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유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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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민루(樂民樓)[편집]

함흥 만세교(萬歲橋)와 낙민루(樂民樓)가 유명하다더니, 가축년 8월 염사일(念四日) 낙(洛)을 떠나 9월 초이틀 함흥을 오니, 만세교는 장마에 무너지고 낙민루는 서편으로 성 밖인데, 누하문(樓下門) 전형은 서울 흥인(興仁) 모양을 의지하였으되, 둥글고 작아 겨우 독교(獨轎)가 간신히 들어가더라.

그 문을 인하여 성 밖으로 삐져 나오게 누를 지었는데, 2층 대(臺)를 짓고 아득하게 쌓아 올려 그 위에 누를 지었으니, 단청과 난간이 다 퇴락하였으되 경치는 정쇄(精灑)하여, 누 위에 올라가 서쪽을 보니 성천강(城川江)이 그 크기가 한강 만하고, 물결이 심히 맑고 조촐한데, 새로 지은 만세교 물 밖으로 높이 대여섯 자나 솟아 놓였으니, 거동이 무지개 휜 듯하고, 길이는 이르기를 이편으로서 저편까지 가기 5리라 하되, 그럴 리는 없어 3, 4리는 족하여 뵈더라. 강가에 버들이 차례로 많이 서고 여염(閭閻)이 즐비하여 별 결이듯 하였으니, 몇 가구임을 모를러라.

누상 마루청 널을 밀고 보니 그 아래 아득한데, 사닥다리를 놓고 저러 나가는 문이 전혀 작으며 침침하여 자세히 못 보다. 밖으로서 아득히 우러러보면 높은 누를 2층으로 무어 정자를 지었으니 마치 그림 속 절 지은 것 같더라.

북산루(北山樓)[편집]

북산루는 구천각(九天閣)이란 데 가서 보면 예사 퇴락한 누이라. 그 마루에 가서 구멍을 보니, 사닥다리를 놓았으니 다리로 거기를 내려가니, 성을 짜갠 모양으로 갈라 구천각과 북루에 붙여 길게 쌓아 북루에 가는 길을 삼고 빼어 누를 지었으니, 북루를 바라보고 가기 60여 보(步)는 하더라.

북루 문이 역시 낙민루 문 같으되 많이 더 크더라. 반공(半空)에 솟은 듯하고 구름 속에 비치는 듯하더라. 성 둔덕을 구천각으로부터 삐져 나오게 누를 지었으니, 의사가 공교하더라.

그 문 속으로 들어가니 휘휘한 굴 속 같은 집인데 사닥다리를 놓았으니, 다리위로 올라가니 광한전(廣寒殿)같은 큰 마루라. 구간(九間) 대청(大廳)이 널찍하고 단청(丹靑) 분벽(粉壁)이 황홀한데, 앞으로 내밀어 보니 안계(眼界) 헌칠하여 탄탄한 벌이니, 멀리 바라보이는데 치마(馳馬)하는 터이기 기생들을 시킨다 하되 멀어못 시키다.

남동편을 보니 무덤이 누누(屢屢)하여 별 벌 듯하였으니, 감창(感愴)하여 눈물이나 금억(禁抑)지 못하리러라. 서편으로 보니 낙민루 앞 성천강(城川江) 물줄기 게까지 창일(漲溢)하고, 만세교 비스듬히 보이는 것이 더욱 신기하여 황홀히 그림속 같더라.

풍류를 일시에 주(奏)하니 대무관(大 官) 풍류라. 소리 길고 화(和)하여, 들음죽하더라. 모든 기생을 쌍지어 대무(對舞)하여 종일 놀고, 날이 어두우니 돌아올새, 풍류를 교전(轎前)에 길게 잡히고 청사(靑紗)초롱 수십 쌍을 고이 입은 기생이 쌍쌍이 들고 섰으며, 횃불을 관하인(官下人)이 수없이 들고 나니, 가마 속 밝기 낮 같으니, 바깥 광경이 호말(毫末)을 셀지라. 붉은 사(紗)에 푸른 사를 이어 초롱을 하였으니, 그림자가 아롱지니 그런 장관이 없더라.

군문(軍門) 대장(大將)이 비록 야행(夜行)에 사초롱을 켠들 어찌 이토록 장하리요. 군악은 귀에 크게 들리고 초롱빛은 조요하니, 마음에 규중(閨中) 소녀자(少女子)임을 아주 잊히고, 허리에 다섯 인(印)이 달리고 몸이 문무를 겸전한 장상(將相)으로 훈업(勳業)이 고대(高大)하여, 어디 군공을 이루고 승전곡(勝戰曲)을 주하며 태평궁궐을 향하는 듯, 좌우 화광(火光)과 군악이 내 호기를 돕는 듯, 몸이 육마거(六馬車)중에 앉아 대로에 달리는 용약 환회하여 도아가 관문에 이르러 아내(衙內) 마루 아래 가마를 놓고 장한 초롱이 군성(群星)이 양기(陽氣)를 맞아 떨어진 듯 없으니, 심신이 황홀하여 몸이 절로 대청에 올라 머리르 만져 보니 구름머리 뀌온 것이 곱게 있고, 허리를 만지니 치마를 둘렀으니, 황연히 이 몸이 여자임을 깨달아 방중에 들어오니 침선(針線) 방적(紡績)하던 것이 좌우에 놓였으니 박장(拍掌)하여 웃다.

북루가 불붙고 다시 지으니, 더욱 굉걸(宏傑)하고 단청이 새롭더라.

채(蔡) 순상(巡相) 제공(濟恭)이 서문루(西門樓)를 새로 지어 호왈(號曰) 무검루(無劍樓)라 하고 경치와 누각이 기(奇)하다 하니 한번 오르고자 하되 여염(閭閻) 총중(叢中)이라 하기 못 갔더니, 신묘년 시월 망일에 월색이 여주(如晝)하고 상로(霜露)가 기강(旣降)하여 목엽(木葉)이 진탈(盡脫)하니 경치 소쇄하고 풍경이 가려(佳麗)하니, 월색을 이용하여 누에 오르고자 원님께 청하니 허락하시거늘 독교를 타고 오르니, 누각이 표며하여 하늘 가에 빗긴 듯하고 팔작(八作)이 표연(飄然)하여 가이 볼 만하여, 월색에 보니 희미한 누각이 반공(半空)에 속아 뜬 듯, 더욱 기이하더라.

