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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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본기(周本紀)[편집]

후직(后稷)[편집]

주(周)의 시조 후직(后稷)은 이름이 기(棄)이다. 그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 여자로 강원(姜原)이라 하였다. 강원은 제곡(帝嚳)의 원비(元妃)였다. 강원이 들에 나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는 마음이 환하게 기뻐지면서 그것을 밟고 싶어져 밟았더니 임신을 한 듯 몸이 움직였다. 기한이 되어 아들을 낳았으나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좁은 골목에 버렸다. 지나가던 마소가 모두 밟지 않고 피해갔다. 숲속에 갖다 놓았으나 때마침 산 속에 사람이 많이 몰려 옮겨서 시내 얼음 위에 버렸더니 날짐승이 날개로 덮어 주었다. 강원이 신기하게 여겨 드디어 데려와 길렀다. 처음에 아이를 버리려 했기 때문에 ‘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기는 아이 때부터 큰사람처럼 품은 뜻이 컸다. 놀이로는 삼과 콩을 잘 심었는데 잘 자랐다. 성인이 되자 농사를 더 잘 지었다. 땅을 살펴 그에 맞는 곡식을 심으니 인민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제요가 소문을 듣고 기를 농사(農師)로 삼았더니 천하가 그 이득을 보는 공을 세웠다. 제순은 “기, 인민들이 바야흐로 굶고 있으니 그대가 후직이 되어 때에 맞추어 백곡의 씨를 뿌리도록 하라”고 했다. 기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이라 부르는 한편 희씨(姬氏) 성을 별도로 내렸다. 후직의 집안이 흥성하기는 도당(요), 우(순), 하(우) 무렵으로 대대로 좋은 덕을 쌓았다.

부줄(不窋), 국(鞠), 공류(公劉), 경절(慶節), 황복(皇僕), 차불(差弗), 훼유(毁隃), 공비(公非), 고어(高圉), 아어(亞圉), 공숙조류(公叔祖類)[편집]

후직이 죽자 아들 부줄(不窋)이 뒤를 이었다. 부줄 말년 하후씨(夏后氏)의 정치가 쇠퇴해지자 직의 자리를 버리고 일에 힘쓰지 않았다. 부줄은 관직을 잃고 융적 땅으로 달아났다. 부줄이 죽자 아들 국(鞠)이 섰고, 국이 죽자 아들 공류(公劉)가 섰다. 공류는 융적의 땅에서 살면서 후직의 일을 다시 일으켜서 밭 갈고 씨 뿌리는 일에 힘쓰고 맞는 땅을 찾아다녔다. 칠수와 저수에서 위수를 건너서는 목재를 얻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재물이 생겼고, 정착해서 사는 사람은 재산이 쌓였다. 인민들이 그로 인해 복을 누렸다. 백성들이 그를 흠모하여 많은 사람들이 옮겨와 귀의했다. 주의 통치가 이로부터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시인은 그 덕을 사모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공유가 죽자 아들 경절(慶節)이 이어받아 빈(豳)에 나라를 세웠다. 경절이 죽고 아들 황복(皇僕)이 섰다. 황복이 죽자 아들 차불(差弗)이 섰다. 차불이 죽자 아들 훼유(毁隃)가 섰다. 훼유가 죽자 아들 공비(公非)가 섰다. 공비가 죽고 아들 고어(高圉)가 섰다. 고어가 죽고 아들 아어(亞圉)가 섰다. 아어가 죽고 아들 공숙조류(公叔祖類)가 섰다.

고공단보(古公亶父), 공계(公季)[편집]

공숙조류가 죽자 아들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섰다. 고공단보가 다시 후직과 공류의 일을 일으키고 덕을 쌓고 의를 행하자 국인(國人)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훈육(薰育)과 융적(戎狄)이 공격해와 재물을 얻으려 하자 주었다. 다시 공격해와 땅과 인민을 요구하자 인민들이 모두 노하여 싸우려 했다. 고공은 “인민이 군주를 세우는 것은 이롭기 때문이오. 지금 융적이 공격하여 싸우려는 것은 우리 땅과 인민 때문이오. 인민이 내게 있든 저들에게 있든 뭐가 다르겠소? 인민들이 나를 위해서 싸우면 그들의 아버지와 아들을 죽여서 그들의 군주가 되는 것이다. 나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소”라 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과 함께 빈을 떠나서 칠수, 저수를 건너고 양산을 넘어서 기산 아래에 머물렀다. 빈에 있던 사람들은 나라 전체로 노약자를 부축하고 이끌어 모두 다 기산 아래에 있는 고공에로 돌아왔다. 이웃한 다른 나라도 고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많이 귀순해왔다. 이에 고공은 융적의 풍속을 없애고 성곽을 쌓고 집을 지어 읍에다 나누어 살게 했다. 다섯 개의 관직과 담당관을 두었다. 인민들이 모두 즐겁게 노래 부르며 그 덕을 칭송했다.

고공단보에게는 큰아들 태백(太伯)과 둘째아들 우중(虞仲)이 있었다. 태강(太姜)은 막내아들 계력(季歷)을 낳았다. 계력은 태임(大任)을 아내로 맞이했다. 모두 어진 부인들이었다. 창(昌)이 태어날 때 성스러운 길조가 있었다. 고공은 “우리 세대에 큰일을 일으킬 사람이 있다는데 그게 창이 아닐까”라 했다. 큰아들 태백과 우중은 고공이 계력을 세워서 창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두 사람은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문신을 하고 단발함으로써 계력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했다.

고공이 죽고 계력이 섰다. 이가 공계(公季)이다. 공계는 고공의 유훈을 잘 닦고 의를 돈독히 행하니 제후가 그를 따랐다.

서백(西伯) 창(昌)[편집]

공계가 죽자 아들 창이 서니 이가 서백(西伯)이다. 서백은 문왕(文王)이라 했다. 후직과 공류의 유업을 따르고 고공와 공계의 법을 본받아 어진 정치를 돈독히 행했다. 늙은이를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했다. 유능한 인재는 자신을 낮추는 예로 대하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인재를 대했다. 인재들이 이 때문에 그에게 많이 몰렸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孤竹)에서 서백이 노인을 잘 보살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에게로 갔다. 태전(太顚),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육자(鬻子), 신갑대부(辛甲大夫) 무리도 그에게 가서 귀의했다.

숭후호(崇侯虎)가 은의 주에게 “서백이 선행을 하고 덕을 쌓아서 제후가 모두 그를 따르니 임금에게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서백을 헐뜯었다. 제주가 바로 서백을 유리(羑里)에 수감했다. 굉요 등이 걱정이 되서 유신씨(有莘氏)의 미녀, 여융(驪戎)의 얼룩말, 유웅(有熊)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아홉 대를 다른 기이한 물건들과 함께 은의 총애받는 비중(費仲)을 통해 주에게 바쳤다. 주는 크게 기뻐하며 “이 물건 하나로도 서백을 석방시키기에 족한데 어찌 이렇게 많을꼬”라며 바로 서백을 사면하는 한편 활과 화살 그리고 큰 도끼를 내려 서백이 (제후를)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면서 “서백을 헐뜯은 자는 숭후호다”라고 말했다. 서백이 낙하 서쪽 땅을 바치며 주에게 포락이란 형벌을 없애도록 청하니 주가 이를 허락했다.

서백이 음덕을 베풀자 제후가 모두 와서 공정한 판결을 청했다. 이때 우(虞)와 예(芮)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송사가 있어 주로 왔다. 경계에 들어서자 밭을 가는 사람은 밭의 경계를 양보하고, 인민의 풍속은 모두 나이 든 사람에게 양보했다. 우, 예 사람이 서백을 보지도 않았는데 부끄러워 서로에게 “우리처럼 싸우는 것을 주 사람들은 부끄러워한다. 가서 뭘 하겠는가? 창피만 당할 텐데”라며 되돌아가서 서로서로 양보하고 떠났다. 제후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서백이 천명을 받은 군주인가보다”라고 말했다.

이듬해 견융(犬戎)을 정벌했고, 그 다음해에는 밀수(密須)를 정벌했다. 또 그 다음해에는 기국(耆國)을 무찔렀다. 은의 조이(祖伊)가 듣고는 두려워 제주에게 보고했다. 주는 “천명이 있지 않던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 했다. 이듬해는 우(邗)를 정벌했고, 그 다음해에는 숭후호를 정벌했다. 그리고 풍읍(豐邑)을 조성하여 기산 아래에서 풍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듬해 서백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발(發)이 즉위했다. 이가 무왕이다.

