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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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편집]

여태후(呂太后)는 고조가 보잘것없을 때의 아내로 효혜제)와 딸 노원태후를 낳았다. 고조가 한왕이 되고 정도(定陶)에서 척부인(戚夫人)을 얻어 예뻐하여 조 은왕 여의(如意)를 낳았다. 효혜제는 사람이 어질고 연약하여 고조는 자기를 닮지 않았다고 여기고는 늘상 태자를 폐하고 자기를 닮은 척희의 아들 여의를 세우려고 했다. 척희가 사랑을 받아 늘 주상을 따라 관동으로 갔는데 밤낮으로 울면서 자기 아들을 태자 대신 세워주길 바랐다. 여후는 나이가 많아 늘 집을 지켰고 주상을 보는 일이 드물어 점점 멀어졌다. 여의가 조왕이 된 다음 하마터면 태자가 될 뻔 했으나 대신들이 나서 싸우고 유후가 계책을 마련한 덕분에 태자는 폐위를 면했다.

여후는 사람이 강하고 굳세어 고조가 천하를 평정하는 것을 도왔고, 대신들을 숙청하는 데 여후의 힘이 컸다. 여후의 오라비 둘은 모두 장수되었다. 큰오라비 주여후(周呂侯)는 죽어서 그 아들 여태(呂台)는 역후(酈侯)에 봉해졌고, 다른 아들 여산(呂産)은 교후(交侯)에 봉해졌다. 작은오라비 여석지(呂釋之)는 건성후(建成侯)가 되었다.

고조 12년 4월 갑진일, (고조가) 장락궁에서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황제 자리를 이었다. 당시 고조에게는 아들이 여덟이었다. 장남 유비(劉肥)는 혜제의 배다른 형으로 제왕이 되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혜제의 동생들이었다. 척희의 아들 여의는 조왕이 되었고, 박부인(薄夫人)의 아들 유항은 대왕이 되었다. 여러 비빈의 아들들 중 유회는 양왕에, 유우는 회양왕에, 유장은 회남왕에, 유건은 연왕에 봉해졌다. 고조의 동생 유교는 초왕이, 고조 형의 아들인 유비는 오왕이 되었다. 유씨가 아닌 공신으로는 파군 오예의 아들 오신(吳臣)이 장사왕이 되었다.

여후는 척부인과 그 아들 조왕에 극도의 원한을 품고 척부인을 영항(永巷)에 감금하고 조왕을 소환했다. 사자가 세 번이나 갔으나 그냥 돌아왔다. 조의 승상 건평후(建平侯) 주창(周昌)이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제께서 내게 조왕을 모시게 했는데 조왕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들리는 말로는 태후께서 척부인에게 원한이 있어 조왕을 소환하여 죽이려 한다니 신이 어찌 왕을 보낼 수 있겠는가? 왕께서는 또 병이 있어 조서를 받들 수 없다.”

여후가 크게 노하여 사람을 보내 조의 승상(주창)을 소환했다. 조의 승상이 장안으로 불려가자 다시 사람을 보내 조왕을 소환했다. 왕이 출발하여 당도하지 않았는데, 어진 효혜제가 태후가 성이 난 것을 알고는 몸소 나가 조왕을 패상에 맞이하여 하께 궁으로 들어와서는 조왕을 끼고 함께 먹고 자고 했다.

태후가 죽이려 했으나 틈이 없었다. 효혜제 원년 12월, 효혜제는 아침 일찍 활을 쏘러 나갔다. 조왕은 아직 어려 일어나지 않았다. 태후가 혼자 있다는 것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독주를 마시게 했다. 날이 밝을 무렵 효혜제가 돌아왔으나 조왕이 이미 죽어 있었다. 회양왕 유우를 조왕으로 옮겼다.

여름, 조서를 내려서 역후의 부친(여택呂澤)에게 영무후(令武侯)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태후는 마침내 척 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알을 파내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서 돼지우리에서 살게 하고는 ‘사람돼지’라 부르게 했다. 몇일 뒤 태후는 효혜제를 불러서 ‘사람돼지’를 보게 했다. 효혜제가 보고 묻고서야 그것이 척 부인임을 알고는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이 때문에 병이 나서 한 해 남짓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을 보내 태후를 청해서는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신은 태후의 아들로서 천하를 끝까지 다스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효혜제는 이로부터 날마다 술과 쾌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이 때문에 병이 났다.

