 지휘의 '런던 심포니', 아바도 지휘의 '빈 필하모니', 자발리슈 지휘의 '스위스 로망드 교향악단', 하이팅크 지휘의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 그리고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의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니'와 오만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필하모니'를 명기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KBS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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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響樂團

KBS Symphony Orche-stra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향악단. 국립교향악단이 개편되어 KBS교향악단이 되었다.

1956년 지휘자 임원식이 40명 남짓의 규모를 갖춘 한국교향악단을 결성해 서울중앙방송국 전속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발전해 국립교향악단이 되었다. 1958년 동남아 6개국을 순회 공연했으며, 정기연주회를 비롯해 오페라 반주를 맡는 등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다. 1972년부터는 홍연택이 상임지휘자를 맡았고, 1981년에는 한국방송공사로 소속을 옮겨 KBS교향악단으로 개편되었다. 1991년에 일본 4개 도시 순회 연주회를 가져 호평을 받았고, 1995년 10월에는 정명훈의 지휘로 유엔(UN) 창설 50주년 및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에 있는 유엔총회장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현재 연평균 90회 남짓의 연주회를 갖고, 세계적인 지휘자와 연주자를 초청하는 등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1998년부터 정명훈이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다.

창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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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作活動

우리나라는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고유의 음악 전통을 이어왔기 때문에 음체계나 표현양식이 다른 서양의 음악을 수용하고 창작활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민중의 음악인 민속악(民俗樂)은 두고라도 순수음악이라 할 수 있는 아악(雅樂)은 임금의 이름으로나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고(非天子면 不作樂), 서양음악의 표현방법을 빌린 창작이란 것이 바로 자아의 발견과 주장에 이어지는 것이라야 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양악(洋樂)의 표현능력을 충분히 구사할 수 없었던 단계에서 창작은 고작 간단한 2부형식이나 3부형식의 유절가곡(有節歌曲)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는 1920년의 가곡 <봉선화>도 그 예외는 아니다. 역시 홍난파(洪蘭坡) 작곡으로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의 조선>, <우야(憂夜)의 성군(星群)>, <동양풍의 무곡(舞曲)> 등의 출판은 1931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35명의 멤버로 우리들만의 교향악단이 조직되고 단 한번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연주회를 가지게 된 것은 1941년, 홍난파가 44세로 세상을 떠나던 해였다. 마침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확대시킴으로써, 패망의 길을 재촉하던 때였다. 미군의 폭격을 피해서 일본에서 활약하던 음악가들이 계속 귀국했다. 본격적인 소나타 형식에 의한 현악 4중주곡, 피아노 트리오 등을 중심으로 한 이건우·김순남의 작곡발표회가 있은 것은 그 무렵인 1943년의 일이다.

반세기 만에 우리의 창작계는 성년기에 들어선 것이다. 성년기 이후 활동한 작곡가로는 윤이상·김대현·김순애·나운영·정윤주·윤용하·이상근·조렴·하대응·이호섭·조두남·김달성·정희갑·윤양석·이영자·성낙훈·최인찬·김용진·백병두·박재열·조병옥·정인국·박중후·박준상·이교숙·정우현·김동환·박판길·구두회·안익태·장일남·안일웅·이성재·박재훈·서우석·김흥교, 그리고 일본에서 작곡생활하는 이현웅·우종갑·이수철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물론 가요곡이나 동요곡도 작곡했지만 교향악을 위시하여 각 부문에 걸친 작품도 발표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파괴는 창작의 세계에도 큰 시련을 안겨다 주었고 그 재기(再起)는 1960년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제2차세계대전의 파괴가 몰고 온 유럽과 미국에서의 기능적 음체계의 붕괴는 6·25전쟁을 체험한 뒤에야 절실한 욕구로 젊은 작곡가들의 의식 속에 뿌리를 내렸다. 미술에서 비구상(非具象)이 대두한 것처럼 세리엘(音列)의 현대기법이 과거의 기능적인 기법과 병존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윤이상 작품의 국제적 진출은 국내의 젊은 작곡가들에게 적지 않은 자극이 되어 1972년에는 박준상(朴俊相)이, 1973년에는 김정길(金正吉)이 국제현대작곡협회(ISCM)의 음악제에 입선 연주되었고, 1976년에는 강석희(姜碩熙)·최인찬(崔仁讚)이 동시에 입선의 영광을 갖기도 했다. 우리의 창작계가 변두리성을 벗어나 역사성과 국제성을 획득하게 된 셈이며, 1975년 10월 명동 예술극장에서 이틀 동안 공연된 공간사(空間社) 주최의 '스페이스 1975'라는 종합예술제는 위의 역사성과 국제성을 입증하는 이벤트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음악과 무용과 미술의 종합적 공간을 추구한 이 공연에 참가한

음악가는 강석희·김정길·박재열·백병동·윤이상·최인찬·황병기·볼프강 스테펜·올튼 헤르만·조지 유아사와 무용의 홍신자, 미술의 김순기 등이었다. 1975년부터 더욱 눈에 띄게 된 음악의 상승기류는 1977년의 음악횟수가 1976년보다 50퍼센트 증가했고 청중은 100퍼센트가 증가했다는 통계로도 나타나고 있다. 현대기법으로 씌어진 창작곡의 음반이 현대 작곡가들의 모임인 창악회(創樂會)에서 출간된 것도 1977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창작계의 상승기류를 북돋기 위해서 문공부(文公部)는 대한민국 작곡상의 제정을 발표했다. 그리고 제1회 작곡상의 수상자는 박중후(朴重厚)·백병동(白秉東)의 실내작품으로 결정되었다.

