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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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INO AFFLANTE SPIRITU


사도좌와 더불어 평화와 친교를 나누는
존경하는 형제들인 총주교, 수석주교, 대주교, 주교들과
다른 지역 직권자들에게 그리고 전세계의 모든 성직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는
성서 연구 촉진에 관한 교황 비오 12세 성하의 회칙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인사와 사도적 축복을 보내는 바이다.


1. 성령의 영감을 받아 거룩한 저자들은 성서를 기록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당신의 부성적 사랑으로 이를 은혜로이 허락하셨는데 이 책들을 통하여 그 분은 인류를 “가르치시고 꾸짖으시며 바로잡으시고 의로움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셨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한 일을 하기 위한 완전한 채비를 갖추게 하시려는 것이었다.”[1] 하늘에서 내려온 이 보화를 교회는 신앙과 윤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삼는다. 따라서 교회가 성서를 사도들의 손으로부터 순수하게 이어받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보존하고 갖가지 거짓되고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보호하며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기 위한 도구로 힘써 사용해왔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세기를 두고 수많은 문헌들이 힘있게 증언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들어서 성서의 신적 기원과 정확한 해석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더욱더 큰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성서를 변호하고 보호하는 데 주력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늘 읽혀져 온, 옛 불가타 라틴어 역본에 포함된 모든 책들과 기록들을 신성한 경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2]고 선언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바티칸 공의회[3]가 성령의 영감에 대한 거짓 논설들을 단죄할 목적으로 똑같은 책들을 교회에서 거룩한 경전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재천명하였다. 그것은 이 책들이 “처음에 인간의 작업으로 기록되었다가 나중에 교회의 권위에 의해 인정되었거나 단순히 오류가 전혀 없는 계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기에 하느님을 그 저자로 삼고 교회 자체에 전수되었기 때문”[4]이다.

가톨릭 교리는 이처럼 신적인 권위가 성서의 “모든 책과 그 기록”에 부여됨으로써 그것이 그 어떤 오류에도 저촉되지 않는다고 장엄하게 선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가톨릭 저자들은 성서의 진리를 순전히 신앙과 윤리에 관한 문제들에만 국한시키고 물질 과학이나 역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과 같은 그 밖의 문제들은 지나가면서 언급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이런 문제들을 신앙과 연계시켜 생각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이런 잘못된 사조에 대해 영원히 기억해드려야 할 선임자 레오 13세께서는 1893년 11월 18일에 반포하신 회칙 [최상 섭리의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을 통하여 올바르고 적절하게 단죄하셨고 가장 현명한 규범과 규칙으로 신성한 책들의 연구를 안전하게 보호하셨다.

2. 이 때문에 본인으로서 이 회칙의 반포 50주년을 경축해야 함은 마땅한 일이다. 본인은 이 회칙을 성서 연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지침으로 생각한다. 교황 재직 시초부터4)성서 연구에 대하여 각별한 열의를 다짐했던 본인은 회칙의 반포를 이렇게 경축함으로써 레오 교황에 의해 현명하게 기초가 놓여지고 그 후계자들에 의해서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된 모든 원칙들을 재천명하고 좀더 자세하게 가르칠 가장 좋은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처럼 필수적이고 귀중한 사업인 성서 연구에 헌신하는 교회의 모든 자녀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기 위하여 오늘 이 시점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I. 성서 연구와 역대 교황들

가. 레오 13세의 업적

3. 레오 13세의 가장 우선적이고 커다란 관심은 성서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그 진리를 반대자들로부터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레오 교황께서는 성서 저자가 비록 물질계의 사물에 대해 언급할 때라도 오류가 없다고 진중한 언사로 선언하셨다. 그것은 천사적 박사[5]의 표현을 빌리자면,[6] 성서 저자가 “표상적인 언어로든, 아니면 그 당시 통용되었고 오늘날도 일상 생활에서나 대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실제적 용어로든, 감각적으로 드러난 사물에 대해 언급한” 경우를 말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자면,[7] 성서에 오류가 없는 이유는 “성서 저자들이, 또는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이러한 사물에 대한 언급, 곧 우주 만물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언급이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면 구태여 그것을 인간에게 가르치고자 아니 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8] 같은 원칙이 “관련 지식들, 특히 역사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 “이 분야에서도 비슷한 원칙에 따라 우리는 반대자들의 오류를 배척하고 그들의 공격에서 성서의 역사적 진리를 보호할 수 있다.”[9] “필경사들이 성서 본문을 잘못 베끼거나,” 또는 “어떤 대목의 실제적 의미가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성서 저자에게 그 잘못을 뒤집어씌워서는 안된다.

결국 성령의 영감을 성서의 한정된 부분에만 적용시키거나 성서 저자가 오류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이며 따라서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적인 영감은 “오류와 본질적으로 양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류를 절대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제외시키고 배척한다. 그것은 최상 진리이신 하느님 스스로 진실하지 못한 것을 말씀하실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오래되고 변함없는 믿음이다.”[10]

4. 본인의 선임자 레오 13세께서 이렇듯 장엄하게 마련하신 가르침을 본인 역시 직권으로 선포하고 모든 이가 이 가르침을 경건하게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 본인은 레오 13세께서 당대에 현명하게 요구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 가르침이 제시하고 권고하는 바에 순명해줄 것을 충심으로 당부한다. 이성주의가 만형시킨 선입견과 특히 고대 근동의 발굴과 탐색으로 인하여 새로운 어려움과 문제들이 심각하게 제기되자, 선임 교황께서는 사도적 직무에 충실하고자 가톨릭 계시의 출중한 저 원천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선익을 위해 더욱 안전하고 풍요롭게 이용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처를 취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그 원천이 어떤 식으로든 오염되지 않도록 배려하셨고 “성서를 위하여 공식적이고 항구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불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특별히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직에 불린 이들이 자신들의 신분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매일 더욱 큰 열정으로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해설해주기를” 바라셨다.

성서 연구의 장려

5. 레오 교황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의 성 스테파노 구역에 설교회 총장에 의해 창립된 성서 학교를 칭송하시고 승인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이 성서 학교로부터 성서학 자체는 적지 않은 열매를 거두었으며 동시에 더욱 큰 약속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11] 교황께서는 생애 마지막 해에 또 다른 조처를 취하셨는데, 이를 통하여 회칙 [최상 섭리의 하느님]에서 그토록 열렬하게 추천되었던 제반 성서 연구가 나날이 더욱 큰 발전을 이루게 되고 가장 확실한 보장 속에서 추진될 수 있게 되었다. 곧 교황께서는 1902년 10월 30일에 Vigilantiae라는 사도적 서한을 반포하시면서 전문인들로 구성된 이른바 “협의회” 또는 “위원회”를 만드셨던 것이다. 이 위원회에 소속된 사람들의 의무는 거룩한 본문들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더욱 철저하게 개방되어 우리 모두에게 어느 곳에서나 다가올 수 있도록 하고, 이 본문들이 오류의 온갖 숨결뿐만 아니라 온갖 지각없는 견해로부터도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이다.[12]

이 같은 선임자들의 예를 따라 본인도 이 위원회를 실제적으로 재인준하고 과거의 전철을 밟아 성서 주석가들에게 역대 교황들과 더불어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이 물려준 가톨릭 주석의 안전한 규범들을 추천하는 데에 위원회의 효과적인 활동들을 폭넓게 활용해오고 있다.[13]

나. 레오 13세의 후임자들이 남기신 업적

6. 여기서 레오 13세의 후임자들이 같은 목적 하에서 이룩한 주요 업적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그들의 업적은 선임자가 기꺼이 시작한 운동을 보완하고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비오 10세께서는“ 가톨릭 학교에서 성서를 해설할 수 있는, 진지하고 건전한 이론을 갖춘 교사들을 풍부하게 배출시키기 위해 확실한 길을 열어놓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성서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제정하시어 그것을 성서위원회에서 관장하도록 하셨다." 교황께서는 나중에 “성직자를 양성시키는 신학교에서 준수해야 할 성서 연구 방법에 관한 규범을 마련하셨다.”[14] 이것은 거룩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생들이 “스스로 성서의 힘과 목적과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할 뿐만 아니라, 품위와 실력을 갖추고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직에 종사할 수 있도록, 그리고 신적인 영감으로 기록된 책들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15] 배려였다.

