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12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효무본기(孝武本紀)[편집]

효무황제(孝武皇帝)는 효경제의 가운데 아들로, 어머니는 왕태후(王太后)라 했다. 경제 4년에 황제의 아들로서 교동왕(膠東王)에 봉해졌다. 경제 7년 율태자(栗太子)가 폐위되어 임강왕(臨江王)이 되었고, 이에 교동왕이 태자가 되었다. 경제가 16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효무황제다. 효무황제는 즉위하자마자 귀신에 대한 제사를 더욱 경건하게 모셨다.

원년(기원전 140년), 한나라가 일어난 지 60여 년이 지나면서 천하는 평안했다. 사대부들이 모두 천자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드리는 봉선(封禪)을 행하고 달력과 복장의 색깔 등 제도를 바꾸기를 희망하였다.

주상이 유가의 학술을 좋아하여 어질고 유능한 현량(賢良)들을 초빙하자, 조관(趙綰), 왕장(王臧) 등이 문학적 능력으로 공경이 되어 옛날처럼 성 남쪽에 명당을 세워 제후들의 조회를 받는 일을 논의하였다. 순수(巡狩)와 봉선, 달력과 복장의 색에 대한 개정 같은 일들을 초안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두태후(竇太后)는 황로(黃老) 학설을 좋아하고 유가 학술을 좋아하지 않아 몰래 사람을 시켜 조관 등이 불법으로 이익을 취한 일을 가지고 조관과 왕장을 불러 심문하였다. 조관과 왕장은 자살하였고, 하려던 일들은 모두 폐기되었다.

후 6년(기원전 135년), 두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주상이 문학을 하는 선비 공손홍 등을 불러들였다.

이듬해, 주상이 처음으로 옹(雍)의 5치(五畤)에서 교(郊) 제사를 드렸다. 그 후로 3년마다 한 번씩 교 제사를 지냈다. 이때 주상이 신군(神君)을 얻어 상림원(上林苑)에 제씨관(蹏氏觀)에 모셨다. 신군은 장릉(長陵)의 여자로 자식을 낳다 죽은 뒤 그녀의 동서인 완약(宛若)의 몸으로 현신한 것이다. 완약은 그녀를 자기 집에다 모셔 제사를 올렸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제사를 드리고 갔다. 평원군(平原君)도 제사를 지내러 간 적이 있는데, 훗날 자손들이 귀해졌다. 무제가 즉위하여 궁 안에 (완약을 모셔놓고) 후한 예물로 제사를 지냈는데, 말소리는 들려도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이소군(李少君)도 주상을 알현하여 사조(祠竈), 곡도(穀道), 각로(却老) 따위의 불로장생과 관련된 방술을 펼치자 주상이 그를 떠받들었다. 소군은 죽은 심택후(深澤侯)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와 방술과 약을 주관했다. 자기 나이와 자란 과정을 숨긴 채 늘 스스로 70살이라고 하면서 귀신을 부리고 늙는 것을 늦출 수 있다고 떠벌였다. 그는 떠돌며 방술로 제후들을 두루 만났는데, 처자식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귀신을 부리고 죽지 않을 수 있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서로 물건을 갖다 주어 늘 금이며 돈이며 비단이며 먹고 입을 것이 남아돌았다. 이에 사람들은 죄다 그가 일 하지도 않고 물자가 남아돈다고 여겼고, 또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더 믿고 다투어 그를 섬겼다.

소군은 타고나기를 방술을 좋아하고 교묘한 말로 어떤 일을 잘 알아맞혔다. 한 번은 무안후(武安侯)의 잔치에 갔는데 그 자리에 90살이 넘은 노인이 있었다. 소군이 그 노인의 할아버지와 사냥 갔던 곳을 말했다. 노인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 그곳에 간 적이 있기에 그 사냥터를 알고 있었고, 좌중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군이 주상을 뵙자 주상은 가지고 있던 옛날 청동기를 보이며 소군에게 물었다. 소군은 “이 기물은 제나라 환공(桓公) 10년 백침대(柏寢臺)에 진열되어 있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조사하게 했더니 과연 제나라 환공 때의 기물이었다. 궁 전체가 놀랐고, 소군을 수백 살 먹은 신으로 여겼다.

소군이 주상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부엌신에게 제사를 드리면 신기한 물건을 얻을 수 있고, 신기한 물건을 얻으면 단사(丹沙)로 황금을 만들 수 있으며, 황금을 만든 다음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쓰면 수명을 늘릴 수 있고, 수명을 늘리면 바다의 봉래산(蓬萊山)에 살고 있는 신선을 만날 수 있으며, 신선을 만나 봉선제를 올리면 죽지 않을 수 있으니 황제(黃帝)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신이 전에 바다를 떠돌다 안기생(安期生)을 만났사온대, 그가 신에게 대추를 먹으라고 주는데 크기가 참외만 했습니다. 안기생은 선인으로서 봉래산을 오가니 그와 통하면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숨을 것입니다.”

이에 천자는 몸소 부엌신에 제사를 올리고, 방사(方士)를 바다로 보내 봉래산에 있다고 하는 안기생 따위를 찾게 하는 한편, 단사 등 각종 약물로 황금을 만들게 했다.

시간이 흘러 이소군이 병으로 죽었다. 천자는 그가 하늘로 올라갔지 죽은 것이 아니라고 여겨 황현(黃縣)과 추현(錘縣)의 사관서(史寬舒)에게 그 방술을 받아 봉래산의 안기생을 찾게 했으나 찾지 못했다. 바다와 가까운 연(燕)과 제(齊) 지역의 괴이하고 황당한 방사들이 서로 이를 따라 하니 귀신에 관한 일을 두고 말이 더 많아졌다.

박현(亳縣) 사람 박유기(薄誘忌)가 태일(泰一)에 제사 지내는 방술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천신으로 가장 귀한 것이 태일이며, 태일의 보좌를 오제가 합니다. 옛날 천자는 봄가을로 동남 교외에서 7일 동안 소, 양, 돼지를 함께 바치는 태뢰(太牢)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제단은 귀신이 드나들 수 있게 팔방으로 통했습니다.”

이에 천자는 태축(太祝)에게 장안 동남쪽 교외에 사당을 세우고 박유기의 방식대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했다.

그 뒤에 누군가 “옛날에 천자는 3년에 한 번씩 태뢰를 갖추어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의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천자는 이를 허락하고 태축에게 그 방식대로 박유기가 말한 태일단에서 제사를 올리라고 명령했다.