서백은 대체로 50년간 재위했다. 그가 유리에 갇혔을 때 『역(易)』의 8괘를 64괘로 늘렸던 것으로 본다. 시인들이 서백을 이르길 천명을 받아 왕이라 칭한 해가 우와 예의 송사를 해결한 때라고 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문왕(文王)이라 했다. 법도를 고치고 달력을 제정했다. 고공단보를 추존해 태왕(太王)이라고 했고, 공계(公季)를 왕계(王季)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개 왕업의 상서로운 징조가 태왕 때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

무왕(武王)[편집]

무왕이 즉위하여 태공망(太公望)을 사(師)로 삼고 주공 단(旦)을 보(輔)로 삼았다. 소공(召公)과 필공(畢公) 등은 왕의 좌우에서 문왕의 위업을 배우고 넓히게 돕도록 했다.

9년, 무왕이 필(畢)에서 제사를 올리고 동쪽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맹진(盟津)에 이르렀다. 나무로 문왕의 위패를 만들어 마차에 싣고는 군대 중앙에 배치했다. 무왕은 자신을 태자 발(發)로 칭하며 문왕을 받들어 정벌에 나선다고 하여 감히 자기 멋대로 하지 않았다. 이어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 제절(諸節)에게 “모두들 굳게 믿음을 가지시오. 내가 아는 것은 없지만 선조의 덕 있는 신하들이 있어 이 어린 사람이 선조의 공덕을 받아 상벌을 바로 하여 그 공을 정하겠소”라 고하고는 드디어 군대를 일으켰다. 사상보(師尙父, 강태공)가 “모두를 모아서 배를 띄워 출동하시오! 늦게 오는 자는 목을 벨 것이오”라고 호령했다. 무왕이 강을 건너는데 중류에 이르자 흰 물고기가 왕의 배로 뛰어 들었다. 무왕은 몸을 굽혀 잡아서 제를 올렸다. 다 건너자 불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더니 왕이 머무는 집에 이르러 까마귀로 변했다. 그 색은 붉었고 그 울음소리는 혼이 있는 것 같았다. 이때 제후와 날짜를 기약하지 않았는데 맹진에 800 제후가 모여들었다. 제후는 모두가 “주를 토발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무왕은 “그대들은 천명을 모르오. 아직 아니오”라 하고는 곧 군대를 돌렸다.

2년이 지나자 주의 어리석음과 포악함이 더 심해져 왕자 비간을 죽이고, 기자를 가두고, 태사(太師) 자(疵)와 소사(少師) 강(强)은 악기를 끌어안고 주(周)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에 무왕은 제후에게 널리 “은의 죄가 크니 토벌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알렸다. 곧 문왕의 위패를 받들고 전차 300대와 용사 3,000명, 갑옷을 입은 병사 45,000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주(紂)를 쳤다. 11년 12월 무오일, 군사들이 모두 맹진을 건넜다. 제후가 모두 모여 “게으름 부리지 말고 싸우자”라 하자 무왕은 바로 「태서(太誓)」를 지어 모두에게 알렸다. “지금 은의 왕 주는 부인의 말만 듣고 스스로 천명을 끊었다. 삼정(三正)을 훼손하고 그의 부모 형제를 멀리했다. 선조의 음악을 버리고 음탕한 소리를 만들어 바른 소리가 어지럽게 바뀌니 부인만 좋아했다. 그리하여 지금 나 발이 함께 천벌을 집행하려고 하니 다들 힘 냅시다. 두 번도 없고 세 번도 없소이다!”

2월 갑자일 동틀 무렵, 무왕은 아침 일찍 상(商)의 교외 목야(牧野)에 이르러 맹서했다. 무왕은 왼손에 누런 큰도끼, 오른손에는 소꼬리가 장식된 흰색 깃발을 들고 휘두르며 “멀리서들 와주었구나 서쪽의 병사들이여! 오, 나의 제후들이여!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려(亞旅), 사씨(師氏), 천부장(千夫長), 백부장(百夫長), 그리고 용(庸), 촉(蜀), 강(羌), 모(髳), 미(微), 노(纑), 팽(彭), 복(濮)의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창을 높이 들고 방패를 맞추시오! 내가 맹세하겠소”라고 말한 다음 왕은 이렇게 선서했다. “옛사람 말씀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는다.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이 망한다’고 했소. 지금 은왕 주는 부인 말만 듣고 스스로 선조에 대한 제사와 신령에 대한 답례를 팽개쳤으며, 자기 나라를 멸시하고 저버렸소. 또한 부모형제는 기용하지 않으면서 사방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자들은 존중하고 믿고 기용하니, 그 자들은 백성을 난폭하게 대하고 상(은)에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소. 이제 나 발이 여러분과 함께 천벌을 대행하려 하오. 오늘 싸움은 여섯 걸음, 일곱 걸음 전진하다가 멈추어 열을 다시 맞출 것이니 모두들 힘을 내시오. 무기를 앞으로 찌르시오. 네다섯 번, 예닐곱 번 찌르고 멈추어 대오를 다시 정도할 것이니 모두들 힘을 내시오. 호랑이처럼 곰처럼 그리고 승냥이처럼 이무기처럼 용맹스러워야 하오. 상의 교외에서 투항하는 자들은 공격하지 말고 서방으로 데려가 노역에 충당하시오. 힘을 냅시다. 그대들이 힘을 쓰지 않으면 그대들의 몸에 죽음이 돌아갈 것이오.”선서를 마치자 제후의 군대 전차 4,000대가 목야에 집결하여 진을 쳤다.

제주도 무왕이 왔다는 소식에 70만 명의 군사를 징발해 무왕에 맞섰다. 무왕은 사상보로 하여금 100명의 용사로 싸움을 걸게 하고, 주력을 제주의 군대로 돌진하게 했다. 주의 군대가 많긴 했지만 모두 싸울 마음은 없었다. 무왕이 빨리 쳐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터라 주의 군대는 모두 병기를 거꾸로 돌리고 무왕을 위해 길을 열었다. 무왕이 치고 들어오자 주의 병사는 모두 붕괴되어 주를 배반했다. 주는 도망쳐 반대로 녹대 위에 올라가 보석과 옥으로 치장한 옷을 뒤집어쓰고는 스스로 불을 질러 타죽었다. 무왕이 커다란 백기를 들고 제후를 향해 휘두르니 제후가 모두 무왕에게 절했다. 무왕이 손을 모아 제후에게 인사하자 제후가 모두 그를 따랐다. 무왕이 상나라에 이르자 상나라 백성들이 모조리 나와 교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무왕은 신하들을 시켜 상의 백성들에게 “하늘이 쉴 수 있게 해주셨다”고 말하게 했다. 상 사람들이 모두 두 번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자 무왕도 답례했다. 마침내 (상의 도성으로) 들어가 주가 죽은 곳에 이르러 무왕이 몸소 화살을 세 발 쏜 다음 수레에서 내려 경검(輕劍)으로 내치친 다음 누런 큰도끼로 주의 머리를 베어 크고 흰 깃발에 매달았다. 다음으로 주의 애첩 두 여자를 찾았으나 두 여자 모두 이미 목을 매어 자살했다. 무왕은 다시 세 발의 화살을 쏘고 검으로 친 다음 검은 큰도끼로 목을 베어 작고 흰 깃발에 매달았다. 무왕이 (성을) 나와서 다시 군대로 돌아갔다.

그 다음날, 도로를 치우고 사당과 상주의 궁궐을 정리했다. 날짜가 되자 100명의 용사가 운한기(雲罕旗)를 들고 앞장섰다. 무왕의 동생 숙진탁(叔振鐸)은 의장대를 이끄는 수레를 몰았고, 주공 단은 큰 도끼를, 필공(畢公)은 작은 도끼를 쥐고 무왕의 좌우에 섰다. 산의생, 태전, 굉요는 모두 검을 들고 무왕을 호위했다. (무왕이 성에) 들어가서 사직 남쪽, 주력 군대의 왼쪽에 서니 모두 그 뒤를 따랐다. 모숙정(毛叔鄭)은 명수(明水, 정화수)를 받쳐 들었고, 위강숙(衛康叔) 봉(封)은 자리를 깔았으며, 소공 석(奭)은 예물을 올렸고, 사상보는 제물을 끌고 왔다. 윤일(尹佚)은 “은의 마지막 자손 주는 선왕의 밝은 덕을 모두 없애고, 신령을 욕보이며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상읍의 백성을 난폭하게 다루었다. 이에 천황 상제께 모든 것을 드러내어 분명히 알립니다”라는 축문을 읽었다. 이어 무왕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윤일은 “천명을 받아 은을 바꾸었으니 삼가 하늘의 영명하신 명을 받드옵니다”라 하였다. 무왕은 다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자리를 물러나왔다.