마침내 교황께서는 “성서와 관련 학문의 연구를 교회 정신에 부합하여 최대한 촉진시킬 수 있도록 더욱더 높은 수준의 성서 연구 센터를 로마에 세우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성청 성서대학원을 창립하시고 동 대학원이 “최상의 교수진과 성서 탐구에 필요한 시설을 모두 완비할 수 있기를 바라시면서” 저명한 예수회에 그 운영을 맡기셨다. 그리고 나서 교황께서는 연구소의 규범과 규칙들을 일일이 마련하셨는데 그것은 레오 13세의 “구원적이고 효과적인 계획”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16]

비오 11세 : 학위의 제정

7. 이 모든 일을 본인의 직속 선임자 공경하올 비오 11세께서는 실제적으로 완성시키셨다. 여러 가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꼽는다면 “신학교에서 성서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성서학의 특수 과정을 이수하고 성서위원회나 성서 대학원이 인정하는 학위를 반드시 취득해야 한다”고 규정하신 것이다. 그분은 이 학위들이 신학이나 교회법의 학위들과 똑같은 권리와 효력을 지닐 수 있기를 원하셨다. 또한 “교회법적으로 사람들에게 성서를 해석할 책임을 맡은 은급 성직자들 가운데 성서학 분야에서 석사나 박사 학위를 얻지 못한 자는 아무도 은급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동시에 일반 수도회와 성청 수도회의 총장들, 그리고 가톨릭 교계의 모든 주교들에게 더 많은 적격자들을 성서연구소의 학원에 수학시켜 학위를 얻게 하라고 권고하셨고 스스로 이 권고의 중요성을 확인시키시기 위해 당신이 내리시는 장려금의 일부를 매년 이 목적을 위해 사용하도록 내놓으셨다.[17]

8. 비오 11세께서는 불가타[18] 라틴 번역본의 새 출판을 위한 탐구와 연구의 임무가 1907년 비오 10세의 인준을 받아 분도회 수사들에게 위임된 사실을 인지하시고 상당한 시간과 막대한 경비를 요구하는 이 “힘들고 험난한 사업”을 더욱 확고하고 안전하게 실현시키시기 위해 로마에 성 예로니모 남자 수도원을 건립하셨다. 그리고 이 수도원이 도서관과 기타 연구 시설을 손색없이 갖추고 이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19]

다. 로마 교황들의 열성

9. 여기서 본인은 선임 교황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성서를 연구하고 설교하며 경건하게 일고 묵상하기를 권면하셨는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비오 10께서는 성 예로니모회를 높히 치하하셨는데, 이 수도회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신자들에게 거욱한 복음서를 읽고 묵상하는 고귀한 습관을 배양시키는 일에 주력하였다. 교황께서는 이 수도회에 그들이 시작한 사업을 항구하게 지속할 것을 권장하시면서 그 사업을 “시대에 가장 적합하고 가장 유익한 과업”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이 사업이 “교회가 성서를 모국어로 읽는 것에 반대하거나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반대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불식시키는데”[20] 결코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간파하셨다.

베네딕토 15세께서는 위대한 성서학자 예로니모 성인의 선종 기념 1,500주년에 성인이 제시하신 원칙과 표양에 덧붙여 레오 13세와 당신 자신이 마련하신 규범과 규칙을 낱낱이 열거하셨다. 그리고 그 외 시의적절한 다른 일들과 이와 관련하여 잊어서는 안될 일들도 당부하셨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권고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교회의 모든 자녀들, 특히 성직자들은 성서에 경의를 표하고 성서를 경건하게 읽으며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

교황께서는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완덕에로 키워줄 음식을 성서 구절 안에서 찾아야 하고”, “설교의 직분을 성스럽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성서를 가장 중요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예로니모 성인의 이름을 따라 창설된 예로니모회의 사업을 다시 한번 기꺼운 마음으로 승인하셨다. 이 수도회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널리 보급하여 “그리스도인 가정이 이 책들을 빠짐없이 소지한 채 매일 이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기르도록”[21] 하는 데 공헌하고 있다.


라. 다각적으로 시작된 성서 연구의 결실

10. 그러나 성서에 관한 지식과 성서의 사용이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큰 진전을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선임 교황들의 주도적 역할과 각종 지침과 권고 때문만은 아님을 마땅히 그리고 기꺼이 고백한다. 수많은 사람의 노고가 이런 진전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서에 관해 묵상하고 탐구하고 저술했으며, 가르치고 설교하며 성서를 번역하고 보급함으로써 선임 교황들의 가르침에 열성적으로 협조하였다. 신학과 성서학에 있어서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도입하도록 요청되었던 학원들, 특히 성청 성서 대학원으로부터 수많은 성서 학자들이 꾸준히 배출되었다. 그들은 거룩한 책에 대한 강렬한 사랑으로 고취되어 젊은 성직자들을 같은 열정에 젖게 만들고 그들 스스로 얻은 학설을 이 젊은이들에게 부지런히 나누어준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기록된 언어로서의 성서연구에 몰두했고 이런 연구를 계속 추진 중이다. 즉, 그들은 본문 비평의 규칙에 따라 거룩한 본문을 수정하여 편찬하고 그 본문을 해석하고 해설하며 모국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성서 본문을 신자들에게 필독의 신심서와 묵상서로 제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서 해석에 도움을 주는 세속 학문도 연마하고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런 주도적인 작업들을 보면서, 그리고 나날이 힘차게 확산되어가는 모임들, 예를 들면 성서 협회와 국제 대회, 독서회, 복음서 묵상 협의회 등을 대하면서 본인은 성서의 이용과 지식은 물론, 성서에 대한 존경심이 앞으로 더욱더 증가되어 성서가 어느 곳에서나 영혼의 선익을 도모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이 경우 전제되는 것은 레오 13세께서 제안하셨고 그분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더욱 분명하고 완전하게 밝혀졌으며 본인에 의해서 확인되고 확장된 성서 연구의 방법론이다. 사실 이 방법론이야말로 유일하게 안전한 길임이 경험에 의해서 입증된다. 인간의 모든 사업이 그러하듯 성서 연구도 갖가지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가 다욱 확고하고 충실하게 그리고 더욱 열정적으로 위의 방법론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II. 현대의 성서 연구

11. 성서 연구와 그 주변 학문의 사정들이 최근 반세기 동안 얼마나 급속도로 변화되었는지 쉽사리 깨닫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레오 13세께서 회칙 [최상 섭리의 하느님]을 반코하실 때만 해도 팔레스티나의 어느 한곳도 고고학적 발굴 방법에 따라 탐사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종류의 탐사가 더욱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더욱 정밀한 방법과 정보가 우리에게 입수되고 있다. 이런 발굴 작업은, 많은 전문가들과 성서 연구에 몸바친 사람들이 성서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을 더욱 정확하고 완전하게 해주는 데 큰 빛을 던져주었다.

