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 서양음악사/1950년대 이후의 경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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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편집]

-年代

6·25전쟁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전쟁으로서 막대한 국토와 재산, 인명피해를 주었지만 가요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미8군 쇼'라는 주한 미군을 위문하는 연예창구가 마련되면서 이는 후일 우리 가요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연예인들을 배출한 터전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처음에는 악단 위주로 미군 계통에서 흘러나오는 당시 유행하던 음악을 연주하다가 곧이어 플로어 쇼라는 명칭으로 노래와 춤이 섞인 무대가 유행했다.

또한 점차 서울 시내에 팝 뮤직을 틀어주는 음악 다방이 등장했는데 종로의 '돌체', '영보', 명동의 '은하수' 등의 음악다방에는 장안의 멋쟁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때 유명했던 파퓰러 가수로는 패티 패이지, 페레 코모, 내트킹 콜 등이었다.

사회가 차츰 안정되면서 미군에 의해 공수돼 온 부기우기 리듬과 차차차에 편승한 <서울 부기>, <노랫가락 차차차> 등이 나오면서 우리 가요가 점차 외국인의 리듬에 동화되어가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맘보의 유행은 트위스트 춤이 나오기까지 계속되었으며 한편 카바레에서 지루박 춤이 인기를 끌었는데 역시 영화 <피크닉>에서 윌리엄 홀덴과 킴 노박이 췄던 춤으로 정확한 명칭은 지터벅이 맞는 말이다.

미8군 쇼의 스타들[편집]

美八軍-

1950년대 '미8군 쇼'가 한창 절정을 이뤘을 때는 전국의 미8군 산하의 클럽수가 자그마치 264개가 있었으며 이 때 미8군이 우리 연예인에게 지불하는 돈이 월평균 8만달러-12만달러로 연간 무려 120만달러나 돼 당시 우리나라가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100만달러 안팎이었음을 감안할 때 '미8군 쇼' 단체의 수입이 우리 경제에 크게 한몫하던 시대였다.

이렇듯 당시 '미8군 쇼' 무대는 황금을 캐는 노다지였기 때문에 여기에 입문하려는 연예지망생이 몰려들었고 지원자가 너무 많아 미군 심사위원 입회하에 오디션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할 정도였다. '미8군 쇼'로 성공한 인물로 첫손가락을 꼽는 사람은 김 시스터즈이다.

김 시스터즈의 성공에 힘입어 우리에게는 <나 하나의 사랑>으로 알려진 송민도가 패티 페이지의 을 번안한 <눈물의 왈츠>를 불렀는데 6·25 이후 최초의 팝송 번안곡이다.

<검은 장갑>의 손시향, 평소 패티 패이지를 좋아해 이름까지 패티로 정한 패티 김이 8군 무대에 나섰는데 김광수, 노명석, 송민영, 엄 토니, 베니 김, 박춘석, 길옥윤, 여대영, 이봉조 등이 연주인으로 활약했다.

1960년대[편집]

-年代

1960년대는 6·25전쟁의 아픔을 완전히 벗어났으며 바야흐로 LP(33⅓회전)시대가 도래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 사이에 우리나라에 팝 음악의 뿌리를 심은 것은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등지에 생겨난 음악감상실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풍물로 젊은이들의 작은 휴식처요 낙원이었다.

당시는 아직 민방이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들 음악감상실의 위력은 대단해 이 곳에서 틀어대는 최신 유행음악은 곧바로 대학 캠퍼스에서 불려질 정도로 젊은이들에게 인기였다.

