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1장~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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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시 사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려쪼이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장로의 딸 선형(善馨)이가 명년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고빙하여 오늘 오후 세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라.

이형식은 아직 독신이라, 남의 여자와 가까이 교제하여 본 적이 없고 이렇게 순결한 청년이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젊은 여자를 대하면 자연 수줍은 생각이 나서 얼굴이 확확 달며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남자로 생겨나서 이러함이 못생겼다면 못생겼다고도 하려니와, 여자를 보면 아무러한 핑계를 얻어서라도 가까이 가려 하고, 말 한마디라도 하여 보려 하는 잘난 사람들보다는 나으리라.

형식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우선 처음 만나서 어떻게 인사를 할까. 남자 남자 간에 하는 모양으로, ‘처음 보입니다. 저는 이형식이올시다’ 이렇게 할까. 그러나 잠시라도 나는 가르치는 자요, 저는 배우는 자라, 그러면 미상불 무슨 차별이 있지나 아니할까. 저편에서 먼저 내게 인사를 하거든 그제야 나도 인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할까. 그것은 그러려니와 교수하는 방법은 어떻게나 할는지. 어제 김장로에게 그 청탁을 들은 뒤로 지금껏 생각하건마는 무슨 묘방이 아니 생긴다. 가운데 책상을 하나 놓고, 거기 마주앉아서 가르칠까. 그러면 입김과 입김이 서로 마주치렷다. 혹 저편 히사시가미(양갈래로 딴 머릿단)가 내 이마에 스칠 때도 있으렷다. 책상 아래에서 무릎과 무릎이 가만히 마주 닿기도 하렷다.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얼굴이 붉어지며 혼자 빙긋 웃었다. 아니 아니? 그러다가 만일 마음으로라도 죄를 범하게 되면 어찌하게. 옳다? 될 수 있는 대로 책상에서 멀리 떠나 앉겠다. 만일 저편 무릎이 내게 닿거든 깜짝 놀라며 내 무릎을 치우리라. 그러나 내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면 여자에게 대하여 실례라, 점심 후에는 아직 담배는 아니 먹었건마는,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고 입김을 후 내어 불어 본다. 그 입김이 손바닥에 반사되어 코로 들어가면 냄새의 유무를 시험할 수 있음이라. 형식은, 아뿔싸! 내가 어찌하여 이러한 생각을 하는가, 내 마음이 이렇게 약하던가 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신에 힘을 주어 이러한 약한 생각을 떼어 버리려 하나, 가슴속에는 이상하게 불길이 확확 일어난다. 이때에,

“미스터 리, 어디로 가는가”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쾌활하기로 동류간에 유명한 신우선(申友善)이가 대팻밥 모자를 갖춰 쓰고 활개를 치며 내려온다. 형식은 자기 마음속을 꿰뚫어보지나 아니한가 하여 두 뺨이 한번 더 후끈하는 것을 겨우 참고 지어서 쾌활하게 웃으면서,

“오래 막혔구려” 하고 손을 잡아 흔들었다.

“오래 막혔구려는 무슨 막혔구려야. 일전 허교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형식은 얼마큼 마음에 수치한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리며,

“아직 그런 말에 익숙지를 못해서……” 하고 말끝을 못 맺는다.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인가? 급지 않거든 점심이나 하세그려.”

“점심은 먹었는걸.”

“그러면 맥주나 한잔 먹지.”

“내가 술을 먹는가.”

“그만두게. 사나이가 맥주 한 잔도 못 먹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자 잡말 말고 가세” 하고 손을 끌고 안동파출소 앞 청국 요릿집으로 들어간다.

“아닐세. 다른 날 같으면 사양도 아니하겠네마는” 하고 다른 날이란 말이 이상하게나 아니 들렸는가 하여 가슴이 뛰면서,

“오늘은 좀 일이 있어.”

“일? 무슨 일? 무슨 술 못 먹을 일이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 같으면 이러한 경우에 다만 ‘급히 좀 볼일이 있어’ 하면 그만이려니와 워낙 정직하고 나약한 형식이라, 조곰이라도 거짓말을 못하여 한참 주저주저하다가,

“세시부터 개인교수가 있어.

“영어?”

“응.”

“어떤 사람인데 개인교수를 받어?”

형식은 말이 막혔다. 우선은 남의 폐간을 꿰뚫어볼 듯한 두 눈으로 형식의 얼굴을 유심하게 들여다본다. 형식은 눈이 부신 듯이 고개를 숙인다.

“응, 어떤 사람인데 말을 못 하고 얼굴이 붉어지나, 응?”

형식은 민망하여 손으로 목을 쓸어 만지고 하염없이 웃으며,

“여자야.”

“요― 오메데토오(아― 축하하네). 이이나즈케(약혼한 사람)가 있나 보네그려. 음 나루호도(그러려니). 그러구도 내게는 아무 말도 없단 말이야. 에, 여보게” 하고 손을 후려친다.

형식은 하도 심란하여 구두로 땅을 파면서,

“아니야. 저, 자네는 모르겠네. 김장로라고 있느니…….”

“옳지, 김장로의 딸일세그려? 응. 저, 옳지, 작년이지. 정신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명년 미국 간다는 그 처녀로구먼. 베리 굿.”

“자네 어떻게 아는가?”

“그것 모르겠나. 이야시쿠모(적어도) 신문기자가. 그런데 언제 엥게지먼트를 하였는가.”

“아니오. 준비를 한다고 날더러 매일 한 시간씩 와달라기에 오늘 처음 가는 길일세.”

“아따, 나를 속이면 어쩔 터인가.”

“엑.”

“히히, 그가 유명한 미인이라대. 자네 힘에 웬걸 되겠나마는 잘 얼러 보게. 그러면 또 보세” 하고 대팻밥 벙거지를 벗어 활활 부채를 하며 교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형식은 이때껏 그의 너무 방탕함을 허물하더니 오늘은 도리어 그 파탈하고 쾌활함이 부러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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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이라는 말도 듣기 싫지 아니하거니와 이이나즈케(약혼), 엥게지먼트라는 말이 이상하게 기쁘게 들린다. 그러나 ‘자네 힘에 웬걸 되겠는가’ 하였다. 과연 형식은 아무 힘도 없다. 황금시대에 황금의 힘도 없고, 지식시대에 남이 우러러볼 만한 지식의 힘도 없고, 예수 믿는 지는 오래나 워낙 교회에 뜻이 없으며 교회 내의 신용조차 그리 크지 못하다. 아무 지식도 없고, 아무 덕행도 없는 아이들이 목사나 장로의 집에 자주 다니며 알른알른하는 덕에 집사도 되고, 사찰도 되어 교회 내에서 젠체하는 꼴을 볼 때마다 형식은 구역이 나게 생각하였다. 실로 형식에게는 시체 하이칼라 처자의 애정을 끌 만한 아무 힘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형식은 자연히 낙심스럽기도 하고, 비감스럽기도 하였다. 이럴 즈음에 김광현(金光鉉)이라 문패 붙은 집 대문에 다다랐다. 비록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는 예수의 사도연마는 그도 개명하면 땅도 사고, 수십 인 하인도 부리는 것이라. 김장로는 서울 예수교회 중에도 양반이요 재산가로 두셋째에 꼽히는 사람이라. 집도 꽤 크고 줄행랑조차 십여 간이 늘어 있다. 형식은 지위와 재산의 압박을 받는 듯한, 일변 무섭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면서 소리를 가다듬어, “이리 오너라” 하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무리 하여도 뚝 자리가 잡히지 못하고, 시골 사람이 처음 서울 와서 부르는 소리와 같이 어리고 떨리는 맛이 있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하는 어멈의 말을 따라 새삼스럽게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중문을 지나 안대청에 오르다. 전 같으면 외객이 중문 안에를 들어설 리가 없건마는 그만하여도 옛날 습관을 많이 고친 것이라. 대청에는 반양식으로 유리 문도 하여 달고 가운데는 무늬 있는 책상보 덮은 테이블과 네다섯 개 홍모전 교의가 있고, 북편 벽에 길이나 되는 책상에 신구서적이 쌓였다. 김장로가 웃으면서 툇마루에 나와 형식이가 구두끈 끄르기를 기다려 손을 잡아 인도한다. 형식은 다시 온공하게 국궁례를 드린 후에 권하는 대로 교의에 앉았다. 김장로는 이제 사십오륙 세 되는 깨끗한 중로라. 일찍 국장도 지내고 감사도 지낸 양반으로서 십여 년 전부터 예수교회에 들어가 작년에 장로가 되었다. 김장로가 형식에게 부채를 권하며,

“매우 덥구려. 자 부채를 부치시오.”

“녜, 금년 두고 처음인가 봅니다.”

하고 부채를 들어 두어 번 부치고 책상 위에 놓았다. 장로가 책상 위에 놓인 초인종을 두어 번 울리니 건넌방으로서, “녜” 하고 열너덧 살 된 예쁜 계집아이가 소반에 유리 대접과 은으로 만든 서양 숟가락을 놓아 내어다가 형식의 앞에 놓는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복숭아 화채에 한줌이나 될 얼음을 띄웠다. 손이 오기를 기다리고 미리 만들어 두었던 모양이라.

“자, 더운데 이것이나 마시오.”

하고 장로가 친히 숟가락을 들어 형식을 준다. 형식은 사양할 필요도 없다 하여 연해 십여 술을 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두 손으로 치어들고 죽 들이켜고 싶건마는 혹 남 보기에 체면 없어 보일까 저어하여 더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술을 놓았다. 그만하여도 얼마큼 속이 뚫리고 땀이 걷고 정신이 쇄락하여진다. 장로는,

“일전에도 말씀하였거니와 내 딸을 위하여 좀 수고를 하셔야 하겠소. 분주하신 줄도 알지마는 달리 청할 사람이 없소그려. 영어를 아는 사람이야 많겠지오마는 그렇게…… 어…… 말하자면…… 노형 같은 이가 드무시니까.”

하고 잠시 말을 끊고 ‘너는 신용할 놈이지’ 하는 듯이 형식을 본다. 형식은 남이 젊은 딸을 제게 맡기도록 제 인격을 신용하여 주는 것이 한껏 기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아까 입에 손을 대고 냄새나는 것을 시험하던 생각을 하면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복받쳐 올라온다. 그러나 기실 장로는 여러 사람의 말도 듣고 친히 보기도 하여 형식의 인격을 아주 신용하므로 이번 계약을 맺은 것이라. 여간 잘 알아보지 아니하고야 미국까지 보내려는 귀한 딸을 젊은 교사에게 다만 매일 한 시간씩이라도 맡길 리가 없는 것이라. 장로는 다시 말을 이어,

“하니까 노형께서 맡아서 일년 동안에 무엇을 좀 알도록 가르쳐 주시오.”

“제가 아는 것이 없어서 그것이 민망하올시다.”

“천만에. 영어뿐 아니라 노형의 학식은 내가 다 들어 아는 바요.”

하고 다시 초인종을 울리니, 아까 나왔던 계집아이가 나온다.

“얘, 이것(화채 그릇) 들여가고 마님께 아씨 데리고 이리 나옵시사고 여쭈어라.”

“녜” 하고 소반을 들고 들어가더니, 저편 방에서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장차 일생에 처음 당하는 무슨 큰일을 기다리는 듯이 속이 자못 덜렁덜렁하며 가슴이 뛰고 두 뺨이 후끈후끈한다. 형식은 장로의 눈에 아니 띄우리만큼 가만가만히 옷깃을 바르고, 몸을 바르고, 눈과 얼굴에 아무쪼록 젊지 아니한 위엄을 보이려 한다.

이윽고 건넌방 발이 들리며 나이 사십이 될락말락한 부인이 연옥색 모시 적삼, 모시 치마에 그와 같이 차린 여학생을 뒤세우고 테이블 곁으로 온다. 형식은 반쯤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서 공손하게 읍하였다. 부인과 여학생도 읍하고, 장로의 가리키는 교의에 걸터앉는다. 형식도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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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가 형식을 가리키며,

“이 어른이 내가 매양 말하던 이형식 씨요. 젊으시지마는 학식이 도저하고 또 문필도 유명한 어른이오. 이번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쳐 줍소사 하고 내가 청하였더니, 분주하심도 헤아리지 아니시고 이처럼 허락을 하여 주셨소. 이제부터 매일 오실 터이니까 내가 출입하고 없더라도 부인께서 잘 접대를 하셔야 하겠소” 하고 다시 형식을 향하여,

“이가 내 아내요, 저애가 내 딸이오. 이름은 선형인데 작년에 정신학교라고 졸업은 하였지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요.”

형식은 누구를 향하는지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부인과 선형이도 답례를 한다. 부인은 형식을 보며,

“제 자식을 위하여 수고를 하신다니 감사하올시다. 젊으신 이가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셨는지, 참 은혜 많이 받으셨삽니다.”

“천만에 말씀이올시다” 하고 형식은 잠깐 고개를 들어 부인을 보는 듯 선형을 보았다. 선형은 한 걸음쯤 그 모친의 뒤에 피하여 한편 귀와 몸의 반편이 그 모친에게 가리웠다. 고개를 숙였으며 눈은 보이지 아니하나 난 대로 내어 버린 검은 눈썹이 하얗게 널찍한 이마에 뚜렷이 춘산을 그리고 기름도 아니 바른 까만 머리는 언제 빗었는가 흐트러진 두어 오리가 불그레 복숭아꽃 같은 두 뺨을 가리어 바람이 부는 대로 하느적하느적 꼭 다문 입술을 때리고, 깃 좁은 가는 모시 적삼으로 혈색 좋은 고운 살이 몽롱하게 비추이며, 무릎 위에 걸어 놓은 두 손은 옥으로 깎은 듯 불빛에 대면 투명할 듯하다. 그 부인은 원래 평양 명기 부용이라는 인물 좋고 글 잘하고 가무에 빼어나 평양 춘향이라는 별명 듣던 사람이러니, 이십여 년 전 김장로의 부친이 평양에 감사로 있을 때에 당시 이십여 세 풍류 남아이던 책방 도령 이도령이라, 김도령의 눈에 들어 십여 년 전 김장로의 소실로 있다가 본부인이 별세하자 정실로 승차하였다. 양반의 가문에 기생 정실이 망령이어니와, 김장로가 예수를 믿은 후로 첩 둠을 후회하나 자녀까지 낳고 십여 년 동거하던 자를 버림도 도리에 그르다 하여 매우 양심에 괴롭게 지내다가, 행인지 불행인지 정실이 별세하므로 재취하라는 일가와 붕우의 권유함도 물리치고 단연히 이 부인을 정실로 삼았음이라. 부인은 사십이 넘어서 눈꼬리에 가는 주름이 약간 보이건마는, 옛날 장부의 간장을 녹이던 아리땁고 얌전한 모양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선형의 눈썹과 입 얼레는 그 모친과 추호 불차니, 이 눈썹과 입만 가지고도 족히 미인 노릇을 할 수가 있으리라. 형식은 선형을 자기의 누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형식이가 남의 처녀를 대할 때마다 생각하는 버릇이니, 형식은 처녀를 대할 때에 누이라고밖에 더 생각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은, 가슴속에 이상한 불길이 일어남이니, 이는 청년 남녀가 가까이 접할 때에 마치 음전과 양전이 가까워지기가 무섭게 서로 감응하여 불꽃을 일리는 것과 같이 면치 못할 일이며, 하늘이 만물을 내실 때에 정한 일이라, 다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덕과 수양의 힘으로 제어할 뿐이니라. 형식이 말없이 앉았는 양을 보고 장로가 선형더러,

“얘, 지금 곧 공부를 시작하지. 아차, 순애는 어디 갔느냐. 그애도 같이 배워라. 나도 틈 있는 대로는 배울란다.”