발굴 작업의 가치는 이따금 발견되는 기록 문서들에 의하여 더욱 높이 평가되었는데 이 문서들은 고대의 언어, 편지, 사건, 관습, 그리고 예배 형식에 대한 지식을 크게 넓혀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는 파피루스의 발견이다. 파피루스는 공적이건 사적이건, 특히 우리 구세주 시대의 문필 활동과 사회제도를 발견하고 탐구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정보를 상당 부분 제공해준다.

12. 더구나 성서의 고대 사본들이 발견되면서 철저한 작업을 거쳐 성서 본문이 새로 출판되었다. 교부들의 성서 주석이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조사되었고,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말하고 어울리고 글쓰는 방법이 다른 문헌들의 수많은 실례에 비추어 더욱 분명하게 규명되었다. 우리 시대가 획득한 이 모든 이점들은 신적 섭리의 특별한 계획에 따른 것으로, 이는 마치 신적 계시를 더욱 깊이 파고들고 더욱 확실하게 설명하며 더욱 분명하게 해석하기 위해 엄청나게 쏟아지는 이 지성의 빛을 부지런히 이용하도록 거룩한 문헌의 해석가들을 초대하고 인도하려는 듯이 보인다. 본인이 비록 대단히 흡족한 마음으로, 성서의 해석가들이 이런 소명에 굳은 각오로 응답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응답하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이것이 결코 회칙 [최상 섭리의 하느님]의 최후 또는 최소의 열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회칙을 반포하신 본인의 선임자 레오 13세께서는 성서 연구의 이 새로운 발전을 예견이라도 하신 듯이 가톨릭 주석가들에게 힘써 노력할 것을 명하셨고 이 노력 속에서 따라야 할 방향과 방법을 현명하게 제시하셨다.

13. 본인 역시 본 회칙을 통하여 이런 작업이 중단없이 전개될 뿐만 아니라 나날이 더욱 완전해지고 더욱 큰 결실을 맺도록 보증해주고 싶다. 이를 위해 본인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열정적으로 수고하는 일꾼들에게 신선한 동기를 제공하고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아직 무슨 일을 더 해야 하는지, 그리고 오늘날 가톨릭 주석가들이 이렇듯 중요하고 고상한 임무를 어떤 정신으로 수행해야 하는지를 특별히 밝히려 한다.

가. 원문으로의 귀환

14.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당대에 성서를 탐구하고 해설하는 임무를 맡은 가톨릭 학자에게 고대의 언어를 공부하여 원문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셨다.[22] 그러나 당시의 학계에서 히브리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많지가 않았고 그나마 불완전하게 알고 있었다. 중세에 들어와서 스콜라신학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서구 사회에 전혀 유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대의 석학들조차도 거룩한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불가타로 알려진 라틴역에 의존했을 뿐이다.

15.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시대에는 인본주의적 르네상스가 부활한 이후 그리스어가 고대와 문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친숙할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와 고대 근동의 다른 언어들에 대한 지식이 학문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다. 더구나 이제는 이런 언어들을 연구하기 위한 보조 학문도 풍부하게 개발되었고, 따라서 그것을 외면하여 성서 원문에 스스로 접근할 기회를 잃어버린 성서 학자는 경솔과 태만의 낙인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 거룩한 저자의 펜에서 흘러나온 가장 작은 표현까지도 극도의 조심과 존경심으로 다름으로써 저자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깊고 완전하게 깨닫는 것이 주석가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16. 그러므로 주석가는 스스로 성서 언어와 더불어 고대 근동의 다른 언어들을 수시로 익힐수 있도록, 그리고 언어학의 갖가지 근접 학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올바른 해석을 내릴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사실 이 같은 태도는 예로니모 성인이 실천하신 것이었는데, 그분은 당대의 학문적 여건에 최대한 성실하게 접근하셨다. 16세기와 17세기의 적지 않은 주석가들도 당대의 언어학 지식이 지금보다 훨씬 뒤떨어진 것이었겠지만 나름대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이런 태도를 견지하였고 그로 인하여 훌륭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따라서 성서 원문을 해설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영감을 받은 저자 자신이 기록한 이 원문이 옛날 것이든 지금 것이든 그 어떤 최상의 번역본보다 더 큰 권위와 더 위대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지식에 문학 비평의 실제적인 기술을 곁들이게 되면 똑같은 성서 본문의 해설 작업이 더욱 쉽고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게 된다.

본문 비평의 중요성

17. 이런 종류의 비평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적절하게 지적하셨다. 성인께서는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당부한 지침들 가운데 더욱 정확한 본문을 지참할 것을 가장 중요한 지침으로 꼽으셨다. 가장 출중한 교회 학자였던 이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면, “사본들의 수정은 성서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수정되지 않은 사본이 수정된 사본에 자리를 내주도록 해야할 것이다.”[23] 오늘날 본문 비평이라 불리면서 일반 출판물의 편집에서 매우 놀랍고 귀중한 결과를 내놓으며 이용되는 이 기술은 성서의 경우에도 적절하게 이용된다. 이것은 성서가 마땅한 존경심으로 신중하게 대해야 되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본문 비평의 본 목적은 거룩한 본문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회복시키고 펼경사들의 부주의로 생긴 부패로부터 성서 본문을 정화시키며, 덧붙임과 빠트림, 낱말의 바꿔치기와 되풀이 등 여러 가지 오류로부터 본문을 최대한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오류는 오랜 세기 동안 필사본이 전달되는 과정 속에서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 것이다.

18. 돌이켜보건대 50여 년 전만 해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본문 비평을 제멋대로 이용하여 자신들의 선입관적인 생각들을 거룩한 본문 안에 임의로 도입시키는 수가 많았지만 오늘날엔 본문 비평의 규칙이 엄격하고 확고하게 수립되었다. 그리하여 본문 비평은 이제 거룩한 본문을 더욱 순수하고 정확하게 편찬하는 데 가장 귀중한 도구가 되었고 그것의 어떤 남용도 쉽게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 교회가 초세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본문 비평의 학문적 업적을 어느 정도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본문 비평은 성서를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의심할 여지가 없이 친숙하고 자명하기 때문이다.

19. 그러므로 오늘날 본문비평학이 이처럼 고도의 완전성에 접근해 있기 때문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가톨릭 교인들이 성서와 고대 번역본을 가능한 한 시급하게 출판해내야 한다. 이런 일은 항상 쉽지 않겠지만,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영예로운 임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경우 마땅히 본문 비평의 원칙에 입각하여 거룩한 분문에 대한 커다란 존경심과 비평 기준의 철저한 적용이 무리없이 조화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본문 비평의 지속적인 작업이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글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효성이 그런 작업을 간절하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효성을 통하여 우리는 당신의 엄위하신 옥좌로부터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내듯이 이 성스런 책들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마땅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트리엔트 교령의 의미

20. 다른 한편 본문 비평의 방법에 따라 원어 본문을 편찬하여 사용하는 처사가 불가타 라틴어 역본의 사용을 추천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령[24]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공의회 의장들은 중요한 임무를 하나 맡아 지체없이 수행했는데, 그 임무란 공의회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최종적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출판될, 우선적으로 라틴어 본문, 그 다음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본문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었다.[25] 그 당시 수정된 성서 원문을 출판하겠다는 이 원의가 제반 어려운 여건들 때문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현재는 가능하기 때문에 본인으로서는 가톨릭 학자들의 통일된 노력을 통하여 더욱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간절히 희망한다.