뒤에 또 어떤 자가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옛날 천자는 늘 봄가을로 해사(解祠)를 지냈는데, 황제(黃帝)의 제사에는 효조(梟鳥), 파경(破鏡)을, 명양신(冥羊)의 제사에는 양을, 마행(馬行)의 제사에는 푸른 수말 한 필을, 태일, 고산산군(皐山山君), 지장(地長)의 제사에는 소를, 무이군(武夷君)의 제사에는 마른 어물을, 음양사자(陰陽使者)의 제사에는 소 한 마리를 사용했습니다.”

제사관에게 그 방식대로 하되 박유기의 태일단 옆에서 제사를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 뒤 천자의 원림(상림원)에 흰 사슴이 나타나자 그 가죽으로 화폐를 만들어 상서로움을 드러내고 백금을 주조했다.

이듬해(기원전 122년), 옹에서 교 제사를 올리다 뿔이 하나 달린 고라니 같은 짐승을 잡았다. 담당 관리가 “폐하께서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니 상제께서 그 답으로 뿔 하나 달린 짐승을 내리셨습니다. 기린(麒麟)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오치(五畤)에 바치고, 치마다에서 소 한 마리씩을 태웠다. 제후들에게 백금을 내리면서 이런 부응이 천지의 뜻에 맞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에 제북왕(濟北王)은 천자가 봉선을 올릴 것으로 생각하여 태산(泰山)과 그 주변 읍을 바치겠다는 글을 올려왔다. 천자가 이를 받고 다시 다른 현을 그에게 보상으로 내렸다. 상산왕(常山王)이 죄를 짓자 유배를 보내고, 그 동생을 진정(眞定)에 봉해 선왕의 제사를 잇게 하는 한편 상산을 군으로 만들었다. 이로부터 오악(五嶽)이 모두 천자의 군에 들게 되었다.

그 이듬해(기원전 120년), 제나라 사람 소옹(少翁)이 귀신을 부르는 방술을 가지고 주상을 뵈었다. 주상이 아끼는 왕부인(王夫人)이 죽자 소옹이 방술로 밤중에 왕 부인과 부엌신의 형상 따위를 불러들이니 천자가 장막을 통해 이를 바라보았다. 이에 소옹을 문성장군(文成將軍)에 봉하고 많은 상을 내리는 한편 손님의 예로 그를 예우하였다.

문성이 말하길 “주상께서 신령과 통하고 싶으시면 궁실과 복식 등이 신령에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령이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곧 구름무늬를 그린 수레를 만들어 매일 다른 색깔의 수레로 갈아타며 악귀를 쫓았다. 또 감천궁(甘泉宮)을 축조하여 그 안에 대실(臺室)을 만들었는데, 천, 지, 태일 등 여러 신을 그려 넣은 뒤 제사 용구를 두어 천신을 불렀다.

한 해 남짓 지나자 소옹의 방술은 효험이 점점 떨어졌고 신령은 오지 않았다. 이에 소옹은 비단에다 글을 써서 소에게 먹이고는 모른 척 이 소의 뱃속에 기이한 것이 들어있다고 했다. 소를 죽이고 보니 글이 있었지만 글의 내용이 괴이하여 천자는 이를 의심하였다. 소옹의 필적을 아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위조된 글이었다. 이에 문성장군을 죽이고 이 일은 감추어졌다.

그 후 다시 백량대(柏梁臺), 동주(銅柱), 승로(承露, 감로수를 받는 접시), 선인장(仙人掌, 신선의 손바닥 형상) 따위를 만들었다.

문성이 죽고 이듬해(기원전 118년), 천자가 정호(鼎湖)에서 병이 났는데 심했다. 무의(巫醫)가 안 써본 것이 없었으나 낫지 않았다. 유수발근(游水發根)이란 자가 “상군(上郡)에 무당이 있는데 병을 앓으면 귀신이 그 몸에 가서 붙는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주상이 불러 그에게 감천궁에서 제사를 올리게 했다. 이윽고 무당이 병이 나자 사람을 시켜 (천자의 병에 대해) 신군(神君)에게 물어보게 했다. 신군이 “천자는 병을 걱정하지 마시오. 병이 조금 낫거든 억지로라도 감천궁에 와서 나를 만나시오.”라고 했다.

그리하여 병에 차도가 있어 감천궁으로 행차하자 병이 다 나았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수궁(壽宮)에 신군을 모셨다. 신군 중에 가장 귀한 신은 대부(大夫)이며, 그 보좌로 대금(大禁), 사명(司命) 따위가 모두 그를 따랐다. 그 모습은 볼 수 없고 그 소리만 들을 수 있는데,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수시로 오가는데 올 때는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났다. 실내 장막에서 살고, 낮에 말하는 때도 있지만 대개는 밤에 말을 했다.

천자라도 의식을 치른 다음에 수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은 무당이 주관하고 있어 신군에게 음식을 넣거나 신군이 전할 말이 있을 때는 무당을 통하였다. 또 수궁과 북궁을 지어 깃털로 장식한 깃발을 세우고, 제사에 소용되는 제구를 마련하여 신군에게 예를 갖추었다. 신군이 한 말을 주상이 사람을 시켜 받아 적게 했는데, 이를 ‘화법(畵法)’이라 했다. 그 말은 세속에서도 아는 바이고 별나게 다를 것이 없었는데 천자 혼자만 좋아했다. 그런 일들은 비밀에 붙여져 세상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담당 관리가 “연호는 하늘이 보여주는 상서로운 길조로 이름을 지어야지 1, 2와 같은 숫자로 해서는 안 됩니다. 첫 연호는 건원(建元)으로, 두 번째 연호는 혜성이 나타났으므로 원광(元光)으로, 세 번째 연호는 교외에서 뿔 하나 달린 짐승을 잡았으니 원수(元狩)로 해야 합니다.” 따위의 말을 올렸다.

그 이듬해 겨울, 천자가 옹현에서 제사를 지내고 상의하기를 “오늘 상제께는 짐이 몸소 제사를 올렸으나 후토(后土)에는 지내지 못했으니 예에 맞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담당 관리와 태사공(太史公), 제사관 사관서 등이 의논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천지에 사용하는 희생은 뿔이 누에고치나 밤같이 작은 송아지라야 됩니다. 지금 폐하께서 몸소 후토에 제사를 올리시려면 후토는 호수 위 다섯 단으로 된 원구단이라야 합니다. 그리고 단마다 누렁 송아지와 태뢰를 갖추어야 하고, 제사를 마친 뒤에는 전부 묻어야 합니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누런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이에 천자는 동쪽으로 가서 처음으로 사관서 등이 의논한 대로 분음수(汾陰脽) 위에 후토사를 세웠다. 주상은 상제에 드리는 예에 따라 멀찌감치 떨어져 몸소 절을 했다. 예를 마치고 천자는 형양(滎陽)을 거쳐서 돌아왔다. 낙양(雒陽)을 지나다가 조서를 내려 “삼대(三代)가 끊어진 지 오래라 그 나라를 회복하기 어렵구나. 사방 30리 땅을 주나라 후손에게 봉하여 주자남군(周子南君)으로 삼고 선왕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라.”고 했다. 이해에 천자는 군현을 순시하기 시작하여 차츰 태산에 이르게 되었다.