2년, 초 원왕과 제 도혜왕이 모두 입조했다. 10월, 혜제와 제왕이 태후 앞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혜제는 제왕이 형님이라 상석에 앉히고는 집안의 예를 따랐다.

여후는 화가 나서 독주 두 잔을 따르게 해서는 앞에다 놓고는 제왕에게 일어나 축수를 올리게 했다. 제왕이 일어나자 혜제도 따라 일어나서 잔을 들고 축수를 올리려 했다. 태후가 겁이 나서 벌떡 일어나 효혜제의 술잔을 엎었다. 제왕이 괴상하게 여기고는 감히 마시지 못하고 취한 척하고 자리를 떠났다. 물어본 다음 그것이 독주라는 것을 알고는 겁을 먹으면서 장안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며 걱정했다. 제의 내사(內史) 사(士)가 제왕에게 이렇게 말했다.“태후에게는 오직 효혜제와 노원공주 뿐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70여개의 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공주는 몇 개만 식읍으로 갖고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진심으로 군 하나를 태후께 바치며 공주의 탕목읍으로 삼게 하면 태후가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이고, 왕께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다.”

이에 제왕은 성양군(城陽郡)을 바치고 공주를 왕태후로 높여 부르니 여후가 기뻐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제왕의 집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즐겁게 마시고 자리가 끝나자 제왕을 돌려보냈다.

3년, 막 장안성을 축조했는데, 4년이 되자 절반이 되었고, 5년과 6년 만에 성이 완공되었다. 제후들이 와서 조회했다. 10월, 입조하여 하례했다.

7년 가을 8월 무인일, 효혜제가 세상을 떠났다. 상 중에도 태후는 곡만 하고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유후의 아들 장벽강(張辟彊)이 시중(侍中)으로 나이 열 다섯이었는데 승상에게 “태후께는 오직 효혜제 뿐이셨습니다. 지금 세상을 떠나셨는데 곡만 하고 슬퍼하지 않으시는데 군께서는 그 까닭은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승상이 “무슨 까닭인가”라고 했다. 벽강은 “황제께 장성한 아들이 없으니 태후께서는 군 등을 두려워하십니다. 군께서 지금 여이(呂台), 여산(呂産), 여록(呂祿)을 장군으로 삼아 남북의 군대를 이끌게 하는 한편, 여씨들을 모두 궁으로 들어오게 하여 궁에 머물게 하면서 일을 맡기자고 청하시면 태후의 마음도 편안해지고 군 등도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승상이 장벽강의 계책대로 하자 태후는 기뻐했고, 통곡도 슬펐다. 여씨의 권력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9월 신축일, (혜제를) 안장했다. 태자가 즉위해 황제가 되어 고조 사당에 인사를 드렸다.

원년(기원전 187), 모든 호령이 태후에게서 나왔다.

태후가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면서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우승상 왕릉에게 의론하여 물으니 왕릉은 “고제께서 백마를 잡아 맹서하시길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공격할 것이다’라 하셨으니 지금 여씨를 왕으로 삼는 것은 맹약을 어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태후는 불쾌했다. 좌승상 진평과 강후 주발에게 물었다. 주발 등은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시고 자제들을 왕으로 삼으셨듯이, 지금 태후께서 황제를 대행하시니 형제와 여씨들을 왕으로 못 삼을 까닭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태후는 기뻐했고 조회는 끝났다. 왕릉은 진평과 주발에게 “처음 고제와 피를 바르며 맹서할 때 그대들은 없었소? 지금 고제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태후가 여주인으로 여씨들을 왕으로 삼으려 하는데 그대들이 약속을 저버리고 그 뜻에 따르려 하니 무슨 낯으로 지하에 계신 고제를 뵌단 말이오”라고 꾸짖었다.

진평과 강후는 “지금 대놓고 반박하고 조정에서 논쟁하는 일이라면 신들이 그대만 못하지만,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 후손들을 안정시키는 일이라면 그대가 신들만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왕릉은 대응할 말이 업었다.