누중(樓中)에 들어가니 육간(六間)은 되고, 새로 단청(丹靑)을 하였으니 모모 구석구석이 초롱대를 세우고 쌍쌍이 초를 켰으니 화광이 조요하여 낮 같으니, 눈을 들어 살피매 단청을 새로 하였으니 채색 비단으로 기둥과 반자를 짠 듯하더라.

서편 창호(窓戶)를 여니, 누하에 저자 벌이던 집이 서울 외에 지물(紙物)가가(假家)같고, 곳곳이 가갓집이 결어 있는데 시정(市井)들의 소리 고요하고 모든 집을 칠칠히 결어 가며 지었으니, 높은 누상에서 즐비한 여염을 보니, 천호(千戶)만가(萬家)를 손으로 셀 듯하더라. 성루를 굽이 돌아 보니 밀밀(密密)제제(濟濟)하기 경중(京中)낙성(洛城)으로 다름이 없더라.

이런 웅장하고 거룩하기 경성 남문루(南門樓)라도 이에 더 하지 아니할지라 심신이 용약하여 음식을 많이 하여다가 기생들을 실컷 먹이고 즐기더니, 중군이 장한 이 월색을 띠어 대완(大宛)을 타고 누하문(樓下門)을 나가는데, 풍류를 치고 만세교로 나가니 훤화(喧譁)가갈(呵喝)이 또한 신기롭더라. 시정(市井)이 서로 손을 이어 잡담하여 무리지어 다니니 서울 같아서, 무뢰배(無賴輩)의 기생의 집으로 다니며 호강을 하는 듯싶더라.

이 날 밤이 다하도록 놀고 오다.

동명일기(東溟日記)[편집]

기축년(己丑年) 8월에 낙(洛)을 떠나 9월에 초승에 함흥으로 오니, 다 이르기를 일월출이 보암직다 하되, 상거(相距)가 50리라 하니, 마음에 중란(中亂)하되 기생들이 못내 칭찬하여 거룩함을 일컬으니, 내 마음이 들썩여 원님께 청한대, 사군(使君)이 하시되,

"여자의 출입이 어찌 경(輕)히 하리요".

하여 뇌거(牢拒) 불허(不許)하니 하릴없이 그쳤더니, 신묘년에 마음이 다시 들썩여 하도 간절히 청하니 허락하고, 겸하여 사군이 동행하여, 8월 21일 동명(東溟)에서 나느 중로손(中路孫)한명우의 집에 가 자고, 게서 달 보는 귀경대(龜景臺)가 시오리라 하기 그리 가려 할새, 그 때 추위 지리하여 길 떠나는 날까지 구름이 사면으로 운집하고 땅이 질어 말 발이 빠지되, 이미 정한 마음이라 동명으로 가니, 그 날이 종시(終始) 청명치 아니하니 새벽 달도 못 보고 그저 환아(還衙)를 하려 하더니, 새벽에 종이 들어와 이미 날이 놓았으니 귀경대로 오르자 간청하기 죽을 먹고 길에 오르니, 이미 먼동이 트더라. 쌍교마(雙轎馬)와 종과 기생 탄 말을 바삐 채를 치니 네 굽을 모아 뛰어 달으니, 안접(安接)지 못하여 시오리를 경각에 행하여 귀경대에 오르니, 사면에 애운(靄雲)이 끼고 해 돋는 데 잠깐 터져 겨우 보는 듯 마는 듯하여, 인(因)하여 돌아올새, 운전(雲田) 이르니 날이 쾌청하니 ,그런 애달픈 일은 없더라.

조반 먹고 돌아올새, 바닷가에 쌍교(雙轎)를 교부(轎夫)에 메어 세우고, 전모(氈帽)쓴 종과 군복(軍服)한 기생을 말 태워 좌우로 갈라 세우고 사공(沙工)을 시켜 후리질을 시키니, 후리 모양이 수십 척(尺) 장목(長木)을 마주 이어 나비 한간 배만한 그물을 노로 얽어 장목에 치고, 그물폿은 백토(白土)로 구워 탕기(湯器)만큼 한 것으로 달아 동아줄로 끈을 하여, 해심(海心)에 후리를 넣어 해변에서 사공 수십 명이 서서 아우성을 치고 당기어 내니, 물소리 광풍(狂風)이 이는 듯하고 옥 같은 물굽이 노하여 뛰는 것이 하늘에 닿았으니, 그 소리 산악이 움직이는 듯하더라. 일월출(日月出)을 변변히 못 보고 이런 장관을 한 줄 위로 하더라. 후리를 꺼내니 연어, 가자미 등속이 그물에 달리어 나왔더라.

보기를 다하고 가마를 돌이켜 돌아올새, 교중(僑中)에서 생각하니 여자의 몸으로 만리 창파를 보고 바닷고기를 잡는 모양을 보니, 세상이 헛되지 아님을 자기(自期)하여 10여 리를 오다가 태조 대왕 노시던 격구정(擊毬亭)을 바라보니, 높은 봉 위에 나는 듯한 정자 있으니, 가마를 돌이켜 오르니 단청이 약간 퇴락한 6,7간(間) 정자 있으니, 정자 바닥은 박석(薄石)을 깔았더라.

정자는 그리 좋은 줄 모르되 안계(眼界) 기이하여 앞은 탄탄 훤훤한 벌이요, 뒤는 푸른 바다가 둘렀으니, 안목이 쾌창(快暢)하고 심신이 상연(爽然)한데, 바다 한 가운데 큰 병풍 같은 바위 올연(兀然)히 섰으니 거동이 기이하더라. 이르기를 '선바위'라 하더라.

봉하(峰下)에 공인(工人)을 숨겨 앉히고 풍류를 늘어지게 치이고 기생을 군복한채 춤을 추이니, 또한 보암즉하더라. 원님은 먼저 내려서 원으로 가시고 종이 형제만 데리고 왔기 마음놓아 놀더니, 촌녀(村女) 젊은 여자 둘과 늙은 노파가 와서 굿보려 하다가 종이라서,

"네 어디 있는 여인인가?"

하니, 상풍 향족(鄕族)부녀(婦女)란가 하여 대로하여 달으니 일장(一場)을 웃다.