그해 봄, 낙성후(樂成侯)가 글을 올려 난대(欒大)를 언급했다. 난대는 교동왕(膠東王)의 궁인(宮人)으로 일찍이 문성장군과 같은 스승을 모시다가 교동왕의 약을 처방하고 제조하는 상방(尙方)이 되었다. 낙성후의 누이는 강왕(康王)의 왕후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강왕이 죽자 다른 희첩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강후는 음탕하여 새 왕과 맞지 않았고, 법을 이용하여 서로를 해치려 했다.

강후는 문성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난대를 보내서 낙성후를 통해 (주상을) 뵙고 방술을 말하게 했다. 천자는 문성을 죽이고는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무 일찍 죽여 그 방술을 다 배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난대를 보자 크게 기뻐하였다. 난대는 수려하게 생긴 데다 말솜씨도 뛰어났으며, 큰소리를 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난대가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일찍이 바다를 오가며 안기생, 선문고(羨門高) 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을 천하다고 여겨 믿지 않았습니다. 또 강왕은 제후에 불과하여 방술을 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신이 몇 번이나 강왕에게 말했지만 강왕은 끝내 신을 쓰지 않았습니다. 신의 스승께서는 ‘황금을 만들 수도 있고, 황하의 터진 둑도 막을 수 있으며, 불사약도 얻을 수 있고, 선인도 오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은 문성처럼 되지 않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그러면 방사들이 모두 입을 닫아 버리는데 어떻게 감히 방술을 말하겠습니까?”

주상이 이렇게 말했다.

“문성은 말의 간을 잘못 먹어 죽었을 뿐이다. 네가 진정 그 방술을 수련해낼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인들 아끼겠는가?”

난대는 이렇게 말했다.

“신의 스승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스승께 구할 뿐이지요. 폐하께서 기어이 스승을 부르고 싶으시다면 그 심부름꾼을 귀하게 대해야만 합니다. 그 친족들도 손님의 예로 대해야지 낮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 모두에게 신표를 지닐 수 있게 해야만 신인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신인이 오겠습니까, 안 오겠습니까? 심부름꾼을 높인 다음에라야 오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주상이 작은 법술이라도 보이라 하여, 바둑판에 바둑돌을 놓자 바둑돌이 절로 부딪쳤다.

이 무렵 주상은 황하가 넘칠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황금도 제련하지 못하자 난대를 바로 오리장군(五利將軍)에 임명했다. 한 달여 만에 네 개의 금인을 얻어 천사장군(天士將軍), 지사장군(地士將軍), 대통장군(大通將軍), 천도장군(天道將軍)의 도장을 차게 되었다. (주상은) 어사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날 우 임금은 구강(九江)을 소통시키고 사독(四瀆)을 텄다. 최근 황하의 물이 땅에까지 넘쳐 제방을 쌓은 일로 쉴 틈이 없었다. 짐이 천하에 임한 지 28년, 하늘이 짐에게 방사를 보내주신다면 크게 통할 수 있으리라. ‘건괘(乾卦)’에 ‘비룡(飛龍)이 하늘에 있다’ 하였고, ‘큰 기러기가 천천히 너럭바위로 나아간다’고 하였으니 그 뜻이 지금과 비슷하지 않은가. 2천 호를 지사장군 난대에게 봉하고 낙통후(樂通侯)로 삼도록 하라.”

열후에게 주는 최고의 저택과 1천 명의 하인을 내리고 황제가 사용하지 않는 수레와 말, 휘장, 기물 따위로 집을 가득 채우게 했다. 또 위장공주(衛長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고 황금 1만 근을 주는 한편 탕목읍의 이름을 당리현(當利縣)으로, 공주의 이름을 당리공주로 바꾸게 했다. 

천자가 직접 오리장군의 저택을 찾았고, 그를 위문하고 물건을 보내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대장공주(大長公主)를 비롯하여 장군과 재상 이하 모두가 그의 집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이런저런 재물을 갖다 바쳤다.

이에 천자는 ‘천도장군’이라 새긴 옥도장을 날개옷을 입은 사람을 시켜 밤중에 백모(白茅) 위에서 주도록 하였는데, 오리장군도 날개옷을 입고 백모 위에 서서 도장을 받았다. 이는 신하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천도(天道)라는 도장을 차고 다니는 자는 천자를 위해 천신을 인도할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에 오리장군은 밤마다 자기 집에서 제사를 지내며 신이 내려오길 기원했다. 신은 오지 않고 잡귀들이 다 모여들었는데 이것들을 부릴 수 있었다.

그 후 난대는 행장을 꾸려 동해로 들어가서 스승을 찾겠다고 했다. 난대가 주상을 만난 지 몇 달 만에 여섯 개의 도장을 차고 천하를 울리는 귀한 몸이 되었다. 그러자 바닷가 연나라와 제나라 방사들은 자신들에게도 신선을 부르는 비방이 있다며 큰소리를 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해 여름 6월, 분음(汾陰)의 무당 금(錦)이 옛날 위(魏)나라 땅 구릉지에 자리한 후토 사당 옆에서 인민을 위해 제사를 드리다가 갈고리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파냈더니 세발솥 정(鼎)을 발견했다. 정은 다른 정에 비해 유달리 컸고, 문양은 있지만 글자는 없었다. 괴이하게 여겨 관리에게 말하자, 관리는 하동(河東) 태수 승(勝)에게 보고했고, 승은 다시 위에 보고했다.

천자가 사자를 보내서 무당 금을 심문하여 정을 얻은 것이 사기가 아님을 알고는 곧 예를 갖추어 제사를 드리고 정을 감천으로 맞아들이니 (천자도) 행차하여 상제에게 바칠 준비를 했다. 중산에 이르자 날이 개고 따뜻해지더니 누른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마침 고라니가 지나가자 주상이 몸소 쏘아 제사에 썼다.