“녜” 하고 선형이가 일어나 저편 방으로 가더니 책과 연필을 가지고 나온다. 그 뒤로 선형과 동년배 되는 처녀가 그 역시 책과 연필을 들고 나와 공순하게 읍한다. 장로가, “이애가 순애인데 내 딸의 친구요. 부모도 없고 집도 없는 불쌍한 아이요” 하는 말을 듣고 형식은 자기와 자기의 누이의 신세를 생각하고 다시금 순애의 얼굴을 보았다. 의복 머리를 선형과 꼭 같이 하였으니 두 사람의 정의를 가히 알려니와, 다만 속이지 못할 것은 어려서부터 세상 풍파에 부대낀 빛이 얼굴에 박혔음이라. 그 빛은 형식이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볼 때에 있는 것이요, 불쌍한 자기 누이를 볼 때에 있는 것이라. 형식은 순애를 보매 지금껏 가슴에 설렁거리던 것이 다 스러지고 새롭게 무거운 듯한 감정이 생겨 부지불각에 동정의 한숨이 나오며 또 한번 순애를 보았다. 순애도 형식을 본다.

장로와 부인은 저편 방으로 들어가고 형식과 두 처녀가 마주앉았다. 형식은 힘써 침착하게,

“이전에 영어를 배우셨습니까.”

하고, 이에 처음 두 처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두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이 없다. 형식도 어이없이 앉았다가 다시,

“이전에 좀 배우셨는가요.”

그제야 선형이가 고개를 들어 그 추수같이 맑은 눈으로 형식을 보며,

“아주 처음이올시다. 이 순애는 좀 알지마는.”

“아니올시다. 저도 처음입니다.”

“그러면 에이, 비, 시, 디도……? 그것은 물론 아실 터이지오마는.”

여자의 마음이라 모른다기는 참 부끄러운 것이라 선형은 가지나 붉은 뺨이 더 붉어지며,

“이전에는 외웠더니 다 잊었습니다.”

“그러면 에이, 비, 시, 디부터 시작하리까요?”

“녜” 하고 둘이 함께 대답한다.

“그러면, 그 공책과 연필을 주십시오. 제가 에이, 비, 시, 디를 써 드릴 것이니.”

선형이가 두 손으로 공책에다 연필을 받쳐 형식을 준다. 형식은 공책을 펴놓고 연필 끝을 조사한 뒤에 똑똑하게 a, b, c, d를 쓰고, 그 밑에다가 언문으로 ‘에이’ ‘비’ ‘시’ 하고 발음을 달아 두 손으로 선형에게 주고 다시 순애의 공책을 당기어 그대로 하였다.

“그러면 오늘은 글자만 외기로 하고 내일부터 글을 배우시지요. 자 한번 읽읍시다. 에이.” 그래도 두 학생은 가만히 있다.

“저 읽는 대로 따라 읽읍시오. 자, 에이, 크게 읽으셔요. 에이.” 형식은 기가 막혀 우두커니 앉았다. 선형은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꼭 물고, 순애도 웃음을 참으면서 선형의 낯을 쳐다본다. 형식은 부끄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당장 일어나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난다. 이때에 장로가 나오면서,

“읽으려무나, 못생긴 것. 선생님 시키시는 대로 읽지 않고.”

그제야 웃음을 그치고 책을 본다. 형식은 하릴없이 또 한번,

“에이.”

“에이.”

“비.”

“비.”

“시.”

“시.”

이 모양으로 ‘와이’ ‘제트’까지 삼사 차를 같이 읽은 후에 내일까지 음과 글씨를 다 외우기로 하고 서로 경례하고 학과를 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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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김장로 집에서 나와서 바로 교동 자기 객주로 돌아왔다. 마치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다만 일년 넘어 다니던 습관으로 집에 왔다. 말하자면 형식이가 온 것이 아니요, 형식의 발이 형식을 끌고 온 모양이라.

주인 노파가 저녁상을 차리다가 치마로 손을 씻으면서,

“이선생 웬일이시오” 하고 이상하게 웃는다. 형식은 눈이 둥글하여지며,

“왜요.”

“아니, 그처럼 놀라실 것은 없지마는…….”

“왜 무슨 일이 생겼어요?” 하고 우뚝 서서 노파를 본다. 노파는 그 시치미떼고 놀라는 양이 우스워서 혼자 깔깔 웃더니,

“아까 석점쯤 해서 어떤 어여쁜 아가씨가 선생을 찾아오셨는데 머리는 여학생 모양으로 하였으나 아무리 보아도 기생 같습디다. 선생님도 그런 친구를 사귀는지.”

“어떤 아가씨? 기생?” 하고 형식은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구두끈을 끄르고 마루에 올라서면서,

“서울 안에는 나를 찾아올 여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아마 잘못 알고 왔던 게로구려.”

“에그, 아주 모르는 체하시지. 평양서 오신 이형식 씨라고, 똑똑히 그러던데.”

형식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앉았더니,

“암만해도 모르는 일이외다. 그래 무슨 말은 없어요……?”

“이따가 저녁에 또 온다고 하고 매우 섭섭해서 갑데다.”

“그래 나를 아노라고 그래요.”

“에그, 모르는 이를 왜 찾을꼬. 자 들어가셔서 저녁이나 잡수시고 기다리십시오. 밥맛이 달으시겠습니다.”

형식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아니한다. 과연 형식을 찾을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 장차 김선형이나 윤순애가 형식을 찾아오게 될는지는 모르거니와 지금 어느 여자가 형식을 찾으리요. 하물며 기생인 듯한 여자가. 형식은 밥상을 앞에 놓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어 좀 지나면 온다 하였으니 그때가 되면 알리라 하고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신문을 볼 즈음에 대문 밖에 찾는 사람이 있다. 노파가, “이것 보시오” 하고 눈을 꿈적하고 나간다. “이선생 돌아오셨어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노파의 뒤를 따라 어떤 젊은 여자가 들어온다. 아까 노파의 말과 같이 모시 치마 저고리에 머리도 여학생 모양으로 쪽쪘다. 형식도 말이 없고 여자도 말이 없고 노파도 어인 영문을 모르고 우두커니 섰다. 여자가 잠깐 형식을 보더니, 노파더러,

“이선생께서 계셔요?”

“저 어른이 이선생이시외다” 하고 노파도 매우 수상해한다.

“녜, 내가 이형식이오. 누구시오니까.”

여자는 깜짝 놀라는 듯이 몸을 흠칫하고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폭 숙인다. 해가 벌써 넘어가고 집집 광명등이 반작반작 눈을 뜬다. 형식은 무슨 까닭이 있음을 알고, 얼른 일어나 램프에 불을 켜고 마루에 담요를 내어 깐 뒤에,

“아무려나 이리 올라오십시오. 아까도 오셨더라는데 마침 집에 없어서 실례하였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저 같은 계집이 찾아와 선생님의 명예에 상관이 아니 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우선 올라오십시오. 무슨 일이신지…….”

여자는 은근하게 예하고 올라온다. 데리고 온 계집아이도 올라앉는다. 형식도 앉았다. 노파는 건넌방에서 불도 아니 켜고 담배를 피우면서 이 광경을 본다.

형식은 불빛에 파래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이윽히 보더니, 무슨 생각나는 일이 있는지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감는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글쎄올시다. 얼굴이 혹 뵈온 듯도 합니다마는.”

“박응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에? 박응진?” 하고 형식은 눈이 둥글하고 말이 막힌다. 여자도 그만 책상 위에 쓰러져 운다. 형식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형식은 비창한 목소리로,

“아아, 영채 씨로구려. 영채 씨로구려. 고맙소이다. 나같이 은혜 모르는 놈을 찾아 주시기 고맙소이다. 아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고 여자의 흑흑 느끼는 소리뿐이로다. 따라온 계집아이도 주인의 손에 매어달려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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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십유여 년 전이로다. 평안남도 안주읍에서 남으로 십여 리 되는 동네에 박진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십여 년을 학자로 지내어 인근 읍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일가가 수십여 호 되고, 양반이요 재산가로 고래로 안주 일읍에 유세력자러니, 신미년 난 역적의 혐의로 일문이 혹독한 참살을 당하고, 어찌어찌하여 이 박진사의 집만 살아 남았다 하더니 거금 십오륙 년 전에 청국 지방으로 유람을 갔다가 상해서 출판된 신서적을 수십 종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서양의 사정과 일본의 형편을 짐작하고 조선도 이대로 가지 못할 줄을 알고 새로운 문명운동을 시작하려 하였다. 우선 자기 사랑에 젊은 사람을 모아 들이고 상해서 사온 책을 읽히며 틈틈이 새로운 사상을 강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의 귀에는 철도나 윤선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아니하여 박진사를 가리켜 미친 사람이라 하고, 사랑에 모였던 선배들도 하나씩 하나씩 헤어지고 말았다. 이에 박진사는 공부하려도 학자 없어 못 하는 불쌍한 아이들을 하나 둘 데려다가 공부시키기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 삼사 년 후에는 그의 교육을 받은 학생이 이삼십 명이나 되게 되었고, 그 동안 그 이삼십 명의 의식과 지필묵은 온통 자담하였다. 그러할 즈음에 평안도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각처에 학교가 울흥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박진사는 즉시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고 아들 둘도 그렇게 시켰다. 머리 깎고 검은 옷 입는 것이 그때치고는 대대적 대용단이라. 이는 사천여 년 내려오던 굳은 습관을 다 깨트려 버리고, 온전히 새것을 취하여 나아간다는 표라. 인해 집 곁에 학교를 짓고 서울에 가서 교사를 연빙하며 학교 소용 제구를 구하여 왔다. 일변 동네 사람을 권유하며, 일변 아이들과 청년들을 달래어 학교에 와 배우도록 하였다. 일년이 지나매 이삼십 명 학생이 모이고, 교사도 두 사람을 더 연빙하였다. 학생은 삼십 이하, 칠팔 세 이상이었다. 이렇게 학교 경비를 전담하는 외에도 여전히 십여 명 청년을 길렀다. 이 이형식도 그 십여 명 중의 하나이라. 그때 형식은 부모를 여의고 의지가지없이 돌아다니다가 박진사가 공부시킨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던 것이라. 마침 형식은 사람도 영리하고 마음이 곧고 재주가 있고, 또 형식의 부친은 이전 박진사와 동년지우이므로 특별히 박진사의 사랑을 받았다. 그때 박진사의 아들 형제는 다 형식보다 사오 세 위로되 학력은 형식에게 밀리고 더구나 산술과 일어는 형식에게 배우는 처지였다. 그러므로 여러 동창들은 형식이가 장차 박선생의 사위가 되리라 하여 농담삼아, 시기삼아 조롱하였다. 대개 우리 소견에 박선생이라 하면 전국에 제일가는 선생인 줄 알았음이라. 그때 박진사의 딸 영채의 나이 열 살이니 지금 꼭 열아홉 살일 것이라. 박진사는 남이 웃는 것도 생각지 아니하고 영채를 학교에 보내며 학교에서 돌아온 뒤에는 소학, 열녀전 같은 것을 가르치고 열두 살 되던 여름에는 시전도 가르쳤다. 박진사의 위인이 점잖고 인자하고 근엄하고도 쾌활하여 어린 사람들도 무서운 선생으로 아는 동시에 정다운 친구로 알았었다. 그는 세상을 위하여 재산을 바치고 집을 바치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목숨까지라도 바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동네 사람들은 그의 성력을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이러한 지 육칠 년에 원래 그리 많지 못하던 재산도 다 없어지고 조석까지 말유하게 되니, 학교를 경영할 방책이 만무하다. 이에 진사는 읍내 모모 재산가를 몸소 방문도 하고 사람도 보내어 자기 경영하는 학교를 맡아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는 오직 세상을 위하여 자기의 온 재산과 온 성력을 다 들인 학교를 남에게 내어맡기려 하건마는 어느 누가 ‘내가 맡으마’ 하고 나서는 이는 없고 도리어 ‘제가 먹을 것이 없어 저런다’ 하고 비웃었다. 육십이 다 못 된 박진사는 거의 백발이 되었다. 먹을 것이 없으매 사랑에 모여 있던 학생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제일 나 많은 홍모와 제일 나 어린 이형식만 남았다. 형식은 그때 열여섯 살이었다.

그해 가을에 거기서 십여 리 되는 어느 부잣집에 강도가 들어 주인의 옆구리를 칼로 찌르고 현금 오백여 원을 늑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강도는 박진사 집 사랑에 있는 홍모라, 자기의 은인인 박진사의 곤고함을 보다 못하여, 처음에는 좀 위협이나 하고 돈을 떼어 올 차로 갔더니 하도 주인이 무례하고 또 헌병대에 고소하겠노라 하기로 죽이고 왔노라 하고 돈 오백 원을 내어놓는다. 박진사는 깜짝 놀라며,

“이 사람아, 왜 이러한 일을 하였는가. 부지런히 일하는 자에게 하늘이 먹고 입을 것을 주나니…… 아아, 왜 이러한 일을 하였는가” 하고 돈을 도로 가지고 가서 즉시 사죄를 하고 오라 하였더니, 중도에서 포박을 당하고 강도, 살인, 교사 급 공범 혐의로 박진사의 삼부자는 그날 아침으로 포박을 당하였다. 박진사의 집에 남은 것은 두 며느리와 영채와 형식뿐, 영채의 모친은 영채를 낳고 두 달이 못 하여 별세하였었다.

그 후에 박진사의 사랑에 있던 학생도 몇 사람 붙들리고 형식도 증거인으로 불려 갔었으나 이틀 만에 놓였다.

두어 달 후에 홍모와 박진사는 징역 종신, 박진사의 아들 형제는 징역 십오 년, 기타는 혹 칠 년 혹 오 년의 징역의 선고를 받고 평양감옥에 들어갔다.

인해 하릴없이 두 며느리는 각각 친정으로 가고, 영채는 외가로 가고, 형식은 다시 의지를 잃고 적막한 천지에 부평같이 표류하였다. 그후 형식은 두어 번 평양 감옥으로 편지를 하였으나 편지도 아니 돌아오고 회답도 없었다. 작년 하기에 안주를 갔더니 박진사의 집에는 낯모를 사람들이 장기를 두며 웃더라. 이제 칠 년 만에 서로 만난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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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번개같이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눈물을 거두고 그 앞에 엎더져 우는 영채를 보았다. 그때― 십 년 전에 상긋상긋 웃으면서 어깨에도 매어달리고 손도 잡아 끌며 오빠 오빠 하던 계집아이가 벌써 이렇게 어른이 되었다. 그 동안 칠팔 년에 어떠한 풍상을 겪었나.

형식은 남자로되 지난 칠팔 년을 고생과 눈물로 지냈거든 하물며 연약한 어린 여자로 오죽 아프고 쓰렸으랴. 형식은 그 동안 지낸 일을 알고 싶어, 우는 영채의 어깨를 흔들며,

“울지 말으시오. 자, 말씀이나 들읍시다. 녜, 일어앉으세요.”

울지 말라 하는 형식이도 아니 울 수가 없거든 영채의 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자, 일어나시오.”

“녜, 자연히 눈물이 납니다그려.”

“……”

“선생을 뵈오니 돌아가신 부친님과 오라버님들을 함께 뵈온 것 같습니다” 하고 또 울며 쓰러진다. ‘돌아가신!’ 박진사 삼부자는 마침내 죽었는가. 집을 없이하고, 재산을 없이하고, 마침내 몸을 없이하였는가. 불쌍한 나를 구원하여 주던 복 있는 집 딸이 복 있던 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또 불쌍한 사람이 되었는가. 세상일을 어찌 믿으랴. 젊은 사람의 생명도 믿을 수 없거든 하물며 물거품 같은 돈과 지위랴. 박진사가 죽었다 하면 옥중에서 죽었을지니, 같은 옥중에 있으면서 아들들이나 만나 보았는가. 누가 임종에 물 한 술을 떠넣었으며, 누가 눈이나 감겼으리요. 외롭게 죽은 몸이 섬거적에 묶이어 까마귀 밥이 되단 말가. 그가 죽으매 슬퍼할 이 뉘뇨. 막막하게 북망으로 돌아갈 때에 누가 눈물을 흘렸으리요. 그가 위하여 눈물 흘리던 세상은 다시 그를 생각함이 없고, 도리어 그의 혈육을 핍박하고 회롱하도다. 하늘이 뜻이 있다 하면 무정함이 원망스럽고, 하늘이 뜻이 없다 하면 인생을 못 믿으리로다.

