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총서
○燕山君諱㦕, 成宗康靖大王長子, 母廢妃尹氏, 判奉常寺事(起畎)〔起畝〕之女。 以成化丙申十一月初七日丁未生。 癸卯二月己巳, 冊封世子, 遣領中樞韓明澮等, 請命于京師。 五月丁酉, 帝遣太監鄭同等賜勑封。 少時不好學, 東宮僚屬有勸戒者, 深銜之。 及卽位, 宮中所行多不善, 外庭猶未之知。 晩年, 荒悖淫縱, 大肆虐政, 誅殺大臣、臺諫、侍從, 殆盡。 至有炮烙、斮胸、寸斬、碎骨飄風之刑, 遂廢徙喬桐, 封燕山君。 居數月, 以疾終。 年三十一, 在位十二年。
연산군(燕山君), 휘(諱)1) 융(㦕)은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2) 의 맏아들이며,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 판봉상사시(判奉常寺事)윤기견(尹起畎)의 딸이 성화(成化) 병신년4) 11월 7일(정미)에 낳았다. 계묘년5) 2월 6일(기사)에 세자(世子)로 책봉(冊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명회(韓明澮) 등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5월 6일(정유)에 황제가 태감(太監)6) 정동(鄭同) 등을 보내어 칙봉(勅封)을 내렸다. 소시(少時)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매,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즉위하여서는, 궁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지 못했으나,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晩年)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7) 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