인하여 돌아나올새, 본궁(本宮)을 지나니 보고 싶으되 별차(別差)가 허락지 아니하기 못 보고 돌아오니, 일껏 별러 가서 일월출을 못보고 무미(無味)막심(莫甚)히 다녀와 그 가엾기를 어찌 다 이르리요.

그 후 맺혀 다시 보기를 계교(計巧)하되 사군이 엄히 막자로니 감히 생의(生意)치 못하더니. 임진(壬辰) 상척(喪戚)을 당하여 종이를 서울 보내어 이미 달이 넘고, 고향을 떠나 4년이 되니, 죽은 이는 이의(已矣)거니와 생면(生面)이 그립고, 종이조차 조매어 심우(心憂)를 도우니, 회포가 자못 괴로운지라, 원님께 다시 동명(東溟) 보기를 청하니 허락지 아니하시거늘 내 하되,

"인생이 기하(幾何)오? 사람이 한번 돌아가매 다시 오는 일이 없고, 심우와 지통(至痛)을 쌓아 매양(每樣)울울 하니, 한번 놀아 심울(心鬱)을 푸는 것이 만금(萬金)엥 비겨 바꾸지 못하리니, 덕분에 가지라".

하고 비니, 원님이 역시 일출을 못 보신 고로 허락, 동행하자 하시니, 9월 17일로 가기를 정하니, 속기생 차섬이, 보배 쾌락(快諾) 대희하여 무한 치장(治裝)기구를 성비(盛備)할새, 차섬이, 보배 한 쌍, 이랑이, 일섬이 한쌍, 계월이하고 가는데, 17일 식후 떠나려 하니, 16일 밤을 당하여 기생과 비복이 다 잠을 아니 자고 뜰에 내려 사면을 관망(觀望)하여, 혹 하늘이 흐릴까 애를 쓰니, 나역시 민망하여 한가지로 하늘을 우러러보니, 망일(望日)의 월식 끝이라 혹 흑색 구름이 층층하고 진애(塵埃) 기운이 사면을 둘렀으니, 모든 비복과 기생이 발을 굴러 혀를 차 거의 미칠 듯 애를 쓰니 대 또한 초조하여 겨우 새워 17일 미명(未明)에 바삐 일어나 하늘을 보니, 오히려 천색(天色)이 쾌치 아니하여 동편의 붉은 기운이 일광을 가리오니, 흉중(胸中)이 흔들려 하늘을 무수히 보니, 날이 늦으며 홍운(紅雲)이 걷고 햇기운이 나니, 상하 즐겨 밥을 재촉하여 먹고 길을 떠나니, 앞에 군복한 기생 두쌍과 아이 기생하나가 비룡(飛龍)같은 말을 타고 섰으니, 전립(戰笠) 위의 상모와 공작모(孔雀毛) 햇빛에 조요하고 상마(上馬)한 모양이 나는 듯한데, 군악을 교전(轎前)에서 늘어지게 주(奏)하니, 미세한 규중 여자로 거년(去年)에 비록 낭패하였으나 거년 호사를 금년(今年) 차일(此日)에 다시 하니, 어는 것이 사군의 은혜 아니리요.

짐짓 서문으로 나서 남문 밖을 둘아가며 쌍교마(雙轎馬)를 천천히 놓아 좌우 저자를 살피니, 거리 여섯 저자 장안(長安) 낙중(洛中)으로 다름이 없고, 의전(衣廛), 백목전(白木廛), 채마전(菜麻廛) 각색 전이 반감희(半減喜)하여 고향 생각과 친척 그리움이 배하더라. 포전, 백목전이 더욱 장하여 필필(疋疋)이 건 것이 몇천동을 내어 건 줄 모를러라. 각색 옷이며 비단 금침(衾枕)을 다 내어 걸었으니, 일색에 비추더라.

처음 갔던 한명우의 집으로 아니 가고 가치섬이란데 숙소하려 가니, 읍내 30리는 가니, 운전창(雲田艙)부터 바다가 뵈더니, 다시 가치섬이 표묘히 높았으니, 한편은 가이없는 창해(滄海)요, 한편은 첩첩한 뫼인데, 바닷가로 길이 겨우 무명 나비만은 하고 그 옆이 산이니, 쌍교를 인부에 메어 가만가만 가니, 물결이 굽이쳐 흥치며 창색(滄色)이 흉용(洶湧)하니 처음으로 보기 끔찍하더라. 길이 소삽(疏澁)하고 돌과 바위 깔렸으니 인부가 겨우 조심하여 1리는 가니, 길이 평탄하여 너른들인데, 가치섬이 우러러뵈니, 높이는 서울 백악산 같고 모양 대소는 백악만 못하고 산색이 붉고 탁하여 족히 백악만 못하더라.

바닷가로 돌아 섬 밑에 집 잡아 드니, 춘매, 매화가 추후하여 왔더라. 점심을 하여 들이는데 생복회를 놓았으니 그 밑에서 건진 것이라 맛이 별하되 구치(驅馳)하여 가니, 잘 먹지 못하니, 낙중(洛中) 친척으로 더불어 맛을 나누지 못하니 지한(至恨)이러라.

날이 오히려 이르고 천기(天氣) 화명(和明)하며 풍일(風日)이 고요하니, 배를 꾸며 바다에 사군이 오르시고 숙시와 성이를 데리고 내 오르니, 풍류를 딴 배에 실어 우리 오른 배 머리에 달고 일시에 주(奏)하니, 해수 푸르고 푸르러 가이없고, 군복한 기생의 그림자는 하늘과 바다에 거꾸로 박힌 듯, 풍류 소리는 하늘과 바닷속에 사무쳐 들레는 듯, 날이 석양이니 쇠한 해 그림자가 해심에 비치니, 1만 필흰 비단을 물위에 편 듯 도니, 마음이 비스듬히 흔들려 상쾌하니, 만리 창파에 일엽 편주로 망망 대해의 위태오움을다 잊을러라.

기생 보배는 가치섬 봉(峰)위에 구경 갔다가 내려오니, 벌써 배를 띄워 대해에 중류(中流)하니 오르지 못하고 해변에 서서 손을 흔드니, 또한 기관(奇觀)이러라. 거년 격구정에서 선바위을 보고 기이하여 돌아왔더니, 금일 선유(船遊)가 선바위밑에 이르니 신기하더라.