11월, 여태후가 왕릉을 파면하려고 황제의 태부로 임명하여 우승상의 권한을 빼앗았다. 왕릉은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에 좌승상 진평을 우승상에 임명하고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를 좌승상으로 삼았다. 좌승상은 정무를 돌보지 않고 궁중 일만 감독하는 것이 낭중령과 같았다. 그러나 심이기는 태후의 총애를 얻어 늘 일을 함에 있어서 공경들도 모두 그를 통해 결정했다. 역후의 부친 여택을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하여 이로써 여씨들을 하나 둘 왕으로 삼고자 했다.

4월, 태후는 여씨들을 제후로 삼으려고 먼저 고조의 공신 낭중령 풍무택(馮無擇)을 박성후(博城侯)에 봉했다. 노원공주가 죽자 노원태후라는 시호를 내렸고, (노원공주의) 아들 장언(張偃)을 노왕(魯王)에 봉했다. 노왕의 아버지는 선평후(宣平侯) 장오(張敖)였다. 제 도혜왕의 아들 유장(劉章)을 주허후(朱虛侯)에 봉하여 여록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제의 승상 제수(齊壽)를 평정후(平定侯)에 봉하고, 소부(少府) 양성연(陽成延)은 오후(梧侯)로 삼았다. 이어 여종(呂種)을 패후(沛侯)에, 여평(呂平)을 부류후(扶柳侯)에, 장매(張買)를 남궁후(南宮侯)에 봉했다.

태후는 여씨를 왕으로 삼기 위해서 먼저 효혜제의 후궁 소생 유강(劉彊)을 회양왕에, 유불의(劉不疑)를 상산왕(常山王)에, 유산(劉山)을 양성후(襄城后)에, 유조(劉朝)를 지후(軹侯)에, 유무(劉武)를 호관후(壺關侯)에 봉했다. 태후가 태신들에게 암시하자 대신들은 역후 여이를 여왕으로 삼자고 청했고, 태후는 이를 허락했다. 건성후 여석지가 죽었지만 자리를 이를 아들이 죄를 지어 폐하고, 동생 여록을 호릉후(胡陵侯)로 세워 강후(康侯)의 뒤를 잇게 했다.2년, 상산왕이 죽자 그 동생 양성후 유산을 상산왕으로 봉하고 이름을 유의(劉義)로 바꾸었다. 11월, 여왕 여이가 죽자 시호를 숙왕(肅王)이라고 하고, 태자 여가(呂嘉)를 왕으로 세웠다. 

3년, 일이 없었다.

4년, 여수(呂嬃)를 임광후(臨光侯)에, 여타(呂他)를 유후(兪侯)에, 여갱시(呂更始)를 췌기후(贅其侯)에, 여분(呂忿)을 여성후(呂城侯)에 봉하고, 다섯 사람을 제후왕의 승상에 봉했다.

선평후의 딸이 효혜황후(孝惠皇后)가 되어 아들이 없었다. 임신했다고 거짓말하고 미인(美人)의 아들을 데려다 자기가 아들로 삼은 다음, 그 어머니는 죽이고 그 아이를 태자로 세웠다. 효혜제가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장성하여 누군가에게서 그 어머니의 죽음과 황후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태후가 어떻게 내 어머니를 죽이고 나를 아들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직 덜 컸지만 크면 변이 생길 것이다”라고 했다. 태후가 이를 듣고 걱정이 되었다. 행여 난을 일으킬까 겁이 나서 영항(永巷)에 깊숙이 가두고 황제가 병이 심하다고 말하며 좌우에서 그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태후는 이렇게 말했다.

“무릇 천하를 소유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자는 하늘과 땅처럼 만물을 덮고 감싸 안아야 한다. 주상이 기쁜 마음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면 백성은 기꺼이 주상을 섬기니 서로 기쁜 마음으로 소통하여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이다. 지금 황제가 병이 오래되어 낫지 않고 정신마저 혼란스러워 종묘의 제사를 받들 수가 없다. 천하를 이끌 수 없으니 누군가 대신해야 할 것이다.”