21. 트리엔트 시노드는 “누구나 진정한 불가타 라틴어 역본을 사용하기”를 바랐는데, 이는 모두가 알다시피 라틴 교회에만, 그리고 라틴어 성서의 공적인 사용에만 적용된다. 따라서 이 바람이 어떤 의미로든지 성서 원문의 권위와 가치를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님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당시 널리 사용되었던 성서는 원문 성서가 아니라 라틴어 역본들이었고 따라서 공의회는 의당 “교회 안에서 오랜 세기를 두고 항구하게 사용되어왔던 것으로 인정된” 이 역본들을 우선적인 것으로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트리엔트 공의회가 불가타의 권위 또는 공의회 자체의 용어대로 “불가타의 진정성”을 확인해준 것은 비평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교회 안에서 합법적으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교회는 불가타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오늘 우리가 성서 본문에 적용하는 똑같은 사용 기준을 채택하였다. 곧 신앙과 윤리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오류에서도 벗어나야 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교회 스스로 시험하고 확인하는 바대로 성서 본문은 토론과 강의실과 설교에서 오류의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인용될 수 있도록 편찬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서 본문의 진정성은 일차적으로 비평적인 것이 아니라 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22. 이런 이유로 교리 문제와 관련하여 불가타의 권위는, 원어 본문들이 같은 교리를 보강해주고 확인시켜주는 것을 결코 막지 않으며, 교리 문제를 다루면서 원어 본문에 어떤 경우든지 의존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원어 본문에 의해서 거룩한 기록의 올바른 의미는 나날이 모든 곳에서 더욱더 확실해지고 분명해져 가기 때문이다.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령은 신자들의 폭넓은 이용과 선익을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성서를 모국어로, 특히 원어 본문으로부터 직접 번역하는 일을 금지시키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번역 사업은 이미 많은 나라에서 교회의 권위로부터 승인을 받아 바람직한 방식으로 시도되었다.

나. 거룩한 책의 해석

23. 가톨릭 주석가는 고대 언어의 지식을 철저히 익히고 비평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임무, 곧 거룩한 책의 진정한 의미를 발굴하고 해석하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해석가들은 자신들의 가장 우선적이고 위대한 과제가 성서 단어 자체의 문자적 의미를 뚜렷하게 밝혀내고 정의하는 것이어야 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문맥과 비슷한 구절의 비교에 힘입어 그리고 성서언어의 지식을 이용하여 해석가들은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온갖 열성으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도구들은 성서 이외의 일반 작품들을 해설하는 데 있어서도 저자의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마찬가지로 이용된다.

24. 거룩한 기록의 주석가들은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본문이 신적인 영감을 받은 본문임을 항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교회에 위임하신 대로 본문을 주의깊게 해설해야 한다. 이 같은 신중한 해설은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과 선언뿐 아니라, 역대 교황들의 해석과 레오 13세께서 회칙 [최상 섭리의 하느님][26]에서 현명하게 갈파하신 “신앙의 유추”까지도 충실하게 반영해야 한다.

주석가들은 특별한 열정으로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그외 다른 보조 학문들에 속하는 문제들만 다루는 데 몰두하지 말아야 한다. 본인이 보건대 유감스럽게도 어떤 주석서들은 이런 문제만 취급한다. 주석가들은 올바른 주석을 위해 필요로 하는 한 그런 문제들을 충분히 언급한 연후에 성서 낱권이나 본문에 포함된 신앙과 윤리에 관한 신학적 교리를 특별히 다루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해설이 신앙의 교의를 해설하고 증명하는 신학 교수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제까지도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되면 주석가들은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인의 거룩하고 가치있는 삶으로 인도해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영적 의미의 올바른 사용

25. 본인의 견해로 신학적 해설이라 할 수 있는 이런 해석을 통하여 주석가들은, 성서 주석서들 안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끌어올리고 영혼을 살찌우게 하며 내적 생활을 촉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침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리가 어떤 영적인 해석,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신비로운 해석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적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꾸준히 염두에 두고 묵상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강렬한 사랑에 몸바친 사람들의 체험이 그들의 말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교회의 항구한 전통과 위대한 교회학자들의 지침으로도 분명하게 증명된다. 성서가 온갖 영적 의미를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26. 구약성서에 나오는 말씀과 사건은 최상의 지혜를 갖추신 하느님께서 마련하시고 섭리하신 것이고, 따라서 과거의 사건들은 그분께서 새로운 은총의 섭리에 속하는 것으로 예정되었던 것들을 영적인 방법으로 미리 표상화시키신 것이다. 그렇기에 주석가는 거룩한 저자가 원래 의도하고 표현한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를 밝혀내고 해설해야 할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분명히 의도하신 거승로 믿어지는 영적 의미에 대해서도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물론 하느님 홀로 이 영적 의미를 아실 수 있고 우리에게 계시하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주 구세주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 영적 의미를 지적해주시고 가르쳐주신다. 사도들 역시 스승의 모범을 따라 자신들의 말과 글을 통하여 그 의미를 고백하고 교회의 변함없는 전통이 이를 승인하며, 마침내 가장 오래된 전례가 널리 알려진 원칙, “기도의 규범이 곧 신앙의 규범이다.” 라는 원칙이 적용되는 곳마다 이 영적 의미를 선포한다.

27. 그러므로 가톨릭 주석가들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시고 마련하신 이 영적 의미를 그분 말씀의 권위가 요구하는 바대로 신중하게 밝혀내고 해설해주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그들은 다른 표상적 의미를 성서의 본래 의미로 제시하는 일이 없도록 극도의 신중을 기해야 한다. 사실 신앙과 윤리 문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성서 본문에 표상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 본문을 더욱 자유롭게 이용하되 절제와 한도를 지켜만 준다면 특별히 설교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서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모르는 사이에 오류가 개입될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은, 특히 신성한 학문이든 세속적 학문이든 학식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탁월한 설교가나 저자가 성서의 말씀을 재치있게 이용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보다 하느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을 더 알고 싶어한다.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워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꿰뚫으며 마음의 의향과 생각을 판단하는 하느님의 말씀은”[27] 영혼을 감동시키고 영혼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인위적 기교와 인간적 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거룩한 문서는 원래 의미 그 자체로서 풍부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신적 능력을 부여받아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천상 아름다움으로 장식되어 스스로 빛과 광채를 뿜어내며, 해석가들에 의해서 그 뜻이 온전하고 정확하게 설명되기만 하면 자체 안에 포함된 지혜와 온갖 보묵들이 찬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

역대 교황들의 연구

28. 현대의 주석학적 임무와 더불어 가톨릭 주석가들은, 스스로 교황과 교회학자들과 그 외 과거의 저명한 해석가들의 성서에 관한 해설서들을 성실하게 연구한다면 대단한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이분들은 우리 시대의 성서 학자들보다 세속 학문과 언어에 대한 지식이 뒤떨어질 수 있겠지만, 교회 안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직분 때문에 천상 사정에 대한 민감한 통찰력과, 하느님의 말씀을 속 깊이까지 꿰뚫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놀라운 지성적 예리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들의 통찰력과 예리한 지성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닫고 거룩한 생활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모든 이를 비추어준다.

