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 부진공론(不眞空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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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공론(不眞空論)



만물은 유(有)가 아닌 까닭도 있고 무(無)가 아닌 까닭도 있다. 만물은 유가 아닌 까닭이 있으므로 유도 유가 아니고, 무가 아닌 까닭이 있으므로 무도 무가 아니다. 무도 무가 아니므로 무는 절대적 공허(虛)가 아니고, 유도 유가 아니므로 참된 유(眞有)가 아니다. 이렇듯 유가 참된 것은 아니고 무가 자취(跡)를 벗어난 것은 아니라면, 유와 무는 명칭은 달라도 결국 의미는 하나이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유(존재)가 참된 유라면 유는 스스로 영원히 유일지니 왜 조건(緣)에 의존하여 유(존재)가 되겠는가? 또 만물이 참된 무라면 무는 스스로 영원히 무일지니 왜 조건에 의존하여 무가 되겠는가? 이처럼 유가 스스로 유이지 못하고 조건(緣)에 의존하여 유가 되는 이상, “유가 곧 참된 유는 아님”을 알 겠고, 유가 참된 유는 아니므로 유도 유라고 할 수 없다. 무도 무가 아니라고 함은 저 무란 고요히 불변함을 일컬어 무라고 하거니와, 만물이 만약 무라면 만물은 흥기하지 안항야 하는데 흐익하고 있는 이상 무가 아닌 것이다. 즉 만물은 명명백백히 조건에 의해서 흥기하기 때문에 무가 아니다. 그런즉 만법(萬法: 일체의 존재)은 과연 유가 아닌 까닭이 있으므로 유라고 할 수 없고, 무가 아닌 까닭이 있으므로 무라고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만법이 유라고 말하자니 그 유는 참된 존재(眞生)가 아니고, 무라고 말하자니 사물의 모습이 이미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모습이 나타난 것은 곧바로 무는 아니나, 참되지 않으므로 참된 유(實有)도 아니다. 그렇다면 참되지 않으므로 공이다(不眞空)의 이치는 마침내 명백해졌다. 따라서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이르기를 “제법(諸法)은 거짓 명칭일 뿐이고 진실이 아니니, 마치 환화인(幻化人: 마술로 생긴 사람, 허깨비)과 같다. 즉 환화인이 없는 것은 아니나 환화인은 참된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