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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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서로 싸우는 마음들

“아이, 무서워!”

영란은 화들짝 놀라 고양이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난데없이 나타난 은철이의 무섭게 굳어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기의 아버지 가방에서 돈을 훔쳤다던 그 소년,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는다는 그 더러운 소년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를 무섭게 쏘아보던 바로 그 소년이 지금도 무서운 표정으로 자기를 쏘아보며 서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이 무서운 소년이 바로 은주라는 계집애의 오빠라던데.’

영란은 또 한 번 ‘괜히 왔다.’고 생각하며 무척 후회를 하였다. 그러나 영란은 그리 쉽게 남에게 지는 애가 아니었다.

‘제까짓 것이!’ 하는 생각이 불쑥 영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영란이도 똑같이 매서운 눈초리로 은철을 바라보면서, 입에 물었던 껌을 “탁―” 하고 땅에 뱉어 버렸다. 그것은 마치 잔뜩 화가 돋친 고양이와 개가 서로 마주 선 것 같은 험악한 풍경이었다.

“......”

“......”

둘은 서로의 얼굴만 뚫어지도록 바라볼 뿐,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참, 재수 없어서! 내가 어쩌다 이런 델 다 왔지?”

결국 영란의 입에서 먼저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데라니, 싫으면 가면 될 게 아냐.”

“가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어린애들처럼 텃세를 하는 건가? 유치하긴!”

“유치해?”

“유치하지 않음 뭐야? 내 얼굴에 똥이라도 묻었나? 왜 사람을 무섭게 쏘아보는 거야?

영란의 독설이 만만치 않았다.

“뭐야?”

말로는 도저히 영란을 당해낼 수 없게 된 은철은 그저 주먹 쥔 손을 와들와들 떨고 있을 뿐이다.

“뭐긴 뭐야? 내 얼굴에 사탕이 묻었냐, 똥이 묻었나? 왜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는 거야? 흥, 정말 웃기네!”

“뭐라고?”

그러면서 은철은 한 발 바싹 영란의 앞으로 다가섰다.

“어디 때려 봐? 말이 막히니까, 주먹만 들면 다냐? 사내 자식들은 그저 단순해서 주먹밖에 모른다니까.”

“요것이!”

여자만 아니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은철은 지금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도저히 영란의 독설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요것이라니? 내가 누구네 집 강아지냐? 왜 함부로 남보고 요것이, 조것이냐? 못 배운 것들은 말버릇도 고약하지.”

“못 배웠다고?”

“배운 것이 뭐 있어? 내가 누구처럼 구두를 닦으러 다녔냐? 신문을 팔러 다녔나? 내가 누구처럼 돈을 훔쳤나? 이거 왜 이래?”

“음,......”

‘그렇다. 어쨌든 나는 영란이의 말처럼 남의 돈을 훔친 사람이 아니냐! 분하고 원통한 일이지만 그것을 반박할 아무런 자격도 없는 몸 아니냐! 깨끗하지 못한 이 몸, 떳떳하지 못한 몸으로 어찌 영란의 말을 반박할 수 있단 말이냐?’

은철의 두 눈에서는 주먹 같은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자꾸만 쏟아져 나왔다.

‘그래, 나는 도둑이다! 남의 돈을 훔친 무서운 도둑이다!’

은철은 그만 머리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흥, 왜 좀 더 잘난 척하시지......”

영란은 승리자로서의 쾌감을 느끼며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 때 집 안에서 마루를 내려서는 이창훈 씨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주야. 이리 나온. 언니가 왔단다. 영란 언니가 너를 보러 왔단다.”

그 순간, 은철은 얼른 머리를 들었다. 머리를 들고 잠깐 동안 어쩔 줄을 모르고 망설이다가 휙 돌아서서 집 뒤 언덕 밑으로 쏜살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영란의 말대로, 무서운 도둑이요 더러운 인간인 자기의 모습을 부인 앞에 드러내기가 은철이는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러는데 부인이 은주의 손목을 끌고 대문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영란아, 네 동생 은주다.”

그리고 이번에는 은주를 향해 기쁨에 넘치는 명랑한 목소리로 소개를 했다.

“자, 은주야. 네 언니 영란이다.”

그 순간, 용모가 똑같이 생긴 영란과 은주는 자기의 분신을 눈앞에 두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과 오늘, 두 소녀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러나 전에는 택시를 탄 부유한 소녀와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가난한 소녀로서의 감정을 가지고 마주 보았지만, 오늘은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다사로운 혈육으로서의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언니, 언니!”

반딧불이가 곱게 날아다니는 집 뒤 언덕 위에서, 또는 곤히 잠든 꿈나라에서, 요 며칠 동안 수없이 불러 본 그 한마디를 은주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불러 보았다.

그러나 영란의 태도는 너무나 차가웠다. 영란은 대답 대신 그 차디찬 눈동자로 은주의 얼굴을 한 번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영란아, 네 동생 은주란다.”

부인은 두 소녀의 손을 하나씩 끌어 당겨 서로에게 꼭 쥐어 주면서 말했다.

“영란이는 오늘부터 동생이 생기고, 은주는 오늘부터 언니가 생겼어. 같이 놀고 같이 공부하면서 언니는 동생을 귀여워하고, 동생은 언니를 따르면서 지내거라. 오늘부터 너희들은 친형제가 된 거야. 알겠니?”

“네.”

은주는 다 해져 나간 행주치마 끝으로 수줄은 듯이 입을 가리며 다사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영란은 끝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흰자위가 많이 섞인 비웃는 눈초리로 은주의 아래위를 힐끔힐끔 훑어볼 뿐이었다.

“영란인 왜 대답이 없느냐? 둘이 같이 학교도 다니고, 놀러도 다니고, 얼마나 좋은 일이냐?”

“어머니나 좋지, 누가 좋아요?”

영란의 쏘아붙이는 한마디가 마침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어머니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입술이 샐쭉해지는 것이다.

“원 애도, 입이 거칠어서 큰일이야.”

어머니는 그렇게 어물어물 넘겨 버렸으나, 은주는 정말 무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를 보면 누구보다도 반가이 맞아 줄 줄 알았던 쌍둥이 언니가 이렇게 싸늘하게 대할 줄은 정말로 꿈에도 생각 못했다.

은주는 그만 머리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그 때까지 언덕 밑 굴뚝 뒤에 숨어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은철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세 사람 앞으로 불쑥 뛰어나왔다.

“은주야, 들어가자!”

은철은 은주를 보호하듯이 자기 앞으로 끌어안으며 부인을 향해 힘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은주에게는 언니가 없어도 좋습니다! 은주는 친어머니가 없어도 좋습니다! 친어머니가 없어도, 언니가 없어도, 은주는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친부모님이 없어도 은주는 학교에 다닐 수 있습니다! 아니, 학교는 비록 못 다닐지 몰라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은주는 저런 거만한 언니가 수백 명 있어도 당해 내지 못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은철은 은주의 손목을 잡아끌며, 영란의 어머니를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은주야, 들어가자! 빨리 집으로 들어가자! 은주가 비록 누추한 널빤지 집에서 살망정, 2층 양옥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건방지게 자란 저런 애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그 한마디를 남겨 놓고 은철은 은주의 손목을 끌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대문을 쾅 닫아 버렸다.

“흥, 큰소리만 탕탕 치면 제일인가? 도둑질하는 버릇이나 고쳐 봐! 돼먹지 못한 것이......”

영란의 비수 같은 말이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