장안으로 돌아오자 공경대부들이 모두 보정(寶鼎)을 받드는 일에 대해 청을 올렸다. 천자가 “최근 황하가 넘치고 몇 해째 흉년이 계속 들기에 순시를 나가 후토에 제사를 올리며 백성을 위해 오곡이 잘 익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올해 풍년이 들었지만 아직 신께 감사를 올리지 못하고 있던 차에 어찌 하여 정이 나왔단 말인가?”라고 했다. 담당 관리들이 일제히 아뢰었다.

“듣자 하오니 옛날 대제(大帝)께서 신정(神鼎) 하나를 만드셨는데, 하나란 하나로 통일된다는 뜻으로 천지만물이 모두 이에 속한다고 합니다. 황제(黃帝)께서는 보정 셋 만드셨는데,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나타냅니다. 우 임금께서는 구주(九州)의 황동을 모아 구정(九鼎)을 주조하셨는데, 모두 제물을 삶아 상제와 귀신에게 올리는 데 썼습니다. 성군을 만나 정이 나타났고, 하나라와 상나라에 전해졌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쇠퇴해지고 송나라의 사직이 훼손되자 정은 바로 가라앉아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송(頌)」에 ‘당에서 내려와 문 앞으로 가면서 양과 소를 살피고, 크고 작은 솥도 둘러보셨네. 굽은 뿔잔에 맛나고 향기로운 술이 있고, 시끄럽고 오만하지 않으니 장수의 복을 받으시리’라 하였습니다. 

지금 정이 감천궁에 이르러 용이 조화를 부린 듯 빛나는 것은 무궁한 복을 이어 받은 것입니다. 중산에서 누렇고 흰 구름이 하늘을 덮었던 것과 큰 활을 쏘아 신단 아래서 짐승을 잡은 것도 길조를 보인 것입니다. 천지 귀신께 드린 성대한 제사의 보답입니다. 하늘의 명을 받아 황제가 된 자만이 마음으로 그 뜻을 알고 덕에 부합할 수 있습니다. 정은 종묘에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 궁정에 잘 모셔 하늘이 밝히신 징조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주상이 “좋다.”고 하였다.

바다로 나가 봉래산을 찾던 자들이 봉래산이 멀지 않는데도 갈 수 없는 것은 그 기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상은 곧 기상을 잘 살피는 자를 보내 관측을 돕게 했다고 한다.

그해 가을, 주상이 옹으로 행차하여 교 제사를 올리려는데 어떤 자가 “오제는 태일의 보좌이므로 태일을 세워 주상께서 몸소 교 제사를 올려야 마땅합니다.”라고 했다. 천자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했다. 제나라 사람 공손경(公孫卿)이 “이 보정을 얻은 올해는 겨울 신사삭일(辛巳朔日, 11월 1일) 아침이 동지인데 이는 황제께서 보정을 얻은 날과 같습니다.”라 했다. 공손경의 작은 나무 조각으로 만든 찰서(札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황제가 완구(宛胊)에서 보정을 얻고 귀유구(鬼臾區)에게 물었다. 귀유구는 ‘황제께서 보정과 신책을 얻으신 때가 올 기유삭일 아침 동지로, 하늘의 규율과 부합하여 끝났다가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황제는 해와 달에 근거하여 역법을 따져 계산하니 이후 매 20년 11월 초하루 아침이 동지였고, 이렇게 스무 번을 거듭하여 380년 만에 황제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공손경이 소충(所忠)을 통해 이를 아뢰려 하였으나 소충이 보기에 그 찰서는 경전과 맞지 않는 헛소리라는 의심이 들어 “보정과 관련된 일은 이미 결정되었거늘 어쩌자는 말인가?”라며 물리쳤다. 공손경이 무제가 총애하는 사람을 통해 이를 아뢰었다. 주상은 크게 기뻐하며 공손경을 불러 물었다.

공손경은 “이 글은 신공(申功)에게 받았사옵고, 신공을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주상이 “신공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자 공손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공은 제나라 사람입니다. 안기생과 통하고 황제의 말씀을 전수 받았지만 글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직 보정에 새겨진 글만 있을 뿐인데 그 글에 이르기를 ‘한나라의 흥성은 황제 때의 부흥이며, 한나라의 성세는 고조의 손자나 증손자 때가 될 것이다. 보정이 나타나 신과 통하였으니 봉선을 지내야 한다. 봉선을 행한 72명의 왕들 중 황제만이 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신공이 말하기를 ‘한나라의 군주 또한 태산에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이니,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황제 때는 제후가 1만에 신령에 봉선한 자가 7천이었다. 천하 명산 여덟 중 셋은 오랑캐 땅에 있고, 다섯은 중국에 있다. 중국의 화산(華山), 수산(首山), 태실산(太室山), 태산(泰山), 동래산(東萊山) 이 다섯 산은 황제가 늘 유람하며 신과 만나던 곳이다. 황제는 전쟁을 하면서도 신선을 배웠고, 백성들이 그 선도에 반대하는 것이 걱정되어 귀신에 반대하는 자들을 죽였다. 100년이 넘어 지난 뒤에 신과 통할 수 있었다. 황제는 옹에서 상제에게 지내를 올리느라 석 달을 머물렀다. 귀유구는 대홍(大鴻)으로 불렸으며, 죽은 뒤에는 옹에 장사를 지냈다. 옛날 홍총(鴻冢)이 바로 그 무덤이다. 그 후 황제는 명정(明廷)에서 만방의 귀신들을 영접했는데, 명정은 감천이다. 이른바 한문(寒門)이란 곳은 곡구(谷口)이다. 황제는 수산에서 동을 캐다 형산 밑에서 정을 주조했다. 정이 다 만들어지자 수염을 늘어뜨린 용이 내려와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가 올라타자 신하와 후궁들 70여 명도 용에 올라탔다. 용은 바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미처 오르지 못한 나머지 소소한 신하들이 모두 용의 수염을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용의 수염이 빠져 황제의 활이 떨어졌다. 백성들은 황제가 승천하는 것을 우러러 보다가 활과 용의 수염을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이 때문에 훗날 그곳에 정호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활을 오호(烏號)라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에 천자는 “아아! 내가 참으로 황제처럼 된다면 짚신을 버리듯 처자식을 떠날 것이다!”라 했다. 그리고는 곧 공손경을 낭(郎)으로 삼아 동쪽 태실에 보내 제사를 드리고 귀신을 맞게 하였다.

주상이 옹에서 교 제사를 드리고 농서(隴西)에 이르러 서쪽 공동산(空桐山)에 올랐다가 감천으로 행차했다. 제사관 관서 등에게 태일 제사단을 갖추라고 명령했다. 단은 박유기가 말한 태일단을 따랐는데 3층이었다. 그 밑으로 오제단을 각각 방위에 맞추어 둘렀다, 황제의 단은 서남쪽에 팔방으로 통하는 귀도를 두었다.