상주의 아들 녹보(祿父)를 봉해 은의 유민을 다스리게 했다. 무왕은 은이 이제 막 평정되어 결집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동생 관숙(管叔) 선(鮮)과 채숙(蔡叔) 탁(度)에게 녹보를 도와 은을 다스리게 했다. 다음으로 소공에게 명하여 기자를 석방시키고, 필공에게 명하여 백성들을 석방시켰으며, 상용의 마을을 표창했다. 남궁괄(南宮括)에게 명하여 녹대의 재물과 거교의 곡식을 풀어서 가난하고 약한 백성을 구제하게 했다. 남궁괄과 사일(史佚)에게 명하여 구정(九鼎)과 보옥을 전시하게 했고, 굉요에게 명하여 비간의 무덤에 봉토를 씌우도록 했다. 종축(宗祝)에게 명하여 군에서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군대를 해산하고 서쪽으로 돌아왔다. 순시를 하면서 갔고 정사를 기록한 「무성(武成)」을 지었다. 제후를 봉하고 (은의) 제기를 고루 하사하고는 「분은지기물(分殷之器物)」을 지었다. 무왕은 성스러운 선조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신농의 후손을 초(焦)에, 황제의 후손을 축(祝)에, 요의 후손을 계(薊)에, 순의 후손을 진(陳)에, 우(禹)의 후손을 기(杞)에 각각 봉하고 포상했다. 공신과 모사를 봉했는데 사상보가 가장 먼저 봉해졌다. 사상보는 영구(營丘)에 봉하고 제(齊)라고 하고, 동생 주공 단은 곡부(曲阜)에 봉하고 노(魯)라 했다. 소공 석을 연(燕)에, 동생 숙선을 관(管)에, 동생 숙탁을 채(蔡)에 봉했다. 나머지도 각각 순서에 따라 봉했다.

무왕은 구목(九牧)의 우두머리들을 소집하여 빈(豳) 언덕에 올라 상읍을 내려다보았다. 무왕이 주에 와서도 밤늦게 잠을 자지 못했다. 주공 단이 왕이 있는 곳으로 가서 “어째서 주무시지 못하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 말하마. 하늘이 은의 제사를 받지 않고 버렸네. 이 발이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60년 동안 미록(麋鹿)이 출몰하고 비홍(蜚鴻)이 벌판에 가득 찼지. 하늘이 은의 제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성공이 있게 된 것이네. 은이 천명을 받아 나라를 막 세웠을 때만 해도 현인이 360명이나 등용되었으나 그들을 기용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 하늘이 (우리 주나라를) 돕고 지키시려는 것인지 아직 확신할 수 없으니 어찌 잠이 오겠는가?” 무왕은 또 말했다. “하늘이 (우리 주나라를) 지키신다는 것이 확정되면 백성을 따르게 하고 천명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전부 잡아 은왕처럼 벌할 것이다. 밤낮없이 힘을 써서 나의 서쪽 땅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로할 것이다. 내가 현명하고 지혜롭게 일을 해야 덕과 교화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 낙수에서 이수까지는 땅이 고르고 험하지 않아 하나라가 정착했었다. 남으로 삼도(三塗)를 바라보고 북으로 악(嶽) 언저리를 보며 황하를 살피고, 다시 낙수와 이수를 바라보니 서로 멀지 않은 것이 하늘의 집(도읍)이다.” 낙읍에 주의 도성을 조성한 다음 떠났다. 화산의 남쪽에다가는 말을 놓아기르고, 도림(桃林)의 들판에다가는 소를 놓아길렀다. 무기와 병사를 거두어 군대를 해산함으로써 다시는 이를 쓰지 않을 것임을 천하에 알렸다.

무왕은 은을 물리친 지 2년 뒤(무왕 13년) 기자에게 은이 망한 까닭을 물었다. 기자는 차마 은의 죄악을 말할 수 없어 국가 존망의 이치를 말했다. 무왕도 난처해져 천도(天道)에 대해 묻고 말았다.

무왕이 병이 났다. 천하가 마저 안정되지 않은 터라 대신들은 두려워하며 경건하게 점을 쳤다. 주공이 목욕재계를 하고 스스로를 인질로 삼아 자신이 무왕을 대신하여 죽거나 병들겠다고 하자 무왕의 병세가 호전되었다. 그 후 무왕이 세상을 뜨고 태자 송(誦)이 이어서 즉위했다. 이가 성왕(成王)이다.

성왕(成王)[편집]

성왕이 어리고 주가 막 천하를 평정했기에 주공은 제후가 주를 배반할까 두려웠다. 주공은 이에 섭정으로 국정을 맡았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동생들이 주공을 의심해 무경(武庚)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주를 배신했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무경과 관숙을 토벌하여 죽이고 채숙은 추방했다. 미자(微子) 개(開)로 하여금 은의 후손을 대신하여 송(宋)에 나라를 세우게 했다. 은에 남은 유민을 모두 거두어 무왕의 막내 동생 봉(封)을 위강숙(衛康叔)에 봉했다. 진(晉) 당숙(唐叔)이 좋은 곡식을 얻어 성왕에게 바치자 성왕은 그것을 병영에 나가있는 주공에게 보냈다. 주공은 동쪽 땅에서 곡식을 받고는 천자의 뜻을 알렸다. 당처 관숙과 채숙이 주를 배반하자 주공이 그들을 토벌하여 3년 만에 완전히 평정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고(大誥)」를, 그 다음으로 「미자지명(微子之命)」을, 그 다음으로 「귀화(歸禾)」를, 그 다음으로 「가화(嘉禾)」를, 그 다음으로 「강고(康誥)」, 「주고(酒誥)」, 「자재(梓材)」를 지었다. 그 사건이 이 주공 편에 있다. 주공이 섭정한지 7년, 성왕이 장성하자 주공은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고 북면하는 신하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성왕이 풍(豐)에 머무르며 소공에게 낙읍을 다시 경영하여 무왕의 뜻을 잇도록 했다. 주공이 다시 점을 치고 잘 살펴서 마침내 도읍을 건설하여 구정(九鼎)을 그곳에 잘 모셨다. 그리고는 “여기가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에서 공물을 바치러 오는 거리가 모두 같아졌다”라 하고는 「소고(召誥)」, 「낙고(洛誥)」를 지었다. 성왕이 은의 유민을 그곳으로 옮기자 주공은 왕명을 알리기 위하여 「다사(多士)」, 「무일(無逸)」을 지었다. 소공은 태보(太保)에, 주공은 태사(太師)에 임명되어 동으로 회이(淮夷)를 정벌하고 엄(奄)을 멸한 후 그 군주를 박고(薄姑)로 옮겼다. 성왕이 엄에서 돌아와 종주(宗周)에 이르러 「다방(多方)」을 지었다. 은의 명을 끊고 회이를 습격하고 풍으로 돌아와 「주관(周官)」을 지었다. 예악을 바로 잡고 제도를 개혁하니 인민은 화목하고 칭송의 노래가 울렸다. 성왕이 동이를 정벌하자 식신(息愼)이 와서 축하하자 왕은 영백(榮伯)에게 「회식신지명(賄息愼之命)」을 짓게 했다.

강왕(康王)[편집]

성왕이 세상을 뜰 즈음 태자 교(釗)가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소공과 필공에게 제후를 거느리고 태자의 즉위를 도우라고 했다. 성왕이 세상을 뜨자 두 공은 제후를 이끌고 태자 교에게 선왕의 사당을 참배하게 하여 문왕과 무왕이 어렵게 왕업을 이루었음을 거듭 알리고, 욕심 부리지 말고 근검절약에 힘쓸 것과 믿음으로 일에 임할 것을 권하면서 「고명(顧命)」을 지었다. 태자 교가 마침내 즉위하니 이가 강왕(康王)이다. 강왕이 즉위하여 문왕과 무왕의 위업을 널리 알릴 것을 제후에게 두루 선언하고는 「강고(康誥)」를 지었다. 성왕과 강왕 때는 천하가 안녕을 찾아 형벌이 40년 넘게 시행되지 않았다. 강왕은 필공에게 (백성 일부를) 성주(成周)의 교외로 나누어 옮기게 하고는 「필명(畢命)」을 지었다.

소왕(昭王), 목왕(穆王)[편집]

강왕이 죽자 아들 소왕(昭王) 하(瑕)가 즉위했다. 소왕 때는 왕도가 쇠약해졌다. 소왕은 남쪽으로 순수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강에서 죽었지만 그 죽음을 알리지 않고 숨겼다.

소왕의 아들 만(滿)이 즉위하니 이가 목왕(穆王)이다. 목왕이 즉위할 무렵 나이가 이미 50이었다. 왕도가 쇠약해져 목왕은 문왕과 무왕의 도가 쇠약해진 것이 걱정이 되어 백경(伯臩)을 태복(太僕)에 임명해 국정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고는 「경명(冏命)」을 지었다. 다시 안녕을 찾았다.

