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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무지개 뜨는 언덕/4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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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소매치기 소년

영란의 지갑을 훔친 소년은 벌써 행렬에서 빠져나간 후, 태양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저녁 거리를 줄달음치고 있었다.

“앗, 저 자식 소매치기다!”

민구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무서운 기세로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뭐, 소매치기?”

구두 닦는 소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 민구 아냐?”

은철이도 후딱 일어섰다.

“은철아! 영란이...... 영란이 지갑을...... 은주의 언니......”

민구는 소년의 뒤를 재빨리 따라가면서 그렇게 외쳤다. 영란이도 민구의 뒤를 쏜살같이 따라가고 있었다.

그 순간, 은철은 자리에서 확 일어나 민구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철은 단 열 걸음도 못 달리고 우뚝 발걸음을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영란이...... 음, 영란이......”

은철은 멈추어 선 채 입술을 꼭 깨물었다. 피가 나도록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영란의 돈지갑과 이 서은철이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생각이 회오리바람처럼 은철의 가슴을 쳤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반대로 은철의 발은 다음 순간 땅을 박차면서 민구의 뒤를 질풍처럼 따라가기 시작했다.

영란의 지갑을 빼낸 소년은 청계천 다릿목을 향해 도망치고 있었다. 소년의 뒤를 민구가 따르고, 민구의 뒤를 영란이가 따르고, 영란이의 뒤를 은철이가 따르고 있었다.

다리 이편 쪽 청계천 시장은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소매치기 소년은 흘끗흘끗 뒤를 돌아다보면서 다리를 건너자 오른편으로 돌아서서 청계천을 끼고 관철동 쪽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민구의 다리는 소년보다 빨랐고, 은철이는 민구보다도 빨랐다. 영란은 민구의 뒤를 따라가다가 숨이 차서 그만 오똑 발걸음을 멈추면서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 은철이가 아닌가!’

영란은 놀라며 입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아, 은주의 오빠......’

영란은 커다란 목소리로 불러 보고 싶은 충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왠지 영란의 입은 그 한마디를 좀처럼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은철은 휙 바람을 일으키며 멍하니 서 있는 영란의 옆을 지나갔다. 지나갈 때, 은철은 영란을 한 번 흘끗 쳐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영란은 뭐라고 헤아릴 수 없는 감동의 마음을 한아름 안고 다시 은철의 뒤를 따라갔다.

수표동 다릿목에 다다랐을 무렵, 민구는 거의 소년의 등 뒤까지 육박했다.

“저 자식 잡아라! 저 자식 도둑놈이다!”

민구가 그렇게 고함을 치는 바람에 다릿목에 앉아 있던 커다란 구두닦이 소년 하나가 후딱 머리를 돌리며 몸을 홱 일으켰다.

“응? 뭐야, 뭐? 누가 도둑놈이야?”

앞에 달려오는 소년과 그를 쫓아오는 민구를 무심코 바라보던 구두닦이 소년은 엉겁결에 두 손을 쫙 벌리고 길 가운데 우뚝 버티고 섰다가 소매치기 소년을 꽉 붙잡았다.

“누가 도둑놈이이? 누가?”

구두닦이 소년은 소리치다가 소년의 뒤를 따라오는 민구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 너는 민구가 아니냐?”

곰보 자국이 얼굴에 가득한 그 소년은 쭉 찢어져 더욱 불량스러워 보이는 눈으로 민구를 무섭게 흘겨보았다.

“아, 너는 봉팔이......”

민구가 따라가서 소매치기 소년의 팔을 움켜잡으며 외쳤다. 소매치기 소년을 붙잡은 사람은 틀림없는 깨알곰보 봉팔이였다. 봉팔이는 경찰의 눈을 피해 이런 외딴 곳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 봉팔이다. 너 오늘 잘 만났다.”

봉팔이는 소매치기 소년을 자기 뒤로 따돌리면서 민구 앞에 우뚝 나섰다. 그 바람에 민구는 약간 겁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넌 좀 가만있어. 너하고는 있다 이야기하고...... 이 자식이 남의 돈지갑을 훔쳤다!”

민구는 봉팔이 뒤에 서 있는 소매치기 소년 앞으로 달려들며 말했다.

“너, 지갑 내놔.”

바로 그 때, 은철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 넌 또 은철이가 아니냐? 흥, 오늘 너희들 여기서 잘 만났다!”

봉팔이는 민구를 내버려두고 이번에는 은철이 앞에 딱 버티고 섰다.

“그래, 나 은철이다! 네 말대로 마침 잘 만났다!”

그러면서 은철이도 봉팔이와 마주 버티고 섰다. 봉팔이는 은철의 아래 위를 한번 훑어보면서 소리쳤다.

“흥, 건방진 자식! 그래, 네가 그렇게 딱 버티고 서면 어떡할 테냐?”

그 때 은철이가 약간 어조를 낮추어 말했다.

“봉팔이 넌 잠깐 좀 가만있어. 너하고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 난 지금 좀 바빠. 저 자식이 남의 지갑을 훔쳤어.”

그러면서 은철이는 소매치기 소년을 향해 달려들며 말했다.

“너 지갑 내놔! 빨리 내놔라!”

“무슨 지갑을 내놓으라는 말이야?”

민구와 마주 섰던 소년이 은철이 앞에 딱 버티고 서며 대들었다. 그러는데 영란이가 할딱할딱 숨이 하늘에 닿을 듯 뛰어왔다.

“아, 저 자식이 내 지갑을......”

숨이 가쁜 나머지 영란은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어쭈, 요건 또 은주 계집애가 아냐? 가족 총출동이로구나!”

봉팔이는 영란이를 은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뭔가 눈치를 챈 듯, 말을 바꾸었다.

“어라, 어딘가 은주와는 조금 다르다? 네가 은주의 쌍둥이 언니나?”

봉팔이는 그제야 그 소녀가 은주가 아닌 것을 알아차렸다.

그 때, 소매치기 소년이 앞으로 나서더니 화를 벌컥 내며 도리어 영란에게 대들었다

“그래, 누가 네 지갑을 훔쳤다는 말이냐? 사람을 똑똑히 보고 말을 해!”

“네가 내 지갑을 훔치지 않았니? 남의 단추까지 끌러 놓고......”

영란이 당황하여 말끝을 흐리자, 소매치기 소년은 더 큰 소리로 윽박질렀다.

“미쳤구나! 내가 언제 네 지갑을 훔쳤다고 협박이냐?”

그 때 봉팔이가 쑥 나서며 신이 나서 빈정거렸다.

“흥, 난 도둑이라기에 남의 가방에서 돈뭉치를 훔치는 은철이 자식인 줄만 알았더니, 뭐? 네가 저 계집애의 지갑을 훔쳤어?”

그 순간, 은철이는 봉팔이에게로 휙 얼굴을 돌리다가, 지금 봉팔이를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소년을 향했다.

봉팔이의 그 말 한마디에 영란이도 비로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은철이를 경찰에 고발했다는 봉팔이가 바로 이 녀석이었구나!’

영란은 부르르 몸을 떨며, 봉팔이가 저 소매치기와 한패일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