“돌아가시다니,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녜, 옥에 가신 지 이태 만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아버님 돌아가신 지 보름 만에 오라버니 두 분도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한 말은 알 수 없으나 옥에서는 병에 죽었다 하고 어떤 간수의 말에는, 첨에 아버님께서 굶어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맏오라버니께서 또 굶어 돌아가시고, 맏오라버니 돌아가신 날 작은오라버니는 목을 매어 돌아가셨다고 합데다” 하고 말끝에 울음이 복받쳐 나온다. 형식도 불식부지간에 소리를 내어 운다.

주인 노파는 처음에는 이형식을 후리려고 나오는 추한 계집으로만 여겼더니 차차 이야기를 들어 보니 본래 양가 여자인 듯하고, 또 신세가 가이없은지라, 자기 방에 혼자 울다가 거리에 나아가 빙수와 배를 사가지고 들어와 영채를 흔든다.

“여보, 일어나 빙수나 한잔 자시오. 좀 속이 시원하여질 테니. 이제 울으시면 어짜요? 다 팔자로 알고 참아야지. 나도 젊어서 과부 되고 다 자란 자식 죽고…… 그러고도 이렇게 사오. 부모 없는 것이 남편 없는 것에 비기면 우스운 일이랍니다. 이제 청춘에 전정이 구만리 같은데 왜 걱정을 하겠소. 자 어서 울음 그치고 빙수나 자시오. 배도 자시구” 하며 분주히 부엌에 가서 녹슨 식칼을 가져다가 배를 깎으면서,

“여봅시오, 선생께서 좀 위로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더 울으시니…….”

“가슴이 터져 오는 것을 아니 울면 어찌하오. 이가 내 사오 년간 양육받은 은인의 따님이오그려. 그런데 그 은인은 애매한 죄로 옥에서 죽고, 그의 아들 형제는 아버지를 좇아 죽고, 천지간에 은인의 혈육이라고는 이분네 하나뿐이오그려. 칠팔 년 동안이나 생사를 모르다가 이렇게 만나니 왜 슬프지를 아니하겠소.”

“슬프나 울면 어찌하나요” 하고 배를 깎아 들고 영채를 한 팔로 안아 일으키면서,

“초년 고락은 낙의 본입니다. 너무 설워 말으시고 이 배나 하나 자시오.”

영채도 친절한 말에 감격하여 눈물을 씻고 배를 받는다. 형식은 다시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보니 과연 그때의 모양이 있다. 더욱 그 큼직한 눈이 박진사를 생각게 한다. 영채도 형식의 얼굴을 본다. 얼굴이 이전보다 좀 길어진 듯하고 코 아래 수염도 났으나 전체 모양은 전과 같다 하였다. 마주보는 두 사람의 흉중에는 십여 년 전 일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휙휙 생각이 난다. 즐겁게 지내던 일, 박진사가 포박되어 갈 적에 온 집안이 통곡하던 일, 식구들은 하나씩 하나씩 다 흩어지고 수십 대 내려오던 박진사 집이 아주 망하게 되던 일, 떠나던 날 형식이가 영채를 보고, “이제는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다. 네게 오빠란 말도 다시는 못 듣겠다” 할 적에 영채가, “가지 마오. 나와 같이 갑시다” 하고 가슴에 와 안기며 울던 생각이 어제런 듯 역력하게 얼른얼른 보인다. 형식은 영채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으려 하여 묻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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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와 형식이 하도 간절히 권하므로 영채도 눈물을 거두고 일어 앉아 빙수를 마시고 배를 먹는다. 눈물에 붉게 된 눈과 두 뺨이 더 애처롭고 아리땁게 보인다. 형식은 얼른 선형을 생각하였다.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그 부모의 귀여워함은 피차에 다름이 없건마는 현재 두 사람의 팔자는 왜 이다지도 다른고. 하나는 부모 갖고, 집 있고, 재산 있어 편안하게 학교에도 다니고, 명년에는 미국까지 간다 하는데, 하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집도 없고, 어디 의지할 곳이 없이 밤낮을 눈물로 보내는고. 만일 선형으로 하여금 이 영채의 신세를 보게 하면 단정코 자기와는 딴 나라 사람으로 알렷다. 즉, 자기는 결단코 영채와 같이 되지 못할 사람이요, 영채는 결단코 자기와 같이 되지 못할 사람으로 알렷다. 또는 자기는 특별히 하늘의 복과 은혜를 받는 사람이요, 영채는 특별히 하늘의 앙화와 형벌을 받는 사람으로 알렷다. 그러하므로 부자가 가난한 자를 압시하고 천대하여 가난한 자는 능히 자기네와 마주서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고, 길가에 굶었다는(굶어 떠는) 거지들을 볼 때에 소위 제 것으로 사는 자들이 개나 도야지와 같이 천대하고 기롱하여 침을 뱉고 발길로 차는 것이라. 그러나 부자 조상 아니 둔 거지가 어디 있으며, 거지 조상 아니 둔 부자가 어디 있으리요. 저 부귀한 자를 보매 자기네는 천지개벽 이래로 부귀하여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부귀할 듯하나, 그네의 조상이 일찍 거지로 다른 부자의 대문에서 그 집 개로 더불어 식은 밥을 다툰 적이 있었고, 또 얼마 못 하여 그네의 자손도 장차 그리 될 날이 있을 것이라. 칠팔 년 전 박진사를 보고야 뉘라서 그의 딸이 칠팔 년 후에 이러한 신세가 될 줄을 짐작하였으랴.

다 같은 사람으로 부하면 얼마나 더 부하며, 귀하다면 얼마나 더 귀하랴. 조고마한 돌 위에 올라서서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이놈들, 나는 너희보다 높은 사람이로다’ 함과 같으니, 제가 높으면 얼마나 높으랴. 또 지금 제가 올라선 돌은 어제 다른 사람이 올라섰던 돌이요, 내일 또 다른 사람이 올라설 돌이다. 거지에게 식은밥 한술을 줌은 후일 네 자손으로 하여금 내 자손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는 뜻이 아니며, 그와 반대로 지금 어떤 거지를 박대하고 기롱함은 후일 네 자손으로 하여금 내 자손에게 이렇게 하여 달라 함이 아닐까. 모르네라, 얼마 후에 영채가 어떻게 부귀한 몸이 되고, 선형이가 어떻게 빈천한 몸이 될는지도. 이렇게 생각하면서 형식은 입을 열어,

“서로 떠난 후에 지내던 말을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선생께서 가신 뒤에 이삼 일이나 더 있다가 저는 외가로 갔습니다” 하고 말을 시작한다. 외가에는, 외조부모는 벌써 죽고 외숙은 그보다 먼저 죽고, 외숙모와 내종형 두 사람과 내종형 자녀들만 있었다. 이미 자기 모친이 없고, 또 가장 다정한 외조부모도 없으니, 외가에를 간들 누가 살뜰하게 하여 주리요. 더구나 내 집이 잘살고야 친척이 친척이라, 내 집에 재산이 있고 세력이 있을 때에는 멀디멀디한 친척까지도 다정한 듯이 찾아오고, 이편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가더라도 큰손님같이 대접하거니와, 내 집이 가난하고 세력이 없어지면 오던 친척도 차차 발이 멀어지고, 내가 저편에 찾아가더라도 ‘또 무엇을 달래러 왔나’ 하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라.

“외숙모님은 저를 귀여하셔서 머리도 빗겨 주시고 먹을 것도 주시건마는 그 맏오라버니댁이 사나워서 걸핏하면 욕하고 때리고 합데다. 그뿐이면 참기도 하려니와, 그 어머니의 본을 받아 아이까지도 저를 업신여기고, 무슨 맛나는 음식을 먹어도 저희들만 먹고 먹어 보라는 말도 아니해요. 그 중에도 열세 살 된 새서방―제 외오촌 조카지요―은 가장 심해서 공연히 이년, 저년 하였습니다. 어린 생각에도, 내가 제 아주머니어든 하는 마음이 있어서” 하고 웃으며, “매우 분하고 괘씸하여 보입데다. 옷은 집에서 서너 벌 가지고 갔었으나, 밤낮 물 긷고 불 때기에 다 더럽고, 더러워도 빨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 제 손으로 빨아서 풀도 아니 먹이고 다리지도 아니하고 입었습니다. 제일 걱정은 옷 한 벌을 너무 오래 입으니깐 이가 끓어서 가려워 못 견디겠어요. 그러나 남 보는 데서는 마음대로 긁지도 못하고 정 견디기 어려울 때에는 뒷울안, 사람 없는 데 가서 실컷 긁기도 하고 혹 이를 잡기도 하였습니다. 하다가 한번은 맏오라버니댁한테 들켜서 톡톡히 꾸중을 듣고, ‘아이들에게 이 오르겠다. 저 헛간 구석에 자빠져 자거라’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제사 때나 명절에 고기나 떡이 생겨도 제게는 먹지 못할 것을 조곰 주고 그러고도 일도 아니하면서 처먹기만 한다고 말을 들었습니다. 한번은 궷속에 넣었던 은가락지 한 쌍이 잃어졌습니다. 저는 또 내가 경을 치나 보다 하고 부엌에 앉았노라니, 아니나다를까, 맏오라버니댁이 성이 나서 뛰어들어오며 부지깽이로 되는 대로 찌르고 때리고 하면서 저더러 그것을 내어놓으랍니다. 저도 그때에는 하도 분이 나서 좀 대답을 하였더니, ‘이년, 이 도적놈의 계집년, 네가 아니 훔치면 누가 훔쳤겠니’ 하고 때립니다. 제 부친께서 도적으로 잡혀갔다고 걸핏하면 도적놈의 계집년이라 하는데, 그 말이 제일 가슴이 쓰립데다.”

“저런 변이 있나. 저런 몹쓸년이 어디 있노” 하고 노파가 듣다고 혀를 찬다. 형식은 말없이 가만히 듣고 앉았다.

영채는 후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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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때리고 맞고 하는 즈음에 이웃에 사는 계집 하나가 와서, ‘저 주막에 있는 갈보가 웬 커다란 은가락지를 꼈습데다. 어디서 났는가 하고 물어 보니까 기와집 새서방이 주더랍데다그려. 새서방님이 요새 자주 다니는가 보더구먼’ 합데다. 이래서 저는 누명을 벗었으나, 그 다음에 오라버니댁과 그 계집과 대판 싸움이 납데다. ‘이년, 서방 있는 년이 남의 어린 사람을 후려다가 끼고 자고, 가락지도 네가 가져오라고 했지 이년’ 하면, ‘제 자식을 잘 가르칠 게지. 남의 탓을 왜’ 이 모양으로 다툽데다.”

“어린것을 가르칠 줄은 모르고 장가만 일찍 들여서 못된 버릇만 배우게 하니.”

하고 형식이가 탄식한다.

“그래서 이선생께서는 장가도 아니 들으시는게구먼.”

영채는 형식이가 일찍 취처 아니했단 노파의 말을 듣고 놀라서 형식을 보았다. 그러고 그 장가 아니 든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 이유가 자기에게 무슨 상관이 없는가 하였다. 이전 부친께서 농담삼아, ‘너 형식의 아내 될래’ 하던 말을 생각하였다. 그때에 어린 생각에도 형식은 참 좋은 사람이거니 하고 사랑에 와 있던 여러 사람 중에도 특별히 형식에게 정이 들었었다. 이래 칠팔 년간에 한강에 뜬 버들잎 모양으로 갖은 고락을 다 겪으며 천애지각으로 표류하면서도 일찍 형식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차차 낫살을 먹어 갈수록 형식의 얼굴이 더욱 정답게 가슴속에 떠 나오더라. 혼자 어디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형식을 생각하고 울면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몸이 팔려 기생 노릇 한 지가 이미 육칠 년에 여러 남자의 청구도 많이 받았건마는 아직 한 번도 몸을 허한 적이 없음은 어렸을 적 소학 열녀전을 배운 까닭도 되거니와, 마음속에 형식을 잊지 못한 것이 가장 큰 까닭이었다. 부친께서, ‘너는 형식의 아내가 되어라’ 하신 말씀을 자라나서 생각하니, 다만 일시 농담이 아니라 진실로 후일에 그 말씀대로 하시려 한 것이라 하고 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부친의 뜻을 아니 어기리라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살았는가 죽었는가. 살았다 하더라도 이미 유실 유가하고 생자 생녀하였으려니 하고는 혼자 절망도 하였으나, 설혹 그러하더라도 나는 일생을 형식에게 바치고 달리 남자를 보지 아니하리라고 굳게 작정하였었다. 이번 우연히 형식을 만나게 되니 기쁨은 기쁘거니와, 자기는 영원히 혼잣몸으로 지내려니 하였다. 그러다가 형식이가 아직 장가 아니 들었단 말을 들으니, 일변 놀랍기도 하고 일변 기쁘기도 하나, 다시 생각하여 보건대 형식은 지금 교육계에 다니는 사람이라, 행실과 명망이 생명이니 기생을 아내로 삼는다 하면 사회의 평론이 어떠할까 하고 다시 절망스러운 마음도 생긴다.

형식으로 말하면, 그 동안 동경에 유학하노라고 장가들 틈도 없었거니와 그 동안 구혼하는 데도 없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공부로 핑계를 삼고 아직도 구혼에 응하지 아니한 것은 중심에 영채를 생각하였음이라. 일찍 박진사가 형식을 대하여 직접으로 말한 적은 없었으나 박진사가 특별히 자기를 사랑하는 양을 보고, 또 남이 전하는 말을 들어도 박진사가 자기로 사위삼으려는 뜻이 있는 줄을 대강 짐작하였었다. 형식이가 박진사의 집을 떠날 때에 영채의 손을 잡고, ‘다시 너를 보지 못하겠다’ 한 것은 여러 가지 깊은 슬픔이 많이 있어서 한 말이라. 그러나 그 후에 영채의 소식을 알 길이 바이 없고, 또 영채의 나이 이미 과년이 된지라 응당 뉘 집 아내가 되어 혹 자녀를 낳았을는지도 모르리라 하였다. 그러하건마는 은사의 뜻을 저버리고 차마 제 몸만 위하여 달리 장가들 마음이 없고 행여나 영채의 소식을 들을까 하고 지금껏 기다리던 차이라.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만나니, 아무리 하여도 기생 노릇을 하는 모양, 그러면 벌써 여러 사람에게 몸을 더럽혔으려니, 만일 그렇다 하면 자기 아내 못 되는 것이 한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애쓰던 은인의 혈육이 이처럼 윤락하게 됨이 원통하여 아까도 슬피 소리를 내어 운 것이요, 또 그 동안 지나온 이야기를 들으려 함도 행여나 기생이나 아니 되었으면 하는 희망과 설혹 되었다 하더라도 옛사람의 본을 받아 송죽 같은 정절을 지켰으면 하는 희망이 있음이라. 이제 형식과 영채는 피차에 저편의 속을 알고 싶어하게 된 것이라.

“그래, 그 다음에 어찌 되었습니까.”