음악감상실 행사 중 가장 큰 화젯거리로는 트위스트 경연대회와 아마추어 가수 선발대회였다. 또 인기 그룹의 미니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면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트위스트 경연대회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가장 특색이 있던 장소 '세시봉'에서는 음악평론가 이백천이 '대학생의 밤'이란 프로그램을 마련해 대학가의 숨은 재간꾼을 발굴하는 무대를 꾸몄다. 여기서 배출된 인물로 조영남, 송창식과 윤형주의 트윈 폴리오, 그리고 MC로서 활약 중인 이상벽 역시 학생 MC로서 자신의 재능을 키워 나갔고, 신중현의 애드훠도 이 곳을 통해 일반 무대에 선보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민방이 하나, 둘 나타나면서 그 주도권을 라디오에게 빼앗기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해 때마침 불어온 음악다방의 출현으로 1970년대에 들어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민방의 개국과 DJ시대[편집]

民放-開局-時代

1961년 MBC 라디오가 개국하면서 본격적인 민방의 시대를 맞았으며 1963년 동아방송(DBS)이 개국하였다. 1964년 디스크 자키 방식이 시작되어 동아방송(DBS)의 최동욱, MBC의 이종환, 라디오서울(RSB)의 피세영의 DJ트로이카 시대를 구가했다.

1970년대[편집]

-年代 1970년대가 되면서 이 땅에 이른바 '청년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즉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가 그것으로 이 3가지가 젊은이들에겐 절대적인 기호품이었으며 거리에서 통기타 하나쯤은 들고 다녀야 행세하던 당시엔 통기타 음악으로 대변된 포크가 크게 유행했다. 또한 고고클럽이 등장하였다.

고고란 원래 60년대 중반 미국의 자니 리버스라는 가수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유명한 댄스 클럽 '위스키어-고고'에서 자신이 개발한 특유의 발라드 형식의 춤곡을 보급하면서 댄스뮤직의 신기원을 이룩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위스키어-고고'의 스타일과 비교해서 많이 변질된 형태의 고고가 등장한 것이다.

록 그룹의 할거[편집]

-割據

한국 록 음악의 개척자 신중현은 그룹의 리더로서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 펄 시스터즈를 국제적인 스타로 키워낸 데 이어 1970년대에도 김추자, 박인수, 장현, 김정미 등을 톱 싱어로 키우는 등 음악에 관한 한 연주활동, 작곡, 스타 제조기 등 모든 면에서 출중했다.

이 밖에 70년대 초반에 인기를 얻었던 그룹으로는 유상봉과 장계현을 배출시킨 템페스트가 마침 불어온 고고 클럽의 붐을 타고 주가를 올렸으며, 손학래, 김기표 등이 속해 있던 호랑나비의 실력은 정평이 있었다. 이 외에도 <그리운건 너>의 데블스, <나는 못난이>의 딕 패밀리, 라스트 찬스, 비스, 영사운드, 세부엉, 아도니스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한편 1977년에 시작된 MBC 대학가요제와 1978년에 개최된 TBC 해변가요제는 아마추어 대학생 그룹의 등용문이었다. <나 어떡해>의 샌드 페블스, <연>의 라이너스, <불놀이야>의 옥슨80 등이 대학가요제 출신이고 해변 가요제에서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의 활주로, <구름과 나>의 블랙 테트라가 배출됐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형제 그룹 산울림, 사랑과 평화, 작은 거인이 스타 그룹으로 떠올랐다. 산울림은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 3형제가 록 그룹의 르네상스를 주창하면서 <아니 벌써>로 데뷔하여 무려 15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음반을 발표하면서 한국 록의 이정표를 제시한 팀이다.

그런가 하면 사랑과 평화는 이장희가 지휘한 그룹으로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 등을 발표하여 70년대 후반 가장 실력있는 그룹으로 평가를 받았다. 반면 김수철이 이끄는 작은거인은 대중성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김수철의 신기에 가까운 기타 워크와 높은 음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렇듯 1970년대는 록 그룹의 군웅할거 시대였다.

디스코 열풍[편집]

-熱風

1974년부터 전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디스코 열풍이 197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도 간헐적으로 불어왔다. 비록 외국에 비해 늦기는 했지만 디스코의 유행은 삽시간에 밀려와 시내의 생맥주 살롱들이 저마다 디스코테크로 업종을 바꾸어 낮부터 디스코 음악들을 틀어 댐으로써 청소년들이 학교를 빠지고 몰려드는 등 미성년자의 유흥장 출입이 사회문제로까지 번졌다.

