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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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편집]

한성의 역사[편집]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이니, 일명(一名) 북한산군(北漢山郡)이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372) 임신에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와서 도읍을 정하여【남한산은 지금의 광주(廣州). 】1백 5년을 지내고, 문주왕(文周王)이 고구려의 난을 피하여 고마나루[熊津]4864) 로 옮겨 도읍하였고, 고려 초에 양주(楊州)로 고쳤다. 숙종(肅宗) 때 술사(術士) 사의령(司儀令) 김위제(金謂磾)가 옥룡 선사(玉龍禪師)의 《도선밀기(道詵密記)》를 증거로 하여 아뢰기를,
“양주(楊州)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합니다.”
하고, 일자(日者) 소부감(少府監) 문상(文象)이 따라서 그 말대로 아뢰니, 4년 기묘 9월에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땅을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신사에 시작하여 9년 갑신에 역사를 마치니, 곧 송(宋)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1104)이다. 8월에 임금이 와서 살펴보고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다. 이로부터 인종(仁宗)·의종(毅宗)·충렬왕(忠烈王)·공민왕(恭愍王)·공양왕(恭讓王)이 모두 순행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충렬왕 34년 무신에【곧 원(元)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元年). 】한양부(漢陽府)로 고쳐서 부윤(府尹)·판관(判官)을 두었고, 본조(本朝)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 3년 갑술【곧 명(明)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7년. 】10월 갑오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판사(判事)·윤(尹)·소윤(少尹)·판관(判官)·참군(參軍)을 두고, 을해4865) 2월에 비로소 종묘(宗廟)와 궁실(宮室)을 경영하여 9월에 모두 낙성되었다.

한성의 규모[편집]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4866) 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곧 동소문(東小門). 】,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곧 수구문(水口門). 】,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곧 남대문. 】,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곧 서소문(西小門). 】,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 】<bt />

한성의 구역[편집]

동부(東部) 12방(坊)【숭신(崇信)·연화(蓮花)·서운(瑞雲)·덕성(德成)·숭교(崇敎)·연희(燕喜)·관덕(觀德)·천달(泉達)·흥성(興盛)·창선(彰善)·건덕(建德)·인창(仁昌). 】
남부(南部) 11방(坊)【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대평(大平)·훈도(薰陶)·성명(誠明)·낙선(樂善)·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 】
서부(西部) 8방(坊)【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황화(皇華)·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 】
북부(北部) 10방(坊)【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장(鎭長)·명통(明通)·준수(俊秀)·순화(順化)·의통(義通). 】
중부(中部) 8방(坊)【징청(澄淸)·서린(瑞麟)·수진(壽進)·견평(堅平)·관인(寬仁)·경행(慶幸)·정선(貞善)·장통(長通). 】

관청의 위치[편집]

종묘(宗廟)【중부 정선방(貞善坊)과 동부 연화방(蓮花坊) 중앙에 있으니, 담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 】
영녕전(永寧殿)【종묘의 담 안 서쪽에 있다. 태조(太祖)가 하늘의 명[天命]을 받아 〈왕이 되매〉 왕(王)으로 목(穆)·익(翼)·도(度)·환(桓)의 네 조상을 추존하고, 종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다가, 태종(太宗)을 부묘(祔廟)하게 되매, 목조(穆祖)를 체천(遞遷)해야 하므로, 따로 이 전각을 세우고 목조의 신주를 옮겨 모시었으며, 익(翼)·도(度)·환(桓)의 세 조상도 또한 이곳에 차례로 옮겨 모시었다. 】

사직(社稷)【인달방(仁達坊)에 있으니, 둘레의 담에 소나무를 심었다. 】

문소전(文昭殿)【처음에 문소전을 창덕궁 서북쪽에 세우고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과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화상[神御]을 모시고, 또 광효전(廣孝殿)을 창덕궁 동북쪽에 세우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과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화상을 모시었다가, 그 후에 송(宋)나라 경령궁(景靈宮)의 제도에 의하여 원묘(原廟)를 경복궁 성안 동북쪽에 고쳐 지었는데, 앞에는 묘(廟), 뒤에는 침(寢)으로 하여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르고, 이름을 문소전이라 하여, 두 임금(태조·태종)의 화상을 옮겨 모시었다. 】

문묘(文廟)【숭교방(崇敎坊)에 있고, 뜰에 비(碑)가 있다.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을 두어 선비를 가르치는데, 2백 사람으로써 액수를 정하였다. 옆에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섬학전(贍學田) 1천 35결(結)을 주었고, 금상(今上) 13년(1431) 신해에 9백 65결을 더 주었다. 】

경복궁(景福宮)【백악산(白岳山) 남쪽에 있다. 】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 동쪽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전(延生殿), 서쪽 작은 침전을 경성전(慶成殿), 또 그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정사를 보는 곳. 】,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조회를 받는 곳. 】, 안문[內門]을 근정(勤政), 안 동문(東門)을 일화(日華), 동각루(東閣樓)를 융문(隆文), 서각루(西閣樓)를 융무(隆武)라 한다.