29. 사실 현대의 많은 저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이런 귀중한 전통적 보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주석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처럼 중요한 주제에 대해 탐구도 하지 않고 정당하게 평가하지도 않는다면 그들은 아직 필요한 작업을 다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성서 해석의 저자들을 탐구하고 그들의 저서를 열심히 연구하여 그 안에 담긴 무한정한 보화를 끄집어냄으로써 큰 결실을 얻어낼 수 있을 거싱다. 그리되면 이 저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성서를 이해했고 그 가르침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는지 점점 더 명확하게 밝혀질 것이고 현대의 해석가들은 그들의 경험을 이용하고 그들의 해석안에서 필요한 논증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30. 이런 일이 항구하게 진척되면 옛 저자들의 교리와 영적으로 부드러운 표현들과, 현대 학자들의 박학과 성숙된 지식 사이에 행복하고 실제적인 일치가 도출되어 나올 것이고 그 결과 성서 분야에 획기적인 장이 마련되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완벽한 탐구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다. 해석가들의 특수한 임무

31.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현시대가 성서를 더욱 깊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의당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역사와 관련된 문제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실들이 과거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전혀 또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욱 명확한 해석을 위해 필요한 모든 정보를 거의 대부분 입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성서 구절들은 교부들에게 너무 난해하여 이해 불가능하게 보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첫 장들의 기록은 수많은 교부들이 아무리 반복해서 설명하려 해도 여전히 어려운 대목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시편을 번역하시면서 예로니모 성인은 거기에 표현된 문자적 의미를 더욱 명백하게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번역을 되풀이하셨다.

32. 사실 다른 일반 고전이나 고문서도 최근에 들어와서야 그 의미가 밝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대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이 새로운 의문들을 제기하고 이 의문들을 바탕으로 문제가 되는 본문을 적절하게 조사해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몇몇 사람들이 이 같은 성서 연구의 제반 상황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주장하는 것처럼, 현대의 가톨릭 주석가들은 고대 그리스도교 전통이 생산해 놓은 것에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 시대는 수많은 문제들에 빛을 던져줌으로써 새로운 탐구의 정신을 고취시키고 현시대가 요구하는 실제적 자질을 갖춘 해석가를 적지 않게 배출시키고 있다.

거룩한 저자의 특성

33. 우리 시대에 새로운 의문과 어려움이 증대됨에 따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성서 주석에 새로운 방법과 도움이 주어지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상기할 만한 사실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역대 교황들과 천사적이요 보편적 박사인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성서적 영감의 본질과 효력을 이전 시대보다 더욱 정확하고 완전하게 조사하고 설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영감을 받은 저자가 성서를 쓸 때 성령의 살아 있는 합당한 도구가 되었다는 원리를 일단 설명한 후 성서 저자가 하느님께서 부여하시는 동기에 끌려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사용했으며 따라서 성서 저자가 쓴 책으로부터 누구나“저자 개개인의 성격, 곧 그의 개인적 특성을”[28] 끄집어낼 수 있다고 정확하게 간파한다. 그러므로 해석가는 거룩한 저자의 특성과 주변 환경, 그가 살던 시대, 그가 의존했던 기록이나 구전 사료, 그리고 그의 표현 양식들을 규정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최근의 연구로부터 끌어낸 어떠한 학문적 결과도 외면하는 법이 없도록 해야 한다.

34. 그제서야 누가 영감받은 저자인지, 그가 자신의 글을 통하여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누구나 알다시피 해석의 최상 원리는 아타나시오 성인께서 훌륭하게 간파하신 대로 저자가 표현하고자 했던 바를 발견하고 규명하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성서 구절들 안에는 편파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께서 무슨 기회에 그런 말씀을 하시게 되었는지 밝혀야 한다. 그분이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편지를 쓰셨는지 신중하고 성실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대목 저 대목 혼동하게 되어 저자가 의도한 진짜 의미를 놓치게 되고 만다.”[29]

표현양식의 중요성

35. 우리 시대의 문학 작품들에서처럼 고대 근동의 저자들이 전해주는 연설과 글 속에서 어떤 대목의 문자적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그들이 표현하고자 원했던 바를 문법과 언어학 또는 문맥만으로는 밝혀낼 수 없다. 해석가는 정신적으로 근동의 저 오랜 세월로 온전히 돌아가서 역사와 고고학과 인종학과 그 외 다른 학문들에 힘입어 고대의 저자들이 그 당시 실제로 사용했으리라고 생각되는 표현 양식을 규명해야 한다.

36. 고대 근동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어법을 항상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의 어법을 따랐다. 주석가는 그 어법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처음서부터 알 수가 없고 오로지 근동의 고대 문학을 주의깊게 조사한 연후에야 알 수 있다. 지난 사오십 년 동안 이전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근면한 탐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는데, 이 탐구는 아득한 저 옛날에 무슨 형태의 표현 방법이 시적인 묘사나 법률 정식과 생활 규범에, 또는 역사적 사실과 사건의 기록에 사용되었는지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똑같은 문제를 고대 근동의 백성들 중 독특한 특성을 지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편찬하는 과정에 적용시킬 수 있다. 그들의 역사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 역사가 오래된 것이고 사건들을 충실하게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 편찬의 특징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영감과 성서적 역사가 지니는 종교적 특수 목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7. 그러나 성서적 영감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도, 다른 고대 저자들의 작품에서처럼 거룩한 저자들의 글 속에서도 설명하고 이야기할 때의 고정된 어법, 분명한 관용어, 셈족 언어의 특징인 이른바 동화나 더욱 강력한 개념을 상대편 마음에 심어주기 위한 과장법과 역설법 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해서 놀라지 않을 것이다. 고대인들, 특히 근동인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 양식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거룩한 책에서 배제되지 않고 거기에 채택된 어법이 결코 하느님의 거룩함과 진리에 모순되지도 않는다.

천사적 박사께서는 이미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보편적 지혜의 말씀으로 간파하셨다. “성서 안에서 하느님께 관한 사정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어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표현되었다.”[30] 하느님의 본체적 말씀이 “죄악을 제외한”[31] 모든 면에서 인간과 똑같이 되셨기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하느님의 말씀들은 오류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인간의 언어와 똑같다. 이것이 바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께서 최고의 찬사로 칭송하셨고 성서 안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누차 주장하셨던 섭리의 하느님의 “겸손”이다.[32]

38. 따라서 가톨릭 주석가는 성서 연구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여 성서를 해설하고 성서의 무류성을 지적하고 증명하는 데 있어서 이 방법을 현명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또한 그는 거룩한 저자에 의해서 채택된 표현 방법이나 문학 양식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까지 바르고 참다운 해석을 끌어낼 수 있는지도 판단해야 한다. 주석가는 이 임무를 소홀히 할 때 가톨릭 주석에 심각한 손해를 끼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저자들이 사실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오류나 부정확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이 경우 좀더 자세히 조사해보면 저자의 이런 약점은 당시의 사회 생활에서 늘 사용하던, 그리고 실제로 통상적인 것으로 고정되어버린 고대인들의 일반적 표현양식과 그들 고유의 설화 구사법에 기인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9. 이런 표현 양식이 인간을 위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거룩한 본문안에서 발견될 때 그것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요구된다. 곧 성서의 표현 양식은 일상 생활의 일반적 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와 연관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어법과 기록법을 정확히 알게 되면 성서의 진실성과 역사적 가치를 거슬러 제기되는 많은 어려움들을 쉽게 풀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연구는 거룩한 저자의 정신을 더욱 완전하고 명쾌하게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효과적으로 하게 된다.

