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중 전회를 앞두고 외분 내열의 중국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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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장개석씨는 남창을 떠나서 노산을 향하여 가고 행정원장 왕조명(王兆明)씨 재정부장 공상희(工詳熙)씨 고시원장 대천구(戴天仇)씨 등도 일간 노산에 가서 복잡다단한 내치외교의 제중요현안에 대하여 중대한 회의를 할 모양이라는데 이 회의에 참가할 이로는 호북수석 석장상(席張群)씨와 북중정권의 교배자 황부(黃 )씨도 있다.

금차 회의의 내용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북중의 제현안 해결과 대일 일반적 외교방침 제오차전국대표대회대책 등등을 표면에 내세우나 서남파에 대한 회유책이라든지 친구파의 동정과 변강중국의 분열이며 강서복건의 홍군세력의 격증 등등이 그들의 금차 회의의 중심문제가 아닐수 없는 만큼 이것을 수조검토하기로 한다면 북중제현안의 해결을 위한 소위 대연회상부터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거월 말경 황부씨의 특사로 대련에 왔던 은동씨와 일본의 관동군당국간에 열렸던 정전협정폐기문제는 거년 오월 삼십일 당활에서 체결한 정전협약을 파기하려는 것인데 당시 중국은 천진 북평이 함락된다면 그것은 장개석의 하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특사 황부를 북상시키는 한편 {華北局勢如斯 誰敢談妥協}이라는 변해를 시키며 국내공책의 폭등에 도산하는 반식민지 중국자본가에게 평화를 주는 대상으로 장성 이외의 통치권을 포기하는 것쯤은 큰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일면저항 일면교섭}이라는 장기행진인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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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메리카 자본을 중심으로 한 중국 시장에 있어서이 열국의 대립은 이 반식민지지배계급의 일반적 주관적인 애국심을 선동하여 마지안었고 정부는 이 애국적인 타협을 국민에게 역으로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년이 지난 금일 통우송차를 교환조건으로 이 협정을 폐기하려는 의도이였으나 그것은 실패인 동시에 북중의 국면은 여하한 회의를 할지라도 황부의 현금의 처지로는 도저히 해결이 될 것 같지도 안타.

이러한 정세에 있는 중국의 대일 일반적 외교방침의 중요한 부분은 북중국세에 관련되여있는 것이니만치 국세의 담당자인 황부씨가 대연회상으로서 얻은 선물을 흥구한 민중의 앞에 내여 놓지 못할 때 그가 은퇴를 근친에게 누설함도 무리가 아닐것이며 요행(僥倖)히 다른 국면을 타개하야 북중문제의 기분을 해결한다할지라도 그것은 헛되게 구미열강의 대립을 첨예케 할 뿐이고 대일 일반적 외교 방침에는 하등의 진전을 볼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적어도 현재의 일중 외교의 일반적 방침을 볼 때 무엇보다 먼저 고려에 떠오르는 것은 구 임관계이며 이 구임관계는 황부씨가 아무리 북중에서 남경정권을 대변한다 할지라도 자기 영역이외에 속하느니 만치 하등의 힘을 갖지 못한 것이며 보다 더 구임문제를 담임할 것은 중국건설은공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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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의 중국건설은공사는 겨우 발기인회를 연데 지나지 않으나 벌써 주(珠)는 다 모집되었으며 정식성립도 이 8월이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의 주요은행 및 경제계가 창변(創辨)한 것으로서 그 조직의 동기자본모집 관리의 권한이 완전히 중국인에게 장악되어 금후 중국경제건설에 일대 공구인 동시에 해외경제와도 연결을 취한다고 한다.