영제교(永濟橋)【근정문 밖에 있다. 】
홍례문(弘禮門)【영제교 남쪽에 있다. 】
경회루(慶會樓)【궁 서쪽 담안에 있는데, 둘레가 못으로 되어 있다. 】
동궁(東宮)【건춘문(建春門) 안에 있다. 】

궁성(宮城)【둘레가 1천 8백 13보(步)이다. 】
동문(東門)을 건춘(建春), 서문(西門)을 영추(迎秋), 남문(南門)을 광화(光化)라 한다.
【문루(門樓)가 2층이요, 누 위에 종고(鍾鼓)를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리어 때알림을 엄하게 한다. 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議政府)·중추원(中樞院)·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 각사(各司)의 공해(公廨)를 벌려 놓았다. 】

창덕궁(昌德宮)【정선방(貞善坊)에 있다. 태종(太宗) 5년(1405) 을유에 세워서 이궁(離宮)으로 삼았다. 】
인정전(仁政殿)【조회를 받는 곳. 】안문을 인정(仁政), 중문을 진선(進善), 바깥문을 돈화(敦化)라 한다.
광연루(廣延樓)【궁 동쪽에 있다. 】
수강궁(壽康宮)【연화방(蓮花坊)에 있다. 태종(太宗) 18년(1418) 무술에 왕위를 물려주고, 따로 이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 】
선양정(善養亭)【궁 남쪽 언덕에 있다. 】
혜정교(惠政橋)【중부 서린방(瑞麟坊) 북쪽에 있다. 】
운종가(雲從街)【곧 서린방과 수진방(壽進坊)의 중앙이다. 】
통운교(通雲橋)【관인방(寬仁坊) 남쪽에 있다. 】
북광통교(北廣通橋)【광통방 북쪽에 있다. 】
남광통교(南廣通橋)【태평방(太平防)에 있다. 】
큰 저자[大市]【중부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 중앙에 있다. 】
종루(鍾樓)【도성 중앙에 있다. 2층으로 되어 있고, 누 위에 종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 】
도성 좌우 행랑(都城左右行廊)【대략 2천 27간이다. 】
태평관(太平館)【숭례문(崇禮門) 안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이곳에서 중국 사신(使臣)을 접대하는데, 옆에다 별전(別殿)을 지어서 임금이 쉬는 곳으로 삼았다.】
모화관(慕華館)【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이름은 모화루(慕華樓)이니,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금상(今上) 12년(1430) 경술에 고쳐 짓고 관(館)으로 하였다. 남쪽에 네모진 못이 있는데, 낮은 담을 쌓고 버들을 심었다. 】
오부(五部)의 호수(戶數)는 1만 7천 15호, 성저십리(城底十里)의【동쪽은 양주(楊州)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4867) 에 이르고, 서쪽은 양화도(楊花渡) 및 고양(高陽) 덕수원(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 및 노도(露渡)4868) 에 이른다. 】호수는 1천 7백 79호이다.

한성의 지형과 토지[편집]

