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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만필/악성의 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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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 헨델의 시대가 지나가자, 유럽의 악계는 주잔(週殘)한 가을빛이 깊어져서 바야흐로 동한(冬寒)의 적요(寂寥)가 부질없이 석일(昔日)의 영화를 회상시키려 할 제, 한줄기의 찬연한 광채가 춘서(春曙)의 길보(吉報)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그는 곧 대악성 하이든의 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1732년에 헝가리의 국경에 가까운 오스트리아의 소촌(小村)에서 문지기의 아들로 탄생하였으니 행운의 신은 그로 하여금 17세가 되던 때에 고향 산천을 이별하고 음악가의 도성 비엔나로 향하게 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여러 귀족들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일심전력으로 작곡에 몰두하였으니, 그때의 하이든의 주택이야말로 그의 일대의 명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산출한 기념할 만한 집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 집에서 일생을 보내었으며, 1809년 5월 31일 최후의 안식을 구한 집도 또한 이 집이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최후를 장식할 만한 눈물겨운 애화(哀話)를 빚어낸 집도 역시 이 집이라면, 이 집은 하이든 자신만의 기념할 만한 집이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도 또한 기념할 만한 집이 될 것입니다.

1809년이라면 나폴레옹의 군대가 비엔나 시를 쳐들어오던 해니, 전시(全市)를 엄습한 공포와 혼란과 암흑은 하이든의 오막살이의 정원에까지도 찾아왔던 것입니다. 죽음이 나날이 가까워오는 이때에 하이든은 병상에 누운 채로 이 포연의 굉성(轟聲)을 들으면서, 근친자들을 자기의 병실에 모아놓고 자작의 오스트리아 국가를 세 번이나 피아노로 연주한 후, 5일이 지나서 그는 장서(長逝)했던 것입니다.

전화(戰禍)가 이 땅에서 떠나가고 국민들의 수미(愁眉)가 겨우 펴지려 할 때 악성 하이든의 부고가 또다시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것이니, 그의 생전에 광휘 있던 예술이 한창 더 만인의 입에서 찬송됨과 동시에, 그의 최후를 장식한 애국적 삽화까지 선전되자 전화에 가뜩이나 앙분된 인민은 피가 끓어오름을 금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이든의 부고는 비엔나 인에게 뿐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에게 새로운 놀라움을 전했으니, 그것은 곧 하이든의 사후 그의 침실을 개방한다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실이 광포(廣布)되었던 까닭입니다.

하이든의 침실! 이 소문은 전광석화와 같이 구주의 천지에 퍼졌습니다.

동시에 그 침실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세인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초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의 침실에는 그의 자작의 명곡 〈46번의 카논〉의 초고가 벽에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하이든은 그의 생전에 자기 친우를 보고 이같이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빈곤한 사람이다. 벽에 걸어둘 그림 같은 것은 살 형편이 못 되는 까닭에, 나는 나의 수제(手製)의 장식품으로 벽화를 대신하련다. 이런 것을 하는 사람이 세계 중에도 아마 나 한 사람밖에는 다시 없을 것을 생각하면 진귀하지 않음도 아니다.”

이것은 사실로 진귀무쌍한 일이 된 것입니다. 하이든 자신이 위안을 받기 위하여 고안해낸 이 벽식(壁飾)은 그의 사거(死去)와 함께 세계의 진보(珍寶)가 된 것이요, 그의 침실이야말로 음악 순례자들의 예배당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 하이든(Franz Joseph Hayden)은 1732년 3월 31일에 오지리(오스트리아)의 한촌 로워에서 탄생하야, 1809년 5월 31일에 77세의 고령으로 비엔나에서 영면했읍니다. 그는 교향악의 부(父)요, 쏘나타 형식의 완성자로, 음악 사상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사람이여, 세계 각국의 국가 중에서 가장 예술적이라고 하는 오국(墺國) 국가는 역시 그의 손에서 작곡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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