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복과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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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아트에서나 다방에서나 늘 은실(銀實)이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뭐 딱이 일이 있대서가 아니라 그 이름이 그저 부르기 좋대서 그렇게 부르곤 했었고, 그 여자도 싫기는커녕 도리어 즐거워하는 듯싶었다. 은실, 은실 이렇게 수없이 되뇌어 보면 은(銀)실꾸러미를 무한정 풀어내는 듯한 감미로운 어감이 느껴진다. 은실어떻소? 「실비아」같은 것보다도 훨씬 더 여운이 있고 맑은 기운이 일지 않소? 「실비아」같은 것보다도 훨씬 더 여운이 있고 맑은 기운이 일지 않소? 「실비아」라고 하니 생각나지만 은실은「실비아 시드니」와 퍽 닮았었다. 큼직하지 않은 날씬한 몸집에 겁겁한 듯하면서도 기실 착 가라앉은 눈매, 어디나 없이 애처러운 몸짓……정말 흡사. 그러나 구태여 그러한 외국 여배우를 은실과 겨누기 위해서 끄집어내잘 것 없이, 그 미목이 수려한 「실비아 시드니」의 아름다움을 꼭 두배로 했다고 상상하면 충분하다.

새하얀 순백색 옷을 차려입고 시원스럽게 나서는 그 여자의 모습은 그 누구의 눈에라도 대뜸 황홀하게 하지 않고는 못배겼었다.

동정이 긴 저고리에 주름을 바투 잡은 짧은치마, 그 밑으로 살빛 양말을 신은 휘친한 다리, 게다가 까만 에나멜의 구두는 간지럽도록 자그만하고 귀여웠다. 배경이야 어떤들 괜찮았다. 거리에 세우거나 카운터에 다소곳이 서있게 하거나 의자에 앉히거나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있거나 그 매력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하기야 색깔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변화가 많은 다채로운 옷을 주로 입는 외국여자의 모습도 그것대로 충분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고, 저 진홍빛 잠옷차림의 창녀의 모습에조차 때로는 야드러운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는 것이지 만, 그러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은실의 소복차림이라는 것은 한 번 힐끗 본 사람들의 가슴에 한평생 잊을 수 없을만큼 사무친 것을 새기게 할 것이다. 그 여자는 소복차림을 하기 위해서만 태어난 것일까, 암, 무엇보다도 그 차림이 알맞고, 이 세상이 것이 아닌 듯한 그 해맑은 모습에서 기품과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 사람들의 마음속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이런 그 여자의 소복차림도 그 여자의 목소리와 말소리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부드러운 말소리를 문득 듣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어느 하늘 나라에서 내려 오는 속삭임 소리가 아닌가 하고 돌아다보면 그것이 바로 은실의 말소리인 것이다. 이를테면 혀끝에 착착 달라붙는 무슨 음식물처럼 짤깃짤깃 입속에서 뛰놀아 싱싱한 탄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 사르르 녹아버리듯 야드러운 목소리이다. 흔히 세상사람들에게 있어 말이란 다만 일을 치르기 위한 부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예사이다. 황급히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서 톡톡 퉁명하게 한 마디 한 마디의 발음을 뱉아버리는그러한 말이란 마치 배가 고플 때 미친듯이 밥을 처넣는 것과 같은 격이어서입이나 혀의 혹사요, 소리에 대한 모독이다. 은실의 말소리를 듣고 있자면 사람의 목소리나 말이란 단순히 일을 치르기 위해서 분만 아니라, 다른 중대한 이유로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목소리는 그것이 그냥 노래이어야 하는 것이고, 말이란 가시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짐승의 울부짖음이나 기계의 잡음 소리와 하등 다를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대답소리조차가 은실의 경우에선 그때그때의 악센트와 억양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아름다운 뉘앙스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더더구나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난 그 여자의 또렷또렷한 서울말씨는 지방 사람들에게 이국적인 것으로 조차 느껴지며 일종의 그리움조차 곁들게 하는 것이다. 일상시 거칠고 어색한 말소리만을 들어온 사람으로 서 그 여자의 낭랑하고 탁 트인 세련된 말소리는 화려한 대접과 같은 것이었다. 훌륭한 어학교사를 따르는 생도들처럼 거리의 젊은 패들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그 부드러운 말소리에 황홀하기 위해서만 모여드는 격이었다.