해거의 가니 행여 월출 보기 늦을까 바삐 배를 대어 숙소에 돌아와 저녁을 바삐 먹고 일색이 다 진(盡)치 아녀 귀경대(龜景臺)에 오르니 5리는 하더라.

귀경대를 가마 속에서 보니 높이가 아득하여 어찌 오를꼬 하더니, 사람이 심히다녀 길이 반반하여 어렵지 아니하니 쌍교에 인부로 오르니, 올라간 후는 평안 하여 좋고, 귀경대 앞의 바닷속에 바위 있는데, 크기도 퍽 크고 형용 생긴 것이 거북이 꼬리를 끼고 엎딘 듯하기, 천생으로 생긴 것이 공교로이 쪼아 만든 듯하니, 연고(然故)로 '귀경대'라 하는 듯싶더라.

대상에 오르니 물 형계(刑械) 더욱 장하여, 바다 넓이는 어떠하던고, 가이 측량없고 푸른 물결 치는 소리, 광풍 이는 듯하고 산악이 울리는 듯하니, 천하의 끔찍한 장관이러라.

9월 기러기 어지러이 울고 한풍(寒風)이 끼치는데, 바다로 말도 같고 사슴도 같은 것이 물 위로 다니기를 말 달리듯 하니, 날 기운이 이미 침침하니 자세치 아니하되 또 기절(奇絶)이 보암즉하니, 일생 보던 기생들이 연성(連聲)하여 괴이함을 부를 제, 내 마음에 신기하기 어떠하리요. 혹 해구(海狗)라 하고 고래라 하니 모를러라.

해 완전히 다 지고 어두운 빛이 일어나니, 달 돋을 데를 바라본즉 진애(塵埃)사면으로 끼고 모운(暮雲)이 창창하여 아마도 달 보기 황당(荒唐)하니, 별러 별러 와서 내 마음 가이없기는 이르지 말고, 차섬이, 이랑, 보배 다 마누하님 월출을 못 보시게 하였다 하고 소리하여 한하니, 그 정이 또 고맙더라.

달 돋을 때 못 미치고 어둡기 심하니, 좌우로 초롱을 켜고 매화가 춘매더러 대상에서 <관동별곡>을 시키니, 소리 놓고 맑아 집에 앉아 듣는 것보다 더욱 신기롭더라.

물 치는 소리 장하매, 청풍이 슬슬이 일어나며, 다행히 사면(四面) 연운(煙雲)이 잠깐 걷고, 물 밑이 일시에 통랑하며, 게 드린 도홍(桃紅)빛 같은 것이, 얼레 빗잔등 같은 것이 약간 비치더니 차차 내미는데, 둥근 빛 붉은 폐백반(幣帛盤) 만한 것이 길게 흥쳐 올라붙으며, 차차 붉은 기운이 없고 온 바다가 일시에 휘어지니, 바다 푸른 빛이 희고 희어 은 같고 맑고 좋아 옥 같으니, 창파 만리에 달 비치는 장관을 어찌 능히 볼지리요마는, 사군이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 천은(天恩)이 망극하여 연하여 외방에 작재(作宰)하여 나랏것을 마음껏 먹고, 나는 또한 사군의 덕으로 이런 장관을 하니, 도무지 어는 것이 성주(聖主)의 은혜 아닌 것이 있으리요.

밤이 들어오니 바람이 차고 물 치는 소리 요란한데 한랭하니, 성이로 더욱 민망하여 숙소로 돌아오니, 기생들이 월출 관광이 쾌치 아닌 둘 애달파하더니, 나는 그도 장관으로 아는데 그리들 하니 심히 서운하더라.

행여 일출을 못 볼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여 새도록 자지 못하고 가끔 영재를 불러 사공더러 물으라 하니,

"내일은 일출을 쾌히 보시리라 합니다".

하되, 마음에 미덥지 아니하여 초조하더니, 먼 데 닭이 울며 연하여 잦으니, 기생과 비복을 마구 흔들어 어서 일어나라 하니, 밖에 급창(及唱)이 와,

"관창 감관(監官)이 다 아직 너무 일찍하니 못 떠나시리라 합니다".

하되, 곧이 아니 듣고 발발이 재촉하여 떡국을 쑤었으되 아니 먹고 바삐 귀경대에 오르니, 달빛이 사면에 조요(照耀)하니 바다가 어젰밤보다 희기 더 하고 광풍이 대작(大作)하여 사람의 뼈에 사무치고 물결치는 소리 산악이 움지이며 별빛이 말똥말똥하여 동편에 차례로 있어 새기는 멀었고, 자는 아이를 급히 깨워 왔기 추워 날치며, 기생과 비복이 다 이를 두드려 떠니, 사군이 소리하여 혼동하여 가로되,

"상(상(常)없이 일찍이이 와 아이와 실내(실내(室內) 다 큰 병이 나게 하였다."

하고 소리하여 걱정하니, 내 마음이 불안하여 한 소리를 모사 하고, 감히 추워하는 눈치를 못 하고 죽은 듯이 앉았으되, 날이 샐 가망이 없으니 연하여 영재를 불려,

"동이 트느냐?"

물으니, 아직 멀기로 연하여 대답하고,물 치는 소리 천지 진동하여 한풍 끼치기 더욱 심하고, 좌우 시인(侍人)이 고개를 기울여 입을 가슴에 박고 추워하더니, 매우 시간이 지난 후 동편의 성수(星宿)가 드물며 울색이 차차 엷어지며 홍색이 분명하니, 소리하여 시원함을 부르고 가마 밖에 나서니, 좌우 비복과 기생들이 옹위(擁衛)하여 보기를 (마음) 졸이더니, 이윽고 날이 밝으며 붉은 기운이 동편 길게 뻗쳤으니, 진흥 대단(眞紅大緞) 여러 필을 물 위에 펼친 듯, 만경 창파가 일시에 붉어 하늘에 자욱하고, 노하는 물결 소리 더욱 장하며, 홍전(紅氈) 같은 물빛이 황홀하여 수색이 조요하니, 차마 끔찍하더라.

붉은 빛이 더욱 붉으니 마주 선 사람의 밫과 옷이 다 붉더라. 물이 굽이쳐 올려치니, 밤에 물 치는 굽이는 옥같이 희더니, 지금은 물굽이는 붉기 홍옥(紅玉) 같아서 하늘에 닿았으니, 장관을 이를 것이 없더라.