목왕이 견융을 정벌하려고 하자 제공(祭公) 모보(謀父)가 이렇게 간했다.“안 됩니다. 선왕께서는 덕을 드러내셨지 군사력을 과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릇 군대는 때에 맞추어 움직여야 하며, 움직였다 하면 위엄을 보여야 합니다. 괜히 과시하면 장난이 되고 장난이 되면 위험을 떨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주문공(周文公)의 노래에서도 ‘창과 방패를 거두어들이고 활과 화살을 자루에 넣어라. 좋은 덕을 천하에 시행하고 왕도로 천하를 지키리라’라고 했습니다. 선왕께서는 인민들에 대해 덕을 바르게 하고 성정을 돈독히 하려고 힘쓰시고, 인민들이 재물을 늘리고 기물을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이해관계의 소재를 바로 알게 했습니다. 예법으로 수양하게 하고, 이익은 꾀하되 손해는 피하게 하고, 덕을 품고 벌을 두려워하게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대대로 보존하여 점점 강해졌던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선왕들께서는 대대로 후직을 맡아 우순과 하우를 모셨습니다.

하가 쇠퇴하여 후직을 없애고 (농사에) 힘을 쓰지 않아서 우리 선왕 부줄은 그 관직을 잃고 스스로 융적 사이로 숨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감히 그 업에 태만하지 않고 미덕과 전통을 지키려 애를 썼습니다. 전장제도를 삼가 받들되 종일 애를 쓰고 돈독함을 유지하면서 충성과 믿음으로 받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대대로 덕을 행하여 선대의 이름을 욕보이지 않았습니다. 문왕과 무왕에 이르러서는 선대의 광명을 밝혀 더욱 자애롭고 화목하게 신을 섬기고 인민을 보호하니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의 왕 제신(帝辛)이 인민에게 큰 악을 저질러 인민들이 참지 못하고 기꺼이 무왕을 추대함으로써 상의 교외에서 싸우게 된 것입니다.

이는 선왕께서 무력에 힘쓴 것이 아니라 인민의 근심을 불쌍히 여겨 그 해악을 제거한 것입니다. 무릇 선왕의 제도에서는 나라 안을 전복(甸服), 나라 밖을 후복(侯服), 제후국 밖은 빈복(賓服), 오랑캐의 거주지를 요복(要服), 융적(戎翟)이 사는 곳을 황복(荒服)이라 했습니다. 전복에서는 제(祭)를 드리고, 후복에서는 사(祀)를 올리며, 빈복에서는 향(享)을 하고, 요복에서는 공(貢)을 바치고, 황복에서는 신하로 복종합니다. 날마다 제하고, 달마다 사하며 계절마다 향하고, 공은 매년 영원히 주 왕실을 받들어야 합니다. 선왕께서는 이런 제사 관련 제도를 시행하시면서 제 제사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자신의 생각을 반성했고, 사 제사에 참가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자신의 말을 점검했으며, 향 제사에 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자신의 정령과 교화를 정돈했고, 조공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자신의 명분을 바르게 하였으며, 자신을 왕으로 받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자신의 덕을 수양하는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러고도 참가하지 않으면 그제야 형벌을 사용하셨습니다.

제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법에 따라서 징벌하고, 사 제사에 참가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 토벌하고, 향 제사에 오지 않으면 정벌하고, 조공하지 않으면 꾸짖으며, 왕으로 받들지 않으면 타일러 깨우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형벌에 따른 법이 있고, 토벌에 따른 군대가 있고, 정벌에 따른 조처가 있고, 꾸짖는데 따른 위엄이 있고, 타일러 깨우치는 데 따른 문장이 있는 것입니다. 명령하고 권하는데도 오지 않으면 자신의 덕을 더더욱 수양하였고, 백성을 원정에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니 가까운 곳에 있는 자 왕명을 듣지 않는 이 없고, 멀리 있는 자 복종하지 않는 이 없었습니다. 지금 대필(大畢)과 백사(伯士)가 귀의한 후로 견융씨는 직분에 충실하여 왕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자께서 ‘향 제사에 오지 않는 죄목으로 저들을 정벌하여 저들에게 무력을 보여주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선왕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니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듣기에 견융은 기풍이 돈독하고 옛 덕을 따르며 한결같이 지키니 우리를 막을 힘이 있습니다.”

목왕이 끝내 그들을 정벌했으나 흰 이리 네 마리와 흰 사슴 네 마리만을 얻어서 돌아왔다. 이로부터 황복 지역에서는 조회를 드리러 오지 않았다.

제후 가운데 화목하지 않는 자들이 있어 보후(甫侯)가 왕에게 말하자 형법을 제정했다.

왕이 이렇게 말했다. “자, 오라! 나라가 있고 땅이 있는 자들이여. 너희에게 좋은 형법을 알리노라. 지금 너희들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고 무엇인가를 한다면 인재를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대처하려면 형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인가를 판결해야 한다면 공평한 판결이 아니겠는가? 소송 양쪽이 모두 오면 법관은 다섯 가지 방법으로 이들을 살펴라. 다섯 가지 방법이 바르게 적용되었다면 다섯 가지 형벌인 오형(五刑)에 따라 판결하라. 다섯 가지 방법으로 살펴도 근거가 불충분하다면 다섯 단계의 벌금으로 처리하라. 벌금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면 다섯 가지 과실을 적용하라. 다섯 가지 과실을 적용할 때는 관리의 권세를 이용하려는 관옥(官獄)과, 연줄을 이용하려는 내옥(內獄)을 살펴라. 법관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면 잘 조사하여 범인과 같이 처벌하라. 다섯 가지 형벌인 오형이나 벌금을 적용하기 어려우면 사면하되 잘 살펴서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하라. 조사가 정확해야 백성의 믿음을 얻을 수 있고, 심문에는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조사가 확실하지 않은 사안은 의심스러운 대로 놓아두고 처리하지 말아라. 모두 하늘의 위엄을 엄숙하게 공경하라.

경형(黥刑, 얼굴에 뜸을 뜨는 형벌)의 죄를 지었으나 의문이 있으면 사면하고 100솔의 벌금에 처하되 그 죄상을 상세히 조사하라. 의형(劓刑, 코를 베는 형벌)의 죄를 지었으나 의심이 가면 사면하고 200솔의 벌금을 부과하되 그 죄상 소상히 조사하라. 빈형(臏刑, 발을 자르는 형벌)의 죄를 지었으나 의문이 있으면 사면하고 300솔의 벌금에 처하되 죄상을 낱낱이 조사하라. 궁형(宮刑, 성기를 자르는 형벌) 죄에 해당하나 의문이 가면 사면하고 500솔의 벌금에 처하되 죄상을 소상히 살펴라. 대벽(大辟, 목을 베는 형벌) 죄를 지었으나 의심스러우면 용서하고 1,000솔의 벌금에 처하되 죄상을 명백히 조사하라. 경형, 즉 묵형(墨刑)의 법조항은 1,000 가지, 의형은 1,000 가지, 빈형은 500 가지, 궁형은 300 가지, 대벽형은 200 가지이다. 오형을 모두 합치면 3,000 가지이다.”

이를 「보형(甫刑)」이라고 이름 지었다.

공왕(共王), 의왕(懿王), 효왕(孝王), 이왕(夷王)[편집]

목왕이 재위 55년에 세상을 뜨고 아들 공왕(共王) 예호(繄扈)가 섰다.

공왕이 경수(涇水)에서 놀 때 밀(密) 강공(康公)이 그를 수행했는데 세 여자가 (강공에게) 달려와 몸을 맡겼다. 강공의 어머니가 “왕에게 바쳐야만 한다. 짐승이 세 마리면 군(群)이라 하고, 사람이 셋이면 중(衆)이라 하며, 여자가 셋이면 찬(粲)이라 한다. 왕이 사냥을 하더라도 짐승을 많이 잡지 않고, 제후가 행차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인사를 올리지 않으며, 왕이 비를 맞이할 때도 한 집안에서 여사 셋을 동시에 취하지 않는 법이다. 세 여자가 모두 잘 생겼다. 사람들이 이 미인들을 바쳤으나 무슨 덕이 있어 감당하겠느냐? 왕도 감당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너 같은 소인이어찌 감당하겠느냐? 소인이 귀한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결국은 망하느니라”라 했다. 강공은 바치지 않았다. 1년 뒤 공왕이 밀을 멸망시켰다. 공왕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의왕(懿王) 간(艱)이 즉위했다. 의왕 때 왕실은 점차 쇠약해졌고, 시인은 시를 지어 풍자했다.

의왕이 세상을 뜨고 공왕의 동생 벽방(辟方)이 즉위하니, 이가 효왕(孝王)이다. 효왕이 세상을 떠나자 제후들이 다시 의왕의 태자 섭(燮)을 세우니 이가 이왕(夷王)이다.

여왕(厲王)[편집]

이왕이 세상을 뜨자 아들 여왕(厲王) 호(胡)가 섰다. 여왕은 30년간 재위하면서 이익을 탐내고 영이공(榮夷公)을 가까이했다. 대부 예량부(芮良夫)가 여왕에게 간했다.