두 편이 모두 현대기법에 의한 실내악곡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낭만주의적 경향이나 국민주의적 경향의 작품에서 이렇다 할 수확이 없고, 현대기법의 우세로 다양성과 대중성을 잃었다는 점, 작품들이 내용이나 형식에 크고 넓은 진폭(振幅)을 갖지 못하고 외소화하고 도식화된 세계에서 맴돌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오페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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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opera運動

최초의 오페라라면 1940년 10월에 일본 후지하라 요시에(藤原義江) 오페라단과 하얼빈 교향악단 공동으로 비제의 <카르멘>이 이 해 25일부터 3일간 서울 부민관(현 국회의사당)에서 상연된 것이다.

물론 이에 앞서 1930년대에 이미 김문보(金文輔)가 일본에서 마스카니 작곡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주역으로 출연한 바 있으니 이 땅에서 우리의 손으로 준비 상연하기는 1948년부터이다.

1934년에 의사의 몸으로 이탈리아 밀라노로 성악 연마차 유학하여 4년 만에 귀국한 이인선(李寅善)은 오페라운동 전개의 필요성을 느껴 그를 중심으로 1946년 국제오페라사를 조직하고 최초의 공연물로 베르디의 <춘희>를(이인선 번역) 선택하고 2년간의 준비를 거쳐 현 국립극장인 시공관에서 1주일간 주야 공연으로 한국 오페라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종합대예술이니만큼 준비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고(故)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의 후원으로 무난히 공연을 끝마치기는 했지만 워낙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오페라인 관계로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 오페라에 출연한 배역은 다음과 같다.

춘희 역에 김자경·마금희, 알프레도에 이인선(단독 테너로 이끌었음), 그외 정영재(鄭榮在)·고종익(高宗益)·송진혁(宋鎭爀)·옥인찬(玉仁燦)·황병덕(黃炳德)·김로현(金魯鉉)·이열희(李烈姬)·손윤열(孫允烈)·김혜란(金惠蘭)·박승유(朴承裕)·오현명(吳鉉明)·노형숙(盧亨淑) 등의 가수들로 2조로 편성되었고, 연출 서항석(徐恒錫), 무대장치에 김정항, 지휘에 임원식, 합창에 이유선 등의 스탭으로 이루어졌다.

첫 공연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까닭에 보고 듣지 못한 음악 애호가들의 앵콜 공연 주문이 쇄도하여 4월에 또다시 8회공연을 가졌다.

이와 같이 오페라운동의 불이 붙기 시작하고, 이 땅에서는 오페라 같은 거창한 종합예술을 할 수 없다는 옛 생각이 불식됨에 따라 그후 거의 매년 한 편씩의 오페라를 상연하다가 2편, 때로는 34편씩이라는 풍년을 이루기도 했는데, 주요 레퍼토리는 베르디의 <춘희>, 구노의 <파우스트>, 비제의 <카르멘>, 현제명의 <춘향전>, 김대현의 <콩쥐 팥쥐>, 현제명의 <왕자 호동>, 베르디의 <리골레토>, 푸치니의 <토스카>,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레온카발로의 <파리아치>, 푸치니의 <라보엠>, 베르디의 <일토로바토레>,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홍연택의 <논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베르디의 <아이다>, 장일남의 <원효대사> 등이다.

한편 1972년 윤이상(尹伊桑)이 <심청전>을 오페라화하여 오페라 고장의 하나인 독일 무대에서 각광을 받아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운동 개시 이래 20여년 동안에 성장이 뚜렷한 것만은 사실이겠으나 아직도 오페라 하우스, 오페라를 위한 오케스트라 지휘자, 연출 등 여러 문제가 해결이 안된 채 새 레퍼토리만을 장만하는 현상과 창작품의 고갈 또한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창작 없는 역사가 있을 수 없으니 오늘을 우리의 소재로 지어내 놓는 작품 시대로 삼아야겠다.

한국의 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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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合唱團

광복 전에도 합창운동이 제법 활발했지만 광복 후의 활동이야말로 합창다운 합창으로 발전한 셈이다.

한국에서 움직이는 모든 문화운동 중 그 어느 것 하나 순조롭게 운영되는 것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니겠는데, 합창 역시 운영난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분투해 오고 있다.