신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황태후께서 천하 백성들을 생각하시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이렇게 깊으니 신하들을 머리를 조아려 조서를 받들겠습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폐위되자 태후는 몰래 그를 죽였다.

5월 병진일, 상산왕 유의를 세워서 황제로 삼고 이름을 유홍(劉弘)으로 바꾸었다. 원년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태후가 천하의 일을 대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후 유조를 상산왕으로 삼았다. 태위 관직을 두어 강후 주발을 태위로 삼았다. 5년 8월, 회양왕이 죽자 그 동생 호관후 유무를 회양왕으로 삼았다. 6년 10월, 태후가 “여왕 여가가 처신이 교만하고 방자하다”면서 그를 폐위시키고 숙왕 여이의 동생 여산을 여왕으로 삼았다. 여름,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제 도혜왕의 아들 유흥거(劉興居)를 동모후(東牟侯)로 삼았다.

7년 정월, 태후는 조왕 유우를 소환했다. 유우는 여씨 딸을 왕후로 삼았으나 사랑하지 않고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 여씨 딸이 질투에 화가 나서 태후에게 가서 헐뜯으며 “(조왕이) 여씨가 어찌 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태후 100년 뒤에는 내가 틀림없이 쳐버릴 것이다”라고 했다며 모함을 했다. 태후가 노하여 이를 빌미로 조왕을 부른 것이다. 조왕이 이르자 관저에 두고 만나지 않은 채 호위병을 시켜 지키게 하면서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조왕의 신하들이 몰래 먹을 갖다 주다가 붙잡히면 벌을 받았다. 조왕은 굶주린 채 노래를 불렀다.

여씨들이 제멋대로 하니 유씨가 위태롭다.

왕과 제후를 협박하여 강제로 내게 왕비를 주었네.

내 왕비가 질투하여 내게 죄가 있다고 모함했네.

모함하는 여자가 나라를 어지럽히거늘 주상은 알지 못하네.

내게는 충신이 없던가? 어찌 나를 버리는가?

들판에서 목숨을 끊어 하늘이 바로 알게 하리라!

아아! 후회스럽다, 진작 자결할 것을.

왕이 굶어 죽으니 누가 불쌍히 여길까?

여씨가 천하의 이치를 끊으니 하늘이 대신 복수해주리!

정축일, 조왕이 갇힌 채 굶어죽었다. 평민의 예로 장안성 인민들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을축일, 일식이 있어 낮에도 어두웠다. 태후는 이를 불길하게 여겨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좌우에게 “이는 나 때문이다”라 했다. 2월, 양왕 유회를 조왕으로 바꾸었다. 여왕 여산을 양왕으로 옮겼으나 양왕은 자기 나라로 가지 않고 황제의 태부가 되었다. 황자 평창후 유태(劉太)를 세워서 여왕으로 삼고, 양나라를 여나라로 개명하고, 여는 제천(濟川)이라 했다. 태후의 여동생 여수의 딸은 영릉후(營陵侯) 유택(劉澤)의 아내가 되었다. 유택은 대장군이었다. 태후는 여씨들을 왕으로 삼았지만 자신이 죽은 뒤 유택 장군에게 해를 입을까 겁이 나서 유택을 낭야왕으로 삼아 그 마음을 달랬다.

양왕 유회가 조왕으로 옮겼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태후는 여산의 딸을 조왕의 왕후로 삼았다. 왕후를 수행한 관원은 모두 여씨들로써 권력을 휘두르며 조왕을 몰래 감시했기 때문에 조왕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조왕에게 총애하는 희첩이 있었지만 왕후가 사람을 시켜 독주로 죽였다. 조왕은 네 장으로 된 노래 가사를 지어 악공에게 부르게 했다. 왕은 슬퍼하다가 6월에 자살했다. 태후는 이를 듣고 조왕이 부인 때문에 종묘에 대한 예를 저버렸다고 여겨 그 후계를 폐지했다.선평후 장오가 죽자 그 아들 장언을 노왕으로 삼고 장오에게 노원왕(魯元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가을, 태후가 사신을 보내 대왕(代王)에게 조왕으로 옮긴다고 알렸으나 대왕은 사양하고 대 지역 변경을 지키길 원했다.