이렇듯 1970년대의 급변하는 팝 뮤직 흐름 앞에서 어린 팝 애호가들은 방향감각을 잃고 허둥거려야 했다. 그것은 결국 가장 감각적인 팝 뮤직이라고 할 수 있는 헤비메탈 록 매니아들만 무작정 양산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대가 국내 팝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대였음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1980년대[편집]

-年代

1979년 12·12사태로 비롯된 신군부의 집권야욕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그들의 마각이 나타나더니 드디어 1980년 12월 1일부터 언론 통폐합을 시켰다. 전국에 산재한 방송, 신문, 잡지사를 통폐합시키면서 많은 언론 종사자들이 직장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 가운데 동아방송(DBS)과 동양방송(TBC)이 KBS로 흡수된 것을 비롯해 지방의 서광복송, 전일방송 등이 역시 통폐합됐다.

이러한 속에서 마이클 잭슨, 마돈나의 열풍이 불어 마이클 잭슨의 춤을 모방한 박남정과 마돈나를 흉내낸 김완선이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또한 이러한 댄스뮤직붐에 편승해 나미가 <빙글빙글>, <보이네> 등으로 국내 댄스뮤직을 선도해 나갔다.

언더그라운드 음악[편집]

-音樂

1980년대 가요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득세를 들 수 있다.

언더그라운드란 한마디로 방송에 의존하지 않는 가수들의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서 과거에도 한대수, 양병집, 김민기 등이 있긴 했지만 1980년대에 조동진의 등장 이후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시대에 불을 지핀 견인차는 들국화였다. 들국화는 방송을 외면하고 라이브 공연만을 고집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로서 라이브 공연의 붐을 초래했다.

이후 많은 무명 가수들이 들국화의 전철을 밟으면서 언더그라운드 세력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김현식을 위시해 한영애,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봄여름가을겨울, 어떤 날, 신형원, 오석준, 장필순, 동물원 등은 방송보다 공연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쌓아 나갔다.

이렇듯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활동은 공연문화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1970년대 초반 통기타 음악의 유행시대에 일어났던 공연문화가 유신체제가 되면서 공연허가가 나지 않아 그동안 얼어붙었다가 10년이 넘어서야 풀렸는데 여기에 편승해 연극붐도 함께 일어 공연장은 연일 만원을 이루면서 이 움직임은 록의 활성화의 효과를 가져왔다. 즉 록 그룹은 그 특성상 팬과 호흡을 함께하는 데 묘미가 있는 것으로서 들국화를 필두로 다섯손가락, 벗님들, 그리고 1986년 본격 헤비메탈을 주창한 시나위, 백두산, 부활, H2O 등이 하드한 사운드를 구사하면서 헤비메탈의 시대가 도래했다.

금지곡의 해금[편집]

禁止曲-解禁

1987년 그동안 금지곡으로 묶여 있던 가요와 팝송이 12년 만에 해금되었다. 가요 70년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대는 일제치하의 36년간과 유신체제하에서부터 6·29선언까지이다. 일제치하에서 우리는 말과 글은 물론 문화까지 빼앗겼지만 상대가 일본인이기에 덮어둘 수 있는 것이었지만 박정희 대통령 집권 말기 4년간의 유신체제와 신군부가 민주화 물결로 백기를 들기까지의 7년간은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였다.

이로써 왜색판정을 받았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비롯하여 가사퇴폐 및 창법저속으로 판정을 받았던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신중현의 <미인> 등이 다시 불려지게 되었다. 또 '시의에 맞지 않는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던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해금 이후 각종 가요차트의 상위에 오르고 음반이 재발매되면서 판매량도 높아져 금지곡에 대한 가요 팬들의 갈증을 보여주기도 했다.