성서적 유물의 연구

40. 성서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 모든 주의를 집중시켜야 한다. 그들은 고대 저자들의 사고 방식과 논하고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방법과 기술을 더 잘 알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고고학 분야나 고대 역사와 문학 분야에서의 새로운 발견들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대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톨릭 평신도들은 스스로 세속적인 학문을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대의 기념비적인 유산들을 탐구하고 조사하는 데 온갖 근면과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이제까지 모호했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데 헌신한다면 그리스도교의 본 목적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41. 모든 인간적 지식은 그것이 비록 세속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무한한 지식에 제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체의 고유한 품위와 출중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지식이 하느님에 관한 사정을 더 밝게 비추어주는 역할에 초대될 때 새롭고 더욱 높은 품위, 이를테면 성별같은 특성을 얻게 된다.

라. 어려운 문제들에 대처하는 길

42. 위에서 언급한 고대 근동의 괄목할 만한 탐구, 원어 본문 자체에 대한 더욱 철저한 연구, 그리고 성서 언어와 다른 고대 근동의 언어에 대한 더욱 광범위하고 정확한 지식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적지않은 의문점들을 수월하게 풀어주었다. 이 의문점들은 레오 13세 시절에 교회 밖에 있거나 교회를 반대하는 비평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는데 성서의 진정성과 전통성, 통일성과 역사적 가치를 부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대자들에 의해서 흔히 잘못 이용되는 동일한 학문적 도구를 가톨릭 주석가들은 올바로 사용하여 가톨릭 교리와 진정한 전통의 흐름에 부합하는 해석을 제안했다. 동시에 이 해석들은 새로운 탐구와 발견에 의해서 제기되거나 옛 전통으로부터 해결을 기다리며 우리에게 넘겨진 과제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43. 몇몇 경우에 반대자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성서의 권위와 역사적 가치에 대한 신뢰도가 약간 흔들렸지만 오늘날 가톨릭 교인들 사이에서 그 신뢰도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비 가톨릭 저자들에게서조차도 신중하고 사려깊은 연구를 거쳐 현대주의적 견해를 버리고 적어도 몇몇 관점에서 더욱 전통적인 견해로 돌아간 사람들이 발견된다. 이런 변화는 대부분 가톨릭 성서 주석가들의 항구한 노고에 기인한다. 그들은 갖은 어려움과 장애에도 굴복하지 않고, 고고학과 역사와 언어학 분야에서 오늘의 지식인들이 탐구한,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적합한 지식들을 올바로 이용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어려움들

44. 그러나 모든 어려움이 아직 풀리지 않고 극복되지 않았다 해서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대에도 심각한 문제들이 가톨릭 주석가들의 마음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좌절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자연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학문이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말하자면 새로운 시작은 어느 경우건 서서히 완성되어가고 그 열매는 많은 노고 끝에야 비로소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문제들이 우리 시대에 들어와 학문의 발전에 힘입어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어 만나는 수가 있다. 따라서 지금 복잡하고 어렵기 짝이 없는 문제들이 항구한 노력으로 마침내 밝혀질 날이 오리라는 희망은 결코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45. 불만스럽게도 문제의 해결이 천천히 진행되고 성공적인 결실이 차세대에 넘겨질 것 같다 해서 조급해 하지 말고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노 성인이[33] 오래 전에 간파하신 진리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그 진리란 하느님께서 당신께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록된 성서 곳곳에 어려움을 흩어놓아 우리로 하여금 성서를 더욱 착심하여 읽고 자세히 연구하며 구원의 길에서 우리 자신의 한계를 체험함으로써 마음으로부터 하느님께 승복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셨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문제에 온전히 만족할 만한 해답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놀랄 필요가 전혀 없다. 흔히 우리가 다루는 문제들 그 자체에 모호함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우리 시대와 경험으로부터 그 문제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석 역시 대부분의 다른 중요한 학문의 경우처럼 우리의 정신이 침해할 수 없는, 그래서 어떤 노력으로도 밝혀질 수 없는 비밀의 영역을 자체 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해답의 발견

46. 그러나 이런 상황은, 왜 가톨릭 주석가가 자신의 연구 과제에 대한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에 충동을 받아 자모이신 성교회에 그토록 충실하게 헌신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풀리지 않은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씨름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는 반대자들의 공격을 반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족할 만한 해답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이 해답은 물론 교회의 가르침, 특히 성서의 무류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과 온전히 부합하는 것이고 동시에 세속적 학문들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결론과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

47. 교회의 다른 모든 자녀들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각오가 대단한 이 일꾼들의 노력을 형평과 정의로써만이 아니라 애덕으로도 평가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나아가 그들은 새로운 것은 무엇이나 새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척해야 하고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격한 논리를 혐오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교회가 반포한 규범과 법들 가운데 신앙과 윤리에 관한 교리 문제가 있는데 성서에 포함된 무수한 문제들-예를 들어 율법적이고 역사적인, 지혜에 관계되고 예언적인 문제들-과 관련하여 교도권에 의해서 그 뜻이 명확하게 정의된 성서 본문은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 역대 교황들의 가르침이 이의 없이 그 정의를 받아들인 성서 본문은 더욱 많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많은 사정들이 아직도 재능과 기술을 갖춘 가톨릭 주석가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해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주석가 개개인은 전체의 유익을 위해, 거룩한 교리의 항구한 발전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에 영광을 가져오기 위해 자신의 몫을 바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8.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이 참다운 자유는 교회의 가르침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세속적 학문의 기여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이용하게 해준다. 이 자유야말로 영구적인 결실과 가톨릭 교리의 확고한 발전을 보장해주는 조건이요 원천이다. 이것은 본인의 선임자 레오 13세께서 올바로 간파하신 그대로이다. “정신의 조화가 유지되고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이 문제에 있어서 아무리 훌륭한 연구가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34]