참 어쩔 수 없이 우둔한 패들일밖에, 바보처럼 멍청히 그 여자의 입언저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삼키듯이 그 여자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 자, 이번엔 정작 흉내를 내보자고 하면 전혀 혀가 말을 들어먹지 않는 것이었다. 공작세를 흉내내는 참새라고나 할까. 어처구니 없는 자기들의 짓들을 돌이켜 보곤 비로소 안타까운 대로 허허허 웃어버리는 사람도 더러는 없지 않아 있었다.

「저 여자를 이런 좁다란 다방에 두기는 아까운걸. 아예 어학학교라도 설립해서 전임 선생으로 모셔야겠는데.」

농담이 아니라 제법 진지하게 지껄이는 작자조차 있었다.

「허지만 말야. 은실은 이러구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거거든. 스스로 일해서 살아가자는 주의인 모양이야. 서울 집에는 양친뿐 아니구 형제두 있는 눈치구. 이 근처에서두 말야, 모두 그 여자를 도우려고 굉장히들 내대는 모양이던데 실상 저 백씨(白氏)내외 같은 분들은 말야, 일생을 같이 지내자고 애걸애걸하는가 분데, 사실상 그런 훌륭한 자리조차 거들떠 보지도 않거든. 애처로운 여자 몸이면서 어찌 저토록 한결같을 수 있는 것인지 이상한 일이야. 」

「백씨같은 사람이 독점을 하다니 될 말이야. 우리 모두의 은실인데. 이런 데 있으니까 사실 우리도 늘 가까이 접할 수도 있고, 또 여러 가지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가르침을 받지 않는가. 아름다움의 표본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지 어느 한 사람에게 독점되는 것이 아니야. 그 여자의 주장이 옳은거야.」

「네가 혼자 으득뿌득 해봤자, 우린 이미 그 여자의 둘레를 도는 잡고기에 불과한거야. 자칫 멍청해 있는 새에 이미 틈사구 하나 없어. 음모의 그물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는 감쪽같이 퍼져 있었던거야 시인인 황씨는 연성 시를 써서 그 여자에게 바치고 있지 않나, 화가인 윤씨는 그 여자의 소복차림을 벌써부터 그리기 시작하지 않나, 유한마담인 임부용(林芙蓉)은 말야, 그 여자와 같이 여행이나 떠나자고 아득빠득 내대고 있는거야. 남편이구 머구도 없구 이젠 그저 은실에게만 미친가부거든. 자, 이러구 보니 남은 것은 결국 우리들뿐이란 말야. 태평하게 앉아 있을 수만 있는가 이말이야.」

들뜬 기색으로 꽤는 초조하게 지껄여대는 건달패 천만조도 실인 즉 임부용이나 시인인 황군에 못하지 않게 열을 올리고 있었고, 제법 거들어지게 내뱉는 그 얘기투와는 달리 뒷구석에선 저 혼자 속을 태우고 있었다. 은실에게 서양춤을 가르쳐주자는 것이 그의 속셈이어서 유학이랍시고 오년 동안 동경에 가 있는 동안 속속들이 배워둔 그 자랑거리인 서양 춤을 샅샅이 가르쳐주고 그김에 마음까지를 제 것으로 독차지하자는 뱃심이다쯤은 누구나가 쉬 알 수 있는 것으로서, 그러나 그런 손에 호락호락 넘어갈 은실이 아니었다.

애초부터가 그 여자는 서양춤같은 것에 까닭도 없이 열중하는측이 아니어서, 사교장도 그런 설비도 없는 바에 어쩌자는 서양 춤이냐고, 맞바로 내대면 할말이 없는 천마조였다.

저 활달한 음악에 따라서 미끄러지는 몸체의 리듬의 쾌감을 입에 신물이 나도록 지껄여 봤자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여자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난 한국춤이 배우고 싶어요. 고전적이고, 그 우아한 춤을 추면 얼마나 여유있구 편안한 기분이랴 싶어요.

