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제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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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은 청석골이 가보고 싶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뀔수록 사랑하는 사람과 그가 활동하는 모양이 보고 싶었다. 날마다 이일 저일에 얽매어서 잠자는 시간밖에는 공상할 틈조차 없기는 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무뜩무뜩 영신의 생각이 나면 손을 쉬고 발을 멈추고 넋을 잃은 사람처럼 머엉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습관이 부지중에 생겼다.

'그가 꿈결같이 댕겨간 지가 언제이던가.'

하면 적어도 사오 년은 된 성싶었다. 편지만은 끊임없이 내왕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웬일인지 열흘이 훨씬 넘도록 영신의 소식이 끊어져서 여간 궁금히 지내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일전에야 기다란 편지가 왔는데 한낭청이란 부잣집에 기부금을 걷으러 가서 창피를 당하고 분풀이를 실컷 하다가, 일주일 동안이나 고초를 겪었다는 것과 앞으로는 기부금 명부에 이름을 적은 사람에게도 자발적으로 주기 전에는 독촉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예배당 문까지 닫으라고 딱딱 얼러메는 것을 간신히 양해를 얻기는 했으나,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청석학원 하나는 기어이 짓고야 말겠다고 새로운 결심을 보인 사연이었다.

그러면서도 한번 구경이라도 와달라는 말은 비치지도 아니한다. 반드시 청좌를 해야만 갈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와달랄까 하고 동혁은 편지마다 은근히 기다렸다. 그러나 오는 편지마다 판에 박은 듯한 사업보고요, 고생하는 이야기뿐이다. 동혁은 그런 편지를 받을 적마다,

'나두 어지간히 버티는 패지만, 나버덤두 한술 더 뜨는걸.'

하고 편지를 동댕이치는 때도 있었다. 가기만 하면야 반가이 맞아 줄 것은 물론이나, 사실 내왕 노자도 어렵고, 별러 별러서 간댔자 급한 볼일 없이 며칠 동안이나 버정거리다가 오기는 싱겁고 멋쩍은 일일 것 같았다. 첫째, 남자 친구를 찾아가는 것과 달라서 하룻밤이나마 묵을 데도 만만치 않을 듯하고, 둘이 함께 얼려 다니고 마주 붙어앉아 이야기라도 하면 노처녀인 영신이가 제가 당한 것보다도 곱절이나 부질없는 놀리움을 받을 것도 상상되었다. 그래서,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꾹 참자.'

하고 피차에 일하는 것밖에 다른 생각은 아주 책장을 덮어 두자고 몇 번이나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늙은 총각의 가슴속에 한번 호되게 붙어당긴 사랑의 불길은 의식적으로 참고 억지로 누른다고 쉽사리 꺼질 리가 없었다. 시뻘건 정열이 휘발유를 끼얹은 듯이 확 하고 붙어당길 때는 머리끝까지 까맣게 그슬릴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일이다, 일! 그저 들구 일만 허는 것이 그와 완전히 결합될 시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동안의 최면제도 되고 강심제도 된다.'

하고 식전부터 오밤중까지도 동네 일과 집안 일로 몸을 얽어매었다. 돈 있는 집 자식들이 몸뚱이가 아편쟁이처럼 비비 틀리도록 무료한 세월을 술과 계집 속에 파묻혀서 보내려고 드는 것처럼.

그래도 억제하기 어려운 청춘의 본능이 피곤한 육체를 괴롭게 굴 때에는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랫도리까지 발가벗고 냉수를 끼얹고는, 엇 둘 엇 둘 하고 체조를 한바탕 하고 들어와서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눈을 딱 감으면 한결 잠이 쉽게 들었다.

한편으로 그가 영신을 될 수 있는 대로 호의로써 이해하려는 것도 물론이다. 그만한 나이에 다른 여자들 갔으면 몸치장이나 하기에 눈이 벌겋고, 돈 있고 소위 사회에 명망이 있는 신사와 결혼을 못 하면, 첩이라도 되어서 문화생활을 할 공상과, 그렇지 않더라도 도회지에서 땀 아니 흘리는 조촐한 직업도 없지 않건만, 유독 '채영신'에게는 다만 한 가지 허영심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못 속이지.'

하고 동혁이가 자신 있게 맥을 짚어 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청석학원을 온전히 저 한 사람의 힘으로 번듯하게 지어 놓고, 교장 겸 고쓰가이(小使) 노릇까지 하더라도, 내가 이만헌 사업을 하고 있노라.'

하고 백현경이나 다른 농촌 운동자들에게 보여 주고, 애인인 저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그 허영심만이 충만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였다. 그러니까 자기의 사업의 기초는 어느 정도까지 잡혔더라도, 외형으로 눈에 번쩍 띄는 것을 만들어서 보여 주기 전에는 저를 청석골로 부르지 않으려는 그 여자다운 심리가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한곡리의 안산인 소대갈산 마루터기에, 음력 칠월의 초생달은 명색만 떴다가 구름 속으로 잠겼는데, 동리 한복판인 은행나무가 선 이 언덕 위에는 난데없는 화광이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농우회의 열두 회원들은 단체로 일을 할 때면 입는 푸른 노동복 저고리를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이고 모여 섰다. 동혁이 형제와 건배는 기다란 장대에 솜방망이를 단 것을 석유를 찍어 가며 넓은 마당을 밝히고 섰는데, 바람결을 따라 석유 그을음 냄새가 근처 인가에까지 훅훅 끼친다.

"자, 시작허세!"

동혁의 명령이 한마디 떨어지자, 회원들은 굵다란 동아줄을 벌려 잡았다.