붉은 기운이 퍼져 하늘과 물이 다 조요하되 해 아니 나니, 기생들이 손을 두드려 소리하여 애달파 가로되,

"이제는 해 다 돋아 저 속에 들었으니, 저 붉은 기운이 다 푸르러 구름이 되리라."

혼공하니, 낙막(落寞)하여 돌아가려 하니, 사군(使君)과 숙시가,

"그렇지 아냐, 이제 보리라."

하시되, 이랑이, 차섬이 냉소하여 이르되,

"소인(小人) 등이 이번뿐 아니라 자주 보았사오니, 어찌 모르리이까? 마누하님 큰 병환 나실 것인, 어서 가압사이다."

하거늘, 가마 속에 들어 앉으니, 봉의 어미 악써 가로되,

"하인들이 다 (말)하되, 이제 해 나오리라 하는데, 어찌 가시리요? 기생 아이들은 철모르고 즈레 이렁 구는다."

이랑이 박장하여 가로되,

"그것들은 전혀 모르고 한 말이니 곧이듣지 마십시오."

하거늘, 돌아 사공더러 물으라 하니,

"사공이 오늘 일출이 유명하리라 합니다."

하거늘 내 도로 나서니, 차섬이, 보배는 내 가마에 드는 상(相) 보고 먼저 가고 계집종 셋이 먼저 갔더라.

홍색(紅色)이 거룩하여 붉은 기운이 하늘을 뛰놀더니, 이랑이 소리를 높이 하여 나를 불러,

"저기 물 밑을 보십시오"

외거늘 급히 눈을 들어 보니, 물 밑 홍운(紅雲)을 헤치고 큰 실오라기 같은 줄이 붉기 더욱 기이하며, 기운이 진홍 같은 것이 차차 나 손바닥 나비 같은 것이 그믐 밤에 보는 숯불 빛 같더라. 차차 나오더니, 그 위로 작은 회오리밤 같은 것이 붉기 호박(琥珀) 구슬 같고, 맑고 통랑(通郞)하기는 호박보다 더 곱더라.

그 붉은 위로 훌훌 움직여 도는데, 처음 났던 붉은 기운이 백지 반 장 나비만큼 반듯이 비치며, 밤 겉던 기운이 해 되어 차차 커 가며, 큰 쟁반만하여 불긋불긋 번듯번 듯 뛰놀며, 적색이 온 바다에 끼치며, 먼저 붉은 기운이 차차 가시며, 해 흔들며 뛰놀기 더욱 자주하며 항아리 같고 독 같은 것이 좌우로 뛰놀며, 황홀히 번득여 양목(兩目)이 어질하며, 붉은 기운이 명랑하여 첫 홍색을 헤치고 천중(天中)에 쟁반 같은 것이 수레바퀴 같아서 물 속으로서 치밀어 받치듯이 올라붙으며, 항아리, 독 같은 기운이 스러지고, 처음 붉어 겉을 비추던 것은 모여 소의 혀처럼 드리워 물 속에 풍덩 빠지는 듯싶더라. 일색(日色)이 조요(照耀)하며 물결의 붉은 기운이 차차 가시며 일광이 청랑(晴朗)하니, 만고 천하에 그런 장관은 대두(對頭)할 떼 없을 듯하더라

짐작에, 처음 백지 반 장만큼 붉은 기운은 그 속에서 해 장차 나려고 내비치어 그리 붉고, 그 회오리밤 같은 것은 짐짓 일색(日色)을 빠혀 내니 내비친 기운이 차차 가시며, 독 같고 항아리 같은 것은 일색이 모질게 고운 고로, 보는 사람의 안력(眼力)이 황홀하여 도무지 헛기운인 듯싶더라.

차섬이, 보배는 내 교중에 드니, 먼저 가는 듯하더니 도로 왔던 양하여, 묘시(卯時) 보심을 하례하고, 이랑이 손을 두드려,

"보시도다."

하여 즐겨하더라.

장관을 쯘더이 하고 오려 할새, 촌녀들이 작별 운집(作別雲集)하여 와서 보며, 손을 비비어 무엇 달라 하니, 돈냥인지 주어 나누어 먹으라 하다. 숙소로 돌아오니, 쯘덥기 중보(重寶)를 얻은 듯하더라.

조반을 급히 먹고 돌아올새, 본궁(本宮) 보기를 하여 허락을 받고 본궁에 들어 가니, 궁전이 광활한데 분장(粉墻)을 두루 싸고 백토(白土)로 기와 마루를 칠하고, 팔작(八作) 위에 기와로 사람처럼 만들어, 화살 맨 것, 공속하고 선 것, 양마지속(羊馬之屬)을 다하여 앉혔으니, 또한 보암직하더라.

궁전에 들어가니, 집이 그리 높지 아니하되 너르고, 단청 채색(丹靑彩色)이 영롱하여 햇빛에 조요하더라. 전(殿) 툇마루 앞에 태조 대왕 빗갓은 다 삭아 겨우 보를 의지하고, 은으로 일월옥로(日月玉露) 입식(笠飾)이 다 빛이 새로워 있고 화살은 빛이 절어도 다른 데 상하지 아니하고, 동개도 새로운 자가 있되, 요대(腰帶), 호수(虎鬚), 활시위하던 실이 다 삭았으니, 손 닿으면 묻어날 듯 무섭더라.

전문(殿門)을 여니, 감실 네 위(位)에 도홍 수화주(桃紅手禾紬)에 초록 허리를 달아 장(帳)을 하여 위마다 쳤으니, 마음에 으리으리하고 무섭더라.

다 보고 나오니, 뜰 앞에 반송(盤松)이 있되 키 작아 손으로 만지이고, 퍼지기 양산 같고 누른 잎이 있고, 노송이 있되 새로웠으니, 다 친히 심으신 것이 여러 백년 지났으되 이리 푸르니, 어찌 기이하지 아니리요.

뒤로 돌아 들어가니 큰 소나무 마주 섰는데, 몸은 남자의 아름으로 두 아름은 되고, 가지마다 용이 틀어진 듯 틀려 얹혔는데, 높이는 다섯 길은 하고, 가지 쇠하고 잎이 누르러 퍽 떨어지더라.