태일에 소용되는 것은 옹의 치에 올리는 것과 같았는데, 단술, 대추, 말린 고기 같은 것을 더하고 검정 소를 잡아 모든 제물을 갖추었다. 그러나 오제에게는 희생과 단술만 올렸다.

그 아래 사방의 땅에서는 뭇 신들을 따르는 것들과 북두에 일일이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마치면 남은 고기 등은 전부 불에 태웠다. 소는 흰색으로 사심을 그 안에 넣었고, 돼지를 사슴 안에 넣어 물에 담갔다. 태양에는 소로 제사를 드렸고, 달에는 양이나 돼지로 제사를 드렸다. 태일 제사를 담당한 자들은 수놓은 자색 옷을 입었고, 오제에 대한 제사도 각각의 옷에 색이 있었다. 태양에 제사를 드릴 때는 붉은 색 옷을, 달에 제사를 올릴 때는 흰색 옷을 입었다.

11월 초하루 아침 동지, 날이 밝기 전에 천자는 태일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태양을 향해, 저녁에는 달을 향해 절을 올렸다. 태일 제사는 옹현에서 드리는 제사의 예법과 같았다. 축문인 찬상(贊飨)은 “하늘이 처음으로 보정과 신책을 황제께 내리시고 초하루가 지나면 다시 또 초하루가 오게 하고 끝나면 다시 시작하게 하시니, 황제가 경배드리옵니다.”라고 되어 있었다. 옷은 누런색을 입었다. 제단에는 횃불을 놓아 단을 가득 메우고 단 옆에는 음식을 만드는 기구를 늘어놓았다. 담당관이 “제단 위에서 빛이 납니다.”라고 하자 공경들이 “황제께서 처음 운양(雲陽)에서 태일에 제사를 올릴 때 담당관이 큰 옥과 좋은 희생을 공손히 바쳤는데 그날 밤 아름다운 광채가 보이더니 이튿날 낮까지 있었고, 그 누런 기운이 하늘로 뻗어 올라갔습니다.”라고 했다.

태사공과 제사 담당관 관서 등은 “신령스러운 징조들은 복을 지키는 상서로운 조짐들이므로 빛이 나는 곳에다 태치단을 세워 그 감응을 드러내야 마땅합니다. 태축에게 가을과 겨울 사이에 제사를 주관하게 하시고, 천자는 3년에 한 번 제사를 올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그해(기원전 112년) 가을, 남월(南越)을 토벌하기에 앞서 태일에 제사를 올리고 알렸다. 가시나무로 깃대를 삼고 깃발에는 천일삼성(天一三星)을 상징하는 해와 달, 북두칠성과 비룡을 그려 태일 제사 때의 기치로 삼았는데, 그 이름을 ‘영기(靈旗)’라 했다. 전쟁 때문에 기도를 드릴 때는 태사(太史)가 이것을 들고 정벌하고자 하는 나라를 가리켰다.

한편 오리장군은 감히 바다로 들어가지 못하고 태산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주상이 사람을 시켜 몰래 따라가 살피게 하였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리장군은 스승을 만났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방술도 다하여 대부분을 영험을 보이지 못하자 마침내 주상은 오리장군을 죽였다.

그해 겨울, 공손경은 하남(河南)에서 신선을 기다리다 구지성(緱氏城) 위에서 신선의 자취를 보았는데, 마치 꿩 발자국이 것이 성 위를 다닌 것 같았다. 천자는 몸소 구지성으로 행차하여 그 자취를 보고는 “문성장군과 오리장군을 따라 하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물었다. 공손경은 “신선은 인간의 군주를 인간의 군주가 찾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조금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신선은 오지 않습니다. 신선의 일이란 마치 뜬구름을 잡는 것인 양 허황된 것처럼 보입니다. 시간이 쌓여야만 신선을 오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군국들 모두가 도로를 닦고 궁관과 명산의 신사를 잘 단장하여 그 행차를 기다렸다.

그해(기원전 111년) 남월을 멸망시키자 주상이 총애하는 신하 이연년(李延年)이 뛰어난 음률로 아뢰었다. 주상이 “좋구나.”하고는 공경들과 논의하길 “민간 제사에도 북과 춤이 있는 음악이 있거늘 지금 교 제사에 음악이 없으니 이 어찌 어울리겠는가?”라고 했다. 공경들은 “옛날 천지 제사에는 모두 음악이 있었습니다. 그래야 천신과 지신에 맞는 예라 할 것입니다.”라 했다. 누군가 말하기를 “태제(泰帝)가 소녀(素女)에게 50현의 거문고를 연주하게 했는데, 슬퍼서 그만두라고 하였으나 멈추지 않아 그 거문고를 25현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남월을 평정한 뒤에 태일과 후토에 제사를 올리면서 처음으로 악무를 사용했고 가무 악대도 늘렸다. 25현의 거문고와 공후(箜篌)의 제작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듬해 겨울, 주상이 말하길 “옛날에는 먼저 군대를 사열·정돈하고 무장을 해제한 다음 봉선을 행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북으로 삭방(朔方)을 순시했는데 10만이 넘는 병력을 과시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산(橋山)에 있는 황제의 무덤에 제사를 올린 다음 수여(須如)에서 무장을 해제하였다.

주상이 “내가 듣기에 황제는 죽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기 무덤이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황제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자 신하들의 그 의관을 묻은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감천에 이르러 태산에서 봉선을 행하기 위해 우선 태일에 유(類) 제사를 지냈다.

보정을 얻고나서 주상은 공경 및 유생들과 봉선에 대해 논의했다. 봉선을 거의 행하지 않았던 데다가 끊어진 지 오래라 그 의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유생들은 <상서(尙書)>와 <주관(周官)>의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망사(望祀)’와 ‘사우(射牛)’를 봉선에 채용고자 했다.

아흔 살이 넘은 제나라 사람 정공이 “봉선이란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이름에 부합합니다. 그래서 진시황도 봉선을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폐하께서 꼭 오르시겠다면 조금씩 오르시다가 비바람이 없을 때 올라서 봉선을 드리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주상은 이에 유생들에게 ‘사우’를 익히도록 명령하고 봉선 의식의 초고를 만들게 했다. 몇 년 뒤 시행할 때가 되었을 무렵 천자는 공손경과 방사들로부터 황제 이전 봉선에서 모두 괴이한 신물을 부르고 신과 소통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천자는 황제를 본받아 신선의 심부름꾼인 봉래 방사들을 맞이하고, 자신이 세속을 초탈해 구황(九皇)의 덕에 버금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유가의 학술을 채용하여 이를 꾸미고자 했다.