태부 여산과 승상 진평 등이 “무신후 여록은 제후로서 가장 높으니 조왕으로 삼으시길 청합니다”라고 했다. 태후가 이를 허락하고 여록의 아버지 강후를 조 소왕(昭王)으로 삼았다.

9월, 연의 영왕(靈王) 유건(劉建)이 죽었다. 미인 소생의 아들이 있었는데 태후가 사람을 보내 죽이니 후사가 끊어져 나라를 취소했다. 8년 10월, 여 숙왕의 아들 동평후(東平侯) 여통(呂通)을 연왕으로 세우고, 여통의 동생 여장(呂莊)을 동평후에 봉했다.

3월 중순, 여태후가 불제(祓祭)를 지내고 돌아오다 지도(軹道)를 지날 때 푸른 개처럼 생긴 괴물이 고후의 겨드랑이를 치고는 문득 사라졌다. 점을 치니 조왕 여의의 귀신이 장난을 친 것이라 했다. 고후가 겨드랑이 상처 때문에 병을 얻었다.

고후는 외손자 노원왕 장언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여서 외롭고 나약하다고 여겨 장오의 예전 희첩 소생의 두 아들 중 장치(張侈)를 신도후(新都侯)에, 장수(張壽)를 낙창후(樂昌侯)에 봉해 노원왕 장언을 보좌하게 했다. 또 중대알자(中大謁者) 장석(張釋)을 건릉후(建陵侯)에, 여영(呂榮)을 축자후(祝玆侯)에 봉했다. 환관들 중에서 영(令)이나 승(丞)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관내후(關內侯)로 봉해 식읍 500호를 내렸다.

7월 중순, 고후의 병이 심각해지자 조왕 여록을 상장군으로 삼아 북군을 이끌게 하고, 여왕 여산은 남군을 이끌게 했다다. 여태후는 여산과 여록에게 경고하길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시고 대신들과 약속하길 ‘유씨 아닌 자가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공격할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 여씨들이 왕이 되었으니 대신들이 불평을 품고 있다. 내가 죽으면 황제가 어려서 대신들이 변을 일으킬 것이다. 반드시 군대를 장악하여 궁을 지키며 내 영구를 따르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제압당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했다.

신사일, 고후가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제후 왕들에게 각각 황금 1천근과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여왕 산을 상국으로, 여록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고후의 장례를 마치자 좌승상 심이기를 황제의 태부로 삼았다.

주허후 유장은 기백과 능력이 있었다. 동모후 유흥거가 그의 동생이었다. 모두 제 애왕의 동생으로 장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여씨들이 일과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며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고제의 옛 대신인 강후 주발과 관영 등이 두려워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주허후의 부인은 여록의 딸이었는데 그 음모를 알고는 죽음이 두려워 몰래 사람을 보내 그(주허후)의 형 제왕(애왕)에게 알려 군대를 동원하여 서쪽으로 여씨들을 없애고 황제에 오르게 하려 했다. 주허후는 궁에서 대신들과 내응하려 했다. 제왕이 병사를 발동시키려 했으나 그의 승상이 말을 듣지 않았다.

8월 병오일, 제왕은 사람을 시켜 승상을 죽이려 하자 승상 소평(召平)이 반발하며 병사를 일으켜 왕을 포위하려 했다. 이에 제왕은 승상을 죽이고 마침내 군대를 동쪽으로 출동시켜 속임수로 낭야왕의 군대를 빼앗고 그 군대와 함께 서쪽으로 향했다. 이 일은 「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에 나와 있다.