“그날 종일 밥도 아니 먹고 울다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집에 있지 못할 줄을 알고 어디로 도망할 마음이 불현듯 납데다. 도망을 하자니 열세 살이나 된 계집아이가 가기를 어디로 갑네까. 영변 고모님 댁이 있단 말을 들었으나 어디인지도 모르고, 또 고모님도 이미 돌아가셨다 하니 거기인들 외가와 다르랴. 들은즉, 아버님과 두 오라버니께서 평양에 계시다 하니 차라리 거기나 찾아가리라. 아무리 옥에 계시다 하기로 자식이야 같이 있게 아니하랴 하고 그날 밤에 도망하여 평양으로 가려고 작정하고 저녁밥을 많이 먹고 식구들이 잠들기를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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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외숙모님과 같이 잤는데 그 어른은 노인이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돌아눕는 소리만 들리고 암만 기다리니 잠드는 양이 아니 보입니다. 그래 기다리다 못하여 뒷간에 가는 체하고 일어나 옷을 입었습니다. 외숙모님께서도 의심이 나시는지, 옷은 왜 입느냐 하십데다. 그래서 뒤보러 가노라 하고 얼른 문 밖에 나섰습니다. 여자의 옷으로는 혼자 도망할 수가 없을 줄을 알고 제 조카의 옷을 훔쳐 입으리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정말 도적질을 하게 되었지요” 하고 웃으며, “마침 저녁에 옷을 다려서 대청에 놓은 줄을 알므로 가만가만히 대청에 가서 제 옷을 벗어 놓고 조카의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때는 팔월 열사흘이라, 달이 짜듯하게 밝고 밤바람이 솔솔 부옵데다. 가만히 대문을 나서니 참 황황합데다. 평양이 동인지 서인지도 모르고 돈 한푼도 없이 어떻게 가는고 하고 부모 생각과 제 몸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납데다. 그러나 이 집에는 더 있지 못할 줄을 확실히 믿으므로 더벅더벅 앞길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대문간에서 자던 개가 저를 보고 우두커니 섰더니 꼬리를 치면서 따라나옵데다. 한참 나와서 길가 큰 들매나무 아래 와서 저는 펄썩 주저앉았습니다. 거기서 한참이나 울다가 곁에 섰는 개를 쓸어안고, ‘나는 멀리로 간다.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할까 보다. 일년 동안 네가 내 동무 노릇을 하였구나. 그러나 나는 너를 버리고 멀리로 간다. 집에 가서 누가 내 거처를 묻거든 아버지를 찾아 평양으로 가더라고 일러라’ 하고 다시 일어나서 갔습니다. 참 개도 인정을 아는 듯해요. 제 옷을 물고 매어달려서 킁킁하면서 도로 집으로 가자는 시늉을 합데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못 들어간다. 너나 들어가거라’ 하고 손으로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개는 떨어지지 아니하고 따라옵데다. 저도 외로운 밤길에 동무나 될까, 하고 구태 때려 쫓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저것 보게. 개가 도리어 사람보다 낫지” 하고 노파가 눈물을 씻는다. 영채는 도리어 웃으면서,

“그러니 어디로 갈지 길을 알아야 아니합니까. 지난봄에 나물하러 갔다가 넓은 길을 보고 이 길이 서편으로 가면 의주와 대국으로 가고, 동편으로 가면 평양도 가고 서울도 간다는 말을 들었기로 허방지방 그리로만 향하였습니다. 촌중 앞으로 지날 적마다 개가 짖는데 개 소리를 들으면 한껏 반갑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데다. 저를 따라오는 개는 짖지도 아니하고 가만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저를 따라옵데다.

그렇게 얼마를 가노라니 촌중에서 닭들이 우는데 저편에 허연 길이 보입데다. 옳다구나 하고 장달음으로 큰길에 나섰습니다. 나서서 한참이나 사방을 돌아보다가 대체 달 지는 편이 서편이려니, 하고 달을 등지고 한정없이 갔습니다.

이튿날 조반도 굶고 낮이 기울어지도록 가다가 시장증도 나고 다리도 아프기로 길가 어느 촌중에 들어갔습니다. 집집에 떡치는 소리가 나고 아이들은 새옷을 갈아입고 떼를 지어 밀려다닙데다. 저는 그중에 제일 큰 집 사랑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랑에는 여러 어른들이 모여서 술을 먹고 웃고 이야기합데다. 길 가던 아인데 시장하여 들어왔노라 하니까 주발에 떡을 한 그릇 담아 내어다 줍데다. 시장했던 김이라 서너 개나 단숨에 먹노라니까 사랑에 앉은 어른 중에 수염 많이 나고 얼굴 투돔투돔한 사람이 제 곁에 와서 머리를 쓸며 ‘뉘 집 아인고. 얌전도 하다’ 하면서 성명을 묻고, 사는 데를 묻고, 부친의 이름을 묻고, 나를 묻습데다. 저는 숙천 사는 김 아무라고 되는 대로 대답하고 안주 외가에 갔다 오노라고 하였더니, 제 얼굴빛과 대답하는 모양이 수상하던지, 여러 어른들이 다 말을 그치고 저만 쳐다봅데다. 저는 속이 덜렁덜렁하고 낯이 훅훅 달아서 떡도 다 먹지 못하고 일어나 절한 뒤에 문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나온즉, 장난꾼 아이들이 모여섰다가 저를 보고 ‘얘 너 어디 있는 아이냐? 어디로 가느냐’ 하고 성가스럽게 묻습니다. ‘나는 숙천 있는 아이로다. 안주 외가에 갔다 온다’ 하고 고개를 숙이고 달아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이 말을 묻는데 뛰기는 왜 뛰어’ 하고 트집을 잡고 따라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이 어리고 밤새도록 걸음을 걸어 다리가 아파서 뛰지 못할 줄을 알고 우뚝 섰습니다. 그제는 아이놈들이 죽 둘러서고 그 중에 제일 큰 놈이 와서 제 목에다 손을 걸고 구린내를 피우면서 별의별 말을 다 묻습니다. 대답하면 묻고, 대답하면 또 묻고, 다른 아이놈들은 웃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고 쿡쿡 찌르기도 하고 아무리 빌어도 놓아 주지를 아니합니다. 한참이나 부대끼다가 하릴없이 으아 하고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마침 그때에 저리로서 큰기침 소리가 나더니 서당 훈장 같은 이가 정자갓을 젖혀 쓰고 기다란 담뱃대를 춤을 추이면서 오다가, ‘이놈들, 왜 그러느냐’ 하고 호령을 하니까 아이놈들이 사방으로 달아납데다. 저는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달음질을 하여 나왔습니다. 뒤에서는 아이놈들이 욕하고 떠드는 소리가 들립데다. 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였습니다. 큰길에 나서니 개가 어디 있다가 따라나옵데다. 어떤 아이놈이 돌로 때렸는지 귀밑에서 피가 조곰 납데다. 저는 울면서 호― 하고 불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쉬엄쉬엄 또 동으로만 향하고 갔습니다.

몸은 더할 수 없이 곤하고 해도 저물었습니다. 아까 혼난 생각을 하면 진저리가 나서 다시 어느 촌중에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밥 굶어서 한데에서 잘 수도 없으며 어쩌면 좋은가 하고 주저하다가 어떤 길가 객점에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고생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치가 떨립니다” 하고 손을 한번 비틀고 한숨을 내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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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한푼도 없이?” 하고 노파가 걱정을 한다.

“돈이 있으면 그처럼 고생은 아니하였겠지요” 하고 말을 이어,

“객점에 드니깐 먼저 든 객이 육칠 인 되옵데다. 주인이 아랫목에 앉았다가 저를 보고 ‘너 어떤 아이냐’ 하기로 길 가던 아인데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고 가려노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저녁을 먹어야 하겠구나 하기에, 돈이 한푼도 없어서 밥을 사먹을 수 없으니 자고나 가게 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즉, 주인이 ‘그러걸랑은 저 안동네 뉘 집 사랑에 들어가 자거라. 우리집에는 손님이 많아서 잘 데가 없다’ 고 합데다. 그제 손님 중의 한 분, 머리도 깎고 매우 점잖아 보이는 이가 주인더러, ‘어린것이 이제 어디로 가겠소. 내가 밥값을 낼 것이니 저녁과 내일 아침 조반을 먹이고 재우시오’ 합데다. 저는 그때에 어떻게나 고마운지 마음 같아서는 아저씨, 하고 엎데어 절이라도 하고 싶습데다. 그래 저녁을 먹고 나서 여러 손님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가 어느 틈에 윗목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자다가 어떤 도적놈에게 잡혀가는 무서운 꿈을 꾸고 잠을 깨어 가만히 들은즉, 방 안에 객들이 무슨 토론을 하는 모양입데다. 하나가 ‘아니어, 사나희지’ 하면, ‘그럴 수가 있나? 그 얼굴과 목소리가 단정코 계집아이지요’ 하고, 그러면 또 하나가 ‘어린 계집아이가 남복을 하고 혼자 갈 이유가 있나?’ 하면서 저를 두고 말함이 분명합데다. 아뿔싸, 이 일을 어쩌나 하고 치를 떨고 누웠는데, 여러 사람들은 한참이나 서로 다투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이 ‘다툴 것이 있는가 보면 그만이지’ 하고 저 있는 데로 옵데다. 저는 기가 막혀 벽에 꼭 붙었습니다. 그러나 힘센 어른을 대적할 수가 있습니까. 마침내 제 본색이 탄로되었습니다. 부끄럽기도 그지없고 설기도 그지없고 분하기도 그지없어 하염없이 소리를 놓아 울었습니다.”

“저런 변이 있나. 그 몹쓸놈들이 밤새도록 잠은 아니 자고 그런 토론만 하였구먼” 하고 노파가 분하여 한다.

“그래 한참 우는데 제 몸을 보던 사람이 말하기를, ‘자― 여러분, 이제는 내기한 대로 내가 이 계집아이를 가지겠소’ 하면서 제 등을 툭툭 두드립데다. 그래 저는 평양 계신 아버님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간절히 말하고 빌었습니다. 한즉, 그 사람 대답이, ‘아버님은 오는 달에 찾아가고 우선 내 집으로 가자’ 하면서 팔을 제 목 아래로 넣어 저를 일으켜 앉히며, 어서 가자 합데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행여나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있는가 하고.”

“아까 밥값 내어 준다던 사람은 어디로 갔던가요” 하고 형식이가 주먹을 부르쥐고 물었다.

“글쎄 말씀을 들으십시오. 지금 저를 데려가려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외다그려. 여러 사람들은 그 사람을 무서워하는지 아무 말도 없이 빙글빙글 웃기만 합데다. 저는 울면서 빌다 빌다 못하여 마침내 사람 살리시오 하고 힘껏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제 울음 소리에 개들이 야단을 쳐 짖는데 그 중에 제가 데리고 온 개 소리도 납데다. 그제는 그 사람이 수건으로 제 입을 꼭 동여매더니 억지로 뒤쳐업고 나갑데다. 방에 있던 사람들은 내다보지도 아니하고 문을 닫칩데다” 하고 잠시 말을 그친다.

형식은 영채의 기구한 운명을 듣고 자기의 어렸을 때에 고생하던 것에 대조하여 한참 망연하였었다. 영채는 그 악한에게 붙들려 장차 어찌 되려는가. 그 악한은 영채의 어여쁜 태도를 탐하여 못된 욕심을 채우려 하는가. 또는 영채의 몸을 팔아 술과 노름의 밑천을 만들려 함인가. 아무려나, 영채의 몸이 그 악한에게 더럽혀지지나 아니하였으면 하였다. 그리하고 영채의 얼굴과 몸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대개 여자가 남자를 보면 얼굴과 체격에 변동이 생기는 줄을 앎이다. 어찌 보면 아직 처녀인 듯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이미 남자에게 몸을 허한 듯도 하다. 더구나 그 곱게 다스린 눈썹과 이마와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가 아무리 하여도 아직도 순결한 처녀같이 보이지 아니한다. 형식은 영채에게 대하여 갑자기 싫은 마음이 생긴다. 저 계집이 이때까지 누군지 알 수 없는 수없는 남자에게 몸을 허하지나 아니하였는가. 지금 자기 신세 타령을 하는 저 입으로 별의별 더러운 남의 입술을 빨고, 별의별 더러운 남의 마음을 호리는 말을 하던 입이 아닌가. 지금 여기 와서 이러한 소리를 하고 가장 얌전한 체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육칠 년 전의 애정을 이용하여 나를 휘어넘기려는 휼계(譎計)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선형을 생각하였다. 선형은 참 아름다운 처녀라.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마음조차 아름다운 처녀라. 저 선형과 이 영채를 비교하면 실로 선녀와 매음녀의 차이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또 한번 영채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고이고 얼굴에는 거룩하다고 할 만한 슬픈 빛이 보인다. 더욱이 아무 상관없는 노파가 영채의 손을 잡고 주름잡힌 두 뺨에 거짓없는 눈물을 흘림을 볼 때에 형식의 마음은 또 변하였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죄로다. 영채는 나를 잊지 아니하고 이처럼 찾아와서 제 부모나 형제를 만난 모양으로 반갑게 제 신세를 말하거늘, 내가 이러한 괘씸한 생각을 함은 영채에게 대하여 큰 죄를 범함이로다. 박선생같이 고결한 어른의 따님이, 그렇게 꽃송아리같이 어여쁘던 영채가 설마 그렇게 몸을 더럽혔을 리가 있으랴. 정녕시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면서도 송죽의 절개를 지켜 왔으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 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어 왔는고. 영채는 다시 말을 이어, 그 악한에게 잡혀가는 일에서부터 지금까지 지내 오던 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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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마침내 그 악한에게 붙들려 갔다. 그 악한의 집은 산밑에 있는 조고마한 집안이었다. 얼른 보아도 게으른 사람의 집인 줄을 알겠더라. 그 악한은, 지금은 비록 이러한 못된 짓을 하거니와, 일찍은 이 동네에서 부자라는 이름을 듣고 살았었다. 그러나 원래 문벌이 낮아 남의 천대를 받더니, 갑진년에 동학의 세력이 창궐하여 무식한 농사꾼들도 머리를 깎고 탕건을 쓰면 호랑같이 무섭던 원님도 감히 건드리지를 못하였다. 이 악한도 그 세력이 부러워 곧 동학에 입도하고, 여간 전래의 논밭을 다 팔아 동학에 바치고 그만 의식이 말유한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감사도 되고 군수 목사도 되리라는 희망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이제는 논밭 한 이랑도 없는 거지가 되고 말았다. 마음이 착하고 수양이 많은 사람이면 아무리 가난하여도 절행을 고칠 리가 없건마는, 원래 갑작 양반이나 되기를 바라고 동학에 들었던 인물이라, 처음에는 양반의 체면과 신사의 체면도 보았건마는 점점 체면을 차리는 데 필요한 두루마기와 탕건과 가죽신이 없어지매 양반의 체면과 신사의 체면도 그와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그 악한은 아무러한 짓을 하여서라도 돈만 얻으면 그만이요, 술만 먹으면 그만이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동네에 유명한 협잡꾼이 되고 몹쓸놈이 된 것이라. 객주에 앉아서 영채의 밥값을 담당함은 잠시 이전 신사의 체면을 보던 마음이 일어남이요, 영채가 계집아이인 줄을 알며 그를 업어 감은 시방 그의 썩어진 마음을 표함이라.