마. 신자들의 교육을 위한 성서 사용

49. 가톨릭 주석가들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거룩한 글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깊고 완전하게 이해되고 더욱 열렬하게 사랑받도록 하기 위해 엄처안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노고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위대한 지성인들에 의해서 수세기 동안 축적되어온 이 보물을 기꺼이 그리고 성스럽게 이용하는 것이 신자들과 특별히 사제들의 중대한 의무라는 사실을 쉽게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연구와 탐구의 자료로 삼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주신 책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간파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향해 우리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을 위한 완전한 채비를 갖추게 하기”[35]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50. 그러므로 직무상 신자들의 영원한 구원을 도모해야 할 책임을 맡은 사제들은 스스로 성서 구절을 열심히 연구하고 기도와 묵상 안에서 자기 것으로 만든 후, 천상의 보화인 이 하느님의 말씀을 강론과 설교와 권고를 통하여 부지런히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사제들은 그리스도교 교리를 성서에 나오는 문장으로 확인하고 거룩한 역사로부터, 특히 우리 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출중한 예들을 끌어내어 해설해야 한다. 그리고 극도의 조심성을 가지고 순전히 임의적이고 엉뚱한 성서의 적용을 삼가도록 해야 한다. 이런 식의 적용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용하는 것이다. 사제들은 말씀을 전하는 모든 일을 힘있고 명쾌하고 깔끔하게 수행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을 쇄신하겠다는 감동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할 뿐만 아니라 성서에 대한 최대의 존경심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1. 주교들도 자기에게 맡겨진 신자들 가운데 성서에 대한 존경심을 나날이 키우고 완성시켜나가도록 노력해야 하고, 사도적 열성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가톨릭 교인들 사이에서 성서에 대한 더욱 큰 지식과 사랑을 일깨우고 촉진시키기 위해 시작한 갖가지 계획들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교들은 성서, 그중에서도 특히 복음서를 신자들 사이에서 보급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리스도교 가정들 안에서 매일 경건하게 성서를 읽도록 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신심깊은 단체들을 애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또한 주교들은 전례법이 허용할 때마다 교권의 승인아래 성서를 현대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말과 표향으로서 전문가들에게 실제적으로 위탁해야 한다. 동시에 그들 스스로도 성서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주최하거나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 아니면 다른 연사들이 이런 일을 잘 진행시키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52. 성지의 사목자들은 천차만별의 신자들을 위해 성서에 관한 잡지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비치해놓고 적절한 방법으로 보급시켜야 한다. 이 성서 잡지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이따금 심금을 울리는 반향을 일으키며 매우 훌륭하게 출판되는데 성서의 문제들을 학문적으로 다루고 해설한 것도 잇고 이런 학문적 탐구의 결과를 사목 직무에 적용시키거나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도 있다. 성지의 사목자들은 이런 활동과, 그 외 하느님의 말슴에 대한 사도적 열성과 진지한 사랑을 바탕으로 고귀한 목적을 위해 알맞게 마련된 제반 활동들이 영혼의 치유를 효과적으로 돕게 될 것이라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신학교 교과 과정

53.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제들이 신학교 시절에 성서에 대한 실제적이고 항구한 사랑의 양분을 섭취하지 못했다면 이 모든 과업을 결코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신학교를 부성적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할 책임을 맡은 주교들은 최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요건들 중 어느 것도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학교의 성서 교수들로 하여금 성서학의 전과정을 가르치되 사제직과 하느님 말씀의 봉사직을 동경하는 젊은이들에게 성서에 관한 지식을 전해줌과 동시에 성서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교육 없이 사도직의 풍성한 열매를 기대한다는 것은 허황된 일이다.

54. 따라서 그들의 주석적 설명은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고, 진정한 배움과 확고한 신심을 촉진시키기보다 호기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계산된 어떤 지식도 배제시키면서 특별히 신학적 교리를 지향해야 한다. 교수들은 문자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며 열정을 가지고 자상하게 가르쳐야 한다. 이런 교수들의 강의를 돋고 학생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탄복한 제자들과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서를 풀이해주셨을 때에 우리 안에서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36]

55. 그리하여 하느님의 글은 교회의 장래 사제들에게 영적 생명을 위한 순수하고 항구한 원천이 되고 그들이 곧 위임받게 될 거룩한 설교 직무를 위한 음식과 힘이 될 것이다. 신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은 성서 교수들이 이 모든 일을 온전하게 수행한 후에는, 그들로 하여금 보람을 느끼고 행복한 휴식을 취하게 하라. 그들은 영혼의 구원과 가톨릭 신앙의 발전과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헌신했으며, 사도적 직무에 가장 직결된 사업을 완수했다고 확신해도 좋다.

하느님 말씀의 가치

56.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자녀들이여, 본인이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지만, 특히 슬픈 우리 시대에 더욱더 절실히 필요하다. 오늘날 거의 모든 백성과 민족이 재앙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잔인한 전쟁이 폐허 위에 폐허를, 학살 위에 학살을 거듭 쌓고 있다. 민족들 사이에 기세를 떨치고 있는 몸서리치는 증오를 보면서 본인은 극심한 슬픔을 느끼며, 적지 않는 경우에 그리스도교적 절제와 애덕의 의미만이 아니라 인간성 그 자체의 의미마저 사라져버렸음을 깨닫는다. 그분이 아니시라면 구 누가 인류 가족의 이 치명적인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겠는가?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가 완전한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말로 달아들었던 그분이 아니시라면.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십니다.”[37]

57.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자비로우신 우리 속량주께 온 힘을 다해 모든 것을 맡겨드려야 한다. 그분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야말로 공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거나 순종과 복종의 의무를 진 사람들이거나 모든 이에게 진정한 정직성과 완전한 정의와 관대한 애덕을 가르치시는 분이시다. 실제로 그분만이 호로 평화와 평온을 확고하게 가지시고 지탱하실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이미 놓여 있는 기초, 곧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38]

우리는 성서, 특히 신약성서를 더욱 부지런히 알고 묵상하는 것에 비례하여 그만큼 구원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완전하게 알고 더욱 큰 열정으로 사랑하며 더욱 충실하게 본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스트리돈의 박사 예로니모 성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기”[39] 때문이다. 그분의 다른 말씀을 들어보자. “이승의 삶에서 현명한 사람을 지켜주고 그를 인도하여 세상의 온갖 고난과 역경 한복판에서 자신의 평온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어떤 것이 있다면, 내 생각엔 우선적으로 성서에 대한 묵상과 지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40]

58. 역경과 재난에 지치고 억눌린 사람들은 성서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초월적 능력을 발견하여 고통을 인내로 참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의와 애덕과 자비의 가장 높고 위대한 모범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복음서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현존하신다. 또한 거룩한 복음서 안에서 하느님의 온총의 샘이 찢겨지고 두려워 떨고 있는 인류에게 공적으로 주어진다. 이 은총의 샘 없이 백성들과 그 지도자들은 결코 지상의 평화와 마음의 일치에 도달할 수도, 그것을 건설할 수도 없다. 마침내 복음서 안에서 모든 이는 “온갖 권세와 권력의 머리이시요”[41] “우리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지혜와 의로움과 성화와 속량이 되시는”[42] 그리스도를 배우게 될 것이다.

결론

59. 위에서 본인은 성서 연구를 시대의 요구에 적용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설명하고 추천하였다.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자녀들이여, 이제 본인은 교회의 헌신적인 자녀들로서 교회의 가르침과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는 성서 학자들에게 부성적 애정으로 그토록 숭고한 직책에 선택되고 초대되었음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모든 열성과 주의를 다하여 이미 훌륭하게 시작한 과업을 언제나 새로운 각오로 지속시켜나가 주기를 기원한다. 그것은 본인의 말 그대로 숭고한 직책이다. 성령의 영감 아래 사람들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를 철저히 연구하고 신자들에게 설명해주며 미신자들로부터 그 말씀을 변호하는 것보다 더 숭고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60. 이 영적 양식으로 해석가의 마음은 “신앙의 기념과 희망의 위로와 애덕의 권유”[43]를 지향하여 살찌고 길러진다. “이 모든 좋은 것들 한복판에서 살고 이것들을 묵상하며, 그 외 다른 것은 일체 외면하고 찾지도 않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천국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 아니겠는가?”[44] 평신도들의 마음도 같은 양식으로 길러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양식으로부터 하느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을, 완덕으로의 전진을, 각 영혼 자체의 행복을 끌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느님 말씀의 해석가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이 거룩한 과업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45] 그들은 거룩한 성서 구절들의 비밀을 더욱 깊이 캐내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 하느님 말씀의 보고를 열어주기 위해 가르치기도 하고 설교도 해야 한다.