유생들은 봉선에 이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데다 <시(詩)>, <서(書)>의 옛 글에 얽매여 생각을 펼쳐내지 못하였다. 주상이 봉선에 사용되는 제사 용구를 만들어 유생에게 보여 주었으나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옛날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또 서언(徐偃)은 “태상(太常) 소속의 유생들이 행하는 의례가 노나라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주패(周覇)가 막 봉선에 관한 일을 계획하려 하자 주상은 서언과 주패를 내치고 유생들을 모조리 파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

3월, 마침내 동쪽 구지에 행차하여 예를 행한 다음 중악(中嶽) 태실산에 올랐다. 산 밑에 있던 수행 관리들이 “만세!”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산 위에다 물었으나 위에서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산 아래다 물었으나 아래서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300호를 태실산에 봉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숭고읍(崇高邑)이라 부르게 했다. 동쪽 태산에 올랐는데, 초목에 잎이 자라지 않아 사람을 시켜 태산 꼭대기에 비석을 세우게 했다.

주상이 동쪽 바닷가를 순시하며 팔신(八神)에 제사를 올렸다. 제나라 사람이 글을 올려 신기하고 괴이한 방술을 이야기하는 자가 1만 명에 이르지만 영험한 자는 한 명도 없다고 했다. 이에 배를 더 많이 띄워 바다에 신산이 있다고 하는 자 수천 명에게 봉래신인을 찾게 했다. 공손경이 부절을 지니고 먼저 가서 명산에서 기다렸다. 동래에 이르자 밤에 키가 몇 장이나 되는 사람을 보았는데 다가가니 보이지 않고 마치 짐승의 것과 같은 아주 큰 발자국만 보았다는 따위의 말을 했다.

신하들이 개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내가 거공(巨公, 황제)을 만나고자 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문득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는 말을 하였다. 주상이 큰 발자국을 보고도 믿지 않았으나 신하들이 또 노인을 말하자 신선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에 바닷가에 머무르며 방사들에게 전거(傳車)를 내주고 수천 명의 간사(間使)들을 시켜 신선을 찾게 했다.

4월, 봉고현(奉高縣)으로 돌아왔다. 주상은 유생과 방사들이 말하는 봉선이 저마다 다르고 조리에 맞지 않아 시행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천자가 양보산(梁父山)에 가서 지신(地神)에게 예를 갖추어 제사를 드렸다.

을묘일, 시중(侍中) 벼슬에 있는 유생에게 피변(皮弁)을 쓰고 홀을 꽂은 관복을 입게 하고는 ‘사우’ 의식을 거행했다. 태산 아래 동쪽에 제단을 만들어 태일에게 제사 올리는 의례대로 제사를 올렸다. 제단은 너비 1장 2척에 높이 9척이며, 그 아래에 옥첩서(玉牒書)를 두었는데 글의 내용은 비밀에 부쳤다. 제사가 끝나자 천자는 시중 봉거(奉車) 자후(子侯)만 데리고 태산에 올라 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일은 모두 비밀에 부쳤다. 이튿날, 북쪽 길을 따라 내려왔다. 병진일, 태산 기슭 동북쪽 숙연산(肅然山)에서 지신에 제사를 올렸는데, 후토에 올리는 제사 의례와 똑같이 했다. 천자는 모든 제사를 몸소 지냈는데, 누런 옷을 입고 늘 음악이 따랐다. 장강과 회수 일대에서 나는 삼척모(三脊茅)로 제단의 자리를 깔았으며, 오색토를 섞어 제단을 쌓았다. 먼 지방의 기이한 들짐승과 날짐승, 흰 꿩 등과 같은 동물들을 풀어 제사 용품으로 보탰는데 외뿔소, 큰꼬리 들소, 무소, 코끼리 등과 같은 동물은 사용하지 않았다. 태산에 이른 다음 모두 놓아 주었다. 봉선 제사 때는 밤에는 빛 같은 것이 있었고, 낮에는 흰 구름이 제단 위에 피어올랐다.

천자가 봉선을 지내고 돌아와 명당(明堂)에 앉았는데, 신하들이 돌아가며 축수를 올렸다. 이에 어사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리게 했다.

“짐은 보잘 것 없는 몸으로 지존의 자리를 이어 맡은 바 일을 해내지 못할까 전전긍긍 두려워했다. 덕은 얕고 예악에도 밝지 못하다. 태일 제사 때 상서로운 빛이 비치고 마치 어떤 소리가 들리는 듯했는데 괴물에 놀라 그만두려다 감히 그러지 못했고, 마침내 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양보에 이른 다음 숙연산에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사대부들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려 하니 인민들에게 100호마다 소 한 마리와 술 열 석을 내리고, 여든 살 노인과 고아 그리고 과부들에게게는 옷감 두 필씩을 나누어 주어라. 또 박현, 봉고현, 사구현, 역성현의 요역과 올 세금을 면제하도록 하라. 을묘년에 내렸던 사면령처럼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도록 하라. 지나온 곳의 죄인들을 사면하고, 2년 전의 일에 대해서는 그 죄를 묻지 않도록 하라.”

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옛날 천자는 5년에 한 번 순수하고 태산에 제사를 올렸으며, 제후들에게는 조회를 위한 숙소가 있었다 하니 제후들도 태산 아래에 각자 저택을 짓게 하라.”

천자가 태산에서 봉선을 마치자 바람이나 비 같은 천재지변이 없었다. 이에 방사들이 다시 봉래 등 여러 신산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자 주상은 기쁜 마음으로 신선을 만날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는 곧 다시 동쪽 바닷가로 가서 굽어보면서 봉래를 볼 수 있길 바랐다. 봉거 곽자후(霍子侯)가 갑자기 병이 나서 하루 만에 죽었다. 주상이 바로 떠나 해상을 따라 북쪽 갈석(碣石)에 이르렀다. 요서(遼西)를 순수하고 북쪽 변경을 거쳐 구원(九原)까지 이르렀다. 5월, 다시 감천으로 돌아왔다. 담당관들이 보정이 나타났던 그해를 원정(元鼎)이라고 하고, 금년을 원봉(元封) 원년으로 하자고 아뢰었다.

그해 가을, 혜성이 동정(東井)에 나타나서 이리저리 빛을 뿜었다. 그로부터 10여 일, 삼능(三能)에 혜성이 나타나 이리저리 빛을 뿜었다. 기상을 관측하는 왕삭(王朔)이 “관측을 하다가 혼자 호리병 같은 그 별을 보았는데 한 끼 먹을 시간 정도가 지나자 다시 들어가 버렸습니다.”라고 했다. 담당 관리는 “폐하께서 한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봉선을 행하시어 하늘이 그 보답으로 덕성(德星)을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라는 따위의 말을 하였다.