그는 아들 형제가 있었다. 맏아들은 벌써 스물둘인데 아직도 장가를 들이지 못하였고, 둘째아들은 지금 십오륙 세 된 더벅머리였다. 그가 처음 영채를 업어 갈 때에는 이십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한 맏아들에게 주려 하는 마음이었다. 그같이 마음이 악하여져서 거의 짐승이 된 놈에게도 아직까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남았음이라. 그러나 영채를 등에 업고 캄캄한 밤에 사람 없는 데로 걸어가니, 등과 손에 감각되는 영채의 따뜻한 살이 금할 수 없이 그의 육욕의(육욕을) 자극하였다. 연계로 말하면 제 손녀나 되어(될) 만한 이제 겨우 열세 살 되는 영채에게 대하여 색욕을 품는다 함이 이상히 들리려니와, 원래 몸이 건강한데다가 마음에 도덕과 인륜의 씨가 스러졌으니 이러함도 괴이치 아니한 일이라. 집에 아내가 없지 아니하나 나도 많고 또 여러 해 가난한 고생에 아주 노파가 되고 말아 조곰도 따뜻한 맛이 없었다. 이제 꽃송이 같은 영채가 내 손에 있으니, 짐승 같은 그는 며느리를 삼으려 하던 생각도 없어지고 불길같이 일어나는 육욕을 제어하지 못하여 외딴 산모루 길가에 영채를 내려놓았다. 아직 나이 어린 영채는 그가 자기에게 대하여 어떠한 악의를 품은지는 모르거니와, 다만 무섭기만 하여 손을 마주 비비며 또 한번 ‘살려 주오’ 하고 빌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아니하고 미친 듯이 영채를 땅에 눕혔다.

이까지 하는 말을 듣고 형식은 전신이 오싹하였다. 마침내 영채는 처녀가 아닌 지가 오래구나 하였다. 설혹 영채가 욕을 보지 아니하였노라 하더라도 형식은 믿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형식은 그 악한이 영채를 땅에 엎드리던 광경을 생각하고, 일변 영채를 불쌍히도 여기고, 일변 영채가 더러운 듯이도 생각하였다. 노파는 숨소리도 없이 영채의 기운 없이 말하는 입술만 보고 앉아서 이따금 ‘저런 저런’ 하고는 한숨을 쉰다.

악한이 영채를 땅에 누일 때, 영채는 웬일인지 모르거니와 갑자기 대단한 무서움이 생겨 발길로 그의 가슴을 힘껏 차고 으아 하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악한은 푹 꺼꾸러졌다. 영채가 아무리 약하고 어리더라도 죽을 악을 쓰고 달려드는 악한의 가슴을 찼으니, 불의에 가슴을 차인 악한은 그만 숨이 막힘이라. 영채는 악한이 거꾸러지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서 도로 일어나려는 악한의 얼굴에 흙과 모래를 쥐어뿌리고 정신없이 발 가는 대로 달아났다. 얼마를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우뚝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고 새벽 바람이 땀 흐르는 얼굴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러나 영채의 눈에는 뒤에 얼른얼른 그 악한의 따라오는 그림자가 보이는 듯하고, 또 그 악한의 손에는 피 흐르는 칼날이 번적번적하는 듯하여 또 한번 으아 하고 뛰기를 시작하였다. 얼마를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뒤에 지금껏 잊어버렸던 개가 입에 희끄무레한 무엇을 물고 따라온다. 영채는 반겨 그 개를 안았다. 그러나 그 개의 몸에는 온통 피투성이요, 더구나 영채가 그 개의 머리를 안을 때에 개의 목에서 솟는 피에 손이 젖음을 깨달았다. 영채는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났다. 개는 킁킁 하고 두어 번 짖더니 그만 다리를 버둥버둥하고 땅에 거꾸러진다. 영채는 어쩔 줄을 모르고 멍멍하니 섰다가 개의 입에 물었던 희끄무레한 것을 집었다. 아직 희미한 새벽빛이 언마는 그것이 아까 그 악한의 저고리 옷자락인 줄을 알았다. 개는 그 악한과 오랫동안 싸워 마침내 그 악한을 물어 메뜨리고 주인에게 그 뜻을 알리려고 그 악한의 저고리 옷자락을 물어 온 것이라. 그러나 그 개도 악한에게 발길로 차이고, 주먹으로 맞고, 입으로 물려 여러 군데 살이 떨어지고 피가 흐르고, 그 중에도 왼편 갈빗대가 둘이나 꺾어져서 심장을 찢은 것이라. 제 목숨이 얼마나 남은지도 모르고 불쌍한 주인을 따라와 제가 그 주인을 위하여 원수 갚은 줄을 알리고 그 사랑하던 주인의 발부리에서 죽고자 함이라.

“저는 개의 시체를 붙들고 한참이나 울었습니다” 하는 영채의 눈에는 새로이 눈물이 흐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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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영채의 말을 듣고 얼마큼 안심이 되었다. 영채의 얼굴을 다시금 보매, 새삼스럽게 정다운 마음과 사랑스러운 생각이 난다. 지금까지 영채의 절행을 의심하던 것이 죄송스럽다 하였다. 영채는 어디까지든지 옥과 같이 깨끗하고 눈과 같이 깨끗하다 하였다. 이전 안주에 있을 때에 보던 어리고 아리따운 영채의 모양이 뚜렷이 형식의 앞에 보이더니 그 아리따운 모양이 방금 그 앞에 앉아 신세 타령을 하는 영채와 하나가 되고 만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옳다, 은혜 많은 내 선생님의 뜻을 이어 영채와 부부가 되어 일생을 즐겁게 지내리라 하였다. 그러고는 자기와 영채가 부부 된 뒤에 할 일이 눈앞에 보인다. 우선 영채와 자기가 좋은 옷을 입고 목사 앞에 서서 맹세를 하렷다. 나는 영채의 손을 꼭 쥐고 곁눈으로 영채의 불그레하여진 뺨을 보리라. 그때에 영채는 하도 기쁘고 부끄러워 더욱 고개를 숙이렷다. 그날 저녁에 한자리에 누워 서로 꼭 쓸어안고, 지나간 칠팔 년간의 고생하던 것과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하던 말을 하리라. 그때에 영채가 기쁜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속에 쌓이고 쌓였던 정회를 풀 때에, 나는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전신을 바르르 떨며 영채를 껴안으리라. 그러면 영채도 내 가슴에 이마를 대고 ‘에그, 이것이 꿈인가요’ 하고 몸을 떨리리라. 그러한 후에 나는 일변 교사로, 일변 저술로 돈을 벌어 깨끗한 집을 짓고,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리라. 내가 저녁때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영채는 나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뛰어나오며 내게 안기리라. 그때에 우리는 서양 풍속으로 서로 쓸어안고 입을 맞추리라. 그러다가 이윽고 아들이 나렷다. 영채와 같이 눈이 큼직하고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나와 같이 체격이 튼튼한 아들이 나렷다. 그 다음에 딸이 나렷다. 그 다음에는 또 아들이 나렷다. 아아, 즐거운 가정이 되렷다.

그러나 영채가 만일 지금껏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으면 어쩌나. 내 마음과 내 사상을 알아주리만한 공부가 없으면 어쩌나. 어려서 글을 좀 읽었건마는 그 동안 칠팔 년간이나 공부를 아니 하였으면 모두 다 잊어버렸으렷다. 아아, 만일 영채가 이렇게 무식하면 어쩌는가. 그렇게 무식한 영채와 행복된 가정을 이룰 수가 있을까. 아아, 영채가 무식하면 어쩌나. 이렇게 생각하매 지금까지 생각하던 것이 다 쓸데없는 듯하여 어째 서어한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형식은 영채의 얼굴을 다시금 보았다. 그 몸가짐과 얼굴이(얼굴의) 표정이 아무리 하여도 교육 없는 여자는 아니로다. 더구나 그 손과 옷을 보매, 지금껏 괴로운 일로 고생은 아니한 듯하다. 아무리 보아도 영채는 고등한 가정에서, 고등한 교육을 받은 사람인 듯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저렇게 몸가짐에 자리가 잡히고, 말하는 것이 저렇게 얌전하고 익숙지 못하리라 하였다. 더구나 그 말에 문학적 색채가 있는 것을 보니 아무리 하여도 고등한 교육을 받았구나 하였다.

혹 내가 남의 도움을 받아 이만큼이라도 출세를 하게 된 모양으로 그도 누구의 도움을 받아 편안히 지내면서 어느 학교를 졸업하지 아니하였는가. 마치 김장로의 집에 있는 윤순애 모양으로 어느 귀족의 집이나, 문명한 신사의 집에서 여태까지 공부를 하지나 아니하였는가. 혹 금년쯤 어느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지나 아니하였는가. 그렇기만 하면 오죽 좋으랴. 옳다, 그렇다 하고 형식은 혼자 믿고 좋아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어서 영채의 그 후에 지낸 내력을 듣고 싶었다. 영채의 하는 말은 꼭 자기의 생각한 바와 같으려니 하였다.