그 고풍인 몸매의 움직임에야말로 탁 트인 부드러운 리듬이 있을꺼야요. 이번에 서울에 돌아가면 옛 명인에게 가서 실컷 배울 테야.」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의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마음씨에 은실을 당해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차악 몸에 배일 수 있고 우리네 성미에 맞는 조상 적부터의 향토나 유물을 사무치게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배기겠다는 투였다. 그 무엇에도 동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은 그 여자의 그 순결한 마음씨가 드디어는 부지불식간에 거리의 젊은 패들에게 끼친 영향도 지금에 와서 보면 굉장히 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훌륭한 몸매에 양장이 참 잘 어울릴 듯하다고 그 누가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그 여자는 어처구닌 없는 듯 어깨를 한번 추슬러 보이곤, 눈 한번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알맞은 옷이 있는 줄 아세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보이는 데는 그만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댁에서들은 무엇이나 좋은 것은 덮어 놓고 외국에만 있는 줄 생각하지만 어림도 없는 원시안이야요. 파랑새가 뜻 밖에도 바로 가까이 있었던 것처럼 도리어 우리 발밑에 지극히 아름다운 보석이 마구 굴러 있는지도 모른는거야요. 우선 자신을 좀더 잘 알고 아끼지 않으면 거짓부리야.」

「하지만 이 한잔의 커피는이건 틀림없이 외국 것인데.」

「아이 못써요, 그런 억지. 이를테면 이 청자(靑磁)병인데」

이렇게 은실은 작은 탁자에 놓여 있는 고대의 자기(磁器)를 가리킨다. 그 여자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값비싼 것인 할 아버지부터 가보로서 이어 내려온다고 하는 그 고려시대의 자기를 그 여자는 어디로 가나 소중히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상감(象嵌)을 박고 진사(辰砂)의 꽃무늬를 넣은데다가 양편엔 작은 손잡이가 달려 있는 길쭉한 하늘색 병이었다.

일찌기 아버지 어머니 곁을 떠나 있어 어릴 적부터 애완해 오고 있는 그 병은 그 여자로서 집을 생각하고 옛날을 그리는 길잡이로서 된 격이었다.

「이 병보다도 아름다운 형태, 우아한 기품이 대체 외국 어느 나라에 있나요? 과문이어서 못 들었는지 몰라도 알고 싶어요.」

이러고는 그 풋내기 패들에게는 말보다도 차라리 실물교육을 택하는 것이었다. 다른 다방에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어서 그 여자는 마담에게 얘기하여 여러 가지의 그 지방 음료를 내놓도록 한 것이었다. 소오다수 대신에 화채(花菜)를, 코오피 대신으로는 수정과, 홍차에 필적할 음료로는 식혜, 보리수단자 등등으로. 이건 참 그럴 듯한 착안이어서 다방은 전보다도 더욱 번창하고 풋내기 코오피통(通)을 자랑삼던 패들도 속속 수정과당으로 전향해 오는 격이었다. 건시의 단 물에 생강이나 육계의 향료로 풍미를 곁들인 음료는 코오피보다 나으면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화채만 해도 철따라 단 꿀물에 진달래 화판을 뜨게 하고 혹은 귤씨를 갈아 넣고 배나 사과쪽을 넣기도 해서, 유리잔에 그득 찬 그것은 소오다수 쯤의 풍류가 아니었다. 식혜나 수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은 주로 서울지방의 음료였기 때문에 지방사람들은 새삼 우리네가 독특하게 지녀오고 있는 그 진미에 찬사를 늘어놓고, 이리하여 이 특색으로 해서 이 집은 대뜸 온 거리의 화제거리가 되었고, 은실도 손뼉을 칠만큼 개가를 올렸었다. 이제는 다방이 아니라 화채집이라고 거리사람들은 불렀고, 꽤는 어깨가 으슥해진 마담도 이 모두가 은실의 덕이라고 되풀이 되풀이 뇌이며 더욱더 그 여자를 소중히 여겼었다.

전아한 한국 춤을 배우고 싶다는 은실은 가야금을 타는 것이 여간 솜씨가 아니었다. 유명한 여류 피아니스트인 백씨의 아내 성남 여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 여자의 기교는 매우 훌륭하여 이미 상당한 경지에까지 다다라 있다는 것이었다.

