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사기/권115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사기/권115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1 조선왕 위만(衛滿)은 원래 연(燕)나라[1] 사람이다. 연나라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을 약탈하고 복속시켜, 관리(官吏)를 두고 보루와 요새를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위만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위만조선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浿水)[2]까지를 경계로 삼아 (이를)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3]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의복을 (입고)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빈 땅의 아래위 보루에서 살면서[4] 진번·조선의 만이(蠻夷)와 옛 연나라·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점차 복속하게 하고, 왕이 되어 왕검(王險)을 도읍으로 삼았다.

2 때마침, 효혜(孝惠)[5]·고후(高后)[6][7]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자, 요동태수(遼東太守)는 곧, 위만과 (이렇게) 약속하였다. : “위만은 외측의 신하〔外臣〕가 되어, 요새(要塞) 바깥의 만이(蠻夷)를 보호하고, 변방이 도적질당하지 않도록 한다. 여러 만이(蠻夷)의 군장(君長)들이 들어와 천자(天子)를 뵙고자 하면, 이를 금지(禁止)할 수 없다.” 이를 듣고, 천자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런 이유로, 위만은 군사(軍事)의 위엄과 재물을 얻어, 그 이웃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하게 하니, 진번(真畨) ·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고 사방이 수천리였다.

3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러, 꼬임에 넘어간 한(漢)나라의 망명자이 점점 더 많아졌고, (우거는) 아직 들어가 천자를 뵙지도 않았다. 진번(真番) 옆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으나, 또한, (우거가)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였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년), 한나라는 섭하(渉何)를 보내 우거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끝내 (우거는) 조서(詔書)을 받들기를 거부하였다. 섭하가 물러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浿水)에 닿자 마부(馬夫)를 시켜 섭하를 전송하러 온 자인 조선 비왕(裨王)[8] 장(長)을 찔러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말을 달려 요새로 들어가, 드디어 천자에게 귀국 보고를 하기를, ‘조선의 장수(將帥)를 죽였나이다’라 하였다. 천자는 그 명분이 좋다고 여긴 즉, 꾸짖지 아니하였고,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遼東 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고, 병사를 내어 섭하를 공격하여 죽였다.

4 천자는 죄인을 뽑아 조선을 쳤다. 그 ()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옛 제(齊)나라 땅[9]으로부터 발해〔渤海〕[10]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에 달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우거(右渠)를 토벌하고자 요동(遼東)에서 나왔다.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遼東)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방종(放縱)하다가, 패하여 흩어지고, 다(多)는 달려서 되돌아오니,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누선장군은 옛 제나라 땅 출신의 병사 칠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險)에 도달하였다. 우거는 성(城)을 지키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꾀를 내어 성을 나가서 누선(장군)을 물리치니 누선(장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장군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山) 속에서 십여일을 숨었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을 구하고 거두니, 다시 갖추어졌다. 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앞서부터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

5 천자는 두 장수가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내, 위산(衛山)을 보내어 군대의 위엄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일렀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뵙고 돈수(頓首)하고 사죄하며 말하기를, “항복을 원하였으나, 두 장수께서 사술을 써서 저를 죽이실까 두려웠습니다. 지금 믿을 만한 징표를 뵈옵고, 항복하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다. 태자(太子)를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사죄하고, 말 오천필을 바쳤고, 또한 군량(軍糧)를 보냈다. 사람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패수를 막 건너려 하자, 사자 위산과 좌장군은 변고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이 마땅히 무기를 소지하지 말라”고 말했다. 태자 역시 사자(使者)와 좌장군이 사술을 써서 그를 죽이지나 않을지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 천자에게 이를 알리니, 천자가 위산의 목을 베어 죽였다.

6 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군을 격파하고, 곧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역시 가서, 모여서 성 남쪽에 자리잡았다. 우거가 마침내 수개월을 견고하게 지켜내니 능히 없애지를 못했다.

7 좌장군은 원래 시중(侍中)이었고, 천자의 총애를 받았으며, 연(燕)과 대(代)[11]의 병졸을 거느렸고, 사나웠으며, 승세를 타고 있었고, (그의) 군사들은 많이 교만(驕慢)했다. 누선은 제(齊) 지방의 병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들어왔는데, 이미 여러 번 패하여 도망했었으니, 그에 앞서 우거와의 전투에서 모욕을 당함으로 인하여 병졸을 잃었으니, 병졸들이 모두 두려워했고, 장군의 마음은 부끄러웠다. 우거를 포위하고는 있으나, 항상 강화(講和)가 들어맞기만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좌장군이 이를 급하게 치니, 조선의 대신(大臣)은 이에, 몰래 아랫사람을 시켜 누선(樓船)에게 항복을 약속하였고 왕래하며 논의하였으나, 여전히 들어주기를 결정(決定)하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누선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를 것을 기약하였으나, 누선은 급하게 그 (조선대신의) 약속을 성취(成就)하려 하였으므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좌장군 역시 아랫사람을 시켜, 그 사이, 조선을 물리치고 항복시키려 했으나, 조선은 수긍(首肯)하지 않았고, (조선 대신의) 마음은 누선을 따랐다. 이런 이유로 두 장수는 서로 (협력이) 불가능했다. 좌장군의 마음 (속에는) 누선이 예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다(는 사실이 있었고,) 지금 조선과 사사로이 친하니, 또한 (조선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그 (어떤) 배반하려는 계획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으나, 감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천자가 이르기를, “장수들이 능력이 없어 예전에 위산(衛山)을 보내어 우거를 항복하도록 회유(誨諭)하자, 우거는 태자(太子)를 보냈다. 위산(衛山)이 행하였으나,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었고, 좌장군과 (일을) 꾀하였으나, 서로 그르쳐, 마침내 약속을 깼다. 지금 양(兩) 장수가 성(城)을 포위하고는 있으나 또한, (서로) 맞지 않고 달라서, 오래되도록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천자는) 이를 바로잡게 하려고 제남(濟南) 태수(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었으니, (공손수는) 형편(形便)에 따라 이로써 일을 맡을 수 있었다.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이르기를, “조선이 당연히 항복하여야 함이 오래이나, 항복하지 아니함에는 (어떤) 정황이 있습니다.”라 하였다. (좌장군은) 누선이 여러 차례 기약(期約)하였음과 (양 자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음을 (공손수에게) 말하였고, 원래 뜻하던 바에 의하여 일일이 공손수(公孫遂)에게 고(告)하여 이르기를, “이제 이와 같이 취하지 아니하니, 큰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뿐만 아니라 또한 조선과 함께 우리 군을 멸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공손수 역시 이를 그렇다고 여기고 나서, 부절(符節)로서, 누선장군을 좌장군 진영(陣營)에 들어 오도록 소환(召喚)하여 일을 꾸몄다. 즉, 좌장군 휘하(麾下)에게 누선장군 및 그의 군사(軍士)의 체포를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를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공손수를 죽였다.