“왕실이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영이공은 이익을 독점하는데만 마음이 가 있고 다가올 재앙은 모릅니다. 무릇 이익이란 만물과 천지자연에서 나오는 것으로 독점하면 그 피해가 큽니다. 천지만물은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누어 써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독점한단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불어 일으켜 큰 재앙에 대비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왕을 이끄니 왕이 오래 자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무릇 왕은 이익이 되는 것을 개발하여 위아래 모두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신과 인간 그리고 만물이 모두 알맞게 이익을 얻게 하되 행여나 원망은 없을지 걱정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송(頌)」에 ‘덕이 넘치는 후직을 그리워하노라! 저 하늘과 참으로 짝을 이룰 만하네. 우리 백성들 두루 잘 살게 하시니 모두가 그를 본받네’라고 했고, 「대아(大雅)」에서는 ‘은혜와 이익을 베푸시니 주나라가 발전하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는 이익은 두루 나누고, 재난은 두려워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나라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이익을 혼자 차지하려는 것이 정말 옳은 일입니까? 필부가 이익을 독차지해도 도적이라고 하거늘 왕이 그러면 따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영이공을 기용하시면 주나라는 분명 낭패를 볼 것입니다.”

여왕은 듣지 않고 끝내 영이공을 경사(卿士)로 기용하여 일을 맡겼다.

왕이 포악하고 사치하고 오만해서 국인이 왕을 비방했다. 소공(召公)이 “인민들은 그런 통치를 못 견딥니다”라고 간했다. 왕이 노하여 위(衛)나라의 무당을 불러들여 비방하는 자들을 감시하게 해서는 보고가 오라오면 그들을 죽였다. 비방이 줄어들었으나 제후는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34년, 왕이 더욱 엄해지자 국인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여왕은 소공에게 “내가 비방을 없앴다. 이제 감히 말을 못하지”라며 기뻐했다. 소공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말을 못하게 막은 것이지요. 인민의 입을 막는 일은 물을 막는 일보다 심각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사람이 아주 많이 상하듯이 인민들 또한 같습니다. 그래서 물은 흐르게 터주어야 하며, 인민은 말을 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자는 정사를 처리하면서 공경과 일반 관리들에게 시를 써서 내게 하고, 악관에게는 곡을 만들어 올리게 하며, 사관에게는 지난 시대의 정치를 기록한 사서를 바치게 하고, 악사에게는 잠언을 올리게 하며, 동자가 없는 맹인에게는 낭송하게 하고, 눈이 먼 맹인에게는 음악이 없는 시를 읊게 합니다. 백관은 직언하고, 평민은 여론을 전달하며, 가까운 시종은 올라온 직언을 살피는데 힘을 쓰게 하고, 친인척은 왕의 잘못을 살펴 보완하며, 악사와 사관은 악곡과 역사로 천자를 바르게 이끌며, 원로대신들은 이것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바칩니다. 왕이 이를 잘 참작하면 정치는 잘못되지 않고 잘 시행되는 것입니다.

인민에게 입이 있는 것은 땅에 산과 내가 있어 거기서 재물이 나오는 것과 같고, 또 평야, 습지, 기름진 땅이 있어서 입고 먹을 것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입으로 마음껏 말하게 하면 잘하고 못함이 다 드러납니다. 좋은 일은 실행하고 나쁜 일은 방지하는 것, 이는 재물을 생산하여 입고 먹는 것에 쓰는 방법과 같습니다. 대저 인민이 속으로 생각한 다음 입으로 말하며, 그러고도 더 기다렸다가 행동합니다. 그런 그들의 입을 막는 일이 얼마나 오래 가겠니까?”

왕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나라에 감히 말하려는 자가 없어졌고, 3년 뒤 서로 힘을 합쳐 난을 일으켜서 여왕을 습격했다. 여왕은 체(彘)로 도망쳤다.

여왕의 태자 정(靜)은 소공의 집에 숨었다. 국인이 듣고는 곧 그 집을 포위했다. 소공이 “전에 내가 여러번 왕에게 직언했지만 왕은 듣지 않아 이 난리가 난 것이다. 지금 왕의 태자를 죽이면 왕은 나라를 원수로 여기고 한을 품을 것 아닌가? 모름지기 군주를 섬기는 자는 위험하다고 군주를 원망하지 않으며, 원망스러워도 성내지 않는다. 하물며 왕을 섬김에 있어서야”라 하고는 그 자기 아들로 태자를 대신하게 하여 태자는 결국 달아날 수 있었다.

소공과 주공(周公) 두 상(相)이 정치를 돌보니 공화(共和)라 했다.

선왕(宣王)[편집]

공화 14년, 여왕이 체에서 죽었다. 태자 정은 소공의 집에서 자랐고, 소공과 주공이 그를 왕으로 옹립하니 이가 선왕(宣王)이다. 선왕이 즉위하자 두 상이 그를 보좌하여 정무를 돌보고 문왕, 무왕, 성왕, 경왕의 유풍을 본받자 제후가 다시 주를 받들었다.

12년, 노(魯) 무공(武公)이 와서 조회했다.

선왕이 왕이 직접 경작하는 천무(千畝)의 적전(籍田)을 돌보지 않자 괵(虢) 문공(文公)이 그렇게 안 된다고 간언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39년, 천무(千畝)에서 전투가 벌어져 왕의 군대가 강씨(姜氏) 융에게 크게 패했다.

선왕(宣王)이 남국(南國)에서 징발한 군대를 잃자 태원(太原)에서 징병하려고 백성의 수를 조사했다. 중산보(仲山甫)가 “하지 마십시오”라고 간했으나 선왕은 듣지 않고 끝내 백성의 수를 조사했다.

유왕(幽王)[편집]

46년(기원전 782년), 선왕이 세상을 뜨고 아들 유왕(幽王) 궁생(宮湦)이 즉위했다.

유왕 2년, 서주 삼천(三川) 유역에 지진이 발생했다. 백양보(伯陽甫)가 이렇게 아뢰었다. “주가 망하려 합니다. 무릇 천지의 기운은 그 질서를 잃으면 안 되는데, 그 질서를 잃었다면 이는 사람이 어지럽힌 것입니다. 양기가 밑으로 막혀 나오지 못하는데 음기가 이를 눌러 올라오지 못하게 하면 지진이 발생합니다. 지금 삼천 유역에서 지진이 발생한 것은 양기가 자기 자리를 잃고 음기에 눌렸기 때문입니다. 양기가 자리를 잃고 음기 자리에 가 있으면 수원은 막히고, 수원이 막히면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과 흙이 서로 스며들어야 만물이 자라고, 그래서 인민이 재물과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흙이 통하여 스며들지 못하면 인민이 사용할 재물이 부족해지니 어찌 망하지 않길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전에 이수와 낙수가 말라 하나라가 망했고, 황하가 말라 상나라가 망했습니다. 지금 주나라의 덕이 이 두 나라의 말기와 같아 하천의 원류가 막혔고, 막혔으니 마를 것이 뻔합니다. 모름지기 나라란 산과 하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산이 무너지고 하천이 마르는 것은 망국의 징조입니다. 하천이 마르면 산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나라가 망한다면 10년이 채 안 걸릴 것입니다. 하늘이 버리면 1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이해에 세 하천이 말랐고 기산이 무너졌다.

3년, 유왕은 포사(褒姒)를 총애했다. 포사가 아들 백복(伯服)을 낳자 유왕은 태자를 폐하려 했다. 태자의 어머니는 신후(申侯)의 딸로 왕후가 되었다. 그 뒤 유왕이 포사를 사랑하여 신후를 폐하고 태자 의구(宜臼)를 제거하여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주의 태사(太史) 백양(伯陽)이 역사 기록을 읽고는 “주나라가 망할 것이다”라 했다. 전에 하후씨가 쇠락하려 할 때 신룡(神龍) 두 마리가 하 임금의 뜰로 와서는 “우리는 포(褒)의 두 왕들이다”라고 했다. 하 임금이 점을 쳤더니 죽여도 쫓아버려도 그냥 두어도 다 불길하다고 나왔다. 다시 점을 치니 침을 받아 보관해두면 괜찮을 것이라 했다. 이에 제물을 올리고 글을 지어 고하자 용은 사라지고 침이 남았기에 상자에 넣고 잘 감추었다.

하나라가 망하자 이 상자는 은나라로 전해졌다. 은나라가 망하자 이 상자는 다시 주나라로 전해졌다. 세 왕조에 이르기까지 감히 상자를 열어보지 못하다가 여왕 말년에 상자를 열었더니 그 침이 뜰로 흘러내려 지워지지 않았다. 여왕이 여자들을 발가벗겨서는 크게 떠들게 하자 침은 검은 자라로 변해서 왕의 후궁으로 기어들어갔다. 후궁에 있던 일곱 살 가량의 어린 계집이 자라와 맞닥뜨렸다. 이 계집아이가 열다섯 살 쯤 되자 남자도 없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으나 겁이 나서 아이를 갖다 버렸다.