그 이듬해 겨울, 옹현에서 오제에게 교 제사를 올리고 돌아와 태일에 제사를 올리고 축원했다. 그 축문은 다음과 같았다.

“덕성이 찬란하게 빛났으니 아주 상서로운 일입니다. 수성(壽星)이 자주 나타나 맑고 밝게 빛났고 신성(信星) 또한 환히 나타났습니다. 황제는 태축(泰祝)을 위한 공물들을 삼가 신령들께 바치나이다.”

그해 봄, 공손경이 동래산에서 신선을 보았는데, 마치 “천자를 보려고 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천자에 이에 구지성으로 행차하여 공손경을 중대부(中大夫)로 삼았다. 이윽고 동래에 이르러 며칠을 머물렀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저 거인의 발자국만 보았다. 다시 방사 1,000여 명을 보내 신기하고 괴이한 것을 구하고 영지(靈芝) 같은 약초를 캐어 오도록 했다.

이해에 가뭄이 들어 천자가 떠날 명분이 없자 만리사(萬里沙)에서 기도하고 지나가다 태산에서 제사를 올렸다. 돌아오는 길에 호자(瓠子)에 이르러 몸소 황하의 터진 둑을 막는 곳으로 가서 이틀을 머무르면서 제물을 빠뜨리고 떠났다. 경 두 사람에게 병졸을 거느리고 황하의 터진 둑을 막게 하고 황하를 두 길로 흐르게 했다. 하우의 옛 모습이 복구되었다.

이 무렵에 남월이 멸망했다. 남월 사람 용지(勇之)가 “남월 사람은 귀신을 믿는 풍습이 있기에 제사 때마다 귀신을 볼 수 있고 효험도 자주 있습니다. 옛날 동구왕(東甌王)은 귀신을 공경하여 160살까지 살았습니다. 후세에 게을리했기 때문에 쇠퇴한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곧 남월 무당에게 대만 있고 단은 없는 남월의 사당을 세우게 하여 천신과 상제를 비롯하여 여러 귀신들에게 제사를 올리게 했는데, 닭의 뼈로 점을 치게 했다. 천자가 이를 믿었기 때문에 남월 사당과 닭뼈 점이 쓰이기 시작했다.

공손경이 말했다. “선인은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주상께서 늘 급하셨기 때문에 못 것일 뿐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구지성처럼 대관을 짓고 말린 고기와 대추 등을 올리면 신인이 올 것입니다. 선인은 누대에 거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에 주상은 장안에 비렴관(蜚廉觀)과 계관(桂觀)을, 감천에 익연수관(益延壽觀)을 짓게 하고, 공손경에게 부절을 갖고 제기를 갖추어 놓은 뒤 신인을 기다리게 했다. 통천대(通天臺)를 짓고 그 아래에 제물을 갖추고 신선 따위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어 감천궁에 다시 전전을 짓고 궁실을 넓히기 시작했다.

여름, 궁전 방 안에서 영지가 자라났다. 천자가 황하의 터진 둑을 막고 통천대를 일으키자 빛나는 구름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에 바로 조서를 내려 “감천궁 궁전에서 영지 아홉 줄기가 자라났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노역 해당자의 노역을 면제하도록 하라.”고 했다.

그 이듬해(기원전 108년), 조선(朝鮮)을 정벌했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공손경이 “황제 때는 제사를 지내면 가뭄이 들어 3년 동안 제단을 말렸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주상이 바로 조서를 내려 “가뭄이 들었다는 것은 제단을 말린다는 뜻이 아닌가? 천하에 명하니 영성(靈星)을 받들어 제사를 올려라.”라고 했다.

그 이듬해, 주상이 옹에서 교 제사를 지내고 회중(回中) 길을 거쳐 순수했다. 봄, 명택(鳴澤)에 이르렀고, 서하(西河)에서 돌아왔다.

그 이듬해 겨울, 주상이 남군(南郡)으로 순수하여 강릉(江陵)에 이른 다음 동쪽으로 갔다. 잠현(潛縣)의 천주산(天柱山)에 올라 제사를 드리고 남악(南嶽)이라 불렀다. 장강에 배를 띄워 심양(尋陽)에서 종양(樅陽)으로 가려다가 팽려(彭蠡)를 지나면서 명산대천에 제사를 올렸다. 북쪽으로 낭야(琅邪)에 이르러 바다를 따라 올라갔다.

4월, 봉고에 이르러 봉선을 행했다.

당초 천자가 태산에서 봉선을 올릴 때 태산 동북쪽 산기슭에 오래된 명당이 있었는데, 지세가 험하고 좁았다. 주상이 봉고 옆에 명당을 짓고자 했으나 그 형태나 규모를 잘 몰랐다. 제남(濟南) 사람 공옥대(公玉帶)가 황제 때의 명당도를 바쳤다. 명당도에는 사방에 벽이 없고 지붕을 덮은 전당이 하나 있는데, 물이 통하고 궁의 담장을 따라 복도가 나 있고 그 위로 곤륜(昆侖)이라 부르는 누각이 있었다. 이 누각은 서남쪽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천자는 이 길을 따라 들어가 전당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에 주상은 명당도처럼 봉고 문수(汶水) 옆에 명당을 지으라고 명했다. 5년 뒤, 봉선을 올릴 때 명당의 상좌에서 태일과 오제에 제사를 올리고, 고황제(高皇帝)의 위패는 그 맞은편에 두도록 했다. 아랫방에서는 소 20마리로 후토 제사를 올리게 했다. 천자는 곤륜도를 따라 들어와 처음으로 교 제사의 예에 따라 명당에서 제사를 올렸다. 제사가 끝나자 당 아래에서 요제(燎祭)를 지냈다. 

또 주상은 태산에 올라 비밀리에 그 정상에서 제사를 올렸다. 태산 아래에서 오제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각각 방위에 따라 황제와 적제를 나란히 두고 담당 관리들이 제사를 올렸다. 태산 위에서 횃불을 들면 아래에서도 모두 그에 호응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11월 갑자삭일 동지, 역법을 따지는 자가 이 날을 새로운 주기의 시작으로 추산했다. 천자가 몸소 태산에 이르러 11월 1일 동지에 명당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봉선은 행하지 않았다. 그 축문은 다음과 같았다.