옛날은 나무 몸에 구피로 쌌더라 하되 녹고, 보로 싸고 구리띠를 하여 띠었더라. 곧고 큰 남기로 사면으로 들어 받쳤더라.

다보 돌아나오다가 동편으로 보니, 우물이 있되 그리 크지 아니하고 돌로 만들고 널러 짰더라. 보고 몇 걸음 나오니 장히 큰 밤남기 섰으니, 언제의 나무인 줄 모를러라. 제기(祭器) 놓은 데로 오니, 다은기라 하되 잠갔기 못 보다. 방아집에 오니, 방아를 정(淨)히 결고 집을 지었으되, 정하기 이상하더라. 제물(祭物)하옵는 것만 찧는다 하더라. 세세히 다 보고 환아(還衙)하니, 사군(使君)은 먼저 와 계시더라.

인생이 여러 가지로 괴로워 위로 두 분 모두 아니 계시고, 알뜰한 참경(慘景)을 여러 번 보고, 동생이 영락(零落)하여 회포가 또한 괴롭고 지통(至痛)이 몸을 누르니, 세상에 호흥(好興)이 전혀 없더니, 성주의 은덕이 망극하와 이런 대지에 와 호의이호식好衣而好食)응ㄹ 하고, 동명 구경대와 운전(雲田) 바다와 격구정을 둘러보고, 필경에 본궁을 보옵고 창업 태평(創業太平) 성군의 옥택(玉宅)을 4백년 후에 이 무지한 여자로서 구경하니, 어찌 자연하리요.

9월 17일 가서 18일 돌아와, 21일 기록하노라.

춘일소홍(春日消興)[편집]

김득신(金得臣)[편집]

김득신은 감사(監司) 치(緻)의 자(子)이라. 위인이 소탕(疎 )하고 오활( 滑)하여 세간 사정을 일체 모르고 글 읽기만 종하하되, 천만 번 읽어도 외지 못하고, <사기>를 더욱 좋아하여 <백이전>을 읽어 1억 2만 8천 번을 읽되, 성품이 심히 노둔(魯鈍)하여 비록 많이 읽기를 이렇듯이 하되, 책을 덮으면 문득 잊는지라.

만년에 사람이 시험하여<백이전>문자를 물은대, 망연(茫然)히 알지 못하고 가로되, "그 문자가 어느 글에 있느뇨?"

그 사람이 가로되, "이것은 <백이전>문자라". 한 대,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이예 그 책을 펴 보고 크게 놀라 가로되 "옳다, 이라, 이라". 하니, 그 둔함이 이렇듯 하더라.

녹천(鹿川) 이상국(理想國)계모는 김득신 여(女)라. 그 딸이 죽어 상행(喪行)하여 성문에 이르러 관을 머무르고 문 열기를 기다리더니 그 부친이 또한 수구(隨柩)하여 이르러 횃불 분답(紛沓)한 가운데 한 책권을 놓고 대독하니, 모든 사람이 본즉 <백이전>이라.

그 오활함이 이 같고, 그 후 상처(喪妻)하매, 그 조카가 가서 조상하매 더불어 한가지로 울더니, 그 조카가 울음을 그치고 들으니, 아자비 바야흐로<백이전>을 그치지 않았는지라 듣는 자가 웃더라.

남호곡(南壺谷)[편집]

남호곡은 아시(兒時)로 부너 시재(詩才)무리에 뛰어나, 하루는 한 어른이 운(韻)을 불러 누에를 두고 글을 지으라 한 대, 응구(應口)첩대(輒對)하니, 시를 읊기를,

어려서 검은 입시욹을 인하여 푸른 잎을 맞고
늙어서는 누른 배를 끌고 푸른 다리로 오르는도다.
짐짓 형상을 잃고 인하여 나비 화하니
다시 장수의 몽혼이 희미한가 의심하노라

그 어른이 아름다이 여겨 상을 주고 가로되, "척구로서 보면, 이 아이 반드시 일찍이 청요(淸要)하고 벼슬을 벌고 늙어서 큰 벼슬을 할 것이요, 말세 구로 보면 마침내 부귀를 보전하지 못할 상이니, 가히 흠이로다." 하더니 공(公)이 21세에 등제하여 현도(玄道)에 출입하고 이미 늙으매 극품(極品)에 올라 종백(宗伯)과 태재(太宰)와 판금오(判金吾)와 전문형(典文衡)에 지나니 '노타황복상청제(老拖黃腹上靑梯)'글귀 징험(徵驗)이 되었더니, 후에 간당(奸黨)에 얽힌 바 되어 관함(官銜)을 삭(削)하고 북새(北塞)에 귀양가 적소(謫所)에서 죽으니 '실각진형잉화접(失却眞形仍化蝶)'의 글귀 징험이 되었더라.

정유악(鄭維岳)[편집]

정유악이란 사람은 서인(西人)으로서 갑인(甲寅)후에 남인(南人)에 붙어 아첨하는 태도를 사람이 차마 바로 보지 못할러니, 그 때 남인이 새로 득지(得志)하여 허목(許穆)을 추존(推尊)하여 와주(窩主)를 삼아, 하루는 모든 남인이 유악으로 더불어 궐중(闕中)에 모여 유악이 또한 좇아 미수야(眉 爺)를 찬칭하니(미수야는 허목의 별호라) 청성(淸城)이 마침 죄상객(座上客)으로 참례하여 계시더니, 희롱하여 웃으며 가로되. "길보(吉甫)는 가히 환야(喚爺)를 임종인아위(任從隣兒爲)랄 이르리로다(아비 부르기를 임의대로 이웃집 아이 따라 한단 말이라)."

유악이 대참(大慚)하여 얼굴을 숙이고, 모든 남이니 다 실색 대경(失色大驚)하고, 듣는 자가 다 앙앙히 여기더라.

정탁(鄭琢)[편집]

정탁은 예천인(醴泉人)인, 가세 한미(寒微)하여 조남명(曺南冥) 문하에 놀아 사우간(師友間) 자못 지명(知名)하더니, 명묘(名廟朝)에 등제하여 고서 분관(校書分館)을 하였더니, 이 때는 사람 쓰기를 다만 재주와 명망을 보고 문벌을 보지 아니하는고로, 정탁이 옥당(玉堂)과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내과, 마침내 지위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을 봉하고 향년 80에 치사(致仕)하고 죽으니, 자손이 또한 번성하니, 짐짓 희세한 팔자이러라.