성남 여사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아니스트로 길러내고 싶었고, 그리하여 백씨는 당자의 의향만 있다면 후원회를 조직해서 그 여자로 하여금 구라파로 유학을 보내도 좋다고 기백을 세우고 있느나, 전혀 겨가루에 못을 박는 격이 어서 그 여자는 이제부터 피아노를 시작했댔자 될 리도 없겠고, 숫제 그런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고 진지하게 응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그 까맣게 반들반들한 피아노라는 악기는 마치 그 여자를 그 앞에 앉히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 같았다. 새까만 윤이 나는 육중한 입체와 연한 순백색 그 여자 모습의 대조세상에 이보다 더한 것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까만빛과 새하얀 색채의 조화! 야들야들한 손끝이 건반에 닿자 그 크고 검은 입체는 마치 그 여자에게 아양을 떨듯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었다. 손가락에 기름이 도는 데 따라 복잡한 음색은 종횡무진으로 얽히면서 그 여자를 위하여 드디어는 심장의 밑속까지를 들추어 쏟아 버리는 것이었다. 우수한 천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추호도 아쉬운 기색조차 없이 피아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애오라지 일념 가야금에만 전념하게 된 사려분별이려니와 여기서 도 고향의 고전에 대한 그 여자의 애정에는 누구나 깊이 울려오는 것이 있었다. 푹 패인 온돌방에 긴 치맛자락을 펼치고 가야금 앞에 단좌한 모습은 피아노의 경우와는 또 다른 풍류였었다. 하여간 여러말 필요없이 그 여자처럼 아름다운 것은 어떤 환경에 갖다 놓건, 어떤 것을 안배하건 그 아름다움엔 추호도 변함이 없다고나 할까. 그렇게 말할밖에 도리가 없었다.

윤씨는 가을 전람회에 낼 작품으로서 청자병을 안배한 은실의 소복 모습의 제작에 착수했으나, 시작하고 일주일이 넘어도 전혀 진척이 없어 몇번씩이나 캔버스를 옮겨 보기도 하고 심지어 화필을 내던지곤 했는지 몰랐다. 지고지미한 영혼의 싱싱한 모습을 그냥 그채로 화판에 옮기자니 여간한 곤란이 아니리라는 것은 상상되고도 남았다. 다방 일은 한 낮부터였기 때문에 그 상이 아침 시간을 윤씨는 아파아트의 그 여자 방에 캔버스를 놓은 채 다니곤 했었다. 그 여자에게 애걸애걸하다시피해서 비로소 모델이 될 것을 허락받은 터여서, 어둑신할 때부터 다닐밖에 없었다. 이러던 어느날 굉장한 일이 벌어졌었다.

층층대를 올라 그 여자의 방앞에 섰을 때 문득 거칠은 소리가 새어나오질 않겠나? 노 크를 하지 않고 잠시 그냥 귀를 기울였다. 은실의 목소리에 분명 사내의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 여자의 방으로 드나 들 수 있는 사람이란 백씨 내외 외에 임부용이 있고, 그 다음은 윤씨 자신인 줄만 알았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사나이인가 하고 의아히 여기고 있자, 은실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해졌다.

「나가 주세요. 어서요, 나가 주세요!」

분명 백씨의 목소리는 아니다. 멈칫거리고 있는 듯한, 그러 나 뻣뻣하게 내대는 사나이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안 나가면 어쩔 테야. 나두 끈기는 있으니까 언제까지라 도 이러구 있을 수 있어.」

「비겁해요. 노크도 없이 쥔도 모르는 새에 들어오다니. 안나갈테면 온통 아파아트가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겠어요.」

「난 차라니 악마가 못된 것이 원통할 지경이야. 악마만이 무엇 할 것 없이 휙 휙 낚아챌 수 있는 것이니까 말야.」

「사내들이란 왜 저렇게 제멋대로인지 모르겠어. 무엇이나 생각만 하면 다 척척 되는 줄 아는가봐. 악마는 이 세상 것이 아니구 지옥의 것이야요. 지옥에라고 가면 되겠죠?」

「정말이다, 그 목소리가 점점 더 나를 못견디게 하누나.

