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번역:삼국사기/권50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삼국사기 (三國史記)
궁예 견훤(弓裔 甄萱) (열전 제10권)
저자: 김부식
101002김부식

궁예

[편집]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견훤

[편집]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甄)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강보에 싸여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면 어머니가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종군(從軍)해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으로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하였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앞섰으므로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이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떼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인 양길(梁吉)이 강성하자 궁예(弓裔)는 스스로 투신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於是 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연지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마침내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오,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서기 900)이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어 견훤에게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천복(天復) 원년(서기 901)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서기 910)에 견훤은 금성(錦城)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서기 912)에 견훤이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의 인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제수하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飡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6년(서기 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동광(同光) 2년(서기 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쳤다.

3년(서기 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는데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때 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래어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일단 화평을 모색하여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사촌아우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서기 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훤은 이를 듣고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바로 왕신을 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 전년에 주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주었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천성(天成) 2년(서기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장차 군사를 내어 도우려 했는데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들이 가서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앞에 끌어내 죽였다. 이어 곧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다음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솜씨있는 기술자를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요격해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훤이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두 살육당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이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 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받을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조가 선수를 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까닭에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악행을 부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중에 태조에게 글을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여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헤치려 하는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조(祖)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韓)씨의 도끼를 휘둘러, 모든 관리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6부를 의로운 가르침으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돌아가시는 변이 생겼으므로,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아우요 헌강왕(獻康王, 憲康王을 말한다.)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였으니, 위태한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잃었으나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다니는 말을 들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달도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면서 함께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더니, 요사이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인해서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를 잃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 오로지 이를 위해 사신을 보내어 그대에게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자 서로 친하게 지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여 왕실을 높이고 마음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어, 이 조칙을 듣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니 주의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싸우다가 피곤해지면 결국 조롱당할 것이오,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時新羅 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imagefont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3년(서기 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반상서가 전해준 조서 한 통을 받았으며 겸하여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중국 사신이 보내온 조서와 편지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고 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은 더하였지만 그대의 편지를 펴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지난번에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많이 도적의 무리에 붙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라도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스스로 선린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과연 수천 리가 농업과 양잠을 일삼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을유년(서기 925)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보고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듯이 곧장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는 것이 모기새끼가 등에 산을 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으고 사죄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며 만약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령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무기를 거두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어짊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마침내 겹겹이 둘렀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볼모를 교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는 남쪽 사람들에게도 내가 크게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들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곤궁에 빠지고 왕궁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대의에 입각하여 주 왕실을 높이는 일에 누가 제(齊) 환공(桓公)이나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에 가까웠던가! 기회를 엿보아 한(漢)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 동탁(董卓)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극히 존귀한 왕에게 몸을 굽혀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게 하였다.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은 숨긴 악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붙잡아 수레에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가득 실어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桀),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극심하여 매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다시 무기를 든 지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내달려 번개 같이 들이쳤으며 수전에서는 범처럼 치고 용처럼 뛰어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윤빈(尹邠)을 바닷가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鄒造)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근처에서는 수오(隨imagefont)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키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버렸고, 청주(淸州)를 깨뜨릴 때는 직심(直心) 등 너댓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에서는 구슬을 머금고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속해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치고 공격하는 것이 이러하니 수복하는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기필코 저수(泜水)의 병영에서 장이(張耳)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가에서 한왕(漢王)이 한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종식시키고 세상은 길이 맑게 될 것이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이 멀리 거친 이곳까지 감싸고 어진 마음이 깊어 어린 백성을 사랑하여,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난을 그치라고 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가 공손히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이는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衽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稇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imagefont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산 채로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훤이 날랜 병사를 선발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楊志),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4년(서기 929) 가을 7월, 훤이 무장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했다.

훤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의 병산(甁山)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봉(元逢)이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全州)로 이주시켰다. 태조는 원봉에게 예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하여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下枝縣)이라 하였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장흥(長興) 3년(서기 932),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가을 9월, 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 3일간 머물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서기 934) 정월, 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무장군사 5천을 선발하여 왔다. 장군 금필(黔弼)이 그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잡았다.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ㆍ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飡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고 홀로 신검만이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서기 935) 3월에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飡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惠帝)가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임금의 자리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은 신묘한 무예가 출중하였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나시어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셨으며,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시었다. 바람과 우레처럼 북을 울리며 치달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와 공업(功業)의 중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력을 농단하였다.

군주를 진(晋)나라의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미혹한 길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줄 뻔 했으나, 다행히 하늘에서 진실한 마음을 내려주셔서 군자께서 허물을 바로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것 같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서기 935) 10월 17일 동트기 이전을 기준하여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한다.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晋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은밀하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란으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공손히 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이에 영규는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태조에게 고하였다.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쳐 길을 막는 장애가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는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높여 반드시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천지신명이 모두 듣고 있을 것입니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베고자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ㆍ금산(金山)과 장군 용길(龍吉)ㆍ기언(奇彦)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으로 삼고, 대상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수향(守鄕)과 장군 왕순(王順)ㆍ준량(俊良)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으로 삼고, 대광(大匡) 순식(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겸(王謙)ㆍ왕예(王乂)ㆍ금필과 장군 정순(貞順)ㆍ종희(宗熙) 등에게 철기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黑水)ㆍ철리(鐵利) 등 여러 방면의 날랜 기병 9천5백을 주어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과 장군 왕함윤(王含允)에게 군사 1만5천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ㆍ명길(明吉)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군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대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ㆍ소달(小達)ㆍ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비밀히 모의해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죄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사졸들이 털끝만치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와 어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수와 사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생업에 안착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眞州)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겸하여 과인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좌승(左丞)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頃)을 하사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니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탈하여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項羽)나 이밀(李密)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을 대적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주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獮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번역문으로서 원문과 다른 저작권의 적용을 받습니다. 원문과 번역문의 저작권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100년이 지났으므로, 미국을 포함하여 저자가 사망한 후 10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단, 나중에 출판된 판본이나 원본을 다른 언어로 옮긴 번역물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저작물이 미국에서도 자유 라이선스 또는 퍼블릭 도메인인 이유를 별도로 명시하여야 합니다.

Public domainPublic domainfalsefalse

번역:

나는 이 저작물의 저작권자로서, 이 저작물을 퍼블릭 도메인으로 모두에게 공개합니다. 이 공개 선언은 전 세계적으로 유효합니다.
만약 저작권의 포기가 법률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경우,
나는 이 저작물을 법적으로 허용되는 한도 내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어떤 목적으로도 제한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Public domainPublic domainfalsefal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