일찍 교서 분관에 있을 제, 고제봉(高霽峰) 경명(敬命)이 바야흐로 조당(朝堂)에 번(番)들어 제붕(諸朋)으로 더불어 논명(論名)(사주(四柱)풀라는 말이니, 고제봉이 사주 풀기를 묘히 하니)하거늘, 정공(鄭公)이 지필(紙筆)을 취하여 사주를 써 고제봉으로 하여금 보아 달라 하니, 제봉이 크게 화를 내어 가로되, "군(君)이 어찌 감히 청하느뇨?"

정공이 빌어 공순함을 마지아니하는지라. 고제봉이 곁눈으로 그 사주를 가만히 보니, 극귀(極貴)할 명(命)이라 크게 놀라 가로되 "그대 명이 지위는 인신(人臣)에 극진(極盡)하고 수(壽)는 기이(장수한단 말이라)에 이르리니, 우리 모든 벗이 다 따르기 어렵다. "하고, 또 가로되 " 이 재자(才子)이라. 영남(嶺南) 풍속이 향족(鄕族)으로써 제일 양반을 삼거늘, 이에 정공이 한미(寒微)한 사람으로 귀히 되리로라." 하더라

후에 과연 정공이 상국(相國)이 된 후 그 형이 본군(本郡) 좌수(座首)되었더니, 왜란(倭亂)에 감사가 군량을 이으지 못하므로 좌수를 중형할새,그 나이를 물으니 70여(餘)라. 감사가 꾸짖어 가로되, "나이 저리 많고 대사를 어찌 소활(疎闊) 히 하여 죄를 범하느뇨?"

좌수가 대하여 가로되, "시임 정승(時任政丞) 정탁의 형이니 나이 어찌 많지 아니리이까?"

감사가 청필(聽畢)에 크게 놀라 즉시 놓으니라.

정인홍(鄭仁弘)[편집]

정인홍은 대(代)로 합천(陜川)서 살더니, 그 아비 본군 좌수(本郡座首) 되었더니, 하루는 해인사 중이 꿈꾸니, 정 좌수(鄭座首) 집의 불빛이 하늘에 닿고 가야산(伽倻山) 호(虎), 표(豹), 시(豺), 낭(狼), 웅(熊), 시(豕)의 무리가 그 집에 무수히 들어가니 이상히 여겨 즉시 가 보니, 그 날 밤에 정 좌수 아들을 낳으니, 곧 인홍(仁弘)이라.

인홍이 산림 발천(山林發闡)으로 광해조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어 흉당(凶黨)중에 들어 성품이 가장 경한(勁悍)하여, 마침내 대역으로서 도시(都市)에서 복형(服形)하니, 중의 꿈을 보건대 악수(惡獸)의 사오나온 기운을 품득(稟得)하여 난 연고이러라.

김승평(金昇平)[편집]

선조(宣祖) 말년에 제궁(諸宮) 왕손을 모두어 그림도 그리이시고 글씨도 쓰이시더니 인조(仁祖) 아시(兒時)에 말을 그리오시니, 선조가 그림을 백사(白沙) 이공(李公)에게 주시니라.

백사 북천(北遷)할 때 문생(門生), 부곡(部曲)이 따라와 도방(道傍)에 보내는 자가 심히 많더니, 홀로 김 승평 유( )를 데리고 역려(驛旅)에 와 자고 그 그림을 맡겨 가로되, "이는 선왕이 주신 바로되 그 뜻을 아옵지 못하더니, 군(君)이 다만 이 그림 그린 자를 살펴보라."

승평(昇平)이 또한 망연하여 그 소유(所由)를 알지 못하고 돌아와 벽상에 붙였더니, 인조(仁祖) 잠저(潛邸) 때 나가 계시다가 급한 비를 만나서 길갓집 문에 들으셔 피하시더니, 한참 있다가 차환(叉 )이 안으로 나와 고(告)하되, "어찌한 손님을 알지 못하나, 비 심하니 오래 섰지 못할지라. 원컨대 잠깐 외사(外舍)에 앉으소서."

주인 없음을 인조가 사양하신대 차환이 여러 번 청하거늘, 인조가 마지못하여 말에서 내려 외사에 들으신대 벽상에 그린 말이 잇거늘 살펴보시니, 곧 아시 때에 그리신 바이라. 마음에 이상히 여기시더니, 주인이 이르니 곧 승평이라. 서로 알지 못하더니, 인조가 피우(避雨)한 연고를 여러 번 이르시고 인하여 물어 가로되, "그림을 어이 벽에 붙였나뇨?"

승평이 가로되, "백사가 일찍이 그림을 주시되, 뉘 그림인 줄 알지 못하는 고로 벽에 붙여 구할 이를 기다리나이다." 한대, 인조가 가로되, "이는 내 아시 때 그린 바이로다."

이윽하여 안으로서 크게 음식을 하여 나오거늘, 승평이 이상히 여기되 인조 돌아가신 후에 들어가 부인께 물어 가로되, "지나가는 종실(宗室)이 우연히 비를 피하거늘 성찬을 대접함은 어찌오?"

부인이 가로되, "밤 꿈에 대가(大駕)가 우리 집 문에 들으셔 위의(威儀) 심히 성하거늘, 깨어 이상히 여기더니 낮에 종이 전하되 한 관인이 비를 피하여 문에 들어 말을 세웠다 하거늘, 내 문틈으로 엿보니 얼굴이 심히 준수(俊秀)하여 완연히 몽중에 본 바와 같은지라. 고로 놀라 성히 대접함이로소이다."

승평이 일로부터 인조께 왕래 친밀(往來親密)하여 흥왕(興王之事)를 하니라

조안렴(趙按廉)[편집]

조안렴은 개국 원훈(開國元勳) 문충공(文忠公) 준(浚)의 아이라, 매양 그 형을 절간(切諫)하여 고자(告者)치 아니하더니 혁명(革命)한 후 문충공이 그 화를 면치 못할까 하여 태조(太祖)께 아뢰고, 공의 이름을 국적에 올리고 호조전서(戶曹典書)를 하이니 나지 아니하거늘, 태조가 그 집에 친림(親臨)하셔 개유(改諭)코자 하신대, 공이 이불로 낯을 싸고 누워 대답하여 가로되, "오히려 여조(麗朝) 섬기던 일을 생각하는다?" 하거늘, 상(上)이 굴하지 아니할 줄 아시고 창연하여 돌아가시더라.