“하늘이 황제에게 태원신책(泰元神策)을 내려주시니 해와 달이 돌아서 다시 시작되옵니다. 황제는 태일께 삼가 절을 올립니다.”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러 바다로 나간 이들이나 신선을 찾으려는 방사들을 조사했다. 효험을 보지 못했음에도 더 많이 내보내 신선을 만나길 바랐다.

11월 을유일, 백량대가 불탔다. 12월 갑오삭일, 주상이 몸소 고리(高里)에서 제사를 드리고 후토에 제사를 올렸다. 발해(渤海)에 임하여 봉래 등에 망 제사를 지내며 다른 세상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랐다.

주상이 돌아왔다. 백량대가 탔기 때문에 감천궁에서 조회를 받았다. 공손경이 “황제(黃帝)께서는 청령대(靑靈臺)를 지은 후 12일 만에 불에 타자 바로 명정(明庭)을 지으셨습니다. 명정이 감천입니다.”라고 했다. 방사들 여럿도 옛 제왕 중 감천에 도읍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뒤 천자는 다시 감천에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고, 감천에 제후들의 저택을 지었다.

이에 용지는 “월(越)의 습속에 따르면 화재가 있는 다음 집을 다시 지을 때는 반드시 크게 지어서 화마를 제압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건장궁(建章宮)을 지었는데, 문이 1,000개에 1만 호에 버금갈 정도의 규모였고, 전전은 미앙궁(未央宮)보다 컸다. 그 동쪽에는 높이 20여 장의 봉궐(鳳闕)을 세웠고, 그 서쪽에는 수십 리나 되는 호권(虎圈)이 있는 당중지(唐中池)가 들어섰다. 북쪽에는 높이 20여 장의 점대를 가진 큰 연못을 만들었는데 이름을 태액지(泰液池)라고 하고 못 가운데에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호량(壺梁)이라는 바다의 신산과 바다거북, 물고기 등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 남쪽에는 옥당(玉堂), 벽문(璧門), 대조(大鳥) 따위를 만들었다. 신명대(神明臺)와 정간루(井幹樓)를 세웠는데 높이가 50여 장에, 연도(輦道)를 통해 서로 이어져 있었다.

여름, 한나라는 역법을 개정하여 정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색은 황색을 받들고 관직이 도장은 다섯 글자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해를 태초(太初) 원년으로 삼았다. 이해에 서쪽의 대원(大宛)을 정벌했다. 메뚜기 떼가 기승을 부렸다. 정부인(丁夫人)과 우초(虞初) 등이 방술로 흉노(匈奴)와 대완을 저주하는 제사를 올렸다.

이듬해(기원전 103년), 제사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옹 오치의 제사에 제물을 갖추지 못하고 향기 나는 제물도 준비하지 못했다고 아뢰었다. 이에 제사관에게 명하여 삶은 송아지를 오치에 바치고 오제가 누리되 제압할 수 있는 털색을 가진 소를 각각 사용하게 하였으며, 제사용 망아지는 나무로 만든 말로 대체하라고 했다. 오제 때 몸소 교 제사를 거행할 때는 망아지를 사용하였다. 또한 주상은 명산대천 제사 때 사용하던 망아지도 모두 나무로 만든 말로 대체하게 했다. 하지만 직접 제사를 지낼 때는 망아지를 사용하게 했다. 다른 의례는 옛날과 같았다.

이듬해, 동쪽 바닷가를 순수하여 신선 따위를 시험해 보았으나 효험을 보지 못했다. 방사가 “옛날 황제 때 5성 12루를 세우고 집기(執期)에서 선인을 기다렸는데, 이를 ‘영년(迎年)’이라 불렀습니다.”라고 했다. 주상이 방사가 말한 그대로 짓도록 하고는 ‘명년(明年)’이라 불렀다. 주상이 몸소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옷은 누런색을 입었다.

공옥대가 말했다.“옛날 황제 때는 태산에서만 하늘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풍후(風后), 봉거(封鉅), 기백(岐伯)이 황제에게 동태산(東泰山)에서는 하늘에, 범산(凡山)에서는 땅에 제사를 올리게 하니 하늘의 징조와 합치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천자는 제사 도구를 갖추라고 명하고는 동태산에 이르렀으나 동태산이 작아서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에 제사관에게 예를 갖추게는 했으나 봉선은 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공옥대에게 제사를 받들고 신물을 기다리게 했다.

여름, 태산으로 돌아와 이전처럼 5년마다 하는 예를 거행하고 더하여 석려산(石閭山)에서 땅에 제사를 올렸다. 석려산은 태산 기슭 남쪽에 있는데 방사들이 이곳을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주상이 직접 와서 땅에 제사를 올린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기원전 98년), 다시 태산에 와서 봉선을 거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상산(常山)에서 제사를 올렸다.

지금 천자가 일으킨 사당으로는 태일(泰一)과 후토(后土)가 있는데, 3년마다 몸소 교 제사를 드렸다. 한나라를 건국하고 행한 봉선은 5년에 한 번이었다. 박유기가 건의한 태일, 삼일, 명양, 마행, 적성, 이 다섯은 제사관인 관서가 매년 예를 올렸다. 6사는 모두 태축이 주관했다. 8신을 비롯한 여러 신들과 명년, 범산 등 기타 유명한 사당은 순수 때 지나가면서 제사를 드렸지만 지나치면 그만이었다. 방사들이 일으킨 사당들은 각자가 주관했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제사관이 주관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당은 모두 옛날과 같았다.

지금 주상이 봉산을 시행한 지난 12년을 돌아보면 오악(五嶽)과 사독(四瀆) 등에 두루 미쳤다. 한편 방사들은 신인을 기다리는 제사도 드리고, 바다로 들어가 봉래를 찾기도 하였지만 효험은 없었다. 공손경이 신선을 기다리다 거인의 발자국 같은 것을 보기는 하였으나 역시 효험은 없었다. 천자가 갈수록 방사의 괴이한 이야기에 싫증을 내기는 하였지만 끝내 굴레를 끊지 못하고 정말 (신선을) 만나기를 바랐다. 이후로 귀신가 제사를 이야기하는 방사들이 갈수록 많아졌지만 그 효험이 어떠했는지는 눈에 선하다.

사마천의 논평[편집]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순수를 수행하여 천지의 여러 신과 명산대천에 제사를 올리고 봉선도 행했다. 수궁에서는 황제를 모시고 신에게 올리는 제문과 기도도 들었다. 물러나와 예로부터 귀신에 관한 이리들을 순서대로 논술하여 그 안과 밖을 볼 수 있게 갖추었다. 훗날 군자들은 이를 얻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제사 때 쓰이는 제기 따위의 세세한 상황이나 술을 따르는 구체적인 예법에 관한 것들은 담당관들이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