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희의 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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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을 가거든 무용 조선의 어여쁜 기사(騎士)들을 만나 보아 달라는 것이 <창공(蒼空)> 편집인들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그러나 내가 동경에 왔을 때는 정에 끌려 거절하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 이유로는 나같이 무용에 대해서 문외한인 사람이 그들을 만서 무엇을 어떻게 인터뷰할까 하는 것과, 동경에 있는 조선의 무용가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내 기억에 있는 <무용 인명 사전>을 뒤져 보아도 15만 불의 개런티를 받고 아메리카로 간다는 최승희(崔承喜) 여사는 예(例)의 경도(京都) 공연 무대에서 불의의 기화(奇禍)를 당했을 때이므로 동경에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는 자신이 '나의 자서전'이란 것을 써서 세상이 다 아는 판이니 내가 새로이 붓을 들 것도 없고, 동대 미술과를 나온 박씨는 구주(歐洲)로 무용 행각을 떠난 지 십여 일이 되었으며, 김민자(金敏子)양은 그 선생인 최 여사를 따라 순연(巡演) 중에 있었으므로 만날 도리가 없고, 다만 남아 있는 한 분이 내가 이에 쓰려는 박계자(朴桂子) 양이다.

그러나 박 양을 만나는 일순 전까지도 나는 여간 불안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박 양은 다까다 세이꼬 여사의 문하에서 수업한 지 만 5개년인 금년 5월 5일에는 자기 자신이 당당한 일개 무용가로서 무용 조선의 처녀지를 개척할 무희라면 박 양에게 너무나 과대한 짐일지는 모르나, 하여간 그 길을 걷고 있는 박 양은 봄의 시즌을 앞두고 자기의 공연 준비와 그 선생인 다까다 여사의 공연에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임무를 가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처음 만나던 전날 전화를 3, 4차나 걸었을 때 그연구소 사무실의 대답에 의하면 일간 공연에 쓸 의상 준비로 외출하고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경성에서 온 사람인데 전할 말이 있으니 박 양이 들어오는 대로 전화를 걸어 달라는 부탁을 하여 두었으나, 종시 아무런 통지도 그날은 받지 못했다.

그 다음날 아침 아홉 시, 박 양의 전화를 받은 나는 12시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정각이 30분을 지난 후 명함을 받아 든 박 양은 나를 응접실로 맞아들었다.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고 곧 내의(來意)를 말하니 어디까지나 명랑한 박양이면서도 "아직 무엇을 알아야지요"하는 것은 처녀다운 경양이었었다.

"처음 배우기는 17세! 글쎄, 거기 무슨 동기라든지 이유랄 거야 있나요. 소학교 시대부터 무용이 좋아서 시작했지요!"하는 대답에 나는 '이 작은 아씨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는 행복된 아씨로구나' 하고 속으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유쾌하였다.

"제일 처음 무대에 선 시일은 5년 전 10월이고, 베토벤의 <학대받는 자에게 영광있으라>와 <가을>이었지요"하는 박 양의 눈은 무슨 광영을 꿈꾸는 듯도 하였다.

"독자적으로 공연을 한 것은 어느 때쯤 됩니까?"

"그것이 아마 재작년 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창작이라고 발표한 것이 <사랑의 꿈>입니다" 하고는 이어서 "글쎄요! 조선의 고전 무용이라고 해도 저는 생각하기를 어떤 의상이라든지 그런 형식에 제약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옷이야 어떤 것을 입었든지 새로운 발레를 춤추려는 노력뿐입니다. 내가 이태리 무용이 된다거나 러시아 무용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아요? 다만 소박한 조선의 고전 무용에 현대적인 감각을 담아서 신흥 무용을 완성한다는 것은 조선의 문화적 정신과 전통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니만큼 결국 그 이데올로기에 있으리라고 밖에 아직은 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는 박 양은 어디까지나 남국적인 정열의 주인공이었다.

"무용과 리얼리즘은?"

나는 이렇게 한 번 물어 보았다.