8 좌장군은 그 후 얼마되지 아니하여 양군(兩軍)을 아우른 즉, 조선을 급히 쳤다. 조선 상(朝鮮相) 노인(路人)·상 한음(相韓陰)·니계 상 참(尼谿相參)·장군 왕겹(王唊)이 함께 일을 꾸며 이르기를, “당초에 누선에게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있고, 홀로 좌장군이 아우르고 거느리니, 전쟁은 점차 급해지고 있고, 더불어 싸우지 못할까 두려운데, 왕은 또한 항복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 ”하였다. 한음·왕겹·노인은 모두 도망쳐 한(漢)나라에 항복하였다. 노인은 도중(道中)에 죽었다.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 상 참은 아랫사람을 시켜 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검성(王險城)이 항복하지 않으니, 고(故)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한 모반하여, 다시 벼슬아치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을 하소연하고 타일러, 성기를 죽이니 이로써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이 되었다. 참을 홰청후(澅淸侯)에, 한음을 적저후(荻苴侯)에, 왕겹을 평주후(平州侯)에, 장항(長降)을 기후(幾侯)에 (각각) 봉(封)하였다. 노최(路最)는 아비가 죽었고, 매우 공(功)이 크므로 온양후(溫陽侯)가 되었다.

9 좌장군은 응징(膺懲)하기에 이르러, 공(功)을 다투고 서로 질투(嫉妬)하였으므로, 기시형(棄市刑)[12]을 (당하였다.) 누선장군 또한 열구(洌口)에 이르러 병사(들과) 머무르며 좌장군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함에도, 제멋대로 먼저 방종(放縱)하여 많은 (군사를) 잃으니, 베어 죽임이 마땅하나 돈을 바쳐 속죄(贖罪)하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10 태사공(太史公)이 말했다. “우거는 (왕검성의) 견고함에 힘입어 (저항하였으나,) 나라는 이에 사직(社稷)이 끊어지고, 섭하는 공(功)을 세운 것처럼 속여 군사를 내는 시초가 되었다. 누선 장군의 편협함은 잘못을 떠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번우(番禺)[13]를 잃고 뉘우치는데도, 오히려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功勞)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모두 주살되었다. 양군(兩軍)이 함께 치욕을 입으니, (그들의 부하) 장수들도 제후(諸侯)가 되지 못했다.”

판본[편집]

원문[편집]

번역본[편집]

역주[편집]

  1. 연나라(燕國)는 중국 춘추 시대의 주나라 제후국이자, 전국 시대의 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222년, 진시황제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2. 고조선 때의 강 이름. 패수는 북요동과의 경계를 흐르는 강으로서 청천강·대동강·예성강 등의 여러 설이 있으나 청천강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영무 옮김, 《사기》 (하), 범우사, (2003년), V. 조선 열전 (213~214쪽) ISBN 89-08-01062-9)
  3. 노관은 한 고조의 친구로 고조의 통일 전역에 종군하였고 친분에 의지하여 연왕이 되었으나 회의하고 모반하여 흉노에 투항했다.
  4. 원문은 居秦故空地上下鄣이다. ‘上下’를 동사로, ‘鄣’을 고유명사로 보아서, “진 나라의 빈 땅에 살면서 장(鄣)을 오르내렸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이영무 옮김, 《사기》 (하), 범우사, (2003년), V. 조선 열전 (214쪽) 참조. ISBN 89-08-01062-9)
  5. 한 효혜황제 유영(漢 孝惠皇帝 劉盈, 기원전 210년 ~ 기원전 188년)은 전한의 2대 황제(재위 :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8년)이다.
  6. 폐후 여씨(廢后 呂氏, 기원전 241년 ~ 기원전 180년)는 전한 고조의 황후이며 전한 혜제의 어머니로, 휘는 치(雉)이며 자는 아후(娥姁)이다. 시호는 고황후(高皇后)였지만, 나중에 광무제가 박탈하였다.
  7. 효혜가 즉위한 기원전 195년부터 폐후 여씨가 죽은 기원전 180년까지를 말한다.
  8. 裨王: 관직명이다.
  9. 원문은 그저 “齊”라고만 되어 있으나, 이 제나라는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존속한 나라이므로, 옛 제나라 땅이라고 풀이했다.
  10. 보하이 해, 즉 발해는 제나라 땅이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다. 곧,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건너갔다는 뜻이 된다.
  11. 둘 다 땅 이름이다.
  12. 기시형(棄市刑)이란 죄인의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형벌을 말한다.
  13. 번우(番禺)는 중국 광동성의 지명이다.

라이선스[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