1990년대[편집]

-年代 90년대가 되면서 혜성처럼 나타난 서태지와 아이들로 인해 이 땅에 비로소 랩의 시대가 도래했다. 랩의 열기가 상승하고 있는 것은 그 음악적 요인에서라기보다는 시대가 바뀌면서 젊은이들의 생활양식의 반영으로 해석된다. 즉 토할 길 없는 불만과 울분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는 수단으로 랩이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들의 랩에다 바로 이런 점을 담아내 신세대를 대변하는 우상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보다 발전된 갱스타 랩까지 시도하였다.

그런가 하면 랩에 이어 뒤늦게 레게 선풍이 불었는데 김건모의 <핑계>는 가요사상 가장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

한국 대중음악의 위기[편집]

韓國大衆音樂-危機

이후 우리나라 가요계는 주로 댄스뮤직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지오디(GOD), 비, 세븐, 쥬얼리, 코요태, 제이티엘(JTL), 이효리, 보아, 쿨 등의 어린 신세대 스타들이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댄스뮤직의 열풍은 우리 가요계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현재 가요계는 댄스뮤직 제작자만 활개를 치고 있고 의식있는 제작자는 모두 동면에 들어간 상태이다. 현재의 대중음악

풍토는 의식있는 제작자들의 음악을 이해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배척하는 분위기이다.

과거에도 팝 뮤직계에서 댄스뮤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50년대 맘보와 차차차로 시작해 60년대 트위스트와 림보, 70년대 고고와 디스코의 물결이 밀려왔으며, 80년대는 브레이크 댄스가 위세를 떨쳤고, 90년대에 들어 랩이나 힙합이 등장했지만 정작 팝의 본고장인 미국은 지금의 우리처럼 극성은 아니었다.

미국에서의 랩이나 힙합은 마침 90년대의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대두한 X세대층의 호응을 얻어 각광을 받았지만 잠시였을 뿐 이미 복고현상으로 돌아섰다.

그 증거가 얼터너티브로 표현된 모던록의 각광으로 다분히 복고적인 사운드가 주류를 이룬다. 더구나 X세대가 소멸되면서 X세대층을 겨냥했던 영화와 음악 등이 판매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는 X세대를 구별짓는 '모호한 정체성' 즉 기존의 가치관과 틀에 대한 거부, 무시를 통해 스스로를 차별화하려 했던 무정형의 특성이 부메랑 효과를 일으키듯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쳐 결국 X세대라는 집단의 세력화와 계속성을 막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조짐이 뒤따를 것이고 그러다 보면 댄스뮤직의 범람도 그 한계의 벽에 부딪힐 것이다.

21세기의 음악[편집]

21世紀-音樂

그러면 다가올 21세기의 대중음악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우선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기기의 발전은 보다 더 테크놀러지한 방향으로 진행되리라 본다. 20세기의 총아로 각광을 받고 있는 컴퓨터 뮤직은 미국의 물리학 박사 로버트 무그에 의해 1964년에 개발된 신데사이저가 시초이다.

처음에는 실험적인 작곡가들에 의해 사용되었으나 차츰 전위음악 또는 음향효과에 이용되다가 나아가서 더 많은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들이 사용했고 나중에는 디스코 음악에까지 이용될 정도로 일반화된 매체이다. 근자에도 컴퓨터와 연결시켜 시퀀스 등을 사용한 컴퓨터 뮤직으로 전위적인 사운드를 추구하거나 테크노 팝에서 많이 이용하고 있는 등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기계음에 식상한 부류들에 의한 어쿠스틱한 사운드도 결코 소멸되지 않고 복고현상과 함께 계승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1976-1977년경 급속히 부상한 루 리드를 리더로 하는 벨벳언더그라운드, 뉴욕 돌스, 섹스 피스톨스 등의 펑크 록은 니힐리즘(허무주의)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분방한 뉴웨이브 움직임과 사이버 펑크로 발전해 21세기 신문화의 가능성으로 대변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