"선생님은 이론 방면은 무용 비평가에게 맡길 일이고 무용가는 실지에 숙련만 하라고 해요" 하면서 연막탄을 한 개 터뜨리고는, "무용이라고 리얼리즘을 전혀 부정할수야 있나요? 그렇다고 해서 로맨티시즘도 영영 부정하긴 싫어요."

이때 하녀가 홍차와 케이크를 가져왔다. "차가 식기 전에...." 하는 박 양의 서비스도 그만하면 만점에 가깝고, 따라서 말은 다른 길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처음 발표한<사랑의 꿈> 이란 어떤 무용이었던가요?"

"그건 무어 한 개 환상의 세계를 그려 보았지요" 하고 웃어 버리면서도 자기의 첫 작품인만큼 상당한 애착을 가진 듯하였다.

"한 개 무용을 제일 많이 춘 것은?"

"글쎄요, <카프리스>, <사(死)의 도피> 그런 것이에요. 그러나 선생과 같이 출연을 하게 되면 다른 동창들도 있고 때로는 제가 나갈 때도 있으나 대개 솔로는 선생이 나가지요. 처음 발표한 뒤의 감상이라고 하여도 제가 알 수가 있읍니까? 그저 무용에만 열중했을 뿐이지요. 나중 혹 음악 신문 같은 데서 비평을 보면 매우 명랑한 춤이라고 한 것을 볼 때마다 얼굴이 홧홧해요" 하며 겸손은 하나 상당한 자신은 가지는 모양! 창작은 연구소에 들어와 3년째 되는 해부터 전부 자기가 하게 되었다 하며, 무용연구소의 시스템에 대해서 한참 동안 얘기가 계속되고 어떤 연구소는 소질만 있으면 막 뽑아 들이는 데도 있으나 다까다 연구소는 5년이란 기한을 채워야 된다는 것과 박양 자신이 5, 6명의 개인 교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올해부터는 저절로 독립을 하여야 될 터인데 어트랙션을 가질 필요는?"

이렇게 속사포의 탄알 같은 질문을 해보았는데, 박 양은 유유히 한참 웃고 나서 "결국은 조선에 가야지요. 그러나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 더 준비를 해야지요. 성공을 빨리 하려고 초조하지는 않으렵니다" 고 질문과는 아주 정반대로 착 까라지는 것이었다.

"조선에 와서 첫 공연을 언제 하느냐고요? 글쎄요, 금년 안으로 하겠지요마는 동경서 한 번 공연을 먼저 할 것같습니다."

"지방 순연(巡演)은 몇 번이나 다닙니까?"

"매년 춘추 2회이고 때로는 4, 5회도 되나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작년 여름엔 대만에 갔다 왔는데, 요전에 대만에서 공연해 달라는 교섭이 있었어요."

"그래, 대만은 가시나요?"

"글쎄요, 될 수 있으면 조선 공연을 하고 갈까 해요. 음악은 무엇을 하느냐구요? 피아노 외에는......" 하고 한 참 웃다가, "글쎄요, 무용과 일반 예술에서 제일 관계가 깊은 것은 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박 양의 무용은 공간에 그리는 박 양의 깨끗한 환상의 시인 것이다. 그리고 얘기가 극으로 옮겨 갔을 때,

"참, 무용극을 한 번 한 일이 있어요. 그것은 물론 선생과 같이 출연했는데 그 극은 <전쟁>이란 것이었어요. 공연날이 3일 남아서 전쟁보다 더 바쁜 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문부(聞訃)를 하고 선생에게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더니, 그것이 잘 되진 않고 전쟁하는 셈치고 출연을 하였더니 결과가 나쁘지 않고 재미도 있었어요" 하는 박양의 오늘이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눈물겨운 무용전도 있었던 것이었다. "영화는 자주 구경을 다닙니다. 좋아는 하면서도 자주는 못 가요. 장래에 영화 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요? 그런 것을 생각한 일은 없어요."

"그래도 <오야게 아가하지>라는 유구(琉球)의 <토민의 영웅>을 동경 발성(發聲)에서 영화화할 때 로케이션에 갔다 오지 않았겠어요."