선왕 때 어린 여자애들이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기(箕)나무로 만든 화살주머니, 주나라를 망하게 하리라”라는 동요를 불렀었다. 선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이런 활과 화살주머니를 파는 부부가 있으면 잡아 죽이게 했다. 이 부부가 도망가다가 길에서 후궁 계집종 낳아서 갖다버린 이상한 아기를 발견했다. 밤에 아이 울음 소리를 들으니 애처로워 아이를 거두었다. 부부는 포(褒)로 달아났다. 포 사람이 유왕에게 죄를 지어 어린 계집이 버렸던 여자를 왕에게 바쳐 속죄를 청했다. 버려졌던 이 여자 아이가 포 지역에서 자랐기 때문에 포사라 불렀다. 유왕 3년, 왕이 후궁에 행차했을 때 그녀를 보고는 총애하여 아들 백복(伯服)을 낳았던 것이다. 유왕은 기어이 신후와 태자를 폐하고 포사와 백복을 왕후와 태자로 삼았다. 태사 백양이 "화근이 무르익었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라고 했다.

포사는 잘 웃지 않았다. 유왕이 갖은 방법으로 그녀를 웃게 하려 했으나 웃지 않았다. 유왕은 봉수(烽燧)와 큰 북을 준비하여 적이 온다면서 봉화를 올리게 했다. 제후가 모두 달려왔지만 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포사가 크게 웃었다. 유왕은 그것이 좋아서 거듭 봉화를 올렸다. 그 후로는 믿지 않게 되었고 제후는 더 이상 달려오지 않았다.

유왕이 괵석보(虢石父)를 경으로 삼아 나라 일을 맡기자 국인이 모두 원망했다. 석보는 사람됨이 간사하고 아부를 잘 하며 이익을 밝혔는데 유왕은 이런 자를 기용했다. 여기에 신후를 폐하고 태자를 쫓아내자 신후는 화가 나서 증(繒), 서이(西夷) 견융(犬戎)과 함께 유왕을 공격했다. 유왕이 봉화를 올려서 군대를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드디어 유왕을 여산(驪山) 아래에서 죽이고 포사는 포로로 잡았다. 주나라의 재물은 모조리 약탈당했다.

평왕(平王)[편집]

이에 제후는 신후에게로 가서 유왕의 태자였던 의구를 옹립했다. 이가 평왕(平王)으로 주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평왕은 즉위하자 낙읍으로 천도하여 융적을 피했다. 평왕 때 주 왕실은 쇠약해졌고, 제후들 중 강자가 약자를 병합하니 제(齊), 초(楚), 진(秦), 진(晉)이 강대해지기 시작했고, 정치는 방백(方伯, 패주)에 의해 좌우되었다.

49년, 노(魯) 은공(隱公)이 즉위했다.

환왕(桓王)[편집]

51년, 평왕이 세상을 뜨고 태자 예보(洩父)가 일찍 죽어서 그 아들 임(林)이 즉위하니, 이가 환왕(桓王)이다. 환왕은 평왕의 손자이다.

환왕 3년, 정(鄭) 장공(莊公)이 조회를 왔으나 환왕이 예로 대하지 않았다. 5년에 정 장공이 이를 원망해서 노(魯)와 허전(許田)을 바꾸었다. 허전은 천자가 태산에서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밭이다.

8년, 노에서 은공을 죽이고 환공(桓公)을 옹립하는 일이 발생했다.

13년, 정을 정벌하자 정이 활을 쏘아 환왕에게 부상을 입히자 환왕이 돌아갔다.

장왕(莊王), 희왕(釐王)[편집]

23년, 환왕이 세상을 뜨고 아들 장왕(莊王) 타(佗)가 섰다.

장왕 4년, 주공(周公) 흑견(黑肩)이 장왕을 죽이고 왕자 극(克)을 세우고자 했다. 신백(辛伯)이 장왕에게 알리자 장왕이 주공을 죽였다. 왕자 극은 연(燕)으로 도망갔다.

15년, 장왕이 세상을 뜨자 아들 희왕(釐王) 호제(胡齊)가 즉위했다. 희왕 3년에 제 환공이 처음으로 패자가 되었다.

혜왕(惠王)[편집]

5년, 희왕이 세상을 뜨고 아들 혜왕(惠王) 낭(閬)이 즉위했다. 혜왕 2년, 전에 장왕(莊王)이 총애하던 요(姚)가 아들 퇴(頹)를 낳자 퇴 역시 장왕의 총애를 받았다. 혜왕이 즉위하면서 대신의 정원을 빼앗아서 원유를 만들었다. 이 일로 대부 변백(邊伯) 등 5인이 난을 일으켜 연(燕), 위(衛)의 군대를 소집해 혜왕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혜왕은 온(溫) 땅으로 달아났다가 얼마 후 정의 역(櫟) 땅으로 옮겼다. (변백 등은) 희왕의 동생 퇴를 왕으로 세우고 온갖 음악과 춤으로 이를 경축하니 정과 괵의 국군이 노했다.

4년, 정과 괵의 국군이 왕 퇴를 공격해 죽이고 다시 혜왕을 세웠다.

혜왕 10년, 제 환공을 (제후의 우두머리인) 백(伯)으로 삼았다.

양왕(襄王)[편집]

25년, 혜왕이 세상을 뜨고 아들 양왕(襄王) 정(鄭)이 섰다. 양왕의 어머니가 일찍 죽고 계모 혜후(惠后)가 들어와 숙대(叔帶)를 낳아 혜왕의 총애를 받자, 양왕이 두려워했다. 3년, 숙대가 융, 적(翟)과 함께 양왕을 공격하려고 했다. 양왕이 숙대를 죽이려 하자 숙대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제나라 환공은 관중에게 주나라로 가서 융을 평정하게 했고, 습붕(隰朋)에게는 진(晉)나라에서 융을 평정하게 했다. 왕이 관중을 상경(上卿)의 예로 대하려 했다. 관중은 “신은 낮은 자리의 관리입니다. 천자께서 임명한 상경 신분의 국씨(國氏)와 고씨(高氏)가 있습니다. 봄가을로 그들이 왕명을 받들러 올 터인데 그 때는 무슨 예로 대하시겠습니까? 제후의 신하로서 감히 사양하고자 합니다”라며 사양했다. 왕은 “그대는 장인 나라의 사신이오. 공적을 가상히 여기고자 하니 짐의 명을 거역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관중은 하는 수 없이 하경(下卿)의 예를 받고 돌아갔다.

9년, 제나라 환공이 세상을 떠났다.

12년, 숙대가 다시 주나라로 돌아왔다.

13년, 정이 활(滑)을 공격하자 양왕은 유손(游孫)과 백복(伯服)을 보내 활을 봐주라고 부탁했으나 정은 이들을 가두어버렸다. 정 문공은 혜왕이 복위한 후 정 여공(勵公)에게 옥으로 된 술잔을 보내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었으며, 또 양왕이 활을 보호하는 것을 원망하여 백복을 가둔 것이다. 양왕이 화가 나서 적(翟)의 힘을 빌려 정을 공격하려 했다. 부신(富辰)이 “우리 주 왕실이 동천할 때 진(晉)나라와 정나라의 힘을 빌렸고, 왕자 퇴가 난을 일으켰을 때도 정나라의 힘으로 평정하였습니다. 지금 보잘 것 없는 원한 때문에 정나라를 버리시렵니까?”라며 말렸다. 왕은 듣지 않았다.

15년, 왕은 적의 군사를 이끌고 정나라를 공격했다. 왕은 적에게 고마워하며 그 딸을 왕후로 맞이하려 했다. 부신은 “평왕(平王), 환왕(桓王), 장왕(莊王), 혜왕(惠王)이 모두 정나라의 도움을 받았는데, 왕께서 가까운 나라를 버리고 적을 가까이 하려하니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직언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16년, 양왕이 적후(翟后)를 내쫓으려 하자 적이 침범하여 꾸짖고는 담백(譚伯)을 죽였다. 부신은 “내가 여러 차례 이야기했건만 들지 않았다.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왕은 내가 자기를 원망해서 그런다고 여기겠지”하고는 부하를 이끌고 나가 싸우다 죽었다.

당초 혜후는 왕자 숙대를 세우려고 무리들과 함께 적(翟)에게 길을 열어주어 적의 군사가 주나라로 들어오게 했다. 양왕은 정나라 달아났고, 정나라는 왕을 범(氾)에 머무르게 했다. 왕자 숙대는 왕이 되자 양왕이 내쳤던 적후를 아내로 맞이해 온에서 살았다.

17년, 양왕이 진나라(晉)에 도움을 청하자 진나라 문공(文公)은 양왕을 맞이하는 한편 숙대를 죽였다. 양왕은 홀, 제사용 술, 활과 화살을 진 문공에게 내리고 백(伯)으로 삼는 한편, 하내(河內)의 땅을 진나라에 주었다.

20년, 진나라 문공이 양왕을 부르자 양왕은 하양(河陽)과 천토(踐土)에서 회맹했고, 제후가 모두 인사를 드렸다. 역사서에는 이 일을 기피하여 “천왕이 하양에 순수하러 갔다”고 기록했다.