61. 현대의 성서 주석가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과거의 저명한 해석가들이 이루어놓은 위대한 결실과 대결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과거에서처럼 현시대에도 하느님의 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유능한 박사들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의 헌신적인 노고를 통하여 신자들은 성서 안에 담겨진 온갖 보석의 화려함과 일깨우는 언어와 환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성서 주석가들은 이같이 힘들고 중요한 직책 안에서 “성서를 자신들의 위로”[46]로 삼고 약속된 상급을 기억해야 한다. “성서에 정통한 자들은 하늘의 광명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들에게 정의를 가르치는 자는 영원히 별처럼 빛날 것이다.”[47]


62. 이제 본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항구하게 묵상하는 교회의 모든 자녀들, 특별히 성서학 교수들과 젊은 성직자들과 설교가들에게 주님의 영이 얼마나 좋고 감미로운지[48] 맛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지막으로 본인은 주님 안에서 가장 큰 사랑으로 하나가 된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자녀들인 그대들 모두에게, 천상 선물의 예표요 본인의 부성적 선의의 표시로서 사도적 강복을 보낸다.

교황 재위 제5년, 1943년 9월 30일, 성서 보금의 가장 위대한 박사이셨던 예로니모 성인 축일에,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반포함.

교황 비오 12세

주석[편집]

  1. 2디모 3, 16-17.
  2. Session Ⅳ, decr. 1 ; Ench. Bibl. n. 45.
  3.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지칭함.
  4. Session Ⅲ, Cap. 2 ; Ench. Bibl. n. 62
  5.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지칭함.
  6. Ia, q. 70, art. I ad 3 참조.
  7. De. Gen. ad litt. 2, 9, 20; PL 34, col. 270 s ; CSEL 28(Sectio Ⅲ, pars. 2), p. 46.
  8. 레오 13세 Acta ⅩⅢ, p. 355; Ench. Bibl. n. 106; supra, p. 22
  9. 베네딕도 15세 회칙 Spiritus Paraclitus, AAS ? (1920), p. 396; Ench. Bibl. n. 471; supra, p. 53 참조.
  10. 레오 13세 Acta ⅩⅢ, p. 357 sq; Ench. Bibl. n. 109 sq; supra, pp. 23-25.
  11. 사도적 서한 Hierosolymae in coenobio 1892. 9. 17; 레오 ⅩⅢ Acta ?, pp. 239-241; v.p.2.
  12. 레오 13세 Acta ⅩⅩⅡ, p.232 ss.; Ench. Bibl. n. 130-141; v. nn. 130, 132; supra, p. 31 참조.
  13. 이탈이아의 대주교들과 주교들에게 보낸 성청 성서위원회의 서한(1941. 8. 20); AAS ⅩⅩⅩⅢ(1941), pp. 465-472; infra, pp. 129-138.
  14. 사도적 서한 Scripturae Sanctae, 1904. 2.23; 비오 10세 Acta I, pp. 176-179; Ench. Bibl. n. 142-150; V, nn. 143-1.
  15. 사도적 서한 Quoniam in re biblica, 1906. 3.27; 비오 10세 Acta III, pp. 72-76; Ench. Bibl. nn.155-173; V. n. 155; supra, pp. 36-39 참조.
  16. 사도적 서한 Vinea electa, 1909. 5. 7; AAS I(1909), pp. 447-449; Ench. Bibl. nn. 293-306; v. nn. 296-306; v. nn. 294, 296.
  17. 자의 교서 Biblorum scientiam. 1924. 4. 27; AAS ⅩⅤⅠ(1924), pp. 180-182; Ench. Bibl. nn. 518-525 참조.
  18. 수도원장 Aidan Gasquet에게 보낸 서한, 1907. 12. 3; 비오 10세 Acta Ⅳ, pp. 117-119; Ench. Bibl. n. 285 sq.
  19. 교황령 Inter praecipuas, 1933. 6. 15; AAS ⅩⅩⅥ(1934), pp. 85-87.
  20. Casetta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 Qui piam, 1907. 6. 21; 비오 10세 Acta Ⅳ, pp. 23-25.
  21. 회칙 Spiritus Paraclitus, 1920. 9. 15; AAS ? (1920), pp. 385-422; Ench. Bibl. nn. 457-508; v. nn. 457, 495, 497, 491; supra, pp. 43-78.
  22. ex. gr. St. Jerome, Praef. in Evang. ad Damasum; PL 29. col. 526-527; 성 아우구스띠노, De doctr. christ. Ⅱ,16; PL 34, col. 42-43 참조.
  23. De doctr. christ. Ⅱ, 21; PL 34, col. 40.
  24. Derc. de editione et usu Sacrorum Librorum; Conc. Trid. ed. Soc. Goerres, t. V, p. 91s
  25. Ib., t. Ⅹ, p. 471; t. V, pp. 29,59,65; t. Ⅹ, p. 446 sq 참조.
  26. 레오 13세 Acta ⅩⅢ, pp. 345-346; Ench. Bibl. n. 94-96; infra, pp. 15-16.
  27. 히브 4, 12.
  28. 베네딕토 15세 회칙 Spiritus Paraclitus; AAS ? (1920), p. 390; Ench. Bibl. n. 461; supra, pp. 46-47 참조.
  29. Contra Arianos, I,v 54; PG 26, col. 123
  30. Comment. ad Hebr. cap. I, lectio 4.
  31. 히브 4, 15.
  32. v.gr. In Gen. I, 4(PG 53, col. 34-35); In Gen. Ⅱ, 21(IB., col. 121); In Gen. Ⅲ, 8(Ib., col. 135); Hom. 15 in Acta Joan., ad. I, 18(PG 59, col. 97 sq.) 참조.
  33. 성 아우구스티노, Epist. 149 ad Paulinum, n. 34(PL 33, col. 644); De diversis quaestionibus, q. 53, n. 2(Ib., XL, col. 36); Enarr. in Ps. 146, n. 12(Ib., 37, col. 1907.
  34. 사도적 서한 Vigilantiae; 레오 13세 Acta ⅩⅢ, p. 237; Ench. Bibl. n. 136; supra, p. 34.
  35. 2디모 3,15.17 참조.
  36. 루가 24,32.
  37. 요한 6,69
  38. 1고린 3,11.
  39. 성 예로니모, In Isaiam, prologus; PL 24, col. 17
  40. Id., In Ephesios, prologus; PL 26, col. 439.
  41. 콜로 2,10.
  42. 1고린 1,30
  43. 성 아우구스티노, Contra Faustum ⅩⅢ, 18; PL 42, col. 294; CSEL. ⅩⅩⅤ, p. 400 참조
  44. 성 예로니모, Ep. 53, 10; PL 22, col. 549; CSEL 54, p. 463.
  45. 성 아우구스티노, De doct. christ. Ⅲ, 56; PL 34, col. 89.
  46. 1마카 12,9
  47. 다니 12, 3.
  48. 지혜 12, 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