"글쎄요, 그것은 춤추는 장면이었는데 다까다 무용 연구소에 교섭이 있어서 선생이 저를 가라니 갔을 뿐이었지요."

"문학에 대한 취미는?"

"시는 좋아해요. 괴테나......" 하는 것을 보면 <들장미>를 콧노래 삼아 부를 듯한 아가씨였다.

"일본 시인으로는?"

"이꾸다 슌게쓰(生田春月)의 시는 좋아요" 하고 몇 번이나 '이꾸다'란 말을 거듭하였다.

"장래의 가정은?" 하고 묻고 어떤 대답이 나오나 하고 이 아가씨의 얼굴을 옆눈으로 잠깐 보았다. "역시 예술가다운......." 하며 말끝은 웃음으로 흐리고 가벼운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는데 검은 드레스에 검향빛 목수건과 자줏빛 오버의 품위 있는 장속(裝束)이었다. (단, 그날의 응접실은 좀 추워서 나도 오버를 입었다.)

"유행에 대해서는?" 하니까,

"직업 관계로 또는 젊은 마음에 화려한 것은 좋아요.그러나 모드라고 해서 빛깔이 조화되지 않는 것이나 상없는 첨단은 즐겨하지 않아요. 숭배하는 예술가라고 특정한 것은 없어요. 말하자면 훌륭한 예술가는 모두 숭배하지요. 그러나 역시 무용을 하니까 크로이스베르크는 좋아요" 하며 독일이 낳은 이 세계적 무용가의 약전(略傳)과 그 무용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는 박 양은 완전히 명랑한 정열을 발로하는 것이었다.

"위인으로는?" 하고 물어 보면 창졸간에 누구를 말할지 곤란한 듯이 "난 몰라요" 하며 웃어 버렸다.

"독서는 많이 못 합니다. 하루에도 3,4시간은 꼭 하려고 노력은 하나 공연에 바쁘면 뜻대론 안 돼요. 스포츠 말입니까? 전 이래두 학생 시대엔 발레 선수였답니다. 좋아하긴 럭비가 좋아요."

그러나 구경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처녀다운 가벼운 한숨이었다. '이 명랑한 무희를 어떻게 한번 곤란케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한 수를 깨달았다.

그래서 눈으로는 보면서도 시침을 떼고, "연애에 대한 경험을 하나 들려주시오."

"글쎄요, 동무들이 말하기를 저는 연애에는 저능하다고 해요" 하며 새빨간 흥분을 남의 말같이 싹 돌리고 말은 계속되는 것이었다.

"조선에는 무용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책임있는 몸인 듯해서 경솔하게는 연애를 해보려는 생각도 않을뿐더러 아직은 그렇게 급한 문제도 아니니까요" 하며 교묘하게 말끝을 돌리는 박 양의 두 뺨에 홍조가 살그머니 돌고 맞은편 유리창 바깥을 지나 멀리 보이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샘물 같은 그 눈동자는 조금도 우울을 모르는 듯하였다. 마치 그 푸른 하늘의 한없이 높고 깊어보이는 거기에 그 예술의 인스피레이션이 생겨나는 것도 같이! 이때 벌써 오후 두 시 반! 세 시부터는 그 다음날 히비야 공회당에 공연이 있어 공부가 시작된다기에 그만 그곳을 떠나기로 하고, 영화 배우로는 조엘 메크리나 프레더릭 마치도 좋으나 가르보의 신비적인 연기에는 말 할 수 없는 애착을 갖는다는데 나는 그만 나와 버렸다.

12일 오후 7시 반, 봄비가 시름없이 내리는데도 나는 히비야로 갔다. 벌써 박 양의 출연 시간이었다. <포도>는 거의 끝이 나고 <카네이션>이 시작되려는 때였다.

그날은 다까다 세이꼬, 이시비 바꾸, 우찌다 에이이찌, 시미즈 시즈꼬 등등 그 방면에 동경에서도 유수한 이들이 모두 공동 출연을 하였으며, 나는 밤 열 한 시 차로 동경을 떠나며 곱게 피어오른 카네이션의 맑은 향기를 머리 속에 그려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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