영채는 노파가 정성으로 베어 주는 배를 한쪽 받아 먹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말한 것도 고생이 아님이 아니요, 눈물 흘릴 일이 아님이 아니나, 이제부터 말할 것은 그보다 더한 슬픈 일이라. 혼자 이따금 그 일을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가 나는데 다른 사람을 대하여 그러한 일을 말하게 되니 더욱 비감도 하고, 또 일변 부끄럽기도 하다. 영채는 이래 사오 년간에 사람도 퍽 많이 대하였고, 잠시나마 형제와 같이 친히 지내던 친구도 꽤 많았었다. 혹 같은 친구들이 모여앉아서 신세 타령을 할 때에 여러 가지 못할 말 없이 다 하면서도 지금 형식에게 말하려는 말은 아직 하여 본 적이 없다. 대개 이런 말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다만 그것 불쌍하다고나 할 따름이요, 깊이 자기를 동정하여 주지 아니할 줄을 앎이라. 영채는 극히 절친한 친구에게라도 자기의 신분은 말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웃 사람의 손에 일어났노라 할 뿐이었었다. 대개 그는 차마 그 아버지의 말을 할 수 없고 그의 진정한 신세를 말할 수 없음이라. 이리하여 그는 슬픈 경력을 제 가슴속에 깊이깊이 간직하여 두었었다. 아마 그가 일생에 형식을 만나지 아니하였슨들 그의 흉중에 쌓이고 (쌓인 회포와 맺히고 맺힌 원한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지 아니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세상에 사람이 많건마는 제 가슴속에 깊이깊이 간직한 회포를 들어 줄 사람이 몇이나 되리요. 영채는 그 동안 지극히 마음이 괴로울 때에는, 혹 그 중에 자기를 가장 동정하는 사람을 구하여 한번 시원히 자기의 신세 타령이나 하여 보리라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 실컷 신세 타령을 하고 나면 얼마큼 몸이 가뜬하여지려니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이 다 자기를 희롱하고 잡아먹으려는 사람뿐이었다. 길가에 본체만체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무론이어니와 가장 다정한 듯이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말소리로 가까이 오는 자도 기실은 나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그러함이 아니라 나를 속이고 나를 농락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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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지금 자기가 일생에 잊히지 아니하고 생각하고 그리던 형식을 만났으니 지금까지 가슴속에 간직하였던 회포를 말하리라 하였다. 세상에 아직도 제 회포를 들어줄 사람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영채는 더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다시 생각하였다. 형식의 얼굴빛을 보매, 자기를 만난 것을 반가워하는 것과 자기의 신세를 불쌍히 여기는 줄은 알건마는 만일 자기가 몸을 팔아 기생이 되어 오륙 년간 부랑한 남자의 노리개 된 줄을 알면 형식이가 얼마나 낙심하고 슬퍼하랴. 또 형식은 아주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라는데 만일 내가 기생 같은 천한 몸이 되었다 하면 싫은 마음이 아니 생길까. 지금은 형식이가 저렇게 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나를 대하여 사랑하는 빛을 보이건마는 내가 만일 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하면 곧 미운 생각이 나고 불쾌한 생각이 나지나 아니할까. 그래서 ‘너는 더러운 사람이로다. 나와 가까이할 사람이 아니로다’ 하고 얼굴을 찡그리지 아니할까. 이러한 생각을 하매, 영채는 더 말할 용기가 없어졌다. 지금까지 죽은 부모와 동생을 만나 보듯 한 반가운 정이 스러지고 새로운 설움과 새로운 부끄러움이 생긴다. 아아, 역시 남이로구나. 형식이도 역시 남이로구나. 마음놓고 제 속에 있는 비밀을 다 말하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영채는 새로이 눈물이 흘러 고개를 숙였다. 내가 왜 기생이 되었던고, 왜 남의 종이 되지 아니하고 기생이 되었던고. 남의 종이 되거나, 아이 보는 계집이 되거나, 바느질품을 팔고 있었더면 형식을 대하여 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고 이렇게 제 속에 있는 말을 못 하지는 아니하려든. 아아, 왜 내가 기생이 되었던고. 무론 영채는 제가 기생이 되고 싶어 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두 오라비를 건져 내려고 기생이 된 것이라. 영채가 평양 감옥에 다다라 처음 그 아버지와 면회를 허함이 되었던 날. 영채는 그 아버지를 보고 일변 놀라고 일변 슬펐다. 철없고 어린 생각에도 그 아버지의 변한 모양을 보매 가슴이 찌르는 듯하였다. 조고마한 구녁으로 내어다보는 그 아버지의 몹시 주름잡히고 여윈 얼굴, 움쑥 들어간 눈, 이전에는 그렇게 보기 좋던 백설 같은 수염도 조곰도 다스리지를 아니하여 마치 흐트러진 머리카락처럼 되고, 그 중에도 가장 영채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황톳물 묻은 흉물스러운 옷이라. 감옥 문 밖에 다다랐을 적에 이 흉물스러운 황톳물 옷을 입고 짚으로 결은 이상한 갓을 쓰고 굵은 쇠사슬을 절절 끌며 무슨 둥글한 똥내 나는 통을 메고 다니는 양을 볼 때에, 이러한 모양을 처음 보는 영채는 어렸을 때부터 무서워하던 어뷔나 귀신을 보는 듯하여 치가 떨렸다. 저것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일까. 아마도 저것들은 무슨 몹쓸 큰 죄악을 지은 놈이라 하였다. 그러고 영채가 그 곁으로 지나올 때에 그 흉물스러운 사람들이 이상하게 힐끗힐끗 자기를 보는 양을 보고 몸에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철없는 영채는 자기 아버지도 저러한 모양을 하였으려니 하고 생각하지는 아니하였다. 영채는 자기 아버지가 이전 자기집 사랑에 앉았을 때 모양으로 깨끗한 두루마기에 깨끗한 버선을 신고, 책상을 앞에 놓고 책을 읽으며 여러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으려니 하였다. 그래서 저는 평양에 올 때까지는 죽을 고생을 다하였거니와 아버지를 만나기만 하면 평생 아버지의 곁에 있어 아버지의 심부름도 하고 옷도 빨아 다려 드리고, 이전 모양으로 오래간만에 재미있던 소학과 열녀전과 시경도 배우려니 하였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늘 웃는 빛이요, 아버지의 눈에는 늘 광명이 있고, 아버지의 말소리는 늘 정이 있고, 힘이 있으려니 하였다. 대합실에서 두 시간이나 넘어 기다리다가, 간수에게 이끌려 들어갈 적에 영채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흐를 뻔하였었다. 이제는 아버지를 뵈오려니 하면, 숙천 어떤 촌중에서 아이놈들에게 고생받던 생각과 그 이튿날 어느 주막에서 어떤 악한에게 붙들려 하마터면 큰 괴변을 당할 뻔하던 것과 순안 석암리 근방에서 금점꾼에게 붙들려 고생하던 것도 다 잊어버려지고 다만 기쁜 생각만 가슴에 가득히 찼었다. 면회소에 들어가면 응당 아버지가, ‘네가 오느냐’ 하고 뛰어나와 자기를 안아 주려니 하였다. 그러나 면회소에 들어가 본즉, 사방에 두터운 널조각으로 둘러막고, 긴 칼을 찬 간수들이 무정한 눈으로 자기를 보며 쿵쿵 소리를 내고 지나갈 뿐, 나오리라 하는 아버지는 아니 보이고 어떤 시커먼 수염이 많이 난 순검―간수연마는 영채의 생각에는 순검이어니 하였다―이 손에 무슨 줄을 잡고 서서 영채를 보며, “너 울지 말아라. 울면 네 아버지 안 보일 테야” 하고 호령을 할 때, 영채는 그만 실망하고 무섭고 슬픈 생각이 났다. 이윽고 그 순검이 손에 잡은 줄을 잡아당기니 덜커덕 하는 소리가 나면서 널쪽 벽에 있던 나뭇조각이 그 줄에 달려 올라가고, 네모난 조고마한 구녁이 뚫리며 그렇게도 몹시 변한 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 어깨 위에서부터 눈까지가 보이고, 이마 위는 벽에 가려 아니 보인다. 아버지는 웃지도 아니하고 말도 없이, 가만히 영채를 내다볼 뿐, 그 얼굴에는 전에 보던 화기가 없고 그 눈에는 전에 있던 웃음과 광채가 없어지고 말았다. 전에 영채를 대할 때에는 얼굴이 온통 웃음이 되더니, 지금은 나무로 깎아 놓은 모양으로 아무러한 표정도 없다. 영채는, ‘저것이 내 아버진가’ 하고 너무 억하여 한참이나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채의 몸에는 피가 식고 사지가 굳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그 나무로 깎은 듯한 얼굴, 움쑥한 눈에 눈물이 스르르 도는 것을 보고 그제야 ‘이것이 내 아버지로구나’ 하는 듯이, “아버지?” 하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웬일이오” 하고 영채는 통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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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버지를 만나 보고 간수에게 붙들려 도로 대합실에 나왔다. 그 간수가 아까 줄을 잡고 있던 간수와 달라 매우 친절하게 영채를 위로하여 주었다. 대합실 걸상 위에 앉히고, “울지 말아라. 이제 얼마 아녀서 네 아버지께서 나오시느니라” 하고 간절하게 위로하여 주었다. 그러나 아주 미련치 아니한 영채는 그것이 다만 저를 위로하는 말에 불과하는 줄을 알았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목을 놓아 울었다. 간수는 달래다 못하여, “울지 말고 어서 집에 가거라” 하고는 자기 갈 데로 가고 말았다. 그때에 곁에 앉았던 어떤 머리 깎고 모직 두루마기 입은 사람이 영채더러, “너 왜 우느냐. 여기 누가 와서 찾느냐?” 하고 아주 친절하게 묻는다. 영채는 그 아버지와 두 오라비가 이 감옥에 와 있는 말과 또 아버지와 오라비는 기실 아무 죄도 없다는 말과 자기는 아버지를 뵈올 양으로 혼자 이 먼 곳에 찾아왔다는 뜻을 고하였다. 영채 생각에, 이런 말을 하면 혹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아버지도 자주 뵈옵게 하여 주고 또 얼마 동안 밥도 먹여 주려니 하였다. 그 사람이 이 말을 듣더니 아주 정성스럽고 다정한 말로 영채를 위로한다. “참 가엾고나. 아직 내 집에 있어서 다음 번 면회일을 기다려라. 한 달에 한 번씩밖에 면회를 아니 시켜 주는 것이니, 내 집에 가서 한 달쯤 있다가 또 한번 아버지를 만나 보고 집에 가거라” 한다. 영채는 한 달을 더 있다 가야 또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매, 마음이 답답하기는 하나 그 사람의 친절히 구는 것이 어떻게 감사한지 몰랐다. 또 영채의 생각에는 평양에 와서 아버지만 만나면 평생 아버지를 모시고 있을 줄로 알고 갔던 것이 정작 와본즉, 모시고 있기는커녕 한 달에 한 번씩밖에 더 뵈올 수가 없고, 또 손에 돈이 없고 평양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 저녁부터라도 먹고 잘 일이 걱정이라. 또 팔월도 이십 일이 지났으니, 아침 저녁에는 찬바람이 솔솔 불어 무명고의 베적삼이 으스스하게 되었고, 또 밤에 덮을 것도 없이 자려면 사지가 가들어들어(옹송그려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젯저녁에도 칠성문 밖 어떤 집 윗목에서 밤새도록 추워서 한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웠더니, 아침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하여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세 번이나 설사를 하였다. 여러 날 괴로운 길의 노독과 고생과 또 오늘 아버지를 만날 때에 슬픔과 낙심으로 전신에 기운이 한땀도 없고 촌보를 옮길 생각이 없다. 이때에 마침 어떤 사람이 이렇게 친절하게 자기를 거두어 주니 영채는 슬픈 중에도 얼마큼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숙천 땅 어느 주막에서 머리 깎은 사람에게 속은 생각을 하매, 이 사람이 또 그러한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의심이 나서 자세히 그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보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숙천서 보던 사람과 달라 옷도 잘 입고 얼굴도 점잖고 아무리 보아도 악한 사람은 아니로다. 또 만일 그가 나를 속이려거든 나는 입으로 그의 코를 물어뜯고 달아나면 그만이라 하였다. 우선 따뜻한 밥도 먹고 싶고, 불 잘 때인 방에서 이불을 덮고 잠도 잤으면 좋겠다 하였다. 이 사람의 집에 가면 아마 맛나는 밥도 주려니, 덮고 잘 이불도 주려니, 저만큼 옷을 입은 사람이면 집이 그만큼 넉넉하려니 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그 사람의 말대로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가는 길에도 그 사람은 영채의 손을 잡아 끌며 친절하게 여러 가지 말을 묻는다. 영채는 기운 없이 그 묻는 말을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집은 남대문 안이었다. 영채가 아주 피곤하여 걸음을 못 걸으리만한 때에 그 사람의 집에 다다랐다. 집이 그리 크지는 아니하나, 얼른 보기에도 깨끗은 하였다. 문에는 김운룡(金雲龍)이라는 문패가 붙었다. 영채는 글씨를 잘 썼다 하고 생각하였다. 안에 들어가니 마당과 방 안이 극히 정결하고, 어떤 어여쁜 젊은 부인과 처녀 하나가 있었다. 영채는 혼자 생각에, 저 부인은 그 사람의 부인, 저 처녀는 그 사람의 누이라 하였다. 왜 어머니가 없는가. 그 사람의 어머니가 계실 듯한데, 아마 우리 조모님 모양으로 늙어서 죽었나 보다 하였다. 모든 것이 영채의 상상하던 바와 같으므로 영채는 아주 마음을 놓았다. 더구나 그 사람의 누이인 듯한 처녀가 있고 또 다른 남자가 없으니 더욱 좋다 하였다. 그 집 식구들은 다 영채를 사랑하였다. 그날 저녁에 영채는 생각하던 바와 같이 오래간만에 고깃국에 맛나는 밥을 먹었다. 식후에 그 사람은 어디로 나가고, 영채는 그 부인과 처녀와 함께 불을 켜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처녀는 영채를 남자로 알매,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나, 부인은 여러 가지로 영채의 신세를 물었다. 영채는 그 부인이 다정하게 혹 머리도 쓸어 주며 손도 만져 줌을 보고 하도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신세를 말하였다. 자기가 부친과 오라비를 찾아 남자의 모양을 하고 외가에서 도망한 일과, 오다가 중로에서 여러 가지로 곤란당하던 일을 자세히 말할 때에, 그 처녀는 눈이 둥글하여지고, 부인은 영채의 등을 만지고 목을 쓸어안으면서 울었다. 영채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부인은 치맛고름으로 눈물을 씻으며, ‘어째 네 얼굴이 여자 같다 하고 이상히 여겼다’ 하면서 장을 열고 새로 지어 둔 옷 한 벌을 내어 주었다. 영채는 두어 번 사양하다가 마침내 입었다. 그러고는 세 사람이 더욱 정이 들어 웃고 이야기하였다. 그 중에도 지금까지 시치미떼고 앉았던 그 처녀가 갑자기 웃고 영채의 손을 잡으며 다정히 말하게 되었다. 영채는 아버지와 오라버니 일도 잠시 잊어버리고 없어진 집에 새로 돌아온 모양으로 기뻐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그 사람이 돌아와서 부인께 영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일동이 웃었다. 이렇게 며칠을 지내며 어서 한 달이 지나가서 다시 아버지를 뵈옵고 이러한 큰 은인의 말을 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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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면 한 달의 세월도 퍽 멀다. 영채는 차차 아버지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그 무섭게 여위고 침한(수척한) 얼굴과 움쑥 들어간 눈과 황톳물 들인 옷과 그 수염 많이 난 간수와 쇠줄을 허리에 매고 똥통을 나르던 사람들의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영채는 제가 입은 곱고 따뜻한 의복을 볼 때마다, 아침 저녁 먹는 맛나는 음식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가엾은 모양이 눈에 보인다. 영채는 점점 쾌활한 빛이 없어지고 음식도 잘 먹지 아니하고 가끔 혼자 앉아서 울기도 하였다. 부인과 그 처녀는 여전히 다정하게 위로하여 주건마는 그 위로를 받는 것도 잠시 몇 날이요, 부인도 처녀도 없는 데 혼자 앉았으면 자연히 눈물이 흐른다. 영채는 어찌하여 그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를 구원하지 못할까. 옥에서 나오게 할 수가 없을까. 아주 나오게는 하지 못하더라도 옷이라도 좀 깨끗이 입고 음식이나 맛나는 것을 잡수시도록 할 수가 없을까. 들으니, 감옥에서는 콩 절반 쌀 절반 두고 지은 밥을 먹는다는데, 아버지께서 저렇게 수척하심도 나 많은 이가 음식이 부족하여 그러함이 아닌가. 옛날 책을 보면, 혹 어떤 처녀가 제 몸을 팔아서 죄에 빠진 부모를 구원하였다는데, 나도 그렇게나 하였으면…… 이렇게 생각하고 영채가 하루는 그 사람에게 이 뜻을 고하였다. 그 사람은 영채의 뜻을 칭찬하면서, “돈만 있으면 음식도 들일 수 있고, 혹 옥에서 나오시게도 할 수 있건마는……” 하고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 영채는 옛말을 생각하였다. 그때 아버지께서 제 몸을 팔아 그 돈으로 그 아버지의 죄를 속한 옛날 처녀의 말을 들을 제, 아직 열 살이 넘지 못하였던 영채는 눈물을 흘리며 나도 그리하였으면 한 일이 있음을 생각하였다. 영채는 그 사람이, ‘돈만 있으면 음식도 들일 수도 있고 혹 옥에서 나오시게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도 그렇게 할까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그러나 돈이 있어야 하지’ 하고 영채의 얼굴을 보며 웃을 때에 영채는 생각하기를, 옳지, 이 어른도 내가 옛날 처녀의 하던 일을 하라고 권하는 뜻이라 하였다. 내가 이제 옛날 처녀의 본을 받아 내 몸을 팔아 돈만 얻으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옥에서 나오시렷다. (옥에서 나오시면 나를 칭찬하시렷다.) 세상 사람이 나를 효녀라고 칭찬하렷다. 옛날 처녀 모양으로 책에 기록하여 여러 처녀들이 읽고 나와 같이 울며 칭찬하렷다. 그러나 내가 내 몸을 팔아 부모와 형제를 구원하지 아니하면 이 어른과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불효한 계집이라고 비웃으렷다. 또 그 동안 이 집에 있어 보니 그 부인도 본래 기생이요, 그 처녀도 지금 기생 공부를 한다 하매 매일 놀러 오는 기생들도 다 얼굴도 좋고 옷도 잘 입고 마음들도 다 착한데…… 하였다. 기생이란 다 좋은 처녀들이어니 하였다. 더구나 그 기생들이 다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아는 것을 보고, 기생들은 다 공부도 잘한 처녀들이라 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결심하였다. 그러고 그 사람께, “저는 결심하였습니다. 저도 기생이 되렵니다. 저도 글을 좀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아버지를 구원하려 합니다” 하고 영채는 알 수 없는 기쁨과 일종의 자랑을 감각하였다. 그 사람은 영채의 등을 만지며, “참 기특하다. 효녀로다. 그러면 네 뜻대로 주선하여 주마” 하였다.

이리하여 영채는 기생이 된 것이라. 영채는 결코 기생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요, 행여나 늙으신 부친을 구원할까 하고 기생이 된 것이라. 기실 제 몸을 판 돈으로 부친과 형제를 구원치만 못할 뿐더러 주선하여 주마 하던 그 사람이 영채의 몸값 이백 원을 받아 가지고 집과 아내도 다 내어버리고 어디로 도망을 갔건마는, 또 영채가 그 부친을 구하려고 제 몸을 팔아 기생이 되었단 말을 듣고 그 아버지가 절식 자살을 하였건마는―그러나 영채가 기생이 된 것은 제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늙으신 부친과 형제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렇건마는 이 줄을 누가 알아주랴. 하늘과 신명은 알건마는 화식 먹는 사람이야 이 줄을 누가 알아주랴. 내가 이제 이런 말을 한들 형식이가 이 말을 믿어 주랴. 아마도 네가 행실이 부정하여 창기의 몸이 되었거늘, 이제 와서 점점 낫살이 많아 가고 창기생활에 염증이 나므로 네가 나를 속임이로다, 하고 도리어 나를 비웃지 아니할까. 내가 기생이 된 지 이삼 삭 후에 감옥에 아버지를 찾았더니, 아버지께서 내가 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와락 성을 내어, “이년아! 이 우리 빛난 가문을 더럽히는 년아! 어린 계집이 뉘 꼬임에 들어 벌써 몸을 더럽혔느냐!” 하고 내가 행실이 부정하여 기생이 된 줄로 알으시고 마침내 자살까지 하셨거든, 부모조차 이러하거든 하물며 형식이야 어찌 내 말을 신용을 하랴. 오늘 아침 형식을 찾으려고 결심할 때에는 형식에게 그 동안 지내 온 말을 다 하려 하였더니, 이러한 생각이 나매 그만 그러한 결심도 다 풀어지고, 슬픈 생각과 원망스러운 생각만 가슴에 북받쳐 오를 뿐이다. 아아, 세상에는 다시 내 진정을 들어 줄 곳이 없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영채는 후 하고 한숨을 쉬며 눈물을 씻고 형식과 노파를 보았다. 형식은 다정한 눈으로 영채의 얼굴을 보며 그 후에 지내 온 이야기를 기다리고, 노파는 영채의 등을 어루만지며 코를 푼다.

“그래, 그 악한의 손에서 벗어난 뒤에는 어찌 되었습니까” 하고 형식은 영채의 이야기를 재촉한다. 영채는 이윽고 (형식을 보더니) 눈물을 씻고 일어나면서,


“일후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그러셔요?” 하는 형식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하고, “어디 계십니까” 하는 질문도 대답지 아니하고 계집아이를 데리고 일어나 간다. 형식과 노파는 서로 보며,

“웬일이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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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가 하던 말을 그치고 갑자기 일어나 나가는 양을 보고 형식은 한참 망연히 섰다가 모자도 아니 쓰고 문 밖에 뛰어나갔다. 그러나 하고많은 행인 중에 영채의 거처를 알 수가 없었다. 형식은 영채가 나올 때에 곧 뒤따라 나오지 아니한 것을 한하였다. 형식은 잠시 동안 행길로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낙심하여 집에 돌아왔다. 노파는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앉았더라.