난 참으로 악마가 되어야겠다. 눈을 감고 이를 악물기만 하 면 되겠지. 자 이젠 악마다.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어. 무 슨 짓을 하건 내가 알 게 뭐야……」

「어마나아, 악마, 짐승, 저 좀 살려 주어……」

윤씨는 더 참지를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와들와들 떨려 오는 것을 누르며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갔다. 놀랍게도 사나이는 천만 뜻밖의 천만조였었다. 서양춤을 잘 춘다는 저 건달패였었다. 그림이 잘 진척되지 않고 며칠째 짜증만 일어나던 터여서 머리를 곱게 빗어올린 빤들빤들한 얼굴에 부딪치자 윤씨는 가슴속이 이글이글해져 그의 앞에 막아선 채있는 소리를 다해 소리를 질렀다.

「창피한 줄도 모르나. 이 자식아!」

은실은 겁에 참새처럼 윤씨의 등뒤에 숨었고, 돌연히 불벼락을 맞은 천만조는 창피함 을 억누르기 위해서 일부러 부리부리해서 역시 지지 않고 고함을 내질렀다.

「뭐야, 닷푼어치 화가. 웬 참견이야!」

「이 파렴치한 자식 보게,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거야!」

되게 뺨을 한대 맞고 그대로 물러설 천만조가 아니어서 지지 않고 달려드는 것이었고, 이리하여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드디어는 큰 싸움판이 벌어졌었다.

「너나 내나 속을 송두리째 들쳐보면 은실에 대한 마음은 마찬가지다. 다만 너희들은 그럴 듯하게 의젓한 까풀을 뒤집어 썼을 뿐이야. 이런 닷푼어치 그림이 뭐야. 이것으로 여자를 낚아채려고……」

천만조는 상소리를 있는 대로 내뱉으면서 엎치락뒤치락 방안을 뒹굴다가 급기야 복도에까지 밀려 나아갔다. 은실은 아파아트에 있는 사람들의 체면도 있어 손을 부르쥐고 덜덜 떠는 것이었지만 어느새 두 몸체는 복도는커녕 이리저리 미끄러져 드디어는 층층대를 그냥 굴러 떨어지는 소동이었다.

천만조는 머리가 깨지고 윤씨는 왼편 팔이 부러져 양편이 다 이주일 이상의 치료를 요하는 상처를 입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두 사람 다 붕대를 쳐감은 모습인 바엔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이, 이 사건은 아파아트는 물론이려니와 온 거리에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었다. 은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고 이로 해서 그 여자에 대한 존경의 열이 덜어지기는커녕 더한층 동경과 선망의 표적이 될 뿐이었다. 물론 그 여자로서는 이런 것조차 시끄러울 뿐 이어서 찬찬히 생각해 보면 차라리 세상이 어처구니 없어지는 것이었고, 그러나 그쯤은 아름다움의 특권을 향유하기 위해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주위에서 얘기하고 위로하고 하는 사이 기분이 좀 후련해지긴 했었다.

윤씨야말로 어이없는 재난에 부닥친 것이어서 귀중한 제작을 앞두고 그런 일이 벌어져 한동안은 꽤 풀이 죽어 있었으나 그러나 그냥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게다가 불행중 다행이랄까 상처는 왼팔이었기 때문에 파렛트를 책상에 놓은 채 오른손으로 화필을 잡고 다시 그림의 완성에 열중했었다.

피어린 노력의 덕택으로, 그 후에도 몇번이나 캔버스를 분지르고 혹은 화필을 내던지고 했지만 수주일의 애씀으로 놀라울만한 걸작이 완성되었다. 오랜 동안의 우울한 초조감에 서도 해방되어 윤씨는 꽤는 자신만만하게 신명이 나고 명랑한 모습이었고, 조금이라도 그림을 아는 사람들은 첫눈에 그 그림에 반하여, 「고호」보다도 싱싱하다, 힘있는 터치 「도란」을 능가한다, 칭찬의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오십호 쯤의 화폭에 은실의 소복차림의 좌상과 청자병을 그린 것으로서 구도(構圖)에는 별 기발한 점이 없으나, 힘있는 선과 싱싱하게 다가오는 인상은 꽤는 압도적인 것이고 게다가 병의 색채는 파격적일만큼 독창적인 것으로 하고 여기저기 초록색의 구사는 정말「마티스」이상이었다. 특선급 이상의 실력으로 이왕직상(李王職賞)쯤은 맡아놓은 작품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번 보기나 하자고 들른 그의 화실에는 젊은 패들이 북적북적 들끓었다.