이어 제왕은 제후왕들에게 편지를 써서 알렸다.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시고 여러 자제들을 왕으로 봉하셨는데 도혜왕은 제나라의 왕이 되었다. 도혜왕이 세상을 떠나시자 효혜제는 유후 장량을 보내 신을 제왕으로 삼으셨다. 효혜제가 세상을 떠나고 고후가 일을 처리하셨으나 나이가 많아 여씨들의 말을 듣고 머대로 황제를 폐위시키고 바꾸고 했다. 또 조왕 셋을 잇달아 죽이고, 양, 조, 연을 없애 여씨들을 왕에 앉혔으며, 제나라를 넷으로 나누었다. 충신이 간언했으나 주상은 홀려서 듣지 않았다. 지금 고후가 세상을 떠났으나 황제는 나이가 어려 천하를 다스릴 수 없으니 대시과 제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씨들은 여전히 멋대로 자신들의 관직을 높이고 군대를 모아 위엄을 떨치며 제후와 충신들을 협박하고, 조서를 조작하여 천하를 호령하니 종묘가 위태로워졌다. 이에 과인은 병사를 이끌고 들어가 부당하게 왕이 된 자를 없앨 것이다.”한의 조정에서 이를 듣고는 상국 여산 등이 곧 영음후(潁陰侯) 관영에게 군대를 이끌고 제왕을 치게 했다. 관영은 형양에 이르러서 “여씨들이 관중의 군대를 쥐고 유씨를 위태롭게 하여 자립하려 한다. 지금 우리가 제를 격파하고 돌아가 보고한다면 이는 여씨의 힘을 더 보태주는 것이다”라고 모의했다. 그러고는 형양에 주둔하면서 사람을 보내 제왕과 제후들에게 서로 연계하여 여씨가 변을 일으키길 기다렸다가 함께 토벌하자고 알렸다. 제왕은 이 말을 듣고는 군대를 돌려 서쪽 경계에서 약속을 기다렸다.

여록과 여산이 관중에서 난을 일으키려 했지만 안으로는 강후 주발과 주허후 등이 겁나고, 밖으로는 제, 초의 군대를 두려워했다. 또 관영이 배반할까 겁이 나서 관영의 군대가 제의 군대를 병합하기를 기다렸다고 일으키기로 하고 미룬 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제천왕(濟川王) 유태, 회양양 유무, 상산왕 유조는 명목상 소제의 동생들이었고, 노원왕은 여후의 외손이었지만 모두 나이가 어려 봉국으로 가지 않고 장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조왕 여록과 양왕 여산은 각각 병사들을 이끌고 남북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두 여씨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후들과 신하들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태위인 강후 주발은 군중으로 들어가 군대를 이끌 수 없었다. 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은 늙고 병이 있었지만 그 아들 역기(酈寄)가 여록과 친한 사이였다. 이에 강후는 승상 진평과 모의하여 사람을 역상에게 보내 겁박하여 그 아들로 하여금 여록에게 가서 이렇게 그를 설득하게 하였다.

“고제께서는 여후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시고 유씨 아홉, 여씨 셋을 왕으로 세우셨는데 모두 대신들과 논의했고 이를 제후들에게 알려 제후들은 모두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태후께서 세상을 뜨시고 황제는 어리신데 족하께서는 조왕의 도장을 차고 서둘러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가 되지 않고 상장군이 되어 군대를 이곳에 주둔시키고 있으니 대신과 제후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족하께서는 어째서 (상장군의) 도장을 반환하여 병권을 태위에게 돌려주지 않는 것입니까? 양왕께서도 상국의 도장을 반환하시고 대신들과 맹서하여 봉국으로 돌아가시길 청합니다. 그러면 제나라도 분명 군대를 해산하고 대신들도 안심할 것이고 족하께서도 베개를 높여 편히 자면서 천리의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니 이야말로 만세토록 이로운 일입니다.” 여록은 과연 역기의 계략을 믿고 장군의 도장을 반환하고 병권을 태위에게 넘기고자 했다. 이에 사람을 보내 여산과 여씨 장로들에게 알리니 누구는 좋다하고 누구는 좋지 않다 하여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여록은 역기를 믿어 종종 그와 사냥을 나갔다. 한번은 (여록의) 고모 여수의 집을 지났는데 여수가 성을 내며 “네가 장군의 신분으로 병권을 버렸으니 이제 여씨는 갈 곳이 없게 되었다”라 했다. 그리고는 구슬과 패물 따위를 마당 아래로 팽개치며 “남의 것을 지킬 필요가 없지”라 했다.