형식은 혼자 책상에 의지하여 영채의 일을 생각하였다. 영채가 어찌하여 중간에 하던 이야기를 끊고 총총히 돌아갔는가. 왜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그렇게 슬피 울었는가. 아무리 하여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혹 내가 영채에게 대하여 불만한 거동을 보였는가. 아니라, 나는 영채의 말을 들을 때에 지극한 동정과 정성으로써 하였다. 아까 영채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볼 때에 나는 그 눈물 고인 맑은 눈을 보고 더할 수 없이 사랑하는 정이 생겼다. 영채는 내 얼굴에서 그 빛을 보았으려니, 그러면 어찌하여 하던 말을 중도에 끊고 그렇게 총총히 일어 갔는고. 암만하여도 내게 차마 말하지 못할 무슨 깊은 사정이 있나 보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사정일까. 나를 찾아올 때에는 아무러한 사정이라도 다 말하려고 왔겠거늘, 어찌하여 하던 말을 그치고 총총히 돌아갔는고. 옳다, 아까 주인 노파가, ‘여학생 모양을 하였으나 암만해도 기생 같습데다’ 하더니 참말 그러한가 보다. 홀몸으로 평양에 왔다가 어떤 못된 놈이나 년의 꼬임에 들어 그만 기생이 되었는가 보다. 서울서 기생 노릇을 하다가 어찌어찌 풍편에 내가 여기 있단 말을 듣고 찾아왔던가 보다. 만일 그렇다 하면 그가 무슨 뜻으로 나를 찾았을까. 어려서 같이 놀던 동무를 그리워서 한번 만나 보기나 하리라 하고 나를 찾았을까. 그리하여 나를 만나매, 옛날 생각이 나고 부모와 형제 생각이 나서 나를 보고 울다가 마침내 신세 타령을 시작한 것일까. 그러다가 제가 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하면 내가 제게 대하여 불쾌한 생각을 품을까 저어하여 하던 말을 뚝 끊고 돌아갔음일까. 그러고 보면 그는 실로 기생의 몸이 되었는가. 그 은혜 많은 박선생의 따님이 그만 기생의 몸이 되었는가. 세상을 위하여 몸과 맘을 다 바치던 열성 있는 박선생의 따님이 그만 세상의 유혹을 받아 부랑한 남자들의 노리갯감이 되었는가. 혹 어떤 유야랑(遊冶郞)과 오늘 저녁에 만나기를 약속하고 그 약속한 시간이 오기 전에 잠깐 나를 찾은 것이 아닌가. 또는 그 유야랑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잠깐 내 집에 들렀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듯도 하다. 아까 영채의 뒤를 따라 행길에 나갔을 때에 교동파출소 앞으로 어떤 키 큰 남자와 여자 하나가 어깨를 겯고 내려가는 양을 보았더니, 그러면 그것이 영채던가. 그럴진대 지금 영채는 어떤 요리점에 앉아서 어떤 부랑한 남자와 손을 마주잡고 안기며 안으며, 한 술잔에 술을 나눠 마시며 음란한 노래와 음란한 말로 더러운 쾌락을 취하렷다. 아까 여기서 눈물을 흘리던 그 눈에 남자를 후리는 추파를 띄우고 그 슬픈 신세를 말하던 그 입으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소리를 하렷다. 혹 지금 어떤 남자에게 안기어 더러운 쾌락을 탐하지나 아니하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니 형식의 흉중에 와락 불쾌한 생각이 난다. 아까 내 앞에서 하던 모든 가련한 모양이 말끔 일시의 외식이로다. 제 신세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나와 노파를 보고 속으로는 깔깔 웃었으리로다. 아아, 가증한 계집이로다 하였다. 아아, 영채는 그만 버린 계집이 되었구나. 더럽고 썩어진 창기가 되고 말았구나. 부모를 잊고 형제를 잊고 유혹에 빠져 그만 개똥같이 더러운 몸이 되고 말았구나. 박선생의 집은 그만 멸망하고 말았구나 하였다. 형식은 머리를 들어 하염없이 방 안을 돌아보고, 책상머리에 있는 부채를 들어 훅훅 다는 얼굴을 부치며 툇마루에 나와 앉았다. 어디서 활동사진 음악대 소리가 들리고 교동 거리로 지나가는 인력거의 방울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흐트러진 생각을 수습지 못하여 좁은 마당으로 얼마 동안 거닐다가 방에 들어와 옷도 입은 채로 자리에 누웠다. 형식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형식의 눈에는 울고 앉았는 영채의 모양이 뚜렷이 보이고, 영채가 말하던 경력담이 환등 모양으로, 활동사진 모양으로 형식의 주위에 얼른얼른 보인다. 안주 박선생의 집을 떠날 때에 자기가 영채를 안고, ‘이제는 다시 못 보겠구나’ 하던 양도 보이고, 외가를 뛰어나와 개를 데리고 달밤에 혼자 도망하는 영채의 모양과 숙천 객점에서 어떤 악한에게 붙들려 가던 양이 얼른얼른 보이고, 남복을 입은 영채가 죽어 넘어진 개를 안고 새벽 외따른 길가에 앉아 우는 양도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활동사진이 뚝 끊어지고 한참이나 캄캄하였다가, 장구를 들고 부랑한 난봉들을 모시고 앉아 음탕한 얼굴로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앉았는 영채가 보이고, 또 어떤 놈과 베개를 같이 하고 누워 자는 양도 눈에 얼른얼른한다.

그러고는 또 아까 자기가 영채를 대하여 앉아서 생각하던 혼인생활이 보인다. 회당에서 성례하던 일, 즐거운 가정을 이뤘던 일, 아들과 딸을 낳았던 일이 마치 지나간 사실을 회상하는 모양으로 뚜렷하게 눈앞에 보인다.

“그만 영채가 기생이 되고 말았구나!” 하고 형식은 돌아누우며 자탄하였다. 형식은 이런 생각을 아니하리라 하고 몸을 흠칫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잠이 들리라 하고 일부러 숨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또 생각이 터져 나온다. 슬픈 신세 타령을 하며 눈물 고인 눈으로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영채의 모양이 쑥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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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그 무릎 위에 힘없이 놓인 어여쁜 손가락이 바르르 떨린다. 형식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영채는 자기를 믿고 자기에게 사정을 다 말하고 자기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왔던 것이 아닐까. 설혹 몸이 기생이 되었다 하더라도 형식이 서울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기를 그 괴로운 지경에서 건져 내어 달라기 위하여 찾아왔던 것이 아닐까. 온 세상에 형식이밖에 말할 곳이 없고 믿을 곳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어 부모를 찾아오는 모양으로, (형제를 찾아오는 모양으로) 형식을 찾아왔음이 아닐까. 아까, ‘제가 이형식이올시다’ 할 때에 영채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담박 눈물을 흘리던 것과 자기의 신세를 말하면서도 연해 연방 형식의 얼굴을 쳐다보던 것을 보니, 영채는 정녕 형식을 믿고 형식의 동정을 구하고, 형식에게 안아 주고 건져 주기를 청한 것이라. 옳다, 영채는 과연 나를 믿고 내게 보호를 청하려고 왔던 것이로다. 육칠 년간이나 차디차디 하고, 괴롭디괴롭디 한 세상 풍파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저를 사랑하여 주어야 할 내가 서울에 있음을 알고 반갑고 기뻐서 나를 찾아왔던 것이로다. 옳다, 그렇다. 나는 영채를 구원할 의무가 있다. 영채는 나의 은사의 따님이요, 또 은사가 내 아내로 허락하였던 여자라. 설혹 운수가 기박하여 일시 더러운 곳에 몸이 빠졌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건져 낼 책임이 있다. 내가 먼저 그를 찾아다니지 못한 것이 도리어 한이 되고 죄송하거늘, 이제 그가 나를 찾아왔으니 어찌 모르는 체하고 있으리요. 나는 그를 구원하리라. 구원하여서 사랑하리라. 처음에 생각하던 대로, 만일 될 수만 있으면 나의 아내를 삼으리라. 설혹 그가 기생이 되었다 하더라도 원래 양반의 집 혈속이요, 또 어려서 가정의 교훈을 많이 받았으니 반드시 여자의 아름다운 점을 구비하였으리라. 또 만일 기생이라 하면 인정과 세상도 많이 알았을지요, 시와 노래도 잘할지니, 글로 일생을 보내려는 나에게는 가장 적합하다 하고 형식은 가만히 눈을 떴다. 멍하니 모기장을 바라보고 모기장 밖에서 앵앵하는 모기의 소리를 듣다가 다시 눈을 감으며 싱긋 혼자 웃었다. 아까 영채의 태도는 과연 아름다웠다. 눈썹을 짓고, 향수내 나는 것이 좀 불쾌하기는 하였으나 그 살빛과 눈찌와 앉은 태도가 참 아름다웠다. 더구나 그 이야기할 때에 하얀 이빨이 반작반작하는 것과 탄식할 때에 잠깐 몸을 틀며 보일 듯 말 듯 양미간을 찌그리는 것이 (못 견디리만큼 어여뻤다.) 아까 형식은 너무 감격하여 미처 영채의 얼굴과 태도를 자세히 비평할 여유가 없었거니와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 영채의 일언 일동과 옷고름 맨 모양까지도 (못 견디게) 어여뻐 보인다. 형식은 눈을 감고 한번 더 영채의 모양을 그리면서 싱긋 웃었다. 도리어 저 김장로의 딸 선형이도 그 얌전한 태도에 이르러서는 영채에게 및지 못한다 하였다. 선형의 얼굴과 태도도 얌전치 아니함이 아니지마는 영채에 비기면 변화가 적고 생기가 적다 하였다. 선형은 가만히 앉았는 부처와 같다 하면, 영채는 구름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선녀와 같다 하였다. 선형의 얼굴과 태도는 그린 듯하고, 영채의 얼굴과 태도는 움직이는 듯하다 하였다. 영채의 얼굴은 잠시도 한 모양이 아니요, 마치 엷은 안개가 그 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모양으로 얼굴의 빛과 눈찌가 늘 변하였다. 그러면서 그 변하는 모양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얌전하였다. 그의 말소리도 정이 자아침을 따라 높았다 낮았다, 굵었다가 가늘었다, 마치 무슨 미묘한 음악을 듣는 듯하였다. 실로 형식과 노파가 그렇게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 것은 영채의 불쌍한 경력보다도 그 경력을 말하는 아름다운 말씨였었다. 형식은 아까 품었던 영채에게 대한 불쾌한 감정을 다 잊어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영채의 모양을 대하여 한참 황홀하였다. 형식의 눈앞에 보이는 영채가, ‘형식 씨, 저는 세상에 오직 당신을 믿을 뿐이외다. 형식 씨,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저는 이 외로운 몸을 당신의 품속에 던집니다)’ 하고 눈물 고인 눈으로 형식을 쳐다보는 듯하다. 형식은 마음속으로, ‘영채 씨, 아름다운 영채 씨, 박선생의 따님인 영채 씨, 나는 영채 씨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사랑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사랑하면 지하에 누워 계신 그 부친이 오죽이 즐거하실까. 그리하고 일후(만일~일후 : 하고 두 팔을 벌리고 안는 시늉을 하였다. 형식의 생각에 영채의 따뜻한 뺨이 자기의 뺨에 와 스치고 입김이 자기의 입에 와 닿는 듯하였다. 형식의 가슴은 자주 뛰고 숨소리는 높아졌다. 옳다, 사랑하는 영채는 내 아내로다.) 회당에서 즐겁게 혼인 예식을 행하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즐거운 가정을 이루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어디 있는가. 지금 어디 있는가. 형식은 또 불쾌한 마음이 생긴다. 영채가 어떤 남자와 희학하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남자와~보인다 : 남자에게 안겨 자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 형식이 영채의 자는 방에 들어가니 영채는 어떤 사나이를 꼭 껴안고 고개를 번쩍 들고 형식을 보며, 히히히 하고 웃는 모양이 보인다).

형식은 ‘여보, 영채, 이것이 웬일이오’ 하고 발길로 영채의 머리를 차는 양을 생각하면서 정말 다리를 들어 모기장을 탁 찼다. 모기장을 달았던 끈이 뚝 끊어지며 모기장이 얼굴을 덮는다. 형식은 벌떡 일어나 모기장을 집어던지고 궐련을 붙였다. 노파는 벌써 잠이 든 듯하고 서늘한 바람이 무슨 냄새를 띄워 솔솔 불어온다. 형식은 손에 든 궐련이 다 타는 줄도 모르고 멍멍하게 마당을 바라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마당으로 뛰어나온다.

교동 거리에는 늦게 돌아가는 사람의 구두 소리가 나고 잘 맑은 여름 하늘에는 별이 반작반작한다. 형식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휙 돌아서며 혼자말로,