어차피 소문이 퍼진 바엔 아직 출품전이라고는 하나 모든 사람에게 전람시키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이었고, 또 친구들의 청도 있어 반입을 이주일쯤 앞두고 십수점의 다른 작품과 함께 은실이가 다니고 있는 다방 벽에 걸어 놓기로 하였다. 현실의 은실과 그림 속의 그 여자를 바로 앞에 두고 비교해 보는 것도 한 멋이라고, 그 작은 전람회는 뜻밖으로 호평이어서 다방은 낮이나 밤이나 꽉차서 공석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소복그림은 연성 모든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하고, 그 북적북적 들끓는 속에서 여전히 부지런하게 돌아가는 은실의 모습도 한층 더 돋보여 사람들은 대체 어느 편의 은실이가 더 아름다운가고 얘기가 벌어져, 예술같은 것은 어림도 없다, 역시 실물인 그 여자 편이 백배 더 아름답다고 누구나가 결론이 한결같았고 어느 한 사람 이의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윤씨도 물론 그것을 추호도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않았고, 그 여자의 아름다움을 그리기 위하여서는 예술이라 할지라 도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이미 느꼈던 터여서 도리어 사람들의 그런 얘기를 웃음으로 넘겼다. 여하튼 전람회는 이렇게 굉장한 평판이었는데 사흘도 못가서 다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아파아트의 사건이나 이번의 이 일이나 불운한 해라고나 할까, 윤씨에겐 가엾을 만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사흘째 되는 아침 다방문을 여니 소복 차림의 그림이 벽에서 없어졌다. 「모나리자」의 실종처럼 형적도 없이 묘연했다. 아마 전날 저녁의 야밤중을 이용해서 누군가가 훔쳐간 모양이었다.

윤씨는 철렁 가슴이 내려앉으며 잠시는 그저 어안이 벙벙하였지만 전람회는 다가오 겠다, 다시 제작을 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겠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림을 찾아낼 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을 찾아헤맨 연후엔 이상하게도 실망 느끼면서도 마음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천만조의 짓일거라고 점을 찍었었으나 딱이 그렇지도 않은 눈치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결백을 얘기하는 데서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임부용이냐, 시인인 황군이냐, 아니면 다방을 거의 제집처럼 드나들며 낮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은실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젊은 패들 가운데 누구인가 하고 남몰래 순례를 시작하여 집집을 샅샅이 휘돌았는데도 그림은 나타나 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용기를 내어 거리 안을 이 잡듯이 뒤진 연후, 사오일 지나서 다행히도 그림은 찾아냈지만 정말 그것은 뜻 않았던 곳에서였다. 이 일은 그러지 않아도 골치아픈 것을 더욱 더 골치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윤씨는 눈을 꾹 지레 감고 마음속으로 울고 싶은 느낌이었다, 누구 였을까? 뜻밖에도 백씨의 방에서 나왔다. 그것도 거의 감추 듯이 피아노 뒤의 벽틈에 놓여 있지를 않겠나? 백씨 내외와 는 참 친한 터여서 그토록이나 그림이 소망이라면 전람회가 끝난 후 선사할 수도 있었겠는데 어찌 그렇듯 서글픈 결과가 되었는가?

「전람회가 끝난다면 분명 이왕가에서 갖게 될 것이 틀림 없겠고, 당신으로서도 그것이 명예라고 생각했지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린 정말 이 그림이 좋았지요. 이것 저것 가릴것 없이 무작정하고 좋았지요.」