좌승상 심이기가 면직되었다. 8월 경신일 아침, 어사대부의 일을 하는 평양후(平陽侯) 조줄(曹窋)이 상국 여산을 만나서 일을 꾸몄다. 낭중령 가수(賈壽)가 제에서 돌아와 여산을 “대왕께서 진즉에 봉국으로 가지 않고 있다가 지금 와서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겠소이까”라고 나무라고는 관영이 제, 초와 연합해 여씨들을 없애려 한다는 사실을 여산에게 상세히 보고하면서 여산에게 입궁할 것을 채근했다. 평양후가 이 말을 듣고는 바로 달려가 승상과 태위에게 알렸다. 태위가 북군 쪽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양평후(襄平侯) 기통(紀通)이 부절(符節)을 황제의 명령이라고 속여 태위를 북군에 들어가게 했다. 태위는 또 역기와 전객(典客) 유갈(劉揭)을 시켜 우선 여록에게 “황제께서 태위에게 북군을 지키게 하고, 족하는 봉국으로 가길 바라니 서둘러 도장을 반납하고 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입니다”라고 권했다.

여록은 역황(酈兄)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장군의 도장을 풀어 전객 유갈에게 주고 병권은 태위에게 넘겼다. 태위가 그것을 가지고 군문으로 들어서서는 군중에 “여씨를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유씨를 따를 자는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고 명령했다. 군사들은 모두 유씨를 위해 왼쪽 어깨를 드러냈다. 태위가 당도할 무렵 장군 여록은 이미 상장군의 도장을 내놓았고, 태위는 마침내 북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남군이 남아 있었다. 평양후가 여산의 음모를 듣고 승상 진평에서 알리자 승상 진평은 바로 주허후를 불러 태위를 돕게 했다. 태위는 주허후에게 군문을 감시하게 하고 평양후로 하여금 위위(衛尉)에게 “상국 여산을 궁전 문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라”고 일렀다. 여산은 여록이 이미 북군을 떠났다는 것을 모른 채 미앙궁(未央宮)으로 들어가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 궁궐 문을 못 들어가자 이리저리 배회했다. 평양후가 승리하지 못할까 겁이 나서 태위에게 달려가 말했다. 태위도 여씨들을 이기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대놓고 없애자고 말하지 못했다. 이에 주허후에게 “서둘러 입궁하여 황제를 호위하시오”라며 보냈다.

주허후가 군사를 요청하자 태위는 병졸 천 여 명을 주었다. 미궁궁 궁문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궁정에서 여산을 만났다. 그 때가 오후 무렵이었다. 마침내 여산을 공격하니 여산은 달아났다. 바람이 크게 불었고, (여산을) 따르던 관리들이 혼란에 빠져 감히 싸우지 못했다. 여산을 뒤쫓아 낭중부 측간에서 죽였다.

주허후가 여산을 죽이자 황제는 알자(謁者)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주허후를 위로하라고 했다. 주허후는 부절을 빼앗으려 하자 알자는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주허후가 바로 수레를 함께 타고 부절을 가지고 장락궁으로 치달아 위위 여갱시의 목을 베었다. 수레를 돌려 북군으로 가서는 태위에게 보고했다. 태위가 일어나 주허후에게 축하의 예를 올리며 “염려한 것은 여산 뿐이었는데 이제 죽였으니 천하는 평정되었소이다”라고 했다. 사람을 나누어 여씨 남녀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게 해서는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목을 베었다.

신유일, 여록을 잡아 목을 베고, 여수는 대나무 채찍으로 매질을 해서 죽였다. 사람을 보내 연왕 여통을 죽이고 노왕 장언을 폐위시켰다.

임술일, 제천왕을 양왕으로 옮기고, 조 유왕의 아들 유수(劉遂)를 조왕으로 세웠다. 주허후 유장을 보내 여씨들을 죽인 일을 제왕에게 보고하고 군사를 철수시키게 했다. 관영의 군대도 형양에서 철수하여 돌아왔다.