24년, 진나라 문공이 죽었다.

31년,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죽었다.

경왕(頃王), 광왕(匡王), 정왕(定王)[편집]

32년, 양왕이 세상을 뜨고 아들 경왕(頃王) 임신(壬臣)이 즉위했다. 경왕이 6년 만에 세상을 뜨고 아들 광왕(匡王) 반(班)이 즉위했다. 광왕이 6년 만에 세상을 뜨고 동생 유(瑜)가 즉위하니 이가 정왕(定王)이다.

정왕 원년,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육혼(陸渾)의 오랑캐를 정벌한 다음 낙읍에 주둔하면서 사람을 보내 구정(九鼎)에 관해서 물었다. 정왕이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좋은 말로 응대하자 초나라 군대가 물러났다.

10년, 초나라 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자 정백이 항복했다. 얼마 뒤 나라를 회복했다.

16년, 초나라 장왕이 죽었다.

간왕(簡王), 영왕(靈王)[편집]

21년, 정왕(定王)이 붕어하고 아들 간왕(簡王) 이(夷)가 즉위했다. 간왕 13년, 진(晉)나라가 자신들의 군주인 여공(厲公)을 죽이고 주나라에서 공자 주(周)를 모셔와 도공(悼公)으로 추대했다.

14년, 간왕이 붕어하고 아들 영왕(靈王) 설심(泄心)이 즉위했다. 영왕 24년, 제나라의 최서(崔杼)가 장공(莊公)을 죽였다.

경왕(景王), 도왕(悼王), 경왕(敬王)[편집]

27년, 영왕이 붕어하고 아들 경왕(景王) 귀(貴)가 즉위했다. 경왕 18년, 왕후가 낳은 태자가 총명했으나 일찍 죽었다. 20년, 경왕은 아들 조(朝)를 사랑해 태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경왕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왕자 개(丐)의 무리가 왕자 조와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국인은 경왕의 큰아들 맹(猛)을 왕으로 옹립했으나 왕자 조가 맹을 죽였다. 그래서 맹을 도왕(悼王)이라 했다. 진(晉)나라가 왕자 조를 공격하고 왕자 개를 옹립하니, 이가 경왕(敬王)이다.

경왕 원년, 진(晉)나라가 경왕을 입국시키려고 했으나 왕자 조가 자신의 힘으로 즉위하니 경왕은 들어가지 못하고 택(澤)에 머물렀다.

경왕 4년, 진(晉)나라가 제후를 이끌고 경왕을 주로 보내니 왕자 조는 신하의 자리로 물러났다. 제후가 주에 성을 쌓아 주었다.

16년, 왕자 조의 무리가 다시 난을 일으키자 경왕은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17년, 진(晉)나라 정공(定公)이 경왕을 주로 귀국시켰다.

39년, 제나라 전상(田常)이 그 국군 간공(簡公)을 죽였다.

41년,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했다. 공자가 죽었다.

원왕(元王), 정정왕(貞定王), 애왕(哀王), 사왕(思王), 고왕(考王)[편집]

42년, 경왕이 세상을 뜨고 아들 원왕(元王) 인(仁)이 즉위했다. 원왕은 8년 만에 세상을 뜨고 아들 정왕(定王) 개(介 )가 즉위했다.

정왕 16년, 삼진(三晉, 한․조․위)이 지백을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28년, 정왕이 세상을 뜨고 장자 거질(去疾)이 즉위하니 이가 애왕(哀王)이다. 애왕은 석 달 재위했다. 동생 숙(叔)이 애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니 이가 사왕(思王)이다. 사왕은 5개월 재위했다. 동생 외(嵬)가 사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니 이가 고왕(考王)이다. 이 세 왕은 모두 정왕의 아들들이다.

고왕은 재위 15년 만에 붕어하고 아들 위열왕(威烈王) 오(午)가 즉위했다.

고왕 때 동생을 하남(河南)에 봉했다. 그가 환공(桓公)으로 주공(周公)의 관직을 계승했다. 환공이 죽고 아들 위공(威公)이 즉위했다. 위공이 죽고 아들 혜공이 즉위했다. 혜공은 막내아들을 공(鞏)에 봉하여 왕을 받들게 하고는 동주(東周) 혜공(惠公)이라 했다.

위열왕(威烈王)[편집]

위열왕 23년에 구정(九鼎)이 진동했다. 한(韓), 위(魏), 조(趙)를 제후국으로 명했다.

안왕(安王), 열왕(烈王), 현왕(顯王), 신정왕(愼靚王)[편집]

24년, 위열왕이 세상을 뜨고 아들 안왕(安王) 교(驕)가 즉위했다. 이해에 도적이 초나라 성왕(楚聲王)을 죽였다.

안왕이 재위 26년 만에 세상을 뜨고 왕자 열왕(烈王) 희(喜)가 즉위했다. 열왕 2년에 주의 태사(太史) 담(儋)이 진(秦)나라의 헌공(獻公)을 알현하고 “주와 진나라는 합쳐졌다고 나뉘고, 나뉜 지 500년이 지나 다시 합쳐질 것이며 합친 지 17년 뒤에는 패왕(覇王)이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10년, 열왕이 세상을 뜨고 동생 편(扁)이 즉위하니 이가 현왕(顯王)이다. 현왕 5년, 진나라 헌공을 치하하고 그에게 방백(方伯)의 호칭을 내렸다. 9년, 현왕은 진(秦)나라 효공(孝公)에게 문왕과 무왕에 제사 드린 고기를 보냈다. 25년, 진(秦)나라가 주의 땅에서 제후를 소집했다. 26년, 주는 진나라 효공에게 방백의 칭호를 내렸다. 33년, 진나라 혜왕을 치하했다. 35년에는 진나라 혜왕에게 문왕과 무왕에 제사 드린 고기를 보냈다. 44년, 진나라 혜왕이 왕을 칭하자, 이어 다른 제후도 모두 왕으로 칭했다.

48년, 현왕이 세상을 뜨니 아들 신정왕(愼靚王) 정(定)이 즉위했다.

난왕(赧王)[편집]

신정왕은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뜨고 아들 난왕(赧王) 연(延)이 즉위했다. 난왕 때 주는 동서로 나뉘어 다스려졌고 난왕은 도읍을 서주(西周)로 옮겼다.

서주 무공(武)의 태자 공(共)이 죽었다. 서자만 다섯이라 옹립할 적자가 없었다. 사마전(司馬翦)이 초나라 왕에게 “땅을 공자 구(咎)에게 주고 태자 자리를 청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좌성(左成)이 “안 됩니다. 주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일은 허사가 되고 주와의 관계만 멀어집니다. 주의 왕이 누굴 세우려는지 살펴서 사마전에게 암시하면 그 때 사마전이 나서 초나라 땅을 찬조하겠다고 하는 쪽이 나을 것입니다”라 했다. 과연 서주는 공자 구를 태자로 세웠다.

8년, 진(秦)나라가 의양(宜陽)을 공격하자 초나라가 구원에 나섰다. 초나라는 주가 진나라를 위해 출병한 것으로 여겨 주를 공격하려고 했다. 소대(蘇代)가 주를 위해서 초나라 왕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어째서 주가 진(秦)나라를 위해 출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가 초나라보다 진나라에 더 가깝다고 하는 것은 주가 진나라에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진(周秦)이란 말이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주가 초나라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진에 투항할 것이 분명하지요. 이는 진나라가 주를 취하려는 묘책을 돕는 꼴입니다. 왕을 위해 계책을 올리자면, 주가 진나라에 기울어도 잘 해주고, 그렇지 않아도 잘 해주면서 진나라와 멀어지게 하십시오. 진나라와의 관계가 끊어지면 주는 틀림없이 초나라로 달려 올 것입니다.”

진(秦)나라가 동주와 서주 사이의 길을 빌려서 한(韓)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주가 길을 빌려주자니 한나라가 두렵고, 빌려주지 않자니 진나라가 두려웠다. 사염(史厭)은 동주의 왕에게 “어찌해 사람을 보내 한나라 공숙(公叔)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으십니까? ‘진나라가 감히 주의 땅을 넘어 한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은 동주를 믿기 때문이다. 공은 어째서 주에 땅을 주지 않고 초나라에 인질을 보내지 않소? 그렇게 하면 진나라는 분명 초나라를 의심하고 주를 믿지 않게 될 것이니, 한나라는 정벌당하지 않을 것이오.’ 또 진나라에는 ‘한나라가 억지로 주에 땅을 주는 것은 장차 진나라가 주를 의심하게 만들려는 속셈이다. 주가 땅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십시오. 진나라는 주가 땅을 주가 받지 말아야 한다는 명분을 못찾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로부터는 땅을 받고, 진나라로부터는 양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서주의 왕을 부르자 서주 왕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나라 왕에게 사람을 보내 “진나라가 서주의 왕을 부른 것은 한나라의 남양(南陽)을 공격하기 위해서입니다. 왕은 어찌해 남양에 군대를 보내지 않습니까? 주왕은 진나라에 이것을 구실로 내세울 수 있습니다. 주왕이 진나라에 가지 않으면 진나라는 감히 황하를 넘어서 남양을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라 했다.