“참 인생이란 우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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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형식은 어젯밤 늦게야 잠이 들었던 탓으로 여덟시가 지나서야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영채의 일을 생각하며 조반을 먹을 제, 형식이가 가르치는 경성학교 학생 두 사람이 왔다. 형식은 어느 학생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게 하므로 형식을 따르는 학생이 많았었다. 그 중에도 형식은 자기의 과거의 신세를 생각하여 불쌍한 학생에게 특별히 동정을 표하고, 그러할 뿐더러 그 얼마 아니 되는 수입을 가지고 학비 없는 학생을 이삼 인이나 도와 주었다. 그러나 형식에게는 재주 있는 학생 얌전한 학생을 더욱 사랑하는 버릇이 있었다. 무론 아무나 재주 있고 얌전한 사람을 더욱 사랑하건마는, 그네는 용하게 그것을 겉에 드러내지 아니하되, 정이 많은 형식은 이러할 줄을 모르고 자기의 어떤 사람에게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떤 친구가 형식에게, “자네는 편애하는 버릇이 있느니” 하는 충고도 받았다. 그때에 형식은 웃으며, “더 사랑스러운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흠이란 말인가” 하였다. 그러면 그 친구가, “그러나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배우는 자를 하루같이 사랑할 필요가 있느니” 하고 이 말에 형식은, “그러나 장차 자라서 사회에 크게 이익을 주어(줄) 만한 자를 특별히 더 사랑하고 가르침이 무엇이 잘못이랴” 하였다. 이리하여서 형식은 동료간에나 학생간에 편애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혹 어떤 형식을 미워하는 사람은, 형식이가 얼굴 어여쁜 학생만 사랑한다는 말도 한다. 학생 중에도 삼사년급 심술 사납고 장난 잘하는 학생들은, 형식은 얼굴 어여쁜 학생만 사랑하여 시험 점수도 특별히 많이 주고, 질문하는 것도 특별히 잘 가르쳐 준다 하며, 형식이가 특별히 사랑하는 학생을 대하여서는 듣기 싫은 비방도 많이 한다. 그럴 때면 형식의 특별히 사랑하는 학생들이 형식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변명하건마는, 도리어 심술 사나운 학생들은 그네를 비웃었다. 지금 형식을 찾아온 두 학생 중에 십칠팔 세 되는 얌전해 보이는 학생은 형식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자 중에 하나이요, 그와 함께 온 키 크고 얼굴 거무테테한 학생은 형식을 미워하는 학생 중의 하나이라. 형식을 사랑하는 학생의 이름은 이희경이니 지금 경성학교 사년급 첫 자리요, 다른 학생의 이름은 김종렬이니, 겨우하여 낙제나 아니하고 따라 올라오는, 역시 경성학교 사년생이라. 그러나 이 김종렬은 낫살이 많고 또 공부에 재주는 없으면서도 무슨 일을 꾸미는 수단이 매우 능란하여 이년급 이래로 그 반의 모든 일은 다 제가 맡아 하게 되고, 그뿐더러 이 김종렬이가 무슨 의견을 제출하면 열에 아홉은 전반 학생이 다 찬성한다. 전반 학생이 반드시 그를 존경하거나 사랑함이 아니로되, 도리어 그의 성적이 좋지 못한 방면으로, 그의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방면으로, 그의 성질이 완패하고 심술이 곱지 못한 방면으로, 전반 학생의 미움과 비웃음을 받건마는 무슨 일을 하는 데 대하여는 전반 학생이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를 신임하며 그를 복종한다. 그는 무론 정직은 하다. 속에 있는 바를 꺼림없이 말하며 아무러한 어른의 앞에 가서라도 서슴지 아니하고 제 의견을 발표하는 용기가 있다. 아무려나 그는 일종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로다. 지금은 최상급 학생이므로 다만 사년급에만 세력이 있을 뿐더러, 온 학교 학생간에 위대한 세력을 가져 새로 입학한 일년급 어린 학생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알고 그를 보면 경례를 한다. 만일 어린 학생이 자기를 대하여 경례를 아니하면 당장에 위엄 있는 태도와 목소리로, “여보, 왜 상급생에게 경례를 아니하오” 하고 책망한다. 그러므로 어린 학생들은 경례하고 돌아서서는 혀를 내어밀고 웃으면서도 그와 마주 대하여서는 공순히 경례를 한다. 동급생 중에 김계도라 하는, 김종렬과 비슷한 학생이 있다. 김계도는 김종렬보다 좀 온화하고 공손하여 사귈 맛은 있으나 그 일하기를 좋아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점에는 서로 일치한다. 게다가 연치가 상적하고 의취가 상합하므로 김종렬과 김계도 양인은 절친한 지기지우라. 김종렬의 생각에는, 세상에 족히 마음을 허하고 서로 천하를 의논할 사람은 나폴레옹과 김계도밖에는 없다 하였다. 그는 무론 나폴레옹의 자세한 전기도 한 권 읽지 아니하였으나, 다만 서양사에서 얻어들은 재료를 가지고 즉각적으로 나폴레옹은 이러한 사람이어니 하여 자기의 유일한 숭배 인물을 삼았다. 친구와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나폴레옹이요, 동창회에서 연설을 할 때에도 나폴레옹이라. 모든 것에 나폴레옹을 인용하므로 학생들은 그를 나폴레옹이라고 별호를 짓고, 얼굴이 검다 하여 그의 별호에 ‘검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검은 나폴레옹’이라고 부르게 되고, 혹 영리한 학생은―이희경도 그렇다― 발음의 편의상 ‘검은 나폴레옹’을 줄여 ‘검나, 검나’ 하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이 법국 황제인 줄은 알지마는 원래 지중해 중에 있는 코르시카 섬 사람인 줄은 모른다. 워털루에서 영국 장수 웰링턴에게 패하여 대서양 중 세인트헬레나라는 외로운 섬에서 나폴레옹이 죽었단 말을 역사 교사에게 들었으나, 그는 ‘워털루’라든가 ‘세인트헬레나’라든가 하는 배우기 어려운 말은 다 잊어버리고 다만 나폴레옹은 패하여 대서양 중 어떤 섬에서 죽었다고 기억할 뿐이라. 그러면서도 나폴레옹은 자기의 유일한 숭배 인물이라. 말하자면 김종렬의 이른바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서 나고 프랑스에 황제가 되었던 나폴레옹이 아니라, 김종렬이가 하느님이 자기 모양으로 아담을 만들었다는 전설과 같이 자기 모양으로 나폴레옹을 만든 것이라. 이 나폴레옹 숭배자는 형식에게 인사한 뒤에 엄연히 꿇어앉아, “저희가 선생님을 뵈오러 온 뜻은……” 하고 말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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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궐련을 피워 물고 김종렬과 이희경 두 학생을 웃는 낯으로 대한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이 두 학생이 찾아왔는지는 모르거니와 김종렬, 이희경 양인이 함께 온 것을 보니 학생 전체에 관한 일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사년급 전체에 관한 일인 줄은 알았다. 대개 전부터 학생 전체에 관한 일이거나, 사년급 전체에 관한 일에는 이 두 사람이 흔히 총대가 됨을 앎이다. 원 격식으로 말하면 최상급의 반장인 이희경이가 으레 그 총대가 될 것이로되, 이희경은 아직 나이 어리고 또 김종렬과 같이 얼굴(일을) 좋아하는 마음과 일을 잘 처리하는 수단이 없으므로 항상 김종렬의 절제를 받는다. 혹 이희경이가 갈 일에도 김종렬은 마치 어린것을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이 아니 놓이는 듯이, 반드시 희경의 뒤를 따라가고, 따라가서는 이 희경이가 두어 마디 말도 하기 전에 자기가 가로맡아 말을 하고 이희경은 도리어 따라온 사람 모양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방긋방긋 웃고만 있을 뿐이다. 이희경은 이렇게 김종렬에게 권리의 침해를 받으면서도 처음은 자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듯하여 불쾌한 생각도 있었으며(있었으나) 점점 습관이 되매, 도리어 김종렬이가 자기의 할일을 가로맡아 하여 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더러, 혹 자기가 공부가 분주하거나 일하기가 싫은 때에는 자기가 김종렬을 찾아가서 자기의 맡은 일을 위탁하기조차 한다. 그리하면 김종렬은 즉시 승낙하고 저 볼일도 내어놓고 알선한다. 이러한 때마다 이희경은 혼자 웃었다. 이번에 형식을 찾아온 일도 아마 명의상으로는 이희경이가 대표요, 김종렬은 수행원인 줄을 형식은 알았다. 그러고 정작 대표자는 상긋상긋 웃고만 앉았고 수행원인 김종렬이가 입을 열어, ‘저희가 오늘 선생을 찾은 것은’ 함이 하도 우스워서 형식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고 김종렬 같은 사람도 사회에 쓸 곳이 많다 하였다. 저런 사람은 아무 재능도 없으되, 오직 무슨 일이나 하기 좋아하는 성미가 있으므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실행하기에 편리하리라 하였다. 김종렬 같은 사람은 조고마한 일을 맡길 때에도 그것을 큰일인 듯이 말하고, 조고마한 성공을 하거든 그것이 큰 성공인 듯이, 사회에 큰 이익이 있는 성공인 듯이 말하고, ‘노형이 아니면 이 일을 할 수가 없소’ 하여 주기만 하면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러한 일이나 맡으리라 하였다. 지금 자기가 자기보다 유치하게 보고 철없게 보는 이희경이가 얼마가 아니하여 자기를 부리는 사람이 되고, 자기보다 세상에 더 공경받는 사람이 될 것이언마는 김종렬은 그런 줄을 모르나니 그런 줄을 모르는 것이 김종렬에게는 행복이라 하였다.

또 학생들이 무슨 일을 의논하여 김종렬을 내어세웠는고 하고 형식은 지극히 은근하게,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녜, 학교에 중대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종렬은 이렇게 조고마한 일에도 법률상, 정치상 술어를 쓰기를 좋아하며 또 다른 것을 외우는 재주는 없으되, 자기의 유일한 숭배 인물인 나폴레옹의 이름이 보나파르트인 줄도 외우지 못하되, 법률상 정치상의 술어는 용하게 잘 외운다. 한번 들으면 반드시 실제에 응용을 하나니, 혹 잘못 응용하는 때도 있거니와 열에 네다섯은 옳게 응용한다. 이번 형식에게 ‘중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것 같은 것은 적당하게 응용한 일례라. 형식은,

“녜, 무슨 중대사건이오?”

“저희는 삼사년급이 합하여 동맹 퇴학을 하려 합니다. 학교의 학생에게 대한 처분 권리를 불만족히 여겨서 이렇게 동맹을 체결한 것이올시다” 하고 동맹 퇴학 청원서를 낸다. 김종렬은 그만 말 두 마디를 잘못 적용하였다. ‘처분 권리’의 ‘권리’는 연문이요, ‘동맹을 체결한다’는 ‘체결’은 너무 굉장하다 하였다. 그러나 한 발이나 되는 퇴학 청원서에 이백여 명이 연명 날인한 것을 보고 형식은 놀랐다. 과연 ‘중대사건’이요, 굉장하게 ‘동맹을 체결하였구나’ 하였다. 김종렬은 퇴학 청원서를 내어 형식을 주며 자기도 형식의 곁으로 가까이 자리를 옮겨 그 글을 낭독하려는 모양을 보인다. 형식은 너무 김종렬의 예절답지 못한 데 불쾌한 생각이 나서 얼른 퇴학 청원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기 혼자만 소리 없이 읽었다. 김종렬이가 또 형식의 책상머리로 따라가려는 것을 이희경이가 웃으며 잡아당기어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나 김종렬은 이 뜻은 못 알아보고, ‘왜 버릇없이’ 하고 이희경을 흘겨보았다. 이희경은 얼굴이 발개지며 고개를 돌리고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듯 웃었다. 김종렬은 마침내 책상 맞은편에 가서 형식과 마주앉았다. 형식은 또 돌아앉으려다가 차마 그러지도 못하여 청원서를 도로 내어주며,

“종렬군, 그러나 이것은 좋지 못한 일이외다. 무슨 이유를 물론하고 학생의 학교에 대한 스트라이크는 좋지 못한 일이외다” 하였다.

김종렬은 스트라이크라는 말의 뜻은 자세히 모르거니와 베이스볼에 스트라이크란 말이 있음을 보건댄, 대체 학교를 공격하는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청원서를 접으며 장중한 목소리로,

“아니올시다. 저의 모교 당국은 부패지극(腐敗之極)에 달하였습니다. 차제(此際)를 당하여 저희 용감한 청년들이 일대 혁명을 아니 일으키면 오히려 모교는 멸망할 것이올시다” 하고 결심의 굳음이 말에 보인다. 형식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이희경을 돌아보며,

“희경군도 의견이 그렇소?”

“녜, 어저께 하학 후에 삼사년급이 모여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래, 증거는 확실하오!”

김종렬이가 소리를 높여,

“확실하올시다. 저희 학생 중에서 몇 사람이 바로 목격을 하였습니다.”

하고 주먹을 내어두르며, “증거가 확실하올시다. 그대로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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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퇴학 청원의 이유는 대개 이러하였다. 경성학교의 학감 겸 지리 역사를 담임한 교사인 배명식이 술을 먹고 화류계에 다니매, 청년을 교육하는 학감이나 교사 될 자격이 없을 뿐더러, 또 매양 학생 전체의 의사를 무시하고 학과의 배당과 기타 모든 것을 자기의 임의대로 하며 학생의 상벌과 출석이 항상 공평되지 못하고 자기의 의사로 한다 함이다. 학감 배명식은 동경고등사범 지리 역사과의 전과를 졸업하고 이삼 년 전에 환국하여 경성학교주 김남작의 청탁으로 대번에 경성학교의 학감이라는 중요한 지위를 얻었다. 경성학교의 십여 명 교사가 다 중등교원의 법률상 자격이 없는 중에 자기는 당당히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노라 하여 학교 일에 대한 만반 사무는 오직 자기의 임의대로 하였다. 그의 주장하는 바를 듣건대 동경고등사범학교는 세계에 제일 좋은 학교요, 그 학교를 졸업한 자기는 조선에 제일가는 교육가라. 교육에 관한 모든 것에 모르는 것이 없고 자기가 하려 하는 모든 일은 다 교육학의 원리와 조선의 시세에 맞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곁에서 보기에는 고등사범을 졸업하지 아니한 다른 교사들보다 별로 나은 줄을 모르겠더라. 그는 취임 초에 학과의 변경을 주장하고 지리와 역사는 만학의 집합처라 하여 시간을 배나 늘리고, 수학과 박물은 중등교육에 그다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여 시간 수효를 이삼 할이나 줄였다. 그는 역사 지리 중심 교육론자로라 자칭하여 학생을 대하여서는 역사 지리가 모든 학과 중에 가장 필요하고 귀중한 학과이며, 따라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교사가 가장 중요하고 힘드는 교사라 하였다. 그때에 다른 교사들은 총독부의 고등보통교육령과 일본 중학교의 제도를 근거로 하여 배학감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배학감은 웃으며, “여러분은 교육의 원리를 모르시니까” 하고 자기의 학설의 옳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각 중학교에서는 이렇게 학과를 배당하는데” 하고 누가 반대하면, “허, 일본에 큰 교육가가 있소? 참 일본의 교육은 극히 불완전합니다” 하고 자기는 청출어람이라는 격언과 같이 일본서 배워 왔건마는 일본 모든 일류 교육가보다도 뛰어나는 새 학설과 새 교육의 이상을 가졌노라 한다. 마침 배학감의 개정한 학과 배당을 학무국에서 불인가하고 마침내 전에 하던 대로 하게 되매, 여러 교사들은 배학감을 대하여 웃었다. 그리하고 자기네의 승리를 기뻐하였다. 그러나 배학감은 아직 세상이 유치하여 자기의 가장 진보한 학설이 시행되지 아니함이라 하고 매우 분개하였다. 일찍 형식이가 조롱 겸 배학감에게 물었다.

“선생의 신학설은 뉘 학설을 근거로 한 것이오니까. 페스탈로치오니까, 엘렌 케이오니까?”

배학감은 페스탈로치가 누구며, 엘렌 케이가 누군지 한번 들은 듯은 하건마는 얼른 생각이 아니 난다. 그러나 조선 일류 교육가가 삼사류의 교육가가 아는 이름을 모른다 함도 수치라, 이에 배학감은 껄껄 웃으며,

“녜, 나도 푸스털과 얼른커의 학설은 보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 지다이 오쿠레(時代運)왼다” 한다. 페스탈로치와 엘렌 케이라는 말을 잊어버려 푸스털, 얼른커라 하리만큼 무식하면서도 그네의 학설을 다 보았다 하는 배학감의 심정을 도리어 불쌍히 여겼다. 그러고 서슴지 않고, ‘그러나 그것은 다 지다이 오쿠레(時代運)왼다’ 하는 용기는 과연 칭찬할 만하다 하고, 형식은 혼자 웃은 일이 있었다. 기실 배학감은 자칭 신학설 신학설 하면서도 대체 학설이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가 고등사범에 다닐 때에 얼마나 도저하게 공부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거니와, 남이 사 년에 졸업하는 것을 오 년에 졸업하였다 하니, 그 동안에 굉장히 공부를 하여 교육에 관한 제자백가서를 다 통독하였는지 알 수 없거니와, 조선에 돌아온 뒤에는 그날그날 신문의 삼면기사나 읽는지 마는지, 독서하는 양을 보지 못하고 독서한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 일찍 같이 경성학교의 교사로 있는 어떤 사람이 형식을 보고,

“배학감은 백지(白紙)입데다그려.”

“백지라니, 무슨 뜻이오니까.”

“아무것도 쓴 것이 없단 말이야요―무식하단 말씀이야요.”

형식은 껄껄 웃으며,

“노형께서 조곰 모르셨습니다. 배학감은 백지가 아니라, 흑입니다. 검은 종이입니다.”

“어째서요?”

“백지나 같으면 아직은 쓴 것이 없어도 장차야 쓸 수가 있지요. 그렇지마는 흑지는 장차 쓸 수도 없습니다” 하고 서로 웃은 일이 있었다.

배학감은 또 규칙을 좋아한다. ‘규칙적’이란 말과 ‘엄하게’라는 말은 배학감의 가장 잘 쓰는 말이었다. 취임 후 얼마 아니하여 친히 규칙을 개정하였다. 개정이 아니라 이전 있던 규칙은 교육의 원리에 합하지 아니하여 폐지하고 자기의 신학설을 기초로 하여 온통 이백여 조에 달하는 당당한 대규칙을 제정하였다. 어느 날 직원 회의에 교원 일동을 소집하고 친히 신규칙의 각 조목을 낭독하며 일일이 그 규칙의 정신을 설명하였다. 오후 한시에 시작한 것이 넉점이 지나도록 끝이 나지 못하였다. 배학감은 이마와 코에 땀이 흐르고 목이 쉬었다. 교원 일동은 엉덩이가 아프고 허리가 아파 연방 엉덩이를 들먹들먹하였다. 어떤 교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코를 골다가 학감의 대갈일성에 깊이 든 꿈을 놀라기도 하고, 어떤 교원은 문을 홱 닫치고 뒷간에 한번 간 후에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형식은 참다 못하여, “그것은 학교 규칙이 아니라 한 나라의 법률이외다그려” 하고 그 조목이 너무 많음을 공격하였다. 자리에 있던 오륙 인―뒷간에 가고 남은―교원은 일제히 형식의 말에 찬성을 표하였다. 그러나 학감의 직권으로 이 규칙이 확정이 되었다. 배학감과 일반 교원 및 학생과의 갈등이 심하여진 것은 이때부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