백씨의 솔직한 고백이 윤씨로서는 도리어 흐뭇했고, 그림을 찾아낸 기쁨도 곁들였겠지만 일종의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엄숙한 감격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한 폭의 그림이 그렇게까지 소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예술가로서 더한 자랑도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은실은 그만큼이나 이편에서 열을 올려도 끄떡도 않고 있겠다, 피아노를 하라고 해도 가야금에만 열중하고 후원회를 만들어서 외국에 보내자고 해도 그리 즐겨하는 기색도 없어그러니 이젠 이대로 은실과 인연이 끊어지면 서운해서 어쩌랴 생각한거야요. 훗날에 가서라도 추억거리라도 남기자고 결국 남편과 상의해서 이 그림을 실례하기루 한거야요.」

성남 여사의 솔직한 고백으로 그 쓸쓸한 내외의 심정이 새삼 실감으로 느껴지자 윤씨 도 꽤 있음직한 일이라고 감동과 함께 수긍이 되어 그림만은 일단 전람회가 끝날 때까지 도로 찾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림을 찾아내서 다행이긴 했으나 이번엔 윤씨 한 사람뿐만 아니라 백씨 내외와 임부용과 아니 온거리의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은실이가 드디어 다방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가기로 작 정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언제라도 지리해질 수 없는 소복차림의 아가씨를 잃는다는 것은 거리의 불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집안사정으 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애초에 은실이처럼 재색이 겸비한 여자가 그렇게 시골거리에만 처박혀 있을 리도 없겠고, 언젠가는 서울에 돌아가게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누구나가 생각은 하고 있었다. 가야금으로 세상에 나서건 그렇지 않으면 그밖의 그 무엇으로라도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 일을 할 것이 틀림없다고 느끼고는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 여자가 남기고 간 크낙한 적적감 을 다시 채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슴속마다에 텅 빈 구멍이 패인거나 진배 없었다. 마치 무지개가 꺼진 직후의 멋적음처럼 사람들은 마음이 짓찢어지는 듯한 생각 이 있었다. 천마조는 며칠을 두고 금시 울음이라도 터질듯 이 상을 찡그리고 있었지마는 그냥 슬퍼하고만 있을 그는 아니었다. 재빨리 그 여자의 뒤를 좆아 서울로 올라 달렸다.

임부용이나 황군도 뒤를 좆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가 돼 있 다는 것이었고, 누구보다도 서글픔에 잠긴 사람은 백씨 내 외였었다. 서울에 가려도 세대를 가진 몸으로는 집을 비울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한 사람만 훌쩍 떠날 수도 없 는 것이었다. 은실에 대한 백씨 내외의 사랑은 서로 백중할 만큼 양편이 다 지극했었다. 윤씨는 혼자 몸이라 언제라도 그 여자를 만나러 갈 입장이긴 했지만, 그 서글픔은 누구에 게도 못지 않게 컸고, 지금에 와서는 백씨 내외에게 약속했 던 소복의 그림도 자기가 기념으로 오래오래 간직해 두어야 겠다고 혼자 생각하는 터였다.

다방은 한동안 불이 꺼진 듯이 쓸쓸했고 손님들도 훨씬 줄 어 들었지만, 다만 그 여자가 남기고 간 향토색의 선물, 화 채나 수정과 같은 음료를 찾는 사람들은 의연히 매일 끊이 지 않고 들려 은실의 여운은 마치 꽃향기나 음악의 선율처 럼 여기 저기에 아련히 떠도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 사람 들 마음속에서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남을 덕이다.

「은실이 같은 분을 이런데 그냥 처박아 우려는 게 우선 무리야요. 나도 꽤 뻗치긴 했지만 내 욕심이라는 걸 알았어. 정말 이제까지 있어준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 해요. 아마도 이 근처에선 겨눌 사람이 없을만큼 훌륭한 사람이야요. 정말 어디엔들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은 없을거야요.」

마담은 우물우물 지껄이며 머리를 갸웃이 하고 언제까지나 이것저것 술회가 끊이지 않았다. 그 여자도 누구 못지 않게 가만히 은실을 사랑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 는 사람을 잃어버린 상처로 해서 누구 못지 않게 괴로와 하 고 있었다.

「단념할밖에 없어요. 그리구 언제까지나 마음속으로 생각 해야 해요. 그밖에 어찌할 도리가 없잖아요.」

그것이 다만 한 가지의 해결책이라는 듯이 모두 무언가 치 바라 듯 그 여자의 애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소복그림 조차 없고 다방의 그림은 쓸쓸하게 퇴색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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