"에에 에헤라, 지경요―---"

열두 사람의 목소리가 목구멍 하나를 통해서 나오는 듯 우렁차게 동네 한복판을 울리자, 커다란 지경돌이 반 길이나 솟았다가 쿠웅 하 고 떨어지면, 잔디를 벗겨 놓은 땅바닥이 움푹움푹하게 패어 들어간다. 여러 해 별러 오던 농우회의 회관을 지으려고 오늘 저녁에 그 지경을 닦는 것이다.

회원들의 마음은 여간 긴장되지 않았다.

자자손손이 대를 물려 가며 살려는 만년주택을 짓기 시작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생각으로, 자기네들이 웅거할 회관을 지으려는 것이다.

달구질 소리가 들리자, 야학을 다니는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아직도 이 시골에는 누구나 집을 지으면 터 닦는 날과 새를 올리는 날은 품삯을 받지 않고 대동이 풀려서 일을 보아 주는 습관이 있어서 회원들 외에 어른들과 아이들이 벌써 수십 명이나 들러붙었다.

"에에 헤에라, 지경요―---"

"에에 헤에라, 지경요―---"

고요한 바닷가의 저녁 공기를 헤치는 달구질 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데, 큰 마을 편에서 징, 장구, 꽹과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 온다. 여러 사람은 잠시 팔을 쉬고 그편을 바라본다.

레인 코트(우장옷)의 허리띠를 졸라맨 기만이가 저의 집 머슴꾼이며 작인들을 말끔 풀어서 술까지 취토록 먹인 뒤에, 두레를 떡벌어지게 차려 가지고 오는 것이다.

높이 든 깃발은 선들바람에 펄펄 날리는데,

"깽무깽, 깽깽, 깽무, 깽무, 깨갱깽."

상쇠잡이가 앞장을 서고,

"떵떵 떵더꿍 떵기떵기 떵더꿍."

장구잡이는 뒤를 따른다. 징소리는 점잖이 꽈응, 꽈응 하고 이슬이 흠씬 내린 잔디밭과 들판으로 퍼지다가 사라지는 그 여운이 웅숭깊다.

마중을 나간 솜방망이 불빛에, 컴컴한 공중으로 우뚝 솟아 너울거리며 다가오는 것은, 이등 삼등까지 무등을 선 머리 땋은 아이들이 고깔을 쓰고 장삼자락을 펼치면서 나비처럼 춤을 추는 것이었다. 터를 닦는 마당까지 올라오더니, 풍물 소리는 자진가락으로 볶아치기 시작한다.

조금 있자, 풍물 소리를 듣고 성벽이 난 작은 마을과 구엉 마을에서도, 낮에 두레로 논을 매던 야학의 학부형들이 잡이를 차려 가지고 와서는 큰마을 두레와 어울렸다.

그럭저럭 언덕 아래는 머슴 설날이라는 이월 초하루나 추석날 저녁보다도 더 풍성풍성해졌다. 각처 두레가 다 모여들어 한데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징 꽹과리를 깨어져라고 두들겨 대는데, 장구잡이도 신이 나서 장구채를 이손 저손 바꾸어 치며 으쓱으쓱 어깨춤을 춘다. 거북이라는 총각 녀석이 어둠침침한 소나무 밑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청승스러이 꺾어 넘기는 새납〔胡笛〕소리는 밤바람을 타고 바다 건너까지도 들릴 듯.

잡이꾼들은 수구를 들고 장단을 맞추어 가며, 패랭이 위의 긴 상모를 돌리느라고 보는 사람까지 현기증이 나도록 곤댓짓을 한다.

"얼시구 좋다, 어리시구."

나중에는 구경꾼까지도 어깻바람이 나서 개구리처럼들 뛰면서 마른 흙이 뽀얗게 일도록 한바탕 북새를 논다.

그 광경을 바라다보고 섰던 동혁은,

"야아, 오늘 밤엔 우리가 산 것 같구나!"

하고 부르짖으며 징을 빼앗아 들고 꽝꽝 치면서 잡이꾼 속으로 뛰어들었다. 키장다리 건배도 깃대를 꼬나들고 섰다가 그 황새 다리로 껑충껑충 춤을 추며 돌아다닌다. 다른 회원들도 어느 틈에 두레꾼 속으로 하나 둘씩 섞여 들어갔다.

아들이 동네 일만 한다고 눈살을 찌푸리던 동혁의 아버지 박첨지도, 늙은 축들과 술이 거나하게 취해 가지고 와서는,

"아아니, 내가 옛날버텀 맡어 논 좌상님인데, 어떤 놈들이 날 빼놓구 논단 말이냐."

하고 난쟁이 쇰직하게 키가 작은 석돌이 아버지의 수염을 끄두르며,

"여보게 꽁배, 어서 따러오게."

하면서 군중을 헤치고 들어선다. 그는 석돌이 아버지와 술을 먹다가 풍물 소리를 듣고,

"내 자식놈이 둘씩이나 덤벼들어서 짓는 집인데 아비 된 도리에 안 가볼 수가 있나?"

하고 기운이 나서 올라온 것이다.

박첨지는 언덕 위에 올라서서 팔을 걷고 곰방대를 내두르며 목청을 뽑아 달구질 소리를 먹인다.

"산지조종은 백두산이요(山之祖宗 白頭山)."

하고 내뽑으면, 달구질꾼들은 그 소리를 받아,

"에에 헤에라, 지경요―---"

하며 동시에 지경돌을 번쩍 들었다 놓는다.

"수지조종은 한강수라(水之祖宗 漢江水)."

"에에 헤에라, 지경요―---"

땅을 다지는 동네 사람들은 목이 쉬어 가는 줄도 모르는데, 그날 저녁 동혁은 젊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싱싱하고 씩씩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생후 처음으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