그동안 여러 합창 단체가 조직되어 운동을 전개해 보았지만 거의 명멸이라는 운명에 봉착했음은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1973년 10월,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개관되고 그 산하단체로 국립합창단(國立合唱團)이라는 직업 단체가 나영수(羅永秀)를 지휘자로 발족하면서부터 합창음악은 새 기원을 맞게 되었다. 나영수를 정점으로 하는 국립합창단은 국립극장 산하단체 중에서 가장 보람있고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고 해도 지나친 평가는 아니다.

첫째로 국립합창단은 바흐의 <요한 수난곡(受難曲)>, 베르디의 <진혼곡>, 베를리오즈의 <진혼곡>, 그리고 베토벤의 <장엄 미사> 같은 거작(巨作)을 초연함으로써 합창음악의 아카데미즘의 길을 열어갔다.

둘째로 국립합창단은 창단 공연에서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만을 선보인 이래로 연 2회의 정기공연 중에서 1회는 반드시 한국 작품만을 연주해서 합창곡 창작에 끊임없는 자극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의 합창곡을 공모하고 발표회를 가짐으로써, 합창곡 창작의 후속부대를 양성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셋째로 국립합창단의 진지한 정진에서 쌓여진 저력은 교향곡의 합창부문과 오페라의 합창파트를 무난히 소화해서 기대를 충족시켜 왔다.

1974년 국립교향악단과 협연한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이라든가 바그너의 오페라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의 합창은 우리 합창사에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외국합창단의 내연으로는 문화회관 개관기념 예술제에 참가한 독일 졸링겐 남성합창단이 있다.

광복 이후의 연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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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以後-演奏家

광복 이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발전이 우리 음악계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6·25전쟁을 겪는 동안 미군의 주둔을 계기로 그들의 도움으로 개인적 또는 미국과의 교류에 따른 혜택으로 젊은 음악도들이 도미(또는 유럽으로)하는 경우가 격증하고 우수한 교수들에게 사사한 자질 있는 젊은 세대의 두드러진 발전과 빛나는 활약상은 나라의 자랑이며 개인의 명예라 아니할 수 없다.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아 명성 높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鄭京和)·김영욱(金永旭)은 두말할 나위 없는 국보적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 위 세대의 연주가로 한동일(韓東一)·신수정(申秀貞)·장혜원(張惠園)·정명화(鄭明和)·이규도(李揆道) 등이 있다.

또한 이대욱(李大旭, 피아니스트)·백건우(白健宇, 피아니스트)·서계령(徐桂玲, 피아니스트)·민초혜(閔初惠, 바이올리니스트)·김남윤(金南潤, 바이올리니스트)·정명훈(鄭明勳, 지휘자)·구진경(具眞璟, 바이올리니스트)·김기혜(金基惠, 첼리스트)·조영방(曺英芳, 피아니스트)·황은영(黃恩英, 피아니스트)·김영호(金永皓, 피아니스트)·이영인(李令仁, 피아니스트)·문미현(文美賢, 피아니스트), 박미영(朴美榮, 바이올리니스트)·임유직(林裕稷, 바이올리니스트), 이청(李淸, 피아니스트)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성악, 기악가들이 해외에서 연구활동하여 성공하였다.

1970년대 국제무대에서 닦은 뛰어난 연주를 들려준 독주자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백건우(白健宇, 피아노)·김남윤(金南潤, 바이올린)·문용희(文龍姬, 피아노)·이대욱(李大旭, 피아노)·김영욱(金永旭, 바이올린).

이어서 1976년부터는 계속사업으로 제1회 대한민국 음악제가 문화공보부 주최로 열리게 되었다. 이 때에 초청된 연주가는 이경숙(李慶淑, 피아노)·이창우(李昌雨, 첼로)·정찬우(丁讚宇, 바이올린)·김창국(金昌國, 플루트)·김영욱(金永旭, 바이올린) 등이다. 이 음악제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초청 연주가 중에서 정찬우와 김창국은 재일교포로서 두각을 나타낸 존재이며, 동구권에 속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지휘자 닉사 바레지와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크르판이 참가했고, 더구나 닉사 바레시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 작곡의 오페라 <이프게니 오네긴>이 연주회 형식으로 알찬 초연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광복 30년에서 젊은 연주가들에게 가장 고무적인 행사였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음악적 위치를 세계 속에 심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한국에서 열렸던 제29차 세계청소년음악회를 꼽지 않을 수 없다.

2차대전으로 고통을 겪는 세계가 청소년들을 음악활동을 통해 협동작업을 시킴으로써 평화적인 유대와 정서의 순화를 도모하고자 조직된 세계청소년 음악연맹(Jeunesses Musicales)은 36개국의 회원국을 갖고 해마다 대회를 갖는 한편 세계청소년 교향악단 연주회를 열고 있는데,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제29차 대회가 1977년 여름 한국에서 열렸다.

세계의 젊은 연주자들로 그 때마다 조직되는 세계청소년 교향악단은 프랑스의 세르주 보도의 지휘로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그 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