조정의 대신들은 서로 이런 음모를 꾸몄다. “소제를 비롯하여 양왕, 회양왕, 상산왕은 모두 효혜제의 진짜 아들들이 아니다. 여후가 계략을 꾸며 다른 사람의 아들에다 이름을 붙이고 그 어미는 죽인 다음 후궁에서 기르게 해서는 효혜제의 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세운 것이다. 또 여러 왕들을 세워 여씨를 강하게 한 것이다. 지금 여씨들을 다 없앴지만 그들이 세운 자들은 아직 남아 있다. 그들이 자라서 일을 벌이면 우리들은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여러 왕들 중에서 가장 어진 사람을 세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누군가가 “제 도혜왕이 고제의 맏아들이고 지금 그 적자가 제왕이다. 근본으로 말하자면 고제의 적장손이니 옹립할 만하다”고 했다. 

그러자 대신들은 모두 “여씨는 외척으로서 악행을 저질로 종묘를 위태롭게 하고 공신들을 어지럽혔다. 지금 제왕의 외가에 사균(駟鈞)이란 자가 있는데 이 자가 나쁜 자이다. 제왕을 옹립하면 다시 여씨처럼 될 것이다”라고 했다. 회남왕을 세우려고도 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외가가 좋지 않았다. 이에 “대왕(代王)이 지금 남아 있는 고제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데다 어질고 효성스럽고 너그럽다. 태후 집안은 박씨도 신중하고 선량하다. 또 장자를 세우면 순리에도 맞고, 대왕이 어질고 효성스러움으로 천하에 알려져 있으니 좋을 것 같다”라고 했다. 이어 서로 함께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 대왕을 그러고는 함께 은밀히 사신을 보내어 대왕을 불러오게 하였다. 대왕은 사람을 보내 사양한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다시 사람을 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여섯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에 올랐다.

윤달 9월 마지막 날인 기유일, 장안에 이르러 대왕의 관저에 머물렀다. 대신들이 모두 가서 인사를 올리며 천자의 옥새를 대왕에게 바치고 모두 함께 대왕을 천자로 높여 옹립했다. 대왕은 몇 차례 사양했지만, 신하들이 한사코 간청하자 받아들였다.

동모후 유흥거는 “여씨들을 없애는데 나는 공이 없으니 궁중의 청소나 하게 해주십시오”라 했다. 이에 태복(太僕) 여음후(汝陰侯) 등공(滕公)과 함께 입궁하여 소제 앞으로 나아가 “족하는 유씨가 아니니 천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라고 한 다음 소제 좌우 호위병들을 둘러보며 무기를 버리고 떠나라고 했다. 몇 사람이 무기를 버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환자령(宦者令) 장택(張澤)이 상황을 알리자 무기를 버렸다. 등공은 수레를 불러서 소제를 태우고 궁궐을 나갔다. 소제가 “나를 어디다 두려는 것이오”라고 묻자 등공은 “나가서 사는 것이오”라 했다. 소제는 소부(少府)에서 안치되었다.

이어 천자의 법가(法駕)를 받들어 대왕을 관저에서 맞이하여 “궁은 삼가 청소되었나이다”라고 보고했다. 대왕은 그날 저녁 미앙궁으로 들어왔다. 알자 10인이 창을 들고 궁문을 지키다가 “천자가 계신데 족하께서 어찌 들어가려 하십니까”라고 가로막았다. 대왕은 바로 태위에게 알렸다. 태위가 가서 설명하자 알자 10인은 모두 무기를 내려 놓고 떠났다. 대왕이 마침내 입궁하여 집정하였다. 그날 밤 담당 관리들을 나누어 양왕, 회양왕, 상산왕과 소제를 그들의 관저에서 죽였다.

대왕은 천자에 즉위한 지 재위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시호를 효문황제(孝文皇帝)라 했다.

사마천의 논평[편집]

태사공은 다음과 말한다. “효혜황제와 고후 때는 인민들은 전국 시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군주와 신하는 모두 억지로 일삼지 않으면서 쉴 수 있었다. 따라서 혜제는 팔짱만 끼고 있었고, 고후가 여자 군주로서 황제를 대행하여 모든 정치가 안방에서 나왔지만 천하는 편안했다. 형벌을 쓰는 일도, 죄인도 드물었다. 인민들은 농사에 힘을 쓰니 입고 먹는 것이 갈수록 풍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