그래서 송자문(宋子文) 자신이 상해 일본총사관당국의 공식은 아닐망정 {구임도 구임이겠지만 은공사에 먼저 협동하지 않겠느냐}고 권유도 있었고 일본 영사당국이 이것을 거절한 것도 사실이나 이로 보아도 중국자본가들의 일본의 구임에 대한 일반을 알기에 어렵지 않다. 하물며 은공사는 라이히만을 중심인물로 연맹의 대중원조위원회 송자문을 영수로 한 중국경제위원회 이 또한 송자신이 창변에 분주한 중국은공사 등등 중국의 경제적 부흥의 삼위일체의 한 존재이니만치 문제는 의연히 장래에 남게 되고 따라서 장왕의 대일외교에 대한 비난은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하여 쟁찰하게 반복되는 것이며 그것은 장의 독재를 공고케할 11월 전국대표대회에 적지않은 암영을 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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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오차 전국대표대회는 작년 11월에 개최될 예정의 것으로 서남파에 속하는 중앙위원들의 반장적 태도로 인하여 그 전도가 매우 비관되든차에 때마침 복건동란으로 유야무야에 흐지부지 유산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제5차 전국대회는 그 본질이 蔣의 독재를 공고히 할려는 것인만큼 절대항일 당 옹호 蔣독재반대를 스로-간으로 하고 있는 남중몬-로주의의 陳濟棠을 중심으로 하고 광서 복건 남운남관주 등의 실력파와 胡漢民씨 등의 소위 정통파 국민당 정객들의 결합으로 된 서남세력이 금차의 노산회의에 참가치 않을 것은 명약관화이며 11월의 오전대회를 계기로 조상(俎上)에 오를 헌법초안 즉 蔣씨 독재의 기본공구인 헌법의 심의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육박하여 12억에 가까운 내외임의 부담에 천식하는 민중들의 목전에 그 독립의 체면을 보이려고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경로가 아니면 안된다. 하물며 작금의 소식은 벌써 서남의 원로 세력 양파가 모두 노산 회의의 초청을 일축하고 蔣씨 독재를 통격하고 있는데랴. 가령 이러한 국면은 그 대상의 미묘한 인적 관계를 이용하여 당분간 타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蔣汪의 합작에 무엇보다 큰 암초는 소위 구미파들의 동태 여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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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의 외교가들 중에 그 세계적 가치는 어떠하였든 중국내에 있어서 가장 화형이고 원로이고 민중들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는 외교가들의 이름을 치면 누구보다도 안혜경(顔惠慶) 고유균(顧維均) 왕정연(王正延) 호세탁(胡世鐸) 등등이며 이들이 모두 소위 구미파인 동시에 구미파의 정객으로 절서재벌의 대표자인 송자문(宋子文)이 중국은공사를 창립하여 라이히만과 손을 잡고 그 배후에 버티고 있는 것이며 손과(孫科)씨가 루-쓰벨트 대통령을 하와이에 회견한 것이라든지 때를 같이하야 이상의 중요한 제외교사신들이 청도에 회합한 것은 중국의 외교관계가 확실히 전향기에 들어선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장왕(蔣汪) 양씨의 친일외교에 감심치못하든 민중들이 왕년국연에서의 인기(우상적이나마)를 이들에게 새로히 기대한다는 것은 요사히 새삼스러히 남중에 있어서 배×단체가 족생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장왕(蔣汪)의 합작은 중국식으로 말하면 구, 일팔이후의 대일관계도 한가지 이렇다할 만한 해결이 없을뿐아니라 더욱 여가치 못한 것은 변강 문제이니 영국무관의 말 끝에 춤을 추는 마중영(馬仲英)은 남강카수칼을 독립시켰다가 지금은 성주 석성세재(席盛世才)의 통치하에 중앙정부와는 거의 인연이 없는 상태이며 달뢰나마(達賴喇 )의 사후 서장 문제는 손도 대기전에 영국의 대서장 정책은 청해의 목양지로 진출함을 잠간 보유하려는 것은 운남성 반공의 확산지대를 점령하는데 따라 서남중국의 교통망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것은 불국이 일억오천만뿌란이라는 막대한 자본을 들여 전월철도( 越鐵道)를 건설한 것과는 좋은 대조이거니와 최근의 내몽자치 등은 삼민정권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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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 오천이 복건성의 수구방면을 일격에 점령하고 복주 상류 십이리 지점에 있는 백사를 또다시 점령하였는데 이 부대는 제3제17 제19군으로서 본래부터 전투력이 강하기로 유명할뿐 아니라 금번의 진출에는 민병의 협력을 얻어 그 세력이 매우 맹렬하다고 전한다.

그래서 복주 함락을 극도로 공포를 느끼는 모모국들은 군함을 당지로 급파하였고 중앙군은 이에 대전하기에 벌써 일만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중국측의 소식은 공군이 이미 후퇴하고 있다고 전하나 4일 상구를 공군4,5천명이 다시 점령한뒤는 동성도 위기가 목첩에 박두하였다고 한다.

6,7년의 긴 세월과 수십억의 금원과 삼백만의 연인원을 동원한 과거를 정산하기 위하여 장(蔣)은 전세계의 피(彼)의 고객에게 선서한 토벌은 물론 공격의 방법은 더욱더 참혹하였다. 수많은 탕크가 사용되고 공중폭격에 전력이 경주되었다. 작년부터는 영도 등지는 하루에 백감픈드폭탄을 오십발이나 터트리는 것쯤은 예사이였다.

장(蔣) 자신이 남창의 진두에서 오십만의 정병과 모든 근대과학의 정쇄를 대표하는 무기를 사용한 것은 실로 장성전선의 일중전에 사용된 무기의 차이와는 말도 할 수 없는 것이였건만은 오늘날 이와같은 대부대의 행동이 복주같은 도시를 향하여 진격되는 것은 비록 복주를 영구히 점경하지 못하드래도 공군 자신에 어떠한 의의가 있다는 것보자 장(蔣)씨 자신에 와야할 날이 오는 것인 동시에 그의 고객인 열국들이 군함을 보내서 복주를 수비하는 것쯤은 예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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