동주와 서주의 싸움에서 한나라는 서주를 도왔다. 어떤 자가 동주를 위해서 한나라 왕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서주는 원래 천자의 나라로 이름난 기물과 보배가 수두룩합니다. 왕께서 출병을 중지하신다면 동주에게는 덕을 베푸는 것이고, 서주의 보물은 모두 한나라 차지가 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주 난왕은 이름만 왕이었다. 초나라가 한나라의 옹지(雍氏)를 포위하자 한나라는 동주에서 갑옷과 식량을 징발하려 했다. 겁이 난 동주 왕은 소대를 불러 이 사실을 알렸다. 소대가 말했다. “천자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신이 한나라에게 주로부터 갑옷과 곡식을 징발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또 천자께서 고도(高都)를 얻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주왕은 “그대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국정을 그대에게 맡기겠소”라고 했다. 소대는 한나라 상국(相國)을 만나서 말했다. “초나라가 옹지를 포위하면서 석 달을 기한으로 정했습니다. 지금 다섯 달이 지났는데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은 초나라가 지쳤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상국께서 주나라로부터 갑옷과 식량을 징발하려는 것은 초나라에 우리가 지쳤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나 같습니다”라 했다. 한나라의 상국은 “맞는 말이오”라 하고는 사신의 출발을 멈추게 했다.

소대는 또 “그런데 어찌해 고도를 주에 주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한나라 상국은 “내가 주로부터 갑옷과 곡식을 징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어째서 고도까지 내주어야 한단 말이오”라며 크게 성을 냈다. 소대가 말했다. “고도를 주에게 주면 주는 몸을 돌려 한나라에 의지할 것입니다. 진나라가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 주에 크게 화가 나서 주와 왕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 무너진 고도를 가지고 동주를 온전하게 얻는 일인데도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상국은 그 말이 맞다며 고도를 주에게 주었다.

34년, 소려(蘇厲)가 서주의 왕에게 아뢰었다.

“진(秦)이 한나라와 위나라를 깨고 사무(師武)를 패배시키고, 북으로 조나라의 인(藺)과 이석(離石)을 빼앗은 것은 모두 백기(白起)가 공입니다. 군대를 잘 다룬데다 하늘의 뜻도 있었습니다. 지금 또 군대를 변방으로 출동시켜서 양(梁, 위나라)을 공격하려 하는데, 위나라가 무너지면 주가 위험해집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백기에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말하지 않으십니까? “초나라에 양유기(養由基)란 명사수가 있었다. 백 걸음이나 떨어진 버드나무 잎을 쏘아도 백발백중이었다. 좌우의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다 잘 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옆에서 보던 어떤 사람이 ‘훌륭하다. 활쏘기를 가르칠 만하구나’라고 말했다.

양유기가 화가 나서 활을 놓고 검을 집어 들면서 ‘당신이 내게 무슨 수로 활쏘기를 가르친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내가 그대에게 왼손으로는 활을 단단히 잡고, 오른손으로는 구부려 활시위를 당기는 그런 활쏘기 자세를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오. 백 보나 떨어져 있는 버드나무 잎을 백발백중한다 해도 가잘 잘 맞출 때 그치지 않으면 결국에는 힘이 빠져 활은 휘고 화살은 구부러질 것이오. 한 발이라도 명중시키지 못하면 백발백중은 다 허사가 되는 것이오’라고 했다.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 그리고 사무를 격파하고, 북으로 조나라의 인과 이석을 빼앗은 것은 대부분 그대의 공이오. 그런데 또 군대를 변방으로 출동시켜 동주와 서주 두 나라를 지나 한나라를 등지고 위나라를 공격하려 하오. 이번에 승리하지 못하면 앞서 세운 공들이 모두 허사가 될 것이오. 하니 병을 핑계로 출전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소.”

42년, 진나라가 화양(華陽)의 조약을 어겼다. 주의 신하 마범(馬犯)은 주왕에게 “양(梁, 위)으로 하여금 주에다 성을 쌓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양왕(위나라 왕)에게는 “주왕께서 병이 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신하인 이 마범 또한 분명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신이 구정을 왕께 주자고 청할 터이니 왕께서는 구정을 받고 신을 살려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양왕은 좋다 하고는 마범에게 군대를 주어 주를 지키게 했다. 이어 진나라 왕에게는 “양(梁)나라가 주에 와 있는 것은 주의 변경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토벌하려는 것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병사를 국경에 보내어 살펴보십시오”라고 하니 진나라가 과연 병사를 보냈다. 다시 양왕에게는 “주왕의 병이 심합니다. 구범이 나중에 청하여 허락을 얻어 다시 회신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왕께서 주로 군대를 파견한 일로 제후가 모두 의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시든 믿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병사들에게 주에 성을 쌓게 하여 이 일의 발단을 감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왕은 “좋다”하고는 마침내 주에 성을 쌓에 했다.

45년, 주나라에 와 있던 진나라 객이 주취(周冣)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께서 진나라 왕의 효성을 칭송하며 응(應) 땅을 진나라 태후(太后)에게 보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진나라 왕은 분명 기뻐할 것이고, 공은 진나라와 친교을 맺게 될 것입니다. 두 나라의 관계가 좋아지면 주왕은 분명 공의 업적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관계가 나빠지면 진나라에 들어가라고 주왕에게 권한 사람이 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라 했다. 진나라가 주를 공격하니 주취가 진나라 왕에게 말했다. “왕을 위해주를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 계책을 말하지요. 주를 공격하는 것은 이익은 없고 천하를 겁먹게 만들 뿐입니다. 천하가 진나라를 두려워하면 동쪽으로 제나라와 손을 잡을 것이 뻔합니다. 진나라 군대가 주에서 지치면 천하가 제나라와 연합할 것이니 진나라는 천하의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천하가 진나라를 지치게 만들려고 왕께 주를 공격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진나라와 천하 (제후의) 뜻대로 지친다면 천하를 호령할 수 없습니다.”

58년, 삼진(한, 조, 위)이 진(秦)에 저항했다. 주는 상국을 진나라에 보냈으나 진이 무시하여 도중에 되돌아왔다. 빈객이 상국에게 말했다. “진이 공을 무시하는 것인지 중시하는 것인지 아은직 알 수 없습니다. 진나라는 지금 삼진 세 나라의 사정을 알고 싶어하니 공께서 어서 진나라 왕을 만나 ‘왕께 동방의 사정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면 진왕은 분명 공을 중시할 것입니다. 공을 중시한다는 것은 진나라가 주를 중시한다는 것이고, 주가 공의 덕으로 진의 중시를 얻는 것입니다. 제나라가 주를 중시한 것도 주최(周聚)가 제나라로부터 환심을 얻은 덕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는 늘 강한 나라와 관계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나라는 주를 믿고 군대를 내어 삼진을 공격했다.

59년, 진이 한나라의 양성(陽城)과 부서(負黍)를 빼앗았다. 서주는 두려워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후들과 합종(合從)하여 천하의 정예 군대를 이궐(伊闕)로 보내 진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진나라 군대가 양성을 넘을 수 없게 했다. 진나라 소왕(昭王)이 분노하여 장군 규(摎)에게 서주를 공격하게 했다. 서주 왕은 진나라로 달려가서 머리를 숙여 사죄하면서 36개 읍과 30,000명을 바쳤다. 진나라는 이를 받고 왕을 서주로 돌려보냈다.

주왕 난(赧)이 죽자 주의 인민들이 동쪽으로 도망갔다. 진나라는 구정과 같은 귀한 보물을 빼앗고 서주의 왕을 탄호(憚狐)로 내쫓았다. 그 후 7년(기원전 249년) 진(秦)의 장양왕(莊襄王)이 동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동주와 서주는 모두 진나라에 속하게 되었고, 주는 더 이상 제사를 이을 수 없게 되었다.

사마천의 논평[편집]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학자들은 모두 주(周)가 상나라 주(紂)를 정벌한 후 낙읍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무왕이 건설하고 성왕이 소공에게 점을 치게 하여 구정을 옮겼으나 주는 다시 풍(豐)과 호(鎬)에 도읍을 정했다. 견융이 유왕을 죽인 뒤에 비로소 낙읍으로 동천했다. ‘주공을 필(畢)에 장사 지내다’라고 말할 때 그 필은 호경의 동남쪽에 있는 두중(杜中)이다. 진(秦)나라가 주를 멸했다. 한나라가 일어나고 90년 뒤, 천자가 태산에서 제사를 지내려고 동으로 순수(巡狩)하다가 하남에 이르러 주의 후손인 가(嘉)를 찾아내 30리 땅을 주고 열후의 지위와 대등한 주자남군(周子南君)이라고 부르며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