간전(墾田)은 1천 4백 15결(結)이다.
삼각산(三角山)【도성 밖 정북(正北)에 있으니,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다.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일컬었다. 】
도성(都城)의 진산(鎭山)은 백악(白岳)이다.【산정(山頂)에 사당[祠宇]이 있어서 삼각산의 신을 제사 지내는데, 백악을 붙여서 지낸다. 중사(中祀)로 한다. 】
목멱사(木覓祠)【도성 남산 꼭대기에 있으니, 소사(小祀)이다. 봉화(烽火)가 5곳이 있으니, 제일(第一)은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온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제이(第二)는 경상도로부터 온 광주(廣州) 천천산(穿川山) 봉화에 응하고, 제삼(第三)은 평안도·황해도로부터 육로(陸路)로 온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사(第四)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海路)로 온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오(第五)는 전라도와 충청도로부터 온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 봉화와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또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로부터 온 풍양(豐壤) 대이산(大伊山) 봉화에 응한다. 】무악(毋岳)【모화관 서쪽에 있다. 위에 봉화가 두곳이 있으니, 동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육로로 온 고양(高陽) 소달산(所達山) 봉화에 응하고, 서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로 온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에 응한다. 】 연희궁(衍禧宮)【무악 남쪽에 있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일찍이 “이 땅이 무악의 명당(明堂)이 되어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고 하였는데, 세종 3년(1421) 신축에 태종이 그 말을 생각하고 이궁(離宮)을 짓게 하였다. 】 우사단(雩祀壇)·동방 토룡단(東方土龍壇)·선농단(先農壇)【모두 흥인문(興仁門) 밖 평촌(坪村)4869) 에 있다. 】마보단(馬步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모두 흥인문 밖 사근사리(沙斤寺里)4870) 에 있다. 】선잠단(先蠶壇)【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4871) 에 있다.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4872) 에 있다. 】남방 토룡단(南方土龍壇)【한강 북쪽에 있다. 】서방 토룡단(西方土龍壇)【가을두(加乙頭)4873) 에 있다. 】북교단(北郊壇)·북방 토룡단(北方土龍壇)·여제단(厲祭壇)【모두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 동적전(東籍田)【흥인문 밖에 있다. 종묘·사직·산천(山川) 백신(百神)의 제미[棄盛]를 제공한다. 또 구도(舊都)의 문교(門郊)에 서적전(西籍田)이 있다. 】 한강도(漢江渡)【목멱산 남쪽에 있다. 너비 2백 보. 예전에는 사평도(沙平渡)4874) 또는 사리진도(沙里津渡)4875) 라 하였다. 북쪽에 단(壇)이 있는데,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중사(中祀)로 한다. 도승(渡丞) 1인을 두어서 드나드는 사람을 조사한다. 나루 머리[渡頭]에 제천정(濟川亭)이 있다. 】용산강(龍山江)【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군자 강감(軍資江監)과 풍저 강창(豐儲江倉)이 있다. 】서강(西江)【서소문 밖 11리에 있다. 또한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광흥 강창(廣興江倉)과 풍저 강창(豐儲江倉)이 있다. 】가을두(加乙頭)4876) 【서소문 밖 12리에 있다. 오똑하고 기이하게 빼어났고, 남쪽으로 큰 강을 임하여 벽처럼 서서, 백 길이나 되는데, 나무를 휘어잡고 아래를 굽어보면 터럭끝이 오싹해진다. 】 빙고(氷庫) 2【곧 예전의 얼음집[淩陰]이다. 하나는 두모포(豆毛浦)4877) 에 있으니, 나라 제향에 쓸 얼음을 바치고, 하나는 한강 아래 백목동(栢木洞)4878) 에 있으니, 어선(御膳), 나라 손님 접대 또는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바친다. 】 조지소(造紙所)【장의사동(壯義寺洞)에 있다. 처음에는 사대(事大)의 표(表)·전(箋)·주(奏)·계(啓)·자문(咨文)에 쓸 종이를, 전라도 전주(全州)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세밑에 바쳤는데, 많이 쓰는 것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금상 2년에 특명으로 조지소를 두어 종이를 만들었는데, 품질이 옛 것에 견주어 훨씬 곱고 좋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주와 남원 두 부(府)의 세공(歲貢) 독촉의 폐단이 비로소 없어졌다. 】물방아[水輾]【장의사(壯義寺) 동구(洞口)에 있다. 】 동활인원(東活人院)【동소문 밖에 있다. 】서활인원(西活人院)【서소문 밖에 있다. 옛 이름은 대비원(大悲院)이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의원과 무당을 두어서, 서울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곳에 모아 놓고, 죽·밥·국·약을 주며, 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 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 】 귀후소(歸厚所)【용산강 가에 있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중들로 일을 주장하게 하여, 관(棺)·곽(槨)을 만들어 팔아서 초상집의 급작스럽게 당한 일을 예비하게 한다. 】 흥천사(興天寺)【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선종(禪宗)에 속한다. 3층탑이 있고, 〈그 속에〉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다. 태조가 세우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흥덕사(興德寺)【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태조가 궁(宮)을 버리고 절을 만들어서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장의사(壯義寺)【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밭 2백 50결을 주었다. 】 봉경(封境)【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5백 40리, 서쪽으로 풍천(豐川)에 이르기 6백 리, 남쪽으로 해진(海珍)4879) 에 이르기 9백 80리, 북쪽으로 여연(閭延)4880) 에 이르기 1천 4백 70리, 동북쪽으로 경원(慶源)에 이르기 2천 1백 90리, 동남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8백 70리, 서남쪽으로 태안(泰安)에 이르기 3백 90리, 서북쪽으로 의주(義州)에 이르기 1천 1백 40리이다. 】<br ? 【영인본】 5책 613면 【태백산사고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