백운산(白雲山)에 숨어 종신하니, 자손ㅇ르 유언하여 3대를 과환(科宦)을 다 폐하고 아조(我朝)관작을 명정(銘旌)에 쓰지 말라 하였더니, 졸(卒)하매 태종(太宗)이 시호를 평간공(平簡公)이라 하시니, 제자(諸子)가 유언을 좇지 아니하고 표석(標石)에 아조 관함(我朝官銜)을 새겼더니, 이미 세움에 비(碑) 홀연 절로 넘어져 부러지고, 조공지묘(趙公之墓) 4자(字)만 남았으니, 보는 자가 정충(貞忠)에 감동함이라 하더라.

유부인(柳夫人)[편집]

홍학곡(洪鶴谷)의 모부인(母夫人)은 유몽인(柳夢寅)의 누이라. 글을 능히 하고 식감(識鑑)이 있으되 성이 투흔(鬪 )하더니, 학곡의 대인이 그 벗을 대하여, 그 투흔하여 난감한 뜻을 이른대, 벗이 가로되, "이러한 자를 어찌 가히 아내를 삼아 스스로 괴로우리요? 어찌 내쫓지 아니하나뇨?" 하니, "내 어찌 모르리요마는, 바야흐로 유신(有娠)하니 아들을 낳을까 하여 참을 뿐이로다."

벗이 가로되, "이 같은 사람이 생자(生子)한들 무엇에 쓰리요?"

부인이 창 사이로 가만히 듣고 사람을 시켜 막대에 똥을 묻혀 손 앉은 편 창문을 뚫고 뺨을 치더라.

생자하니 곧 학곡이라. 자소(自小)로 친히 과독(課讀)하여 문장을 이루니라. 유부인 식감이 있더니, 학곡 아들 감사 명일(命一)이 감시(監試), 회시(會試)로 나오니, 학곡이 그 글을 보고 반드시 하지 못하리라 하거늘, 부인이 가로되, 이 넉넉히 장원을 하리라 하고 가인(家人)을 재촉하여 술을 빚어 응방(鷹枋)할 차림을 하더니, 방(枋)이 나니 장원을 과연 하니라. 이 밖에, 후생(後生)의 글을 한번 보매, 문득 수요궁달(壽夭窮達)을 결단하여 점(占)한 듯하니, 가히 다 기록치 못하리라.

하루는 학곡이 뫼셔 앉았더니, 멀리 말소리를 듣고 부인이 말하기를, 이는 명마(名馬)라 하고 데리고 오라 하니 여위어 죽게 된 말이거늘, 명하여 먹여 기르니, 과연 절족(絶足)이 되니라.

유 부인이 이 같을 뿐 아니라, 곤범( 範)이 많아 이제까지 숙덕(淑德)으로 이르니, 투흔하기를 의론할 사람이 아니라.

막대에 똥 묻힌 이는 감사의 후부인(後夫人) 구씨(具氏)의 일이라 하더라. 구부인도 결렬 결열(潔烈)하고 영기(英機) 있더니, 감사가 혼인날 밤에 그 복착(服着)을 자랑하여 가로되, "총갓과 도홍(桃紅)띠와 옥관자(玉貫子)가 어떠하뇨?"

부인이 응성(應聲)하여 가로되, "황초립(黃草笠)에 대모 관자(玳瑁貫子)에 세초(細草) 띠야." 하니, 감사가 말이 막히더라.

감사가 새로 남대단(藍大緞) 단령(團領)을 입고 조회(朝會)에 갔다가 귀로에 첩의 집에 다녀오니 부인이 알고 바로 관대를 거름동이에 담더라.

이번(李蕃)[편집]

이번은 율곡(栗谷) 형이라. 파주에 있더니, 서울 들어와 율곡을 보니, 이 때 상(上)이 표피(豹皮) 요를 사송(賜送)하시니, 이는 외방에서 진상(進上)한 바라. 장광(長廣)이 크고 화미하더니, 전상(殿上)에 어(御)하시는 것이라. 율곡을 권우(眷遇)하사 주심이러라.

번이 명일(明日)에 파주로 돌아가더니 도로 오거늘 율곡이 물으신대 답하여 가로되, "몇 리(里)를 가더니 군(君)응ㄹ 생각하여 다시 보고 가려 하노라."

율곡이 가로되, "어제 은사(恩賜)하신 표피 요를 형에게 드림즉하되, 임금이 주신 것을 감히 깔지 아니코 보내지 못하여 수일 후 기다려 보내고자 하더니, 이미 깔아 밤이 지났으니 감히 드리노라."

한대, 번이 가지고 가더라.

이탁(李鐸)[편집]

이 상국(李相國) 탁은 성종조(成宗朝) 명신이라. 갓나며 이불로 덮어 오래 소리 없으니, 그 모부인이 열어 보매 작은 용이 머리와 뿔이 우뚝하고 몸이 서려 길이 자거늘, 드디어 도로 덮고 가만히 기다리더니, 이윽고 깨어 우는 소리 있거늘 열어 보니 아이러라.

자라 급제하여 성균 학유(成均學諭)로 시골 갈새, 한강 건너로 10여 리의 물가에서 말ㅇ르 먹이더니, 월산 대군(月山大君)이 남으로 놀아 돌아올새, 또한 물가에 앉아 점심을 은기(銀器)에 드리거늘, 이공(李公)이 은기를 들어 보고 도로 놓은대, 대군(大君)이 가로되 "그 그릇을 가지고자 하는다? 마땅히 받들어 주리라."

이공이 웃어 가로되, "내 평생 은가란 것을 보지 아녔는 고로 집어 보았을 뿐이거늘 문득 가지라 하니, 어찌 사태후의 대접을 그리 박(薄)히 하시나이까?" 하고 인하여 떠나가거늘, 대군이 와 상(上)께 보옵고 그 말씀을 여쭈온대, 상이 내구마(內廐馬)를 명하여 따르라 하여 더불어 말씀하시고, 대열(大悅)하셔 즉시 홍문 수찬(弘文修撰)을 제수(除授)하시고, 불차 탁용(不次擢用) 초천(超遷)하여 정승에 이르니라.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100년이 지났으므로 전 세계적으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